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한국의 딸이 된다면 2005/03/30 08:32 | 추천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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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에 발 디딘 박 대표
지난 3월20일, 일요일, TV나 신문기사의 사진으로만 봐왔던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씨의 실 모습을 여기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 봤다. 방송을 통해 보는 것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박 대표를 보니 마치 육영수 여사의 생전 모습을 보는 듯한 그런 착각이 들어 약간 놀랬다. 동시에 더 가까운 친근감도 느낄 수 있었는데 입은 한복 때문인지 우아함과 상끗한 맛이 서려있었다. 왜 박 대표가 국민의 사랑을 흠뻑 받고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느 때인가 더 요긴하게 쓰여질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워싱턴포스트 3월15일자 기사엔 "Star Rises for Daughter of South Korea"라는 제목으로 박 대표를 "기상하는 한국의 딸"로 묘사하여 상서로운 미래를 예견해주는 듯한 느낌도 주었다.
(어머니 육영수 여사와 딸 박근혜 많이 닮았다)
신문을 통하여 박근혜 대표가 워싱턴과 뉴욕을 거쳐 LA로 온다는 소식을 알았을 때 환영회 장소에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막상 가려니 좀 망설임이 앞섰다. 편한 캐주얼로 차림으로 나돌아다니길 좋아하는데 장소가 장소인 만큼 캐주얼 차림으로 갈 수 없어서였다. 양복을 꺼내 입어야 했는데 그게 불편했다. 넥타이 매는 게 싫다. 그렇지만 박정희의 핏줄이자 야당 대표가 정치행보 차 어려운 LA 행차를 한다는데 안가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았다. 그런 기회 다시 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오랜만에 양복입고 외출했다.
호텔 2층 행사장에 올라가니 입장객들에게 명찰을 달아준다. 명찰은 미리 전화 예약을 한 사람에게 달아주는 것이었다. 하루 전 토요일 신문광고엔 그런 내용 없었는데 예약이라니 난처했다. 환영회장 내로 들어갈 수 없다면 그냥 돌아가는 게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박 대표가 입장하는 모습만은 보고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 기다렸다. 1분 정도 기다리니 박 대표가 한복을 입고 환영회장으로 들어선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입장하는 게 아닌가. 명찰 달지 않은 사람들도 함께 따라 들어가는 것이었다. 따라 들어갔다. 이를 본 한 "박사모" 도우미가 이렇게 말한다. "어.. 명찰 달지 않은 사람들은 들어가면 안 되는데...."괘념치 않았다. 다행히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 맨 뒤에 서서 환영회를 지켜볼 수 있었다.
사회자의 인사말이 나왔다. 애국가 1절만 부르고 박근혜 대표의 말을 듣는 순서로 진행된다고 한다. 애국가 부르는 것은 좋은데 애국가를 너무 오랜 세월 불러보지 않아 애국가를 따라 부를 수 없을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애국가를 따라 불러보니 가사가 기억 속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술술 살아 나오는 게 아닌가. 우려와 달리 1절 끝까지 다 부를 수 있었다.
곧 이어 한나라당의 홍보 비디오가 나오고 다음에 박 대표의 말이 이어졌다. 매우 조심스럽게 말하는 느낌이 확연했다. 심사숙고 된 내용이다. 특정단체에 기분상할 만한 말이 전혀 내포되지 않았다. 내용은 정치, 종교, 교포의 지위 문제, 행정도시 이전 문제 등등...
근간 들어와 한나라당 일부에서 박 대표가 우유부단하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 별로 들지 않았다. 세심한 조심성 때문에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계각층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배려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인에게 이 점 부정적으로 비춰질 수 있지만 좋게 보면 아주 좋게 보일 수도 있다. 마음 여리고 깨끗한 심성 소유자인 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맑은 심성 소유자는 아마 새 시대가 원하는 정치인의 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젠 전쟁, 투쟁, 정쟁(政爭), 혹은 반대 위한 반대의 상충을 통하여 정치를 끌어가는 세상이 아니다. 대화를 통한 상생의 정치를 통하여 역사를 엮어 가는 시대로 들어섰다. 때문에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정치가 아니라 남의 의견을 더 들어주는 자세가 정치가로서의 더 중요한 덕목의 조건이 된다. 때문에 우유부단하게 보이는 점이 다름대로 장점으로 더 부각될 수가 있다. 시간은 더 걸리겠지 만 양방의 합의를 도출시킬 수 있어서다.
하지만 현실 정치는 냉정하다. 때가 오면 어떤 반대 목소리를 듣더라도 특정 노선을 택해야 한다. 비록 일부가 반대하고 욕한다 해도 대의와 대도를 위한 일이라면 욕먹으면서도 일을 추진해야 한다. 정치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비록 박근혜 대표가 지금은 조용하고 조심스런 정치행보를 걷지만, 어느 지점과 때에 도달하면 뚜렷하고 확실한 정치노선을 밝히고 아버지가 보여줬던 그런 스피릿으로 명확한 정치행보를 걸어야 할 때가 올 것으로 생각된다.
꿈에 나타난 박정희
내가 박정희를 유난히 존경의 대상으로 생각한 것은 그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데 있다. 하지만 그보다 꿈을 통해서 그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그가 나의 존경의 대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특별한 꿈을 꾸는 현상은 20대에 막 들어오면서부터 생겼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20대 이전엔 두어 번 정도 외엔 다른 특별한 꿈을 꾼 기억이 없다.
박정희에 대한 첫 꿈은 1979년 10.26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시작된다. 한국시간보다 거의 하루 정도 늦은 로스앤젤레스 현지 시간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들렸다. 정신이 아찔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더 이상 집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차를 몰고 바닷가로 달렸다. 롱비치 바로 남쪽 아래에 있는 시얼 비치(Seal Beach)를 질주하는데 눈물이 끝이지 않고 나왔다. 운전하기 힘들어 바닷가에 차를 세우고 홀로 차안에서 수평선을 바라 봤다. 들리는 소리라곤 파도와 가끔 차가 씽씽 지나가는 소리뿐,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주 저 멀리서만 몇 쌍의 연인들이 걸어가는 모습만 보였다. 지금 그곳은 집도 많고 차도 많이 지나다니지만 당시 밤엔 차가 간간이 지나다녀 까만 밤중의 하늘 아래서 느껴지는 슬픔은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Seal Beach, 박정희 시해 소식에 이곳에서 홀로 거의 밤을 새웠다)
정신이 희미한 상태로 3일을 보내고 10월29일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첫 꿈을 새벽에 꿨다. 박 대통령이 내 방에 나타난 것이다. 새벽 3시경, 천장에 붕 떠서 날 내려다보시는 게 아닌가. 꿈이라기엔 너무 묘한 생시 같은 기한 현상이었다. 박 대통령은 나보고 이렇게 짧은 말씀을 하신다: "나 비록 이렇게 가지만 나라가 평정을 되찾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이 꿈을 꾼 이후 나는 나의 박정희에 대한 관심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신문 기사에 나 박정희에 대한 내용만 있으면 온 시선이 그쪽으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분석한다. 분석하면 할수록 박정희의 국가를 위한 순수한 열정에 반하고, 과거의 입만 뻥끗 하며 축재만 하고 할 일은 안하고 싸움만 하는 그런 전형적인 부패상의 정치인과 다르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조갑제의 글
이런 나의 깨달음은 박정희에 대하여 심도 있는 연구로 연결되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인지 몰라도 박정희에 대한 책이 나오면 그 책에 관심이 갔고 그 책을 사서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그래서인지 박정희 예찬론자로 잘 알려진 "월간조선" 조갑제씨의 글을 가까이 접하게 된 것 같다. 그의 글은 박정희 이해에 대하여 많은 도움이 됐다.
