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관 - 런던 : 전시회 거리 과학의 시대를 선포하며 세계 최초의 엑스포가 열린 그곳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3. 16. 13:59
세계의 과학관 - 런던 : 전시회 거리 과학의 시대를 선포하며 세계 최초의 엑스포가 열린 그곳
2024.01.22. 08:54조회 17
런던 : 전시회 거리
과학의 시대를 선포하며 세계 최초의 엑스포가 열린 그곳
세계인들의 관심을 듬뿍 받는 여왕의 나라. 영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 중 하나는 런던의 녹색 심장인 하이드파크 남쪽에 위치한 ‘전시회 거리(The Exhibition Road)’다. 거리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거리에는 그야말로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박물관들이 즐비해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인 영국을 건설하고 유지했던’ 빅토리아 여왕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남편 앨버트 공을 기억하기 위해 이름 붙여진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Victoria & Albert Museum)과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 그리고 과학박물관(Science Museum of London)도 자리하고 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에는 예술(art)과 기술(techne)의 경계를 넘나드는 화려한 산업적 예술품과 공예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외벽을 자랑하는 자연사박물관에는 공룡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지구의 역사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다양한 동식물의 표본과 함께 보여 준다. 그 건너편에 자리한 과학박물관은 증기 엔진과 산업혁명 그리고 그 이후 급속하게 전개된 첨단 과학기술의 역사를 시대정신과 함께 보여 준다. 또한 성인만을 위한 공간이자 전시물이 없는 과학박물관을 표방하는 다나 센터(Dana Center)도 있다.
전시회 거리
19세기 중반까지도 하이드파크 남쪽인 사우스켄싱톤 지역은 아무것도 없는 초지였다. 이곳이 세계 과학 문화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1851년에 개최되었던 세계 최초의 엑스포 덕분이다. 18세기 말에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경험하면서 ‘세계의 공장’으로 불렸던 영국은 점차 프랑스나 독일 등에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 내부 모습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서 ‘영국 과학 쇠퇴론’1) 이 확산되면서 과학기술 부흥 운동을 전개하자는 목소리가 제기되었고, 급기야 독일인인 앨버트 공이 전면에 나섰다. 여왕의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정치에서 소외된 앨버트 공은 주로 사냥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과학 발전에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런던에서 개최되었던 세계 최초의 엑스포는 바로 과학에 대한 그의 열정과 정치적 소외감 그리고 과학자들의 위기론이 어울려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엑스포 개최를 위해서는 엄청난 규모의 자금이 필요했고 이러한 자금은 여왕과 귀족들의 기부와 후원을 통해 마련되었다. 세계 최초로 유리와 철근으로만 지어진 조립식 건물을 자랑하는 크리스털 팰리스(crystal palace)2)는 그 이름에 걸맞게 하이드파크 숲 속에서 수정처럼 빛났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지만 세계 건축사에 남은 크리스털 팰리스는 영국의 대표 건축물이 되었고, 영국 전역은 물론 프랑스와 유럽에서 수없이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그 결과 20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이익금이 생겼는데 이익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1,000여 건의 계획이 논의되었다. 결국 앨버트 공의 의견을 받아들여 켄싱턴 고어 지역에 대규모 토지를 매입하기로 결정했고 이것이 오늘날 전시회 거리가 형성된 배경이다.
