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과학관 - 뮌헨 : 도이체스 박물관 정부와 산업체의 탁월한 조화가 낳은 이상적인 박물관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3. 18. 0:06
세계의 과학관 - 뮌헨 : 도이체스 박물관 정부와 산업체의 탁월한 조화가 낳은 이상적인 박물관
2024.01.23. 03:45조회 29
뮌헨 : 도이체스 박물관
정부와 산업체의 탁월한 조화가 낳은 이상적인 박물관
1990년 10월 3일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날이다. 전쟁 이후 45년간 동서 독일을 가로막고 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당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위치한 제국의회 의사당 광장에는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든 가운데 동 · 서독 지도자들이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곧이어 국기 게양대에 독일 국기인 삼색기가 천천히 게양되었고, 군중들은 일제히 독일 국가를 합창했다. 분단되었던 독일이 통일되는 극적인 순간이었고, 전 세계 사람들은 환호와 감동의 눈물로 마음속 깊이 응원했다.
20세기 역사에서 최고로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될 이 사건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일어났다. 독일은 제1 ·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인지라 독일의 도시들에는 특히 전쟁의 기억과 연관된 것들이 많다. 하지만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뮌헨은 세계 사람들이 가장 이민을 가고 싶은 도시, 가장 살고 싶은 도시로 꼽을 정도로 독일에서는 경제적 ·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도시다.
옛 독일어로 ‘수도승들의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 무니헨(Munichen)에서 유래하여 뮌헨으로 이름 붙여진 이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할 테지만, 특히 축구팬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도시일 것이다. 전설적인 잉글랜드 프로축구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단이 1958년 2월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유로피언컵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8명의 선수를 잃은 ‘뮌헨 참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선수단이 탄 비행기가 뮌헨-리엠 공항에서 급유를 위해 잠시 착륙했는데, 급유를 마친 비행기가 이륙에 두 번이나 실패한 것이다.
세 번째 시도 때에는 충분한 높이까지 날아오르지 못하고 인근 민가에 추락하고 말았다. ‘버스비의 아이들’로 불리며 유럽 무대를 휘저었던 맨체스터 선수들의 사망은 팬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심지어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팬이 자살하는 안타까운 사건까지 일어났다. 지금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 트래퍼드에는 뮌헨 참사가 발생한 시간인 3시 30분에 멈춰진 시계가 걸려 있다. 이것을 누르면 뮌헨 참사 희생자들의 생전 모습이 담긴 추모 영상을 볼 수 있다.
뮌헨에서는 해마다 가을이 되면 대규모 축제인 옥토버페스트(Oktoberfest)가 열린다.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속 축제이자 맥주 축제로 매년 9월 15일 이후에 돌아오는 토요일부터 10월 첫째 일요일까지 계속된다. 1810년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화려하게 치장한 마차와 악단의 행진으로 시작되며, 민속 의상을 차려입은 시민과 방문객들이 어우러져 시가행진을 벌인다. 축제 기간에는 회전목마, 대관람차, 롤러코스터 같은 놀이 기구 80종을 포함해 서커스, 팬터마임, 영화 상영회, 음악회 등 남녀노소가 함께할 수 있는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마련된다.
이 축제가 세계적인 맥주 축제가 된 데에는 뮌헨을 대표하는 6대 맥주 회사가 후원하기 때문이다. 축제에 참여하는 맥주 회사들은 시중에 유통되는 맥주보다 알코올 함량이 높은 축제용 맥주를 특별히 준비하고 최대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천막을 세워 맥주를 판매한다. 축제 기간 동안 팔려 나간 맥주는 평균적으로 약 700만 잔에 달한다고 한다. 커다란 맥주잔과 흥겨운 노래와 춤으로 뮌헨은 한동안 가장 즐거운 도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독일은 과학기술의 시각에서 볼 때 19세기까지만 해도 그 존재감이 매우 미미했다. 16세기의 이탈리아에는, 망원경을 제작하여 메디치 가문에 헌사하며 천문학 혁명의 실증적 증거를 제시한 갈릴레오가 있었다. 17세기 영국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근대 과학을 선도한 아이작 뉴턴이 있었고, 18세기 프랑스에는 근대 화학의 꽃을 화려하게 피운 비운의 과학자 라부아지에가 있었다.
