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 9-22 (세계 차 없는날)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 2) 3)
1) 1969 - 멕시코 대통령 로페스 마테오스(Lopez Mateos, Adolfo) 사망 마테오스 [Lopez Mateos, Adolfo, 1910.5.26~1969.9.22] 아티사판 출생. 국립대학에서 법학을 배우고 멕시코주 주지사 비서를 거쳐 국민혁명당(PNR) 당수의 비서가 되었다. 1946년 상원의원, 유네스코의 멕시코 대표가 되었고, 1957년 입헌혁명당(PRI)의 대통령후보에 선출되어 1958년 대통령이 되었다. 쿠바혁명의 영향에 의한 국내의 좌우대립 속에서 인플레이션 문제, 토지개혁을 다루어 대통령 카르데나스 이후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963년 미국과의 엘 차미사르 영토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하였다.
2) 1994 - 미국의 만화가 버드 자겐도르프(Sagendorf, Bud) 사망 자겐도르프 [Sagendorf, Bud, 1915.3.22-1994.9.22] 30여년동안 뽀빠이 연재만화를 그린 버드 자겐도르프(79)가 1994년 9월 22일 플로리다주 사라소타 근처 한 작은 마을의 요양원에서 암으로 사망했다.워싱턴주 웨나치에서 출생, 소년 때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로 이주한 자겐도르프는 고교시절 산타모니카 부두에서 낚시를 하다가 만화주인공 뽀빠이를 만들어 낸 만화가 엘지 시거(Segar, Elzie, 1894~1938)를 만나 그의 조수가 됐다. 자겐도르프는 시거와 함께 '스위피' '신병 유진' '깡패 앨리스'와 같은 멋진 만화주인공을 만들어내 전세계 어린이들의 사랑을 받았다.1938년 시거가 사망한 후 킹사의 만화 편집차장이 되었고 1959년부터 일간지와 일요판의 뽀빠이 만화를 맡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만화예술' (1955년) '뽀빠이 첫 50년' (1979년) 등 2권의 책도 저술했으며 시력악화로 일간지에 연재하던 만화작업을 1986년에 그만두었으나 일요판 신문의 연재만화를 계속 그려왔다.
3) 1989 - 미국의 작곡가 어빙 벌린(Berlin, Irving) 사망 벌린 [Berlin, Irving, 1888.5.11~1989.9.22] 러시아 계 미국의 작사 ·작곡가. 시베리아의 테문 출생. 4세 때 미국에 이민하였으며 그 후 아버지를 잃고 갖가지 일을 하면서 음악을 공부, 작사 ·작곡을 시작하였다.1911년에 작곡한 《알레산더스 랙타임밴드》가 출세작이며, 그 후 《올웨이스 Always》 《이스터퍼레이드 Easter parade》 《화이트크리스마스 White Christma》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뮤지컬작품으로는 《Annie, Get Your Gun》(1946) 《Call Me Madam》(1950) 등이 있다. 1) 2) 3)
1) 1975 - 민방위대 발대식 전국에서 시작 민방위대 발대식 전국 직장, 지역별 민방위대 발대식 거행 * 제작연도 1975-09-30 * 상영시간 01분 11초 * 출처 대한뉴스 제 1050 - e-영상역사관 http://ehistory.go.kr/page/pop/movie_pop.jsp?srcgbn=KV&mediaid= 10075&mediadtl=20285&gbn=DH&quality=W 민방위 연혁 1975년 07월 19일 - 민방위본부 설치 1975년 07월 25일 - 민방위기본법 제정 1975년 08월 26일 - 민방위본부 설치 1975년 09월 22일 - 민방위대 발대 1991년 04월 23일 - 재해대책업무 인수(건설부) 1994년 12월 23일 - 방재계획관실을 방재국을 개편 1995년 10월 19일 - 민방위재난통제본부로 학대 개편(재난관리국 신설) 2000년 06월 07일 - 민방위방재국을 민방위재난관리국과 방재관실로 분리 2004년 06월 01일 - 민방위업무 일부 소방방재청으로 이관 http://www.ganghwa.incheon.kr/open_content/main/pleasure _ganghwa/civil_defense/defense_hall/history.jsp
2) 1964 - 한국의 월남군사원조단(의료대) 140명 사이공 도착 최초의 한국군 월남파병은 1964년 9월 제1이동외과병원 병력 130명과 태권도 교관 10명의 파견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브라운 주미대사와 베트남 정부의 지원 요청을 받고, 1965년 1월 26일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2월 비둘기부대로 명명된 2,000여 명의 후방 군사원조지원단의 파병으로 본격화되었다.전투부대의 파병은 1965년 7월 2일 결정되어 10월 9일 해병 청룡부대가, 10월 22일 육군 맹호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하여 미국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받았다. 이외에도 군수지원부대인 십자성부대, 군수물자수송을 담당한 백구부대 등이 파병되었다. 1966년 미국의 전투부대 추가파병 요청에 의해 국회의 논의를 거쳐 4월 16일 혜산진부대가, 8월 15일 백마부대가 베트남에 상륙했다. 이로써 한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월남파병 국군은 4만 8,000여 명에 이르렀다.
