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동행(同行)
1
천하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적무강이 존재했다. 강
호에서 그보다 더 유명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비밀에 쌓인 천
왕성주보다, 천하제일인으로 군림하는 십자성주보다 더욱 유명한 사
람이 바로 적무강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삼백 년 전의 무신에 필
적하는 유일한 무인이라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적무강의 존재가 폭풍의 핵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적무강은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
었다. 그가 있는 곳은 장성 밖 몽골의 영역이었다. 어찌 보면 몽골
의 영역을 홀로 지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제까
지 적무강은 그가 지나온 곳 어디에서도 살아 있는 몽고인을 만나지
못했다. 대신 그가 본 것은 초원 곳곳에 보이는 약탈의 흔적과 시신
들 뿐이었다.
"으음......"
적무강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이미 오래전에 약탈을 당한 듯 시신은 반쯤 썩어 있었고, 들짐승
들에 의해 훼손되어 있었다.
"천왕성이 지나가면서 약탈을 벌였던 곳인가?"
적무강은 그렇게 추측했다.
비록 오래되기는 했지만 이들의 몸에 난 상처는 분명 그와 싸운
적이 있는 낭혈문의 무인들이 검을 쓸 때 나타나는 흔적이었다. 그들
은 장성으로 들어오기 전에도 약탈과 노략을 벌였던 것이다.
처음 이 낯선 이방인들에게 한 부족이 당하자 인근의 부족들이 연
합해서 응징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광활한 초원의 기상을 오래전에
잃어버린 그들이 낭혈문의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결국 다섯 개 부
족이 그들에 의해 멸망한 후 더 이상 덤벼드는 자들은 없었다. 다른
부족들은 아예 그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멀리 피하고 말았다. 그
렇기에 적무강이 이제껏 몇 날 며칠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부족
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가 지나온 곳은 그야말로 천왕성의 흔적
이 아직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는 곳이었으니까.
"이대로 이들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천왕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
다."
적무강은 황량한 초원으로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미 북방에는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뼈가
시릴 정도의 한기가 스며 있었다.
비록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적무강은 피풍의를 목까지 올리며
말위에 올라탔다.
"가자."
그는 초원으로 거칠게 말을 몰았다.
북방의 겨울은 매서웠다. 더구나 장성 밖에서 느끼는 추위는 상상
을 초월할 정도였다. 이제 겨우 초겨울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칼
날 같은 바람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거기에 폭설이 내리면서 엄청난
눈보라가 흩날렸다.
적무강이 익힌 화륜심결은 그야말로 극양의 심법으로 따로 운용하
지 않아도 스스로 열기를 만들어 내며 외부에서 들어오는 이질적인
기운을 차단했다. 덕분에 적무강은 추위를 느끼지 못했다. 그런 그와
달리 그가 타고 있는 말은 이제껏 쉬지 않고 달렸기에 극심한 추위
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적무강은 말 때문에 쉴 곳을 찾아야 했다. 그는 말의 목을 쓰다듬
으며 말했다.
"조금만 더 참거라. 적당한 곳이 있으면 쉬어 갈 테니."
푸르르!
말이 거친 숨을 토해 냈다.
한참 동안 쉴 만한 곳을 찾던 그의 눈에 커다란 바위가 눈에 들어
왔다. 몇 개의 거대한 바위가 포개져 있었는데 전면을 제외하고 삼
면이 막혀 있어 하루 정도 쉬어 가기에 딱 적당한 곳이었다. 적무강
은 그곳으로 말을 달렸다.
도착해서 살펴보니 생각보다 더욱 아늑했다. 바위가 교묘하게 막
혀 있어 정면으로 바람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적무강은 말을 한쪽에 묶어 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돌
아왔을 때 그의 품에는 토끼 한 마리와 나뭇가지가 한 아름 안겨 있
었다. 비록 눈 때문에 젖어 있었지만 그 정도는 그에게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다. 삼매진화를 가볍게 운용해 나뭇가지에 주입하자 순식
간에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물기가 증발되었다. 그 후에야 적무강은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타닥타닥!
나뭇가지 타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이내 따뜻한 온기가 퍼
져 나갔다.
푸르르!
말도 기분이 좋은지 투레질을 하며 바닥을 긁었다.
"눈이 멈출 때까지 잠시 이곳에서 쉬자. 그리고 가까운 마을에 들
어가면 좋은 건초를 먹여 주마."
적무강은 수통을 꺼내 말에게 먹인 후 자리에 앉아 잡아 온 토끼를
손질했다. 그는 소도로 토끼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끄집어냈다.
아깝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내장을 손질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그
는 내장을 밖에다 버리고 남은 고기를 가느다란 나뭇가지에 꽂아 모
닥불 위에 올려놨다.
치지직!
시간이 지나고 고기가 익어 가면서 노릇하게 색깔이 변했다. 동시
에 고기에서 육즙이 빠져나와 불 위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바위틈에서는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고기가 어느 정도
익었다 싶은 순간, 적무강은 보따리에서 미리 준비해 온 소금을 꺼내
고기에 골고루 뿌렸다.
그의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이제까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험로를 걸어왔지만 따뜻한 불과
먹음직스런 음식을 눈앞에 두니 마음이 푸근해졌다. 중원에 있을 때
라면 입에 대지도 않을 음식이었지만, 처해진 상황이 좋지 못하니
이마저도 진수성찬이었다.
"모든 일이 사람 마음에 달린 것인가?"
적무강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기를 향해 손을 뻗어 갔다. 그러나
그는 곧 손을 멈추고 바깥을 바라보아야 했다.
다그닥! 다그닥!
미약하지만 분명 말발굽 소리였다. 누군가 눈보라를 피해 적무강
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거 장난이 아니군. 휴우~!"
말발굽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말과 함께
곧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와 어깨에 하얀 눈이 쌓인 남자, 창백하면
서도 유쾌한 듯한 이상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남자였다. 삼
십대 같기도 하고 사십대 같기도 한 묘한 인상을 지닌 남자, 이토록
이질적인 모습이 잘 어울리는 남자도 드물 것이다.
그가 적무강을 보며 말했다.
"어이쿠! 이거 먼저 손님이 와 계셨군요.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어지간하면 그냥 지나가겠으나 오늘은 눈발이 장난이 아니군요."
그의 말에 적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하루 묵어가는 처지요. 들어오시구려."
"아~! 감사합니다. 나는 어떻게 견디겠는데 말이 더 이상 추위를
견디지 못하더군요. 말이 동사하면 걸어서 갈 수밖에 없어서 염치 불
구하고 들어왔습니다."
남자가 말을 안으로 들여보내면서 말했다.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
였다. 그러자 남자가 자신의 말을 적무강의 말 옆에 세우고 나서 모
닥불 앞에 앉았다.
