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관 - 스톡홀름 : 노벨 박물관 ‘북구의 베네치아’에서 기리는 과학자 최고의 영예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3. 17. 0:38
세계의 과학관 - 스톡홀름 : 노벨 박물관 ‘북구의 베네치아’에서 기리는 과학자 최고의 영예
2024.01.22. 23:44조회 8
스톡홀름 : 노벨 박물관
‘북구의 베네치아’에서 기리는 과학자 최고의 영예
해마다 10월이 되면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은 ‘북구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북유럽의 한 도시에 집중된다. 이 도시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에는 중립국의 수도로서 외교의 무대가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핵무기 금지 운동을 비롯하여 국제적인 회의가 많이 열리고 있다. 귀에 쏙 들어오는 멜로디와 흥겹고도 단순한 리듬으로 뮤지컬<맘마미아>와 함께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팝 그룹 아바(ABBA)를 탄생시킨 이곳은 중립과 실용주의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최대 도시로 손색이 없다. 1250년에 스타덴 섬에서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고 지금도 그 무렵의 교회와 시장 광장, 불규칙한 도로 등 옛사람들의 기억과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인류 최고의 창의적 성과를 칭송하고 격려해 주는 이곳은 바로 도시 스톡홀롬이다.
매년 12월 10일이 되면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여 물리학과 화학 그리고 생리의학 분야에서 최고의 과학자들을 선정하고, 이들에게 노벨과학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을 진행한다. 스웨덴 국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정치인들이 참석함으로써 전 세계인의 시선을 한데 모으는 시상식이 끝나면 수상자들과 초청받은 축하객들은 전망 좋은 시청 건물의 거대한 블루홀에서 행해지는 공식 만찬에 참석한다.
스톡홀름의 전경
전 세계 언론과 방송은 전통과 격식이 어우러진 최고의 수상식과 만찬을 생방송하기 위해 몰려들고, 때문에 노벨상 수상 시즌에 스톡홀름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가 펼쳐진다. 전 세계에서 가장 지적이면서도 가장 화려한 축제가 북구의 겨울 도시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수상식장은 이탈리아 산레모에서 특별히 재배되어 비행기로 공수된 꽃들로 화려하게 장식된다. 공식적인 노벨 만찬에는 매년 약 1,300명이 특별히 초청되며 매우 신중하게 선별된다. 참석하는 모든 남자들은 반드시 연미복을 입어야 하기 때문에 수상자들은 물론 초청받은 하객들도 연미복을 마련하느라 분주하다고 한다. 매해 노벨 만찬은 새로운 메뉴로 초청객을 대접하는데 만찬의 메뉴는 서빙될 때까지 비밀에 부쳐진다. 보통 3코스로 이루어진 만찬은 약 4시간 동안 진행되며, 약 260명의 서비스 직원들이 시계처럼 정확하게 움직이며 모든 참석자들에게 거의 같은 시간대에 음식을 서빙한다고 한다. 상금 액수만 해도 13억 원에 달하는 최고의 상인만큼 노벨상은 수상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국에도 대단한 영광이다.
이처럼 영예로운 노벨상은 1900년에 설립된 노벨 재단이 제정하고 운영하고 있다.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난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300건에 달하는 특허를 보유했던 발명가이자 화학자이며,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글로벌 사업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발명 사업에 열중하느라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고, 그 덕분에 노벨은 자주 이사를 다녔다. 1837년에 그의 가족은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는데,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면서 다시금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에 빠진 아버지는 그의 가족을 데리고 러시아를 떠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혼자 남겨진 노벨은 다이너마이트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 1867년에 마침내 니트로글리세린을 활용하여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는 데 성공한다.
노벨의 연구실을 재현한 모형
굉장한 폭발력을 자랑하던 다이너마이트로 인해 폭파가 어렵던 공사 현장의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면서 노벨은 한순간에 유럽 최대의 부호가 되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듯이 그의 발명품은 전쟁에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무서운 무기가 되었다. 어릴 적 공장이 폭발하여 동생을 잃었던 아픈 경험이 있는 노벨에게 이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선의로 발명했던 다이너마이트가 인류를 파괴하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로 몹시 괴로워했던 노벨은 자기 전 재산의 94%를 기부하여 노벨상을 제정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처럼 노벨상은 인류 평화를 갈구하는 그의 진정한 희망을 반영한 것이다.