3) 1918 - 반나치 저항조직 '백장미'의 한스 숄(Scholl, Hans) 출생 숄 [Scholl, Hans, 1918.9.22~1943.2.22] 심야통신/백장미의 기도 (발췌) 나치 독일 시대 뮌헨대학 학생이었던 조피 숄(Scholl, Sophie, 1921~1943)은 오빠 한스 숄(Scholl, Hans, 1918~1943) 및 동료들과 함께 ‘백장미(Die weisse Rose)’라는 반나치 저항조직에서 활동했는데, 1943년 2월18일 오빠와 함께 체포돼 4일 뒤 처형당했다. 조피는 21살, 한스는 24살이었다. 백장미 저항운동이란 제2차 세계대전중이던 1942년 6월 익명의 유인물이 뮌헨지역의 불특정 시민들에게 우송됐다. “무책임한 어두운 충동에 몸을 맡긴 지배자 무리들에게 저항도 하지 않고 통치를 허용할만큼 문화민족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은 없다.” 다른 사람이 시작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파시즘이나 그와 유사한 모든 절대국가 조직”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저항을 해야 한다.- <백장미 통신>이라 이름붙인 유인물은 나치의 전쟁수행정책에 대한 ‘소극적 저항’(비폭력불복종)을 촉구했다. <백장미 통신> 제1호는 뮌헨대학 의학부 학생 한스 숄과 알렉산더 슈모렐이 썼다. 제4호까지 냈을 때 그들은 동부전선에 동원돼 전장의 무참한 현실과 유대인 학살 등을 직접 체험한 뒤 더욱 저항 신념을 굳혔다. 1942년 11월에 전선에서 돌아온 그들은 동지들을 늘리는 한편 베를린이나 다른 지역 저항그룹들과 서로 연락을 취했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이 패배한 사실을 안 그들은 <백장미 통신> 제6호를 만들었다. 제6호는 “남녀학생 여러분, 우리 민족은 스탈린그라드 괴멸에 떨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우리 민족은 국가사회주의(나치즘)의 유럽 노예화에 저항하고 자유와 명예의 새로운 신념으로 가득찬 진군을 시작하려 한다”고 끝맺고 있다. 학생들과 함께한 쿠르트 후버 교수가 썼다. 최후의 통신이 된 제6호를 조피와 한스는 대학 구내에 배포하다가 대학 직원의 고발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2월22일 열린 민족재판소는 조피와 한스, 크리스툴 프로프스트 등 3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 뒤 관련자 체포가 잇따라 43년 4월의 제2차 재판에서는 후버 교수, 알렉산더 슈모렐, 빌리 그라프 3명에게도 사형이 선고됐다. 백장미 그룹에 대한 재판은 1944년 10월까지 다섯차례에 걸쳐 모두 1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나치 지배하의 독일에서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은 시민은 100만명을 넘는다. 민족재판소는 ‘국가반역죄’를 처리할 목적으로 1934년에 설립됐는데, 패전까지 5200건의 사형판결을 내렸다. 백장미는 비좌익계 저항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서 경 식 도쿄경제대학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한겨레 2006-02-16 오후 04:15:00 1) 2) 3)