엑스포가 종료되면서 전시물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또 다른 이슈가 생겨났다. 해외에서 온 전시품들 중 일부는 본국으로 돌려보냈지만 대부분의 전시품이 그대로 남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별도의 공간이 급하게 필요해졌다. 한때 ‘브롬튼 보일러(Brompton Boiler)’라고 불렸던 가건물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생겨난 것으로, 이 가건물 자리에 바로 오늘날의 런던 과학박물관이 탄생했다. 이는 마치 12세기 유럽에 대학이 생겨난 목적과 비슷하다. 십자군 전쟁을 치르면서 유럽에는 이슬람으로부터 서구의 학문과 지식이 많이 유입되었는데 당시의 대학은 이를 수용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이처럼 런던 과학박물관도 남겨진 전시물들을 보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전시 공간을 갖춘 런던 과학박물관에는 모두 30만 점에 달하는 소장품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최고의 과학박물관이면서 동시에 체험형 과학 센터 기능도 갖추어 전시물의 보존과 연구, 체험과 교육이라는 주요 기능을 모두 수행한다. 21세기 들어 현대적 예술 감각으로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마친 런던 과학박물관은 크게 기초과학을 다루는 본관과 웰컴 트러스트 재단(Welcome Trust)이 지원하고 운영하는 의학 및 생명과학관인 웰컴 윙(Welcome Wing)관, 그리고 2003년에 개관한 다나 센터로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기본적으로 물리학, 화학, 수학 등 기초과학과 함께 우주항공과 정보통신 등 기술공학을 다루고 있으며, 근대를 형성하는 힘인 증기 엔진 지동차도 실제로 만날 수 있다. 1813년에 탄광 철도의 레일 위를 달렸던 퍼핑빌리 기관차를 비롯하여 스티븐슨 공장에서 제작하여 이후 대다수 기관차의 원형으로 불리는 로켓 기관차 그리고 특허국장으로 재직하면서 기계 특허품을 열정적으로 수집했던 우드 크로프트가 소장하던 트레비딕 기관차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제임스 와트와 뉴커먼의 엔진 설계도 등을 직접 볼 수 있다.
런던 과학박물관 전시물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과학 기구를 고치는 일을 담당했던 제임스 와트는 1759년의 어느 날, 같은 학교에 교수로 재직하던 친구로부터 뉴커먼 엔진 기관을 수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뉴커먼 엔진 기관은 수증기의 열에너지를 기계에너지로 바꾸는 증기기관이었는데 1705년에 토머스 뉴커먼이 발명하여 탄광에서 물을 퍼내는 용도 등으로 사용되었다. 사실 물이 끓을 때 생기는 증기가 동력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멀리 알렉산드리아의 헤론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실제로 증기가 동력으로 사용 가능함을 보여 준 것은 18세기였다. 뉴커먼 엔진은 실린더 안의 수증기가 압축하고 팽창함에 따라서 피스톤이 왕복 운동함으로써 기계를 작동시키는 것으로, 특히 대기압만으로도 물을 빨아올리기 때문에 대기압 기관이라 불렸다.
수리를 의뢰받은 와트는 뉴커먼 엔진이 수리 후에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자 아예 증기기관을 대폭 개량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뉴커먼 기관은 증기 압축을 위해 물이 한 번 분사될 때마다 실린더 전체가 냉각되기 때문에 열 손실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석탄 소모량도 많다는 현실적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와트는 고민 끝에 증기를 실린더 안이 아니라 실린더와 연결된 별도의 응축기에서 압축시켰으며, 피스톤을 대기압이 아니라 증기압력으로 움직이는 방식을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피스톤의 상하 운동 모두를 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응축기만 냉각되고 실린더의 열은 보존하여 효율성을 높였으며, 그 결과 석탄 소모량도 뉴커먼 기관에 비해 4분의 1 이하로 줄이는 혁신을 가져올 수 있었다. 물론 와트의 개량된 증기 엔진이 실제로 상용화되기까지는 이후에도 약 10여 년의 시간이 더 소요되었지만, 와트가 이룬 발상의 전환과 특허 덕분에 인류는 증기를 새로운 동력원으로 삼아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과학박물관 2층에 마련된 ‘조지 3세 컬렉션’에는 18세기에 사용되었던 과학 기구와 19세기 영국의 뛰어난 과학자들이 제작하였던 수학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영국 왕들 중 남자로서는 제일 오랜 기간인 59년이나 재임한 조지 3세는 어렸을 적부터 약간의 정신 질환을 앓았다고 한다.3)
대신 그는 과학 기구 등을 제작하고 모으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는데, 조지 왕이 직접 제작을 의뢰하거나 수집한 수학과 과학 관련 기구들은 원래 왕의 천문대가 있던 큐가든 천문대에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천문대를 운영할 비용이 충분치 않자 빅토리아 여왕은 수집품을 모두 런던 대학교 킹스 칼리지에 기증했고, 1843년에 앨버트 공이 조지 3세 박물관을 정식 개관하게 되었으며, 1926년에는 오늘날처럼 런던 과학박물관 2층으로 완전히 이전되었다.
