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관 - 샌프란시스코 : 익스플로라토리움 예술과 과학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최초의 과학센터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3. 16. 14:01
세계의 과학관 - 샌프란시스코 : 익스플로라토리움 예술과 과학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최초의 과학센터
2024.01.22. 16:23조회 10
샌프란시스코 : 익스플로라토리움
예술과 과학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최초의 과학센터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으세요.”
“If you going to San Frans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언제 들어도 감미로운 스콧 맥킨지의 노래가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도시. 또 토니 베넷의 “내 마음을 샌프란시스코에 남겨 두고 왔네.(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라는 감미로운 노랫말이 우리를 유혹하는 도시. 자욱한 안개와 골든게이트 브리지를 배경으로 영화를 만든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과 버클리 대학교의 군수 연구소에서 돌연변이 괴물로 변신하게 된 녹색 괴물 ‘헐크’를 만날 것만 같은 도시.
코미디 영화 <시스터 액트>에서 날라리 수녀 역을 맡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우피 골드버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세인트 폴 가톨릭교회(St. Paul’s Catholic Church)가 있는 도시.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달리는 케이블카로 언뜻언뜻 보이는 아름다운 해변가를 가진 도시이자 길가에서 한 다발의 장미꽃을 사야 할 것만 같은 도시.
미국 서부 해안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는 스페인 해안가와 비슷한 느낌으로 60년대 이후 히피 문화가 탄생하고 번성하면서 예술가들이 즐겨 찾는 도시가 되었다. 아시아 인, 유대 인, 게이와 보헤미안 등 다양한 소수자들은 이제 창조 계급이 되어 각자의 개성을 발산하며 새로운 문화의 장르를 개척하고 있으며, 마크 트웨인(Mark Twain)1)이 남긴 수없이 많은 명언은 오늘도 도시 곳곳에서 방문객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고 있다.
언덕이 많은 샌프란시스코
문화와 예술, 저항과 자유의 기억과 흔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는 과학적 시선으로 볼 때도 지극히 매력적인 곳이다. 왜냐하면 이 도시 해안가에는 미술의 궁전(Palace of Fine Art)과 나란히 세계 최초의 과학 체험 센터인 익스플로라토리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1969년 ‘예술과 과학과 인간의 이해를 위한 박물관(a museum of art, science, and human perceptio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표방하며 낡은 미술관 건물에 설립된 이곳은 20세기 최대의 과학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맨해튼 프로젝트’와 연관이 매우 깊다. 1943년에 연방 정부 주도로 추진된 이 거대 프로젝트를 계기로 미국은 세계 최대의 과학 강국임을 선언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미국이 인류 문명사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근래의 일이며, 특히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볼 때 미국의 위상은 매우 미비했었다. 16~17세기에 이탈리아와 영국 그리고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던 과학기술 활동은 19세기에 제2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독일로 그 중심이 옮겨 갔다. 분열된 군소 국가의 집합체였던 독일이 정치적으로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룬 것은 1871년의 일이다.
독일은 통일국가의 집결된 힘을 보여 주기 위해서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특히 경쟁 상대국인 프랑스나 영국에 비할 때 대학에서의 과학 활동은 매우 뒤처져 있었으며, 베를린 아카데미에서는 주로 프랑스 출신의 과학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독일이 극복해야 할 첫 번째 상대는 프랑스였고, 때문에 독일 정부는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노력으로 대학 개혁을 시작했다.
개혁의 방향 중 하나는 우수한 교수 및 연구진들을 일정 기간 낙후된 지방대학에 체류토록 함으로써 지역의 질을 높이는 순환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그 결과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독일 대학은 놀랄 만큼 수준이 향상되었다. 또 하나의 방향은 오늘날처럼 실험실을 통해 연구자를 양성하는 박사 과정이 생겨났고, 또 ‘세미나’라는 교육 시스템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개혁 덕분에 괴팅겐 대학교 및 라이프치히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등은 전 세계 과학의 새로운 메카로 등장하게 되었다. 덕분에 당시 분위기는 과학 연구에 종사하려면 무조건 독일로 유학을 떠나 선진 과학을 접해야 한다고 여겼다. 당연히 미국의 과학도들도 독일로 유학을 떠나는 상황이었고 미국 과학의 존재감은 아주 미미했다.
이러한 때에 등장한 로버트 밀리컨(Robert Milikan)은 1923년에 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미국 과학의 자존심을 한순간에 회복시켜 주었다. 밀리컨 역시 시카고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기 전에 미국 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2년간 독일의 베를린 대학교와 괴팅겐 대학교에 유학했다. 1896년에 귀국한 그는 독일 출신으로 시카고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A. 마이컬슨2) 밑에서 조교로 일했으며 1921년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자리를 옮겼다.