뮌헨의 풍경
하지만 19세기 이전의 독일에서는 딱히 내세울 만한 과학자의 이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과학자들의 주된 무대인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Berlin Academy of Science)1)에서 활동하던 과학자들도 대부분 프랑스 출신이었다. 오히려 독일은 17세기 프러시아에서 활동하며 천문학 혁명을 완성한 케플러를 신교도라는 이유로 떠나보냈고, 상대성이론의 주창자인 아인슈타인을 유대 인이라는 이유로 미국으로 내몰기도 했다.
이러한 독일이 현대 문명의 중심 국가로 등장하게 된 것은 1872년에 뒤늦은 통일을 맞이하면서다. 당시 프로이센의 교육부 장관이던 훔볼트를 비롯한 신인문주의자들은 독일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학 및 중등학교의 교육 개혁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는 ‘대학의 의무는 지식의 주입이나 전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추구하고 헌신하는 곳’이며 이를 위해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학의 근대적 이상2)을 실천하기 위해 그는 국가의 막대한 지원을 아까지 않았으며 1809년에 설립된 베를린 대학교의 개혁에 나섰다.3)
그 결과 독일의 대학에는 훌륭한 실험 시설, 강의실, 실험 실습실이 마련되었으며, 정교수-부교수-사강사-조교라는 일련의 대학 직급 체계도 역사상 처음으로 마련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세미나’나 ‘콜로키움’이라는 개념도 이때 독일의 대학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독일 대학은 짧은 기간 동안 놀라운 질적 성장을 이루면서 오늘날과 같은 과학 연구의 세계적 메카로 자리 잡았다. 하이젠베르크, 막스 플랑크, 막스보른, 아인슈타인 등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물리학자와 수학자들의 절대 다수가 독일인이라는 사실은 바로 이러한 의도적인 혁신의 결과라 할 수 있다.4)
1903년에 독일 공학자 협회(Verein Deutscher Ingenieure: VDI)의 정기 모임에서 오스카 폰 밀러(Oskar von Miller)가 제안한 국립 과학 및 산업 박물관은 바로 이러한 독일의 의도적인 노력과 맞닿아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급성장한 독일의 현주소를 국민에게 직접 보여 줌으로써 독일인으로서 자긍심과 일체감을 느끼게 하자는 취지였다. 과학과 산업, 공학과 기술이 모두 어우러진 세계 최대의 과학 산업 박물관 중 하나인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최악의 인플레이션이라는 경제적 위기를 겪으면서 22년 만인 1925년에 개관되었다. 전기기술자인 폰 밀러는 1882년에 뮌헨에서 개최된 전기공학 박람회 때 세계 최초로 마일바흐에서 뮌헨까지 57km에 달하는 고압 전류선을 설치하여 유명해졌다.
도이체스 박물관의 전경
박물관 설립을 위해 폰 밀러는 정부 관료와 대학교수 및 학자 그리고 산업계 인사들을 설득하여 기금을 모았다. 여기에 뮌헨 시가 오늘날 박물관 섬으로 불리는 모래섬을 기증하였고5), 황제 빌헬름 2세가 초석을 놓았으며 막스 플랑크 등 독일을 대표하는 과학자들이 자문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폰 밀러는 1918년부터 1924년까지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어 박물관을 위한 예산 확보와 전시물의 기획 그리고 전시 공간의 구축 등 세부적인 일을 직접 챙겼다. 그가 70번째 생일을 기념하던 날에 자연과학과 기술의 대표 명품을 위한 도이체스 박물관이 정식 개관했다.6) 폰 밀러가 평생 꿈꾸던 과업이 완성된 것이다. 그의 열정과 노력 그리고 고민과 손길의 흔적은 오늘날의 뮌헨 곳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도이체스 박물관은 아자르 섬에 위치한 본관과 뮌헨 시내에 위치한 3개의 과학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1945년 이래 독일의 과학기술 분야를 주로 전시하던 본 과학 센터가 도이체스 박물관 본관으로 통합되었으며, 뮌헨 시내 중심에서 북쪽으로 18km 떨어진 곳에는 도이체스 박물관 항공관이 자리한다. 원래 이곳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세워진 독일 최초의 공군 기지 중 하나였다.
