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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옥희도 |
시대상황 |
한국전쟁 | |
생활태도 |
요령, 사무적, 직업적 |
예술가의 기질, 요령 없음 |
성격 |
일상적, 가변적, 사무적 |
불변적, 의지적 |
그림 속의 지시 대상 |
나목 밑을 스쳐가는 사람 |
봄의 희망을 간직하고 있는 나목 |
■ <나목> 이해하기
박완서의 '나목'은 1970년 <여성동아>의 장편 공모에 당선된 작품으로, 한국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절의 서울을 배경으로 청춘의 성숙 과정과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길을 교차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을 살아가야 했던 때에 인간다움 혹은 가치를 실현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미군 PX에서 근무하는 이경은 미군에게 초상화를 그려 주는 화가들 속에서 옥희도를 만나 사랑을 느낀다. 이경은 자기 때문에 두 오빠가 폭격으로 죽었다는 죄 의식이 있으면서, 동시에 두 아들을 잃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살고 있는 어머니와 암울한 집안 분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있는 인물이다.
옥희도 역시 고독한 인물로, 두 사람은 서로의 고독함을 확인하고 가까워진다. 술 먹는 침팬지 앞에 이경과 옥희도는 함께 모이며 사랑을 나누곤 한다. 침팬지를 보는 동안 이들은 이들이 가진 고독을 털어버리고 유쾌할 수 있기 때문에 둘이 침팬지 앞에서 모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인물은 각자 제 갈길을 찾아간다.
옥희도는 진정한 화가가 되기 위한 길을 가고, 이경은 태수와 결혼하여 평범한 아내의 길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렇게 헤어진 것이 아니다. 옥희도는 '나목'을 그림으로써 진정한 화가가 되었고, 그 나목을 고목으로만 보았던 이경은 옥희도의 유작전에서 그것이 나목이었음을 확인하고 과거의 제 모습과 자신에 대한 옥희도의 의미를 뚜렷이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시각적 심상이 있다. 그것은 '부우연' 휘장·'부우연 '캔버스와 같은 '부우옇다'는 심상이다. 이것은 이경이 옥희도의 눈에서 본 '황량한 풍경의 일각 같은 것'과 같은 심상이다.
외부의 세계가 부옇게 보이는 것은 '자신의 눈에 무엇이 덮여 그렇게 보이는 것'과 '정말로 외부의 세계가 부옇다'라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여기서 나타난 '부우연'의 의미는 인물들 속에 내재되어 있는 생각들이,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를 부옇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경은 옥희도가 그리던 그림을 죽어버린 나무, 생명력을 상실한 나무로 보았고, 후에 가정을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 후, 겨울 한철을 이겨 내고 있는 나무인 나목(裸木)으로 보았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청춘의 성숙 과정을 다룬 것이다.
■ 화가 박수근과 박완서의 '나목'
“그럼 도대체 왜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잘 나가는 증권중개인이었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홀연히 떠난다. 불혹의 나이 40에. ‘달과 6펜스’에서 서머싯 몸은 폴 고갱의 삶과 예술을 이렇게 극적으로 재현했다. 그림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타이티로 간 찰스 스트릭랜드, 즉 폴 고갱은 그곳에서 불후의 명작들을 남기고 생을 마친다. 그는 천재가 갖추어야 할 예술적 성취와 비극적 삶이라는 극적 요소들을 두루 갖춘 매력적인 인물이다. 고갱으로 인해 몸의 ‘달과 6펜스’가 더 읽혔는지, 아니면 뛰어난 문체를 자랑하는 몸의 책으로 인해 고갱이 더 많이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둘이 상호 보완적으로 다른 하나를 좋아하게 만드는 시너지 효과가 있다는 것. 미술과 문학은 서로 그리 멀지 않은 상호 보완적 존재이니까.
고갱 하면 박수근이 떠오르는 것은 순전히 취향의 문제일까?(물론 박수근 하면 반대로 고갱이 떠오른다). 원근이나 명암 등의 회화 규칙들을 무시하고 평면성을 추구한 것, 향토적 서정성을 극대화한 것, 사조를 무시하고 고집불통 외길을 간 것 등 공통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평가와 분석은 전문가에게 맡기자. 그들이 한 짝으로 기억되는 다른 이유는 고갱에게 ‘달과 6펜스’가 있듯이 박수근에게는 박완서의 ‘나목(裸木)’이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 시대의 걸출한 글쟁이 박완서가 ‘본시가 환쟁이’인 박수근을 만난 것은 6·25 전란 중 미군부대의 초상화부에서였다. 스무살 적의 이 운명적 만남은 다시 스무해가 지난 후에도 박완서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나이 40에, 어쩌면 평범한 주부였던, 그러나 강렬한 창조의 힘에 저항력을 잃고 만 박완서를 문단으로 내밀었고, 마침내 ‘나목’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나목’을 감명깊게 읽은 사람이 박수근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박수근을 좋아하면서 ‘나목’의 진한 감동을 느끼지 못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나목’으로 해서 박수근이 더 좋아지고, 박수근으로 인해 박완서의 글을 읽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내가 사람이 아니란 것보다 화가가 아닌 것이 더 두려워. 화가가 아닌 난 무엇일 수 있을까?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어.” ‘나목’의 주인공 옥희도는 이렇게 말한다. 본시부터 환쟁이인 박수근은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지극히 평범한 견해”를 갖고 우리의 참모습들을 그려냈다.