그가 말했다.
"이렇게 같이 유숙을 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한검우라고 합니다. 지금 일이 있어 급히 청해로 가고 있습니다."
"난 적무강입니다. 나 역시 청해로 가고 있습니다."
"오~! 그렇습니까? 이거 뜻밖이군요. 목적지가 같다니."
한검우가 활짝 웃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아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적무강은 그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고기가 있군요, 하하하!"
한검우가 모닥불 위에 놓인 토끼 고기를 보며 눈을 빛냈다. 적무
강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말했다.
"같이 먹읍시다."
"하하하! 좋습니다, 호탕하시구려. 그럼 내가 보답으로 이것을..."
한검우가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봇짐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거 아껴 먹으려고 꽁꽁 숨겨 둔 건데 같이 마십시다. 마침 두
병이니까 형장과 내가 한 병씩 마시면 좋겠구려."
"고맙소. 마침 한잔이 절실했는데."
"하하하! 이런 게 상부상조 아니겠소!"
한검우가 적무강에게 술병을 건네줬다. 뚜껑을 열고 향기를 맡아
보니 독하디독한 화주였다. 그러나 날씨가 추울 때 이만큼 좋은 게
없는지라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화주 병을 입에 물고 토끼 다리를 하나씩 뜯었다. 토끼
고기에서는 기름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제법 간이 잘 배어 있었기에
무척이나 맛있었다. 더구나 한 모금씩 들이켜는 화주는 뱃속을 화끈
하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따뜻하고 배가 부르니 마음이 편해졌다.
적무강은 바위에 등을 기댄 채 밖에 흩날리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화주를 들이켰다. 한검우 역시 바위벽에 기댄 채 화주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크~! 좋구나. 배도 든든하고 술까지 마시니, 이보다 좋을 수 있
을까? 그런데 적 형은 무슨 일로 청해를 가시는 거요? 홀로 가기에
는 무척 고된 길인데."
"일이 있어 가오. 그러는 한 형은 왜 청해로 가는 거요? 알다시피
이 길은 일반인들은 다니지 않는 길인데."
"하하하! 난 청해가 고향이라오. 이곳에는 일 때문에 나왔었고 단
지 시기가 안 맞아 눈보라를 만난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내 뜻대
로 되고 있다오."
"후후!"
적무강은 웃음을 지었다. 한검우도 그와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속
에 있는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서로에게 적
의가 없음을 확인하고 즐길 뿐이었다.
적무강은 한검우의 허리에 달린 검집을 바라봤다.
볼품없는 검집과 손잡이. 누가 본다면 불쏘시개를 차고 있는 줄로
착각할 만큼 형편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적무강은 그렇게 생각하
지 않았다.
거침없어 보이는 호남형의 남자에다 무공을 익힌 흔적마저 보이지
않았지만 적무강은 그가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굉장히
강한. 뚜렷한 근거는 없어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이런 척
박한 땅에 일이 있어 왔다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지금 이 순
간만큼은 화주를 즐기고 싶었다. 비록 남자가 적이라 할지라도 말이
다. 그만큼 한검우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
'어디선가 한번 만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만의 착각인가?'
적무강은 잠시 그렇게 생각했으나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결
국 그는 다시 화주를 들이켰다.
눈보라가 그친 것은 반나절이 지난 후였다. 초원은 온통 은빛 세상
이었다. 눈은 허리만큼 쌓여 맨몸으로도 빠져나오기가 힘이 들 정도
였다.
"이 상태라면 말을 타고 가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 같구려. 다행
히도 이곳에서 두 시진 거리에 내가 아는 몽고족이 있소. 초원을 떠
돌아다니는 그들도 이 시기만 되면 모두 돌아온다오. 그러니까 거기
까지만 간다면 하루 쉬어 갈 수 있을 것이오."
"일단은 그 마을로 들어가야겠구려."
"좋소! 그럼 마을로 갑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바위 틈새를 떠났다.
한검우는 유쾌한 남자였다. 그는 장성 밖 사람들의 생활상이라든
지 각종 풍물에 매우 해박했다. 적무강 역시 어렸을 때부터 세상을
떠돌아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자부했지만 한검우에 비하면 모자람이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 모두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는 거내 놓지 않았지
만 묘하게 마음이 잘 맞았다. 때문에 그들은 청해성까지 같이 가기로
했다.
적무강은 앞서 말을 달리는 한검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말은 바람에 흩날려 들리지 않았다.
2
천왕성주의 자리에 오르면 두 가지의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다.
그 하나는 마도육문을 추스르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바로 천왕성주
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무공을 익히는 일이다.
둘 중 어느 것 한 가지도 쉬운 것은 없다. 삼백 년 동안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던 마도육문을 완벽하게 자신의 통제 하에 두는 일이
란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그가 성주직에 막 올랐을 때는 마도육문
이 오히려 천왕성이라는 틀에 아직도 묶여 있다는 것이 불가사의 할
정도였다. 그런 마도육문을 완벽하게 자신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하여
그가 사용한 방법은 바로 압도적인 무력에 의한 철저한 공포정치였
다. 반항이나 항명은 용납하지 않았다. 대드는 자기 있다면 철저하게
짓밟았다. 감히 대항할 생각 따위는 하지 못하게 말이다. 그렇게 그
는 지난 삼백 년의 세월 동안 분열돼 있던 천왕성을 하나로 묶었다.
그것은 역대 천왕성주 그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천왕성을 일통한 천왕성주가 심혈을 기울인 일은 바로 무
공이었다. 역대 천왕성주에게 내려오는 무공을 모두 익히고, 그도 모
자라 천하의 각종 무공을 수없이 섭렵했다. 때문에 그의 무공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무공은 무섭게 증진되고 있었으니까.
천왕성주 사도경, 그것이 정식으로 그를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사도경은 대전의 태사의에 앉아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자
들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극존칭의
예를 행하고 있는 자들. 그들은 결코 이렇게 함부로 자신을 숙이는
자들이 아니었으나 천하에서 오직 한명, 사도경 앞에서는 자신의 모
든 것을 숙여 보임으로써 존경의 뜻을 표했다.
사도경이 그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흘흘! 사천에서는 십자성에 밀리고, 산서성와 장성 밖에서는 적무
강이란 자에게 밀리고..... 재미있군! 누가 이 상황을 해명해 보겠
는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목소리,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사람의 심장 밑바닥에 가라앉은 불안감을 자극하는 그 무언가가 있
었다.
주르륵!
순간 그들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는 차라리 먼저 죽은 좌천기가 부럽기까지 했다. 죽은 사
람은 공포를 느낄 수 없으니까. 지금 그들은 극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들 역시 자신의 무공으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었지만 눈
앞의 남자는 결코 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결코 그들이 대항할 수
없는 인물, 영혼까지 복종하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런 남자가 추
궁을 하자 그들은 전신이 위축되는 느낌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기회를......"