2003년에는 도이체스 박물관 교통관이 새로 개관했는데 운송 · 여행 · 이동에 사용되는 기술, 교통과 관련한 각종 과학 원리 및 기술을 다루고 있다. 1층에 들어서면 마치 거대한 도시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다양한 기차와 자동차 · 자전거 · 신호등 · 교통표지판 · 화물 오토바이 · 마차 · 헬기 등의 모든 교통수단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융프라우를 오르내리던 실제 산악열차 전시물은 열차의 원리를 기초부터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직접 작동해 볼 수 있도록 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섬에 위치한 본관 건물에는 항공 · 자동차 · 선박 · 컴퓨터 · 천문학 등 1만 7,000여 점의 전시품과 6만 점의 소장품 그리고 2,000개의 전시물이 보관되어 있다. 모두 50여 개에 달하는 전시관에는 물리학 · 화학 · 생물학 · 지구과학 등을 다루는 자연과학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온 재료와 산업의 역사관, 에너지관, 교통통신관 등이 마련되어 있다.
악기관
가장 규모가 큰 전시물은 금속 관련 기계와 장비,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을 다룬 기계관이며, 키보드 방 · 현악기 방 · 목관악기 방 · 동관악기 방 · 울려 퍼지는 악기 방 · 기술적 악기 방 등으로 구분되는 악기관도 흥미롭다. ‘명예의 전당’에서는 인류 문명과 함께해 온 과학인의 사진과 업적을 전시함으로써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의 생생한 역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이곳 전시물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대표적인 것은 독일의 발전에 기여한 광산업의 현실을 보여 주는 광업관이다. 실물 크기로 광산을 재현하고 광산업에 사용되는 다양한 기구들을 전시해 놓은 이 전시관은 1960~1970년대에 독일로 건너간 한국의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기억하게 한다. 좁은 폭의 광산 터널을 따라 900m나 걸어 들어가면 암염을 캐는 광산과 석탄을 캐는 광부들의 모습이 재현된다.
암염덩어리를 캐는 모습
소금은 바다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닌데 땅속에 암염 덩어리로 존재하는 것을 광부들이 캐내어 가공하기도 한다. 또 1950년대에 사용되었던 석탄 화물차가 수직에 가까운 갱도를 내려가는 모습도 전시되어 있으며, 오늘날 탄광 개발에 사용되는 첨단 기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갱도와 갱도 사이의 전시 공간에는 채굴한 원석을 처리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역학 전시관의 대표 전시물로는 ‘갈릴레오의 실험실’과 독일 과학의 수준을 한꺼번에 두세 단계 상승시킨 실험화학자 리비히의 실험실을 본뜬 ‘리비히의 실험실’이 있다. 리비히는 ‘유기화학의 아버지’로 불릴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 학생들을 획기적으로 교육하는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19세기 독일을 세계적인 화학의 메카로 만든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는 염료 공장에서 가져온 화학 물질을 가지고 놀았던 리비히는 1820년에 화학자가 되기 위해 본 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듬해 카스터너 교수를 따라 에를랑겐 대학으로 전학할 수밖에 없었고, 도중에 학생운동에 가담하는 바람에 퇴학을 당했다.
만약 그를 아끼던 카스터너의 추천으로 화학의 본고장이던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수 없었다면 그의 운명과 독일 과학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는 거기서 게이뤼삭(Joseph Louis Gay-Lussac)7)으로부터 분석화학 방법을 배우는 매우 귀중한 기회를 갖게 되었다. 젊고 전도유망한 리비히는 1824년에 귀국하여 21세의 나이로 기센대학교의 조교수가 되었고 2년 뒤에는 정교수가 되었다. 이제 그는 처음으로 대학에 유기화학 실험실을 만들고 화학 연구 방법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리비히의 실험실은 곧 유명해졌고 전 유럽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이 찾아들었다. 그는 도제 방식으로 진행되던 학생 지도 방식을 전면적으로 개혁하여 실험실에서 교수의 지도하에 연구 방법을 체득케 하는 새로운 교육을 실시했다. 즉 리비히는 오늘날 대학에서처럼 박사 과정의 학생이 연구 주제를 정하고, 구체적인 실험을 수행하여 그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제출함으로써 학위를 인정받는 교육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것이다.