밀리컨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에 대한 오랜 논쟁이 종식되고 양자라는 불연속적인 입자라고 인정되었다. 또한 빛이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의 성질을 가진다는 이중적인 특성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밀리컨의 생각은 ‘기본 전하량 역시 연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량의 정수의 곱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었다. 그에게 걸림돌은 어떻게 실험을 통해 기본 전하량을 측정할 것인가라는 기술적인 문제였다.
밀리컨은 1908년부터 물과 알코올을 사용하여 전하량을 측정하는 일련의 실험을 수행하다가 1909년 가을부터는 물이나 알코올이 아닌 기름방울을 사용하는 실험을 계획했다. 자동차 엔진오일로 사용되는 기름은 상대적으로 휘발성이 낮기 때문에 방울이 오르내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30분에서 길게는 4시간까지 연장되어 전하량을 측정하는 데 훨씬 편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기름방울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전자의 기본 전하량을 측정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미국 과학자 최초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그의 영광 뒤에는 항상 두 가지 비판이 따라다녔다. 하나는 남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는 윤리적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실험 데이터 조작에 대한 것이다.
사실 물방울이 아닌 기름방울을 사용하여 실험을 해 보자며 아이디어를 처음 냈던 것은 밀리컨이 아니라 그의 학생이자 실험 동료였던 하비 플레처(Harvey Fletcher)였다. 그런데 밀리컨은 그 실험 결과를 공동이 아닌 단독으로 발표하면서 플레처에게는 그것을 비밀로 해 줄 것을 부탁했다. 플레처는 그 약속을 충실히 지켰고, 비밀을 지킨 대가로 실험 결과 중 하나였던 브라운 운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을 두고 밀리컨과 플레처 사이에 어떤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며 의심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과학 연구가 실험실에서 공동으로 수행된다는 사실과 개개인이 실험의 성공에 기여한 정도를 정확히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당시는 오늘날보다 더욱 그러한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알기는 쉽지 않다.
밀리컨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그가 실험 데이터를 조작했을 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밀리컨은 실험 이전부터 전하량이 불연속성을 갖는 입자라고 강하게 믿었다. 마침내 1913년 실험에 성공한 그는 오늘날 교과서에 나오는 것처럼 전하량의 값이 4.774±0.009×10-10 esu(전하량의 단위)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런데 거의 비슷한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도 밀리컨과 유사한 실험을 수행하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전자의 기존 전하량의 유무를 놓고 평생 동안 밀리컨과 논쟁을 벌이게 되는 펠릭스 에렌하프트(Felix Ehrenhaft)였다. 에렌하프트는 1909년에 밀리컨과 유사한 방법으로 전하량을 측정하여 그 값이 4.6×10-10 esu 값을 얻었으며 자신의 값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와 그의 제자들은 밀리컨이 얻은 전하량의 1/50 혹은 1/100까지의 양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밀리컨은 이러한 반박에 맞서 보다 정확한 실험을 시도했고 그 결과들을 실험 노트에 일기처럼 자세히 기록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밀리컨이 실험 노트에 기록된 데이터의 1/3만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있다. 밀리컨이 에렌하프트의 주장을 지지할 만한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이라는 의심이 드는 부분이다. 이러한 오해를 종식시키기 위해 후대의 과학자들은 그의 실험 노트에 기록된 모든 데이터를 활용하여 계산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그 평균값이 밀리컨이 제안한 전하량의 값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밀리컨(앞줄 맨 오른쪽)과 아인슈타인(앞줄 가운데)
밀리컨 이후 미국 과학은 가속도를 얻었다. 때마침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상황이 변화하여 수많은 유대 인 과학자들이 히틀러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해 왔다. 대표적인 망명 과학자들로는 헝가리 출신의 물리학자 레오 질러드(Leò Szilárd)와 독일 출신의 아인슈타인이 있었다. 이 두 과학자는 당시 독일 과학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터였고, 전쟁 종식을 위해서는 미국이 먼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이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는 “핵분열로 놀라운 에너지가 나올 수 있으며 독일에서는 현재 연구가 진행 중이다. 빨리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며 절박감이 담겨 있었다.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한 미국 연방 정부는 곧 레슬리 그로브스 육군 소장을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여 비밀 프로젝트를 착수시켰다. 