그들이 더욱 고개를 숙였다.
"내가 원한 것은 십자성의 말살이었도다. 하지만 오히려 역풍을 맞
았구나. 낭혈문의 바보들은 약탈과 폭력을 자행하다 중원의 공분을
사고, 나머지 문파들은 여기 깨지고 저기 깨지고, 이것은 정말 마
도육문의 일원이라고 보기 어려운 수치로다. 너희들은 어찌 생각하
느냐?"
"저희들이 벌인 일, 저희들이 수습을 하겠습니다."
"어떻게?"
"우선 겁도 없이 청해성으로 오고 있다는 적무강이란 자를 처단하
겠습니다. 그런 후에 힘을 모아 다시 사천성으로 전진하겠습니다."
"흘흘~! 그는 나이는 어리나 이미 절대자의 반열에 오른 자이로다.
어쩌면 너희 개개인보다 강할지도 모르지. 그것은 이미 그의 손에
죽은 낭혈문주 좌천기가 증명해 주고 있다."
"저희는 좌천기와 다릅니다. 우리의 힘이라면 그가 제아무리 절대
자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충분히 숨통을 끊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성주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실력이나 그래도
저희들도 일문을 이끌어 가는 종사들입니다."
비록 사도경에게 극존칭의 예를 행하고 있었으나 그들의 목소리에
는 숨길수 없는 자부심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들은 바로 마도육문 중 패천문과 밀종문의 종사들이었다. 가운
데 있는 칠 척 거구에 패도적인 기운이 무린 풍기는 남자가 바로 당
대 패천문의 문주인 북리종우였고, 오른쪽으로 혈의 가사를 입고 있
는 노승이 바로 밀종문의 문주인 서우노사(西雨老師)였다.
천하의 마도육문 중 각기 일문을 맡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감히 사
도경에게 불경의 눈빛을 보내지 못했다. 사도경이 분노하게 되면 자
파가 어찌 될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도경이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어느새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흘흘~! 너희들의 뜻은 알겠다. 그러나 그에게 일반 무인은 의미
가 없다. 그를 막으려면 그 못지않은 고수가 나서야 한다. 그 점은
어찌 생각하느냐?"
그의 입가에는 옅은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패천문주 북리종우는 침음성을 속으로 삼켰다. 숙여진 고개 사이
로 그의 눈이 빛났다.
'지금 성주께서는 우리에게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직접 도마
를 처리하라고.'
사실 패천문과 말정문의 정예를 동원한다면 굳이 그들이 나서지
않더라도 적무강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도경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사도경이 이리 말하는 것은 자신들을 시험하
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속셈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
만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자신을 비롯한 서우노사가 적무강을 죽인다 해도 그들에게 돌아오
는 것은 없다. 명예도 없고, 그에 따른 어떤 부가적인 소득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마도육문의 문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
이 적무강을 죽이지 못한다면 그 실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목숨을 잃는 것은 물론이요, 죽어서도 명예가 땅으로 떨어질 것이다.
게다가 그들의 휘하 세력은 고스란히 천왕성주에게 흡수될 것이다.
어느 쪽이든 천왕성주로서는 잃을 게 하나 없다. 아니, 오히려 세를
불릴 절호의 기회이다. 그러나 그와 서우노사는 전부를 잃느냐, 아니
면 현 상태를 유지하느냐가 달린 불리한 싸움이었다. 그런데도 거절
할 수 없다는 것이 북리종우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원래대로라면 혈화문의 문주인 만화성모도 이 자리에 같이 나와야
했으나 그녀는 참석하지 않았다. 아마 마도육문 중 다른 문파들 모두
사도경에 의해 서 멸문을 당하더라도 혈화문만큼은 온전히 그 전력을
유지할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북리종우는 잘 알고 있었
다.
'성주에게 꼬리나 치는 화냥년.'
만화성모가 사도경의 정부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 때
문에 이번 중원 침공에서 가장 무능력한 모습을 보인 혈화문이 무사
할 수 있었다는 것도 말이다.
지금 이렇게 북리종우와 서우노사가 수모를 당하는 순간에도 그녀
는 사도경의 침상에서 진한 분으로 단장을 하고 있으리라.
북리종우와 서우노사는 눈빛을 교환했다. 서로의 눈빛에서 의중을
읽은 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합의를 본 것이다.
"도마를 저희 손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직접 십자성의 공략
에 나서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주. 이번 일은 모두 저희 손으로 마무리를 하겠습
니다."
그들의 말에 사도경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좋다. 이번 일은 너희들의 손에 맡기겠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노
라. 흘흘!"
"곧 좋은 결과를 가져오겠습니다."
북리종우와 서우노사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조용히 자리에서 사
라졌다.
"안일해서는 도태밖에 남는 게 없도다. 이곳은 적자생존의 세계,
도태되고 싶지 않으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수밖에......"
사도경이 술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그는 약자를 인정하지 않았다. 적이라도 강자라면 그의 존재를 인
정하나. 단지 강하다는 이유만으로 인정을 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적무강은 강자였다. 그것도 대단히 강한. 그 정도만으
로도 그를 존종해 줄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출현은 다
른 의미로 그에게 호재였다.
"이제 시작할 때도 됐지."
촌로만 같은 그의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음성이었다.
"야하하!"
"꺄르르~!"
아이들이 초원을 뛰놀고 있었다. 아이들은 순백색으로 변한 설원
이 춥지도 않은지 연신 뛰어놀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적무강과 한검우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
이 있는 곳은 몽골의 한 부족이었다. 보통 유목 생활을 하는 몽고족
들은 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풀을 찾아 넓은 초원을 떠돌아
다니는데, 지금 적무강과 한검우가 신세를 지고 있는 몽고족 역시 마
찬가지였다. 지금 그들이 머물고 있는 무리의 수장은 자무카라는 남
자였다. 그는 현재 소수 부족으로 지리멸렬한 몽고족 중에서도 오백
명 이상의 식구를 거느린 힘 있는 수장이었다. 사실 북원이 멸망한
이후 오백 명 이상의 대가족을 거느린 부족이 거의 없는 실정에서
자무카의 힘은 손에 꼽힐 정도였다.
보통 몽고족은 한족에 매우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이
하게도 자무카는 그런 기색 없이 그들을 맞아 줬다. 물론 자무카와
한검우가 서로 알지 않았다면 꿈도 못 꿀 대접이었다. 한검우가 적무
강을 자신의 친구라고 소개하자 그는 놀라울 만치 살갑게 적무강을
맞아 주었다. 친구의 친구는 자신의 친구라는 그들의 가치관 때문이
었다. 덕분에 적무강은 편하게 몸을 쉴 수 있었다.