조갑제라는 사람의 글에 끌리게 된 동기는 12넌 전인 1993년도로 거슬러 올라간다. 월간조선 에 큰 기사로 박정희에 대한 글이 실렸다. (여기에 대한 글은 나중에 따로 글 쓸 생각.) 단순한 역사적 내용이 아닌 박정희의 신념과 정치 및 경제적 행적과 다른 정치가와의 분석 내용인데 가슴에 불이 댕겨지고도 남는 글이었다. 감명적이다. 그런 감명을 받고도 느낀 감정에 대한 표현을 전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과장된 말이지만, 그 역시 죄일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당시 조갑제 부장에게 편지를 써 나의 생각을 전했다. 글 정말 감명 깊게 읽었다고...
그 후 어떤 일로 조선일보에 볼일이 있어 거기 갔다가 두 번 인사를 하게 되었고, 미국에서는 조갑제 부장이 '97년도 봄 하버드 대학의 Nieman Foundation에서 연수할 때 그곳에 들렸다. 전화를 하니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신라식당에서 만나자 한다. 그래서 거기서 함께 점심을 했다. 난 비빔밥을 시켰다. 식사 중 말한 내용은 박정희 책에 대한 내용이었다.
현재 조갑제씨 월간조선 사장이다. 근간 그 자리를 곧 그만 둘 것이라는 모 신문의 뉴스도 접했다. 이 뉴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어찌 되었든 한국 언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명사 "조갑제"라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내가 박정희의 꿈을 꾸고 그를 존경 대상의 이상으로 생각하는 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조갑제 부장에게 그런 편지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그랬다면 조갑제 부장이라는 사람과의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꿈을 통한 박정희로 인한 인연은 조갑제씨를 만나게 해준 연줄이 되었고, 또 그 꿈은 더 나아가 나중 다른 특별한 사람과의 만나는 일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된다.
(조갑제의 "내 무덤에 침을 밷어라"와 "박정희")
꿈이 현실로
1992년도 6월, 한국을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겼다. 마침 내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가까운 사람이 듣고 간곡한 부탁을 한다. 편지를 주면서 한국에 나가면 대전에 내려가 육완득 사장이라는 분을 만나 편지를 전해달라 한다. 어렵지 않아 승낙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도 만나달라는 주문을 한다. 육 사장이라는 분의 집에서 바로 100미터 거리의 옆집이란다. 본명보다 일명 "박사주"로 불리는 사람이다. 명리학의 대가라 한다. 바빴지만 이도 승낙하고 두 사람을 만났다.
그 때가 92년도 6월이다. 먼저 육 사장을 만나고 잠시 그분을 말씀을 듣고 나가려 하니 점심은 먹고 가야 한다고 하는 게 아닌가. 점심은 그분 식구들과 함께 했다. 식사를 마치고 곧 일어나 갈 곳이 있어 빨리 가봐야 한다고 하니 왜 그렇게 서두냐고 묻는다. 박사주라는 분을 만나 뵙고 서울로 빨리 올라가 볼일을 봐야한다고 했다. 이 말에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는 게 아닌가. "박사주를? 음... 그럼 거기 나도 함께 가지..."
그분 집을 나서서 걸었다. 여든을 넘기신 노인이라 걸음걸이가 매우 느렸다. 빨리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생겼다. 하지만 서두를 수도 없었다.
다행히 찾아 가봐야 할 집은 가까이 있었다.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냐 묻는다. 박 선생님을 뵈러 왔다고 했다. 중환으로 누워 계셔서 안 된다 한다. 그냥 돌아갈 수 없어 미국에서 누구의 심부름을 왔다고 했다. 사모님은 이 말에 들어오라고 한다. 방에 들어가 그 분을 뵈니 정말 곧 돌아가실 것 같이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누워있었다. 하지만 정신은 맑게 보였다. 인사 드렸다. 그리고 짤막한 말씀을 전하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니 박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물어볼 게 있을 터이니 할말 있으면 물어 보게..."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난 사실 그분에게 물어볼 게 없었다. 심부름을 갔던 것이지 내가 뭘 물어보러 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 말 물어보게"라며 마치 내 말을 기다리신 것 같이 말씀하시니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이런 말 물어봐도 될까 하는 생각으로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저... 박정희 대통령이 제 꿈에 자꾸 나타나셔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의 이런 말을 듣더니 그 분은 누운 자세에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생각을 좀 하시더니 몇 마디 하신다. 간단 명료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이었다. 그 말을 듣고 "감사합니다"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를 나섰다. 함께 들어오신 육 사장님은 안부 몇 마디 물으시고 별 말씀 없으셨다.
그 집을 나오자마자 서울로 올라가려 하는데 육 사장님은 그냥 서울로 갈 수 없다고 하신다. 시내 양복점으로 가 양복을 하나 맞춰줄 터이니 양복을 해 입으라고 하신다. 난 시간이 없다고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랬더니 양복 안 맞추면 서울은 물론 미국으로도 돌아갈 수 없다고 하신다. 다른 수 없었다. 그분을 따라 나섰다.
시내 양복점으로 갔다. 양복점으로 들어서서 주인을 대동하고 옷감을 따로 사러 라사점으로 가는 게 아닌가. 좀 특별한 신경을 쓰시는 것 같았다. 옷감을 따로 골라 사서 다시 양복점으로 돌아가 치수를 재었다. 이때 양복점 주인이 나에게 낮은 소리로 슬쩍 묻는다. "저 분 어떻게 아세요?" 나는 답했다. "아... 심부름으로 처음 뵈었는데... 저도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랬더니 "그래요? 아니.. 그럼 저 분이 육영수 여사 집안 사람인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함께 왔어요?"라는 말을 하며 의아한 눈초리로 날 쳐다본다.
"예??" 난 놀랬다. "저 분이 육영수 여사 집안 분이라고요? 전.... 전혀 몰랐는데요." 이 말을 하면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바로 30분 전 그 피골이 상접하여 누워 계신 분에게 박 대통령의 꿈 이야기를 했는데, 혹시 육 사장님은 내가 당신에 대해서 누구인지를 알고 그런 질문을 일부러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 때 육 사장님은 나에게 내 몸 수치를 다 재고 오늘 가봉까지 하라 하신다. 가봉까지 하려면 3시간 정도 더 기다려야 한다.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데 초조한 마음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 3시간 계룡산에 잠시 들리면 어떻겠냐고 하셔서 동학사에 잠시 들렸다. 계룡산으로 가는데 길에 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 실은 사장님... 저는 사장님이 누구 시라는 것 잘 몰라서 아까 실수했습니다. 그 꿈 이야기 한 것이요..." 이렇게 말끝도 제대로 맺지 못하며 어렵게 말을 하니 육 사장님이 묻는다. "음.... 자네 꿈에 박 대통령이 정말 그렇게 나타나시나?" 난 답했다. "예... 그 분이 돌아가신 3일 후부터 나타나십니다." 육 사장님은 이런 나의 대답에 이러신다. "허... 거 참 묘한 일이구먼... 그 분이 꿈에 그렇게 나타난다면 보통 일 아닐세..."
나중에 양복점으로 돌아와 가봉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일을 보고 미국으로 돌아온 다음 약 3주 후 양복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난 그 양복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꿈을 꾼 선물이라 생각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꿈을 꾸고, 또 박 대통령 집안 사람까지도 묘한 상황에서 만났으니 내 꿈 참 묘하다는 생각 금할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첫 꿈을 79년도 10월 29일에 꾸고, 13년 만인 92년도 6월에 박 대통령 집안 사람을 나도 생각지 못하게 만났던 사실은 지금도 미스테리한 일로 나는 생각한다.
