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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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추모 조형물
[이한열(李韓烈) : 학생운동가로 1987년 6월 9일 전두환 정권의 독재 타도와 5·18 진상 규명 등을 외치는 시위에 참여했다 전경이 쏜 최루탄을 맞아 사경을 헤매다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다는 소식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면서 6월 항쟁과 6·29 선언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출생~사망 : 1966. ~1987.
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에서 태어난 이한열 열사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입학 후 본격적으로 학생운동가의 길에 들어섰다.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했던 이 열사는 결의대회를 마친 뒤 100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경찰은 시위 진압을 위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쐈고, 이 과정에서 이 열사는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고인은 함께 시위에 참여했던 학우의 부축을 받아 시위 현장을 빠져 나왔는데, 이 장면을 로이터 통신 기자가 촬영해 보도하면서 해당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다. 이후 이 열사가 최루탄을 맞았다는 소식에 시민들의 분노는 커졌고, 이는 6월 10일부터 29일까지 약 20일 동안 학생과 시민 등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오는 계기가 됐다. 이 시위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결국 전두환 군사정권은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한편, 경찰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은 이 열사는 27일간 의식을 차리지 못했고 결국 1987년 7월 5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인은 망월동 5·18 묘지에 안치됐으며, 사망 14년이 지난 2001년이 되어서야 권위주의 정권에 항거하다 숨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돼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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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열사 추모비
학생회관
윤동주 시비와
그 뒤로 보이는 핀슨관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기숙사 생활을 했던
핀슨관
핀슨관과 윤동주 시인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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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尹東柱)
순결한 희망
출생 – 사망 : 1917.12.30. ~ 1945.2.16.
윤동주는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도 아니었고, 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에 불과하고, 공부나 시도 생활이 되어야 한다며, 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시 정신은 어느 투사 못지 않게 치열한 바가 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는 <서시>의 구절처럼, 그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 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 정신의 마을 만주 명동촌에서 자라나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 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 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 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다.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주는 증조부 되는 윤재옥(尹在玉)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재옥이 43세 때인 1886년 부인과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본래 살던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자동(紫洞. 현재의 자동(子洞))에 처음 자리잡으면서,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생활은 시작되었다. 북간도 이민 초창기에 자동으로 이주한 윤재옥은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주변에서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수성가하였다. 그리고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 때 명동촌으로 이사하여 명동 한인마을의 한 식구가 되었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다. 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은 1906년 10월경 이상설(李相卨) 등이 용정(龍井)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이었는데, 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지 몇 개월 안돼 문을 닫고, 그 뒤를 이은 것이 명동촌의 명동서숙(明東書塾)이었다. 명동서숙은 앞서 김하규, 김약연, 남위언이 한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세 군데 서재를 하나로 합치고, 서전서숙 교사 출신의 박무림(朴茂林)을 초대 숙장으로 모셔와 1908년 4월 문을 열었다. 명동서숙으로 출발한 명동학교는 1909년 신민회 회원 정재면(鄭載冕)이 교사로 부임해 교장 김약연, 교감 정재면의 체제를 갖추면서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신교육기관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명동학교에서 정재면은 학생들에게 신학문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 그리하여 부임 첫 해에 명동교회가 설립되고, 이후 마을사람 거의 모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되었다. 1910년 명동학교에 중학교 과정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명동촌은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15세 나이로 명동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정재면이 교사로 부임해 마을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온 1909년이었다. 이듬해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한 윤영석은 1913년 3월 문재린 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와 모교인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윤동주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명동촌에서도 벼농사를 하는 몇 집 가운데 하나로 넉넉한 가세를 자랑하였다. 그가 태어난 집은 학교촌 입구 자그마한 과수원에 둘러싸인 큰 기와집으로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 교회당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인 명동소학교 입학…손수 <새 명동>이라는 잡지 펴내
윤동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큰 마을 명동촌에서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 이와 관련해 한가지 눈 여겨 볼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아명이다. 윤동주의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해환(海煥)이었다. 아버지 윤영석은 자식들 이름에 ‘해’ ‘달’ ‘별’을 차례로 붙여, 윤동주의 아우인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그 밑에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다. 윤동주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이렇게 그의 아명 속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윤동주의 성장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영향이다. 명동교회의 장로로 도량이 넓었던 할아버지 윤하현과 집안의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는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적부터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기독교정신을 배우며 자랐다. 또 1912년 결성된 북간도 최초의 한인자치단체 간민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 아래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뜰 수 있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기독교신앙, 그리고 민족주의가 삼위일체로 어우러진 기름진 토양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난 시인 윤동주는 1925년 만 8세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3.1운동 이후 북간도 대한국민회가 조직되고, 국경선 일대의 봉오동․청산리 등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명동학교 출신들이 보여준 활약상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가 다닌 명동학교는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이었다. 그래서 1920년 10월 ‘간도 대토벌’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1918년 신축된 양옥 벽돌교사가 불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불탄 교사는 1922년 원상복구가 되었지만, 윤동주가 입학할 무렵 명동학교의 형편은 썩 좋지 않았다. 1920년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가 북간도 교통의 요지인 용정에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를 세워 교육의 중심이 용정으로 이동한 데다, 갑자년 가뭄으로 인한 경영난까지 겹쳐 윤동주가 입학하던 1925년 명동중학교가 문을 닫은 때문이다. 명동소학교도 1929년 교회학교에서 공립으로 넘어갔다.
