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은 활동가들의 의견을 듣고 흔쾌히 받아주거나 칭찬하고, 스님의 의견도 말했습니다. 두 시간 동안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사람을 챙기기 어렵다는 활동가에게 스님은 어떻게 하면 사람을 잘 챙길 수 있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지금 모둠장을 하고 있는데요. 제가 모둠원들을 못 챙기고 있어서 법사님께 어떻게 사람을 챙겨야 하냐고 물어보니까 엄마처럼 챙기면 된다고 하셨어요. 제게는 그 말이 뭔가 막연하게 느껴졌어요. 우리 엄마는 저를 잘 안 챙겨줬는데... (모두 웃음)
옛날의 엄마들은 되게 헌신의 아이콘이었잖아요. 그에 비해 저희 엄마나 주변 친구들의 엄마를 보면 잘 챙겨주는 이미지랑 거리가 멀고 자기 거를 먼저 챙기는 사람인데 어떻게 엄마처럼 챙기라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요. 잘 챙긴다는 게 막연하고 와 닿지 않더라고요. 소임 설명을 들으면서 차라리 ‘엄마 같이 하라’고 하지 말고 ‘보살처럼 해라’ 이렇게 말하면 좀 더 와 닿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법사님이 고지식한 옛날 사람인가 봐요. (모두 웃음) 사람들은 용어를 쓸 때 자기의 세계와 경험 속에서 체험한 용어를 씁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삶 속에서는 그 용어밖에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용어라도 내가 쓰는 용어 하고 다른 사람이 쓰는 용어의 의미가 다를 수 있어요. 대표적으로 윤회라는 용어는 인도 전통 사회에서는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서 소가 되고 말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쓰신 윤회라는 용어는 똑같은 용어지만 인도 사람들이 쓰는 윤회와는 개념이 다릅니다. 부처님은 우리의 마음이 즐겁다 괴롭다를 끊임없이 반복되는 걸 윤회라고 했어요. 그래서 윤회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인도 사회에서는 다시는 안 태어난다는 의미예요. 그러면 ‘안 태어나는 게 뭐가 좋을까? 태어나는 게 좋지’ 이런 의문이 들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에서 벗어난다’ 하는 표현은,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고 즐거움이 괴로움이 되는 윤회에서 벗어나 다시는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는 경지를 뜻해요. 괴로움이 소멸해버리는 것이 해탈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도 인도 사회 안에 있다 보니까 인도식으로 내용이 변질돼 버린 거예요. 용어는 같은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것처럼 엄마라는 단어도 그 법사님이 쓰실 땐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보디 사트바를 지칭하는 용어예요. 보디 사트바가 어떤 마음이냐고 할 때 보통은 엄마 같은 마음이라고 표현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질문자의 엄마는 보디 사트바 같은 마음이 아니다 보니까 도대체 엄마 같은 마음이라는 표현 갖고는 보디 사트바의 마음이 전달이 안 되는 거예요. 하지만 보통은 보살의 마음이 어떤 거냐고 할 때 쉽게 설명하는 비유로 엄마 같은 마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엄마 같은 마음이 도대체 이해가 안 돼서 보살 같은 마음이라고 표현해야 ‘아, 그게 엄마의 마음이구나’ 하고 알 수 있다니까 이것도 세대 차이네요. (모두 웃음)
앞으로 청년들에게는 엄마 같은 마음으로 하라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요. (모두 웃음)
사람을 챙긴다는 것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하라는 게 아니에요. 나누기를 하거나 정일사를 해 보면 ‘저 사람은 마음에 이런 상처가 있구나’, ‘저 사람은 저런 장점이 있구나’, ‘저 사람은 저런 아픔이 있구나’ 이런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의 마음에 어떤 상처가 있는 걸 이해하면 그 사람이 뭔가 픽픽 토라져도 ‘저 사람은 전에 보니까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저런 반응을 하는구나’ 하고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그 사람의 얼굴만 보다가 나누기를 하면서 그 사람의 심리 상태가 어떤지를 알게 되면, 내가 다음에 그 사람의 행동만 보고 평가하지 않고, 그런 행동과 말이 나온 뿌리를 생각하면서 기다려줄 수 있게 됩니다. 그가 화를 좀 내더라도 그걸 따지지 않고 꼭 껴안아 줄 수도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 사람을 파악해야 된다는 거예요. 좋은 인간, 나쁜 인간을 분류하기 위한 파악이 아니고, 사실대로 그를 알아서 그에 맞게 대응하기 위해서 파악하는 거예요. ‘너는 마음에 상처가 있고, 감정 기복이 심하니까 너는 안 돼’ 이런 관점이 아닙니다.