1) 1960 - 말리 독립 4-13세기에는 가나왕국이 지배하였으며 13-15세기에는 회교권의 말리 왕국이 15-16세기에는 송하이 왕국이 각각 이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송하이 왕국이 니제를 강 연안의 교역도시 팀북투를 중심으로 번성하였으나, 1591년 모로코에 의해 멸망하면서 17세기 중엽까지 모로코의 지배를 받았다. 그 후 세구와 카르타에서 밤바라족 왕국이 건설 되었으나 19세기중엽, 프랑스의 침략으로 식민화가 시작되었다. 1850~1864년에 투쿨로르 족의 회교도 알마르 우마르가, 1872∼1895년에는 말링케족의 사모리 투레가 프랑스군에 저항했으나 프랑스는 1880-1895년 두 세력을 정복하여 1920년 서아프리카 프랑스 수단으로 합병 식민화하였다. 니제르강 유역과 현재의 부루키나파소는 각각 1911년과 1919년에 프랑스 수단에서 탈퇴, 독자적인 국가를 세웠다. 이 들은 프랑스의 기본법에 의해 자치가 인정되어 1958년 11월 프랑스 식민지에서 공동체 공화국이 되었다. 1960년 8월5일 어퍼볼타로 독립하였으며, 1959년 세네갈과 연방을 구성한 말리는 1960년 9월 22일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을 한다. 초대 대통령에선출된 모디보 케이타는 사회주의 일당제의 강력한 지도력을 행사하였으나, 1968년 11월 군사 쿠데타로 추방되어, 트라오레를 위원장으로 하는 군사해방 위원회가 10여 년에 걸쳐 정권을 장악하였다. 1979년 6월 민정이양 후에도 트라오레가 계속 대통령에 유임하였으나 1991년 3월 군부가 트라오레 정부를 몰아내고, 1992년 4월 알파 우나르 코나레가 대통령이 되었다.2000년 5월 초에 말리의 대통령이 양국의 우호 증진 및 경제협력 등의 일환으로 방한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말리 국내 사정상 방문을 하지 못하였다. EXODUS (말리의 역사) http://www.koreabound.com/han/nation/africa/mali_info.html
2) 1955 - 충주비료공장 기공 1955년 충주비료공장 起工(기공)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국내자본 2억7500만원에다 차관 3333만8000달러가 투입된 국내 최초의 현대식 화학비료 공장이었다. 이것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사업의 핵심인 석유화학공업 건설의 추진체가 된다. (발췌)[화보로 보는 한국의 1인당 GDP 변천사-미래는 꿈꾸는 자의 몫이다] 김태완 월간조선 2010년 1월호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print.asp?nNewsNumb=201001100082&ctcd=N
3) 1941 - 드골, 자유프랑스 국민위원회 조직
1940년 6월 16일 프랑스 정부는 합헌적인 절차에 의해 필리프 페탱 원수에게 인계되었는데, 페탱은 이미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어야 한다고 결심한 상태였다. 2일 후인 6월 18일 프랑스군의 한 장교인 샤를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라디오 방송으로 프랑스가 계속 싸울 것을 호소했다. 영국측의 조심스러운 지원하에 드골은 영국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중심으로 전쟁 발발 전부터 영국에 거류하던 프壕?교민 지원자들과 프랑스 해군 부대들을 모아 자유 프랑스군을 단계적으로 증강했다. 1940년 8월 아프리카의 3개 프랑스 영토인 차드·카메룬·무아앵콩고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편으로 모였으며, 9월에는 인도와 태평양의 프랑스 식민지들이 그뒤를 따랐다. 1940년 9월 자유 프랑스의 다카르 원정군이 자유 프랑스에 대한 세네갈의 즉각적인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지만, 드골은 그해 10월 제국 국방회의를 신설했다. 