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五 章 아들의 소원
전옥린은 흠칫 놀랐다.
『그 옛날 낙성추혼(落星追魂) 이대협(李大俠)의 양심신공 말인가?』
엄릉야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옥린은 송철잠을 한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양심신공이 다시 강호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면 칠대문파 사람들이 그토록 놀라 한꺼번에 움직이지는 않았을 것 같구려.』
송철잠은 온 얼굴 가득히 놀라운 빛을 띠고 말했다.
『엄릉야, 자네는 그 양심신공이 누구의 손에 떨어졌는지 아는가?』
엄릉야는 대답했다.
『선배님은 남패천(南覇天)을 아십니까?』
송철잠은 한숨을 내쉬었다.
『패천마도(覇天魔刀) 남패천 말인가?』
엄릉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은 아마도 다년간 강호에서 떠나 계셨던 모양이지요? 패천마도는 이미 칠 년 전에 무창성 남쪽의 천패장(天覇莊)에 주거를 정했답니다. 이번에 그가 양심신공을 얻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에……』
전옥린이 그 말을 가로챘다.
『강호의 소문은 종종 확실하지 않을 때가 있다네. 남패천에게 원한을 가진 자가 그를 모함하려고 그와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렸는지도 모르지……』
송철잠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주의 말씀이 옳소이다. 소위 '필부(匹夫)는 죄가 없으나 구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죄다.'라고, 남패천이 만약 양심신공을 정말 손에 넣었다면, 결코 소식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엄중히 조처했을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었겠습니까?』
엄릉야는 그 말을 부인했다.
『이번 일은 결코 천패장에서 새어나온 이야기가 아니고 한 나무꾼이 천패장에 나무를 팔러 갔다가 사흘 간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소문이 나게 된 것이지요.』
전옥린은 흥미롭다는 듯이 추리했다.
『아! 원래 그 양심신공비급은 나무꾼이 우연히 산 속에서 얻게 되었지만 진보(珍寶)인 줄 모르고 천패장으로 가져갔다가 결과적으로 살신지화(殺身之禍)를 당했다는 줄거리인 것 같군.』
엄릉야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바로 그렇게 된 것이지요.』
전옥린이 물었다.
『이 일은 내가 분명히 알았네. 그러면 자네 오호맹은 도대체 어떤 조직이며 수뇌자는 누구인가?』
엄릉야는 말을 더듬거렸다.
『그건 말씀드리기가……』
그리고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입을 열었다.
『만약에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저에게 말씀을 해 주신다면 불초는 감히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때 불초는 죽어도 감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전옥린은 엄릉야를 바라보았다.
『아, 그건 또 무엇 때문인가?』
곧이어 그는 짐작할 수 있다는 듯 스스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자네들 오호맹 규칙이 매우 엄해서 가볍게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모양이로군. 그러니까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고수를 만나기 전에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고 그 규칙을 지키지 않았을 때 처벌을 받게 된다는 뜻인가?』
엄릉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님의 말씀이 지극히 옳습니다.』
전옥린은 웃었다.
『자네들의 그와 같은 규칙은 좀 억지인 것 같군. 만약에 자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자네의 목숨을 빼앗게 된다고 하세. 그래도 말을 하지 않을 텐가?』
엄릉야는 눈빛을 사납게 번쩍였다.
『선배님께서는 불초소생을 핍박하여 말을 하도록 강요하려는 것입니까?』
송철잠이 꾸짖었다.
『자네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는 것인가? 만약 자네가 우리 주인이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면 노부가 우선 가만 두지 않겠네.』
엄릉야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더니 그의 동료에게 말했다.
『노림(老林), 자네의 단도(單刀)를 나에게 빌려주게나.』
그의 곁에 섰던 대한이 놀라 말했다.
『엄형, 그대가 감히…… 저들과……』
엄릉야는 이빨을 깨물었다.
『단도를 나에게 달라니까.』
그의 동료는 잠시 망설이더니 단도를 내밀었다. 엄릉야는 단도를 받아들자 즉시 그 단도를 휘둘러 그 동료를 죽여 버렸다. 그가 갑자기 손을 써서 동료를 죽인 것은 비단 죽은 사람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지만 전옥린과 송철잠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들이 깜짝 놀라게 되었을 때 엄릉야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몸을 돌리고 칼을 쳐들고서 다른 두 명의 동료에게로 달려갔다.
노호라고 하는 대한은 송철잠에게 두 번이나 채찍을 얻어맞아 얼굴 가득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막 얼굴에 약을 바르고 말 위에 올라탄 형편이었으며 이쪽의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 명의 노장이라 하는 대한은 줄곧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엄릉야가 동료를 죽이고 칼을 들고 달려오는 것을 보고 그만 아연해서 외쳤다.