기름기 없는 투박한 유화를 덧칠하여 우툴두툴한 화강암 질감을 내고, 그 위에 그림을 새겨 넣은 회백색 화폭은 첫눈에도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화강암 때문일까. “나는 우리나라의 석탑과 석불 같은 옛 석물에서 무한한 아름다움의 원천을 느끼며, 이를 조형화하는 일에 애쓰고 있다”는 그의 염원이 구현된 것이다. 그가 외국에서 가장 인정받는 한국 작가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박수근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나무 그림이다. 잎과 열매들을 다 떨구고 맨몸으로 서있는 나목 박완서의 말처럼 나목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고, 거침없이 당당하고 늠름하지 않은가. 물기 없는 질박한 화강암 표피에 우뚝 서있는 나목은 언젠가 새싹을 틔워낼 생명에의 희망이 아닌가.
현대 미술품 최고가를 연달아 경신하는 작가, 5월의 문화인물, 한국적인 소재와 정서를 독창적 조형언어로 구사한 화가. 이러한 사후 평가가 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더 많은 박수근, 더 많은 ‘나목’이 나오기를 기다릴 뿐.
- 장영준 중앙대 영문학 교수(문화일보, 푸른광광, 2002.5.9)
납작납작 ―박수근 화법을 위하여 / 김혜순
드문 드문 세상을 끊어내어 /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걸어 놓고 바라본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 둘이 / 벽 위에 납작하게 뻗어 있다.
그림 내용에 대한 묘사(삶의 무게에 눌린 듯한 이미지)
가끔 심심하면 / 여편네와 아이들도
한 며칠 눌렀다가 벽에 붙여 놓고 /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조심스럽게 물어 본다.
「발바닥도 없이 서성서성.
입술도 없이 슬그머니. / 표정도 없이 슬그머니.
그렇게 웃고 나서 /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마르기.」
「 」부분 : 그림 속 인물의 형상화 과정
그리곤 드디어 납작해진 / 천지 만물을 한 줄에 꿰어놓고
가이 없이 한없이 펄렁 펄렁. / 하나님, 보시기 마땅합니까?
세상에 휘둘림당하는 듯한 이미지 / 절대자인 하나님에게 질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서민들이 고달픈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설의적 표현임.
*가이 없이 : 끝없이
■ 핵심정리
*갈래: 자유시, 서정시
*운율: 내재율
*성격: 애상적, 반어적, 비판적
*제재: 박수근의 그림
*주제: 힘겨운 세상살이에 대한 서글픔과 연민
*특징 : 그림을 바탕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설의적으로 표현함 / 고달픈 삶을 사는 서민들의 입장에서 하느님께 항변하는 투의 어조를 사용함.
*출전:《또 다른 별에서》(1981)
■ 해설
박수근이 회백색의 선묘(線描)를 주요한 기법으로 하여 우리들의 생활을 그려냈던 것처럼 이 시의 시인도 그렇게 가느다랗게 이 세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비록 가느다랗지만 우리들 삶의 깊이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박수근 특유의 색채와 질감으로 형성된 아낙네들의 모습을 통해, '납작해진 천지 만물'을 읽어 내고자 한다.
이 시의 첫 부분에서 시인은 아주 독특한 발상을 보여 준다. 입체적인 이 세상을 납작하게 눌러서 그림처럼 벽에 걸어놓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 속에는 이 세상이 정말로 들어 있다. 시인 역시 이 세상이 정말로 들어 있는 그런 시를 쓰고 싶어한다. 흰 하늘과 쭈그린 아낙네들, 그리고 여편네와 아이들도 있다.
그러나 화려하고 당당한 이미지가 아니라 무채색에 가까운 색감과 입술도, 표정도, 윤곽도 희미한 인물들의 이미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정서는 서글픔과 애처로움일 것이다. 아무런 표정 없이 서성거리며 살다가 드디어는 피도 눈물도 없이 바짝 말라야만 잘 사는 것이라는 아이러니가 들어 있다. 바싹 말라야 잘 산다는 것은 거꾸로 보면 구태여 시인이 이 세상을 바짝 눌러놓지 않아도 저절로 이 세상이 사람을 억누르고 납작하게 만든다는 뜻이 아닌가. 이 시의 시적 화자가 '하나님'에게 이와 같은 서민들의 삶의 모습을 '보시기 마땅합니까?'라고 묻는 부분 역시, 서민들의 고달픈 삶에 대한 애처로움을 설의적 표현으로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아이러니에서 이 시인이 세상을 보는 법, 더 나아가서 시를 쓰는 태도를 찾아 볼 수 있다. 바로 하느님께 이 세상이 어떠냐, 정말로 보기 좋으냐를 물어보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물론 시인 자신도 하느님께 직접 자신의 의견을 물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 수가 있느냐고 피를 토하듯 묻고 싶다는 뜻으로 그렇게 썼을 것이다.
■ 그림 <세 여인>의 시적 변용
이 시의 제재이기도 한 ‘세 여인’은 박수근 화백의 작품 제목인 동시에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세 인물을 가리킨다. 박수근 화백은 일반적으로 아낙네나 소녀, 할아버지와 같은 서민들을 작품의 소재로 즐겨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애환을 나타내는 작품을 그렸다. ‘세 여인’이란 작품 역시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작품 속 등장 인물인 세 여인은 김혜순의 이 시에서 ‘아낙네 둘’, ‘여편네와 아이들’로 변용되어 나타나고 있다. 물론 미술 작품 속의 인물과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압축된 형태로 삶에 눌려 있는 서민들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또 이를 통해서 서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세 여인’은 미술 작품이나 시 속에서 작가의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중심 소재라고 볼 수 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유익한 자료 고맙습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