(꿈 꾼 보답의 양복이었던가? '92년도)
더 묘한 일
위의 묘한 일을 경험하고 1년 후, '93년도 5월16일, 박정희에 관련된 일로 더 묘한 일을 경험하게 된다. LA 시내 신문 가판대에서 미주 중앙일보 하나를 꺼내 읽는데 바로 일년 전 피골이 상접한 상태에서 뵈었던 그 분에 대한 기사와 사진이 있었다. 본국판 기사였다. 내용은 당시 박정희 소장이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을 뒤엎겠다는 생각으로 혁명의 거사를 치르기 전 그 분의 집을 밤에 몰래 찾아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말을 꺼내고 그 일의 성공 여부를 물었다는 것이다. 답은 성공한다는 것이었고, 혁명 날짜를 5월16일로 택일해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막도 이어진다. 1979년 10월26일 얼마 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답답한 일이 있었는지 그 분을 찾아가 뭔가 물었다는 내용도 나온다. 박 사주는 그분은 김재규 중정부장에게 "車覆全破(차복전파)"라는 네 글자만 써줬다. 김재규는 그 글 뜻이 자동차가 뒤집어져 車사고가 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하여 20년 무사고 운전사로 전용운전사를 대체했다고 신문은 말한다.
"차복전파", 그 뜻은 차사고 낸다는 뜻이 아니었다. 당시 박 대통령 경호실장 "車지철"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사이의 알력으로 인해 김재규가 열 받아 속이 뒤집어져 차지철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할 수 있는 사건을 미리 예견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것 천기의 내용인지라 그 글은 그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 네 문자는 "차"씨(차지철) 때문에 뒤집어지는(覆) 사건이 일어나고, "전(全씨, 즉 전두환)이 깨치고(破) 나와 정권을 잡는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사실 나중에 그 문자 뜻대로 10월26일에 차지철에 의해 김재규 속이 뒤집어져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다. 약 두 달 후 12월12일엔 전두환이 군부를 깨치고 나와 정권을 잡는다. 그 말 계시적인 내용이었던 것이다.
신문 기사는 더 말한다. 그 박사주라는 분은 당대 우리 나라의 최고 명리학자였고 만주에서 명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와 충북 옥천에 거주했는데 그때 고 육영수 여사 집안의 과수원에서 기거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런 인연으로 훗날 5.16혁명을 계획했을 때 박정희 장군이 박사주의 조언을 받았던 것 같다. 마치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일화를 연상케 하는 일이다. 박사주는 대전에 정착해 살다 1992년도 9월에 생을 마감했다.
이 분은 5.16혁명 택일은 물론 또 3공화국 18년 동안 청와대 수시로 불려갔는데도 불구하고 세상 그 누구에게도 그런 자랑하지 않고 매우 소박한 삶을 마침으로써 명리학자로써의 귀감이 됐다. 허세와 멀고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다. 손님들에게 사주를 봐주고도 최소한의 돈만 받고 전혀 금전욕심도 보이지 않았다 한다. 박정희도 개인적 재물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는데 두 사람 이런 면에서 天적인 인연이 남달랐던 것 같다. 나는 당시 그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뵈었다. 정말 소박한 사람이라는 인상만 받았다.
어떻게 박정희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만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렸을 때 한국을 떠나 미국에 살다 잠시 고국에 들려 육영수 여사의 집안 분 육 사장이라는 사람과의 만남, 또 5.16 혁명 날짜를 잡아주고 청와대를 수시로 불려갔던 그런 사람을 우연히 만날 수 있었던 것, 이 모든 만남은 아마 박정희 대통령이 꿈에 나타나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말해줬기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꿈으로 국운(國運)을 보는군요"
박정희에 대한 나의 관심은 계속된다. 앞서 밝혔듯이 신문 기사나 책을 읽던, 드라마를 보건 일단 박정희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나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으로 집중된다.
1997년도 1월었다. TV 뉴스를 보다 "L. T. H."라는 분을 접했다. (KBS로 기억한다. 사정상 약자로만 밝힌다.) 3공화국 때 청와대를 왕래했다는 묘한 내용이 담긴 뉴스였다. 자연히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싶었다. 서초동 사무실을 찾아갔다. 한국을 약 열흘 정도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이었다.
5년 전 육 사장이나 박사주는 그 분들이 누군지 전혀 모르는 가운데 만났지만, 이번 찾아가는 분은 무엇 하는 분이라는 것을 알아서 다른 말 전혀 없이 금년(97년) 신수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 분은 책을 꺼내는데 몇 분 소비했다. 큰 금고에 당신이 연구해 만든 두꺼운 책 같은 것을 꺼내는 것이었다. 책을 펴더니 묻는다. 사주를 말하라 한다. 사주를 말하니 팬으로 뭔가를 쓴다. 조용한 생각을 좀 한참 한다. 그러더니 신수에 대한 말은 없고 이런 말씀을 하신다: "아... 선생은 꿈으로 국운(國運)을 보는 분이군요."
놀랬다. 내가 말한 것은 겨우 내 생년월일과 이름 석자뿐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입이 벌어졌다. 신통한 영감력(靈感力)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 말을 잇는다. "가령 예를 든다면.... 선생은 6.25 동난 같은 전쟁이 일어나게 되면 한 보름 전에 그런 것을 꿈으로 먼저 봅니다." 이 말 듣는 순간 몸에 전기가 흐른다. 정말 놀래서다.
그 분은 더 묻는다. "어떤 꿈을 그렇게 꾸세요? 특별히 꾼 꿈 얘기 좀 해주세요." 생각지 못했던 요청이라 당황했다. 내가 그 분의 말을 들을까 생각하여 들렸는데 그 분은 나의 꿈 얘기를 해달라 한다.
머리에 섬광같이 떠오르는 그 꿈에 대한 말을 해도 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말하지 않으면 그 분은 당신이 한 그 말이 그렇게까지 잘 맞추었다는 것을 모를게 아닌가. 이 생각에 도달하자 몇 가지 꿈 얘기를 하는 게 좋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저... 사실은요. 음... 김일성이 죽기 한 4주일 전에 내 꿈에 나타나 살려달라고 조상 제사상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절을 하더군요. 제사상 높이는 좀 높았고, 그 상위엔 술을 담긴 사발이 있었는데, 전 그 사발의 술을 다른 사발에 몰래 담았어요. 김일성이 머리를 바닥에 박고 엉덩이를 뒤로 올린 채 열심히 절을 하고, 손은 맞장구 치며 위 아래로 마주치며 내려치더군요. 김일성은 내가 제사상 위의 술을 치우는 것 볼 수 없었죠. 난 그 빈 사발에 콩나물국 국물을 넣었죠. 건더기를 꺼내 넣었죠. 색깔이 술 색과 같았으니 술인지 아닌지는 식안으로 구별할 수 없었지요. 김일성은 그 사발에 술 담긴 것이 아닌 콩나물 국물이 담긴 것을 놓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것이죠. 그 자리엔 히틀러도 있었습니다. 독일군 장군복(버버리 코트)을 입고 모자도 쓰고, 김일성에게 아래로 쳐다보며 어떻게 하라고 무언의 눈짓으로 무언가 알려주더군요. 아무튼 그 기도는 술이 담겨져 있어야 할 사발에 술은 없고 콩나물 국물만 있었으니 제대로 된 기도는 아니었죠. 전 당시 그 꿈이 어떤 꿈인지 몰랐습니다." (94년6월12일 꿈.)
이렇게 꿈에 대한 말을 하니 이분은 그 이야기를 노트북에 열심히 필기한다. 입으로 말하는 나는 금방 말할 수 있었지만, 필기하는 분은 손으로 쓰니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필기가 끝나고 더 묻는다. "다른 꿈은요?"
