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회는 자가 백제이고, 태원군 양곡현 사람이다.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평원부승으로 임명되었다. 문제가 오관장이 되었을때, 곽회를 불러 문화적조에 임명하였다. 승상병조의령사로 전임되었고, 한중토벌을 수행하였다. 조조가 돌아올때, 정서장군 하후연을 남겨 유비에게 대항하도록 하고, 곽회를 하후연의 사마로 삼았다. 하후연이 유비와 싸울때, 곽회는 다이 질병이 있어서 출병을 하지 못했다. 하후연이 살해된 후, 군대안의 인심은 불안하였다. 곽회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탕구장군 장합을 군주로 추천하자, 각 진영은 비로서 안정되었다. 그 다음날, 유비가 한수를 건너 공격해 오려고 했다. 각 장수들은 의논한 결과, 중과부적이고 유비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있는 이상 물에 의지하여 진을 만들고 유비에 대항하려고 했다. 곽회가 말했다.
'이것은 우리들의 연약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을 꺽기에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물에서 멀리 떨어진곳에 진을쳐서 적을 유인하여 반쯤 건넌 후에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반드시 유비를 무찌를수 있을 것입니다.'
진을 친 후, 유비는 의심스럽게 여겨 건너지 않았다. 곽회는 고수하고 돌아올 마음이 없음을 나타냈다. 이런 상황을 보고하자, 조조는 그를 칭찬했으며, 임시로 장합에게 부절을 주었고, 또 곽회를 사마로 임명하였다. 훗날, 문제가 왕위에 오르자, 곽내후의 작위를 하사하였고, 진서장사로 전임되었다. 또 정강호군을 대행하고, 좌장군 장합과 관군장군 양추를 감독하여, 산적 정강와 반란을 일으킨 노수의 오랑캐를 모두 토벌하여 평정시켰다. 관중은 비로서 안정되었고, 백성들은 일을 편안히 할수있었다.
황초 원년(220) 곽회는 문제가 제위에 오른것을 봉하하는 사자로서 수도를 오는데, 도중에 질병을 얻어서, 거리를 계산하여 머물렀다. 도착하였을때는, 신하들이 즐겁게 연회를 열고 있었으므로, 문제가 정색을 하고, 곽회를 꾸짖으며, 말했다.
'옛날 우가 도산으로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때, 방풍은 뒤에 도착하자, 사형에 처했소, 지금 하늘이 함께 축하하고 있는데, 그대는 오히려 가장 늦게 왔소. 무엇 때문이오?'
곽회가 대답하여 말했다.
'신은 오제는 교화를 우선으로 하여 백성들을 덕으로써 지도하였고, 하후의 정치가 쇠미해지자, 형벌을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신은 당우의 시대를 만났습니다. 이 때문에 스스로 방풍의 죽음을 면하게 될것 입니다.'
문제는 그의 말을 듣고 칭찬하고 발탁하여 옹주자사를 겸임하도록 임명했다. 안정의 강족 대사 벽제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곽회가 토벌하여 투항하도록 했다. 매번 강족과 오랑캐가 투항해 오면 곽회는 항상 먼저 사람을 보내 그들의 친척관계 남여의 많고 적음을 탐문하도록 했다. 회견할 때, 한두가지 일로부터 그들의 사정을 하나하나 이해할수 있었고, 심문을 매우 조밀하게 하였으므로, 모두 그를 신명이라고 칭했다. 태화 2년(228)촉나라 재상 제갈양이 기산에서 나와 장군 마속을 가정까지 파견하고, 고상은 열유성에 주둔하도록 했다. 장합이 마속을 공격하였고, 곽회가 고상의 진영을 공격하여 모두 격파시켰다. 또 농서의 유명한 강족 사람당제를 포한에서 격파시켰으므로 건위장군의 직위를 더해주었다. 5년(231)촉나라가 노성을 공격하러 나갔다. 이때, 농우에는 식량이 없었으므로, 관중에서 대량 수송해 오도록 상의했다. 곽회는 위임과 은혜로써 강족과 오랑캐 사람을 어루만지며, 집집마다 곡식을 내게 하고, 공평하게 수송 노역을 할당하였으므로, 군사들의 식량은 충분했다. 양무장군으로 전임되었다.청룡 2년 (234)제갈양이 사곡에서 공격하여 나왔고, 아울러 난항에서 둔전을 하였다. 당시 사마선왕(사마의)는 위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제갈량이 반드시 북원을 다툴것이므로 응당 먼저 그곳을 점거해야 된다고 계획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곽회가 말했다.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사마선왕은 그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곽회는 곧 북원에 주둔했다. 참호와 보루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촉나라 병사가 대대적으로 이르렀으므로, 곽회는 맞아서 그들을 공격했다. 며칠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장수들은 모두 서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양이 서쪽에서 형체를 드러내는것은 관병으로 하여금 중병을 서쪽에서 대응하게 하려는것으로, 실제로는 틀림없이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밤, 과연 양수를 공격하였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성을 공략할 수는 없었다. 정시 원년 촉나라 장수 강유가 농서로 진격해 나왔다. 곽회는 곧 진군하여 강중까지 추격하였다. 강유는 곧 물러났다. 곽회는 곧 강인 미당등을 토벌하고, 저인 3천 부락을 순찰하여, 위로하고, 그을들 옮겨 관중을 충실하게 하였다. 좌장군으로 승진했다. 양주의 휴도호양원벽드은 종족 부락 2천여 가구를 이끌고 옹주로 귀속했다. 곽회는 상주하여 그들로 하여금 안정군의 고평에서 거주하도록 하여, 주민이 되게 하기를 요청했다. 그후, 그들 때문에 서주도위를 설치했다. 전장군으로 바꿔 임명되었고, 이전과 같이 옹주를 관리했다. 정시 5년(244) 촉을 토벌하자, 곽회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선봉이 되었다. 곽회는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즉시 군사를 적지에서 탈출시켰기 때문에, 크게 패하지는 않았다. 돌아오자, 곽회에게 절이 주어졌다.