"아이들이 무척 건강해 보이는구려."
"비록 한족처럼 풍요롭지는 않으나 이곳에는 생명력이 깃들어 있
소. 그래서 난 초원을 좋아한다오. 자무카를 만난 것도 그 때문이라
오. 그와는 어려서 초원에서 만났고, 그 때문에 친구가 됐소."
한검우가 말 젖으로 만든 마유주를 마시며 진짜 친구에게 털어놓
듯이 말했다. 적무강은 나무잔에 담긴 마유주를 마시며 그의 이야기
에 귀를 기울였다.
"친구라......"
적무강 자신에게도 친구가 있었다. 아주 오래된 진짜 친구가......
'잘 지내고 있겠지? 오늘따라 말 많은 그 녀석이 보고 싶군.'
철홍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림에서의 만남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
지는 알 수 없었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의 넉살이라면 어떤 위기가
닥쳐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보고 싶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은 어쩐 일로 지나가는 것이오?"
"동생이 죽었기 때문이라오."
한검우의 눈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동생?"
"후후~! 내겐 아직 철들지 않은 동생이 있는데 그가 이번에 중원
에 갔다가 횡액을 당했다오."
"으음!"
한검우의 눈은 매우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옆에 있는 나
뭇가지로 모닥불을 헤집으며 말을 이었다.
"비록 많이 모자라고 내 속을 부단히도 썩였던 놈이지만 그래도
내 동생이오. 그래서 그 진상을 알기 위해 중원에 갔다 오는 길이라
오."
한기가 풀풀 날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적무강은 마유주를 들이
켰다. 텁텁한 신 내가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동생을 죽인 자를 찾으면 어떻게 할 것이오?"
"당연히......."
타다닥!
불씨가 바람에 흩날렸다. 허공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재를
보며 한검우가 말을 이었다.
"......죽일 것이오. 생명을 죽인 대가는 오직 생명으로만 치를 수
있는 것이오."
"잘되었으면 좋겠구려."
"잘될 것이오."
"훗!"
적무강은 미소를 지었다.
묘한 분위기가 계속될 무렵 자무카가 다가왔다. 그는이제 삼십대
초반의 남자로 광대뼈가 유독 튀어나와 있었다. 특히나 기골이 장대
한 모습이 그를 더욱 강해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손에는 넓적한 무
쇠 솥이 들려 있었다. 그는 고리가 달린 무쇠 솥을 모닥불 위에 매달
았다.
"하하하! 오늘은 귀한 손님도 왔고 하니 특식을 내왔네."
자무카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한검우가 고개를 끄덕였
다. 무쇠 솥 안에는 살점이 가득 붙어 있는 하얀 말뼈가 들어 있었
다. 초원을 떠돌아다니기에 국물 요리를 많이 먹지 못하는 몽고족에
게 이런 국물 요리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특별했다. 특색을 내
왔다는 자무카의 말은 결코 거짓이 아닌 것이다.
"어서 앉게나. 오랜만인데 이런 심부름이나 시켜서 정말 미안하
네."
"하하핫! 친구 좋다는 게 무언가? 별말을 다 하는군. 그보다 용케
우리가 머문 곳에 찾아왔군. 난 또 자네가 길을 잃어버린 줄 알았지
뭔가."
"후후~! 물론이지. 친구의 일에는 늘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한검우와 자무카와 정답게 말을 주고받았다. 적무강은 그런 두 사
람을 바라보며 마유주를 들이켰다.
한동안 이야기를 하던 자무카는 무쇠 솥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
나자 그릇에 국물을 떠서 적무강과 한검우에게 나눠 주었다. 뽀얀 국
물 안에는 말의 고기로 보이는 건더기기 둥둥 떠 있었다.
"많이들 드시게나. 워낙 척박한 곳이라서 이것밖에 내놓을 게 없
다네."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지."
"잘 먹겠소."
자무카의 말에 한검우와 적무강은 그릇을 자신들의 앞에 놓았다.
그들은 마유주를 들이켜면서 같이 국물을 마셨다. 차가운 바람이 불
어왔지만 그다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용케 당신의 부족은 무사했구려."
적무강이 뜬금없이 말했지만 자무카는 그 속에 숨겨진 뜻을 즉각
알아차렸다.
"후후~! 운이 좋았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갔을 때 우리는 이곳에
서 백여 리 이상 떨어진 곳에 있었다네. 만약 우리가 이삼 일만 일찍
이곳에 도착했더라면 다른 부족들과 마찬가지로 큰 화를 면치 못했
을 거라네. 그야말로 신이 도운 것이지."
얼마 전에 이곳 초원은 천왕성의 무인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그들
의 행로에 있던 부족들이 모두 전멸을 당했다. 재물은 모조리 약탈당
했고, 여인들은 겁탈을 당했으며 남자와 아이는 하나도 남김없이 몰
살을 당했다. 천인공노할 이 사건에 자무카도 분노를 했다. 하나 그
보다는 자신의 부족이 안전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를 했다. 자신
에게는 오백에 이르는 식구들이 딸려 있었기에.
"나 같은 경우야 이 친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여정을 늦췄네. 그
래서 횡액을 면할 수 있었지. 다 이 친구 덕분이네. 하하하!"
자무카가 한검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순박한 웃음을 지었다. 그 순
간 한검우의 눈가에 묘한 기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자무카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기에 전혀 그런 낌새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적무강
은 그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무언가 숨기는 것이 있는가?'
자무카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와 한검우 사이에는 묘한 기
류가 맴돌았다. 그들은 오늘 만났고, 오늘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눴
다. 얼핏 보기에 그들은 매우 친한 사이처럼 보였지만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그것은 적무강도 알고 한검우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
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숨기고 서로를 상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얼굴에 가면을 한 겹 쓰고 서로를 대하는 것과 같았
다. 하지만 그들 중 먼저 자신의 얼굴에 쓴 가면을 벗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후루룩!
적무강은 국그릇을 들어 국물을 들이켰다. 뜨거운 김이 일어나며
시야를 가렸다. 맞은편에서 마찬가지로 국물을 들이켜는 한검우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적무강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하! 한 잔들 하세나. 역시 초원에서는 마유주가 최고라네. 든
든히 마시게."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 채지 못한 자무카가 나무잔을 들
며 외쳤다.
적무강은 바위에 기대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다른 사람들은 파오
에 들어갔기에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밤이 되자
바람은 더욱 매서워졌으나 적무강에게는 하등의 영향을 줄 수 없었
다. 그렇기에 그는 고즈넉하게 밤하늘을 찬연하게 수놓고 있는 별무
리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북방의 차가운 공기에 별무리가 더욱 밝게 보였다. 적무강은 아예
도집을 머리에 베고 바닥에 누웠다.