위의 꿈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꾸었지만 또 다른 김일성 꿈은 고층 빌딩의 뉴욕 호텔 방에서 꾸었다. 첫 김일성 꿈을 꾸고 정확히 보름 있다 보였다. 그 꿈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김일성 궁전이 보였는데 김일성이 씩 웃으면서 궁전 밖으로 나가더군요. 그 꿈을 꾸면서 이렇게 생각했죠. '어.. 지난번엔 살려달라고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조상 제사상 앞에서 절하며 애원하더니 이번은 웃으면서 나가네....' 김일성은 나가면서 머리를 뒤로 돌려 날 쳐다본 후 머리를 더 왼쪽으로 돌리더군요. 난 내 오른 쪽에 누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느꼈죠. 그래서 오른 쪽을 쳐다보니 어떤 분이 계시더군요. 유명한 분이었죠. 김일성은 궁전 밖으로 나갔습니다." (94년6월27일 꿈.)
이 꿈 이야기 역시 그 분은 노트북에 다 필기를 한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소식을 접했다. 난 이런 꿈들을 꾸고도 김일성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다만 인간이 잘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이 나에게 그런 사건을 미리 보여줬다는 사실에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을 가졌다.
또 다른 두 개의 꿈도 그분에게 아울러 밝혔다. 같은 해 7월11일과 7월17일에 본 꿈이다. 김일성, 김정일, 백두산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이 꿈들은 이 지면에 밝히기 밝히지 않는다. 거북해서다. 미래를 보여준 내용이고 다소 사적인 의미가 서려있어서다.
당시 나는 김일성이 죽기 전에 이런 꿈들은 주위 몇 몇 아는 사람들에게 밝힌 바 있다. 그냥 깊은 뜻 없이 별 이상하고 희한한 꿈을 다 꿨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런데 꿈에 대하여 중요성을 알아차린 어떤 사람이 보통 꿈 아니니 아무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신신 당부하는 게 아닌가. 그리하여 난 오래 동안 입을 봉했다.
시름하는 박정희
1992년 5월 28일, 꿈에 박정희 대통령은 자손에 대한 걱정하는 말씀을 하신다. 박 대통령이 다른 내용 보여주는 꿈은 꾸었지만 자손에 대하여 걱정하시는 내용의 꿈은 이게 처음이었다. 아들 박지만 씨에 대한 말씀을 하셨는데, "내 아들이 썩어간다"며 우시는 것이었다. (지만씨는 당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방황했다.) 그러시면서 한국에 나가 "내 아들 지만이를 찾아보게. 찾아가 만나서 말 좀 해보게"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개발독재로 욕은 듣지만 역사상 최고의 업적을 이룬 지도자로 기록된다.)
박 대통령을 꿈에 뵈우면 내 기분 좋다. 그런데 그렇게 애처롭게 우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슬퍼하시는 그 모습도 그랬지만, "가서 지만이를 만나보게"라고 한 부탁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이유도 있었다. 만날 수 있는 인연도 없는데 어떻게 만날 수 있다는 말인가. 또 만약 만날 수 있다해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줘야 한다는 말인가. 정신병자 취급받기 안성맞춤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 꿈은 잊기로 했다.
훗날 그 꿈이 왜 보였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앞서 밝혔듯이 내가 심부름으로 만나게 될 분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몰랐던 육완득 사장, 그리고 박사주라는 분, 이분들 '92년도 6월14일 뵈었다. 박 대통령이 내 꿈에 나타나 아들 지만씨를 만나라 했던 꿈을 꾼 것은 그분들을 뵙기 약 보름 전인 5월28일에 보였다. 정말 묘한 타이밍이었다. 그때 나는 그 꿈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 같다.
육신을 쓰고 큰 일을 하던 사람은 대부분 육신을 벗은 후에도 그 사람에 대한 격의 자리가 낮지 않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박 대통령은 내가 한국 가는 것을 알고 또 한국 가게 되면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훗날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하기 보름 전 꿈에 "가서 지만이를 만나 말 좀 해보게"라 하는 부탁의 말씀을 한 것 같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일이 일어날 당시엔 그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깨닫지 못한다. 그리다 나중에 깨달음을 느끼면 후회하게 된다. 내가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만나게 될 분들이 누구인지 미리 알았다 해도 내가 그 분들에게 꿈에 대하여 자세한 말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아마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내가 박사주라는 분을 만났을 때 옆에 함께 있었던 육 사장님이 육영수 집안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또 박사주라는 분이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난 감히 박 대통령이 꿈에 자꾸 보인다는 말은 못했을 것이다.
나중에 왜 박 대통령이 아들 지만씨를 만나보라는 말씀을 했나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첫째, 내가 그 분을 항시 깊이 생각하고 꿈도 많이 꿔서인 것 같다. 조갑제씨를 만나서 나 나름대로 박정희에 대한 책을 썼으면 하는 말을 했을 정도면 내가 얼마나 박정희에 대한 생각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내 나이가 아들 지만씨와 동갑이어서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동갑끼리의 말은 편할 것 같고 나름대로의 이해가 남다를 것이라 생각해서 그런 부탁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박지만씨 몇 달 전 결혼했다. 박 대표가 너 좋아 눈물까지 흘렸다는 뉴스를 신문 기사를 통해 알았다. 또 LA에까지 와서도 동생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여 기뻐했다. "이 한복... 미국 와 처음 LA서 입었는데요... 내 동생이 결혼할 때 입었던 옷이랍니다." 박 대표는 이렇게 말하며 화사한 웃음으로 기쁨을 보여줬다. 그 기쁨 보통 이상이라는 것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박 대표는 워싱턴과 뉴욕에서는 너무 바빠서 못 입었다 함.)
(결혼식 올리는 박지만, 너무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동생 지만씨 결혼식 때 입었던 한복, LA, 박 대표.)
그런데 그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을 가졌던 분이 계셨다. 그 분은 저 세상에서 바라다보신 아버지 박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이 '90년대 초 한번은 꿈에 이런 말씀을 하신다. "살아 생전 하고싶은 일이 너무 많았는데, 그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이렇게 온 게 한일세. 내 살아생전 하려던 일은 다른 사람을 통해 이뤄질 걸세."
난 이 분의 말씀 무엇이 어떻게 이뤄지게 될 줄 모른다. 하지만 느낀 것은 그 분의 뜻대로 국가가 경제적으로 부강해지고 국민도 더불어 더 잘살 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를 하고자 한다. 사실 지금 우리 나라는 많은 세계 국가들 중에서 경제에 있어서 거의 열 번째로 강한 국가로 변모했다. 10년 전 만해도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는데 지금 10대 20대의 세대들은 아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정도로 한국의 세계 속 위상은 엄청 변했다.
박 대통령 꿈에 대하여 할 말은 많다. 하지만 밝히기 거북하여 덮어둔다. 황당한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이 받아줄 수 없으면 이상한 사람만 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나라 정치에 대해서 원하는 바를 하나 더 말한다. 그것은 나라 일을 계속 돌보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자손 박 대표에 대한 기대가 크다. 지금 박 대표의 약진적 활약이 박 대통령의 업적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 없을 것이다.
꿈에 나타난 노무현 대통령, 반대만 할 수 없는 이유
조갑제씨가 최근 박근혜 대표를 비난했다 신문 기사를 읽었다. 김정일의 대변인이 되었다는 식의 비난이었다. 얼마나 화났으면 그 분이 존경한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을 그렇게까지 비난할 수 있었겠냐마는 예전의 정치 틀을 놓고 볼 때 어떤 면에 있어서는 그 정도 비난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이해되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 국제 및 국내 정치 틀은 우리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묘한 약점이 있다. 때문에 미국이 "힘의 외교/군사력"으로 공산주의 본거지였던 소련을 무너트렸던 일은 이북에서 일어나기 힘들다. 왜냐면 이미 자본주의로 전환하여 크게 성공한 중국이 이북의 후견인으로 보호막을 만들어 보호하기 때문이다. 미국도 그래서 전전긍긍한다. 이런 새로운 차원에서 한반도의 남과 북, 그리고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젠 미국이 소련과 이라크에 보여준 그런 힘으로 이북 정권을 무너트릴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DJ 정권이 불법 송금으로 도와주지 않고 그냥 방치했었다면 지금쯤 이북은 황장협씨 말대로 자연사 증상을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을 가능성 높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김정일 정권을 그렇게 쉽게 무너트리려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갑제씨의 박 대표에 대한 비난은 2002년도 대선 때의 나 자신을 돌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난 절대적으로 이회창 후보가 차기 대통령이 되어지길 학수 고대했다. 그런데 하늘이 무심(?)했는지 그렇게 반대했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그 당시 황당했다.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허무한 생각만 들었다.