명동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유순하고 눈물 많은 소년이었다. 동기동창으로 윤동주 집에서 석 달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김약연의 조카로 윤동주와 외사촌간이었던 김정우, 그리고 문재린 목사의 아들인 문익환 등이 있었는데, 모두 문학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서울에서 발행되던 <<아이생활>> <<어린이>> 등의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소년의 꿈을 키우던 윤동주와 동기들은 5학년 때인 1929년 손수 원고를 모아 편집해서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등과 함께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을 더 다녔다. 대랍자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화룡현 현청 소재지였는데, 윤동주와 송몽규는 명동에서 대랍자까지 십 리 길을 날마다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에선 축구 선수로, 잡지 편집자로, 웅변 1등상 수상자로 활기찬 생활
윤동주가 대랍자 소학교에 다니던 1931년 늦가을 윤동주의 집은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 용정으로 이사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무장단의 출몰이 잦아지자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도회지로 이주한 것이다. 용정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거점도시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었다. 중국 관청이 밀집한 연길(延吉)과 더불어 북간도의 양대 거점을 이루었던 용정에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인쇄소를 차리고 도회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내 실패하고 그 뒤 포목점을 비롯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대어 보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집도 과수원이 딸린 큰 기와집에서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의 20평 정도되는 초가집으로 바뀌어 옹색한 생활을 해야 했다.
용정에서 윤동주는 1932년 4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 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6세 때의 일인데, 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은진중학교는 ‘영국덕’이라 불린 용정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미션스쿨로 명신여학교, 제창병원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다. 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1932년은 앞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 그리하여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되었고, 그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다. 그러나 ‘영국덕’의 학교와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동생 윤일주의 회고에 따르면 은진 중학교에서 윤동주는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 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을 돌리기도 하면서 활기찬 학창생활을 보냈다. 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하고, 문학적 취향에 걸맞지 않게 기하학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지은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며 작품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34년 12월 24일’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초한대>를 비롯한 세 편의 시가 그것인데,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에게서 받은 감화였다. 명 선생은 학생들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치열한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한편으로, 중국 군관학교 등에 입교를 주선하기도 했다. <초한대>에 나오는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 나의 방에 풍긴 /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는 시 구절은 그 같은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다. 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깨끗한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던 윤동주 자신 또한 뒤에 그 제물로 바쳐졌으니, 시인의 범상치 않은 예지를 읽을 수 있다.
정지용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 세계 열어
1935년 봄 고종사촌 송몽규가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해 가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가을학기 편입시험을 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자격밖에 얻지 못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 해서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냈다. 숭실중 학생청년회에서 발행하던 <<숭실활천>>(1935. 10)에 실린 <공상>은 그의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된 작품이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어나갔다. 1935년 12월에 쓴 <조개 껍질>을 시작으로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때까지 계속된 그의 동시 쓰기는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6년 1월 일제 총독부 당국이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선교사를 교장 직에서 파면하자 일어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간 때문이었다.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용정에서 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는 문익환의 회고처럼 그들이 편입한 광명학원은 대륙낭인 출신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친일계 학교였다. 그럼에도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상급학교 진학시의 편의를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 광명중학에 재학하던 2년 동안 윤동주는 동시에 더욱 몰두하여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가톨릭소년]에 모두 5편의 동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민족현실에 눈 떠…발악적인 일제의 광기를 고뇌로 승화, 시 속에 녹여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 송몽규는 앞서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1936년 4월 제남에서 체포 압송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된 전력이 있었다. 1937년 4월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 그는 이듬해 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 문과 별과시험에 합격하여 윤동주와 다시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다.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와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 연희전문에서의 4년간은 윤동주 나름의 시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다. 그런데 그것은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고, 거기에 맞서 자신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의 과정이었다. 연희전문 1․2학년 방학 때 고향에 들려 누이 혜원과 동생 일주에게 들려주었다는 태극기의 모양과 무궁화와 애국가, 기미독립만세와 광주학생운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무렵 그가 가진 역사의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한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였다. 때문에 그의 고뇌와 번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희전문의 기숙사를 나와 하숙생활을 시작한 2학년 때부터 동시 쓰기를 아예 그만두었다. 1939년 한 해 동안 그가 쓴 시는 6편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9월에 가서야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 쓴 <자화상>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가 단말마적 발악을 하는 속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고, <투르게네프의 언덕>에는 기만적인 싸구려 이웃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있어 당시 그의 내면풍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후 윤동주는 1940년 12월까지 1년 이상 절필을 한다. 1940년 12월경에 쓴 <팔복>의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는 시 구절처럼, 이 기간에 그는 민족의 처절한 수난에도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을 지키는 신에게 대들었다. 1939년 가을 용정 정안구(精安區) 제창로(濟昌路) 1-20호, 캐나다 선교부 경내 경치 좋은 언덕에 세워진 큰 집으로 집안이 이사하고 나서 방학 때 집을 찾은 윤동주에게 예전에 보았던 신앙의 열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동생 윤일주의 회고처럼 이 무렵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었다.
