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시험 공부를 하다보면 재미없는 부분도 있고 그래도 비교적 재미있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제 경우에는 배정급수 한자 외우기나 여타 부분 가운데에서도 특히 유의어가 제일 재미없더군요.
반의어보다 분량도 훨 많을 뿐더러
특2급 부터는 뜻도 모르겠거니와 때로는 그 두꺼운 국어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를,
뭐 이런 한자어까지 아는 것도 모자라 외우기 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하는 거부감까지 들 정도였으니 말이지요.
(허나 역시 속단은 금물. 시험후 고전을 읽다보니, 그 한자어들이 실제로 나오더군요.
전에는 뜻도 모르고 지나쳐야 했는데, 이제서야 그 의미가 명확해지니, 자그마한 보람이라 할 수 있겠지요.^^)
특히나 장단음에 대한 거부감은 매우 컸습니다.
아니 시대가 어느 때인데, 장단음이야? 지금 누가 장단음 가지고 의미파악하고 있는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사람의 눈/ 겨울 눈’, ‘사람이 하는 말/ 달리는 말’ 등을
그 소리의 장단으로 구별을 요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중요하고 필요하다면 무슨 규칙성이나, 법칙성 이라던가 아니면 최소한의 일반성 정도는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도무지 그런 것도 없는 것을 실생활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듯한 장단음을 공부하라니,
아니 이런 건 공부도 아니라 그야말로 시험을 위한 단순 암기라 해야 할 것이라 생각해 버리니… 공부하기 싫었던 것이지요.
그런 무의미한 듯한 장단음이 무려 10문제나 된다하니 그 거부감은 꽤 컸던 것 같습니다.
일전의 글에서 특2급 까지는 제가 장단음을 포기했다고 했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포기라기보다는 ‘거부’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하다가 마지막 특급때는 10문제라는 사실에 하도 열 받아서 해 버렸지요.
그러나 그 공부방법은 지극히 편법이었으니 역시나 지금은 그 어떤 것 보다도 빨리 망각했을 것입니다.
(근데 얼핏 보아하니 이 사성의 장단음이 또 한시를 이해하자면 매우 필요한 것 같더군요. 역시나 속단은 금물인 모양입니다.^^)
암튼 그렇고… 그 중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사자성어 입니다.
공부하는 가운데 참으로 무릎을 치며 감탄하고, 공감하고 때로는 깨닫게 되는 성어들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말로써 하기 힘들거나, 말로하기 애매하고 때로는 구차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
관련 성어 하나로 깨끗하게 정리되고 명쾌하게 이해될 때, 그 성어의 위력은 참으로 놀랍다고 할 것입니다.
낱 글자로는 지난 글에도 썼다시피 ‘삼갈 근(謹)’자에 매료되었고,
딸내미를 가르치며 저도 한자를 공부하면서는 제일 먼저 ‘교학상장(敎學相長)’에 크게 깨달았습니다.
오로지 내가 딸래미를 가르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가르치다 보니 저도 배우게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자는 물론 인간적인 면에 있어서도 저는 늘 아버지인 내가 딸내미를 가르쳐야 되는 줄로만,
아비인 나는 가르쳐야 하는 일 밖에는 없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늘 아비인 내가 우위(優位)요 상위(上位)위에서 가르치고 내리붇는 입장인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단지 '한자’와 ‘인생의 경험’이라는 계단에서 아비인 내가 그저 몇 걸음정도 앞서 걸어봤다는 이유로
지금은 잠깐 내가 앞에서 향도(嚮導)하고 있을 뿐 이지,
아무리 아이라해도 모든 면에서 내가 우위도 아니고 또 그 우위가 절대적인 것도 아니지요.
저도 딸아이로부터 배우는 게 많았습니다. 한자를 떠나서도 말입니다. 그야말로 ‘교학상장’이었습니다.
(이 좋은 것을 이제야 겨우 깨달았다니…)
삶이란 진리와, 진실과 지혜를 향해 이어진 끝없는 배움이라는 계단을 오르는 노력의 연속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급하게도 말고, 게으름 부리지도 말고
그저 서로 손 잡고 그 계단을 재미있게 함께 올라가는 동반자였으면 하는 바램을 해 봅니다.
'거일반삼(擧一反三)’이란 말에 공자님도 그러했다니 참으로 무릎을 치며 공감했고,
‘왜자간희(矮子看戱)’라는 그 절묘한 비유에 크게 웃었으며, ‘기복염거(驥服鹽車)’에 좌절했습니다.