조르주 카트루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군이 1941년 6~7월에 영국이 주도하는 시리아 작전에 참가했다. 그 작전은 페탱이 비시에서 수립한 정부에 충성하는 프랑스군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었다. 9월에 드골은 망명정부인 프랑스 국민위원회를 창설했다.자유 프랑스군은 비시 정부에 의해 반군으로 매도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많은 좌익주의자들은 드골의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싫어했으며, 영국은 드골이 프랑스의 위신이나 프랑스 주권의 화신이라는 자신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들에 관해 비타협적인 태도를 취해 골치를 앓았다. 비시 정부와 외교 관계를 지속하고 있던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12월 자유 프랑스의 해군이 명목상 비시 정부가 통치권을 물려받은 뉴펀들랜드 근해의 생피에르 섬과 미클롱 섬을 점령한 데 기분이 상했다. 그때는 마침 미국이 아직 비시 정부의 프랑스는 적국으로 삼지 않고 추축국들을 상대로 전쟁에 돌입한 달이었다. 영국과 자유 프랑스 사이의 긴장상태는 자유 프랑스가 런던과 프랑스 국내에 있는 애국적인 레지스탕스의 수많은 항독(抗獨) 단체들 사이의 모든 비밀관계를 독점할 권리가 있는 듯한 태도를 취해 고조되었다. 레지스탕스와의 유대를 과시하기 위해서 드골의 운동조직의 명칭이 1942년 7월 14일자로 전투 프랑스군(Forces Françaises Combattantes/FFC)으로 바뀌었다. 1) 2) 3)
1) 1937 - 중국 제2차 국공합작 성사 [어제의 오늘]1937년 제2차 국공합작 성사ㆍ일제 침공 맞선 불안한 좌우연합 시안사변(西安事變)은 1936년 12월12일 동북군 사령관인 장쉐량(張學良)이 공산군 토벌을 독려하기 위해 산시성 시안을 찾은 국민당 주석 장제스(蔣介石)를 화칭츠(華淸池)에 가둬둔 채 국민당과 공산당 간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동북 5개성을 통치하던 중국의 2인자 장쉐량이 1인자 장제스를 무력 감금한 이 사건은 세계를 경악시켰고,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제2차 국공합작(國共合作)이 성사되도록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국민당은 27년 제1차 국공합작 결렬 이후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역을 공격했고, 궤멸위기에 빠진 공산당의 홍군은 근거지를 서남부에서 중국 북서부 옌안(延安)으로 옮기는 대장정에 나서야 했다. 한편 일본군이 동북 3성을 침략하자 중국에는 항일여론이 들끓었고, 공산당은 국민당에 내전 중지와 항일을 위한 제휴를 제안했다. 장제스는 이를 거부했지만 장쉐량이 이에 동의해 시안사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어 일본군이 37년 7월7일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일으키며 중국 내륙 침략을 본격화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37년 9월22일을 기해 제2차 국공합작에 들어갔다. 서의동기자 phil21@kyunghyang.com - 경향신문 2009-09-21 17:43:3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0909211743325&code=100100&s_code=ap005
2) 1981 - 초고속열차 TGV 시험운행 1981년 오늘 프랑스의 초고속열차 테제베(TGV)가 시험운행에 나섰다.