찰스 휘트스톤과 찰스 배비지는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놀라운 정보통신 기술의 발전을 이끈 핵심적인 인물들이다. 19세기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다양한 기계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혁신적이면서 빠르게 발전했던 시기이다. 런던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들 덕분에 컴퓨터가 가능해졌고 전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아이작 뉴턴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교 루카시안 석좌 교수4)이던 찰스 배비지는 수학자였지만 기계 발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프로그램이 가능한 컴퓨터’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으며, 기계로 작동하는 컴퓨터를 발명하여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린다.
조지 3세 컬렉션 중 하나
조지 3세 컬렉션은 주로 기계역학과 공기역학에 관련된 것이 많다. 1760년에 기구 제작자인 조지 애덤스(George Adams)에게 의뢰하여 제작한 것들로 그 화려함과 정교함이 아주 놀랍다. 이 기구들에는 왕의 수학자라는 호칭이 부여되었는데, 과학적 탐구보다는 왕실의 교육과 여흥을 위해 제작된 것들이다.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공중시계(公衆時計)로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계는 1386년에 제작된 솔즈베리 대성당의 시계다. 그리고 과학박물관에는 25분마다 종을 울리는 웰스 대성당용 시계가 전시되어 있다.
17세기 후반부터는 시계에 분침을 사용하여 보다 정밀해진 개인용 시계가 보편화되었는데, 18세기 철학자들은 시계를 보면서 기계적 철학5)의 물질적 기초를 마련했다. 런던 대화재가 발생하기 전에는 런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웨스트민스터 아비에 안치되어 영원한 ‘런더너’로 남은 근대과학의 아버지 뉴턴조차 정교한 시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제작한 시계공의 존재를 말해 준다고 여겼다. 복잡한 우주가 작동하는 것은 그것을 창조한 조물주가 존재한다는 증거였던 셈이다.
과학박물관 4층과 5층에 위치한 웰컴 윙 관에는 웰컴 트러스트 재단이 제공한 의학 관련 자료와 생명과학 관련 과학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1853년 미국 서부에서 태어난 웰컴은 젊은 시절에 제약 회사를 창업하고 대부분의 약품이 가루나 액체이던 시절에 ‘타블로이드(Tabloid)’라는 이름의 알약을 판매하여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나중에 영국에서 작위를 수여받은 그는 이익금으로 약품 개발을 위한 연구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의학 역사와 관련된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기 시작했다.
1936년에 세상을 떠난 그는 자신의 소장품과 유산을 의학 발전을 위해 사용해 줄 것을 부탁했고, 그의 유언에 따라 설립된 웰컴 트러스트 재단은 당시 유럽의 어느 박물관보다 많았던 그의 소장품들을 런던 과학박물관으로 옮겨 웰컴 윙 관을 열었다. 세계 최대이자 최고의 웰컴 윙 관은 과학과 의학과 수의학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영국인 스미손이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면서 막대한 유산을 남겨 스미스소니언 재단과 박물관을 설립했듯이, 미국인 웰컴은 영국에 막대한 유산을 남겨 웰컴 생명과학관을 설립했다.
과학박물관을 나와 임페리얼 칼리지 근처로 돌아가면 19세 이상 성인만을 위한 과학박물관이 나타난다. ‘먹고 마시며,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자(eat, drink, and talk)’는 모토의 사이언스 카페가 운영되는 다나 센터다. 어른만을 위한 논쟁적인 과학 이슈들을 다루되, 재미있고 급진적이며 오락적인 요소들을 과감하게 도입하고 있다.
이곳은 2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영국 과학 진흥 협회6)와 런던 과학박물관, 그리고 민간 신경 과학 연구 기관인 ‘두뇌를 위한 유럽 다나 연합’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평범한 수준의 과학 전시관이 아니라 과학 관련 이슈들을 토론하고 보여 주는 참여형 과학 공연장이라는 명칭이 더 적절한 이곳에서는 ‘줄기세포의 허와 실’, ‘로봇과 인간의 경계’, ‘60대의 남녀관계 가능한가?’, ‘DNA 테스팅 : 과학인지 사기인지?’ 등의 이슈가 논의된다.