이런 오랜 고뇌와 번민의 터널을 지나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 되는 1941년 그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무서운 시간>, 1941. 2)라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 나라 잃어 <간판 없는 거리>의 “모퉁이마다 /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 불을 켜놓고” 어진 사람 사람들의 손목을 잡고 보듬는 따뜻한 민족 사랑을 시로 녹여 나갔다. 졸업을 앞둔 그 해 11월 윤동주는 그 때까지 써놓은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 그는 자신의 시집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또 1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1부를 이양하 교수에게 바친 것은 출판을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이 교수의 답변은 출판을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일제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신변에 위험도 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의 첫 시집 출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유학 후 민족운동했다는 이유로 투옥…일제의 정체 모를 주사 맞으며 피골 상접하여 타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고종사촌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사학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진 채 유학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윤동주가 진학한 릿쿄대학은 성공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쉽게 쓰여진 시>(1942. 6)의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라는 구절에 나와 있듯이, 유학 초기 윤동주는 이국 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단짝친구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 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 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전시체제하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윤동주는 도지샤의 자유로운 학풍을 호흡하고, 송몽규를 비롯한 벗들과 어울리며 한결 안정된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 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 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 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 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 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 같은 증언을 한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하였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8년 11월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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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과 카페가 있는 건물인
어울샘
1920년에 세워진
연희전문학교 최초의 석조건물인
스팀슨관
연희전문학교 교사 건립을 위해
2만 5천 달러를 기부한
스팀슨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건물인
스팀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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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동상과
그 뒤로 보이는 언더우드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잉글랜드계 미국인, 미국의 장로회 목사이자 선교사, 대한제국 및 일제강점기의 인물, 연세대학교 총장, 경신학원 설립자,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한국어명 : 원두우(元杜尤)
출생 : 1859년 7월 19일(영국 잉글랜드 런던에서 출생)
사망 : 1916년 10월 12일 (향년 57세), 미국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
국적 : 미국
묘소 : 서울특별시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
직업 : 선교사
직책 :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연희전문학교 초대 교장, 경신학교 초대 교장
배우자 :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
자녀 : 호러스 오튼 언더우드
종교 : 개신교 (북장로회)
학력 : 뉴욕 대학교 인문학과 졸업, 뉴브런즈윅 신학교에서 공부
1. 개요
2. 일생
2.1. 젊은 시절
2.2. 조선에서의 활동
3. 어록
4. 후대의 평가
5. 언더우드 가문과 한국
6. 연세대학교의 기념 현황
7. 경신고등학교의 기념 현황
8. 기타
1. 개요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에서 활약한 미국 출신의 선교사이자 조선예수교장로회 1대 총회장으로 대한민국 개신교 장로회의 아버지다. 한반도에 장로회를 전도한 최초의 목회 선교사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 중 하나인 연희전문학교와 경신학교의 설립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언더우드가의 후손들도 현재까지 대한민국과 연세대학교에 대대로 기여하고 있으며 좋은 인연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의 한국식 이름은 원두우인데 이는 언더우드를 빠르게 발음한 말로 당시 고종 황제가 직접 지어줬다고 한다.
명암이 분명한 연세대학교의 또 다른 설립자격 인물인 호러스 뉴턴 알렌과는 달리, 헨리 아펜젤러, 어니스트 베델, 호머 헐버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후세 다쓰지, 조지 쇼, 메리 스크랜튼 등과 함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 은인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 헌신으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서훈받았다.
2. 일생
2.1. 젊은 시절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언더우드는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1년 뉴욕 대학교(NYU)를 졸업하여 문학사학위를 받고 그 해 가을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네덜란드 개혁 신학교(The Dutch Reformed Theologica Seminary)에 입학하여 1884년까지 공부하였다. 1883년 11월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당시 영미권의 선교사들이 주로 파견되던 인도 제국에 건너가 목회 활동을 하기 위해 1년간 힌디어와 의학을 공부한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동아시아의 생소한 국가에 파견할 선교사 한 명을 찾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을 결심한다. 당시 언더우드가 약혼녀와 조선에 함께 가는 문제를 두고 나눴다는 대화가 전해진다.
"그 곳에서는 무얼 먹고 살고 있나요?"
"모르겠소."
"병원은 있나요?"
"모르겠소."
"그럼 당신은 조선에 대해 아는 게 뭔가요?"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주님을 모르는 1,000만의 민중이 살고 있다는 것뿐이오."
허나 이에 약혼녀는 동의하지 못했고, 결국 언더우드는 파혼 통보를 받고 나서 홀로 조선으로 향하게 된다.
2.2. 조선에서의 활동
그가 조선으로 건너가려던 1884년에 갑신정변이 터지는 바람에 후유증으로 외국인 입국이 막혔으며, 언더우드는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감리회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와 함께 헐버트의 도움을 받아 마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 가운데 한국어를 가장 잘 구사하는 축에 들었다.
1885년 언더우드는 호러스 뉴턴 알렌의 도움으로 조선에 입국한다. 알렌이 조선 정부에 제출한 설립안에 의거해 1885년 4월 개원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의 설립 목적에는 의학생 교육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당에서 언더우드는 영어,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언더우드는 1888년에 파견된 선교사이자 제중원의 여의사인 8살 연상의 릴리어스 스털링 호튼(Lillias Stirling Horton, 1851 ~ 1921)과 1889년 3월 14일에 결혼했다. 이들의 신혼여행은 선교여행으로 평안도 지역으로 1600킬로미터를 거의 도보로 이동했다고 한다.