두 개의 별이 보였다. 다른 별들을 압도하며 유난히도 밝은 빛을
뿌리는 두 개의 별. 별들의 주위에는 먹장구름이 끼어 있어 서로를
침범하고 있었다.
"견오대사께서 어찌하고 계실지 궁금하군. 가뜩이나 소림에 속세
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하시는 분인데."
그래도 소림에 있을 때는 마음이 편안했다. 비록 각오는 했지만 수
많은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빼앗고 나니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어쩌
면 평생을 이토록 그들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모닥불 때문에 붉게 보이는 자신의 손에는 아직도 혈향이 가득한
것 같았다. 문득 밀려오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 그러나 적무강은 마
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면 그 누구도 믿
을 수 없고, 그 어떤 일도 소신있게 추진할 수 없다. 때문에 흔들리
지 않는 굳은 심지가 필요했다.
"혼자 밖에서 뭐 해요, 아저씨?"
그때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제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두명이 또랑또랑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적무강은 그 아이들이 방금 전 초원을 뛰어놀던 아이들이라는 것
을 알아차렸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낯선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이 가
득 담겨 있었다.
"너희들은 왜 안 자고 나와 있느냐?"
"그냥요. 아저씨는 왜 밖에서 누워 있어요? 춥지 않나요?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추운데."
"난 이런 일에 제법 익숙하단다. 앉겠느냐?"
"네!"
아이들은 사양하지 않고 적무강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은 전
혀 경계심이 없는 듯 보였다.
"너희들은 내가 무섭지도 않느냐?"
"예, 왜요?"
아이들이 오히려 반문했다. 그에 물음을 던진 적무강이 오히려 머
쓱해졌다.
자신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기에 쉽게 사람을 믿지 못했다.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일단은 의심을 하고, 그 사람에 대한 것을 파악하
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받아들이
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순수함일지도 몰
랐다.
적무강이 대답이 없자 이제는 오히려 아이들이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는 어디로 가는 거예요?"
"청해성으로 간단다."
"청해성이요? 왜 이리로 돌아가는데요? 여기로 가면 너무 멀잖아
요?"
"그래. 그래도 난 이리로 가야 한다."
"왜요?"
아이들의 질문에 적무강은 난감함을 느꼈다. 자신이 천왕성을 상대
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 줘야 할지 암담했기 때
문이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이 길이 내가 찾는 사람들이 지났던 길이기 때문이다. 난 그들을
찾아가야 하는데 그들이 있는 곳을 모른다. 때문에 그들이 지나간 길
을 거슬러 올라가는 수밖에 없지."
"그래요?"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게 보이던지 적
무강이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너희들은 이름이 뭐냐?"
"전 챠파고, 이 애는 우룬이에요. 저하고는 쌍둥이에요."
"그래, 너희 둘은 꼭 닮았더구나."
"헤헤! 모두들 그렇게 말해요."
챠파가 머리를 긁적이며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옆에서 우룬이 잠
시 인상을 쓰면서 생각하더니 말을 꺼냈다.
"그렇게 힘들게 사람을 꼭 찾아야 하나요?"
"그래."
"왜요? 저도 여기 초원에서 살지만 여기는 엄청 커요. 그래서 수십
밤을 걸어도 끝이 안 보여요. 그런데 여기를 지나 어떻게 청해성을
가요? 그리고 그 넓은 곳에서 사람을 어떻게 찾아요?"
"힘든 일이지. 하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럼 다른 사람들한테 도와 달라고 하세요. 그렇게 힘든 일을 뭣
하러 혼자 해요?"
"내가할 일은 누군가 도와줄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내가 반드
시 해야 한다. 그게 남자다."
적무강의 말에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그러자 적
무강이 그들의 머리를 쓸어 만지며 말했다.
"해야 하는 일이 힘든 일이라면 오히려 남에게 미룰 수 없다. 자
신의 일이 힘들다고 남에게 미루는 자는 대장부라고 볼 수 없다."
"아저씨는 대장부인가요?"
"그렇게 되려고 노력 중이다."
"와아~!"
챠파와 우룬의 눈에 감탄과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까지 그들
은 초원을 유랑했지만 그들이 만난 그 누구도 이렇듯 명확하게 남자
란 존재에 대해 정의를 내린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말했다.
"전 남자가 될래요."
"저도요. 저도 대장부가 될래요."
적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들은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네!"
"그렇게 될 거예요."
아이들이 앙증맞게 두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을 보며 적무강이 고
개를 끄덕였다.
적무강 자신은 몰랐지만 이날의 만남이 챠파와 우룬의 운명을 크게
바꿔 놓았다. 훗날 챠파와 우룬은 초원을 대표하는 남자들이 된다.
그러나 적무강이나 아이들 모두에게는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었다.
한검우는 자신의 파오 안에서 양털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며 중
얼거렸다.
'그래! 해야 할 일을 미루면 남자가 아니지.'
그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불 속에서 맴돌았다.
다음 날, 적무강은 한검우와 함께 자무카의 부족을 떠났다. 챠파와
우룬의 열렬한 환송 속에 그들은 청해성으로 향했다. 사실 한검우의
안내가 아니더라도 청해성으로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천왕
성이 지나갔던 곳에는 반드시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보름 이상을 말을 달렸고, 마침내 감숙성 무위(武威)에 들
어설 수 있었다.
한검우가 무위의 시장통으로 말을 몰며 말했다.
"이곳에서 청해성까지는 불과 삼 일 거리요. 비록 길이 험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관도가 닦여 있으니 크게 어려움은 없을 거요. 일단 오
늘은 늦었으니 객잔에서 하루 유숙한 후 내일 출발합시다. 부지런히
말을 달리면 이틀 만에도 들어갈 수 있을 거요."
"그럽시다."
적무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천왕성의 무인들을 만나지 못한 것은 적무강으로서도 뜻밖
의 일이었다. 그는 더욱 악착같이 천왕성의 무리들이 자신에게 덤벼
들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천왕성의 무인들을 더 이상 볼
수는 없었다. 어저면 그들이 자신을 피해 남하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어딘가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
을지도 몰랐다. 적무강은 후자이길 바랐다. 그래서 그들과 자신이 정
면으로 격돌하길 원했다.
"이곳은 내가 감숙성에 올 때마다 들르는 객잔이오. 비록 이름처럼
거창한 곳은 아니지만 소홍주는 기가 막힌 곳이오. 적 형도 이곳의
소홍주를 마신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
한검우가 안내한 곳은 천하객잔이라는 현판을 내건 곳이었다. 이
름처럼 거창하거나 규모가 큰 건물이 아니라 허름한 삼층짜리 건물
이었다. 더구나 목조로 이루어져 있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
다.
