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조약, 한일병합조약, 한일합병조약, 한일합방조약, 한일합병늑약, 국권피탈 등으로 불리운다.
1910년 8월 22일 조인되고 8월 29일에 발효되었다.
스기야마 시게마루(杉山茂丸/삼산무환)는 이용구, 송병준에게 한일합방 청원서를 제출하게 하고,
한일합병조약에 조인한 대신들은 이완용(내각총리대신), 윤덕영(시종원경), 민병석(궁내부대신)
박제순(내부대신), 조중응(농상공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이병무(친위부장겸 시종무관장)
조민희(승녕부 총관)등 8명이다.
이용익(학부대신/현 교육부장관)은 반대하다 협상장에서 쫓겨났다.
일제는 1907년 7월20일에 이준의 헤이그 밀사 사건을 명분삼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등박문)를
경성(서울)으로 파견하여 을사보호조약(1905년에 맺은 불평등 조약/을사늑약)을 위반하였다며
고종황제를 강제 폐위시킨다.
이때 이완용이 고종폐위에 가담하였다.
대한제국을 병탄하려는 목적의 사전단계로 정미조약에 정미칠적이 서명하였다.
황제 재위가 빈사이 7월24일에 정미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한다.
조선통감부 사저에서 이완용과 이토히로부미가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일신협약, 제2차 을사조약, 제3차 한일협약(일본측에서 사용)이라고도 한다.
이완용(내각총리대신), 송병준(농상공부대신), 이병무(군부대신), 고영희(탁지부대신), 조중응(법부대신),
이재곤(학부대신), 임선준(내부대신)등 7명과 이완용, 이토 히로부미가 황제의 옥쇄를 위조하여
불법적으로 체결하였다.
정미7조약을 체결한 7명의 매국노를 경술국적이라고 한다.
군대해산권, 사법권, 경찰권이 박탈되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후 순종이 9월14일에 황제로 등극하였다.
1907년 7월 24일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구식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적으로 의병과 구식군대(1882년 임오군란으로 해산된 군대까지 가세)등 14만명이 봉기하여
서울 진공작전을 벌였으나, 전력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대한제국 인구1천3백12만명 중에서 14만명이 일제에 항거하였다.
1910년 한일합병이후 만주등 해외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정미7조약을 체결시키기 위하여 고의로 고종황제를 강제폐위시키고, 권력 이양기 시기를 틈타서
황제의 재가없이 정미조약을 체결시킨 것이므로 불법조약이다.
조약을 체결시킨후 순종을 즉위시킨뒤 1910년에 순종을 폐위시키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시켰다.
고종은 폐위되자 황실자금과 국고자금으로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발각되기도 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조직하고 배후에서 움직이려다 발각되었고, 만주로 탈출하여
3,1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려다가 1919년 1월 16일 3.1만세운동을 앞두고 일제에 의해
독살당하여 붕어하고 말았다.
순종은 1926년 독살을 당하고 만다.
이일로 6.10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이 내준 거금의 독립자금은 일제와 내부 배신자들이 나눠가지는 사고도 있었다.
또 독일은행에 맡긴 거금의 독립자금을, 일제와 독일이 나눠갖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천억이상)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895년에 일어났던 을미의병과 1907년 정미의병이 주도하여
정미 7조약에 반발하며 봉기에 들어갔으나 실패하였다.
1908년 군대해산에 불만을 품고 구식군대 위주로 봉기하였다.
1908년 1월초 이인영을 주축으로 원주의 이구재, 이은찬 등이
전국 48진 1만여명의 구식군대와 의병을 모아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였다.
선봉대 300여명을 이끌고 서울 진공작전을 벌여 동대문밖까지 진격하였으나,
후속부대와 연락이 두절되어 조선통감부 점령에 실패하고 말았다.
경기도,강원도, 충청도-민긍호, 박준성, 손재규.
경기도-허위, 연기우(강화, 포천, 연천), 김수민(장단~황해도 서흥)
경북-이강년, 신돌석.
전남-기삼연(장성), 전해산(나주), 김태원, 심남일(함평),
전북-이석용(임실-거창, 함양 안의로 확산시킴), 문태수(무주)
충남-김동신(공주, 회덕, 연산, 진잠)
황해도-박정빈, 이진룡(평산)
함경도-홍범도, 차도선(삼수, 갑산), 최재형(경원), 이범윤, 엄인섭, 안중근 등이 함남 갑산에서
일본군과 신아산전투(新牙山戰鬪)를 치뤘다.
