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유의 박자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가끔 엇박자가 되기도 하고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고 지루박이 되기도 하고 디스코가 되기도 하고 왈츠가 되기도 하고 편안해진 마음이 춤을 추고 싶다가, 어느새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를 듣는다.
역무원의 명령으로 노래 듣기를 멈추고 다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도계다. 20 년전 방문했다가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소주를 마시고 짧은 글 하나를 쓴 적이 있다.
“또 눈이 내리길래 횟집을 하루 문을 닫았다. 그날, 모처럼 하얀색 기차여행을 작정했다. 같이 가자던 선배는 일 때문에 합류가 되지 않았고, 혼자 떠나게 되었다.
강릉 역 앞 작은 가게에서 막걸리 두병과 안주를 샀다. 기차는 평형을 유지하기에 술 마시는 여행으로는 그만이다. 묵호 역을 지나서 두 병을 전부 마셔버렸다. 그리고는 온통 하얀색 뿐이었다. 막걸리의 하얀색이 세상으로 취하고 있었다.
어느 새 도계역에 내려, 역 앞의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육십대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부인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무얼 그리 열심히 쓰세요?"
"아, 한자요.....이번에 2급 시험 볼려구요."
"아! 대단하시네요."
퇴색된 탄광촌 기차 역 앞의 허름한 중국집에서 한자 공부를 열심히 하는 늙은 여자는 상큼했다. 주방에서 열심히 짜장면을 만들고 있는 늙은 여자의 남편 얼굴에 붙어 있는 귀걸이도 그러했다. 역시 여행은 다른 삶과의 만남이었다. 내 삶을 잠시 떠나서 다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 도계역 앞은 그것을 충실하게 도와주었다.
게다가, 더욱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아주머니, 저기 저 사람 누군지 알아요?
"아, 저 사람, 체게바라요.....공산주의자, 혁명가 말이죠?"
소주 반병 정도 마시고 취기가 오르자, 나는 컴컴한 중국집 벽에 붙어 있는 그 사람 얼굴을 아무 기대도 없이 그녀에게 물어보고야 말았다. 설마 그녀가 그를 알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 물음은 순전히 술주정에 다름 아니었다.
"아주머니가 저 사람을 어떻게 아세요?"
"아.....개업할 때 호랑이 그림 주문하니까, 저 사람 사진이 따라왔어요. 그래서 사람이 하도 잘 생겨서 누군가에게 물어 보았더니...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녀를 얕잡아 본 것이 미안했다. 역시 이 쓰러져가는 시골 구석 중국집에서 아무 쓸데도 없는 한자 2급 시험을 보기 위해 공부하는 그녀가 아니던가.
어쩌면, 체게바라는 얄팍한 좌파 지식인의 서재보다도, 시꺼먼 탄가루가 날리는 이곳 강원도 오지에서 더욱 빛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곳 도계역 앞 중국집에서 당연히 체게바라를 만나야 했던 것이다.”
도착해서 별로 갈 곳이 없었다.
중국집은 없었다. 역 앞에 부채찌게가 있어, 들어가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여주인은 도계 출신인데 성남에 살다가 왔다고 했다.
도계의 검은색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나른함만이 남아 있다.
아! 문득 영화, ‘꽃피는 봄이 오면’ 이 생각났다.
도계 중학교 밴드부가 생각 나서, 도계 중학교에 가볼려고 하다가, 역 앞의 플랭카드에 써 있는 졸업생의 수상 소식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묵호로 오는 길은 기억이 안난다.
역무원이 깨워서 겨우 일어나 택시를 타고 원룸에 도착했다.
나의 휴게실에 텃밭의 애용자 부부와 어머니가 손짓을 한다.
술을 마시면서 어머니와 묵호 어판장 이야기를 했다.
천자봉 건어물 여자가 암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며, 전설적인 나의 대게 매출이며, 등등.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술이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술이 똥이 되어 지금 일어났다.
여행은 달랑 느닷없이 떠나야 제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