그러나 적무강은 실망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가 이제까지 봐 온
한검우라는 남자는 결코 허언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기대하겠소."
"기대해도 좋을 것이오."
한검우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적무강은 그의 뒤를 따
라 들어가며 객잔 안을 살폈다.
객잔의 일층은 이미 사람들로 발 디딜 곳 하나 없이 꽉 차 있었다.
"하하! 이거 오랜만에 왔는데 사천성에서 온 상인들이 미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구려. 아무래도 조금 기다려야 되겠소. 일단 방은 두
개 잡아 놨소. 기다리기 뭐하다면 씻고 내려오시구려."
"아니오, 괜찮소."
"그렇다면 난 밖에 좀 나갔다 오겠소. 아무래도 오랜만에 왔으니
만큼 인사할 사람들이 좀 있으니."
"그러시오."
"그럼 잠시 나갔다 오겠소."
한검우가 객잔 밖으로 나갔다.
적무강은 주인의 계산대 옆에 서서 자리가 나오길 기다렸다. 올라
가서 씻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목에 낀 먼지를 술 한 잔으로 씻
어 내고 싶었다.
그때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비대한 객잔 주인이 적무강에게 조
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손님, 괜찮으시다면 저쪽 상인 분들하고 합석하시겠습니까? 그쪽
분들은 괜찮다고 하시던데......"
적무강의 시선이 객잔 주인이 가리킨 상인들에게 향했다. 그곳에
는 한 탁자에 조촐하게 두 명만이 앉아 있었다.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소홍주와 오리 구이 한 마리를 가져다주시오."
"알겠습니다."
주인의 대답을 뒤로 하고 적무강은 탁자에 다가갔다.
"고맙소. 마침 자리가 절실하던 참이었는데."
"별말씀을. 사해가 동도라 하지 않았소. 마침 우리는 자리가 남으
니 괘념치 마시고 앉으시오."
수염이 덥수룩한 상인이 적무강에게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분
명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적무강은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자신이 감숙성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기에 부질없는 생
각이라 여기며 자리에 앉았다.
"고맙소."
"음식 나올 때까지 기다리기 뭐하면 우리 거라도 좀 드시겠소? 보
다시피 우리가 좀 많이 시켜서 말이오."
수염이 덥수룩한 상인이 음식이 가득 쌓인 탁자를 가리키며 친근
하게 말했다. 그러나 적무강은 고개를 저었다.
"음식이 곧 나올 것이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드시구려."
그의 말에 상인이 자신의 술잔을 들었다. 그러나 균형을 잘못 잡
았는지 그만 술잔을 엎지러 탁자 위에 술을 쏟고 말았다.
"아이쿠, 이런 실수를......"
상인이 머쓱한지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적무강의 눈은 그의 얼굴
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상인의 손에 멈춰 있었다.
스스슥!
상인의 손이 쏟아진 술 위에서 움직였다.
'오랜만입니다, 적 대협. 저 만형통입니다."
분명 그의 손은 그런 글자를 만들고 있었다. 적무강의 눈이 반짝
였다. 그는 전음으로 대답했다.
<오랜만이구려. 당신이 이곳에 있다니 뜻밖이오.>
'하하! 저야말로 뜻밖입니다. 설마 적 대협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
야.'
만형통의 손이 은밀하게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적무강이 옆에 상
인을 바라보니 그가 미약하게 아는 척을 했다. 그는 만형통의 심복인
대오였다.
<사천성으로 갔다고 들었는데......>
'얼마 전까지 사천성에 있었지요. 그곳에서 십자성과 천왕성이 박
터지게 싸웠지 않습니까? 하지만 십자성의 무상인 사무독이 나선 후
모든 것이 깨끗하게 정리되었습니다. 더 이상 제가 그곳에 있을 이유
가 없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천왕성의 흔적을 따라오다 보니 이곳까
지 오게 되었습니다. 적 대협을 만난 것은 저로서도 뜻밖의 일입니
다. 설마 이곳에서 대협을 뵙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
다.'
<이곳까지 천왕성의 흔적이 이어졌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 은밀하게 애들을 풀어 천왕성의 소재를 수소문
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잘되었구려. 사천성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소?>
'휴우~! 말도 마십시오.'
만형통이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엔 백중지세였다. 그러나 사무독이 전장에 참여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그는 천왕성의 거점인 공무장을 친 후 마치 폭풍처럼 움직
였다. 그는 천왕성의 잔당이 있는 곳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
다. 폭풍 같은 그의 행보에 천왕성의 거점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
는 천왕성이 어떤 대책을 세우기도 전에 모든 것을 끝냈다. 그것은
무공 이전의 심계의 문제였다. 그의 잔혹한 심계는 상대의 저항을 결
코 용납하지 않았다.
'십자성의 무상 사무독은 무서운 자입니다. 그가 왜 십자성주를 대
신해 무력을 행사하는 자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아마 적 대협을
제외하고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중원에서 손가락에 꼽기도 힘들
겁니다.'
'사무독이라.....'
적무강은 그의 이름을 단단히 기억해 두었다.
'오늘 머무시는 곳으로 대오가 이제까지 정리한 중원의 소식을 가
져다 드릴 겁니다.'
<고맙소.>
'고맙긴요. 다 이득을 좇아 하는 일인데..... 대협 덕분에 사천성
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 추세로 나간다면 변방이 아닌
중원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잘되었군.>
적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연이나 특별한 인연 때문에 맺어진 사이가 아니었다. 어차피 서
로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사이다. 서로의 필요성이 없어질 때까지
는 배신이란 단어는 없을 것이다. 적무강은 오히려 그런 만남이 오래
간다고 생각했다.
그때 점소이가 적무강이 주문했던 소홍주와 오리 구이를 내왔다.
때문에 잠시 그들의 대화가 끊겼다.
쪼로록!
적무강은 자신의 잔에 소홍주를 따랐다. 진한 향취가 느껴지는 것
이 냄새만으로 취할 듯했다.
"확실히 명주군."
그는 소홍주를 마시며 중얼거렸다.
오리 구이를 뜯고 소홍주를 마시는 적무강의 모습은 누가 봐도 식
탐에 열을 올리는 모습이었다. 또한 만형통의 모습도 그와는 전혀 상
관없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대화는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
었다.
<부탁할 것이 하나 있소.>
'말씀해 보십시오.'
<나와 같이 이곳에 들어온 한검우라는 남자, 그에 대한 뒷조사 좀
해 주시오. 조심해야 할 것이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고맙소.>
'훗! 별말씀을......'
만형통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꺼억~! 잘 먹었다. 이젠 올라가서 쉬어야겠다."
"저도 배가 불러서 도저히 못 먹겠습니다."
만형통과 대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적무강에게 말했다.
"그럼 형장, 식사 잘 하시구려."
