<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로베르트 비네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된 암울한 분위기의 표현주의 영화이다. 독일은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국가적으로 큰 모욕감을 떠안고 경제에 큰 위기를 맞닥뜨린다. 이때 표현주의 영화가 등장하면서 불안정한 사회 속 위태로운 사람들의 심리 상태를 영화로 승화시키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대한 총체적인 탐구가 기반이 된다. 현실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기 위하여 영화 속 공간을 사실과는 전혀 다르게 표현한다. 인물을 둘러싼 세계는 마치 연극 무대인 것처럼 극도로 양식화되어있다. 등장인물들의 과장된 분장도 기괴함을 더하며 환상 속 공간을 배경으로 한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들의 과장된 연기도 이러한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 프란시스의 내면이라는 실체 없는 세계라는 것을 좀 더 과장되게 표현하기 위해 원근법을 없애고 공간을 추상적인 그림처럼 표현해 환상적인 세계로 보이게 만든다. 올곧은 직선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꺾인 선들은 이를 보고 있는 사람들의 불안함도 증폭시킨다. 굽은 벽과 내려앉은 천장은 인물이 속해있는 공간을 비좁게 해 두려움과 답답함을 크게 한다. 또한 비네팅으로 외곽이 부드럽게 처리함으로써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현실 세계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을 더 강조시키는 것 같았다.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에서의 인간은 인간 같지 않다. 그전까지 알고 있던 인간의 개념과 다른 인간이 등장하는 것이다. 인물은 때로는 차분하지만 때로는 광기에 차 있으며 강박증에 시달린다. 몽유병자나 약혼녀처럼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어있는 것 같은 인물도 등장한다.
세자르는 무의식 그 자체를 의미한다. 잠이 든 것처럼 보여 살았는지 죽었는지, 존재하는지도 모르지만 잠을 자면서도 세자르는 움직인다. 다분히 자신의 욕망에 따르며 잠재된 폭력성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칼리가리 박사가 품었던 인간 무의식의 의지에 대한 의문이 그 당시 시대의 사람들이 느꼈던 의문과 같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어두운 무의식은 조명의 의도적인 사용으로 더더욱 부각된다. 빛과 어둠을 강렬하게 대조 시켜 서로를 더욱 돋보이고 강조되게 한다. 마치 빛과 그림자가 절대 조화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조명을 사용해 그림자를 이용한 것도 흥미로웠다. 여러 개로 겹쳐지는 그림자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인격을 의미해 등장인물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또한 그림자의 크기를 조절하면서 인간 무의식의 표출 정도를 표현하려 하는 것 같았다. 몽유병자 세자르가 사람을 칼로 찌를 때 그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그림자로 표현하면서, 인간 무의식의 어둠이 인간을 잡아먹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난 후에 영화를 보니 영화를 더 깊게 이해하는 데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사람들이 가졌을 내면의 불안감들이 영화 안에 그대로 드러났다. 독일의 정치적 상황, 암울한 분위기와 위태로웠던 사람들의 마음이 화면 밖으로까지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미소 짓는 마담 브데>
평화와 열정과 영혼, 그 뒤에는 마담 브데가 있다. 제르만 뒬락의 <미소 짓는 마담 브데>는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이면서 초창기 페미니즘 영화이다. 프랑스 아방가르드 영화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와는 다르게 서사 양식에서조차도 구상적이지 않다. 전통적인 서사 방식을 모두 깨버리며 기존의 내러티브 구성 방식과는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진행한다. 이들은 영화를 상업적인 도구로 보는 것에서 벗어나 예술의 한 영역으로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주로 아방가르드 영화들은 비현실적이면서 추상적이었다. 내러티브를 가지기보다는 연속적이지 않은 이미지와 물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더 관심을 가지고 카메라에 담아냈다. 이미지들이 주는 강렬한 인상만을 영상에 담으면서 영화 예술의 본질을 찾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들이 담는 것이 실재가 아닌 것은 아니다. ‘포토제니’에 기반하여 그들에게 영화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을 기록하되 그것을 감성적으로 증폭 시켜 그 이상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소 짓는 마담 브데>에서는 아방가르드 영화에 걸맞게 감각적 이미지로 상황을 표현하려는 실험적인 연출을 시도해봤다는 게 느껴졌다. 부인은 남몰래 남편을 때리는 상상을 한 후 슬쩍 웃는다. 여기서부터 브데 부인이 고민하는 것이 남편과의 관계임을 알 수 있었다. 남편은 총을 들고 거짓 자살 소동을 벌이는데 부인은 지겨운 듯 조롱 조로 웃는다. 이러한 장난이 익숙하다는 것이다. 동거인이 자살 소동을 벌이는 것은 그 상황 속에 함께 있어야 하는 상대방에게 매우 폭력적인 상황일 것이다. 그런 상황이 아무렇지 않을 때까지 무뎌져 왔을 부인의 정신적 고통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곧바로 부인에게 공감할 수 있었다.
마담 브데는 식탁의 한 가운데에 있던 꽃병을 가장자리로 옮긴다. 꽃은 겉으로는 잘 꾸며진 결혼생활을 의미하며 아니면 말 그대로 보데 자신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를 안정적인 환경인 중심에서 일부러 위태위태한 가장자리로 밀어내는 것은 현재 브데가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이 결혼 생활을 자신의 의지로 억지로라도 박살 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남편은 브데가 위태롭게 해놓은 꽃병을 다시 안정적인 곳으로 옮겨놓는다. 이렇듯 극 중 인물의 행동으로 전체적인 상황을 설명해준다.
조명을 꺼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방 안에서 암울한 음악을 흘림으로써 한층 더 분위기를 어둡게 만든다. 브데 부인은 남편이 닫아놓은 피아노를 열려하지만 열리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적 연출은 남편의 구속과 억압으로 인해 부인이 가지는 결혼생활에 대한 답답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인은 빛 아래에서 책을 읽는다. 어떻게든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남편은 꼭두각시에게 폭력을 가하고 결국 꼭두각시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부서진다. “꼭두각시는 깨지기 쉬워. 마치 여자처럼.”이라는 대사를 넣어 줌으로써 브데 부인과 꼭두각시를 동일화하고, 현재의 브데 부인처럼 여성이 사회와 가정 속에서 인형 같은 존재로 여겨져 왔음을 알게 한다. 하지만 여성은 당연하게도 인형이 아닌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을 압박하는 기괴한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또한 남편이 인형에게 폭력을 가해 목이 부서지는 이미지를 통해 여성이 가부장제의 폭력성에 언제나 노출되며 살아가고 있고 여성들에게 그 구조 자체가 생명을 위협하는 공포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남편은 자신이 부러뜨린 꼭두각시의 머리를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주머니에 품는다. 이건 후에 남편이 브데 부인을 꼭 끌어안으며 너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의 암시이다. 여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으면서도 그들을 영원히 자신들의 곁에 있게 하려는 가부장제 수혜자들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 부인의 허망한 눈빛은 이 영화가 보여주려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기에 그녀와 한마음이 되어 고통스러워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