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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여자중.고 2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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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스크랩 피카소 - 성스러운 어릿광대
나도인조찬화 추천 0 조회 297 10.01.06 09: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피카소 -  성스러운 어릿광대

 

 

 

 

 

 

 

 

 

 

 

 

 

 

 

 

 

 

 

 

 

제1장  스페인에서 보낸 유년기
  사내아이는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라는 이름을 얻었다. 오랜 전통에 따라 아버지 이름에서
루이스, 어머니 이름에서 피카소를 따 왔다. 그리고 산티아고 성당에서 세례를 받던 날 아기
는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로,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
스, 시프리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따위 많은 이름을 얻었다. 많은 이름을 주는  것
은 말라가의 풍습이었다. 많은 이름을 가진 만큼 많은  재능을 부여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일
까.
  부모는 순수한 스페인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검다못해 푸른빛이 도는 머리카락을
지닌 어머니 마리아 피카소 로페스와 아버지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안달루시아  사람이었
다. 그러나 둘의 출신지역은 정반대였다. 호세는 키가 훌쩍 크고 바싹 마른 몸매에 머리카락
은 붉은색이었다. 실제로 스페인 민족의 신체적 특성은 이처럼 다양한 요소들이 어우러져있
다. 피카소는 상반된 이 두 유형을 한몸에 갖추고 태어난 셈인데, 계보를 조금 더 위로 거슬
러 올라가면 그 다양성은 더욱 풍부해진다. 사제, 예술가, 교육가, 사법관, 하급 공무원, 파산
귀족 등 피카소 몸 안에 이  모든 내력이 동시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다.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조상들이 피를 이어받은 피카소의 혈관 속에는 스페인 전체가 녹아 흐르고 있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다.
  피카소의 첫 작품, 비둘기 발    아버지는 화가로  식당 실내장식 전문가였다. 그는 새의
깃털, 나뭇잎, 앵무새, 라일락, 특히 비둘기를 즐겨  그렸다. 피카소의 가족이 살던 메르세드
광장에는 우거진 플라타너스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어서 수많은 비둘기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있었다. 호세는 광장의 비둘기를 끊임없이 그렸다.
  비둘기는 어린 피카소의 첫 번째 친구이기도 했다. 아직 말을 떼지 못한 아기는 정열적으
로 사물들을 주시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기가 말을 했다. "피스, 피스!(Piz,Piz!)" 그것은 명령
이었다. "라피스(Lapiz)." 크레용을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나무 위의 비둘기를 그릴 때,
창문을 통해 아기의 눈에 비친 수많은 나뭇가지들은 그만큼  많은 크레용이었다. 크레용 위
에 비둘기들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걸음마를 조금게 배웠는데, 과자상자를 잡기 위해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곡  닫
혀 있는 과자상자는 입방체였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입체주의의 창시자가 될 아기는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비스킷이었다. 비스킷을 먹기 위해 피카소
는 걸음마를 했다. 피카소는 입방체보다 비둘기와 먼저 친하게 된다. 아들의 재능에  감탄한
호세는 몇 년이 지난 후  조금씩 화필을 아들에게 넘겨주어 자기  작업에 참여하도록 한다.
피카소의 첫 소재는 비둘기의 발이었다.  호세는 대형 정물화의 끝마무리  작업을 아들에게
맡겼던 것이다. 피카소가 그린 비둘기들은 완벽했다. 어찌나 생생하게 그렸던지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아들에게 자신의 팔레트와 물감을 넘겨주었다. 호세는 아들의 재능이 자신을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알아보고, 자신의 이제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붓을 건네 준 행위는 모든 스페인 어린이들이 꿈꾸며 동경하는 또 하
나의 전수를 연상시킨다. '알테르나티브(Alternative)'라 불리는  이 전수행위는 투우 견습생
이 황소를 쓰러뜨릴 수 있는 진짜 투우사가 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파블로가 투우를 안 것
은 비둘기와 친숙해진 것만큼이나 오래된  일이다. 아버지는 피카소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투우장에 데리고 갔다. 원형 투우장의  화려한 광채와 열광, 이글거리며  김을 내뿜는 황소,
검은 황소의 털 위에 번들거리면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 '올레!'를 외치는 관중, 날개처럼 퍼
덕이는 관중의 부채, 그리고 조명을 받으면서 가슴을 쭉 펴고 서 있는 투우사, 이 모든 것에
대한 정열을 그는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스페인 회화의 정수    1891년, 호세는  스페인 최북부 서해안에 위치한 라코루냐시에서
제의한 미술교사직을 수락했다. 피카소의 누이동생 콩셉시옹과 롤라가 태어난 뒤였다.  대서
양에서 몰려드는 안개와 비를 동반한 바람이  부는 길목에 자리잡은 라코루냐는 늘  날씨가
흐린 곳이었다. 호세는 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이 도시를 싫어했다. 설상가상으로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어린 콩셉시옹이 디스테리아로 사망했다. 호세는  라코루냐를 더욱 증오하게 되
었다.
  그러나 이번 이주는 피카소에게는 큰 의미가 있었다. 가족은 아버지가 근무하는 미술학교
바로 길 건너에 살았다. 그저 길 하나만 건너면 아버지의  다양한 회화기법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피카소는 수많은 데생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목탄 데생 기법을 완벽하게 체득하
여 대상의 음영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공부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열한 살
이 지나도록 읽기, 쓰기, 산수 등 기초 과목에서조차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졸업시험 날, 그는 시험관에게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실토해야 했다. 이해심 많은 시
험관은 칠판에다 줄을 맞추어 숫자들을  적었다. 그리고 피카소에게 답안지  위에 숫자들을
받아적으라고 말했다. 까짓 것! 그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는 칠판에  있는 숫자를 받아 적
었다. 완벽에 가까운 모사였다. 피카소는 내심 자랑스러웠다.  그는 흡족한 마음으로 기뻐할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상으로 받을 여러 개의 붓자루를 상상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모든 숫자를 더한 뒤 밑줄을 긋고는 무엇인가를 적어야 했
다. 그런데 천만다행으로 답을 적어 둔 시험관의 종이가 눈에 띄었다. 피카소는 거기에 적힌
숫자들을 반대방향으로 그려 넣었다. 거꾸로 그리는 일은 자신 있었다. 훗날 피카소는  탁자
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은 친구의 모습을 크로키한 적이 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그림의 방
향을 바로하기 위해서 친구의 모습을 거꾸로 그려야 했다.  어쨌든 그날 파블로는 수료증을
옆구리에 끼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걷는  동안 그는 아버지가 끝손질을