노벨은 1896년 12월 10일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 1년 전에 이미 유언장을 작성했다. 다음 해에 공개된 그의 유언장에는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위해 3,100만 크로네(약 45억 원)를 기증할 것과 그의 유산을 관리하기 위한 노벨 재단의 설립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노벨 재단은 1901년부터 매년 노벨상을 선정하고 수상해 왔는데, 2014년까지 모두 889명(두 차례 받은 사람을 제외하면 847명)의 수상자가 배출되었다.1)
노벨상은 수상자의 업적이 인류의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했는지, 얼마나 많은 인류를 구하기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한 칭송이자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수상자들의 연구 대부분이 당시 학계의 주류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이며 또 대부분의 수상자가 최소한 20년에서 5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에야 상을 수상한다는 것이다. 이는 노벨상이 새로운 과학적 이론보다는 실험을 통해 확인된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노벨상 위원회가 추천하고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가 선정하는 노벨물리학상의 경우에 아인슈타인은 상당히 뒤늦게 수상했다. 스위스 특허청에 근무하던 젊은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3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 편은 빛의 파장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한 광전효과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한 편은 박사 학위 논문인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며, 마지막 한 편은 특수상대성이론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1921년에서야 노벨상을 수상하는데, 그것은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었던 상대성이론 때문이 아니라 이론물리학에 기여하고, 특히 광전효과의 법칙을 발견한 공로 때문이었다. 특수상대성이론이나 일반상대성이론이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1905년에 제안했던 빛의 광전효과를 실험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인슈타인이 1923년에 스웨덴을 방문하여 노벨상 수상 기념 강연회에서 강연한 내용은 광전효과가 아닌 상대성이론이었다.
노벨상은 과학 연구에 종사하는 모든 과학자들의 로망이지만, 정작 자신이 수상하게 될 것을 예측하기는 매우 어려운 상으로도 유명하다. 첫 수상자를 배출한 지 100년이 넘은 오늘날까지도 노벨상이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 이유에는 바로 추천 및 선정 과정에서의 개방성 때문이다. 노벨 재단은 매해 수상자를 선정하기 위해 전년도 9월부터 약 100여 개에 달하는 유수 대학과 연구소에 3,000여 통의 추천 서한을 발송하며, 350여 명의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나 유관한 아카데미의 추천을 받아 광범위하게 후보 풀을 마련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매우 엄격하면서도 공정한 심사를 진행하여 수상자를 선정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수상자들을 알아내기란 여간 쉽지가 않다. 실제로 2011년에 초신성을 연구해 우주의 팽창이 점점 빨라진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솔 펄머터(Saul Perlmutter)는 아마 자신이 수상자로 선정될 것임을 예상한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며 수상 소감을 밝혀 청중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스톡홀름 중심부 감라스탄(Gamla Stan)의 스토토겟 광장(Stortorget)에 위치한 노벨 박물관은 바로 이러한 노벨상 과학자들의 성과를 한눈에 볼 수 있게 전시하고 있다. 노벨상 제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1년에 노벨 재단이 설립한 이곳은 스톡홀름에 현존하는 18세기 건축물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다.
노벨 박물관의 모습
이곳은 노벨의 삶을 기리는 한편, 노벨과학상뿐만 아니라 평화상, 문학상 등 모든 수상자들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보관 · 전시하고 있다. ‘창의성의 문화’를 모토로 삼고 운영되는 이 전시관에서는 짧은 영화를 통해 700여 명의 노벨상 수상자들과 만날 수 있으며, 700여 점의 독창적인 발명품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전 김대중 대통령의 일생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실물자료도 만나 볼 수 있다.
역대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은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 준다. 우선 그 누구도 혼자서 독립적으로 연구 활동을 하거나 그렇게 수행한 연구 결과를 통해 수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은 이미 노벨상을 수상한 선배 혹은 스승의 연구실에서 이들과 연관을 갖거나 어떤 한 시기 동안 같이 지내며 연구 주제나 방법 등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은 서로가 혈연 혹은 결혼으로 맺어진 경우도 많다. 실제로 1901년부터 1976년 사이에 노벨상을 수상한 313명의 수상자를 분석해 보면 대부분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나타나고 일부는 혈연 혹은 결혼을 통한 관계로 나타났다.