1887년 서울에서는 한국 최초의 장로회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평양부 일대 지방까지 교세를 확장했다. 이 해부터 거의 20년 동안 언더우드는 평안도 전역을 순회하는 선교 여행을 반복했고, 1891년 게일 선교사와 마펫 선교사가 여행에 합류하면서 신앙 공동체를 설립하는 등 본격적으로 서북 지역에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1894년, 영국 출생의 캐나다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 (Oliver R. Avison)이 조선 정부와의 협상 끝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받았고, 이로써 제중원은 온전한 사립 선교 기관으로 재편됐다. 1900년, 록펠러의 석유회사 '스탠다드 오일'의 창립 멤버 중 하나였던 루이 헨리 세브란스 (Louis Henry Severance, 1838 ~ 1918)가 병원 건립을 위해 제중원에 거액을 기부했다. 이 기금을 두고 평양부의 선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했으나 언더우드의 협조에 의해 갈등은 해결되었고, 1904년 제중원은 새로 지어졌으며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 병원,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교가 되었다. 세브란스의 건립에도 언더우드의 공이 컸던 것이다.
번역과 교육에도 힘써서 입국한 직후부터 신약의 4대 복음서를 번역했으며, 한국에 머문 30년 동안 한국어 자료를 모아 한불 사전, 한영 사전, 한영 문법을 편찬했다. 1885년에 입국하자마자 서울 정동에 한국 최초의 고아원인 언더우드학당(경신학당)을 설립했고, 1915년에는 경신학당을 모태로 고등교육기관인 경신학교 대학부(현 연세대학교의 전신)를 설립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부터 연희전문학교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영국 출신의 발명가이자 타자기 재벌이었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 (John Thomas Underwood, 1857 ~ 1937)가 토지 매입과 교사 건축 비용을 제공했다.
그러나 평양부의 새로운 교회 설립, 경신학교 설립 작업과 번역 작업으로 후유증을 얻었고, 일제가 '조선의 모든 교육자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교육 시행령을 내리면서 일본어 공부까지 겹쳐 과로로 몸을 상하게 된다.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자 191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으며 요양했으나 결국 그 해 10월 16일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시신은 한국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어록
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 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한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조선의 믿음의 앞날을 볼 수 있게 될 것을 믿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 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하늘나라의 한 백성, 한 자녀임을 알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제군들이 확고부발(確固不拔)의 정신을 갖고 신앙을 키워나가면 그 결과 언젠가 반드시 큰 성과를 낼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바라는 바는 제군들이 한층 용기를 떨쳐 우리 교회를 성대하게 하는 것, 그리고 내가 신애(信愛)하는 곳 한국이 순연한 독립국이라는 것을 늘 유의하고 결코 한 시도 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 1909년 9월 16일 종로 YMCA회관
4. 후대의 평가
같은 조선에서 활동했지만 언더우드는 알렌과 달리 민중에게 직접 다가가는 아래로부터의 선교 방식을 지향했다. 또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도 자기 잇속 챙기기 급급했던 알렌과는 달리 청렴결백했으며 자신의 집을 고아원 겸 교회 건물로 기꺼이 내놓을 정도였다. 하지만 의외로 자신의 선교 방식과 교리에 대해서는 일체 타협을 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선교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하고 일제에 의한 압력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장로회에서는 최초의 장로회 선교사로, 연세대학교에서는 설립자로 추앙하고 있으며 한국 개신교 역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 교정에 동상이 세워졌다가 1940년대 태평양 전쟁 중에 일제가 포탄을 만든다고 동상을 뽑아가는 바람에 광복 이후에 다시 세우게 되었다. 헌데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동상을 또 뽑아가는 바람에 전쟁이 끝나고 3번째 동상을 다시 만들게 되었다.
5. 언더우드 가문과 한국
언더우드는 본인 뿐만 아니라 후손들 역시 한국과 연세대에 대대로 공헌하며 좋은 인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가문의 구성원 전원이 한국식 이름을 갖고 있으며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한다. 아래의 인물들은 각 세대의 장남이며, 이게 이 집안의 업적 전부가 아니다.
아래에 나오는 언더우드의 직계 후손 이외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언더우드 역시 연세대에 기여한 바가 크다. 친형 존 토마스 언더우드는 미국에서 타자기 생산 기업을 세워 자수성가하였는데, 1917년 거액을 연전에 기부하여 그 기부금으로 신촌에 드넓은 교지를 매입하여 본관을 세울 수 있었다.
2대 -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1890년대생으로 언더우드 집안의 2대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Horace Horton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박사는 제암리 학살사건을 외신에 알렸다. 대학 인가를 받고 취임하게 된 연희전문학교장 시절에는, 자신이 미국 국적을 가졌기에 치외법권을 내세워 일제의 손에서 최현배, 정인보 등 한국어 학자들을 보호하면서 한국어 연구에 힘쓰게 했다. 또한 '한국의 배와 선박'이라는 저서를 통해 한선을 처음으로 서양에 알리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연희전문학교는 가장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교원 겸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이윤재 박사와 한징 박사는 옥사한다. 원한경 박사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진 태평양 전쟁 직전에 일제를 피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광복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51년 부산에서 한국전쟁 구호 사업을 돕던 중 심장마비로 병사한다.