그의 학생들 중에는 호프만(August Wilhelm von Hoffmann)과 벤젠고리가 6개의 탄소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낸 케쿨레(August Kekule von Stradonitz)8) 등 세계적인 화학자가 아주 많았다. 호프만은 아닐린을 연구하면서 염료 산업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영국의 퍼킨(Sir William Henry Perkin)9)을 제자로 키워 냈다. 리비히의 실험실을 중심으로 급성장한 독일 화학은 화학 분야의 무게 중심을 아예 프랑스에서 독일로 옮겨 오게 했으며, 탄소화합물을 다루는 본격적인 유기화학의 시대를 열었다.
리비히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우리 몸의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은 몸 밖의 물, 이산화탄소 등 무기물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또 식물이 공기로부터 얻는 이산화탄소와 뿌리로부터 얻는 질소화합물과 미네랄을 가지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조만간에 당, 아스피린, 몰핀 등 천연물을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1828년에 리비히의 절친한 친구였던 뵐러(Friedrich WÖhler)는 생체에서만 만들어진다고 여겨졌던 소변의 주성분인 요산(尿素)을 무기물인 시안산암모늄을 가열하여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또 리비히는 1838년부터 화합물로 만들어진 인공 비료를 만들어 냈고10), 화학 산업이 제2차 산업혁명의 핵심임을 강조하면서 “한 국가의 부(富)는 그 국가에서 생산되는 황산의 양으로 측정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11)
오늘날 기센 대학교는 리비히-기센 대학교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리비히가 기센 대학교에 기여한 바가 얼마나 큰지를 잘 말해 준다. 아직도 기센 대학에는 그가 1824년에서 1852년까지 교수로 재임하는 동안 사용했던 실험실이 남아 있다. 1920년에 리비히 박물관으로 문을 연 그의 실험실은 2003년에 독일 화학자 연합회가 선정한 ‘화학 역사의 중요한 10대 장소’ 중 하나다. 이곳에 가면 기센의 기구 제조업자가 리비히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정밀 분석 저울을 볼 수 있고, 리비히의 최고 발명품으로 꼽히는 다섯 개의 공으로 이루어진 시험관도 있다. 도이체스 박물관의 ‘리비히의 실험실’에는 이 모든 것들이 재현되어 있다.
전시물 중에서 또 흥미로운 것은 ‘마그데부르크의 반구(Magdeburg hemisphere)’다. 마그데부르크는 독일에 있는 한 도시의 이름이다. 1654년에 도시의 시장으로 재임했던 오토 폰 게리케(Otto von Guericke)는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명한 물리 실험을 수행했다. 그것은 대기압의 크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진공을 만드는 기구였다. 그는 이미 1650년에 공기 펌프를 발명하여 부분 진공을 만들었고, 빛은 진공 속을 통과하지만 소리는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도 밝혔다. 그에 앞서 토리첼리는 1643년에 수은 기압계를 제작하여 최초로 실험실에서 진공 상태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고12), 게리케는 진공 펌프를 제작하여 진공 상태의 힘의 크기를 보여 주는 실험을 수행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반구는 지름 약 35cm의 구리로 만든 2개의 반구를 만들어 꼭 맞추고, 한쪽 반구에는 밸브를 만들어 내부의 공기를 모두 빼낸 것이다. 진공 상태로 된 두 반구의 내부는 외부의 대기압에 눌려 단단하게 밀착되기 때문에 반구를 다시 떼어 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그는 반구를 떼어 내기 위해 양쪽 반구의 끝에 여러 마리의 말을 묶고 채찍질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리게 했다. 말의 숫자를 점차 늘려가다가 결국 두 반구가 떨어졌는데, 그때 사용된 말이 각각 8마리씩 총 16마리였다. 기압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많은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준 대규모 공개 실험이었다. 당시 게리케가 마그데부르크 시의 시장이었다는 이유로 이 반구는 나중에 마그데부르크의 반구로 불리게 되었다.