『엄형! 무슨 짓이오?』
엄릉야는 흉측하게 웃더니 칼을 들고 그를 찌르려 들었다. 그의 도법으로 말하자면 그들 몇 사람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고수라 할 수 있었다. 칼빛이 몇 번 번쩍이는 가운데 노장은 그만 비명횡사하게 되었다. 말 위에 앉아 있던 노호는 동료의 비명 소리를 듣고 억지로 눈을 뜨다가 엄릉야가 칼을 휘둘러 노장을 죽이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는 경악해서 소리쳤다.
『엄형! 당신이……』
엄릉야는 얼굴 가득히 살기를 띠고 말을 가로챘다.
『만약 네가 불러일으킨 화가 아니었다면 어찌 내가 자기의 형제들을 죽이는 일이 벌어졌겠는가? 노호, 너야말로 죽어 마땅한 놈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달려들어 한 칼로 노호라는 자의 목을 베려고 들었다. 노호마저도 자기의 동료처럼 비명횡사하려는 찰라 송철잠이 나는 듯 달려와 대뜸 엄릉야의 어깨를 잡고 호통을 쳤다.
『엄릉야! 무슨 짓이냐?』
엄릉야는 왼쪽어깨가 마치 무쇠 발톱에 움켜잡힌 듯 아파서 반쪽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남은 기운을 내어 한 칼로 노호의 목을 베었다.
선혈이 뿌려지면서 피가 엄릉야의 얼굴에 마구 튀었다. 송철잠은 즉시 그의 손에 들렸던 칼을 빼앗고 그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송철잠은 얼굴 가득히 살기를 띠고 손에 빼앗아든 단도를 쳐들고 엄릉야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엄릉야, 너는 정말 악랄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대단한 담을 가지고 있구나! 감히 노부 앞에서 너의 동료를 죽이다니! 그와 같은 이리의 심보를 가진 너를 노부가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느냐……』
엄릉야는 송철잠을 쳐다보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항의하듯 말했다.
『만약에 선배님이 손을 써서 저를 죽이게 된다면 불초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심지어는 전혀 신의를 따지지 않는 소인배가 될 것입니다……』
송철잠은 노해 물었다.
『그 말은 대체 무슨 뜻이냐?』
엄릉야는 설명했다.
『선배님이 저에게 방의 비밀을 말하도록 핍박한 것은, 바로 저로 하여금 동료를 죽이도록 강요한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말을 한다면 그대로 저를 놓아준다고 했습니다. 이제 제가 방의 비밀을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선배님은 저를 죽이려고 하니, 그것이야말로 신의를 저버린 소인의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송철잠은 생각해 보더니 단도를 거둬들였다.
『노부는 다만 너보고 너희들 오호맹의 일을 말하라고 했지, 동료들을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엄릉야는 그 말을 받았다.
『선배님의 그 말씀은 틀렸습니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말했다.
『방규에 의하면 방의 비밀을 이야기했을 때 오직 죽음의 길밖에 남지 않습니다. 선배님께서 저에게 그러한 비밀을 말하도록 강요한다면 저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그들을 죽이는 방법 이외는 다른 방법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전옥린이 입을 열었다.
『자네 말이 맞다.』
그는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에게 말을 하도록 핍박을 하니 그로서는 동료들을 죽여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겠지. 그러나 엄릉야, 이제 나는 너에게 방의 비밀을 누설하라고 강요하지 않겠다. 그렇게 된다면 네가 동료를 죽인 일은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엄릉야는 어리둥절해졌다. 전옥린이 이와 같이 생각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터라 일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전옥린은 손을 내저었다.
『너는 가보아라. 하지만 권고하는데 네놈이 나를 만났던 일을 들먹이게 된다면 훗날 나는 반드시 삽시호(揷翅虎) 손통(孫通)을 찾아가 따질 테니 그리 알아라.』
엄릉야는 전옥린이 삽시호 손통을 들먹이자 그만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잠시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포권을 했다.
『선배님께서 이토록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데 대해 정말 고맙게 생각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얼굴의 핏자국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몸을 날려 말 등에 올라타더니 급히 달려갔다. 송철잠은 엄릉야가 말을 몰아 급히 달려가는 것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보주, 저와 같은 악인을 어째서 놓아주는 것이지요?』
전옥린은 대답했다.
『그는 용서받지 못할 악인임에 틀림없지만 우리는 결코 그를 죽일 수가 없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의 말이 이치에 맞기 때문이지. 그가 칼을 써서 동료를 죽인 것은 내가 비밀을 말하라고 핍박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외다. 그런데 우리가 다시 그를 죽인다면 강호 도의에 어긋나는 일이지……』
송철잠은 여전히 전옥린의 말 속에 숨겨진 뜻을 이해할 수 없어 머리를 긁적긁적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무런 비밀을 캐내지 못했지 않습니까?』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마음이 편안하다오. 그가 동료를 죽인 악행을 모두 다 우리들 때문으로 밀어붙일 수 없고 부득이 그 혼자 책임을 져야 하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는 다시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조금 전 나는 그가 오호맹을 여러 보이나 들먹이는 말을 듣고는 줄곧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소이다. 나중에 철노가 그 사람을 붙잡았는데도 그가 여전히 칼을 휘둘러 사람을 죽였는데, 나는 그제사야 몸을 날리며 칼을 쓰는 동작으로 그가 삽시호 손통의 제자라는 것을 알아냈지요……』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재차 말을 이었다.