3대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
언더우드 집안의 3대가 되는 손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Grant Underwood Jr. 한국명 원일한)는 1917년에 태어나 한국전쟁 당시에 유엔군으로 참전했으며, 정전 협정 당시에는 통역관을 맡았다. 전역 후에는 장로회 목사가 되었으며 장로회 계열 미션스쿨인 한남대학교와 배재대학교의 설립에 이바지한다. 1980년에는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해외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이로 인해 전두환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당했다. 5공이 막을 내린 후 복권되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연세대 이사를 역임하고 2004년 1월에 한국 땅에서 삶을 마쳤다. 연세대 대학 교회 루스채플에 이 분의 이름을 딴 원일한홀이 있다.
4대 - 호러스 호톤 언더우드 주니어(Horace Horton Underwood Jr. 한국명 원한광)
언더우드 박사의 증손자 원한광 박사는 1943년생으로 연세대 영어영문학과에서 30년간 교수로 재직하면서 한국인의 영어 교육론에 대해 연구했으며, 한미 교육 위원단장을 역임했다. 2004년 아버지 원일한 박사가 작고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모든 고서 보관본과 근대사 자료를 기부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3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주니어 박사가 세상을 떠난 후, 언더우드 일가의 대부분은 2005년에 한국 땅을 떠나 미국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2011년 10월, 방우영 조선일보 상임 고문의 영향으로 이사회가 교단 파송 이사에 대한 조항을 삭제하게 되자, 조선일보가 연세대 법인의 지분을 노리는 것이 아닌가 또는 법인을 사유화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2010년대까지 한국에서 컨설턴트로 활동 중인 언더우드 박사의 3대손 피터 언더우드(Peter F. Underwood, 한국명 원한석) 씨와 4대손 리처드 언더우드(Richard A. Underwood, 한국명 원특한) 씨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협력을 얻어 연세대 사유화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6. 연세대학교의 기념 현황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언더우드 동상.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의 언더우드관. 언더우드 동상 뒤에 세워져 있다.
연세대학교에서 언더우드 일가 기념관도 운영 중이다.
해외 벽지나 오지 등 선교 활동이 어려운 지역에서 15년 이상 선교 활동을 한 사람을 대상으로 연 1회 언더우드 선교상을 시상한다.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국제대학(Underwood International College)이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존재한다. 타교 국제학부와 비슷한 학부로 줄여서 UIC라 부른다. 일반적인 국제학부에 비해 단과대학 인원이 상당하다.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의 기숙사(Residential College)는 12개의 하우스(House)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언더우드 하우스가 있으며, 국제캠퍼스의 중앙도서관이 언더우드 기념도서관으로 명명되어 있다.
7. 경신고등학교의 기념 현황
경신고등학교 본관 앞에 위치한 조선인 학생을 가르치는 모습의 언더우드 동상.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국어 이름인 원두우(元杜尤)가 새겨져 있다.
1885년에 25세의 나이로 내한한 미국 선교사로서 이 땅에 최초로 복음의 씨를 뿌리고 교육기관을 설립하시니 경신학교가 이에서 비롯되었도다. 처음 시작은 정동에서였으나 겨례의 수난과 함께 연지동으로 정능동으로 옮겨지다가 마침내 이 자리에 정착하여 오늘 맥맥히 이어온 설립정신을 기리며 그의 슬기롭고 고귀한 모습을 가까이 하기 위해 여기 박사의 상을 세우노라.
언더우드 동상 설명문
연세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언더우드가 설립한 경신고등학교 또한 교내에 언더우드 동상이 있다. 2019년 3월에는 학교 정문에 언더우드 기념관을 건설하기 위해 시공식을 했으며, 체육관 및 강당 등 다목적 복합시설로 이용 중이다.
8. 기타
그의 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가 바로 유명 타자기 브랜드 언더우드의 설립자이다. H. G. 언더우드가 선교 및 교육 지원 활동을 할 때 이 형이 준 자금이 큰 역할을 했다. 학교부지 20만 평의 구매자금 5만 3천 달러를 보냈으며 추가로 10만 달러를 보내서 현재 연세대학교 본관으로 쓰이는 언더우드 관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연세대학교 상경대학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많은 타자기를 기증하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선교 활동에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정작 선교라는 측면은 비슷하던 당시 천주교에 대해서는 꽤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는 언더우드 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개신교, 특히 성공회 선교사들을 제외한 영국과 미국 출신 개신교 다수 선교사들의 공통점이기도 했다. 당시 한국에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관계는 매우 불편한 상태였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개신교/대한민국 문서를 참조.
고종이 호러스 언더우드에게 하사한 사인참사검 1자루가 2016년 10월 11일 손자 원득한 박사에 의해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참고로 이 사인참사검은 2017년 6월 18일 TV쇼 진품명품 1101회에 나와 3억 원의 감정가를 받았다.
생전 성격이 거침없었다고 한다. 어릴 적 ‘넓은 날개’(wide wings)와 ‘불 동가리’(a bundle of fire)라는 두 개의 별명이 있었다.