"고맙소!"
그들이 나간 후에도 적무강은 자리를 뜨지 않고 오리 고기와 소홍
주를 즐겼다.
그의 눈에 한검우가 다시 객잔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던 사천성에서의 십자성과 천왕성의 격돌
은 결국 십자성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천왕성은 그들이 점령했던
십자성의 다섯 개 분타에서 막대한 희생자를 남긴 채 물러났다. 그들
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사무독이 지휘하는 십자성 정예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천왕성의 무인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사무독이 보여 준 광기와 잔
혹성은 같은 십자성의 무인들마저 전율케 만들었다. 그는 용서라는
단어를 아예 모르는 사람처럼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다. 불과 보름
이라는 시간 동안 그의 손에 죽은 천왕성 무인들의 수는 헤아리기 어
려울 정도였다.
사무독은 사천 총타에 머물렀다. 이제 실질적으로 그가 할 일은 거
의 없는 셈이었다. 천왕성의 수뇌들은 모두 그의 손에 죽었고, 남은
것은 조무래기들뿐이었다. 때문에 그는 사천 총타에서 조용히 차를
즐겼다.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사천성에서 천왕성의 잔당을 확실하게 정리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 달이라...... 보름 안에 끝내도록."
"그것은...... 알겠습니다."
사천 총타주 구문해는 사무독의 말에 대답했다. 보름 안에 천왕성
의 무인들을 완전히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더 이상 사무독에게 무능한 자로 찍히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사무독은 찻잔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손짓을 했다. 그에 구문해
는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밖으로 물러 나왔다.
사무독은 아직 남아 있는 흑기대주 청호문에게 물었다.
"안휘성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도련의 건물이 모두 완성된 모양입니다. 본격적으로 구대문파
에서 제자들을 보내 어느 정도 구성이 완료된 것 같습니다."
"후후~! 정도련이라...... 건방진 것들!"
사무독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우리 측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는가?"
"흑기대는 언제라도 출진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있
습니다. 그리고 본성에서도 참호대를 비롯해 지원 병력의 준비가 이
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잘됐군. 이곳의 일이 모두 마무리되는 대로 안휘성으로 출발한다.
본성과 조율해 합류할 시기를 조절하도록."
"알겠습니다."
사무독은 차를 들이켜며 창밖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
했다.
"아참, 문상은 요즘 무엇을 하고 있다 하는가?"
"글쎄요. 성주의 명으로 근신을 하고 있지 않을까요?"
"성주에게 요청해서 그녀를 안휘성 쪽으로 보내 달라고 해."
"문상을 말입니까?"
"그래. 하루 이틀 안에 끝날 싸움이 아니야. 구대문파도 정도련에
총력을 기울이겠지. 그렇다면 이쪽에도 머리를 쓰는 사람이 필요해.
그런 면에선 문상이 제격이지. 힘쓰는 것은 내가 책임질 테니까 정도
련을 무너트릴 귀계나 준비하라고 해."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단기간의 싸움이라면 전력이 압도적으로 우위인 쪽이 절대 유리하
다. 그러나 장기간의 싸움으로 이어진다면 거기에는 숱한 모략과 음
모가 필요하다. 사무독은 다른 것은 몰라도 문수영의 암계는 인정하
고 있었다. 아마 그녀도 이번에 근신을 하면서 독기를 품었을 것이
다. 사무독은 독기를 가득 품은 문수영이 필요했다.
"간자를 심어 넣는 작업은?"
"이미 동천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직 심처에는 간자를 심지
못했지만 몇몇 인물은 포섭한 것 같습니다."
"흐음!"
사무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수영이 근신을 당한 상태에서도 동
천이 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문수영이 평소
에 조직 관리를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그들을 내버려 뒀어."
사무독은 차향의 여운을 즐겼다. 고요한 모습이었지만 청호문은 그
를 보는 순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단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이런 숨 막히는 존재감을 주는 인물이 천하에
몇이나 있을까?
그가 보는 사무독은 마치 벽력탄과도 같은 존재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리고 한번 터지면 주위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켜 버리는.
그는 이런 남자의 적이 되어 버린 정도련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가
아는 한 사무독의 목표가 된 자치고 아직까지 자신의 힘으로 호흡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대의 거마들도, 그리고 현재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무인도.
'이젠 정도련도 끝이다.'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밤이 되었어도 천하객잔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이곳의 소홍주는
무척 맛이 좋아 서민들이 마시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가격에도 불
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이곳을 지나는 표국이나 상
인들은 반드시 천하객잔을 지났다. 때문에 이곳은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이곳을 드나들더라도 그것은 결코 이
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한검우의 오지랖은 진가를 발휘했다.
그는 천하객잔에서도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탁
자에는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특유의 화술로 대화를 이
끌어 나갔다. 그는 항상 웃는 낯이었기에 어디에서도 빛이 났다. 그
것은 적무강과 묘한 대조를 이뤘다.
적무강은 어느 공간에 있든, 어떤 사람과 있든 결코 표가 나지 않
는 사람이었다. 천 사람이 있으면 천 사람에 묻히고, 군웅들 속에 있
으면 군우의 일부가 되는 사람이었다. 어디에서건 빛이 나는 한검우
와는 대조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적무강의 눈은 매우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술
을 마시는 그의 손바닥에는 남들 눈에는 띄지 않는 조그만 쪽지가 한
장 놓여 있었다.
쪽지에 써 있는 글은 달랑 하나였다.
무(無).
아무것도 없음이다.
다른 이들이 썼다면 웃고 넘어갈 수도 있는 글자였다. 그러나 이
쪽지를 보내 준 사람이 다름 아닌 만형통이라면 사건의 심각성은 커
진다.
만형통은 정보 상인이다. 그것도 매우 뛰어난. 적무강이 알기에 그
와 대등하거나 뛰어난 정보망을 손꼽으라면 오직 하나, 십자성의 동
천밖에 없었다. 그만큼 만형통의 이목은 영활했다. 그런 그의 촉각에
도 잡히지 않았다면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검우가 최
소한 만형통의 이목에도 감지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화학!
순간적으로 적무강의 손바닥에서 불길이 일어나며 종이가 순식간에
타서 없어졌다.
'한검우라......'
그 순간 그와 한검우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한검우가 잔을 들
어 보였다. 적무강 역시 잔을 들어 보였다.
적무강은 잔을 들이켠 후 이번에는 다른 종이를 품에서 꺼냈다. 그
곳에는 사천성에서의 십자성과 천왕성 전투의 개요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사천성에서의 십자성의 움직임까지 적혀 있었다.
'사무독......십자성의 무상.'