또 1975년까지 노벨과학상 수상자들 중에 부모와 자식이 수상한 경우는 모두 다섯 차례가 있다. 양자물리학자인 닐스 보어(Niels Bohr)는 아들 아게 보어(Aage Bohr)가 태어나던 해 노벨상을 수상했으며, 아게 보어는 그로부터 53년 뒤인 1976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J. J. Thomson)은 1906년에 기체를 통한 전기 전도에 대한 연구를 인정받아 노벨과학상을 수상하였는데, 그의 아들 톰슨(G. P. Thomson)역시 1937년에 결정에 의한 전자 회절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특히 윌리엄 브래그(W. H. Bragg)와 로렌스 브래그(W. L. Bragg)는 아버지와 아들로 1915년에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부자로서는 첫 수상자인 이들은 ‘X선 결정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함으로써 현대 물리학과 화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실험에 뛰어났던 아버지 윌리엄과 이론적 개념화에 우수했던 아들 로렌스는 서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했고 또 부자라는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짧은 기간에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이들은 또한 대를 이어 영국 왕립 연구소(Royal Institution)2)소장을 역임하면서 쇠락하던 왕립 연구소를 실험과학 연구의 최전선으로 부활시켰다.
사실 1900년대는 X선의 본성이 입자인지 혹은 파동인지에 관한 논쟁이 매우 뜨겁던 시기였다. 1909년 영국의 리즈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윌리엄은 본격적으로 X선을 이용한 입자 간의 간격을 탐구하는 연구에 몰두했고, 그의 첫째 아들인 로렌스 브래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설득으로 수학자가 되는 대신 물리학을 전공 분야로 선택한 로렌스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대학교 수학우등시험에서 1등의 영예를 안고 졸업했다. 졸업과 동시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일하게 된 로렌스는 이미 X선 결정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고 있던 아버지와 X선의 본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게 되었다.
1912년 여름에 독일의 폰 라우에(Von Laue)는 윌리엄이 이미 수행했던 것과 유사한 연구 내용인 X선이 결정에 부딪히면 회절될 수도 있음을 발표했다. 급박해진 윌리엄은 라우에의 X선 연구 결과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를 아들 로렌스와 상의했는데, 로렌스는 특유의 직관력을 발휘하여 X선이 부분적으로는 파동이고 또 부분적으로는 입자일 것이라는 매우 뛰어난 설명을 제안했다. 윌리엄은 아들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같은 해 11월에 결정에서의 원자 배열, 즉 결정의 구조를 결정하는 데 핵심이 되는 유명한 브래그 법칙을 내놓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여 동안 아버지와 아들은 X선 회절에 관한 공동 연구에 몰입하였고, 염화나트륨 결정이 염화나트륨이라는 분자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염소 이온과 나트륨 이온이 기하학적인 규칙성을 갖고 배열되었다는 점을 처음으로 알아낼 수 있었다. 이것은 화학사에 길이 남을 대단히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윌리엄은 또 실험 기구인 X선-스펙트로스코피도 개발했고, 여기에 방사에 관한 연구 결과가 더해지면서 마침내 X선 결정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분야가 탄생하게 되었다.
나중에 왕립 연구소의 밝혀지지 않은 역사를 서술하던 도중 세상을 떠난 윌리엄의 딸이자 로렌스의 여동생인 카로는 “어렸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만든 결정 모델을 빛에 비추어 보면서 원자의 구조를 고민하곤 했는데, 그때 아버지의 얼굴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배어 나왔다.”라고 술회했다. 그녀는 또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면 어디든 결정을 표현하기 위한 구슬들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필통 속에 있던 검정색, 상아색, 초록색의 구슬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척이나 갖고 싶었다.”며 윌리엄이 얼마나 연구에 열정적으로 몰두했는지를 잘 보여 주었다.