맡길지도 모를 비둘기 그림을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근사하게 비둘기를 그릴 것인가? "비
둘기의 눈은 숫자의 0자처럼 둥글다. 0자아래에는 6자, 그  아래에는 3자 하나. 비둘기 눈은
두 개다. 날개도 두 개, 그리고 덧셈의 정답을 아래에 적어 넣어야 하는 가로선과 같은 횟대
위에 버티고 선 발이 두 개. 정답은 그 아래에 있다." 그러나 진정한 정다은 바로 그가 그리
게 될 그림이었다.
  1895년 초여름, 가족은 여름휴가를 보내러 말라가로 떠났다. 여행 도중 들른 마드리드에서
호세는 피카소에게 프라도 미술관을 구경시켜 주었다.  이것은 경이로운 사건이었으며 환희
그 자체였다.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고야 등,  피카소는 생전 처음 스페인 회화의  걸작들을
저할 수 있었다.
  천재소년 파블로 피카소    1895년 학기 초, 일가는 다시 북쪽으로 떠나 바르셀로나로 갔
다. 호세가 바르셀로나에 있는 라론하 미술학교로 발령을 받았던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카탈
루냐 지방의 수도로 유서 깊은 대도시였다. 지리적으로 스페인에 등을 기대고 있는 이 도시
는 스페인 문화를 풍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전통적으로 전유럽에 대해 개방적인 도
시였다.
  1855년 이래로 바르셀로나와 프랑 사이에는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 바르셀로나에는 프랑스 문화가 흘러 넘치고 있었고, 카탈루냐의 지식인들은 대거 파리
로 떠났다.
  피카소는 첫눈에 바르셀로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는  항상 잿빛에 싸여 이름마
저 회색인 라코루냐와 달랐다. 바위 위에 우뚝 서서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지만 고독을 느끼
게 하는 도시, 말라가와도 달랐다. 약동하는 생명력,  풍성함과 관대함, 개성과 자유, 그리고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들끓는 바르셀로나는  진정한 도시였다. 바르셀로나에서 파블로
는 자신의 삶이 광활한 지평선 위로 활짝 열리는 것을 느꼈다.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라론하는 규율이 몹시 엄격했다. 학생들은 고전미술을 연구하고, 낡
은 석고 형틀로부터 고대 그리스, 로마의 입상을 찍어 내는 일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피카소
는 이제 겨우 14세였다. 시험을 치르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호세의 고집에 못 이겨  학
교측은 입학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다.  입학시험 과제는 '고전미술, 자연, 조형,  유화'였
다. 피카소가 작품을 제출했을 때, 시험관들은 모두 아연실색했다. 일반적으로 한 달을 주고
작성하도록 하는 과목을 이 개구쟁이가 하루 만에 완성했던  것이다. 그것도 완벽한 기교와
정확성으로 다듬어진 작품들이었다. 천재소년의 입학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입학 수 얼마 지나지 않아, 피카소는 마누엘 팔라레스와 우정을 맺었다. 피카소는  수업에
서보다 더 많은 것을 그와 함께 한 시간에서 배웠다.  교실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팔라레
스의 화실에서 보냈던 것이다.
  카탈루냐 전원이 ? 준 야성미    1897년 여름, 가족은 말라가로 돌아왔다. 호세는 고향의
아늑함에 잠길 수 있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주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신경이 날카로
워져 있었다. 주변이란 미술학교라는 테두리와 그곳에서 가르치는 아카데미즘, 그리고  지나
치게 자주 그의 화실을 들여다보는 아버지의 시선이었다.
  그해 10월 말 피카소는 혈혈단신 마드리드로 떠났다. 그리고  거기서 왕립 아카데미의 입
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몇 년 전 바르셀로나에서와 마찬가지고 눈부신 것이었다. 피카소는
이번에도 하루 만에 전례 없이 완벽한 데생을 제출했다.  피카소는 열여섯의 나이에 스페인
의 이렇다 할 미술학교의 모든 시험을 통과한 셈이었다. 그는  시내 중심가에 작은 방을 하
나 빌려 자리를 잡고 곧 그림에 몰두했다. 땔나무조차 없는 불기 없는 방에서 먹을 것 하나
변변히 없이 겨울을 나야 했지만 독립생활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힘을 얻어 쉬지 않고 그
림을 그렸다. 추운 겨울은 몹시 견디기 힘들었고 너무나 길었다. 봄이 돌아왔을 때 피카소는
심하게 앓아 결국은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야만 했다.
  1898년 여름, 마누엘 팔라레스가 자기 부모님이 사는 시골마을  오르타 데 산후안에 와서
요양을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곳에서 피카소는 처음으로 진정한 전원을 발견했다. 그
는 밭일을 배웠고, 짐승과 달, 기름 짜는 기계와 당나귀의 느릿한 걸음을 직접 몸으로  체험
했다.
  여름은 금방 지나가 버렸고 오르타에서의 생활도 막을 내렸지만 이곳에서 보낸  나날들은
피카소에게 중요한 의미와 영향을 남겼다. 훗날 피카소는 이  시절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
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팔라레스의 시골 마을에서 배운 것입니다."
  이듬해 봄 피카소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충실한 친구가 될 사람을 만났다. 젊은 시인, 하
이메 사바르테스가 그이다.
  첫 번째 전시회    2년  전 바로셀로나에 한 카페가  문을 열었다. 엘스 카트레가트(Els
Quatre Gats, 고양이 네 마리)라는 이 카페는 예술인과 문인의 회합장소로 자리잡았다. 파리
를 무척 사랑하는  카페 주인은  몽마르트르 언덕에  있는 유명한  카바레 검은 고양이(Le
Chat Noir)에서 카페 이름을 따  왔다. 엘스 카트레 가트가  자리잡은 바르셀로나의 구시가
바로 옆에 위치한 중국인 구역은 지저분하지만 매우 유쾌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예술가,  반
정부주의자, 시인, 방랑자 등은 떠들고 즐기면서 밤을 꼬박 새우다가 아침햇살을 맞곤 했다.
이곳보다 더 중국적인 곳도, 여기보다 더 스페인적인 곳도 없었다. 구불구불한 골목들은  항
상 행인들로 북적거렸고 담배연기가 자욱한 바의 천장 낮은 실내에서는 플라멩코  가수들이
부르는 저음의 노랫가락이 울려 퍼졌다.  자정이 지나야만 문을 여는 어두컴컴한  카바레들,
날카로운 가락과 정열적인 박자의 기타소리, 음악당들,거리의  여인들... 때로는 엘스 카트레
가트의 나지막한 홀에서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900년 2월 1일, 피카소의 첫 전시회도  바
로 이곳에서 열렸다. 좁고 긴 실내의 기름때와 담배연기에 찌든 벽에 150여 점의 작품을 핀
으로 고정시켜 놓았다. 작품의 대부분은 시인과 음악가 친구들을 그린 크로키였다.
  검은색 모자, 폭넓은 넥타이, 짧은 저고리,  어두운 빛깔의 셔츠, 발목에서 좁아지는  바지
등, 엘스 카트레 가트에 매일 모이던 이 떠들썩한 무리의 복장은 일종의 제복이었다. 이  집
단에서 피카소는 곧 중심인물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피카소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로 뚜렷이 갈라졌다. 피카소는  원만한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화를 잘 냈고 자기의 신념에 대해서는 침묵을 고수했다. 또한 그는 늘 비밀스러웠고
자기만의 세계에 가라앉아 있다가도 삶의 환희로 넘치곤 했다.  이러한 면모는 그가 사랑받
은 이유이면서 또한 미움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1900년 여름이 끝날 무렵, 그는  자신을 둘러싼 집단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해
10월, 그는 새로 사귄 친구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와 함께 파리행 열차에 올랐다. 1900년 피카
소는 열아홉 살이 되었다. 파리 생활은 최초의 외국생활이었다. 그에게 파리는 몽마르트르를
의미했다. 피카소는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몽마르트르에 자리를 잡았다. 몽마르트르는  가장
매력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착할 당시 피카소는 프랑스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몰랐다. 그
러나 그해 가을은 진정 영예로운 한철이었다. 파리는 아름다웠고  피카소는 이 도시에 완전
히 매료되었다.