『철노도 알겠지만 손통은 천서오호 단혼도 팽씨 집안의 사위로서, 비단 팽씨 집안의 비전 도법을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영자(魔影子) 애륜개(艾倫凱)의 경신법을 배워서 일종의 등공운도(騰空運刀)의 도법을 독창했지요. 그가 오호맹을 창립한 것을 보면 아마도 다른 사호들은 그의 처남들일 것이오. 그들이 남칠성의 흑도맹주 탈백신수(奪魄神手) 음무극(陰無極)의 휘하에 속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라 엄릉야로 하여금 돌아가 손통에게 양심신공에 관한 일을 보고토록 하여 음무극의 힘으로 양심신공을 빼앗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송철잠은 그제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원래 그랬군요.』
그러나 그는 다시 물었다.
『보주께서는 양심신공이 이 세상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믿습니까? 믿지 않습니까?』
전옥린은 대답했다.
『이 일은 아마도 태반이 사실일 것이외다. 그렇지 않을 때 남패천은 결코 그 나무꾼을 죽이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 말이외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가 귀찮게 된 것이 틀림이 없구려. 양심신공비급은 현문지보(玄門之寶)입니다. 유일하게 불문의 육대신통(六大神通)과 금강부동심법(金剛不動心法)에 대항할 수 있는 일종의 현공(玄功)이지요. 비교해 볼 때 태청강기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정사이도를 막론하고 모두다 이것을 차지하려고 계략을 꾸밀 것이니 아무래도 무창성은 이 며칠동안 상당히 시끄러울 것 같구려.』
그들은 이같은 말을 주고받으면서 마차 곁으로 돌아왔다. 전옥린은 마차 옆의 휘장이 이미 들쳐지고 하옥지와 전모백이 머리를 내밀고 바깥을 살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물었다.
『이제 깨어났나?』
하옥지가 대답했다.
『밖에서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설사 귀머거리가 잠들었다 하더라도 깨어났겠어요. 큰오빠,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에요?』
이미 노을빛이 거의 사라지고 땅거미가 대지를 덮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한가닥 노을빛이 하옥지의 얼굴에 비춰지게 되자 그녀는 교염하고도 신비로운 자태를 드러내게 되었다. 전옥린은 그녀의 이런 분위기에 약간 어리둥절해졌으나 즉시 심신을 가다듬고 설명했다.
『다만 좀도적들이 귀찮게 굴었을 뿐이다. 그들은 만만히 볼 상대인 줄 알았다가 결국 철노에게 한바탕 가르침을 받게 된 셈이지!』
하옥지는 다시 물었다.
『그러나 저는 양심신공비급을 들먹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요?』
하옥지는 일신에 무공을 지니고 있었지만 중독되었기 때문에 운기행공을 할 수가 없어서 지금 보통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거기다가 그녀의 차림새가 양갓집 젊은 부인 같았기 때문에 더욱더 간드러지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전옥린은 그녀가 자기를 위해 치른 헌신적인 희생을 상기하고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소문에 양심신공비급이 세상에 나타나서 무창성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는데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지……』
그는 손을 뻗쳐서 전모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모백아, 너는 많이 지쳤겠지? 우리는 곧 성 안으로 들어갈 것이고 훌륭한 객잔을 찾아 묵게 될 것이다. 이 애비는 너에게 몇 가지 무창의 이름난 음식을 먹여주도록 하마.』
전모백이 말했다.
『아버지, 저는 피곤하지 않아요. 길을 오면서 고모님이 저에게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 정말 재미있었어요. 아버지, 운남(雲南)에 가게 되거든 공작 한 마리를 잡아주세요.』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 애비가 반드시 공작을 잡아주도록 하마.』
그는 다시 입을 열고 당부했다.
『너는 잠시 쉬면서 앉아 있거라. 우리는 곧 성으로 들어갈 것이다.』
전모백은 머리를 마차문 안으로 움츠렸다. 하옥지가 물었다.
『큰오빠, 그 양심신공비급이 누구의 손에 떨어졌대요?』
전옥린이 그녀에게 되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것을 묻느냐?』
그는 정색을 하고 다시 말했다.
『그 물건 때문에 오대 문파의 고수들이 모두 무창에 왔다고 한다. 우리들이 그 귀찮은 일을 알아서 무엇 하겠느냐?』
하옥지는 겸연쩍게 웃었다.