이들 부자는 1915년에 전쟁으로 인해 노벨상을 직접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X선을 이용하여 결정 구조를 분석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수상 당시 로렌스의 나이는 25세였다. 이들의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는데, 가장 중요하게는 아버지와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완벽한 팀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두 사람은 초기 공동 연구를 시작하는 동안 모든 연구자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완벽한 팀워크를 자랑했다. 게다가 아버지는 실험가였고, 아들은 이론가여서 공동의 작품을 만들어 내기에 최상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이해할 것 같은 두 사람은 노벨상 공로를 인정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 결국 그들은 분야를 나누어 각자의 길을 걷고 말았다.3)
이들 부자의 사례는 과학자에게 있어서 노벨과학상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로렌스가 자신의 미래를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결정했다는 것이며 아버지는 아들의 의견을 경청하며 존중해 주었다는 것이다. 만약 윌리엄이라는 아버지가 없었다면 로렌스는 수학도가 되었을 것이고, 또 만약 아버지가 X선 스펙트로스코피라는 실험 기구를 고안하지 않았다면, 로렌스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그저 하나의 발상으로 그쳤을 것이다. 역으로, 만약 로렌스라는 아들이 없었다면 실험에 뛰어났던 윌리엄이 X선 결정학을 이론화하는 데 매우 어려웠을 것이고, 시간을 다투던 다른 연구 팀과의 경쟁에서 우선권을 갖고 X선 결정학을 완성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이 수상한 경우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아무래도 4명의 수상자가 모두 혈연이자 결혼으로 엮여서 모두 5차례나 노벨과학상을 수상한 퀴리 가문일 것이다. 1903년 폴란드 태생의 마리 퀴리(Marie Curie)와 그의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는 물리학 분야에서 방사능 물질의 발견으로 노벨상을 공동 수상하였다. 그로부터 8년 동안 열정과 끈기로 연구 활동을 수행한 그들은 앞서서 발견한 라듐(radium)과 폴로늄(polonium)으로 화학 분야에서 다시금 단독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이후 한 세대가 지난 1935년에는 그들의 딸과 사위인 이렌느 졸리오 퀴리(Irene Joliot Curie)와 프레데릭 졸리오(Frederic Joliot)가 새로운 방사능 원소의 합성에 관한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결혼 전 이름이 마리 스클로도프스카였던 퀴리 부인이 조국 폴란드를 떠나 어렵사리 파리에 도착한 것은 그녀의 나이 24세 때였다. 의사가 된 언니의 지원 덕분에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 입학한 마리는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그러하듯 돈을 아끼기 위해 대학 근처에 난방도 되지 않는 방에서 공부에 몰두했다. 그녀의 꿈은 어서 빨리 공부를 마치고 교사가 되어 조국 폴란드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1894년 어느 날 수줍은 성격의 피에르 퀴리가 운명처럼 나타났다. 그는 마리의 자취방으로 찾아와 청혼을 했고, 너무 갑작스런 일에 놀란나머지 마리는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서둘러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노벨상 시상식 공식 만찬이 열리는 블루홀
고향에 머물던 마리에게 어느 날 피에르의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우리가 서로의 곁에서 우리의 꿈에 취해 삶을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당신이 갖고 있는 애국자로서의 꿈과 우리가 함께 꾸는 인도주의자로서의 꿈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과학에 대해 품은 꿈에 취해서 말이오!”라고 쓰여 있었다. 편지에 감동을 받고 파리로 되돌아온 마리는 피에르와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며 과학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피에르는 뒤늦게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고 마리는 교사 시험에 합격했다.
마리와 피에르의 실험실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목재로 대충 지어져 비가 새고 환기가 되지 않는 헛간에서 그들은 2년 동안, 20kg이나 되는 액체를 몇 시간씩 휘젓는 중노동을 감수했다. 그 결과 새로운 방사능 원소인 폴로늄과 라듐을 얻었고 1903년에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하지만 노벨과학상은 그들의 삶을 아주 복잡하게 만들었다. 언론들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하기 원했고, 강연 요청은 쇄도했으며, 연구실 복도에는 그들을 만나러 온 사람들로 그득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학회 모임에 나간 피에르가 연인들의 장소로 유명한 퐁네프 다리 근처에서 마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남편이자 가장 절친한 동료였던 피에르를 잃어버린 것은 38세의 여인 마리에게는 너무나도 서글프고 끔찍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기운을 차리고 연구에 매진하였고, 그 결과 소르본 대학교 최초의 여자 교수가 되었다. 나중에 그녀는 연구하던 시절을 “우리는 마치 한 덩어리처럼 연구와 실험 그리고 수업과 시험 준비 등 모든 일을 함께 나누었다. 그때 우리는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무척 행복했다. 그토록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우리의 창고는 아주 고요했고, 난로 옆에서 마시는 뜨거운 차 한 잔은 우리에게 커다란 위로를 주었다.”고 회상했다.