    제2장  몽마르트르에서의 광적인 시절
  피카소는 미술관 순례에 몰두했다. 뤽상부르 미술관에 소장된 인상주의 작품들 앞에서 많
은 시간을 보냈고, 루브르 미술관에서는 앵그르와 들라크루아  등을 새로 발견했으며, 드가,
툴루즈 로트레크, 반 고흐, 고갱을 탐욕스럽게 관찰했다. 그는 당시 야만스러운 예술로 평가
되던 페니키아와 이집트의 예술품, 고딕 조각작품, 일본 판화에도 호기심을 느꼈다.
  몇 달 후 피카소와 카사게마스는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카탈루냐의 한 지방잡지는 피카소
의 귀향을 환영하는 기사를 실었다. "프랑스 예술가 친구들은 그를 작은 고야라 부른다."
  그러나 이 글이 인쇄되고 있던 순간 피카소는 이미 파리에 되돌아가 있었다. 이제 피카소
의 새로운 시대가 서서히 막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대는 고통 속에 시작되
었다. 그해 겨울 실연한 카사게마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몽마르트르의 작은 방, 그리고 청색시대    1901년 봄에 피카소는 스무번째  생일을 맞았
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했다. 피카소는 파리로 돌아와 클리시가 130번지에 조
그만 방을 얻었다. 이 방은  '청색시대'를 예고하는 <청색방>의 실제 모델이었다.  피카소는
청색을 가장 조아했다. 그는 청색을 통해 세계와 사물을 보았고, 청색 옷을 입고 다녔다. 피
카소는 청색이야말로 '색 중의 색'이라고 생각했다. 이 시기는 '청색시대'로 불린다.
  그러던 어느 날, 밤같이 어두운 이 청색세계에 여명이 비쳤다. 그의 인생에 막스 자코브가
등장했던 것이다. 6월의 어느 날,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자신의 화랑에서 개최한 피카소
의 전시회에 한 젊은이가 나타났다. 젊은이는 매우 우아하고  섬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
다. 남루한 옷에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지만, 실크 모자 아래서 빛을 발하는 그의  얼굴에는
기품이 서려 있었다. 젊은이, 막스 자코브는 시인이자  미술비평가였다. 그는 피카소의 작품
을 보자 감탄을 아끼지 않았고, 피카소는 그의 정확한 평가와 독자성과 정열에  매료되었다.
이리하여 이 위대한 두 인물의 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피카소 동아리    그해 겨울, 막스는 작은 호텔방에 피카소와 젊은 스페인 화가들로 구성
된 피카소의 추종자들을 불러들였다. 좁은 방은  파이프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살을  에는
추위를 견디기 위해 외투를 껴입은 그들은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막스가 낭송하는 자
작시와 랭보, 베를렌, 보들레르의 시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밤이 되면 몽마르트르에 있는 검은 고양이 같은  카바레를 찾았다. 운좋게 입장권
을 손에 넣을 때면 물랭루주에 가기도 했지만, 그런 행운은 드물었다. 피카소와 친구들이 즐
겨 찾던 카레는 조촐한 곳이었다. 피카소 동아리는 한동안  몽마르트르 언덕에 위치한 보헤
미안의 조그만 카바레, '르 쥣(Le  Zut, 제기랄이라는 뜻:역주)'의 작은 골방에  모이곤 했다.
르 쥣의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지저분한 벽에는 촛불이 희미하게 타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의 파격적인 가격은 몽마르트르의 가난한 고객들을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1902년 겨울에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그는  파리와 바르셀로나 어느 한곳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두 도시를 모두 사랑했고 필요로 했다. 피카소는 형편없는  프랑스어
를 구사하며 막스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띄웠다. 크로키로 그득한 편지 가운데 하나에는 널
찍한 검은색 모자와 끝부분이 꽉 조여진 바지차림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피카소가 등장
한다. 이 편지는 작업 때문에 답장이 늦어 미안하다는 사과로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
다. "그리고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빈둥거리거나  권태에 빠지기 때문에..." 902년 말, 피카
소는 세 번째로 국경을 넘어 파리로 갔다.
  피카소와 막스는 2년 간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1902년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다. 피카
소의 비참한 생활을 보다못한 막스가 볼테르가에  있는 자기 방에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했
다. 그렇다고 막스의 형편이 피카소보다 썩  나은 것도 아니었다. 큰 백화점에서 일을  하고
있던 막스는 겨우 방세를 지불할 만큼 돈을 벌고 있었다.  방에는 일인용 침대가 하나 있었
고 실크 모자도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두 친구는 이것들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수밖에 없
었다. 한순간도 침대가 비는 적이 없었다. 밤이면 막스가  자고 피카소는 작업을 했다. 그리
고 막스가 가게에서 일하는 낮 동안은 피카소가 침대를 썼다. 돈이 하나도 없었던 그들에게
는 배를 채우는 일이 제일 큰 문제였다.
  그래도 피카소는 파리 생활과 친구들을 매우 사랑했다. 여섯 달 후, 피카소는 다시 바르셀
로나로 돌아왔다. 그가 막스에게 보낸 편지는 향수에 가득  차 있다. "나의 친구 막스, 볼테
르가에 있는 자네 방이 그리워지네.  그리고 오믈렛과 제비콩과 브리치즈  생각이 간절하구
먼..."
  1903년에서 1904년 사이에 피카소는 또다시 파리와 바르셀로나 사이를 오갔다. 그는 쉬지
않고 움직이며 정착하지 못했다. 1900년에서 1904년 사이에 그는  피레네 산맥을 여덟 번이
나 넘었다. 그러나 1904년에 그는 카탈루냐 지방과 영원히 작별을 했다. 이번에는 마음을 확
고히 정하고 파리에 정착한 것이다.
  바토라부아르, 보헤미안 생활의 중심지    바토라부아르(Bateau-Lavoir, 바토는 배,  라부
아르는 세탁장을 뜻함:역주)는 배도 세탁장도 아니었다. 작은 수도꼭지말고는 물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기묘한 형태를 갖춘 낡아바지고 엉성한 건물에 바토라부아르라고
이름붙인 사람은 막스였는데, 그것은 이 건물에 들어오려면 배를  탈 때처럼 다리를 건너야
하기 때문이었다. 건물의 구불구불하고 습기 찬 층계를 올라가면  희미한 전등이 있는 어두
컴컴한 복도가 나왔다. 복도에는 '화실'이라는 거창한 명칭이  민망할 정도로 초라한 방들이
넝마 같은 벽을 타고 죽 늘어서 있었다. 이곳이 20세기  초 파리에서 보헤미안 생활을 하던
사람들의 근거지였다. 1904년 봄, 피카소는 이곳에 화실을 마련하고 5년 간 머물렀다.
  더럽고 불편한 바토라부아르에는 화가, 조각가, 시인, 행상인, 세탁하는 여인 따위 온갖 직
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공동생활은 시골의 촌락생활과 비슷했다. 사소한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남의 일에
도 앞장서 서로를 도왔고, 이러쿵저러쿵 남의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던 어느 날, 비를 피해 젊은  여인이 바토라부아르의 어두컴컴한 복도
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마침 그곳에 서 있던 청년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가무잡잡한  피부
에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던 청년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좁은 복도를 가로막고 섰던
청년은 웃으면서 팔에 안고 있던  작은 고양이를 내밀었다. 피카소와  페르낭드 올리비에가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들은 20세로 동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낭드는 피카소의
화실로 짐을 옮겨 동거를 시작했다. 피카소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 그리고  그녀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페르낭드는 몇 시간, 때로는 며칠이고 집밖에 못 나가고 포즈
를 취해야 했다. 이는 너무나 가난한 탓에 신발을 살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겨우이 오
자 석탄 살 돈이 문제였다. 그들은 외상으로 석탄을 얻을 방법을 궁리해 냈다. 배달부가  문
을 두드리면 페르낭드가 "거기다 두세요. 지금은 나갈 수가 없어요. 옷을 몽땅  벗고 있거든
요." 하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석탄값을 융통하는 데에 1주일을 벌 수 있었다.
  그 시기에 피카소는 밤에 주로 작업을 하고 낮에는 잠을  잤다. 그는 천장 꼭대기에서 자
기 머리까지 늘어져 있는 석유등잔을 켜고, 화폭은 방바닥에 펼쳐 놓고 바닥에 웅크리고 앉
아 그림을 그렸다. 돈이 없어 석유를 구할 수가 없을 때면 왼손에 촛대를 들고 작업을 했다.
작업은 새벽 6시까지 계속될 때가 많았다. 이러한 그의  습관을 잘 모르는 방문객들이 아침
에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피카소의 화실    그의 화실에서는 아마와 같은 석유 냄새가 진동했다. 이것은 등불을 밝
히거나 물감을 혼합하는 데 촉매로 쓰였다. 10여 개의 캔버스가 겹겹이 벽에 새워져 있었고,
바닥에 두거나 이젤의 발에 걸쳐 놓은 5것은 아직  작업중인 그림들이었다. 이젤 옆에는 물
감과 붓, 단지와 걸레, 알루미늄 깡통 등이  널려 있었다. 그리고 책들, 괴이하게 생긴  물건
들, 서랍 속에 사는 흰 쥐, 색이 마음에 들어 구입한 조화, 한마디로 무질서 그 자체였다. 그
러나 무질서의 세계는 착상을 떠올리거나 창조를 하는 데 질서의 세계보다 풍요로운 영역이
었다. 무질서는 그의 질서였다. 사물이 차지하는 공간은 그 순간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한다는
필연성에 따른 것이다. 반면 부여되는 질서는 정신을 고정시키고 한계짓는 그 무엇이었다.
  피카소는 작업을 위해 늘 고독해야 했다. 그러나 친구 없이는 견딜 수 없었다. 시를  사랑
한 피카소는 많은 시인들과 친구가  되었다. 1905년 가을, 피카소는 코스트로비츠키를  알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재능과 불타는  정열을 지닌 시인이었다. 폴란드와 이탈리아의  혼혈인
코스트로비츠키는 훗날 국적을 바꾸면서 기욤 아폴리네르로 이름을 바꾸었다.
  다른 시인 친구들로 알프레드 자리, 샤를 빌드락, 피에르  막오를랑 등이 있었다. 막스 자
코브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종종 피카소의 화실에 모였다. 막스는 지칠 줄 모르는 농
담꾼이었고 기지가 번뜩이는 능변가였으며, 감탄스러울 정도로  뛰어난 솜씨로 시를 낭송하
여 청중을 사로잡곤 했다.
  피카소는 친구들과 식사를 하거나,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즐겼다     피카소의 무
리들은 화실에서 시를 낭송하거나 회화를 주제로 토론을  하지 않을 때는 '라팽 아질(Lapin
Agile, 날쌘토끼)'이라는 식당에 모였다. 최소한의 가격으로 최대한 배불리 먹어야 했던 그들
은 라팽 아질에서 2프랑이면 훌륭한 식사는 물론 포도주를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어두컴
컴한 실내 벽에는 집주인이 식사비 대신으로 받은 작품들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이중에