청장년들은 퇴근 후 친구끼리 혹은 연인끼리 과학관을 찾아 자연스럽게 과학자와 의사, 법률가와 경찰, NGO 운동가와 화가, 철학자와 시인 등 서로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면서 생활 속 과학 이슈를 접한다. 또한 주중에는 과학과 예술을 접목하고 실험과 쇼를 겸비한 ‘펑크 사이언스’가 공연된다.
다나 센터가 취하는 흥미로운 형식은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토크쇼가 끝나면 바로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토론에 참여할 수 있으며, 홈페이지와 휴대전화로도 참여할 수 있다. 다나 센터는 이를 위해 3층 규모의 전시관에 모두 980만 파운드(약 200억 원)를 투입하여 디지털 장비를 갖추었다. 남의 얼굴을 통째로 이식하는 설정이 등장하는 영화 <페이스 오프>처럼 ‘그러한 얼굴 성형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윤리적인 문제는 없는가’를 주제로 한 실시간 전자 투표에서는 <페이스 오프>식의 얼굴 성형을 위해 자신의 얼굴을 기증할 수 있다는 답변이 높은 수치를 기록해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전시회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려한 외벽을 자랑하는 런던 자연사박물관에는 전 세계로부터 수집된 식물 약 520만 점, 곤충 약 2,800만 점, 고생물 약 750만 점, 동물 약 2,700만 점 등이 소장되어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중앙 현관에 거대한 공룡 화석 ‘디피(Dippy)’를 만날 수 있는데, 디피는 전체 길이 32m를 자랑하는 디플로도커스라는 공룡의 골격 복제품이다. 세계적인 철강왕인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가 에드워드 7세의 요청으로 이곳에 기부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섬유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어렸을 적 가난에 몹시 시달렸다. 대부분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출신의 노동자 집안이 그러했듯이 그의 가족 역시 1848년에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로 이주했다. 얼레잡이, 방적 공장 노동자, 기관 조수, 전보 배달원, 전신 기사 등 어려운 일을 전전하던 그는 1853년 펜실베이니아 철도 회사에 취직했고,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장거리 여행자를 위한 침대차와 유정 사업 등에 투자하면서 큰돈을 벌었다.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디피 모습
이후 그는 피츠버그에 카네기 철강 회사를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중에 J. P. 모건 사에 48억 달러라는 금액에 팔리면서 큰 부자가 되었다. 디피는 카네기 박물관에 전시된 진품을 복제한 것이다. 이후 그는 디피를 유럽의 여러 도시뿐만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와 남미 지역의 과학박물관에도 기증하여 공룡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자연사박물관이 자랑하는 또 다른 전시물로는 거대한 대왕고래(blue whale)가 있다. 대왕고래는 수염고래 과에 속하는 고래로 흰긴수염 고래라고도 부른다. 엄청나게 큰 것은 버스 4대를 이은 길이보다 더 길고 꼬리지느러미 크기는 중형 비행기의 날개 크기에 맞먹는다. 심장도 소형 자동차만 한 크기이고 가장 큰 혈관은 사람도 헤엄칠 수 있을 정도로 넓으며, 지구 역사상 존재했던 동물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무거운 동물로 알려져 있다. 웩스포드 항에서 붙잡은 지 42년이 지나도록 전시 공간이 없어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1934년에 ‘신 고래관(new whale)’이 건립되면서부터 대중에게 공개되기 시작한 대왕고래는 무게 10톤, 길이 28.3m에 달한다.
자연사박물관의 또 다른 자랑은 1996년부터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통해 개관한 지구관(Earth Galleries)이 뿜어내는 매력이다. 지구관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 에스컬레이터는 마치 지구 내부로 들어가는 듯한 디자인으로 설계되어 관람객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지구의 현재와 미래를 주제로 한 전시에서는 일본 고베 대지진 때의 상황을 재현하는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1995년 1월 17일 새벽에 발생한 강도 7.2의 고베 대지진 때문에 고베를 비롯한 한신 지역에서 사망자 6,500여 명, 부상자 약 5만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일본 지진 관측 사상 최대 규모이자 최악의 지진으로 고베 시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한신 고가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이러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10년 동안 철저한 조사를 수행했고, 그 결과 지진 피해 예측 장비인 피닉스 방재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와 함께 건물 내진 보강 공사도 강화하는 등 위기관리를 보다 철저히 함으로써 2013년 4월에 효고 현 아와지 섬에서 규모 6.3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그 피해를 최소화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런던 자연사박물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레스토랑의 양쪽에 자리 잡은 두 과학자의 동상이다. 한 사람은 찰스 다윈이고 다른 한 사람은 ‘다윈의 불독’을 자처하고 나선 T. H. 헉슬리다. 1859년 다윈은 ‘무신론자로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진화론 발표를 미루다가 청년 알프레드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의 편지를 받고 서둘러 책을 출간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메커니즘을 담은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이었다.