1909년에 들어서자 호남일대의 의병활동이 가장 치열하였다.
일제는 1909년 9월부터 2개월에 걸쳐 작전명 "남한대토벌작전"을 벌여 호남대공세를 펼쳤다.
일제의 대공세에 밀려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그후1920년 10월21~28일의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1920.6.6~7)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만 아래와 같다.
청산리, 봉오동전투 VS 일본군.
독립군. 일본군 동지대 37여단.
북로군정서 조선주둔 육군19사단.
대한독립군 육군20사단파견대.
군무도독부 포조군 제14사단
의군부 포조군 제11사단
한민회 포조군 제19사단
대한광복단 북만주파견대.
신민단 관동군파견대대.
북로군정서.(7~800명) 야마다
최고사령관 서일 가노 노보테루
사령관 김좌진 마사히코 아즈마
대대장 김규식. 나오키 이소바야시
참모장 나중소 마즈조 기무라.
연성대장 이범석(150명)
기타 2,000명.
대한독립군(3~1,400명)
홍범도 국민군(200~250명)
의군부(150명) 한민회(200~500명)
군무도독부군 최진동,안무.
의민단 허근,강창대,방위룡 김연군.
신민단(1,100명) 김준근, 박승길, 양정하.
광복단(200명) 의민단(200명)
전투원 3,050~4,700명 비전투원1,000명.
독립군전과. 일본군 피해 전과.
독립군130명 전사 916~1,200여명 전사
89명부상 3,300여명 부상.
200여명 실종.
일본은 군부기록을 조작하여 11명전사, 24여명 부상이라 기록해놓고 한국측 주장을 날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 승리의 후폭풍으로 경신참변(간도학살사건)이 발생한다.
일본군은 45만의 대병을 출병시켜 만주 간도일대에 살고 있는 조선인 마을을 초토화시키며,
10,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2,500호의 민가와 30여개의 학교를 불태워 없애버렸다.
(실제로는 4만이상임)
또 1921년 자유시사변과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며 날조하였고,
관동대지진의 책임을 조선인들에게 뒤집어 씌워 4~50,000여명의 조선인을 학살하였다.
(일본학자가 찾아낸 기록은 2만3천여명이고, 최대 3~4만명일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청산리, 봉오동전투에서 패한 앙갚음과, 일본인들에게 피해보상을 해주기 싫어 날조하고
조선인들을 대리 희생양으로 삼음.)-그유명한 150엔발음을 묻고 다르면 죽이고 다녔다.
매국노들은 간도참변을 불러일으켰다고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를 비난하였다.
독립군을 지원해줄 수 있는 민간인들이 사라지자, 간도참변사건을 복수하기 위하여
적극적 독립활동으로 전환하고 중국내에서 활동하던 모든 독립군들이
북만주, 사할린으로 8만이 집결한다.
그후 이만, 알렉셰에프스크, 하바로프스크 등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러시아 연해주땅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러시아 민족민주주의 군대인 러시아백색군의 요청으로
공산사회주의 군대인 소련적색군을 한동안 토벌해야만 하였다.
민족사회주의진영인 섬서성 연안시 연안파의 5만독립군, 김구를따르는 민족주의 진영,
고려공산당을 따르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지휘권다툼으로 자유시사변을 겪게 된다.
이것은 소련 적색군의 이간책공작이었다.
이간책공작은 일본이 소련을 사주한것이었다.
이당시 소련은 적색군과 러시아백색군으로 나뉘어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있었다.
동시베리아에서 소련적색군은 러시아백색군에 전력열세로 밀려나고 있었다.
러시아백색군은 민족민주주의 군대이고 적색군은 공산사회주의 군대였다.
8만의 좌우합작 조선독립군의 등장으로 불안해진 소련적색군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일본군을 끌어들여
조선독립군과 백색군을 토벌하였다.(독립군 좌우합작으로 북만주 사할린집결/8만명)
일제는 45만병력을 출병시켜 압록강을 도강하여 백색군을 선제 기습하고, 토벌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조선독립군 토벌이 여의치않자,적색군을 움직여 이이재이전법을 구사하기로 한다.
조선독립군의 이념을 이용하고 분열시켜 지휘권다툼을 벌이게 만드는데 성공시켰으며,
민족사회진영에 지휘권을 빼앗겼던 고려공산당군을 소련적색군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하였다.