는 훗날 <라팽 아질>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피카소의 작품도 걸려 있었다.
  피카소는 카페에서 때로는 심각하고, 때로운 수다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했
다. 또한 길거리에서나 카페의 테라스에서 발생하는 예기치 않은 만남을 무척 좋아했다.  간
혹 이러한 만남이 진정한 우정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피카소는 그의 그림을 이
해한답시고 멍청한 질문이나 해대는 사람들을 참지 못했다. 어느 날 저녁 피카소는 그의 '미
학'이 무엇이냐고 묻는 세 명의 독일 청년에게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따끔하게 보여 주었다.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공중에다 연이어 세 발을 발사했던 것이다. 웃기기
위해서 한 일이었지만 웃은 사람은 피카소뿐이었다.
  조각가 파코 듀리오와 마놀 위그, 화가 카날, 막스 자코브등은 그가 진정 아끼던 친구들이
었다. 그들은 처음으로 피카소의 재능을 알아보았으며, 언제나  그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다.
이 친구들은 조금이라도 돈을 만들어 주려고 종종 팔 밑에 그림을 끼고 피카소의 화실에서
나오곤 했다.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이 화실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가슴 아파했을 뿐 아니라
대중 앞에 작품을 선보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카소가 미술상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판다는 것 역시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림값을 놓고 흥정하느니 차라리  그림을 주어 버렸을
것이다.
  이제 미술애호가들도 차츰 피카소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레오 스타인과 거트루드 스
타인라는 두 미국인은 처음으로 피카소의 화실을 방무하던 날, 그 자리에서 800프랑에 달하
는 그림들을 샀다. 전례 없는 일이었다. 1906년에는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장밋빛시대
작품 대부분을 구입하면서 금화 2,000프랑을 지불했다.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여행을 떠나 수
있었다. 피카소는 2년 동안 파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스페인, 태양, 실편백나무    1906년 여름, 피카소는 스페인으로 향하는 뜨거운 열정에 사
로잡혔다. 전원의 평온함이 그리워졌던 것이다. 피카소는 버섯냄새만 풍기는 프랑스의  전원
이 아니라, 백리향과 실편백나무, 올리브 기름과 로즈메리의 냄새가 있고 뜨거운 태양이  빛
나는 스페인의 전원이 필요했다.
  6월 초,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바르셀로나행 열차표를 샀다. 그들은 피레네 산악지대  높이
자리잡은 자그마한 마을로 갔다. 고솔은 불가사의한 고대의 마을이었다. 백색의 광장을 중심
으로 돌집 1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마을로 가려면 당나귀를 타야 했다.
  새로운 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카소는 모험담을  늘어놓는 밀수입자들과 함께 숲길을
걸어, 마을에서 올려다보면 푸른 하늘을 잘라 낸 것처럼 보이는 산의 정상까지 올라가곤 했
다. 그러나 그에게 이 새로운 생활은 무엇보다도 작업의 또 다른 한때를 의미했다. 그는  고
솔에서 평정을 되찾아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창문에 유리가 끼어 있지  않은 네모 난
작은 집 , 숄로 어깨를 감은 농사 짓는 아낙네들, 노인들의 가무잡잡한 얼굴, 잔잔한 아름다
움을 지닌 페르낭드의  모습... 여름이  끝날 무렵,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파리로 돌아왔다.
1906년 말, 피카소는 스물다섯번째 생일을  맞았다. 피카소는 회화와 데생뿐 아니라  조각과
판화 분야에서도 널리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가 마티스를 만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또 다른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의  내부에서 용트림하던 하나의
흐름이 서서히 분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흐름은 피카소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작업
태도와 신념을 문자 그대로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제3장  입체주의 혁명
  907년 여름 어느 날, 피카소는 혼자서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박물관을 찾았다.  피카소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박물관을 나섰다. 흑인예술의 조각품과 가면들이 뿜여 내는 강렬한 마
술적인 힘이 피카소를 완전히 압도했던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명확한 관계, 직접성과  심오
함, 인간역사가 경험해 온 감정으로  가득 찬 생동감 넘치는 해석은  피카소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피카소는 이 직접성을 추구했다. 어느 한순간도 피카소는 '환쟁이'가 되고자 원한 적
이 없었다. 그는 언어를 통해서 표현할 수 없는 심오한 인상의 해석을 회화 및 다른 표현양
식을 통해 끊임없이 추구했다. 그는 보고 느껴야 했다. 게다가 흑인예술에는 이러한  순수한
인상은 물론 형태의 단순성, 즉 명확하고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가 존재했다. 그것은  기호로
구성된 주형언어였다. 며칠 동안 피카소는 많은 시간을 박물관의 전시대 앞에서 보냇다.  그
에게 아프리카 예술과 오세아니아 예술은 진정한 발견이었다. 이때부터 피카소의 그림에 어
떤 변화가 일어나 낙인 찍힌 듯 자리잡기 시작했다.
  <아비뇽의 처녀들>, 도전, 선동, 스캔들    1907년 여름이 끝나 갈 무렵, 피카소는 몇 달
전부터 진행해 왔던 거대한 작품을  완성했다. 100여 개에 가까운  데생과 준비작업을 거쳐
완성된 이 대작은 사방 6m에 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구체적으로 어떠헥 만들
어졌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피카소가  작업하는 동안 완전히 출입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카소가 화실문을 활짝 열었다. 경악, 충격, 아연실색이 이어졌다. 피카소와
가장 가까웠던 친구들이 이 작품을 본 순간 느낀 감정은 어떤 말로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
었다. 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이며 언제나  앞장서서 그를 옹호해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가 지나쳤다. 그들은 단호히 이 작품을  거부
했다. 위대한 화가 마티스는 노여움을 표명했다. 당시 피카소와 매우 절친했던 조르주  브라
크는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우리가 톱밥을 먹고 석유  마시길 원하는 것 같군." 지금까지
무조건 피카소를 옹호했던 아폴리네르도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다. 그날 아폴리네르와 동행
한 한 미술비평가는 캐리커처에 전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충고했다.
  그 와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분노와 경악의 소리에  동참하지 않았다. 칸바일러라는 젊은
독일인 미술수집가였다. 화실을 처음 방문했던 날부터  칸바일러는 피카소의 그림에 매료되
었다. 그날 이후 그들은 평생토록 우정을 지속하게 되며, 칸바일러는 훗날 금세기 최고의 현
대회화상이 되었다.
  이 작품에는 아직 제목이 없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세기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운동의
하나인 입체주의의 태동에 비유할만한 가치를 지닌다. 이 작품에 <아비뇽의 처녀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것을 몇 년이 지나서였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피카소의 작품활동이나 친
구들과의 우정에 큰 타격을 준 것은 아니었다. 피카소는 이제 정상적인 리듬으로 작업을 하
기 시작했다. 밤보다는 주로 낮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 저녁 나절의 손님맞
이나 외출이 쉬워졌다. 당시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센강을 건너 파리 시내 맞은편 동네로 나
들이를 다녔다. '백합의 정원'이라는 이름의 맥주집은  '운문과 산문'이라는 문학동인 회원들
이 모이던 곳이었다. 폴 포르, 알프레드 자리, 아폴리네르 같은 시인들과 작가들, 화가, 조각
가, 음악가 등이 자주 그곳에 모였다. 피카소도 주중행사처럼 이루어지던 이 모임을 몹시 좋
아했다. 이들의 토론은 독한 알코올과  함께 뜨겁게 달아올라, 때로는 아침까지  계속되다가
주인에게 쫓겨나는 것으로 끝을 맺곤 했다.
  입체주의의 탄생    1908년, 추계 살롱전에 브라크는 신작 풍경화 6점을 출품했다. 브라크
가 새로이 채택한 작품경향을 보고 심사위원들은 당혹감을 느꼈다. 브라크의 작품은 색채가
극히 약화된 대한 단순한 기하학적인 형태가 강조되어 있었다.  당시 심사위원 중의 하나였
던 마티스가 브라크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처음으로 '작은 입방체'라는 표현을 사용했
다.
  그가 출품한 작품 중 두 점이 결국 거부당하고 말았다.  이에 울화가 치민 브라크는 즉시
나머지 작품을 철회해 버렸다. 그런데 칸바이러가 브라크의 새로운 양식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브라크가 자신의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도록 주선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입체파 회화전
이었다. 그 무렵 피카소는 파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조용한 시골에 묻혀 있었다. 그  역시
가라앉은 녹색과 갈색 계통의 어두운 색조로 기하학적이며 단순화된 형태로 인물과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세잔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후인 1907년, 추계 살롱전은  세잔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전시
했다. 그때 피카소와 브라크는 세잔의 작품들을 연구하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  이후
로 피카소와 브라크는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작업을 했다. 그들은 서로 많은 것을 줄 수 있는
친구였으며, 비판과 사려 깊은 충고를  아끼지 않는 동료였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오랫동안
입체주의 혁명의 핵심인물이었다.
  피카소는 다시 한번 오르타 데 산후안으로 여행한다. 그러나  그의 시각은 이제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1909년 7월 여름, 피카소는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나무가 수