조용한 뉴멕시코 주에 위치한 해발 2,000m 높이의 로스앨러모스(Los Alamos)에서 역사상 최초의 민관 협동 프로젝트인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3)가 가동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여 핵폭탄을 개발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영국과 매우 가까웠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 내내 중립을 표방하면서 막대한 군수물자 수출로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전쟁이 격렬해지면 격렬해질수록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많아졌기 때문에 미국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또 한 번의 기회였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아침에 일본의 전투기가 미국 하와이 주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공격으로 188대의 비행기가 파괴되었고 2,5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쟁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챙기며 불구경을 즐기려던 미국 정부는 곧 연합군으로서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과 독일의 군비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맨해튼 프로젝트를 주도한 과학자는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의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4)와 시카고 대학교의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5)였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진행된 이 프로젝트를 위해 전 세계에서 물리학자, 수학자, 공학자 등 수백 명이 초빙되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동생인 프랭크 오펜하이머(Frank Friedman Oppenheimer)를 비롯하여 닐스 보어, 리처드 파인만, 유진 폴 위그너, 존 폰 노이만 등 과학의 역사에 그 이름이 길이 남는 과학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허름하고 급조된 실험실에서 초기비용 6,000달러로 시작된 연구는 1945년에 이르러 13만 명을 고용하고, 예산은 2억 달러로 늘어났다. 과학자들에게는 암호명이 부여되었고 가족을 포함한 아무에게도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특별 지시가 내려졌다. 연구 개발과 실제 원자탄 제조는 미국, 영국, 캐나다 등에 있는 30곳 이상의 지역에 분산되어 아주 비밀리에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실전에 사용되는 핵무기인 원자폭탄이 개발되었다.
펫보이
전쟁 기간 동안에는 두 종류의 핵폭탄이 개발되었다. 하나는 우라늄 235를 사용하여 만든 ‘리틀보이(little boy)’로 히로시마에 투하되었고, 다른 하나는 플루토늄을 사용한 ‘팻맨(fat man)’으로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다.6) 1945년 7월에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가 오렌지 빛 섬광을 내며 성공적으로 수행되었고, 8월에는 히로시마에 리틀보이가 투하되었으며 그로부터 3일 후에 나가사키에 팻맨이 투하된 것이다.7) 원자폭탄 투하로 히로시마에서는 7만여 명의 사망자와 13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나가사키에서도 약 7만 5,000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조기에 종료되었지만 그것이 가져온 물적 · 정신적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고 후유증 역시 오래 남았다.
과학의 역사에서 원자폭탄의 개발과 투하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과학이 인류에게 엄청난 재앙이 될 수 있음을 전 세계에 여실히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생산물에 대한 과학자들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라는 새로운 이슈를 제기했다. 사실 독일에 앞서 핵폭탄 개발을 서두름으로써 세계 평화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도 과학자들이었는데, 막상 핵폭탄이 개발되었을 때 핵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며 청원서를 제출한 것도 바로 그들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150여 명의 과학자는 우선 일본에게 공개적으로 항복을 요구할 것과 만약 일본이 항복을 받아들이는 한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말아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개발된 핵폭탄의 투하 여부는 이미 과학자들의 손을 떠나 버린 상황이었다. 과학자들의 결정과 열정적인 연구 개발로 얻어진 과학기술의 산물이 이제 더 이상 과학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과학은 어느덧 국제정치적이고 군사적인 판단에 의해 그 사용 여부가 결정되는 사회적 산물이 되어 버렸다. 과학 활용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뒤늦게 아인슈타인은 “만약 내가 루스벨트에게 보낸 편지가 그런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알았더라면 나는 그 편지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크게 통탄했다. 이보다 앞서 트리니티 핵실험을 감행했던 총괄 책임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우리는 세상이 다시는 전과 같지 않으리란 걸 알았다. 일부는 울고, 일부는 웃었으며, 대부분은 침묵을 지켰다. 난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원폭 투하 이후 과학자들은 핵과 과학이 평화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절박감을 느끼고 대대적인 반핵 운동을 전개했다. 전쟁 종료후인 1945년 10월에 오펜하이머는 육군과 해군 포상식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국가, 혹은 전쟁 중인 세계의 무기고에 원자폭탄이 새로운 무기로 추가된다면, 인류는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라는 이름을 저주하는 날이 올 것.”이라며 핵폭탄이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경고했다.