그런데 내 꿈에 그의 패색 증조가 이미 2번 보인 일이 있었다. 2002년 10월 난생 처음 이회창 후보가 내 꿈에 보였다. 그 꿈 자체는 좋다고 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꿈의 내용이었다. 그 꿈에 이회창 후보를 보았던 곳은 어떤 호텔의 벵큇(banquet) 하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많았고 연설을 끝내고 나오는데 이회창 후보가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난 망설였다.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할까 말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내 손은 내밀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회창 후보는 그냥 날 지나쳤다. 난 머리를 돌려 이회창 후보를 바라보며 쫓아가서 인사를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아 그럴 수 없다는 생각에 인사를 하지 않았는데 그 때 꿈에서 깼다.
두 번째 꿈은 이회창 후보를 미국 서부 해변가에서 봤다. 난 해변가 찻길을 운전하고 가는데 이상하게 그 해변가 길엔 눈이 내려져 있었다. 눈길을 달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눈길을 달리는데 해변가에서 이회창 후보가 홀로 걸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난 그 순간 급브레이크를 잡았다. 길에 눈이 와서 그런지 차는 미끄러져 한참 앞으로 나갔다. 뒤를 돌아보니 이회창 후보는 홀로 저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난 후진기어를 넣고 약간 후진하다 말았다. 가서 뭐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없어서였다.
이 꿈을 꾸고 몇몇 사람에게 말했다. 별 묘한 꿈이 다 보였다고... 사람이 꿈에 보였으면 그 사람과 대화를 해야하는데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아서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당시 난 인터넷을 통해서 차기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가 되어야 한다는 글을 올렸다. 신문사 게시판에 올렸던 것이다. 이회창 후보에 대한 글을 올렸으니 다시 말해서 노무현 후보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글은 특히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H신문과 K신문에 많이 올렸다. 내가 노무현 후보를 반대하는 글이 그냥 반대가 아닌 장문의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올려서인 것 같았다. 정도가 심했는지 K신문에서는 어느 날은 나 때문에 몇 시간 게시판을 잠시 폐쇄하는 일도 벌어졌다.
H신문은 아무리 노 후보를 반대하는 글을 올려도 삭제하지 않는데 K신문은 그렇지 않았던 것은 좀 예상 외였다. K 신문은 좀 논리적으로 장문의 반대하는 글을 올리면 다 삭제했던 게 당시의 상황이었다.
K신문은 당시 나를 '알바'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어떤 정치단체와 연결되지 않았고 지금도 그 어떤 정치정당과도 관계가 없다. 미국에 사는 사람으로써 그냥 나의 보수적 색깔 이 강한 사견을 글로 올렸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 때 그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 조갑제씨의 박근혜 대표가 예전 박 대통령이 김일성/김정일에게 당했던 일을 망각하고 어떻게 김정일에게 미국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겠다고 하자 화가 난 것 같다. 이 심정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 하지만 세상일은 생각하지 않게 돌아가는 예가 허다하다. 좌파 분자로만 보였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일이 그 예 중 하나다.
원치 않았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취임식 하던 날, 2003년 2월25일 새벽 4:32분, 내 꿈에 처음 노무현 대통령이 나타났다. 믿기 어려운 꿈이었다. 그 꿈 내용은 이렇다.
청와대가 보였다. 비가 오고 있었고 하늘도 흐렸다. 그냥 흐린 게 아니라 매우 흐렸다. 난 검정 우산을 쓰고 청와대 바깥 담장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청와대 담장을 넘어 나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난 생각했다. '아니.... 어떻게 대통령 된 사람이 담장을 넘어 나오지?'
노무현 대통령이 담장 넘는데 다른 경호원들은 어쩔 줄 모르고 그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담 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당황해 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였지만 저지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대통령이 담장을 넘자마자 난 내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서 종로 쪽으로 쭉 돌았다. 그리고 다시 똑같은 장소의 담장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은 그 담장을 다시 넘어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 꿈을 꾸고 잠자리서 일어나 일기에 내용을 썼다. 계시적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아... 그 동안 나는 노무현 후보 너무 좌파적이라 죽어라 반대했는데, 이젠 이 사람을 그렇게 반대하지 말라는 뜻으로 하늘이 보여준 것인가...'
난 이 꿈을 꾼 이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하여 다른 시각으로 보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진정 사람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다 그의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노무현을 극도로 증오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겠지만 첫째, 노무현 대통령의 심성은 남달리 선하고 여려 악의 근성이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형적인 그런 부패한 정치인이 아니라는 것. 둘째, 비록 박정희와 정치적 사상 면과 통치 스타일에 있어서 극과 극의 대치를 이루고 있지만 박정희 못지 않게 청렴하다는 것. 셋째, 사리사욕이 없고 재물 이권을 둘러싼 계산에 약하다는 것. 넷째, 그 어떤 욕을 먹어도 일단 신념이 서면 정치적으로 손해봐도 옳다는 사안을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 대부분 이런 사람은 고집이 세다. 그런데 여린 마음 소유자 같지 않게 노 대통령은 황소고집의 면면을 보여줘 약간 놀랠 때가 있다.
아무튼 나 자신도 내가 그런 꿈을 꾸었는데도 그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내용이었기에 해몽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대통령 취임식 하는 날 대통령이 담장 넘어 나오고, 또 다시 그 담장을 넘어 들어가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별 생각을 다하다 아침에 아는 사람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오후엔 동부의 아는 사람에게도 꿈 이야기를 했다.
또 다른 한 사람에게도 말했다. 챗 사이트에 로그인 하고 있던 어느 날, 2003년 3월,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한국인)이 정중하게 말 좀 나눌 수 있냐고 말을 걸어왔다. 평상시에는 그런 요청 거의 다 모른 척 했다. 그런데 그 날은 이상하게 거절하지 않았다.
말을 나누니 서로 말이 잘 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런지 금방 절친한 대화친구(chat friend) 사이로 발전했는데 엄청난 양의 대화가 오갔다.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았고 대화가 매우 편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 사람과 대화를 하다 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되었고, 또 내가 꾸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식 하던 날의 꿈도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난 말했다. 취임식 새벽에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 담장을 넘어 나와 나의 우산을 쓰고 시내를 돌아다니다 다시 그 담장으로 돌아가 그 담장을 넘어 청와대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이 말을 들은 그 사람도 정말 신기한 꿈이라고 말하며 사실 자신은 앞장서서 정치운동은 하지 않았지만 노사모 회원이나 마찬가지라 한다. 자기와 절친한 친구고 유럽에서 공부하는 친구도 노사모라 한다. (노사모 운동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어서였을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말했다. 내가 꿈 꾼 시간대가 새벽 5시전인데, 그 시간대에 꾼 꿈은 거의 다 맞는다고... 분명 그 꿈은 1년이나 2년 후에 맞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내용으로 사실이 전개될 지는 모른다고 했다. 꿈은 대부분 "상징성"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 대화는 2003년 3월 중순에 나누었고 1년 후 꿈대로 정말 묘한 일이 벌어졌다.