『큰오빠, 저는 단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손에 넣자는 것이 아니잖아요……』
전옥린은 그 말을 받았다.
『생각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쓸데없는 일에 휘말렸을 때 천하의 정사에 속하는 온갖 고수들이 모두 우리들을 찾아오게 될 것이니 그 골치 아픈 점을 네가 짐작이라도 하겠느냐.』
하옥지는 살포시 웃었다.
『큰오빠, 저도 알고 있어요. 저를 어린애처럼 보지 마세요……』
전옥린은 그녀의 그 간드러지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자 약간 멍해졌으며 하옥지가 휘장을 내린 후에야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스름 빛이 차츰 온 누리를 뒤덮게 되고 몇 개의 별이 밤하늘에 떠 있는 것을 보며 그는 생각에 잠겼다.
'만약에 이번 길에서 해약을 취득할 수만 있다면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옥지와 모백과 더불어 깊은 산 속이나 물가에 숨어서 한 평생을 조용히 보내야지……'
그의 마음은 한가닥 행복한 느낌으로 가득 찼다. 그는 유쾌하게 말을 타고 천천히 마차를 따라 무창성 안으로 들어갔다.
대보름이 되려면 아직도 며칠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무창성 안에는 이미 등을 내걸고 오색종이로 장식을 하고 있었으며 길가는 행인들도 희희낙락한 것이 명절 기분에 들떠 잔뜩 흥청거리고 있는 듯 했다.
전옥린은 성 안으로 들어가 성태객잔(盛泰客棧)에서 세 칸의 객실을 빌린 다음 여장을 풀고 세수를 하고 식사를 했다.
그 객잔의 사환은 사람을 대하는 것이 매우 열성적이어서 대뜸 찻물도 가져오고 세숫물을 가져오는 등, 바삐 왔다갔다 하더니 식사를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길을 오는 동안 늘 세 칸의 방을 빌렸는데 하옥지가 한 칸을 사용하고 전옥린 부자가 한 칸을 차지했으며 나머지 한 칸은 송철잠이 묵었다. 그러나 밥을 먹을 때는 모두 모여서 먹었다. 그래야 좀 더 화기애애하기 때문이었다.
그 사환은 처음에 마부와 주인이 같은 상에서 식사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으나 송철잠으로부터 은자를 몇 냥 받은 후에는 감히 이상한 시선으로 늙은 마부를 보지 않았다.
그들 네 사람이 식사를 끝내고 잠시 쉬는 동안 전옥린이 입을 열었다.
『모백아, 피곤하지 않느냐? 거리에 가서 화등(花燈) 놀이를 구경하겠느냐?』
전모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보고 싶지 않아요.』
전옥린은 의아하여 물었다.
『어째서 그러느냐? 너는 언제나 화등놀이를 좋아하지 않았느냐?』
전모백은 대답했다.
『이곳의 화등은 대명부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으니 볼 것이 있어야지요.』
전옥린은 길을 오는 동안 이르는 곳마다 아들을 데리고 가서는 그 고장의 명승을 구경시키곤 했다. 아무리 총망하다 하더라도 그 고장의 토산품을 사줘서 어린 아들을 즐겁게 하려고 했다.
그는 녹포노조가 해약을 내놓도록 할 복안이 어느 정도 있었지만 해약이 손에 들어오기 전에는 역시 어느 정도 불안한 마음이 가셔지지 않았고 일이 잘못될 경우를 생각해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가장 잘못될 경우라고 생각하는 결과는 바로 그가 아들과 함께 죽는 것이었다. 과거 처의 죽음도 그에게 책임이 있었는데 이제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게 된다면 그로서는 스스로 같이 죽는 수 밖에는 달리 자신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해약을 얻지 못하게 된다면 모백이 열흘밖에 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늘 머리에 떠올리게 되었고 과거 십 년 동안 자기가 아들에 대해 너무나 소홀하게 대했다고 느꼈다. 그래서 남은 열흘이라도 어린 아들이 유쾌하게 지내도록 해주어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전옥린은 한번 생각해 본 후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좋다! 네가 화등놀이가 싫다면 우리 거리로 나가 구경하며 거닐면서 네가 어떤 것들을 좋아할지 살펴보기로 하자.』
전모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나가기 싫어요.』
전옥린은 송철잠을 하번 바라본 후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 모백이가 왜 이럴까?』
송철잠이 입을 열려고 했을 때 하옥지가 몸을 일으켰다.
『큰오빠, 얘기들 하고 계세요. 저는 제 방으로 가봐야겠어요.』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제 방으로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여유 있는 태도로 다시 물었다.