모든 생명이 사실상 연관되어 있으며 공통의 조상에서 유래했다는 그의 책은 출간되자마자 1,250부가 순식간에 팔려 나갈 정도로 큰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온화한 성격의 다윈은 종교계와 과학계에서 제기되는 격정적 논쟁을 감당해 낼 투지와 열정이 없었다. 이러한 일은 바로 헉슬리가 담당했다. 다윈은 그러한 헉슬리를 “나를 대신하여 복음을 전하는 착하고 친절한 대리인.”이라 불렀다.
헉슬리는 사실 공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8세에 공립학교에 입학해 자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독학과 타고난 언변으로 1860년대에 인간의 유인원 조상(ape ancestors)과 동굴 인류(cave men)에 대한 이야기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당시 런던에서 그의 강연에 대한 인기는 오늘날 연예인에 대한 인기만큼 높았으며 ‘부르튼 손에 수염이 덥수룩한 노동자들이 인류의 조상에 관한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무리지어 몰려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치솟는 그의 인기는 기독교계를 심하게 자극했고, 급기야 1860년에 영국 과학 진흥 협회는 그와 옥스퍼드의 성공회 주교인 사무엘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간에 공개적인 논쟁을 마련했다. 이 자리에서 윌버포스가 헉슬리에게 “당신의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 중 어느 쪽이 유인원과 친척이냐.”고 물었고, 헉슬리는 “자기의 뛰어난 재능과 영향력을 중요한 과학적 토론을 조롱하는 데 사용하는 인간보다는 차라리 유인원을 할아버지로 택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쇼맨십이 강했던 헉슬리는 논쟁이 벌어진 날이면 자신이 “옥스퍼드에서 4시간 내내, 그리고 그 후 20시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매년 9월이 되면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이른바 과학과 예술의 화려한 접목인 ‘런던 패션 위크(London Fashion Week)’가 개최된다. 지구 환경 및 동식물과 패션의 결합은 우리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2004년에 베네통 사는 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원숭이 살리기’를 주제로 대규모 환경 이벤트를 실시했다.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등 인간과 96% 이상 DNA를 공유하는 유인원들을 멸종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이 행사에서는 사진작가 제임스 몰리슨이 찍은 유인원의 사진이 들어간 티셔츠와 ‘얼굴(Face)’이라는 이름의 사진첩이 판매되었다. 당시 수익금의 일부는 유엔 평화사절단원이자 유명 동물학자로 우리나라 국립 생태원에 그 이름을 남긴 제인 구달 박사에게 기부되어 세계 영장류 보호에 활용됐다.
금융과 산업의 도시, 최첨단 문화와 예술의 탄생지 그리고 무엇보다 상징적 통치자로서 왕의 권한이 살아 있는 도시. 최근 사람들은 다시 런던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디지털식 과학수사 도구를 활용하되 여전히 인간의 추리력을 바탕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영드 <셜록> 때문이기도 하고, ‘애니그마’라는 독일 암호를 해독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앨런 튜링을 그린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 때문이기도 하다. 또 근사한 슈트를 갖춰 입은 멋진 중년 남자가 진정한 ‘신사’가 무엇인가를 설파하는 영화 <킹스맨>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런던이 다시금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갈 수 있는 것은 늘 시대를 앞서 생동적으로 변모하는 과학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런던 : 전시회 거리 - 과학의 시대를 선포하며 세계 최초의 엑스포가 열린 그곳 (세계의 과학관, 2015. 10. 25., 조숙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