독일이 제1 · 2차 세계대전의 가장 뜨거운 중심에 있었던 만큼 도이체스 박물관에는 전쟁 중에 개발되거나 실제 전투에 사용된 전시물도 많다. 독일 하면 아무래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수많은 영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잠수함 유보트(U-boat)다. 유보트는 두 차례 세계대전 당시에 독일 해군이 운용한 잠수함이지만 사실은 19세기 중반에 개발되었다. 바다 밑의 선박을 뜻하는 ‘운더제보트(Unterseeboot)’란 독일어의 약자에서 비롯된 유보트는 평상시에는 해상으로 항해하다가 ‘필요한 때에 잠수할 수 있는 배’ 혹은 ‘잠수가 가능한 배’로 알려졌다.13)
도이체스 박물관에 전시된 유보트
유보트는 대서양에서 늑대 떼 전술을 사용해서 연합군의 수송선을 공격했고, 미국과 영국을 오고가는 선박들을 공격했다. 유보트의 피해가 갈수록 커졌던 결정적인 이유는 유보트들 간에 ‘애니그마’라는 암호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타자기처럼 생긴 애니그마 기계가 알파벳을 이해할 수 없는 글자로 변화시키는데, 이 암호 조합을 정해진 시간 내에 해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도록 어려웠다. 당연히 연합군측에서는 애니그마를 해독하는 일이 매우 시급한 과제였다.
한편, 1939년 영국 런던에는 독일군의 암호 체계를 해독하기 위해 수학자, 과학자, 기술자 등 당시 이름 있는 최고의 지성들을 모은 집단, ‘캠프 블레츨리 파크(Bletchley Park)’가 조성되었다.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 중간에 위치했던 이곳에서는 비밀리에 ‘울트라 작전’을 수행했는데, 가장 활발했던 때에는 1만 명에 가까운 인력이 머물렀다. 물론 이 일은 영국의 대표적인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고 암호학자였던 앨런 튜링이 담당했다.
그는 진공관을 이용하여 세계 최초의 연산 컴퓨터에 해당하는 ‘콜로서스’14)를 개발했는데, 이 암호 해독 기계는 도청한 독일군의 메시지를 1초에 5,000단어씩 빠른 속도로 해독했다. 결국 1944년에 영국군이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게 되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당시 영국을 승전으로 이끈 윈스턴 처칠 경은 회고록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를 가장 두렵게 한 것은 유보트였다.”고 했으며, 독일의 위협을 저지한 단 한 사람을 꼽으라는 질문에 주저 없이 앨런 튜링을 지목했다.
하지만 컴퓨터를 개발한 천재 앨런 튜링은 너무나도 비참하게 그리고 갑자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와 함께 생활하던 남자 파트너가 범죄 집단과 어울리다가 경찰에 붙잡히는 바람에 앨런 튜링의 사생활이 노출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성애자임이 밝혀진 튜링에게는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법원은 그에게 화학적 거세를 선고했으며, 그는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일로부터 일체 손을 떼야 했다.
그의 이름은 세상에서 다시 언급되어서는 안 될 금기 사항이 되었다. 좌절하다 못한 앨런 튜링은 동화의 한 장면처럼 청산가리 독이 든 사과를 베어 물고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61년 후인 2013년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는 명석하고 특별한 인물이었다.”면서 12월 24일자로 사면을 공식 선언했다. 이로써 정보 통신 기술의 시대를 열었던 천재 과학자 앨런 튜링의 명예가 정식으로 회복되었다. 많은 인기를 누렸던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애니그마를 풀기 위해 튜링이 겪었던 갈등과 좌절 그리고 기쁨과 사랑을 잘 그리고 있다.
도이체스 박물관은 연방 정부와 지방 정부 그리고 산업체가 조화로운 협력을 통해 설립한 이상적인 곳으로, 과학기술을 통한 산업의 역사를 보여 주는 종합 과학 · 산업관이다. 최근 이곳에서는 과학기술 지식의 직접적인 생산자인 과학기술자들의 참여가 눈에 띄게 활발하다. 과학기술과 사회 간의 진짜 ‘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과학기술이 관람하고 이해하는 즐거움의 대상을 넘어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행동하고 고민해야 하는 이유임을 말해 주고 있다. 도이체스 박물관은 1920년대에 미국을 비롯한 북아메리카 대륙의 과학 · 산업 박물관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처럼 21세기에도 과학기술과 사회의 소통을 위해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뮌헨 : 도이체스 박물관 - 정부와 산업체의 탁월한 조화가 낳은 이상적인 박물관 (세계의 과학관, 2015. 10. 25., 조숙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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