『모백아, 혹시 고모가 너에게 무슨 말을 한 것이 아니냐?』
전모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그러다가 그는 생각난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고모는 그저 나에게 양심신공은 현문에서 가장 훌륭한 심법이며 그 공부를 익히게 되면 사람으로 하여금 동시에 마음을 두 갈래로 나누어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씀만 하셨을 뿐이에요.』
전옥린은 안색이 굳어지면서 물었다.
『모백아, 이 애비에게 솔직히 이야기해봐라. 너는 그 양심신공비급을 욕심내는 것은 아니겠지?』
전모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옥린은 어리둥절해 있다가 쓸쓸히 웃었다.
『모백아, 너는 혹시 아는지 모르겠다만……』
그러다가 그는 말을 멈추고 손을 내저었다.
『아! 내가 어린 너에게 이런 말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문 밖으로 걸어나가려 했다. 송철잠이 입을 열었다.
『보주!』
전옥린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들에게 다시 물었다.
『모백아, 너는 어째서 그와 같이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
전모백은 아버지의 난처한 표정을 보자 자기 요구가 너무 지나쳤다는 것을 알고 고개를 숙이며 나직이 말했다.
『아버지, 저는 다만 그러한 무공비법을 한번 보았으면 할 뿐이에요. 아버지가 안 된다 하시면 그만두기로 하지요……』
전옥린은 아들의 그 창백하고도 조그만 얼굴이 며칠 전보다 수척해졌으며 한 쌍의 새까만 눈동자가 더욱더 커져서 옛날의 또렷또렷한 모습이 사라진 것 같다고 느꼈다. 그는 마음속으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느낌을 받고 자연히 십 년 전에 세상을 등진 아내를 생각했다.
십 년 전 그의 처는 그에게 집 안에 남아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아이를 낳을 동안이라도 곁에 있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경성 쌍사표국의 총표국주를 위해 하남(河南)으로 가서 약탈당한 표은을 찾아와야 했다. 그는 아내의 애원을 못 들은 척하고 의연히 대문을 나섰던 것이다.
그가 집을 비운 것은 불과 일 개월에 지나지 않았으나 금응보로 돌아왔을 때 그의 사랑하는 아내는 갓난아이만 남겨 두고 난산으로 죽었다.
지나간 일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이미 돌이킬 수 없었으나 전옥린의 마음속에 남은 상처는 영원히 지워지기 어려웠다. 그 후부터 그는 금응보에 칩거했으며 다시는 강호에 발걸음하지 않았다.
전옥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모백이 이와 같이 비참한 경우를 당하고 있다. 어린 아이가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는 이 마당에, 그 아이가 그저 조그만 요구를 했을 뿐인데도 나는 모질게 거절했으니, 내 어찌 죽은 아내를 저승에서라도 대할 면목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생각이 떠오르자 그는 다시 전모백의 곁으로 다가가 사랑하는 아들을 안았다.
『얘야, 네가 어떤 것을 요구하든 나는 반드시 그것을 구해다가 너에게 주겠다.』
그렇게 말을 하자 마음은 더욱더 격동되어 전모백을 꼭 얼싸안고 그는 자신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얘야, 이 아버지는 정말 너에게 잘해주지 못했구나.』
과서 십여 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전옥린은 줄곧 엄하고도 무서운 아버지였다. 그는 이 하나뿐인 아들을 사랑했지만 한번도 그와 같은 감정을 밖으로 나타낸 적이 없었으며 다만 엄하고도 매섭게 아들이 공부를 하고 무공을 연마하도록 감독했을 뿐 지금처럼 다정하게 전모백을 얼싸안은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모백은 아버지에게 얼싸 안기게 되었을 때 처음에 약간 생소한 감에 손과 발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나 곧이어 아버지에 대한 정이 우러나게 되어 그 역시 전옥린을 꼭 껴안았다. 느낌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게 되어 전옥린은 급기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송철잠은 전옥린을 따른 지 수십 년이 되었다. 그러나 줄곧 보아온 것은 전옥린의 위엄있고 침착하며 매서운 일면뿐이었다. 강호의 흑도 인물들이 그 이름만 듣고도 간담이 서늘해진다는 금응대협 전옥린에게 이토록 자애로운 일면이 있는 줄은 몰랐는지라 일시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교류를 지켜보며 마음속으로 역시 흐뭇한 정이 솟아올라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이어 전옥린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그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그만 눈물이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가는 천천히 흘러나오게 되었다.
우주의 시간은 이 찰나 마치 정체된 것 같았으며 객잔의 시끌벅적한 소리도 모조리 정지한 것 같았다. 방 안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이라곤 오직 한 알 한 알의 참된 정을 담고 흘러내리는 눈물방울뿐이었다. 잠시 후에 전옥린은 겨우 분출하는 정감을 거둬들이고 슬그머니 얼굴의 눈물을 훔쳤다. 그는 천천히 전모백을 내려놓고 아들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고 쓸쓸하게 웃었다.
