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새벽 눈은 내리고
최의상
어스름 새벽, 눈은 내리고, 보는 사람 없어 멋적기만 한데 그래도 아무 생각 없는 듯 눈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 앉는다. 눈은 새벽에 내리면서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는지 아무것도 가리지 않은 눈 그 자체로 내려 와서는 검은 대지를 하얗게 덮고 있다.
"어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여 커튼을 빠꼼히 열고 창밖을 무심히 보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은 내리고 있었다. 소근거리는 소리도 없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하다. 아파트 창마다 어둠이 잠자고 있을 뿐 불을 밝힌 창문은 없었다. 불빛이 있다면 졸고 있는 가로등과 장례식장의 광고 네온사인이 밝고, 오른 쪽에는 타이어집 광고의 네온사인이 졸고 있었으며 100m앞 돌담거리 저수지는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의 라이트를 반사하기도 하며 아래로 내려가는 자동차의 붉은 미등의 불빛이 반사하여 장미꽃이 피었다가 지는듯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어쩌다 한 개의 눈송이가 창문에 부딛혀 기절한 듯 붙어 있다가 스르르 흩어져 흔적도 없다. 창문 앞 소나무 가지에 하얀 꽃이 피었다. 송화가루와는 다른 백향목꽃 같은 꽃이 피었다.새벽에 몰래 볼 수 있는 저 아름다움을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눈들이 살아 있는 요정들 같았다. 어느 하나도 똑 같은 움직임은 없었다. 저 나름대로 춤을 추듯 공중에서 흔들리며, 나부끼며, 오르내리며, 교태스럽게, 요염하게, 춤을 추며 내리고 있다. 지난 날 써 둔 시가 생각났다. 2012년1월31일 써 둔 시다. 그 날도 눈이 내렸다
운무(雲舞)
운산/최의상
허공을 은반삼아 춤추며 눈이 온다.
서서히 춤추며 이야기를 나누는 눈도 있고,
천상의 비밀을 말하듯 교태스러운 눈도 있고,
단순히 미풍에 맡기고 여릿여릿 오는 눈도 있다.
빠르지도 않으며, 느리지도 않으며
바람이 부는 듯, 바람이 일렁이는 듯
억만 송이 눈꽃 축제가 내 눈(眼)으로 들어온다.
나목인 가로수, 빛 없는 조명등, 방향 없는 표지판들이
눈에 묻혀 조용히 잠들고
탐욕스런 도시가 소리 없는 눈의 무덤이 되어도
눈은 계속 오고 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정원의 정막은
죽은 영혼을 깨우는 숨소리가 되어야 한다.
봄이면 마른 잎 속에서 솟아나는 푸르름을 보듯
하얀 눈 속의 태동을 잊을 수는 없다.
하얀 눈은 계속 와야 한다.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릴 때 까지
하얀 눈은 오고 또 오면서
붉은 피라도 하얗게 덮어 주어야한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2023년 새 해를 맞이하여야 한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고 한다. 옛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이한다는 말이다. '옛 것은 무엇이고 새것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으나 옛것이 도무지 생각이 안 난다. 미수(米壽)에 가까운 내 나이 속에 옛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다. 막연히 어림짐작으로 생각하니 좋은 것 보다 나쁜 것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그래서 잊고 싶어하는 것인가. 나는 반평생(半平生)을 가르치는 일로 세월을 보냈다. 야간학교, 재건학교, 주일학교를 합친다면 삼분의 이는 가르치는 일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잘 가르쳤느냐고 묻는다면 잘못 가르친 일이 많다고 솔직히 고백한다. 계몽기시대이며 일본교육의 계승이며 페스탈로치, 죤 듀이등 외국 교육사조와 유교사상교육의 혼용된 사상 속에서 가르치던 시대이기 때문에 사랑의 매를 들고 가르쳐야 했다. 눈이 무릎까지 파묻히는 시골길 초가집을 찾아 기성회비를 받아야 했고, 중학교 입시를 통과시키기 위하여 전기도 없는 호롱불 밑에서 가르쳐야 해고, 육성회비를 받으러 찬바람이 몰아치는 바닷가 어부집을 찿아가야 했던 일 들이 학생들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생각하면 오늘의 잣대로 평가한다면 그 시대의 선생들은 모두 검찰에 불려가서 호된 꾸중과 모멸찬 잔소리를 듣고 몇 년이고 언도를 받아 감옥에 가야 할 선생들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지난 날 좋은 일이 있었다고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래 산 것이 유죄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위안이 되는 일도 있다. 제자들이 이제는 육십 한갑이 되었다고 띠동기 환갑진치를 하는데 그 때 담임선생님을 모시고 오히려 선생님들을 위로하는 제자들이 있었기에 조금의 위로가 되었다. 그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었다. "자네 그 때 매우 개구장이였지, 그래서 매를 맞았지. 이제 생각하니 미안허이" 하자 제자는 "선생님께 매를 많이 맞았어요. 그렇지만 그때 매를 맞으며 배웠기 때문에 지금 사람이 되었지요."하며 웃는다.
눈이 멎어가고 있다. 옛날을 보낼 준비를 해야겠다. 새 날을 맞이하려면 옛것을 버려야, 즉 마음을 비워야 새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것이다. 옛것을 버리자. 그리고 새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자. 니는 커튼을 닫고 새벽 잠을 자기로 하였다.
첫댓글 최선생님은 참 훌륭한 교육자시었습니다.
그보다 더 월등하심은 아직도 젊은이라는 점입니다.
눈 내리는 창가에서 사색을 하시고 시를 읊고
추억을 반추하시는 여유!
다 아름답습니다
세월은 저 혼자 가게 두고
선생님은 젊은 시절의 꿈으로 돌아가소서
샬롬!
최선생님
새해복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