십여 년이라는 세월을 십자성에 있었지만 그는 사무독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십자성에 있을 당시에 워낙 관심이 없었던 이유도 있었
지만 그만큼 사무독의 모든 것이 비밀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이제 와서 사무독이 사천성에서의 일을 처리한 모습을 보자면 그
의 흉폭성이나 과단성이 단연 돋보였다. 거기에 십자성의 무상이라면
무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위험해질 수도......'
적무강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서문아는 그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가 잘못된다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서문아를
믿었다. 그리고 현재는 그녀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사......무독.'
적무강의 눈에 순간적으로 살기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합석해도 되겠소?"
그때 문득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만형통의 모습
이 보였다. 그가 넉살좋게 말했다.
"형장, 다른 곳에 자리가 없구려."
"앉으시오."
"고맙소."
만형통이 한검우를 등지고 앉았다. 이곳에는 이처럼 합석을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만형통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만형통이 자리에 앉자 적무강이 전음을 보냈다.
<무슨 일이오?>
'뜻밖의 소식이 있어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적 대협께 왔습니
다.'
만형통은 물 잔의 물을 새끼손가락에 찍어 글자를 썼다.
'십자성의 무상 사무독이 조만간 정도련을 정벌하기 위해 나선다
는군요.'
<그가......>
이미 짐작은 하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 적무
강의 눈이 더욱 무겁게 가라앉았다.
'사천성에서의 일을 마무리하는 데 보름을 잡고, 또 안휘성까지
수많은 무인들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면 또 한 달을 잡아야 할 겁니
다. 그렇게 본다면 한 달하고 보름 후 정도에는 정도련과 십자성의
격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무독이 직접 나설 것 같소?>
'그렇습니다.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이번에는 십자성의 무상과
문상이 역사상 처음으로 같이 움직일 것으로 보입니다.'
<으음!>
적무강이 침음성을 흘렸다.
문상인 문수영까지 같이 움직일 줄은 그 역시 미처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대략 오십 일의 기간이라. 촉박하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의외의 소식이 있습니다.'
<의외의 소식?>
'그렇습니다. 서 소저의 집안에 대해 아십니까?'
<무언가 알아낸 게 있소?>
적무강의 눈빛이 변했다. 서문아는 자신에 대한 것을 말해 주지 않
으려 했다. 그것은 적무강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적무강을 위
해서였다. 그 마음을 알기에 이제까지 모르는 척했는데 만형통이 먼
저 말을 꺼낸 것이다.
'알고 보니 무척이나 복잡한 사연이 있더군요. 자세한 내용이 적
혀 있는 장부는 대협의 방 지붕 구석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동생이 저와 곽가에게 연락을 해 왔더군요. 암도 서 소저나 남
궁 공자에게 저에 대한 존재를 들으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동생이?>
'서찰에 자세히 적혀 있지만 대단한 천재인 것 같습니다. 만약 병
약하지 않았다면 어느 거대문파의 책사가 되었어도 능력을 발휘했을
겁니다. 단지 몸이 너무 약해 오랫동안 생각을 할 수 없기에 이제까
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잘되었구려.>
'후후! 우리를 통해서 십자성의 정보망을 혼란시키려는 생각을 가
지신 것 같습니다. 아직 그에 대해 속단을 할 수 없기에 수락 여부는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적무강도 서문아에게 남동생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도.
<그것이 그 개인의 생각이오. 아니면 정도련의 의향이오?>
'현재로서는 그분 개인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 이상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수락하시오.>
'적 대협?'
<단, 은밀히. 혹시 정도련이 어떻게 되더라도 결코 발각되지 않을
정도로 은밀히. 부탁하오.'
'알겠습니다.'
만형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서도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이 일이 잘만 된다면 정도련 내에서 그의 입
지가 커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보면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
리고 무엇보다 그의 뒤에는 적무강이 있었다. 아직 그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적무강이라는 남자의 가치는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종
류의 것이었다. 현재 수많은 강호인들이 그를 열렬히 추종하고 있었
다. 아마 그가 천왕성의 정벌을 끝마치고 중원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그는 모든 폭풍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 점을
잘 알기에 만형통은 적무강을 놓칠 수 없었다. 비록 정도련이 잘못되
더라도 적무강만 있으면 된다. 그만 있으면 언제든 재기가 가능한 것
이다.
만형통은 자기 몫으로 나온 음식을 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소! 덕분에 음식을 잘 먹을 수 있었소."
"별말씀을......"
누가 봐도 그들의 모습은 우연히 자리에 합석했다 헤어지는 사람
들의 모습이었다. 만약 이 이상 시간을 더 끌었다면 남들의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
그 누구도 그들에게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적무강은 계단으로 올라가는 만형통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자신의
앞에 놓은 술을 들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거 이제까지 같이 온 친구를 내버려 두고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소."
털썩!
그때 이제까지 만형통이 앉았던 자리에 한검우가 앉았다.
"친구들과 이야기는 모두 끝냈소?"
"하하! 그럭저럭 끝냈소. 청해로 들어가면 당분간 보지 못할 얼굴
들이라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소."
"즐거웠겠구려."
"당연히......자, 우리도 한잔합시다."
"그럽시다."
챙ㅡ!
두 사람은 술잔을 부딪쳤다.
이미 둘 다 얼큰할 정도로 소홍주를 마셨지만 그들에게는 별 의미
가 없었다. 소홍주를 들이켜던 한검우의 눈이 빛났다. 그가 이제까지
만형통이 적무강에게 은밀히 말을 전하느라 사용했던 물이 엎질러진
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후후~! 아까 합석했던 양반이 자리를 꽤 지저분하게 사용했구려.
이렇게 물이나 엎지르고 가다니."
"그러게 말이오."
날카로운 한검우의 지적에도 적무강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오히려 약간 당황한 사람은 한검우였다.
'내가 잘못 추측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의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적무강에 신경을 집중
했다. 그리고 적무강의 맞은편에 앉은 상인에 대해 무언가 미심쩍음
을 느꼈다. 그래서 적무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는데 너무나 태
연하게 대답하니 오히려 자신이 혼란스러웠다.
그때 적무강이 한검우에게 물어 왔다.
"한 형은 정확히 청해 어디로 가는 거요?"
"나는...... 청해호(靑海湖)로 간다오. 그러는 적 형은 어디까지
가려는 것이오? 알다시피 청해성은 무척이나 넓다오. 보통 중원의 다
른 성들 서너 개를 합친 것만큼이나 커서 처음 가는 사람은 무척 헤
맨다오."
한검우의 말에 적무강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나도 청해호로 간다오."
순간 한검우가 흠칫했다. 그는 적무강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의 눈
을 빤히 들여다보았으나 적무강의 눈에서는 그 어떤 흔들림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거 참 우연의 일치구려. 나와 같은 곳으로 간다니."
"그러게 말이오."
한검우의 눈이 깊게 침전됐다. 적무강은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