『모백아, 왜 우느냐?』
전모백은 약간 더듬거렸다.
『저는…… 저 역시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다만……다만 참을 수가 없이 눈물이 나요.』
전옥린은 사랑스럽고 귀엽다는 듯 전모백의 얼굴을 살며시 쳐들었다.
『얘야, 나는 네가 참된 사내대장부가 되어줄 것을 바란다. 차라리 피를 흘릴지언정 결코 눈물은 흘리지 말아라. 설사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극복해야지 결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려서는 아니 된다.』
전모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명심하겠어요.』
전옥린은 몸을 일으켰다.
『그래야 나의 착한 아들이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모백아, 너는 방 안에서 좀 기다리고 있거라. 나는 잠시 나갔다 오겠는데 늦어도 두 시진 안에 돌아올 작정이다.』
전모백이 물었다.
『아버지께서 어딜 가시는 거예요?』
전옥린은 대답했다.
『나는 가서 양심신공비급을 빌려와 너에게 보여주어야겠다.』
전모백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버지, 저는 그것을 보고 싶지 않아요……』
전옥린은 사랑하는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모백아, 기다려라. 송백부께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 만약 나가서 놀고 싶으면 송백부님과 함께 거리로 나가서 산책하도록 해라.』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리고 송철잠에게 말했다.
『철노, 모백을 부탁하오.』
송철잠은 이미 얼굴의 눈물 흔적을 닦은 후였다. 전옥린이 천패장으로 가려는 것을 보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보주, 정말 천패장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전옥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철노, 설마하니 내가 갈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오?』
송철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올시다. 노복이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 밖으로 나가시지요.』
전옥린이 답했다.
『당신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고. 그러나 나는 반드시 가야 되겠소.』
그는 설명하듯 다시 말을 이었다.
『아직은 오대문파의 사람들이 다 모이지 않았소. 좀 더 시간이 흐르게 되면 천패장이 아마도 뭇사람들의 과녁이 될 것이니 더욱더 일이 곤란해질 것이외다.』
그래도 송철잠은 마음이 불안한 듯했다.
『하지만 보주……』
전옥린은 물었다.
『철노, 당신은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시오?』
송철잠은 전옥린의 무공과 그 성질까지 잘 알고 있는지라 감히 반박을 하지 못하고 그저 당부할 뿐이었다.
『보주, 아무쪼록 조심하십시오.』
전옥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철노, 당신은 나대신 모백과 옥지를 잘 돌봐주면 되오. 내 될 수 있는 한 빨리 갔다오리다.』
전모백은 아버지가 떠나려는 것을 보자 달려들었다.
『아버지! 가지 않으면 안 되나요? 저는…… 저는 양심신공인지 뭔지 보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어요……』
전옥린은 부드러운 어조로 모백을 다독거렸다.
『네가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역시 그것을 가져와야겠다.』
그는 다시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나의 마음은 개운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어쩌면 영원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단다.』
그는 가볍게 전모백의 어깨를 두드리고 당부했다.
『모백아, 너는 아버지가 돌아올 때까지 마음 편하게 먹고 쉬고 있어라.』
그는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갔다.
전옥린은 천천히 걸어서 객잔을 나섰다. 길을 가는 동안 마음속은 한가닥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으로 충만했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 자신마저도 확실하게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 안에는 아늑함, 만족, 우수 및 아득함이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와 같이 복잡한 정서는 그로 하여금 줄곧 정신이 오락가락하도록 만들었으며 객잔의 사환과 주인이 그에게 인사말을 하는데도 모르고 지나쳤다.
그러나 그는 객잔을 나서서 찬란한 등불이 번쩍거리는 거리에 나오자 그 아득하고 흐릿했던 표정이 즉시 달라지면서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는 몸을 살짝 날려서 객잔 옆 처마 밑의 그늘진 곳에 내려서서 두 눈에서 형형한 광채를 쏘아내며 거리를 응시했다.
정월대보름을 며칠 남기지 않아서인지 거리에는 어린아이 손을 잡은 행인들이 많이 있었으며 삼삼오오 떼를 지어 구경을 나온 놀기 좋아하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어떤 녀석들은 전문적으로 여인의 등 뒤로 바짝 다가서서 기회가 생기면 즉시 손을 뻗쳐서 치마를 들어올렸다. 놀란 여인의 비명 소리를 듣고 왁! 하니 웃으면서 흩어지곤 했다.
전옥린은 눈초리가 날카로워 그들 거리에 오고 가는 사람들 틈에 무기를 감추고 있는 강호의 인물이 적지 않게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사람들의 옷차림은 일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외견상으로는 어떤 흔적을 나타내지 않고 사람들 틈에 섞여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이 새로이 성 안으로 들어온 인물이 없는지 감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옥린은 가만히 생각했다.
