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4일 성령강림 후 열째 주일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2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은 행3:1-16절(신191쪽)입니다.
제목: 우리에게 있는 것은 무엇?
초대 교회의 특이한 모습 중 하나는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2:43)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기사와 표적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사건(1-10)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과 같이 이 기적으로 인하여 심히 놀라며 기이하게 여긴 백성들(11)에게 베드로는 설교를 통하여 그 기적에 대하여 설명합니다(12-26).
모세에게 출애굽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출4:3)라는 질문을 통하여 모세의 손에 있는 것이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출4:20)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오늘 본문(1-16)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 의미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먼저. 치유 기적의 이야기(1-11)를 살펴보겠습니다.
치유 기적 이야기의 인물과 배경입니다(1-3). 이방인의 뜰에서 성전으로 들어가는 미문에서 날마다 구걸하는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주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기에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그를 자주 보았을 것입니다.
치유 기적의 이야기입니다(4-8). 기적이 일어났던 그 날에는 베드로는 요한과 더불어 그를 주목하였습니다(4). 우리말 성경에는 접속사 ‘그러나(데)’의 번역을 생략하였지만, 2-3절에서 전환을 나타내는 ‘그러나(데)’를 번역하여야 합니다. 이는 그가 구걸하는 것은 날마다 하는 일이었지만(2-3), 4-8절의 이야기는 특별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4절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여기서 우리말 성경은 ‘그를 향하여(에이스 아우톤)’의 번역을 생략하고 ‘주목하여(아테니사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에이스 헤마스)를 보라’는 명령에도 전치사 ‘에이스(into)’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깊은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 즉 서로의 마음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그의 슬픔과 고통을 공감하는 마음으로 그를 주목하였고, 그도 자신들의 긍휼과 사랑을 자세히 보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불신자나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거나 도움을 주기 전에 그들의 슬픔과 아픔을 공감하는 마음, 즉 주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주목하는 것이 먼저 필요합니다. 주의 모든 사역의 동기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3:2-3절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영적 분별에서 사랑이 첫째의 기준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때 앉은뱅이는 그 사도들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습니다(5). 베드로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6절입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직역하면, “은과 금은 내게 없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이것을 너에게 내가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너는 일어나라! 그리고 너는 걸으라 ”입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둘째로 내게 있는 이것(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너에게 내가 준다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그 결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in)에서 너는 일어나라, 그리고 너는 걸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말 성경에는 헬라어 전치사 ‘엔(in)’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베드로가 앉은뱅이에게 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단지 걷기 위한 수단과 같은 뉘앙스를 줍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라는 표현은 앉은뱅이가 고침을 받기 전에 베드로가 전하여 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아서 인격적으로 주 예수와 연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미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에게 ‘너는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여기서 성도 여러분, 그의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구원)과 그의 기적적인 치유를 구별하시기를 바랍니다(16절에서도 이것을 확인).
베드로가 믿음으로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7-8a).
기적으로 치유를 받은 앉은뱅이가 처음으로 한 것은 사도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8b절입니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것은 치유 기적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예배,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치유 기적의 결과입니다(9-11). 이 기적은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그를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놀라며 솔로몬 행각에 모이게 하였고, 베드로가 그들에게 그 기적에 대하여 설명하는 설교(12-26)를 하게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금과 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앉은뱅이에게 주었고, 그 이름 안에 있는 그를 기적적으로 치유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도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입니다. 베드로의 설명(12-16)을 통하여 그 이름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제, 치유 기적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설명)입니다(12-16).
베드로는 두 가지 질문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12절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첫째는 과거에 하나님의 많은 능력(특히 출애굽)을 체험한 이스라엘 사람으로 왜 이 일을 기이히 여기느냐? 즉 이 기적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도 자신의 권능과 경건으로 그를 고친 것이 아닌데, 왜 자기들을 주목하느냐? 즉 자기들을 주목하지 말고 그를 고치신 분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들과는 달리,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면서, 은근히 자신이 믿음이 좋고 영력이 있어서 이적의 권능을 행하는 것처럼 자신을 강조하여 많은 사람의 존경과 영광을 받아서 자신의 교회만을 크게 만드는 자는 거짓 사역자일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주의 기적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어떤 것을 계시하는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4:22절입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기적은 주 예수의 복음을 계시하여 믿게 하는 표적입니다. 즉 사람들이 복음을 통하여 주께 돌아오게 하여(11:21), 주께 붙어 있게 하는 것(11:23)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백성들이 주목하여야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13a절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화롭게 하셨다’라는 것은 예수님을 사망에서 부활을 통하여 영광의 주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치유 기적은 이 복음을 계시하며 믿게 하는 표적이기에 베드로가 복음을 설명합니다.