3) 1980 -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 [어제의 오늘]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발발ㆍ미국·서유럽, 일제히 이라크 지원 중동의 맹주를 다투던 이란과 이라크는 1979년 각각 정치적 대격변을 겪는다. 2월에는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나 친미 팔레비 왕조가 몰락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호메이니가 집권했다. 7월에는 이라크에서 향후 중동 정세의 폭풍의 눈이 되는 사담 후세인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때부터 양국은 국경 근방에서 소규모 군사충돌을 빈번하게 벌였다. 그러던 중 1980년 9월22일 이라크 전투기가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폭격하면서 8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전이 시작됐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9212125315&code=100100 2001 - 미국의 바이올린 연주자 아이작 스턴(Stern, Isaac) 사망 스턴 [Stern, Isaac, 1920.7.21~2001.9.22]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 타계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81)이 심장병으로 2001년 9월 22일 뉴욕 코넬 의료센터에서 별세했다. 1년전 여름 심장판막 수술을 받은 스턴은 그해 12월 코네티컷주 가이로드빌의 자택에서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 때 "여전히 시거와 와인을 즐긴다"며 건강을 과시했으나, 최근 심장병이 재발, 뉴욕 병원에서 치료받아 왔다. 스턴은 1m65cm의 작은 키에 `음악의 지존`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에 앞서 음악교육자, 음악운동가로 이름을 날렸다. 연주장인 카네기홀 구출운동은 스턴의 `수퍼 파워`를 일군 대표적 사건으로, 1891년 뉴욕 맨해튼에 개관한 카네기홀이 부동산 개발업자한테 팔려 1955년 헐릴 위기를 맞자 스턴은 시민위원회를 만들어 카네기홀 지키기에 나섰다. 그는 "카네기홀은 음악가들의 영감이 숨쉬는 문화유산"이라며 불도저가 버티고 선 홀 앞에서 항의집회를 주도, 홀을 되사는데 필요한 모금운동을 폈다. 결국 뉴욕시가 카네기홀을 매입했고, 홀이 새 출범하던 1960년부터 스턴은 카네기홀 회장을 맡아왔다. 스턴의 의지와 열정을 기려 카네기홀은 1997년 대연주장을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움`으로 명명했다. 스턴은 1920년 우크라이나에서 유태인 부모밑에서 태어났다. 생후 10개월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13살 때 데뷔했다. 음반만 100장 넘게 남겼으며, 특히 20세기 현대음악에 애착을 보여 번스타인·뒤티외 등의 작품을 다수 초연했다. 스턴은 카네기홀을 지켜낸 공로로 `알버트 슈바이처 음악상`을 받았고 `그래미 종신 공헌상`(1987) `미국 대통령 자유메달`(1992) 등을 수상했다. -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기념 (2000.9.22 발행)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 직지의 본고장 청주에서 2000청주인쇄출판박람회가 열린다. 22일부터 10월22일까지 청주 예술의 전당을 비롯한 청주시 일원. ‘문자 문화의 지난 천년, 새 천년’을 주제로 한 이번 행사에서는 인류의 인쇄문화 발달사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 전시장은 ‘고인쇄마을’ ‘인쇄체험마을’ ‘문자마당’ ‘출판문화도시’ ‘출판체험도시’ ‘인터넷세계’ ‘디지털세계’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직지의 제작 과정과 관련 유물, 수메르 점토판 글자, 중국 갑골문자, 필기 재료인 파피루스 등 고인쇄문화부터 현대의 첨단 디지털 인쇄출판까지 동서고금의 인쇄문화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과거의 인쇄과정을 체험해보는 자리도 마련되고 각종 공연 공모전과 학술회의(9월 28, 29일, 10월 12, 13일)등 부대행사도 풍성하다. www.cippexpo.com 043―220―6859<이광표기자>kplee@donga.com 동아닷컴 2000-09-19 18:51
1990 - 베이징 아시안게임 개막(9.22~10.7) 제11회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1990년 9월 22일 오후 5시 베이징[北京] 공인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개막식과 함께 시작됐다. 단결, 우의, 진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이번 대회에는 아시아 35개국 6천여명의 선수단이 출전, 이날부터 10월 7일까지 16일간 경기를 벌였다.베이징 대회에는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38개 회원국 중 이틀전 9월 20일 열린 OCA총회에서 회원국 자격을 상실한 이라크와 재정문제를 이유로 불출전을 통보해 온 요르단 예멘 등 3개국을 제외한 35개국이 출전, 1951년 뉴델리 제1회 대회 이후 가장 많은 출전국을 기록했다.이번 대회에선 육상, 축구 등 27개 정식종목과 야구, 연식정구 등 2개 시범종목에서 총 3백13개(시범종목 5개 포함)의 금메달을 놓고 각국 대표선수가 열전을 벌였다. 27개 종목 3백8개의 금메달을 걸고 싸운 이번 대회의 종합패권은 금 1백83개의 홈팀 중국에 돌아갔으며 한국이 54개로 2위, 일본과 북한은 38개, 12개로 각각 3-4위에 올랐다.