언더우드가 뉴욕대학교 인문학과를 졸업한 인연인지, 연세대학교는 뉴욕대학교와 교환협정을 맺고 매년 교환학생을 상호 교환하고 있다.
현재는 대학본부 건물로
총장실을 비롯한 중요 행정부서가 있는
언더우드관
언더우드관에 관한
안내문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온
북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아펜젤러관
아펜젤러관에 관한
안내문
아펜젤러관 앞에서 바라본
정원과 스팀슨관
언더우드관을 배경으로
이성수
유억겸 기념관
유억겸 기념관 앞에 있는
이정표
사회과학대학(연희관)
사회과학대학(연희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성암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성암관) 앞에서 바라본
사회과학대학(연희관)
2023년07월16일(일요일) 서울 [연세대학교&봉원사&안산&고은산] 산행기 12:00~12:24 서울 지하철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2호선으로 환승하여 신촌역으로 이동한 후 신촌역 3번 출구로 이동 [24분 소요] 산 : 서울 [연세대학교&봉원사&안산&고은산] [안산(鞍山)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있으며 높이는 295.9 m로 나지막한 도심의 산이다. 산의 생김새가 말이나 소의 등에 짐을 싣기 위해 사용한 길마와 같이 생겼다 하여 길마재라고도 하며, 안현(鞍峴), 모래재, 추모련이라고 불렀고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봉우재라고도 불러왔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어머니의 산이라고 해서 모악산(母岳山)이라고 불렀으며 호랑이가 출몰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모아서 산을 넘어가야 했기에 모악산라고도 불렀다는 설도 있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을 정할 때 하륜(河崙)이 안산 남쪽을 도읍지로 추천하였다. 조선시대 인조 때인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다. 서울 시내 중심에서 홍제동으로 향하는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해발 340m)과 마주하고 있으며 서대문독립공원, 이진아 도서관이 위치한다.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평안도에서 올라온 봉화가 안산에 연결되어 최종 남산으로 연결되었다. 정상 부근에는 큰 바위들이 많고 서울시 중구 일대를 관망하는 전망이 뛰어나다. 태고종의 총본산인 봉원사(奉元寺)가 남쪽에 있으며 관음보살을 닮았다는 관음바위가 유명하다. 그리고 근래 새로운 모습으로 보수한 봉수대(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3호) 등을 볼 수 있다. 수맥이 풍부한 27개의 약수터가 있어 등산로가 발달하였다. 옥천약수, 백암약수, 맥천약수, 봉화약수 등이 유명하다. 서대문구청, 연희b지구 시민아파트, 연세대학교 기숙사, 봉원사 등에서도 등반할 수 있고, 주변에 백련산과 인왕산이 있어 함께 등반할 수 있다. 지하철 무악재역, 독립문역 쪽에서도 등반이 가능하다.] 산행코스 : [ 신촌역 3번 출구~연세대학교 정문~연세대학교 캠퍼스~연세대학교 동문~봉원사~안산 주능선~안산 봉수대~고은 초등학교~고은산 고은정~홍제역 4번 출구 ] 산행일 : 2023년 07월 16일(일요일) 날씨 : 구름이 낀 날씨 [서대문구 봉원동 최저기온 24도C, 26도C] 산행코스 및 산행 구간별 산행 소요시간(총 산행시간 : 2시간 50분) 12:24~12:33 신촌역 3번 출구에서 산행 출발하여 연세대학교 정문으로 이동 12:33~12:37 이한열 동산으로 이동 12:37~12:46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기숙생 생활을 했던 핀슨관으로 이동 [핀슨관은 백양 삼거리의 서쪽 언덕에 1922년에 지어진 2층 영국식 주택이다. 봄날에는 건물 입구의 벚나무 한 그루가 곱게 꽃을 피운다. 핀슨관은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로 지어진 건물이다. 그리고 수많은 기숙생 중 한 사람으로 인해 주목 받는다. 1938년 4월 9일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다. 1941년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3년여를 연희전문학교에서 보냈다. 그는 기숙사에서 머물며 사색하고 고뇌하며 그 감성을 아름다운 시로 표현했다. 우리가 애송하는 많은 시들이 이곳에서 지어졌다. 윤동주 시인이 사용했다는 핀슨관 2층의 205호는 윤동주 기념실이 되었다. 사진자료와 미공개 자필시 등을 전시한다. 핀슨관 앞에는 그의 시비도 섰다. 그의 필체대로 조각한 「서시(序詩)」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기를 바랐던 시인의 마음이다. 그 곁에서는 ‘잎새에 이는 바람’ 소리마저도 예사롭지 않다.] 12:46~12:48 식당과 카페가 있는 건물인 어울샘(한경관)으로 이동 12:48~12:52 1920년에 세워진 연희전문학교 최초의 석조건물인 스팀슨관으로 이동 12:52~12:54 현재는 대학본부 건물로 총장실을 비롯한 중요 행정부서가 있는 언더우드관으로 이동 12:54~12:56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온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를 기념하기 위해 지은 아펜젤러관으로 이동 12:56~13:00 유억겸 기념관으로 이동 [유억겸(兪億兼, 1896년 10월 23일 ~ 1947년 11월 8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계몽운동가이자 법조인, 교육인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다. 