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노동의 길
3월 23일은 벌써 봄이 지나고 있습니다. 한국GM대우의 담벼락은 노랗게 개나리로 물들고 있습니다. 답사가 녹록치는 않습니다. 짙은 황사에 따스한 봄 날씨는 특성상 공단을 배회하는 답사팀들에게 짜증이 날 수 밖에 없는 코스이기도 하죠. 어쩜 암울했던 70년대의 공단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찾듯 답사의 즐거움은 그날과 함께 호흡하며 미래를 본다는 것으로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누군가 오늘 답사가 제일 힘드네 하니 또 누군가가 예전엔 너무 춥고 더 힘들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추억은 아름답다고 옛날이 더 멋져 보이는 것은 착각만은 아니겠지요. 오늘의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이 화사한 추억으로 남을 것을 확신하며 오늘의 답사 내용 중 일부분을 간추려 봅니다.
▣ 답사 코스 14:00 ~17:00
갈산역 4번 출구 – 삼원섬유공업주식회사 터 - 한국지엠노동조합 - 광야교회& 백마교회 터 – 뫼골공원 - 부평노동사목(새날의 집터) - 산곡동 성당(옛 피정의 집) - 산곡역
- 부평 공단의 노동자, 삶의 투쟁
70년대 부평공단의 50개 입주업체가 본격적으로 생산을 시작하면서 수출공단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양적 성장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68년 까지는 부평이 인천에서 수출에 차지하는 비중은 3.5%에 불과하였으나 1변 후 22.4%, 70년에 들어서면서 무려 42.5%를 차지하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다.
70년대 ‘어느 돌맹이의 외침’ (삼원섬유 유동우편에 해설), 70년대 수출 자유지역은 노동조합의 설립도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노력으로 부평 공단에서 최초로 민주 노조를 건설하였으며 이 후 반도상사 여성 사업장의 노조 건설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80년대 노동운동의 발전
80년 광주항쟁을 지나면서 인천지역의 노동운동에 나타난 주요한 변화는 변혁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학생 출신 현장 활동가들의 등장이었다. 수도권에 있는 대규모 공업도시인 인천은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노동현장으로 진출하고자 할 때 적합한 조건을 갖추로 있었으며 이들의 활동이 84, 85년 대우자동차 투쟁과 여러 사업장의 투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86년 경에는 사업장에 투신한 학생 출신 활동가들과 노동자들의 현장 투쟁이 여러 사업장에서 이루어졌다. 인천 5.3민주 항쟁을 거치면서 일싲거으로는 정권의 탄압과 소강 국면이 있었지만 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 투쟁은 인천지역에서 폭발적인 노동운동의 성장으로 나타났다.
90년대 이후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부평 공단은 새로운 활력으로 가득했다. 여전히 붐비는 공단 출근길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기대와 자신감이 있었다. 가끔씩 들리는 노조탄압 소식에 조합원들이 퇴근 시간에 몰려가 싸우고 밤새 구사대를 물리치고 공장을 지키다 출근한 이야기가 자랑스럽게 나누곤 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뭉쳐서 싸우면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은 공단에 충만했다.
87년 투쟁과정에서 건설된 노동조합으로 부평 공단에 10개가 넘는 인노협(인천지역노동조합협의회) 사업장이 있었고 규모있는 사업장의 노동조합 민주화 투쟁이 진행 중이었다. 대우자동차와 삼익악기를 비롯하여 한국샤프, 해태전자, 풍산금속, 진도, 해태음료 등은 한국노총소속 상버장이었으나 어용성을 극복하고 녿오조합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이 해고노동자들과 현장 조합원 연대를 통하여 조금씩 진전되었다.
- 삼원섬유자리터
노동자 유동우의 해고(인천 삼원섬유공업주식회사 노사분규)
삼원섬유노조는 100% 외국인 투자기업에 결성돼 정상적으로 활동한 최초의 노동조합이었어. 유신 초기의 정말 어려운 때 1973년 부평공단 최초로 노동 조합(전국섬유노동조합 경기지부 삼원섬유분회)을 결성했다. 삼원섬유 노동 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하다 해고를 당했고,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후 노동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하는 강연 활동 및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는 일을 돕는 ‘재야 노동운동가’로 활동했다.
1979년 전두환 신군부가 12·12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자 전국민주노동자연 맹에 참여해 민주화운동에 힘을 보탰다. 이 활동으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1985년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초대 회장으로,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현재는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 문지기로 있으며
민주인권 교육 길잡이로 일하고 있다.