'저 사람들은 아마도 오호맹이 성 안에 풀어놓은 정탐꾼들일 것이다. 그들의 근거지 역시 무창일 가능성이 있다. 오대문파의 고수들이 무창으로 들어오게 되자 그들은 혹시나 당해내지 못하게 될까봐 사람을 보내 탈백신수 음무극에게 통지를 하려는 것일 게다.'
그는 자기가 십 년 동안 강호에 발을 디디지 않았고 지금은 얼굴마저 바꾸어져 있으니 오호맹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옥린 같은 고수가 만약에 사람들 틈에 섞이게 되고 오대문파의 고수와 맞닥뜨리게 된다면 상대방에서는 즉시 그가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고 방법을 강구해서 내력을 알아내려고 할 것이다.
그는 결코 오대문파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양심신공비급을 쟁탈하느라고 귀찮은 일을 야기시키기 싫었고 시끄러운 일이 발생함으로써 그가 운남으로 녹포괴인을 찾아가 해약을 얻으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기게 될까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본 후, 그 객잔 문 입구에 서서 왕래하는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환에게 손짓을 했다.
『이보게, 점소이(店小二), 이리 와 보게.』
그 점소이는 땅딸막하고 좀 모자라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처음 문 입구에 서서 길을 지나가는 사람만 있으면 들어오시라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지만 목이 쉬도록 외쳐도 돌아보는 사람이 없자 아예 그곳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점소이는 그들 젊은 부인들이 짓궂은 녀석들에게 치마가 뒤집혀서 날카로운 울부짖음을 토해내는 광경을 보며 입을 헤벌쭉 벌리고 멍청하게 웃고 있었다. 입을 너무나 오랫동안 벌리고 있었기 때문에 입 안의 침이 흘러내렸는데도 그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전옥린이 두 번이나 불러서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턱밑까지 흐른 침을 닦으며 둘레둘레 돌아보았다.
『아, 누가 나를 부르는 거예요?』
그가 달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는 본래 작은 편이 아니었다. 다만 뚱뚱하고 두꺼운 얼굴살의 면적에 비해서 조그맣게 보이는 것이었다. 눈이 작은데다가 전옥린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이 그늘 쪽이라 그는 일시 누가 그를 부르는지 보지를 못한 것이었다. 전옥린은 다시 손짓을 했다.
『점소이, 나는 여기 있네. 이리 와 보게.』
이번에야 그는 상대를 똑똑히 보고 헤헤 웃으면서 다가왔다.
『손님, 원래 이곳에 숨어 계셨군요. 그러니까 제가 보지를 못하지요. 손님께서는 저와 숨바꼭질을 하고 싶은가보군요?』
전옥린은 입을 열었다.
『점소이, 나는 자네에게 물어볼 말이 있다네.』
점소이는 바보 같은 웃음을 흘렸다.
『손님, 저는 소보(小寶)라고 하며 점소이라고 불리지 않는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의 집에서 외아들이고 형이 없기 때문이지요.』
전옥린은 물었다.
『소보, 자네는 천패장이 어디 있는지 아는가?』
소보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천패장이라고요? 알지요……』
그는 전옥린을 바라보았다.
『손님, 그건 왜 묻습니까? 그 안의 사람들은 흉포하기 이를 데 없지요. 보통사람이 거기 들어갔다가는 살아서 나온 적이 없답니다.』
전옥린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은자 한 잎을 꺼내 건네주었다.
『소보, 이것이 무엇인지 알겠지?』
소보는 어리둥절해졌으나 헤벌쭉 웃었다.
『이것은 은자지요.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전옥린이 설명했다.
『소보, 자네가 천패장이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준다면 그 은자는 자네 것이 된다네.』
소보는 침을 삼켰다.
『참말이지요? 손님, 저와 농담하자는 것이 아니지요?』
전옥린은 은자를 소보의 손에 쥐어 주었다.
『이래도 장난을 치는 것 같은가?』
소보는 은자를 받고서 약간 어리둥절해하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천패장은 바로 이 옆으로 뻗어 있는 거리를 따라가다가 남문을 나서서 줄곧 걸어가야 하는데 아마 반 시진이면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조금 전 객잔 입구 등불이 밝은 곳에 서서 줄곧 거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전옥린이 서 있는 곳으로 왔다. 처음에 처마 아래의 그늘진 곳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전옥린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참 동안 서 있게 되자 눈이 어둠에 적응하게 되었고 앞에 선 이 사람의 눈초리가 독수리처럼 매서우나 눈썹이나 수염이 없는 것을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갑자기 그는 온몸이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라서는 물었다.
『손님! 손님은 어째서 눈썹이 없지요?』
전옥린은 그의 그와 같이 놀라는 태도를 보게 되자 더 머뭇거리지 않고 몸을 움직여 지붕 위로 올라가서 소보가 가리킨 방향대로 천패장을 향해 달려갔다.