2004년 초 정치계에 이상한 기류가 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대통령 "탄핵" 운동이 국회에서 일어났다. 그런 꿈을 꾼 지 13개월만에 현실로 벌어진 것이다. 자연히 꿈에 대한 기억이 새롭게 되살아났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하.. 그 꿈이 이 일이구먼....' 그러면서 이런 확신이 들었다. 그 탄핵 안 관철되지 않는다고....
이런 사실을 안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청와대에 편지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노 대통령 앞으로 편지를 썼다. 내용은 취임식 날 새벽에 봤던 그 꿈에 대한 내용을 적었고 탄핵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 편지엔 또 내가 얼마나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반대했던 사람이었는가에 대해도 썼다. 그런데 그런 묘한 꿈을 봄으로 인하여 하늘의 어떤 뜻이 서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노무현 대통령을 적극 반대하는 것을 접게 되었다고 밝혔다.
작년 그런 편지를 노 대통령에게 보내고 약 열흘 후 꿈을 꾸었다. 청와대 몇몇 사람이 내 편지를 읽어보고 별 이상한 내용의 편지가 다 있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편지를 전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내 편지를 읽고 희색으로 변하여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꿈은 이렇게 보였는데 실제 청와대에서 어떤 일이 있어 났는지는 나는 알 수 없다. 편지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보냈다.)
이런 일의 경험으로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반대만 할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이 일 뿐 아니라 박 대통령이 시해 당한 이후 꿈에 나타났던 것, 김일성 죽기 전에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 꿈, 더불어 노 대통령이 탄핵 당하기 1년 전 꿈을 통하여 담장을 넘어 나와 다시 담장을 넘어 청와대로 것 등등을 미리 보았던 것, 이 모든 것들은 예시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머리로 뜻을 해석하려면 풀 수 없을 것이다.
나같이 꿈을 통해 뭔가 보는 사람도 뜻을 모르고 실수를 한다. 하물며 아무 것도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더 실수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단순한 차원에서 정치에 대한 단면만 보고 판단을 내릴 게 아니라, 남의 입장에 들어가 보고, 국가의 백년대계도 생각해 보고, 또 사심을 버리고 정말 무엇이 국민을 위한 일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풀기 어렵게 보이는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려질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니 꼭 "노사모"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지 않다. 나의 다른 글을 읽어보면 노무현 정부의 정책 비판이 여럿 있는데 그것을 보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꿈 때문인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인정해줄 것은 인정해 준다. 그렇지 않은 면은 인정하지 않는다. 정책 사항을 놓고 인정하고 인정하지 않고 하는 사항이 다르게 나온다. 인정하지 않는 것은 국가보안법으로 이렇게까지 국론을 분열시킬 필요 없다는 것이고, 또 친일파라 부르며 과거청산 한다는 미명하에 원치 않게 친일적 행위를 한 사람들까지 60년이 지난 이때 처벌을 한다면 더더욱 국론만 분열되어 국력만 낭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친북 활동한 사람들도 다 추려 내어 정치보복이 따르게 되 국가는 더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결코 건설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행정도시 건설은 찬성한다. 국가 인구 거의 절반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산다. 절반 인구가 한 지역에 쓸어져 담겨 나라가 운영되는 국가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수도권 인구 27%였을 때 수도이전을 구상했던 것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이 문제는 누군가가 총대를 매고 풀어야 한다.
노무현 정권의 사관(史觀), 정치관, 외교관(觀)으로 인한 혼란
한번 생각해 보자. 해방 후 과거 정권들이 지금의 노무현 정권과 같이 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현재 우리 나라의 위상이 세계 상위권 교역국이 되었나? 아니다. 생존을 위해 할 수없이 수동적 친일적 행위를 한 사람들은 국가가 보호해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현 정권을 그렇지 않고 국력만 소비되는 마녀 사냥 식의 과거청산을 쫓겠다 하니 이게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식의 과거 친일파 규명은 국가만 분열시키고 일본만 유리하게 만든다. 예전 이북 정권이 친일파를 대청소한 것 같은 그런 식의 방법으로 친일파를 박멸하겠다면 사회적으로 친일파를 매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북 정권이 그렇게 했는데 그리하여 이북 정권이 그렇게 잘 살게 되었나? 그들은 국가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갈만한 전문가들을 다 죽였다. 결과는 나라만 망조 들게 만들었다. 남한은 반대로 비록 그들이 비록 친일로 지탄받을 수 있는 일을 했으나 그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하여 경제부흥에 밑거름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지금의 든든한 경제한국을 만들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무조건 친일 흔적이 있다고 정죄 하고 사회적으로 매장시킨다면 국가가 잘 살게 되어질까 하는데에 대해서 깊은 생각을 해봐야 한다. 국가가 절단 나는 일일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봐야 한다. 마치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아 과거 박정희 잔재를 청산한다며 성공한 "군사 혁명"을 "군사 쿠데타"로 규정하고 쓸데없이 교과서 내용 바꾸는데 국가 역량을 낭비하고 경제를 등한시하며 "박정희 죽이기" 일로 일관하여 결국 IMF 경제사태를 일으킨 것 같이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혁명"과 "쿠데타"를 의미를 나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 "혁명"은 자신의 이익을 쫓지 않고 국가의 안녕과 민생을 위한 정치적 틀 바꿈의 완전 개혁을 추구하는 대변혁이라고 생각한다. 1776년의 미국 혁명(American Revolution)이 그랬고 1789년의 불란서 혁명(French Revolution)이 그랬다. 반면 "쿠데타"는 국가를 위하는 공익 차원에서의 틀 바꿈보다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적 반란으로써 국가의 민생고를 어렵게 하는 네거티브한 개혁적 대변혁 결과만 낳는다. 이런 차원에서 박정희와 김영삼을 정치 업적을 비교한다면 오히려 김영삼은 허울 좋은 민주화의 탈을 쓴 선거 변란으로 민생고만 파탄시킨 주범이 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되고, 또 그것은 허울만 좋은 실패한 "민주 쿠데타"로 규정지을 수도 있다고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번 독도 문제의 불거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국력이 없으면 그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국제사회에서 먹혀들지 않는다. '95년 1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본 버르장머리를 고쳐버리겠다"고 했는데 그 일본 버르장머리 고쳐졌나? 10년이 흐른 지금 버르장머리 고쳐지기는커녕 10배 이상 버르장머리가 더 없어졌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의 편협적인 지도력과 자국의 이익만을 탐하는 과정에서 악화되는 미중(美中) 패권 다툼에 일본의 도움이 절실해지니 이 기회를 십분 이용할 수 있어서 가능해졌다. 그리하여 일본은 과거 잘못은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과거 죄를 덮고 미화하려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런 일 일본의 경제와 군사력이 뒷받침 된 국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런데 이런 국가도 더 국력이 강한 국가에게는 자존심을 저버릴 줄 안다. 자존심이 좀 상한다 해도 국력이 강한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체제를 더 공고히 할 수 있는 것도 국가의 외교적 수완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이렇지 못하다. 힘은 더 약하고 과거에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도 그 과거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식으로 '우리도 할 말은 한다'라는 우월적 고자세로 자존심을 내세운다. 그러니 우방이 고개를 절래하며 멀어져 가는 것이다. 만약 이런 자세를 북한정권을 향해서 적용할 수 있다면 그게 올바른 외교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비굴할 정도로 이북 정권에게는 저자세다. 우리 나라 지도자가 김정일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잡혔단 말인가?
일본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강한 태도를 보이는 태생적 국민성 결함을 가진 국가며 그것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로 되어진 나라다. 한국은 다르다. 한국은 어려울 때 도와주면 도와줘도 고마운 지 모른다. 신사적으로 도와주면 어려울 때만 고개를 숙인다. 특히 현 정권에 들어와서 그 정도는 더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리고 어려운 고비를 넘기면 목소리를 높이고 더 나아가 은인에 칼도 들여댄다.