액을 필요로 하듯 피카소는 스페인을 필요로 했다. 이미 10년 전에 피카소가 여름으 보냈던
오르타 데 산후안으로 간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친구 팔라레스를 찾아갔다. 피카소는 백색의
태양이 작열하는 이곳, 이 고원지대의 상큼하고도 강렬한 내음을  10년 동안이나 맡지 못했
던 것이다.
  오르타는 예전과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보는 피카소의 시선은 변해
있었으며, 그가 화폭에 담는 풍경은 10년 전에 그렸던 것과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더욱  단
순화되고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제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복사하는 데에 만
족하지 않고 자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만을 취했으며,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무한한 자유를 허용했다. 자연 속에서  그가 보았던 것은 차갑고 아롱진  빛을 발하는 수정
응고체의 면들과 잘려 나간 돌조각의 결정면이었다. 피카소가 존경하던 세잔의 표현을 그대
로 비자면 '자연을 원기둥과 구 그리고 원뿔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가난은 옛날이야기가 되고    피카소가 오르타에서 완성한 작품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오
자 화상 볼라르가 전시회를 열었다. 큐비즘이라는 새로운 경향에  대한 대중의 적대감도 무
색하게 그의 그림은 인기가 높았고 아주  잘 팔렸다. 피카소 찬양자들도 늘어 갔는데,  특히
러시아인들과 독일인, 미국인이 피카소 작품에 열광해따. 가난에 찌든 생활은 이제 까마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1909년 9월에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샴 고양이를 데리고 바토라부아르를 떠나 클리시가 11
번지에 있는 널찍한 화실 겸 아파트로 이사했다.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을 통해 푸르른
녹색의 대지가 보였다. 앞치마를 두른 하녀가 식사시중을 들어주었고, 마호가니로 만든 가구
들과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도 한 대 있었다. 물질적 환경이 변화한 만큼이나 생활도 변했다.
  그렇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작은 궁전을 굉장한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살았다. 기타
들, 여러 가지 모양의 병들, 강렬한 푸른색에 반해 사들인 물잔 하나, 낡아빠진 벽지 조각들,
마티스, 루소, 세잔 등 존경하는 화가들의 작품 그리고 점점 늘어나는 아프리카 가면들이 널
려 있었다. 여러 가지 양식들이 마구 엉켜 있다고나 할까. 이것은 피카소만의 고유한 정글이
었다. 피카소는 늘 고상한 취미나 조화라는 것이 혐오스럽다고 말하곤 했다. '전체가 조화를
이룰 것인가'하는 문제는 뒷전이었다. 단지 좋아하는 것, 마음에 드는 것을 수집하면 그만이
었다.
  1910년에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스페인으로 가는 대신 피레네산맥 프랑스 쪽 산자락에  위
치한 세레에서 여름을 보냈다. 좁고 상쾌한 길 위에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당나귀를 끌고 산에서 내려온  농부들이 가득한 매혹적인 도시였다. 피카소의  한
친구가 살구나무와 포도나무 과수원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사방이 정원으로 둘러싸인 조그만
수도원을 사들였다.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수도원 2층  전체를 사용했다. 그해 여름 수많은
화가들과 시인들이 세레에 다녀갔다. 거의 매일 저녁, 친구들은 카페의 테라스에 모여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르 나누었다. 피카소는 대화를 하지  안을 때면 탁자의 대리석 위
에 그림을 그리곤 했다.
  피카소는 세레를 몹시 좋아했다. 스페인에서 가까운 지리적  위치, 건강한 처녀들, 지평선
위로 끝없이 이어진 산지, 지중해의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는  식물과 습한 녹지대의 식물들
이 한데 어울린 식물군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피카소와 페르낭드는 3년 연속 세레에서
여름을 보냈고, 세 번째 여름에 결별했다.
  입체주의와 결별하고 에바를 만나다    에바의 본명은 마르셀이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
녀를 에바라고 불렀다. 그녀가 모든 여성 가운데에서 첫째 여성이 되었으며,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점을 세상에 알리려 했던 것이다. 1912년 봄, 피카소와 에바는 남프랑스로  내려
가 은밀한 사랑을 불태웠다. 아비뇽에서 북쪽으로  9km 떨어진 소르그쉬르우베에 피카소는
'레클롯P(Les clochettes, 작은 종들)'라고 부른 작은  집을 한 채 비렸다. 곧 이어  브라크와
그의 아내가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빌려 합류했다.  그 허술하고 보잘것없는 두 시
골집에서 몇 달을 보내는 동안, 피카소와 브라크는 입체주의  발전사에서 가장 풍요롭고 커
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다시 한번 피카소는 놀랄 만한  열정을 갖고 작업하게 되었다. 에바  곁에서 그는 진정한
행복을 느꼈다. 칸바일러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썼다. "나는 그녀를 진정 사랑하고 있어
요. 그걸 내 그림 위에 쓰겠어요." 피카소는 이 말을 실행에 옮겼다. '나는 에바를 사랑한다.
'라는 문장은 마치 그의 서명처럼 입체주의 회화작품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레클로셰는 다소 누추한 집이기는 했지만 집안 내부의 흰 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이 커다
란 백색 벽면에 매혹된 피카소는 그 위에 스케치를 시작하여 여름이 끝나 갈 무렵에는 달걀
형의 커다란 회화작품을 완성했다. 이 그림을 매우 소중히 여겼다. 피카소는 파리로  올라올
때 그림이 그려진 벽의 돌들을 고스란히 운반해 왔다. 집주인의 동의를 구하고 보상을 했음
은 물론이다.
  1912년 여름, 브라크는 목탄화  시리즈를 제작하면서 오려 낸  색종이 조각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곧 피카소도 브라크의 이 기법을 자신의 작품에 도입했고, 그해 가을에 일련의 콜
라주 작품들을 완성했다. 그는 브라크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자네가 최근에 고안한  그 종
이조각과 넝마조각들을 붙이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네." 콜라주  기법은 삽시에 사방으로
전파되었다. 브라크와 피카소는 잘라 낸 종이조각들을 사용하여 입체주의 회화에서 거의 사
라졌던 생생한 색채를 외복할 수 있었다.
  입체주의는 이제 미술계에서 가장 분분한 논란의  대상이자 중요한 쟁점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피카소는 의도적으로 이들 입체파 그룹과 거리를 유지했다. 1911년, 재야 미술가협회
가 주최한 입체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출품한 화가 명단에는 피카비아, 돌로네, 레제, 마르셀
뒤샹 등의 이름이 있었지만 입체파의 창시자인 피카소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세계대전의 발발과 보헤미안 생활의 청산    1912년 여름에 피카소와 에바는 몽파르나스
로 이사했다. 클리시가에서의 보헤미안적인 생활을 이제 완전히 끝낸 것이다. 화실은 몽파르
나스에서 아주 가까운 쉘세르가에서 열었다. 그곳은 르 돔, 백합의 정원, 라 쿠폴 같은 몽파
르나스의 큰 카페들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해 여름  숨막힐 듯 무겁고 긴장된 기
운이 고조되고 있었고, 눈앞에 닥친 전쟁의 위협은 전해에 부친상을 당한 피카소를 더욱 혼
란스럽게 만들었다. 1914년 8월 1일, 드디어 프랑스와 독일 간에 전쟁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이튿날 브라크와 드랭이 입영했고 스페인 국적을  가진 피카소는 징집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친구들을 아비뇽 역에서 전송하고 홀로 남은 피카소의 마음은 불안과 허무와 슬픔들로 가득
찼다. 그는 이 작별에 뭔가 비장하고 결정적인 것이 있음을 느꼈다. 입체주의가 이제 막  도
약의 첫걸음을 내디디면서 앞으로의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순간에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상심한 마음을 안고 파리로 돌아왔으나 전쟁통에 파리는 많이 변해 있었다. 도시는 텅 비
어 버렸고, 예술가 집단은 징집으로 완전히 와해되었다. 전쟁 동안 피카소가 그의 삶에서 중
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예술가 친구들을 만나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운 좋게  휴가를
받았을 때였다.
  전쟁 한가운데 맞아야 했던 에바의 죽음    단 한 사람 전쟁에 나가지 않은 친구가 있었
다. 몸이 약한 막스 자코브였다. 가는 열렬한 카톨릭 신자다 되어 다분히 신비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했고, 수도원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고자했다. 유대인인 그는 1915년에 영세를 받
았으며 시프리앵을 세례명으로 받았다. 피카소는 막스의 세례식에 대부 자격으로  이회했다.
피카소는 대자이자 영원한 친구인 막스에게 자신의 작품 <예수 그리스도의 모사>를 선물했
다.
  그해 겨울, 비극이 닥쳤다. 시름시름 앓던 에바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피카소
는 쉘세르가를 떠나 파리 근교 몽루즈에 작은 집을 구했다.  그곳의 공기를 숨쉬는 것은 너
무나도 고통스러웠다. 지난날의 추엇이 너무나 강렬한데다가  몽파르나스 묘지의 무성한 나
무들이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쉘세르가에서 살던 시절, 피카소는 휴가를 얻어 전장에서 돌아와 있던 한 젊은 시인을 만
나게 되었다. 그 젊은이는 매우 영리하고 생기에 넘쳤으며  항상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리곤
했다. 피카소의 작품과 입체주의에 완전히 매료당한 이 젊은 시이은 장콕토였다. 콕토는  러
시아 발레단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으며, 위대한 안무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각별한 친분
을 맺고 있었다. 1917년 봄, 콕토는 피카소에게 디아길레프의 다음 공연에 필요한  무대장식
과 의상을 의뢰했다. 그리고 그가 제안을 수락한다면 곧 발레단이 머물고 있는 로마로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음악은 작곡가 에릭 사티가 맡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피카소는 콕토의  제
안을 받아들여 1917년 2월에 로마로 떠났다. 1917년의 로마는 태양과 로마 시민들의 쾌활함
과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었다. 소용돌이 장식으로 꾸며진 바로크풍의 기념물들, 경탄을 자
아내는 성당 건물과 성당의 독방 기도실에서 빛을 발하는 대리석 조각들. 황홀경에 빠져 온
종이 걸어다니다 베네토가 깊숙이 자리잡은 카페에 들어가 피곤한  다리를 쉬곤 했다. 그는
마치 공작새 꼬리의 수많은 눈을 가진 사람처럼 로마를 관찰했다.