‘염화시중(拈華示衆, 염화의 미소)’이란 말을 알게 되었고,
‘학여불급(學如不及)’, ’여조삭비(如鳥數飛)’란 말에 배움의 자세를 가다듬었으며,
‘수중축대(隨衆逐隊)'를 보면서는 개념없이 그저 남 따라가기 바쁘고,
많은 쪽에 붙으면 괜찮겠거니 하는 세태와 얼치기들을 생각했고,
‘하불엄유(瑕不掩瑜)’를 보면서는 조그마한 허물을 들어 진리를 폄훼하고 진실을 호도하려는 작태가 떠올라졌습니다.
‘귀곡천목(貴鵠賤鶩)'에서 멀리만 보는 게 능사가 아님을 되새기고,
유행이라며 어리석은 '서시빈목(西施嚬目)'과 '한단지보(邯鄲之步)'를 하고 있지는 않는지,
'양포지구(楊布之狗)', '엄목포작(掩目捕雀)', '걸견폐요(桀犬吠堯)', '촉견폐일(蜀犬吠日)', '월견폐설(越犬吠雪)' 에서는
눈 앞의 진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비웃다가 나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씁쓸해졌고,
'주대반낭(酒袋飯囊)', '행시주육(行尸走肉)'이란 말에 가슴 뜨끔했으며,
인터넷상의 못난이들을 보면서는 정말 한 마디 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 하우불이(下愚不移) 들아~~’하고 말입니다.
'허유소부(許由巢父)'를 보면서는 ‘정말 놀고들 있네…. 심하다..ㅋㅋ’하며 정말 그랬을까 싶기도 했고…,
'호계삼소(虎溪三笑)'에 상상되어지는 그 선경(仙境)같은 그림에 나 조차 편안해졌으며,
'오상고절(傲霜孤節)'과 '독야청청(獨也靑靑)' 못지 않은 '화광동진(和光同塵)'의 미덕도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어린 딸과 조카에게 뜬 구름같이 들릴지도 모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설명하면서는
남이 장군의 시를 직접 써서 해석해주며 그 웅혼한 기상이 바로 호연지기 아니겠느냐며,
그런 호연지기를 느끼고 배워야 할 것이라고 애써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豆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앤다.
사내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한다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딸내미와 조카를 가르치면서는 때로 성어와 관련하여 알아듣기 쉽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설명한다면서
그 유래를 이야기하다보면 이야기가 어느새 삼천포로 빠져 신나게 옛날얘기를 해 주고 있는 저를 보게 됩니다.
요녀석들도 요 때 만큼은 집중력 최고입니다.ㅋㅋ…
때로는 요 녀석들이 살살 간질간질 저를 꼬시기도 합니다. 공부하기도 싫겠다… 옛날 얘기 재밌잖습니까?
그래서 다시 진도나갈려고 하면…
‘아빠, 고사성어 다른 거, 재밌는 거 또 없어?.. 또 해 줘… 응?..’하면서 보채기도 합니다.^^
(해 주고 싶은 이야기들, 재밌는 이야기들이야 많지만… 아껴뒀다가 조금씩 꺼내 써야겠지요?^^)
한자성어를 보다 보면 사람사는 세상은 다 똑같구나 싶기도 하고,
중국의 언제 어디서 이런 일이 다 있었을까 싶기도하고, 이 말이 여기서 유래된 거구나하고 알게도 되고,
이런 묘한 일들을 성어로 엮어서 후세에 귀감과 경계가 되도록 한 지혜가 놀랍기도 합니다.
무릎을 치고 탄식하고 감탄하며, 어리석다 비웃고, 돌아보며 반성하며 부끄러워지게 되는
이 한자성어 부분이 그래도 제게는 그 중 제일 재미있고, 지금도 살아움직이는 양 꿈틀거리며 제게 다가오는 듯 합니다.
마치 입체영화를 보는 것 처럼 말입니다.
님들은 어떠하신지요?^^
첫댓글 한시에서는 장단음이 아니라 평측입니다. 사성을 알아야 근체시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제야 겨우.. 글공부의 맛을 들일려하고 있습니다^^ 님의 글을 읽으니 더욱 입맛다셔지구요~ 맞아요 한자를 공부하면 할수록 더더욱 그 깊이에 빠져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네요
장단음 알아가는 방법을 터득 하셨으면 알려주세용^^
님은 한자를 통해 인생을 배우시지만 저는 생활에 부딪히는 아이들과 긍정의 심리를 통해 인생을 배운답니다. 부정을 먼저알았던저는 그동안을 삶을 되돌아봤지요.. 특히 다른사람에게 조언을 해줄만큼 긍정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