정시 8년(247)농서,남안,금성,서평의 각 강인 아하,소과,벌동,아차새 등이 서로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켜서 그들에게 호응했다. 토촉호군의 하후패는 군사들을 지휘하여 위시에 주둔했다. 곽회의 군대가 막 적도에 이르렀을때, 논의하는 자들은 먼저 포한을 공격하여 평정한 후에야 내부의 흉악한 강인을 평정 할 수 있고, 외부의 적의 음모를 꺽을수 있다고 했다. 곽회는 강유가 반드시 하후패를 공격해 올 것이므로 풍중으로 들어가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하후패를 맞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강유는 과연 위시를 공격해 왔는데, 마침 곽회의 군대를 만나자, 강유는 점차 퇴각했다. 곽회는 모반한 강족 사람들을 토벌하여 아하와 소과를 베어버렸는데 이때, 항복한 자가 1만여 부락이나 되었다. 정시 9년(248) 아차새등은 하과와 백토의 옛성에 주둔하면서 황하를 거점으로 하여 위나라 군대에 항거했다. 곽회는 상류의 형세를 보고 비밀리에 하류로 군대를 건너게 하여, 백토성을 점거하고, 공격하여 크게 격파시켯다. 치무대가 무위를 포위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서해에 남아있었다. 곽회는 군대를 전진시켜 서해까지 나아가 그들의 물자와 귀중품을 습격하여, 취하려 했는데 마침 돌아오는 치무대와 마주치게 되어 용이의 북쪽에서 교전하여 그를 무찔러 달아나게 했다. 영거라는 흉악한 오랑캐가 석두산의 서쪽에 있었는데 큰 길을 끊어버려 왕의 사신을 왕래하지 못하게 하였다.
곽회는 돌아갈 때, 토벌하여 크게 무찔렀다. 강유는 석영으로부터 나와 강천을 따라서 서쪽으로 치무대를 맞이하고, 음평태수 요화를 석중산에 남겨 두어 성을 쌓게 하였고, 패배한 강인들을 거두어 인질로 삼았다. 곽회가 군대를 분산시켜 그들을 취하려 했다. 장수들은 강유의 군세를 서쪽으로 강력한 만족과 이어져 있고, 요화가 요충지를 점거하고 있는데, 우리편의 군대를 두방향으로 나누어 대처하는 것은 군대의 세력만 약화시키는 것이고, 전진해도 강유를 제압할수 없고, 물러나도 요화를 함락시킬수 없으니 계책이 아니고, 모두 합쳐서 함께 서쪽으로 가는 것만 못하며 아직은 만족과 촉나라가 연견되지 않아 그 안팎이 끊어져 있으니, 이는 연합하여 적을 토벌하는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곽회가 말했다.
'지금 가서 요화를 취하고, 적이 생각지도 못했는데 출동하면 강유는 반드시 낭패할것이요. 그리고 강유로 하여금 명령에 따라 분주히 돌아다녀 피곤하게 하는것이오. 군대는 멀리 서쪽으로 가지 못하고, 호인과 촉나라의 연합은 자연스럽게 끊어지게 될 것이오. 이것은 하나를 들어 둘을 온전하게 하는 계략이요.'
곧 따로 하후패등을 파견하여 답중까지 강유를 추격하게 했다. 곽회는 직접 군사들을 인솔하여 요화들을 공격하였다. 강유는 과연 달려 돌아와 요화를 구하였으니 모두 곽회가 계산한 것처럼 되었다. 나아가 도향후로 봉해졌다. 가평원년(249)정서장군 도독옹양제군사로 승진했다. 이해 옹주자사 진태와 함께 계책을 정하여, 촉나라 아문장군 구안등을 시옆에서 항복시켰다. 가평 2년 (250)조서를 내렸다.
'옛날 한천 싸움에서 거의 전멸하였지만, 곽회는 위험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구제하였으므로 공로가 왕부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관중에서 30여년 있으면서 밖으로는 적을 정벌하고 안으로는 백성들을 안정케 하였다. 근년이래로 요화를 격파하고 구안을 포로로 잡았으니, 공적은 현저하다. 짐은 매우 칭찬하는 바이다.지금 곽회를 거기장군,의동삼사로 삼고, 지절,도독은 옛날과 똑같이 하라.'
그는 승진하여 양고후로 봉해졌고, 식읍이 2천7백8십호가 되었는데 3백호를 분할하여 한 아들을 정후로 봉했다. 정원 2년(255) 세상을 떠났고, 대장군으로 추증했으며, 시호를 정후라고 했다. 아들 곽통이 뒤를 이었다. 함희연간, 다섯 등급 작위를 세웠는데 곽회가 앞 조대에서공훈이 현저하였으므로 바꿔서 부양자로 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