    제4장  명성으로의 길
  전쟁과 에바의 죽음이 몰고 온 슬픔의 나날들로부터 몇 해가 흐른 후, 피카소는 로마에서
처음으로 새로이 샘솟는 환희를 맛보았다.
  그리고 로마 여행은 또다른 충격을 던졌다. 그것은 육체의 아름다움에 눈뜰 수 있는 기회
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 작품에서 시작하여 발레단원들의 몸에 이르기까지...  그의
눈에 비친 발레단원들의 강하게 단련된 몸은 참으로 경이로운 동작들을 연출했다.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발레단은 20세기 초 가장 뛰어난 고전 무용단이었다.
  디아길레프가 추진하던 발레극 <퍼레이드>는 대담하기 이를 데 없는 현대적 작품이었다.
피카소와 콕토, 에릭 사티를 동시에 기용한다는 것은 가장 앞서가는 현대사조를 그 발레 작
품 안에 모두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1917년 5일 17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막
을 올린 초연은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한편, 초연을 지켜본 아폴리네르는 피카소와 콕
토가 창조한 인물들을 말하면서  처음으로 '초현실적'이라는 기이한  단여를 사용했다. 그날
이후로 이 용어는 널리 사용된다.
  새로운 연인, 디아길레프 발레단의 무용수 올가  코홀로바    그러보터 몇 달이 지난 후
디아길레프와 그의 발레단은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피카소도 이들과 동행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그는 옛 친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누이동생  롤라는 최근에 후안 빌라토라는
의사와 결혼하여 그의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피카소는 항구 근처에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서 그림에 착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화폭에 표현된 것은  입체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실제의 모습과 같은 사물들이었으며 전통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새로
운 사실주의 시기의 작품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올가의 초상화이다. 이 초상화에 피
카소는 모든 감정을 쏟아 부었다. 이 초상화에서 올가는 스페인  부채를 손에 든 채 엄숙한
표정으로 깃털장식의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피카소가 고전적인 미를 거부하는 것만을 보아
왔던 사람들도 이 초상화 앞에서는 자신들의 판단이 오류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디아길레프 발레단이 남아메리카 공연을 위해 바르셀로나를  떠났을 때, 올가 코홀로바는
피카소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남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 그들은  함께 파리로 올라와 몽루
즈의 작은 집에 정착했다. 올가는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녀는 파블로가 심한  스
페인 억양으로 들려주는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몹시 좋아했다.
  1918년 7월 12일, 피카소와 올가는 다뤼가에 있는 러시아 정교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증인으로는 아폴리네르, 콕토, 막스 자코브가 참석했다. 결혼  후 그들은 파리 8구 라보에티
가에 있는 커다란 2층짜리 아파트로 이사했다. 파리 8구는 매우 품격 있고 사교적인 구역으
로 모피 가게들과 호사스런 개인저택들이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한번 더 피카소의 환경이
바뀐 것이다. 이번에는 그의 생활도 크게 변했다. 그는 곧게 줄을 세운 바지를 입고  지팡이
를 들고 다녔으며, 그의 옷장 안에는 스리피스 양복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올가는 응접실
과 거실을 호화스러게 꾸몄고, 피카소의 화실은 2층에 마련되었다. 그곳에 피카소의 온갖 잡
동사니와 그림들, 얼마 전부터 수지하기 시작한 루소, 마티스, 세잔, 르누아르 등의 작품들을
옮겼다.
  사치스런 생활, 그리고 친구의 죽음    피카소의 친구들은 "피카소가 호화 주택가에 나타
났다."고 말하고 다녔다. 아닌게아니라 바야흐로 호사스런 접대와 식사 등으로  꾸며진 피카
소의 사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피카소의 집에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  새
로운 친구들은 피카소 내외의 접대에 전혀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예의 바르고 격식을 갖춘
하인들이 시중을 드는 접대는 완벽했다.
  상류구역에 살기 시작하면서 피카소가 옛 친구들을 만나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머리에 심
한 부상을 당하고 전쟁에서 돌아온 브라크는 몹시 쇠약해졌고  신경도 매우 날카로웠다. 그
는 피카소의 새로운 생활방식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그런 생활이 무엇보다도 무미
건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아폴리네르 역시 부상을 당한 채 전쟁에서 돌아왔다.  아폴
리네르는 1918년에 결혼했는데, 그때 모든 사람들은 아폴리네르가 이제 완전히 회복의 길로
들어섰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1918년 휴전과 때를 같이하여 유행하던 스페인 인플루엔자
에 걸려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1918년 11월 11일이었는데, 공교로게도 그날은 종전이 선포된
날이었다. 시내는 승리의 환희 속에 온통 국기로 뒤덮여 있었으며 피카소 역시 거리로 나와
군중속에 휩싸였다. 그가 리볼리가의 회랑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전쟁 미망인의 검은 베일
이 바람에 날려와 그의 얼굴에 감겼다. 불현듯 알지 못할 불안감에 사로잡힌 피카소는 서둘
러 지으로 돌아왔다. 긔고 몇 시간이 지난 후 친구의 임종소식이 날아들었다. 그가 받은  충
격은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가장 오랜 친구이자 자기를 가장 잘 이해해 주던 지기
를 잃은 것이었다. 친구의 임종을 알리는 전화벨이 울리던 순간, 피카소는 거울 앞에서 자화
상을 그리고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다시는 자화상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새로운 스타일?    피카소는 소속계층과 생활양식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래하던
화상도 바꾸었다. 종전 직후 프랑스에서는 맹목전이  애국주의와 완강한 반독일주의의 분위
기가 팽배하고 있었는데, 입체주의 회화는 '독일놈들의 것'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프랑스 거주 독일인은 모두 재산을 몰수당했다. 피카소의 화상이자  지난 10년 동안 막역
한 친구로 지내 온 카나일러도 독일인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입체파 회화작품들은 여기저기
팔려 나가서 하나씩 흩어져 버리고 칸바일러 화랑도 문을 닫았다.
  1918년, 폴 로젠베르그라는 사람이 피카소의 새 화상이 되었다. 그는 대중이 보다 쉽게 접
근할 수 있는, 사실주의적이며 인기 있는 예술을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로젠베르그는 포부르
생오노레에 있는 자기 화랑에서 몇 차례 피카소의 전시회를  주최했다. 피카소의 작품은 갓
40세를 넘은 화가의 것으로는 상당한 고가에 팔리고 있었다.  피카소는 엄청난 부자가 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신작에서 여태껏 보지 못한 새로운 양식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고대의 여
신처럼 주름진 옷의 표현이 중시된 인물들이 덩어리진 육체의 형태를 하고 움직임 없는 둔
중한 동상처럼 표현되고 있었다. 몹시 무겁고 강렬하게 표현된 사실주의적인  그림들이었다.
일부 미술애호가들은 피카소가 입체주의를 배반했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양식적 변화가 기회주의의 소산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나
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을 때면  그것이 꼭 그렇게밖에 표현될 수 없다고 느끼는
방법에따라 표현합니다." 피카소가 표현양식을 바꾼 것은 내면 깊은 곳의 필연성에 따른 것
이었다. 피카소가 표현의 욕구를 느낀 여러 형태는 분출하는  내면의 흐름과 끓어오르는 사
유의 내용에 토대를 두었다. 그에게 양식은 강력한 사유르르  표현하는 가장 정확하고 적절
한 방법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 시기에 피카소는 사실주의와 입체주의 두 가지 양식으로 작
품을 제작했다.
  피카소의 첫아들, 파울로 피카소    1921년 3월, 파울로가 태어났다. 그는  파울로와 올가
를 사랑했다. 이것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거나 피아노를 치고 있는 올가의 모습을 그린
데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부르주아 가정의  가장이라는 새로운 역할에 완전한
행복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피카소는 체면치레에서 푸른 잔디를 해방시키기 위해 가로등과
야외용 변소를 주문하고 싶다고 친구들에게 고백했다.
  그는 자라나는 아들을 보며 함께 놀아 주기를 좋아했다.  어느날 피카소는 아들의 장난감
자동차를 장식해 주었다. 마지막 손질로 그는 자동차의 지붕을 여러 색의 체크 무늬로 채색
했다. 그런데 파울로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진짜' 자동차 지붕에는 체크 무늬가
없다는 것이었다.
  여름이면 피카소는 올가와 파울로를 데리고 파리를 떠나 3-4개월 휴가를 보내곤 했다. 어
느 해 기나긴 여름휴가에서 돌아와 옷장을 열어 본 피카소는 깜짝 놀랐다. 겨울양복이 모두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옷들은 마치 낙엽처럼 늘어져 있었고 모직섬유 조직의 흔적만 남은 채
내부가 들여다보일 정도로 해어져 있었다. 좀벌레들이 파먹을 수  있는 부분은 다 파먹었는
데, 남은 것이라곤 벌레 먹은 흔적과 바느질 자국뿐이었다. 마치 엑스레이를 통해 보는 것처
럼 바느질 자국 사이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잡동사니들이 훤히 비쳤다. 열쇠, 파이프, 성
냥갑 그리고 좀벌레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몇 가지 물건들...  이 광경을 본 피카소는 놀라움
과 함께 즐거움을 느꼈다. 투명성은 회화에서 항상 그를 쫓아다니던 문제였다. 눈에  보이는
면 뒤에 감추어져 있는 그 무엇을 보려는 욕망에서 그는 사물의 형태를 완전히 해체하여 버
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에는 자연 스스로가 그에게 자연현상을  통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일러준 것 같았다. 브르타뉴 지방에서 보낸 이듬해 여름, 그의 화폭 위에는 새로운  형
태의 입체주의 정물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살처럼 유연한 선으로 그려진  투명한 및이
화폭을 압도하고있었다. 그것은 마치 빛이 덧창을 통해 들어와  걸러진 것 같은 투명함이었
다. 피카소가 고전적인 주제들을 고전적인 방식을  그린 지 몇 년이 지났다. 가족인  올가와
파울로를 모델로 그린 많은 초상화들, 이제 이 고전풍 그림에 대해서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
다. 그런데 1925년 6월에 공개된 작품  앞에서 비평가들은 모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을 던진 이 작품을 <무용>이었다.