이어 1946년부터 과학자들은 ‘원자 과학자 비상 위원회’를 가동시켰고, 195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라이너스 폴링은 핵의 평화적 사용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1955년에 그는 51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대기 중에서의 핵실험을 금지하는 반핵 서명 운동을 전개했으며 강연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핵실험의 위험성을 알렸다. 그는 1958년에 출간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No More War)』에서 과학이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위해 공헌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1962년에 두 번째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익스플로라토리움은 바로 원폭 투하에 대한 과학자들의 뒤늦은 후회와 평화로운 미래를 찾으려는 희망 속에서 탄생했다. 형 로버트가 전쟁에 지대한 공로를 세우고도 매카시즘에 휘말려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의 길을 포기한 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과학 연구에 심각한 회의를 느꼈다. 그러는 중에 구겐하임 장학금을 받고 영국 런던 대학교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과학박물관이라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
익스플로라토리움
런던 과학박물관의 어린이 갤러리와 도이체스 박물관8) 등을 방문한 그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과학의 즐거움을 전해주는 것이야말로 과학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것이며 과학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과학자였던 자신이 정작 미국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과학 연구가 아니라 자연 세계의 숨은 과학적 원리를 즐겁게 이해하고 탐구할 수 있도록 미래 세대를 키워 내는 일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초대 관장으로 재직하면서 기존의 과학박물관들과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9) 그의 과학 센터에서는 사람들이 사물과 개념을 어떻게 인지하는가에 대한 기초연구를 토대로 전시와 전시물을 기획했다. 이곳에서는 관람객이 탁 트인 전시장에 배치된 전시물들을 자유롭게 만지고 조작하면서 전시물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호기심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압력이나 온도 그리고 빛의 편광 같은 과학의 아주 기초적인 개념들이 작동 전시물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되도록 하는 것이 이곳의 목표다.
익스플로라토리움의 전시물
익스플로라토리움은 크게 6개의 갤러리로 구성되었으며 과학과 인간 지식, 예술 등 다양한 분야와 연관된 650여 개의 작동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다. 귀와 눈, 빛과 소리를 활용한 ‘보는 것과 듣는 것’ 갤러리, 관람객들이 서로에게 스스로 행동 관찰자가 되어 보는 ‘인간 행동’ 갤러리, 기계공학 관련 키트를 직접 제작하고 작동시켜 봄으로써 자연의 숨은 원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손으로 생각하기’ 갤러리가 있다. 또한 어린이들이 대형 블록에서 뛰어놀면서 공간 개념을 느끼게 하는 기하학 놀이터, 아치교의 원리를 실험을 통해 이해하는 코너, 현미경으로 살아 있는 생물을 관찰하는 코너, 손과 발을 이용해 전기에너지를 만드는 코너 등 체험 위주의 프로그램들이 다채롭게 운영된다.
하지만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시 워크숍(Exhibit Workshop)’이라는 공방이다. 과학자와 엔지니어, 기술자와 예술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협업을 통해 과학 전시물을 직접 제작하고 수리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전시 워크숍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전시물이 된다. 투명한 유리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융합의 작업 과정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이곳은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곳에서는 모든 전시물이 자체 제작되며, 성공적으로 제작된 전시물의 전개도 및 제작 과정은 체계적인 매뉴얼인 쿡북(Cook Book)으로 제작된다. 뮤지엄 숍에서 팔리는 이 쿡북은 전 세계 과학 센터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하나 이곳의 특징은 과학과 예술의 접목이다. ‘예술이 곧 아는 방식(Art as a Way of Knowing)’이라는 기본 철학하에서 예술을 적극적인 과학 전시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974년부터 시작된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 아래 매년 10명에서 20명 정도의 예술가들을 과학 센터로 초청하여 짧게는 2주에서 길게는 2년까지 상주하도록 지원한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평소 협업이 어려운 과학자와 엔지니어, 예술가와 인문학자들 간에 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음악을 통한 소리의 본성이나 미술을 통한 빛의 본성 등의 전시물은 예술가 레지던스의 대표적인 사례로 현재까지 약 250점이 넘게 제작되었다. 이곳에서는 또한 음악회나 영화 상영 등의 다양한 문화 공연도 선보이는데, 이곳에서 공연한 대표적인 예술가들 중에는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가로 활동하는 존 케이지(John Cage)10)와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이 있다. 이제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머리에 꽃을 꽂는 대신 익스플로라토리움에서 미래 세상을 익스플로링(탐험)해 보는 것이 어떨지!
[네이버 지식백과] 샌프란시스코 : 익스플로라토리움 - 예술과 과학으로 인간을 이해하는 최초의 과학센터 (세계의 과학관, 2015. 10. 25., 조숙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