소보는 놀라서 묻게 되었을 때 눈앞이 번쩍 하면서 눈썹이 없는 괴인이 이미 종적도 없이 사라지니까 놀라 입을 딱 벌리게 되었고 잿빛 담벼락을 바라보며 한참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객잔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를 질렀다.
『귀신이다! 귀신이 나타났다……』
경황 중에 그는 발밑을 주의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객잔 안으로 뛰어들기 전에 그는 그만 문지방에 걸려 꽈당 쓰러져서 정신을 잃고 말았으며 손에 꼭 쥐고 있던 은자 역시 저만치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전옥린은 독문의 응유만리(鷹遊萬里), 표표한 신법을 펼쳐 그림자처럼, 수백 채나 되는 민가를 가로지르고 높이 솟아 있는 성벽을 뛰어넘으며 넓은 관도를 따라 남쪽으로 질풍과 같이 달려갔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되지 않아 그는 멀리 한 채의 거대한 장원이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장원은 관도에서 십 장쯤 떨어진 거리에 서 있었고 한 대의 마차가 통과할 수 있는 자갈을 깐 길과 통해 있었다.
전옥린은 그 길을 보자 발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리고 방향을 틀어서 들판 쪽으로 달려갔다. 봄의 밭갈이가 아직 시작되지 않아서 밭에는 무더기 무더기의 짚단이 쌓여 있었고 들판에는 새싹이 돋아나고 있는 계절이었다.
전옥린은 들판을 한 걸음에 일 장 정도 가로지르며 발끝으로 짚단을 밟기도 하면서 천패장 뒤에 있는 대나무 숲에 이르러서야 앞으로 나가던 기세를 멈추었다.
그는 흔들리는 대나무 가지 아래에 서서 천패장을 한번 훑어보았다. 이 장원은 차지하는 땅이 꽤 넓고 장원 안에는 집들이 많이 서 있는 것이 그 규모가 금응보에 못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원 밖으로 커다란 나무로 만들어진 목책이 둘러쳐졌는데 그 높이가 삼 장 남짓하다는 것이었다.
시선이 목책의 담장에 가려서 그저 연이어지고 즐비하게 서 있는 집들의 지붕을 바라볼 수 있을 뿐 안의 상황을 볼 수는 없었다.
그는 몸을 날려 대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진기를 돋우고 몸을 가볍게 하여 밤바람에 끊임없이 흔들거리는 대나무를 따라 몸을 흔들거리면서 한동안 자세히 관찰했다.
정적에 휩싸인 밤. 천패장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 높고 낮은 누각 안에 어떤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어떤 창문은 꼭 닫혀져 있었다.
전옥린은 간혹 창문에 비쳐지는 사람의 그림자에서 방 안 사람이 아직도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관찰했지만 장원 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람을 하나도 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정상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이와 같이 널따란 장원 안에서 적어도 수백 명이 안에서 생활하게 될 텐데 겨우 이경 무렵인 이때, 가장 빈번하게 활동을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한 사람도 장원에서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전옥린은 생각했다.
'혹시 남패천은 비밀이 누설되고 장원 안에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장정들을 어둠 속에 잠복시켜 적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태가 정말 그렇다면 남패천은 이미 천패장에서 멀리 도망칠 계획을 준비해 놓았거나, 이미 이곳을 떠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은 재물에 대해서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지만 무학의 비급이나 신병이인(神兵利刃)이라면 눈을 까뒤집고 원하는 법이다. 더욱이 이 양심신공비급은, 전해진 바에 의하면 지극히 짧은 시간 안으로 그 무공을 익힐 수 있고 공력이 쉽사리 두 배나 증진된다는 것이다.
그 누구건 양심신공을 익히기만 하면 쉽게 무림을 제패할 수 있고 고수중의 고수로 뛰어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남패천은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인사(人士)였다. 따라서 이 점을 잘 알고 있을 것이며 또한 이 소식이 강호에 퍼지게 되었을 때 어떤 귀찮은 일이 찾아오리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잠시 천패장을 떠나 멀리 다른 은밀한 장소를 찾아 몇 년이고 머물면서 양심신공비급의 무공을 연성하고 나서 다시 강호에 나설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는 충분히 달려드는 적들을 모두 상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게 되자 전옥린은 더 고려하지 않고 팔을 저으며 대나무가지를 밟았다가 반탄력을 빌려 허공으로 삼장이나 높이 솟아올라서 비스듬히 천패장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는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독수리처럼 기척도 없이 장원 뒤쪽의 이 장 넓이나 되는 풀밭을 가로질러 한 누방(樓房)의 지붕 위로 내려설 수 있었다.
그는 두 발이 지붕의 기왓장에 닿자 즉시 몸을 웅크리고 눈을 들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장원 안은 여전히 정적에 휩싸여 있고 마당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고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