    제5장  천재의 고독
  <무용>은 폭력적이었고, 고문당하는 듯한 공격적인  인상을 주었다. 불에 타  일그러지고
정신착란으로 왜곡된 듯한 육체를 표현하고 있는 그림은 화려한 색채의 의지가 발현되고 있
었다. 무용수의 사지는 분리되고 얼굴 윤곽선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곳곳에 악몽과 괴물이
나타나 있었다. 끔찍한 표정들, 빳빳한 털처럼 일어선 머리카락, 쇠못처럼  생긴 손가락하며,
<어릿광대로 분장한 파울로>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얼마 전부터 피카소는 격해지고 있었다.  우울한 노여움이 내면 깊은  곳에서 으르렁대고
있었다. 결혼생활은 몰이해와 소외로 치닫고 있었다. 올가는 피카소의 작품에서 사교적인 가
치밖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의 권위적인 성격과 질서에 대한 아집, 의례를  존중하는
취향 등을 파블로는 더 이상 견elf 수가 없었다. 그는 감옥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기 시작했
다. 쇠사슬을 끊어야 했다. 이러한 폭력적 성향의 원인을  올가에게만 돌릴 수는 없었다. 또
다른 요인으로 1924년 이후, 문학과 문화운동을 주도한 초현실주의의 등장을 들 수 있다.
  폭력적인 방식이든 부드러운 방식이든 피카소가 어떤 감정을 강하게 표현하고자 할 때 그
표현수단은 항상 회화였다. <무용>은 깊은 곳에 존재하는 진정한 흐름을  드러낸 것이었다.
혹자는 이를 찬양했고, 혹자는 격렬히 반발했다. 그러나 피카소의 발전 추이를 지켜보고  있
던 사람들은 지금까지 피카소가 고수했던 양식과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도발적인 단절이
진행되고 있음을 느꼈다.
  초현실주의 선언, "미는 발작증상과 같다"    전쟁은 전분야에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예
술계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전쟁으로  입체주의 같은 폭력적인 사조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한편, 다다이즘이 출현했다. 그러나 피카소가 곧바로 동질감을 느낀 것은 초현실주의
였다.
  초현실주의를 제창하고 나선 사람은 폴 엘뤼아르,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루이 아라
공 등이었다. 아폴리네르가 살이 있었다면 그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이들은 다양한  현대적
사유를 해석하는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고자 했다. 이들의 슬로건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
로운 선언이 필요하다'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초현실주의 혁명>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는데,
이 자지의 창간호에는 피카소가 1914년에 제작한 <구성> 중  한 점이 실렸다. 주로 시인과
화가들로 구성된 초현실주의 집단은 막강한 기세로  확장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꿈과 무
의식의 영역에 들어가 예술적 창조의 뿌리에 도달하려 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미  보들레르,
말라르메, 로트레아몽 같은 시인이나 피카소가 시도한 적이 있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렇게 썼다. "앞으로 미는 발작증상적 성격을 가질 것이며 그렇게 않은
미는 사라질 것이다." 피카소의 <무용>보다 이 말을 더 잘 표현할 작품이 또 있을 것인가?
브르통은 초현실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그것이 꿈을 꾸고 있을 때에 상응하
는 심리적 자동현상의 언어라는  점에 합의했다." 어떻게  피카소가 태동하는 초현실주의에
매력을 느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피카소는 항상 사물의 외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을 보고
그렸다. 즉, '현실의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을 그렸던 것이다.
  1926년 ha, 피카소는 <기타> 연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조각난 헝겊과 실, 그리고 낡은 못
이나 뜨개바늘 등을 모아 붙인 것으로 조화나 품격 혹은 의례적인 가치와의 단절을 의미했
고, 대상의 현실성, 즉 기능적인 면은 무시되었다.  이것이 초현실주의자 피카소의 표현방식
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피카소를 매혹시키고 그의 흥미를 끈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무엇인가
를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피카소가 초현실적인 성격의 작품을  제작한 것은 이미 초현실주
의 운동 이전의 일이었다. 1925년에서 1926년 사이에 대두한  초현실주의는 이미 얼마 전부
터 피카소의 내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던 어떤 단절, 어떤 격한 움직임을 더욱 강화시키는 역
할을 했을 뿐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경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마리 테레즈의 등장    피카소가 17세인 마리 테레즈 월터mf 만난 것은 1927년 1월의 어
느 추운 날 갈레리 라피에트(파리에서 가장 큰  백화점:역주)근처의 길거리에서였다. 피카소
가 이름을 밝히자 그녀는 의아스럽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녀는 피카소를 알지 못했
던 것이다. 피카소는 열광적으로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마리 테레즈의 아름다움에는  깊이와
차분함이 있었다. 그것은 성찰의 분위기를 지닌 조각상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피카소는 "우리는 함께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피카소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쉬지 않고 그려 나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기 집에서 아
주 가까운 라보에티가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의 정열적인 관계는 몇 년 동안 비밀리
에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마리 테레즈로부터 발산되어  피카소의 회화와 조각 작품속에
표출된 것은 아름답고 엄숙한 선과 충만한 형태였다. 그것은 마리 테레즈의 몸과 얼굴 그리
고 그녀를 향한 피카소의 애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는 다시 고전양식을 통해  표현되었다.
우리가 <볼라르 연작>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판화작품들을 보면 이러한 변화를 볼 수 있다.
간결한 데생으로 이루어진 100여 점에 달하는 이 판화작품들에는 주로 고대의 인물, 대리석
을 깎는 조각가, 남신과 여신 등이 표현되어 있다.
  부아줄루 저택에서 찾은 평화    1931년에 피카소는 파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
는 저택을 하나 구입했다. 새 집은 17세기의 건축물로 굉장히 아름다웠다. 대문 옆에는 조그
마하고 우아한 고딕 양식의 기도실이 있었다. 기도실은 한 채의 기와집과 수많은 회색 돌이
깔려 있는 정원을 향하고 있었다. 피카소는 길게 늘어선  가축우리에 조각과 판화 작업실을
설치했다. 그곳에서 만난 판화가 루이 포르와 조각가 곤살레스는  판화와 조각 작업에 재착
수한 피카소를 독려했다.
  이해에 부아줄루에서 피카소는 커다란 행복을 느꼈다. 정열적으로 작업에 몰두할 수 있는
은신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피카소에게 이러한 장소는  지속적인 행복으로 보장하는 기본
적인 조건이었다. 되찾은 행복과 더불어 먼 곳에 은밀하게  마리 테레즈가 존재한다는 사실
은 활력소가 되었다. 이 시기에 제작된 조각작품들은 모두  마리 테레주의 두상을 변형시킨
것이다. 한편, 피카소는 곤살레스와 함께 철제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했다. 이미 콜라
주라는 새로운 방식이 일상적인 사물을 조합하여 기대하지 않던 효과를 가져온 바 있다. 쓰
레기 하치장에서 주의 깊에 골라 온 철조각, 용수철, 냄비뚜껑, 물받이, 나사못 등등 모든 것
이 조합될 수 있었다. 피카소는 항상 주머니에 손칼을 넣고 다녔는데, 이것으로 긴 나무토막
을 사람얼굴 모양으로 깎아 내고 그 위에 청동을 쏟아 붓기도 했다.
  충실한 친구, 사바르테스    부아줄루에서 보낸 나날은  정말로 행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이었다. 올가와의 불화는 점점 힘겨워졌다. 1935년 6월에 올가와  파울로
만 여름휴가를 떠났다. 지난 몇 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홀로 남은 피카소는  사교계와
도 담을 쌓고 집안에 틀어박혔다. 올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피카소는 친구  사바르테스
에게 편지를 섰다. "그사이에 내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그리고 앞을 어떤 일들이 벌어질
지 자네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네." 피카소의 고독은  천재들이 필연적으로 느끼는 그곳 이
상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살아왔던 우아한 세계, 그러나 공허하기 이를 데 없는  세계에
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작품 속에 파묻혀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애정과 우정은 피카소에
게 필수불가결한 무엇이었다. 고독에 겨운 그는 사바르테스에게 도움을 구했다. 그는 친구에
게 이 어려운 때에 함께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바르테스는 즉시  기차를 타고 생라자르
역에 도착했다. 그날 이후로 일생의 마지막날까지  사바르테스는 피카소가 속마음을 털어놓
을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로 남게 되었다.
  몇 달 후 마리 테레즈는 딸, 마이야를  낳았다. 아기의 정식 이름은 마리아 드 라  콩셉시
옹, 라코루냐에서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누이동생 콩셉시옹을 회상하며 지은 이름이었다.
  생애 최악의 시절    피카소의 생활은 매우 복잡해졌다. 한편에 올가와 파울로가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는 마리 테레즈와 마이야가 있었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변호사들을 고용했
지만 그들 중 누구도 올가와의 이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녀가 이혼을 원치 않았기 때문
이다. 피카소는 평정을 잃었고 도무지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비극이었다. 그해 가능
그는 부아줄루로 도피했다. 거기서 그는 자신만을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아
무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작은 노트에 글을 써 나갔는데, 인기척 소리만 나도 얼른 쓰던 것
을 숨기곤 했다. 그러나 외부세계와의 접촉에 대한 욕구가 차츰 그를 부추겼고,  그는가까운
친구들에게 자신이 쓴 글들을 조금씩 읽어 주기 시작했다. 부아줄루에서 쓴 초기 작품 가운
데 몇몇에서 피카소는 다양한 색상의 물감을 이용하여 시어를  표현했다. 그것은 하나의 예
술을 다른 하나의 예술로 대치하려는 시도로 '그림을 쓰고' '시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는 지
극히 시각적인 양식과 뛰어난 색감으로 문장을 꾸몄다.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는
종이조각을 다루듯 단어를 다루었고, 화폭의 바탕색을 구두점처럼 사용했다. 단어들은  화가
의 붓끝에서 나오는 색채와 같았고 나아가 색채를 자극하고 울려 퍼지게 했다. 단어들이 색
채를 노래하는 것이다. 제일 먼저 피카소의 시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앙드레 브르
통이었다. 몇 편은 <예술 노트> 특별호에 발표되었다.
  스페인 내전    1936년 3월에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 마이야를 데리고 후안레스핀스로
떠났다. 또다시 그는 우울한 기분에 휩싸였다. 여전히 그림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기 때문이
다. 8주 동안 사바르테스는 피카소에게서 혼란스럽고 음울하고  모순된 말들로 가득한 편지
들을 받았다. "오늘 저녁부터는 그림, 조각, 판화, 시, 이 모든 것을 그만두고 오로지 성악에
만 전념하기로 했다네." 이런 편지를 받은 며칠 후에는 다시, "성악 따위 모든 것을 다 제쳐
놓고 작업을 계속하고 있네."라고 쓴 편지를 받기도 했다. 피카소의 심리상태는 매우 불안정
했으며 절망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평정 속에서  작업을 하는 데에 필요한 외부
적 균형이 어디선가 손상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때 그를 일깨우고 자기 자신을 되찾게 해준
것 역시 외부 사건이었다.
  1936년 7월에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다.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당에 대항하여 공
화파가 맞선 일어난 것이다. 피카소에게 자유란 생명 그 자체만큼 본질적인 것이다. 그는 자
신의 자유는 물론 만인의 자유에 대한 엄청난 애정과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내전으로 조국
과 동포의 자유가 위협받고 있었다. 피카소가 공화파를 지지한 것은 당연했다.
  유럽 각처에서 국제여단이 자유와 스페인 공화파를 지키기 위해 결성되었다. 피카소의 친
구들도 스페인 전장으로 출발했다. 스페인 내란은 파시즘과 나치즘을 예고하는 먹구름 같은
것이었다. 명철한 의식을 가지고 있던 유럽의 모든 지식인들은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
었다. 1936년, 스페인 공화파의 편에  선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막 번져가기 시작하는 파시즘과의 전쟁을 뜻했다. 1939년은 두 개의 겹쳐진 얼굴, 두
개의 겹쳐진 존재 속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마리 테레즈와 도라였다. 피카소는 헤아릴 수 없
을 정도로 많은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의 작품 속에서 이  두 얼굴은 서로 대치되고 중첩되
었다. 1월의 어느 날에는 똑같은 포즈를 취한 모습으로  두 여인의 초상화를 그리기까지 했
다. 깊고 깊은 표정을 가진 도라의 얼굴은 피카소를 매혹시켰다. 피카소는 울면서 애원하는,
눈물자국이 난 얼굴을 한 그녀의 모습을 수없이 그렸다.