다만 그런 사람은 조직의 책임을 맡으면 안 돼요. 눈 밖에 났으니까 너는 팀장이 될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에요. 그런 분이 조직의 책임을 맡으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기감정이 자꾸 왔다 갔다 하니까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요. 그런 사람은 재능이 있으면 재능 기부를 하는 건 괜찮지만 타인과 관계하는 조직책임자로는 적당치가 않습니다.
이건 차별하고 성격이 다릅니다. 적재적소에 맞게 사람을 쓴다는 관점이에요. 이렇게 헤아리는 것을 ‘사람을 챙긴다’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소임자를 배정할 때 추천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이렇게 물어본단 말이에요.
‘그분에게 이 일을 맡기면 어때?’
‘그분은 이런 착실한 면이 있어서 이런 일은 잘할 것 같고, 마음에 상처가 있어서 저런 일은 지금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주면 나중에 그 분과 상담을 하거나 그분에게 어떤 소임을 줄 때 참고를 할 수 있어요. 사람의 상태를 파악하고 있으면 이렇게 소임을 줄 때 도움이 됩니다. 그분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따지는 게 아니에요.
만약 지금 질문자가 불교대학에서 10명의 학생을 담당하고 있다면, 어떤 필요에 의해서 질문자가 맡고 있는 학생에 대해 물어보면 ‘몰라요’ 이렇게 얘기하면 안 돼요. 그건 질문자가 학생들을 못 챙기고 있다는 얘기예요. 그런 것들을 파악하고 있다는 건 사람을 잘 챙기고 있다는 거예요. 꼭 불교대학에 학생들이 안 빠지고 다니게 한다고 사람을 잘 챙긴다는 뜻이 아니에요. 예를 들어 한 학생이 결석을 자주 할 때도 그 사람을 알아야 적절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저분은 당분간 쉬게 해주는 게 낫겠다’
‘그냥 두면 저 사람은 안 나올 수 있으니까 전화를 해서 지금 안 떨어지도록 도와야 되겠다’
‘저 사람은 전화를 자꾸 하면 오히려 반발이 생기니까 조금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려주는 게 좋겠다’
이렇게 그 사람을 잘 알아야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을 잘 챙긴다는 말을 쓰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마칠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질문을 미리 신청한 사람이 열 명 남아있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스님은 바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열 명의 질문을 다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스님은 개인적인 질문은 즉문즉설 강연에서 하라고 하고, 마지막으로 활동가들이 가볍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의 활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해줘도 사람들은 부처님을 직접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법륜 스님 같은 사람을 만나면 부처님이 좀 좋아 보이고, 또 그렇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부처님도 별로로 보이는 겁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법륜 스님의 법문을 영상으로 들으면 좋아 보이지만, 그 사람이 법륜 스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불교대학의 담당자예요. 그래서 담당자가 곧 법륜스님이에요.
학생들은 담당자가 괜찮으면 불교대학을 계속 다니고, 담당자가 마음에 안 들면 불교대학을 안 다닙니다. 평소에도 부처님처럼 행동하라고 하면 여러분들이 부담이 커요. 그래서 불교대학을 진행하는 그 2시간만큼은 ‘내가 법륜스님이다’ 이런 마음으로 임해야 해요. ‘오늘은 내가 법륜 스님 대역으로 나왔다’ 이런 마음으로 2시간 동안 불교대학을 진행해야 해요. 집에까지 가서는 법륜 스님 대역을 안 해도 됩니다. 딱 2시간만 하는 거예요.
‘오늘은 내가 법륜 스님의 대역이다. 평등한 마음으로 학생들을 따뜻하게 대해야 되겠다.’