1911년에 퀴리는 두 번째로 노벨화학상을 단독 수상했으며, 1914년에는 파리 대학과 파스퇴르 연구소가 공동으로 설립한 라듐 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녀는 이제 딸 이렌느 퀴리를 비롯하여 유수한 제자들을 키워 내며 라듐 연구의 세계적인 명성을 이어 갔다. 그러나 행운은 또다시 불행과 함께 찾아왔다. 방사선에 오랫동안 노출되었던 탓에 그녀는 백혈병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는 아직 방사선의 위험에 대해 전혀 모르던 때였고 그녀는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동위원소를 담은 튜브 병을 주머니에 넣어 다녔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1934년 7월 4일에 스위스에서 요양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유해는 1995년에 파리의 국립 공원 팡테옹으로 옮겨져 남편 피에르와 함께 안치되었다. 그녀의 죽음을 두고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사람들 중에서 명예를 얻기 위해 순수함을 잃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라며 칭송했다.
노벨상 수상 과학자들 중에는 스승 혹은 멘토와 제자, 선배와 후배 연구자라는 사회적 연결이 훨씬 중요하게 작동하기도 한다. 1972년까지 미국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92명의 과학자들 중에서 절반 이상인 48명은 앞선 수상자들 지도하에 학생, 박사 과정, 보조 연구자들로 일한 경험을 갖고 있다. 인공 방사능 물질을 만든 엔리코 페르미는 6명의 미국인 수상자들을 직간접으로 키워 냈으며, 어니스트 로렌스(Ernest Lawrence)와 닐스 보어는 각각 4명의 수상자들을 길러 냈다.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캐번디시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곳으로 톰슨과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의 지도하에 모두 17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좋은 스승을 만나는 일은 언제 어디서나 매우 중요한 일인 듯하다.
노벨과학상 수상 기관들을 분석해 보면, 1973년부터 최근 30년 사이에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 대표적인 대학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영국 등 영어권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대학이 아닌 연구소의 경우에는 영국의 캐번디시 연구소와 독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Max Planck Institute)4), 미국의 국립 보건원(NIH: National Institute of Health), 벨 연구소(Bell Institute) 그리고 스위스에 소재한 유럽 원자핵 공동 연구소(CERN)가 있다.
NIH의 경우는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생리의학 분야에서 수상자를 많이 배출했으며, 캐번디시 연구소와 벨 연구소 그리고 CERN은 물리학 분야에서 다수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유카와 히데키가 194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래 일본은 모두 1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고, 중국의 경우에는 1957년에 리쩡다오(李政道)와 양쩐위(杨振宁)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이래 모두 7명이 수상했다.
노벨 박물관에는 이러한 노벨상 수상자들의 다양한 스토리와 삶의 애환을 소개할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과학과 예술의 융합이 시도 되고 있다. ‘과학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science)’이라는 주제로, 현미경으로 찍은 세포 사진들을 활용한 스카프 디자인이나 연구 현장에서 얻어진 각종 데이터가 예술품으로 각색되어 전시되고 있다. 특히 ‘패션 이노베이션(Fashion Innovation)’이라는 이름으로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매년 노벨 물리학상, 화학상, 생리의학상, 문학상, 경제학상 수상자들의 성과를 패션으로 해석하여 선보인다. 또한 왕립 음악 학교(Royal college of Music) 학생들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성과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노벨 박물관의 내부
다채로운 사이아트(Sci-art)전시물을 만날 수 있는 1층 카페의 의자를 뒤집어보면 노벨상 수상자들의 친필 사인을 찾을 수 있다. 또 박물관 내부에 마련된 기념품 가게에서는 초콜릿으로 만든 노벨상, 수류탄, 다이너마이트 모양의 캔디를 구매할 수 있고, 카페테리아에서는 노벨 만찬 때 수상자들에게 제공되는 특별 디저트도 맛볼 수 있다. 도시 스톡홀름에 가면 언제든 인류 최고의 창의성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스톡홀름 : 노벨 박물관 - ‘북구의 베네치아’에서 기리는 과학자 최고의 영예 (세계의 과학관, 2015. 10. 25., 조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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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