신간회, 흥업구락부 등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활동을 하였고, 연희전문학교 부교장, 조선체육회 회장등 역임하여 각종 사회활동을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후반에 변절하여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13:00~13:01 사회과학대학(연희관)으로 이동 13:01~13:02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성암관)으로 이동 13:02~13:13 연세대 동문으로 이동하여 연세대 탐방을 완료 [사적 제276호 언더우드관은 정방형의 평면에 5층 높이의 중앙탑이 두드러진다. 현재는 대학본부 건물로 총장실을 비롯한 중요 행정부서가 있다. 언더우드관은 아펜젤러관과 같이 지어졌으나 1925년 6월에 공사가 마무리됐다. 긴 공사 기간을 반영하듯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사적 3동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건물의 좌우 끝에는 돌출형 창을 가진다. 백양로 등 캠퍼스 마스터플랜과 건축의 설계는 재미 건축가 머피가 맡았다. 시간상으로 가장 먼저 지어진 건물은 사적 275호 스팀슨관이다. 1920년에 세워진 연희전문학교 최초의 석조건물이다. 교사 건립을 위해 2만 5천 달러를 기부한 스팀슨의 이름을 땄다. 1919년 4월에 착공해 1920년 8월 완공했다. 지상 2층 반지하층으로 이루어졌다. 스팀슨관만의 특징은 돌출한 형태의 정면 현관 입구다. 그 정수리 부근에는 태극마크가 선명하다. 맞은편의 사적 277호 아펜젤러관은 1921년 10월 착공해 1924년 가을 완공했다. 스팀슨관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졌다. 언더우드와 함께 온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를 기념한다. 배재학당을 세운 인물이다. 아펜젤러관은 스팀슨관과 유사한 형태이나 현관이 아닌 양쪽 끝이 돌출했다. 중앙 출입구에는 1층 높이의 페디먼트(입구 위의 삼각형 벽)를 설치했다. 현재는 사회복지대학원으로 쓰인다.] 13:13~13:24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길 120 번지에 있는 봉원사로 이동 (동문~봉원사 : 751m) 13:24~13:36 [대방~대웅전~삼천불전~칠성각~명부전~한글학회 창립한 곳~미륵전~극락전~만월전]의 동선으로 봉원사(奉元寺)를 탐방 [봉원사(奉元寺)는 한국불교태고종의 본산이다. 889년(진성여왕 3)에 국사 도선(道詵)이 부유한 신도의 집을 희사받아 절을 창건하고 반야사(般若寺)라 하였다. 그 뒤 고려 공민왕 때에 보우(普愚)의 중건으로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396년(태조 5)에는 이 절에 왕의 초상화를 모신 원당(願堂) 반야암을 지어 불교탄압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지인(智仁)이 크게 중창하였고, 1651년(효종 2)에 다시 법당과 동서에 있던 요사가 소실되었지만 극령(克齡)·휴암(休巖)·도암(道庵) 등이 중건하였다. 또, 선조·인조·영조 때에는 반야암을 수호하라는 왕명이 있어 조정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특히, 1748년(영조 24)에는 왕이 절을 지을 부지를 하사하여 찬즙(贊汁)·증암(增巖) 등이 현재의 자리로 이건하였고, 이듬해 영조는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렸으므로 이때부터 절 이름을 봉원사라 하였다. 1788년(정조 12)에는 팔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를 설치하여 승려의 승풍(僧風)을 지도, 단속하게 하였다. 구한말에는 개화파의 대표적 인물인 이동인은 이곳 봉원사에 주석하면서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과 함께 교류함과 동시에 일본과 서양문물에 관한 지식을 쌓아갔으며 승려의 신분으로 수차례 일본을 내왕하며 당시의 선진문물을 소개하여 김옥균 등을 개화사상에 눈 뜨게 하는 직접적인 역할을 하였고, 1884년(고종 21)에는 갑신정변의 주동인물이었던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박영효(朴泳孝) 등이 이동인(李東仁)의 지도 아래 개화파의 젊은이들을 깨우쳐 정변을 일으키게 하기도 하였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 때문에, 서재필(徐載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곳 봉원사를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하였다. 1894년에는 주지 성곡(性谷)이 약사전을 신축하였으며, 1911년에는 다시 이보담(李寶潭)이 크게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때 가람의 일부가 소실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66년 최영월(崔映月)이 복원한 것이 많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위시하여 범종각·명부전·납골당·산신각·칠성각·종무소·비각 등이 있다. 중요한 유물은 도선의 반야암 편액, 이광사(李匡師)의 대웅전 편액, 정도전(鄭道傳)의 명부전 편액, 친일 어용총리 이완용(李完用)의 명부전 주련(柱聯)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信力), 김정희(金正喜)의 대방(大房) 청련시경(靑蓮詩境)·산호벽루(珊瑚碧樓), 옹방강(翁方綱)의 대방(大房) 무량수각 편액, 장승업(張承業)의 신선도 십폭병풍 등이다. 대웅전 탱화와 단청은 인간문화재 이만봉 스님의 작품이다. 대웅전에 걸린 ‘大雄殿(대웅전)’ 현판 필자는 조선의 명필 원교 이광사(李匡師)이다. 