그런데 어느 불교대학 담당자의 얘기를 들으니까 청년들이 간식을 잘 먹는다고 해서 매 수업마다 샌드위치와 김밥을 만들어 간데요. 학생들이 10명인데 간식을 매번 만들어 가려니 처음에는 잘 먹어서 너무 좋았는데 요새는 지쳤다고 해요. 이런 방식으로 사람을 챙기는 것은 좋은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불교대학 졸업하고 나서 정토회에 수행하러 계속 나올까요? 안 옵니다. 친목 때문에 불교대학에 다니는 사람은 친목이 끝나면 안 나옵니다. 젊은이들에게 가끔씩 밥도 해주고 간식도 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양념으로만 들어가야 해요. 그게 주가 되면 여러분들이 지칩니다.
좀 가볍게 하세요. 정성을 기울이되 마음은 가벼워야 합니다. 지치면 안 돼요. 제가 늘 얘기하잖아요. 엄마가 애 키울 때 정성을 기울여서 책임과 의무감을 갖고 키우라고 하나요? 대충 키우라고 하나요?”
“대충 키우라고 해요.”
“대충 키우라는 건 내버려도라는 게 아니라 가벼운 마음으로 키우라는 뜻입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아이고, 불교대학 담당하려면 얼마나 힘들어요?’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해야 해요.
‘하나도 안 힘들어요. 법문 한 번 더 들으니까 저도 좋아요. 사람들 불교 공부하는 거 보니 너무너무 좋아요. 나누기하면 나도 배우는 게 많죠. 그래서 시간은 좀 들지만 아주 좋아요.’
담당자 소임을 봉사점수 따려고 억지로 하면 안 돼요. 옆에서 ‘하지 마라’ 그래도 나에게 좋으니까 하는 겁니다. 이런 가벼운 마음으로 해야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어요. 잘해야 된다는 의무감으로 하면 여러분들도 힘들고, 하갱들에게도 부담이 돼요.
첫째, 가볍게 하셔야 됩니다. 일주일에 딱 2시간만 법륜 스님 대역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아요?
‘내가 부처다. 내가 법륜스님이다. 법륜스님 대역을 내가 한다’
이런 마음으로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저의 대역을 해주시니까 저는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해야 해요.
‘제가 해야 되는 일을 여러분들이 다 나눠서 법당마다 저를 대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대로 여러분들은 저한테 ‘법륜 스님 대역을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마음을 내야 하고요. 서로 이렇게 고맙게 생각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가벼워지지 않을까요.
얼굴을 보니까 지난번 경주 남산 순례 때도 오신 분들이네요. 그때는 담당자라고 학생 데리고 오고, 오늘은 본인일로 온 거예요?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모두 박수)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활동가들은 나들이를 다녀온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내가 법륜스님이라는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내일도 수업이 있는데, 내일 딱 2시간은 법륜스님이 되어봐야겠어요.”
“온라인으로 회의만 하던 활동가들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고 도시락도 함께 먹어서 즐거웠어요.”
“올해 단풍 구경은 못 할 줄 알았는데, 덕분에 단풍구경까지 해서 좋았습니다.”
“다른 활동가들도 주말이 없다는 말에 위로를 받았습니다.”(웃음)
스님의 하루가 저물어갑니다. 새벽에는 불교대학 학생을 만나고 낮에는 불교대학 학생들을 챙기는 담당자를 비롯한 활동가들을 만났습니다. 내일은 서울에서 정토회 만일결사를 책임지는 결사 행자들을 만나 하루 종일 회의할 예정입니다.
아침에 두북 정토수련원을 출발한 스님은 점심때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오늘은 오후 2시부터 밤늦게까지 결사 행자 회의에 하루 종일 참석했습니다.
정토회 사료편찬특별위원회 구성 및 운영 방안, 제10차 천일결사 사업안, 회칙 개정, 정토회 별 법사단 배정 방안, 경전반 교재, 불교 의식 개편 등 다양한 안건이 올라와 열띤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쟁점이 생길 때마다 스님은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내일은 수원 컨벤션센터에서 행복한 대화 즉문즉설 강연이 있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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