먼저 베드로는 출3:6절을 인용하여 하나님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으로 소개합니다. 즉 하나님은 아브라함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하여 떨기나무 앞에서 모세에게 나타나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셨던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왜 베드로는 하나님을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 언약의 하나님과 출애굽의 하나님으로 소개하였을까요? 예수님이 부활을 통하여 영광의 주가 되신 것(13)이 아브라함 언약의 종말론적 성취이며, 종말(참)의 출애굽이기 때문입니다. 눅9:51절입니다. “예수께서 승천(Exodus, 출애굽)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이렇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언약의 관점에서 그리고 종말의 출애굽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과거의 출애굽의 예표(그림자)를 보여주셨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언약을 실제로 성취하실, 즉 출애굽 그림자의 실체인 종말의 출애굽을 하실 그들의 조상(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한, 베드로는 영화롭게 되신 예수님을 ‘그(하나님)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왜 죽임당하셨는지를 이해하는 근거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여호와의 고난받은 종’에 근거합니다. 사53:11절입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언약의 당사자라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도 율법 언약에 실패한 하나님의 종(사41:8), 즉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일하게 남은 이스라엘로서 율법(창조) 언약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신 하나님의 종이십니다(요19:30).
그 결과로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의 종 예수님을 사망에서 부활(종말의 출애굽)하게 하셔서 영광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13).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아브라함 언약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하나님께서 언약적으로 우리를 대표하신 하나님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창조) 언약에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의 심판을 받게 하시고, 아브라함 언약에 따라 우리를 위하여 그를 사망에서 부활(종말의 출애굽)하게 하여 영광의 주가 되신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우리를 위한 주 예수의 복음입니다. 그 이름은 우리에게 영생과 육체의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주기로 약속하는 새 언약의 복음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하나님의 복음, 즉 종말의 출애굽, 즉 하나님의 언약적인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로 그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13b-15a절입니다.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여기서 ‘생명의 주’(15a)에서 ‘주’라고 번역된 헬라어가 주님이라는 의미인 ‘퀴리오스’가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 가장 먼저 들어서는 인도자 또는 선구자라는 의미인 ‘아르케코스’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주’는 저주와 사망에서 우리를 영생과 부활로 인도자, 개척자, 즉 사망에서 우리를 출애굽 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 총독은 그가 무죄한 자, 즉 ‘거룩하고 의로운 이’시라는 것을 증명하였고 ‘유대인의 왕(언약적 대표)’이라는 예수님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예수님을 거부하고 살인자(바라바)를 선택하고, 사망에서 우리를 부활 생명으로 인도하실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둘째로 그의 부활입니다. 15b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출애굽의 하나님께서 율법(창조) 언약에 따라 세상의 죄를 대신 하여 십자가에서 사망의 심판을 받으신 그의 종을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심(종말의 출애굽)으로 영화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13). 이 일에 사도들이 증인입니다. 우리도 사도들이 전한 주 예수 복음에 의하여 이 일에 증인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종말의 출애굽)의 하나의 열매인 그 치유의 기적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16절입니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의 이름의 그 믿음 위에 그 사람, 그를 너희가 응시한다. 그리고 너희가 알아 왔다. 그분의 이름이 강하게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한 그 믿음이 너희 모든 자를 앞에서 그에게 이 완전함을 주었다.”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치유함을 받은 먼저 사람을 소개합니다(16a). 그들이 응시하고 알아 왔던 그 사람을 부활(출애굽)하신 ‘주 예수의 이름의 믿음 위에 있는 그 사람’, 즉 주 예수의 이름에 대한 믿음으로 주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으로, 주 예수의 복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6)으로 소개합니다. 여기서도 성도 여러분, 그의 주 예수와 연합하는 전인적 구원과 그의 치유의 기적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그의 주 예수와 연합(구원)의 한 열매인 그의 치유를 설명합니다.
16b절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강하게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한 그 믿음이 너희 모든 자를 앞에서 그에게 이 완전함을 주었다.” 여기서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의 주어는 ‘그의 이름(토 오모나 아우투)’입니다(16b). 이것은 그를 고친 분이 바로 그의 이름(그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를 고친 것은 앉은뱅이나 사도의 믿음이나 권능이 아니라 사망에서 부활(출애굽)하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앉은뱅이와 사도의 믿음을 통하여 그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즉 주 예수님이 그들에게 분배하신 믿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와 연합하신 주 예수님이 모든 표적의 일차적인 주권자이십니다. 그리고 필요하시면, 자신과 연합한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앉은뱅이의 치유 표적과 그에 대한 베드로의 설명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은과 금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은과 금이 없다고 한 것은 전혀 물질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비록 사도들이 가난하였지만, 그래도 구걸하는 그에게 줄 적은 돈은 있었을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가져다가 구제할 수도 있었습니다.
‘은과 금이 없다’라는 것은 그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자신(우리)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과 금’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의 이름’은 그에게 영생을 이미 주었고, 부활의 몸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줄 것을 보증하는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그때 그에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완전한 치유를 보장하는 이름입니다. 단지 시간 차이 문제(약 20~30년)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와 사도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 치유의 기적을 표적으로 일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이 주 예수의 복음을 통하여 주께 돌아오게 되었고(4:4), 초대 교회에 박해가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4:16-18).
성도 여러분, 주께서 우리를 통하여 많은 기적과 표적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께 속한 일입니다. 우리는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며 판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롬12:3절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많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우리에게는 영생과 부활과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증 약속하는 ‘주 예수의 이름’이 있습니다. ‘주 예수의 이름’의 실체인 성령님이 이러한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십니다(엡1:14). 성도 여러분, 주 예수의 이름, 즉 성령님의 새 언약대로 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 예수의 이름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시며 춤추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찬송 93장을 부르시고 다 같이 기도하신 후에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