법당 안 우측에 보관 중인 범종(梵鐘)은 충남 가야사에 있던 종인데 조선의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의 묘를 쓰기 위해 가야사를 불태웠을 때 타지 않았던 종을 옮겨온 것이다. 대웅전 마당 우측에 있는 3천불전은 1986년 주지 조일봉 스님과 사부대중의 원력으로 건물허가 및 준비 과정을 거쳐 1988년 삼천불전의 복원불사가 시작되어 단일 목조건물로는 국내 최대의 건물로 9년 여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대웅전 아랫마당에는 대방(大房)이 있는데 공덕리(지금의 마포구 염리동이고, 현재 서울디자인고교가 들어서 있음)에 있던 대원군의 별장 아소정(我笑亭) 건물을 옮겨 세운 건물이다. 대방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청련시경(靑蓮詩境)", "산호벽루(珊湖碧樓)"와 추사의 스승으로서 중국 청대 중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의 행서체 현판 "무량수각(無量壽閣)"이 걸려 있다. 명부전(冥府殿)편액은 600년 전 조선개국의 일등공신 삼봉 정도전의 예서체 친필이다, 이성계가 부인 강씨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명복을 빌기위해 정동에 현당인 흥천사를 세워 명부전을 짖고 삼봉에게 편액을 쓰도록 했다. 그런데 명부전 기둥에 쓴 주련(柱聯)은 구한말 조선(대한제국)의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한 매국노 이완용의 글씨이다. 조선의 시작과 끝을 이끈 두 인물의 글씨가 한 건물에 있는 셈이다. 극락전 건물은 봉원사의 꽃이다. 4군자 문향의 목각(木刻) 문살조각과 색 바랜 단청의 고즈넉한 우아함이 시공을 초월하는 극치미이다. 전면 문살대 위에는 대나무, 국화, 연꽃 및 각종 화초를 덧붙여 화려함을 장식했다. 명부전과 칠성각을 지나 미륵전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한글학회 창립한 곳>이라는 표지석이 있다. 처음에는 국어연구학회로 출범한 한글학회는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 당대의 지식인들이 우리 민족의 문맹을 깨치고 나라의 주권을 지키고자 이곳에서 창립총회를 연 곳이다. 창립 초기부터 우리 말과 글의 수호와 연구,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에 목표를 두었다. 광복 후에는 한글문화와 국어학 발전 등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한글문화를 보급하고 우리 말과 글의 선양 사업을 펼치고 있다. 봉원사 미륵전(彌勒殿)은 특이하게도 흰색의 현대식 건물이다. 미륵전은 사찰에서 미래불인 미륵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이곳은 미륵불이나 도솔천에서 설법하고 있는 미륵보살을 모시는데, 이는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원해 주기를 바라는 내세 신앙의 발로 때문이다. 미륵전 내부에는 미륵불입상이 봉안돼 있으며 미륵불 옆으로는 윤장대(輪藏臺)가 마련되어 있다. 봉원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칠성각(七星閣)은 본래 영조의 적장손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의 신위(神位)를 모신 원당(願堂) ‘의소제각(懿昭祭閣)’이었다.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첫아들로, 정조와는 동복형인데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 고종 1년(1864)년 중건되면서 해당 전각은 ‘칠성각’이라 불렸다. 이와 같은 역사는 지난 2011년 봉원사 칠성각의 불단을 수리하면서 ‘의제소각’이라고 각인된 편액이 발견되면서 명확해졌다. 일제 강점기 많은 사찰에 있던 조선왕실 원당이 폐쇄되고 편액들이 훼철되었는데 칠성각 불단 아래 숨겨진 편액은 비록 훼손되었지만 남았다. ‘봉원사 의소제각 편액’은 조선왕실의 원당에 대한 실마리를 풀 희소한 사례로 평가되며, ‘봉원사 칠성각’과 함께 2020년 서울특별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서울특별시 보호수 제67·69·70호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약 500년의 괴목이 있고, 절 뒤에는 관세음보살의 영험담이 얽힌 관음바위가 있다. 매년 7, 8월에 봉원사는 아름다운 연꽃으로 장식된다. 100여 개의 대형 고무 물통에 흙과 물을 채워 연꽃을 피운다. 또한 봉원사는 불화와 단청의 최고 기능을 보유하고 있고, 불교음악 범패(梵唄)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곳에서는 매년 영산재(靈山齋)가 열린다. 영산재는 석가가 영취산에서 설법하던 영산회상을 상징화한 의식절차다. 1973년 11월 5일 중요무형문화재(현 가곡780) 제50호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괘불을 걸어놓고 영혼을 천도하는 의식인데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큰 행사다.] 13:36~13:44 안산 주능선으로 이동 13:44~13:56 안산(295.9m) 정상부에 있는 안산 봉수대로 이동 13:56~14:03 사진촬영 14:03~14:44 서울 서대문구 모래내로 441 번지에 있는 고은 초등학교로 이동 14:44~14:52 고은산(113.7m)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로 이동 14:52~14:55 고은산 정상부에 있는 정자인 고은정으로 이동 14:55~14:58 사진촬영 14:58~15:14 서울 지하철 3호선 홍제역 4번 출구로 이동하여 산행 완료 연세대학교 [언더우드관&아펜젤러관&스팀슨관&핀슨관] 위치도 서울 서대문구 [안산&고은산]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