1968 - 이집트 '아부심벨 신전' 이전공사 완료 아부 심벨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재위 BC 1301∼BC 1235)가 건축한 신전 유적지. 아스완댐의 상류 약 280㎞ 지점인 나일강 기슭에 있다. 신전은 왕 자신을 위한 대신전과, 왕비 네페르타리를 위한 소신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 바위 속에 구축한 암굴신전인데 기자(Giza)의 피라미드와 맞먹는 큰 건조물이다. 대신전의 정면은 높이 33m, 너비 38m, 안길이 63m에 달한다. 정면에는 4체(四體)의 왕의 의좌상(椅坐像)이 있는데, 그 높이는 모두 20m이다. 중앙에 태양신 라 호라크티의 상이 안치되어 있고, 상부에는 태양을 예배하는 동물 개코원숭이 무리를 새겼다.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너비 16.7m, 안길이 18m의 제1실이 있는데, 이곳에는 높이 10m인 오시리스 신을 본뜬 람세스상이 8체 있고, 벽면을 모두 덮는 그림과 문자들은 왕의 카데슈싸움의 경과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다. 카데슈는 시리아 땅이며, 람세스 2세 군대와 히타이트군의 결전장이었는데, 기록에는 이집트군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서술하고 있다. 미국의 이집트학자 J. 브레스테드가 <아르신전은 역사의 보고(寶庫)이다>라고 한 것은 이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제1실에 연결하여 좌우로 8실의 창고를 만들었다. 제2실은 너비 7.7m, 안길이 11.2m이며, 천장은 신상을 본뜬 4개의 기둥으로 떠받쳐 있다. 벽면 그림은 종교의식을 묘사하였다. 제3실은 너비 7.7m, 안길이 3.2m이며, 화면 내용은 제2실과 같다. 제4실은 지성소(至聖所)이며, 너비 4m, 안길이 7m이며, 제단에 4체 신상이 있는데, 신이 된 람세스 2세 자신과 라호라크티, 아모레, 프타하이다. 1년에 2회, 즉 2월 20일 무렵과 10월 20일 무렵 해돋이빛이 이 지성소를 넓게 비추어서 오른쪽 끝의 1체를 제외하고 3체의 신상을 떠오르게 한다. 소신전은 대신전 북쪽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정면에 높이 10m인 6체의 거상(巨像)이 있는데, 왕비 외에 왕과 여신을 나타낸다. 안길이는 약 20m이며, 방이 3개 있고 벽면에 그려진 것은 종교적인 그림과 글뿐이다. 1958년 구체화된 이집트의 아스완하이댐 건설계획으로 이 신전들 외에 여러 유적이 있는 누비아지방이 수몰될 위기에 놓이자, 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는 이집트정부와 수단정부의 요청을 받고 1960년 누비아유적 구제를 위한 세계적 캠페인을 시작하였다. 구제의 최대목표물은 아부심벨 신전이었다. 세계 여러 국가와 민간으로부터 기금이 갹출되고 여러 가지 구제안 가운데 스웨덴기술사단의 해체·이축안(移築案)이 채택되어, 스웨덴·이집트·독일·이탈리아·프랑스의 회사가 공동회사를 조직하여 1963년에 착공하였다. 1968년 두 신전은 원위치에서 63m 높은 120m 서쪽 지점에 옮겨 세웠다.
1962 - 네루 인도 총리, 프랑스 방문 우호관계를 재확인한다. 아시아 여러 국가의 연대 강화, 미·소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는 비동맹주의와 균형외교는 네루가 인도 독립 이래 변함 없이 편 외교정책이었다.
1961 - 미국의 배우 매리언 데이비스(Davies, Marion) 사망 데이비스 [Davies, Marion, 1897.1.3~1961.9.22] http://www.imdb.com/name/nm0203836/bio
1914 -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알랭 푸르니에(Alain-Fournier, Henri) 사망 1914 - 영국 순양함 3척 독일 잠수함에 피격, 400명 사망 1911 - 44세의 사이 영, 피츠버그 파이어리츠를 완봉 1862 - 링컨 미국 대통령 '노예해방 예비선언' 발표
1791 - 영국의 물리학자, 화학자 마이클 패러데이(Faraday, Michael) 출생 1593 - 독일의 동판화가 마테우스 메리안(Merian, Matthaeus)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