한국지엠지부 서문 휴게소에서 휴식
-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
전국국금속노동조합 한국지엠지부는 인천의 대표적 대기업 노동조합으로 1963년 신진자동차 노동조합으로 출밯하였다.1985년 임금인상투쟁을 시작 으로 정리해고 및 해외매각 반대투쟁을 강력하게 전개하였으며, 87년
노동자 대투쟁등 지역의 노동운동을 활성화 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
대표적인 노동조합니다. - 광야교회
광야교회는 1974년 인천지역 노동자들을 위하여 탁아소와 진료소를 설치 하는 등 생활공동체를 지향하는 교회로 출발하여 1980년 백마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위 교회는 노동자들의 기본권을 향상하고자 노동자를 위한 교육 등 다양한 지원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1987년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시기 우리사회 민주주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기에 이를 알리고 기억하고자 이곳에
표석을 설치한다.
- 대우자동차 파업관련 추가 설명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 최초의 대규모 파업농성이 성공하는 순간이 었다. 그리고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의 폭력과 노동운동 금압을 뚫고 그동안 역량을 비축하고 있던 노동운동의 새로운 세력들이 수면 위로 공개되는 역사의 순간이기도 했다.
대우자동차 파업농성은 한국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전 사회에 깊은 충격과 영향을 미쳤다. 위장취업자 문제가 전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다시금 환기시켜 전두환 정권의 저임금정책과 임금동결정책의 허구를 그대로 드러내게 만들었다. 제3자 개입금지,냉각기간 등 전두환 정권이 개정한 해괴한 노동악법의 문제점도 그대로 폭로되었다. 대우자동차 임금인상투쟁 자체가 불법이었다. 이후 한국노총이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고 민주화운동단체들도 여기저기서 노동법 개정을 강력히 제기하면서 전두환 정권도 한때나마 노동법 개정을 논의한 것은 그나마 대우자동차 파업농성이 그런 정도라도 움직인 것이었다.
대우자동차 파업의 승리는 곧바로 진행 중이거나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전국 모든 사업장의 임금인상투쟁과 교섭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전두환 정권의 임금 가이드라인은 형체도 없이 무너져버리고 대신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 가이드라인이 전국에 적용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사용자들은 파업농성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요구를 앞다투어 대폭 수용했다. 영창악기는 대의원 3명을 포함한 5명을 부당해고하면서까지 임금인상을 억압하고 있었는데, 대우자동차 파업 승리의 소식이 들리자마자 16% 인상으로 서둘러 상향조정하고 교섭을 타결해버렸다. 대우자동차와 인접한 삼익악기도 총 16%로 타결되었고 한영알미늄도 15%로 끝났다. 심지어는 임금인상투쟁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사업장에서도 사전예방 차원에서 10% 이상의 높은 임금인상을 먼저 제시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이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조합의 임금인상투쟁도 아연 활기를 띠 게 되면서 예상보다 수월하게 두 자릿수의 임금인상 성과를 얻게 된 것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 덕분이었다. 효성물산 노동조합의 임금인상투쟁(4월 25일),대우어패럴(4월 26일),부산파이프(4월 23일 ~4월 25일),통일 산업 (4월 25일~ 4월 26일) 등 많은 노동조합의 단체행동이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후원 아래 이어졌다. 이들 노조들도 예외 없이 높은 임금인상을 쟁취할 수 있었다.
어용 노동조합들도 조합원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고 손쉽게 낮은 임금인상률 에 함부로 도장을 찍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은 민주주의의 승리였다. 군사독재라는 강력한 억압에 아래에서도 제한된 범위이기는 하지만 밑바닥 풀뿌리에서 민주주의는 강력한 대항조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민주주의를 통한 노동 대중의 각성과 활발한 참여야말로 독재의 힘을 밀어내는 풀뿌리 민중의 힘이었다. 독재에 대한 승리는 또 다른 독재가 아니라 바로 민주주의임을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몸으로 실감했을 뿐 아니라 이를 모든 시민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같은 민주주의의 승리 의 경험과 민주의의의 학습. 정치의식화의 힘이야말로 다름 아닌 6월 항쟁과 7, 8,9월 노동자대투쟁의 원동력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뫼골공원
뫼골공원 지역은 1980년대 노동 때문에 바쁜 삶을 살고있던 노동자들이 아이들을 서로 맡아서 돌봐주는 마을공동체였다. 이곳은 현재 지역 공동체의 활성화와 마을 복지를 위한 문화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부평노동사목(새날의 집터)
새날의 집은 1977년 일할 권리, 인간답게 살 권리를 외치며 자본과 국가권 력에 맞서야 했던 시절 노동자들에 의해, 노동자들 위한, 노동자들의 공간 으로 출발했다.부평공단과 대우자동차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이들과 의기투합한 현장활동가들이 이곳에 모여 노동자들의 쉼터겸 사랑방으로, 매몰된 그들의 자아를 발견해 나가는 교육공간으로 유지되어 왔었다.
- 산곡 성당에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