김영삼 정권도 그랬고 노무현 정권도 그렇다. 강한 국가에는 강한 면을 보여주려는 다소 허세적 기질이 강하다.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것 같은 행동을 보여준다. 기사도적 정신의 허세나 환상에 잘 빠진다. 실제 국력은 전혀 뒷받침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환상에 빠지길 좋아하면 외교적 손해만 초래한다. 더 나아가 강국들에 의해 고립만 자초한다.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그런 국제 정치관이 바로 그런 상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깨닫고 있는지 궁금하다.
우리 나라는 국가의 땅덩이, 인구, 경제력, 군사력 아직 강국의 턱에도 가지 못한다. 약국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의 최고 생존 방안은 힘이 강한 국가와 끈끈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는 게 효율적 국가 경영이다. 다시 말하면 강한 국가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좁은 국가가 그 적은 인구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면 얼마나 부강하게 만들 수 있겠나. 또 부강하게 만든다 해도 이웃과 견줄 수 있는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그 돈은 천문학적으로 들어간다. 그것을 우리가 감당할 수 있나? 때문에 우린 미국이라는 강국의 우산 아래 더 무임승차(?)를 해야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국력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우리도 주권국가인데 왜 당신들에게 굽실거려야 하나 하는 자세로 목청만 계속 돋군다면 일본은 그 상황을 보고 좋다며 손뼉을 칠 것이다. 왜? 독도 같은 분쟁이 생겨도 미국이 일본 편을 되어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이 한반도에서 영원히 떠났다 가정해 보자. 일본은 더 기고만장해져 독도는 그들 영토라 주장할 것이고 더 나아가 군사력으로 얼마든지 독도를 장악할 수 있다. 그럼 중국은 자극 받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러시아 역시 개입하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는 100여년 전 중국, 일본, 러시아가 자행했던 그런 한반도 식민지화를 재연시킬 수 있다는 가정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결국 한반도는 또 강국들의 싸움에 휘말려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진다.
노무현 정권은 이런 면 심각히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일을 안일한 생각으로 대처한다. 다행히 근간 독도 일을 강경하게 대처하여 국민의 지지도가 올라가고 있지만 아직 미흡한 점 많다. 애초 독도 문제 조용한 외교가 좋다고 안일한 대처를 하다 당했고, 약 500년 전의 임진왜란도 그런 안일한 대처로 침략 당했다. 을사조약과 한일합방도 그런 사고방식으로 국가를 이끌고 나가 당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또 앞으로는 그런 일 재발되지 않도록 성숙된 외교전을 펴야 국익을 제대로 챙길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미국에 대한 저자세가 굴욕적 외교라 생각하여 쓸데없는 핏대를 내세우는 것은 열등감에서 발로되었다고 삼자는 본다. 일본이 그래서 조센징이라며 우리보고 비웃는 것이다. 이런 우리 민족성은 강자가 약자를 완력으로 다루고 무지막지하게 힘으로 지배하면 목소리를 낮추는 습성이 있다. 일본이 과거 우리의 이런 민족성을 알았기에 무서운 완력으로 우리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고쳐야할 민족성이다. 혼란만 야기된다. 대신 미국을 향해 내세우는 그 자존심을 이북 정권에게도 보여줄 수 있어야만 진정한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꿈과 국운의 연결 가능한가
꿈은 누구나 항상 꾼다. 사람에 따라서 간밤에 꾼 꿈을 자세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또 꾼 꿈을 어떤 때는 기억하고, 또 어떤 때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때가 있다. 나는 내가 꾼 중요한 꿈은 거의 다 기억하는 편이다. 아주 중요한 꿈은 꿈을 꾸자마자 일어나는 때가 많다. 그럴 때는 일기에 기록한다. 때문에 다 잊은 꿈도 몇 년 후나 10년 후에 읽어보고 나 자신도 놀란다. '아... 내가 이런 꿈도 꾼 일이 있었구나... '하며 감탄할 때도 있다.
누가 "국운을 본다"고 한 말 같이 나의 꿈 맞는 때가 많다. 앞으로도 그런 꿈은 종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아무에게나 말할 수 없다. 특별한 경우에만 말할 수 있다. 바로 박 대표의 정치적 미래에 대하여 이런 글을 쓰는 경우가 특별한 경우라 말할 수 있다. 꿈을 통해서 13년 전 육영수 여사 집안 사람과의 만난 일이 있었고, 또 5.16혁명 날짜를 택일해준 사람까지도 우연히 만났으니 이 지면을 통해 정치인의 미래에 대한 꿈을 심어준다면 분명 특이한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꿈에 대한 말이 이야기가 여기저기 나온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요셉"일 것이다. 요셉은 다음과 같은 꿈 이야기를 한다. (1)처음으로 꾼 꿈(창세기 37:6-7), (2)두 번째 꾼 꿈(창세기 37:9-10), (3)바로에게 술잔을 올리는 시종장의 꿈(창세기 40:9-11), (4)바로에게 빵을 구워 올리는 시종장의 꿈(창세기 40:16-17), (5)바로의 첫 번째 꿈(창세기 41:1-4), (6)바로의 두 번째 꿈(창세기 41:5-7). 이렇게 6가지가 나온다. 이 외 꿈을 해몽한 내용도 4군데에 더 나온다.
요셉이 꿈으로 인하여 가장 유명한 일화를 남긴 것은 그가 애굽 왕 "바로" 앞에서 그의 꿈을 정확히 해몽하여 총리로 임명된 일일 것이다 (창세기 41:41). 바로 왕이 본 꿈은 나일강 가에서 본 암소. 파리, 흉한소, 충실한 일곱 이삭, 가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에 대한 것이다. 요셉은 그 꿈을 이렇게 해석한다: "일곱 좋은 암소는 일곱 해요. 일곱 좋은 이삭도 일곱 해며 그 꿈은 하나라 그 후에 올라온 파리하고 흉한 일곱 소는 칠 년이요 동풍에 말라 속이 빈 일곱 이삭도 일곱 해 흉년이니..."
비단 성경만 아니라 부처님의 탄생도 꿈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머니 마야 부인의 꿈에 코끼리가 옆구리를 뚫고 들어오는 게 보인 후 부처님을 잉태하고 중생을 구할 사명을 갖고 올 부처님을 탄생시킨다.
우리 나라의 고대사에도 꿈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유신 장군 시대의 이야기다. 당시 신라 시대에는 성골이나 진골이 아니면 출세할 수 없는 그런 엄격한 신분사회였다. 김유신 장군도 사실은 출세할 수 있는 만한 집안의 핏줄 인물이 아니었다. 때문에 출세하고자 하는 꿈은 컸지만 출세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 때 김유신은 누이동생을 이용하여 기발할 출세가도의 꿈을 그렸다. 그 기발한 발상은 김유신 장군 누이동생의 지략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 내용은 이렇다.
김유신 장군에게는 맏누이 보희가 있었고 누이동생 문희가 있었다. 하루는 문희의 언니 보희가 꿈을 꾸었는데 서산에 올라가 소변을 봤다. 그런데 그 소변이 신라의 서울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가. 꿈이 너무 이상하고 묘하여 다음날 아침 보희는 동생 문희에게 그 꿈에 대한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은 문희는 그 꿈이 보통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대뜸 말했다. "언니 그 꿈 나에게 파시오!"
언니는 "무엇으로 그 꿈을 사겠다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 문희는 서슴지 않고 "비단 치마를 드리겠어요." 라고 말한다. 꿈 파는 조건으로 비단 치마를 받는 다는 것은 횡재나 마찬가지라 생각한 언니 보희는 흔쾌히 응한다. "그래... 지난 밤 꿈을 너에게 준다!"