(일제가 소련적색군과 내부동맹을 맺고 벌인 사건이며 일본군이 백색군을 토벌하는데 성공하자,
승산이 적색군에게 있다고 판단한 고려공산당군이 소련적색군측으로 돌아서 협력하였다.)
그결과 자유시사변이 일어났던것이다.
(이일로 일본은 홋가이도북부, 쿠릴열도, 알류샨열도를 얻게 된다.
패망후 알류산열도는 미국으로 넘어가고, 쿠릴열도는 소련이 다시 차지함.)
자유시사변(自由市慘變/자유시참변)은 1921년 6월27~28일
러시아의 스보보드니(이만/알렉세예프스크/자유시)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소련은 조선독립군의 무장을 와해시키려고 공작하여 지휘권다툼을 벌이게 만들었다.
그결과 고려공산당계열이 소련적색군과 손잡고 수천명의 독립군이 와해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고,
살아남은 자들은 키르키즈,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으로 민간인 40만명과 함께 끌려가서
간첩혐의로 죽임을 당하고 독립군세력이 와해된다.
지청천, 김좌진, 이범석등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고려공산당원에 의해
김좌진은 죽임을 당하였고, 민족사회주의 계열이 가장 많이 소련군에 희생되고 체포되었다.
살아남은 민족주의 진영은 김구의 상해로 돌아간후 훗날 사천성 중경임시정부로 이동하고,
민족사회주의 계열은 섬서성 연안시(연안파)로 이동하여 5만명으로 다시 늘어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공산주의계열 고려공산당은 만주와 사할린에 남아 소련에 협력하였다.
한국전쟁후 50~60년대 연안파는 58년 국내파를 필두로 남로당파와함께, 소련파 김일성에 의해
모두 숙청되고 말았다.
민족사회주의 계열인 섬서성 연안파 5만의 조선팔로군은 동북삼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일어나
일본군에 쫓겨 섬서성 연안시로 밀려나 조선팔로군의 도움으로 세력성장의 발판을 삼고
중국의 모택동 공산군에 협력하고 일제와 싸우며 전투력이 대폭 향상되어,
북한공산군과함께 1950년 6월 25일 팔로군이 되어 남침하는데 앞장선다. (병력 5만명.)
섬서성 연안시 연안파 5만의 조선팔로군이 장개석의 국민군을 대만으로 몰아내는데
선봉으로나서 전투력이 급성장하였기 때문에 모택동은 장개석을 몰아내고 나서 조선팔로군에
위기를 느끼게되어 3.8선에서 400여회에 걸친 국지전이 발생하자 북한 평양으로 보내버린다.
연안파는 한국으로 들어오려면 미군으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해야했기 때문에 관망하고 있다가
북조를 장악한 모택동이 국공합작[좌우합작]을 깨고 장개석[장제스]를 공격하자,
무장해제를 당하지 않으려고 적극 협력하여 선봉으로 나서게 된다.
연안파 5만의 조선팔로군의 도움으로 중화민국의 장개석을 대만으로 몰아낸 공로를 인정하여,
전후, 북한에 중화학단지를 대대적으로 건설해주는 계기가 되어 1960년대 한국보다 GNP가 더높았던 이유였다.
중국 장개석의 국민군과 동맹이었던, 김구의 민족주의 진영만 개인자격으로 한국으로 들어왔다.
장개석의 국민군은 1949년 모택동군과 연안파[조선팔로군]에 의해 대만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청산리, 봉오동전투의 승전을 계기로
중국인들도 일본인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은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중국인이 일본인을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에 젖어있었다.
한국이 일본을 이김으로써 중국인들도 항일정신을 고무시키는 성과를 얻어낸것이다.
이로써 중국 국민군은 한국의 상해, 중경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되어,
독립군양성을 위한 군관학교설립에 활기를 띄게 되었다.
만약 소련에서의 무장력이 계속 살아있었다면, 사할린은 소련령으로 남아있지 않았을것이었다.
좌우합작 독립군은 8만명을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소련은 조선독립군을 무서워하고 경계하였다.
소련은 1945년 만주지역 심양을 중심으로 하는 동진국을 재건하여 조선독립군에게 맡기려 하였으나
중국이 반대하고 후일 한국전쟁에 개입한 명분을 대며 강력한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일제와 소련적색군이 내부동맹을 맺고,
그들의 이이재이전법에 악랄하게 당한것이 자유시사변이다.
일제와 공산사회주의 소련적색군과의"적대적동반자관계"전략형성으로 패하고만
독립운동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