여기에 대한 내용은 더 깊고 흥미진진한 일로 전개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생략한다. 여하간 이런 일로 문희는 성골인 김춘추와 결혼하려는 계략을 짜서 성공하여 결혼한다. 오라버니 김유신도 덕분에 출세의 가도를 달린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꿈을 꾸고 그 꿈을 가치를 알 수 있었기에 문희가 언니 보희의 꿈을 사서 지략를 짜 그 지략을 성공할 수 있게 만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사타트 전 대통령의 암살과 다음 날 꿈에 나타나 해준 말
미국시간으로 1981년 10월 5일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암살범들은 광신 이슬람교인들인데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한 이유는 원수인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라는 것.
그 뉴스는 톱뉴스로 모든 TV 뉴스의 화면을 차지했었고, 그 일로 2년 전 박정희 대통령이 암상 당했던 일을 상기하게 되었다.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에 그 날 밤 잠들었는데, 다음날 새벽, 10월 6일, 그 사다트 대통령이 꿈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새벽 5시경이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집트 대통령이 나타났던 게 정말 묘했다. 더 묘했던 것은 그 분이 나한테 말한 내용이다.
사다트 대통령과 나는 푸른 초원을 걷고있었다. 초원을 가로질러 저 등성을 넘어 어디론가 가야하는 길이다. 그렇게 걷는데 사다트 대통령은 내 왼쪽 어깨에 오른손을 얹는다. 그리고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예수님의 길을 간다."
이 말 외에 다른 말 전혀 없었다. 오직 "예수님의 길을 간다"는 말만 했다. 아침에 일어나 이 꿈에 대한 생각을 하고 왜 그 분이 이집트와 전혀 상관이 없는 예수님에 대한 말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나 난 아무리 생각해도 거기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 꿈을 꾸고 10년이 넘고 더 오랜 세월이 가도 그 꿈의 내용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왜 그분이 그런 말을 했는가 하는 해답이 떠올랐다. 그것은 그 분이 죽은 이유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 죽은 이유는 아랍인들이 영원한 철천지원수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과 평화협정을 맺고 수천 년의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다 잊고 없었던 일로 청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서 였다.
생각했다. 이스라엘과의 수천 년 동안의 원수 관계를 사다트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다. 자국 국민은 물론 전체 아랍형제들까지 반대한다는 것 알았다.
1977년도 이스라엘 수상 메나킴 베긴과 평화협정을 맺기 10년 전인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공군의 기습으로 아랍 연합국의 군대를 단 6일만에 수백 대의 공군전력을 초토화 시켰다. 아랍국의 자존심을 완전히 밝아버렸던 것이다. 이에 이집트를 주축으로 한 연합 아랍국은 1973년도 10월 몇 년 전 "6일 전쟁"으로 잃었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이스라엘에 대한 대공격을 감행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로 파죽지세로 몰고 들어갔다. 아랍이 이길 것 같았다. 순간 미국이 개입하여 역사상 유래 없는 수십 억 달러의 군수물자를 최단기간에 이스라엘로 공수하여 아랍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다. 이에 아랍국의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타오르게 된다.
당시 중동 상황이 이랬다. 사다트가 이스라엘을 용서하고 "평화협정"을 맺는다 하니 이집트 자국 내는 물론 전 아랍국가에서 사다트 대통령을 배신자로 몰며 죽여야한다는 여론이 들 끊는다. 이 때 암살 음모가 짜여진다.
문제는 사다트 대통령이 그런 아랍인들의 반 이스라엘 정서를 몰랐을까 하는 점이다. 사다트는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사다트 대통령은 자기가 그런 용단을 내려 이스라엘과 손잡지 않으면 이스라엘과 아랍은 영원한 원수로밖에 살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예수님의 근본 가르침은 "용서"와 "박애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으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인 "용서"를 생각하고 그런 신념 하에 죽음을 무릅쓰고 평화협정에 서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로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의 진 뜻을 내 꿈에 나타나 "나는 예수님의 길을 간다"고 말씀했던 것이다.
박정희와 사다트 대통령 죽음의 공통점
두 사람 모두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 재직하다 흉탄에 맞아 죽었다. 그것도 적군이 아닌 가장 믿었던 사람을 통해서 당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최 측근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의해서 세상을 달리했고, 사다트 대통령은 자국 군인들을 사열하는 국군의 날에 사열대에서 그들의 총탄에 맞아 죽었다.
또 두 사람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된 후 꿈에 나타나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비록 이렇게 가지만 나라가 평정을 되찾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말씀하셨고, 사다트 대통령은 "나는 예수님의 길을 간다"는 말로 자신을 죽인 사람도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을 꿈을 통해 남겼다.
누가 이런 위인들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야말로 인간성에 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의 딸"로 될 수 있는 길
난 이 글을 쓰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머리에 어떤 글을 써야한다는 나도 모르는 강박감이 들며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아냐... 그런 글쓰면 안돼.' 하는 생각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래서 글쓰는 것을 미루고 했는데 어떤 미지의 힘이 날 누르는 힘이 더 강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안절부절 해졌던 게 그 증표다.
지난 일들을 생각했다. 난 글 같은 것은 쓰겠다는 생각 전혀 하지 않았는데 1989년도 어떤 유대인 아주머니가 나보고 말한 게 생각났다. LA 웨스트우드 연방청사 빌딩 가까운 데서 들은 말인데 그 사람 말은 이랬다. "당신은 언젠가 책을 씁니다. 좋던 싫던 당신은 책을 써야할 운명입니다."
물론 그 유대인 아주머니는 책을 쓰게 되면 어떻게 되게 될 것이라는 더 자세한 말도 했었고, 또 당시 나에게 일어나고 있던 일에 관해서도 말했다. 그러면서 도와주겠다고 한다. 난 거절했다. 글을 쓰게 되며 나중에 책을 쓰게 된다는 말은 믿지 않아서 거절한 것이다. (1989년도엔 글쓰는 것조차 싫어했다.)
책을 써야한다고? 神의 조화인지 장난인지 모르지만 아마 그런 운명 때문에 이런 글을 쓰고있는지 모른다. 또 아마 그런 이유로 1997년도 조갑제 부장을 보스턴에서 만나 박정희에 대한 책 이야기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아무튼...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 싶은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성취하고자 하는 중요한 4개의 정치사안 중 2개는 옳고 2개는 그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박 대표는 아버지가 항상 굽어 내려다 봐 시시각각 찾아오는 위기를 의외로 잘 넘길 것 같다고 말하고 싶다. 그 분의 뜻대로 대권까지 내다볼 수 있는 날이 생각과 같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생각도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청렴을 지키고 사리사욕이 없어야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다. 재물을 멀리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별로 들지 않는다. 박 대표의 본래 태어난 태생이 사리사욕과 너무 멀어서다.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좋은 점을 골고루 갖춘 사람이다. 지금은 그렇게 안 보이는 것 같지만 다스릴 수도 있고 어머니 같이 품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남북통일도 "강"으로 꺾어서가 아닌 "유"로 녹여서 만들 수 있는 자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워싱턴 포스트 말대로 "한국의 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라 생각하는데 행운의 신이 따르길 기원하며 이 글 여기서 줄인다. |
첫댓글 조금 안심이 되는 군요. 이후의 일은 말씀하시기 곤란하거나 아직 때가 아니여서 ...
대단하십니다.책을 쓰시기 바랍니다.당신은 신의 계시를 받은 듯 합니다.어느 누구도 운명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감사
박대표님 엘에이 방문시 환영회 끝난후 수고하신 여러분과 저녁식사를 할기회가 있었는데 ,그중에 한분이 유명한 역술가이셨읍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러시더군요 ,자기같은 사람은 원래 정치인들 모임에 들어내지 않는데 박대표님에 사주와 2007년 대선과 아주 잘 맞는다고요....박대표님 홧팅!!
Sean Lee님은 미국에서 살고 계신 분이시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