    제6장  방황과 좌절
  유럽의 정치상황은 급변했다. 독일에서는 히틀러,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 스페인에서는
프랑코가 등장했다.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입에 전쟁이라는  낱말
이 오르내렸다. 그해 여름을 피카소는 앙티브에서 도라와 함께 보냈다. 매일 저녁 카페 테이
블에 앉아 토론하고 대화를 내눴다. 조만간 전쟁이 터지리라는 것을 의심하는사람은 없었다.
유럽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피카소도 <앙티브에서의 밤낚시>를 중단해
야 했다. 그해 8월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도 전쟁에 참가했다. 1914년처럼 친
구들은 전선으로 떠났고, 시내는 군인들로 가드 찼다. <앙티브에서의 밤낚시>를 더 이상 그
릴 수 없는 데 화가 난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그림을 방해할 목적으로 선전포고
를 한 거야." 그는 파리로 돌아왔다.
  야간열차를 겨우 얻어 타고 파리에 돌아왔으나, 파리는 불안과  공포와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민들은 임박한 폭격 때문에 불안에 떨고 있었다. 피카소는 곧 도라 마르와 사바르
테스, 애견 카스벡을 데리고 루아양으로  옮겼다. 마리 테레즈와 마이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카소는 루아양에서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한 저택의 꼭대기층을 임대했다. 비꼬는 듯
한 어투로 피카소는, "스스로 화가라고 믿는 사람이 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야."
라고 말했다. 그는 작업을 계속했다. 작업하는 동안은 전쟁도 멀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점점
바닥나기 시작하는 재료가 문제였다. 그는  캔버스 대신 나무판자를 사용했고, 팔레트  대신
낡은 나무의자 바닥을 썼으며, 이젤이 없었기 때문에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서 작업을  했다.
작업에 몰두하자 그는 프랑스를 휩쓸고 있던 집단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1940
년 여름, 루아양에도 군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일 대포와 탱크들을 앞세우고  불
길한 행진을 하고 있었다. 페탱과  히틀러가 휴전협정을 맺어 프랑스는 독일에  합병되었다.
더 이상 루아양에서 스스로 유배생활을  계속할 이유가 없어졌다. 피카소는  파리로 돌아와
그랑오귀스탱가의 화실에 정착했다.
  속박과 식량보급제, 독일점령하의 파리 생활은 견디기 힘들었다. 마리 테레즈와  마이야는
피카소가 앙리 4세가에 구해준 집에  살았다. 피카소는 이들을 보러  가거나 아니면 집에서
가까운 조그만 식당에서 친구들과 식사하는 일을 빼고는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
다.
  희곡, <꼬리 잡힌 욕망>    그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그에  저항하며 새로운 생활방
식을 창출해야 했다. 피카소는 새로운 창조 방법을 모색했다. 비록 존재하는 것은  파괴뿐이
었지만, 1941년 1월의 어느 혹독하게 추운 기나긴 겨울  저녁에 피카소는 낡은 공책을 하나
집어 들고 표지 위에 이렇게 적었다. "꼬리 잡힌 욕망." 그리고 첫장에  자신의 초상화를 잉
크로 그려 넣었다. 천장에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파리가 포착한 모습이었다. 탁자를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작가의 이마에는 안경테가 뻗어 나와 있고 손에는 펜을 쥐고 있다. 다음 쪽
부터 전 6장으로 구성된 희곡을 썼다. 그것은 짓궂은 익살로 가득 찬 희극이며 또한 비극이
었다. 등장인물의 이름은 '큰발' '살찐 불안' '파이과자' 등인데 이들은 시종일관 먹는 이야기
만 떠들어댄다. 피카소는 이 작품에 초현실주의 수법인 자동기술법을 시도했다.
  그리고 나흘이 지났을 때, 정확히는 1941년 1월 17일, 피카소는 마지막 쪽 끝줄 아래에 가
로선을 하나 긋고 이렇게 적었다. "희곡의 끝." 작품을 읽은 친구들은 모두  배꼽을 잡고 웃
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친구들은  각자 하나씩 역할을 맡은 극을  읽는 독서회를 마련했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장 폴 사르트르, 시몬느  드 보부아르, 레이몽 케노, 미셸 레리,  루이즈
레리, 조르주 위네, 제르멘 위네 등은 그날의 연극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1944년 초, 엘뤼아르는 "그의 그림은 점점 신의 그림을 닮아 간다. 어쩌면 악마의 그림을.
그는 정당하게 처신한 몇 안 되는 화가 중 하나이다. 지금도 그는 정당하게 행동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전쟁중에 몇몇 예술가들은 프랑스 예술인을 매수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독일의 제안에 현혹되기도 했던 것이다.
  혁명적 회화를 창조하는 작업의 고삐를 늦추지 않다    '혁명적'이라는 평판만으로도 처벌
받기에는 충분했다. 피카소는 현대 예술이  대중에 미치는 영향 가운데서도  히틀러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분야의  명백한 대가였다.  피카소는 나치가  '타락한 예술(degenerate
art, 독일어로는 예술의 볼셰비즘 Kunsbolschewismus)'이라고 부르는  것의 선구자였다. 이
미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파시즘에 대한 그의 증오를  명백하게 천명하지 않았던가. 그
러던 어느 날, 게슈타포가 그의 지을 수색하기 위해 들이닥쳤다. 탁자 위에 놓인 <게르니카
> 사진을 복 나치 장교가 물었다. "당신이 그린 것이오?" 피카소가 대답했다. "천만에!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지요."
  1944년 봄, 피카소는 막스 자코브의 장례식에 참석해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냈
다. 유대인인 막스는 전쟁중 체포당해  수용소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에
제작된 피카소의 작품에는 전쟁과 핍박의  어두운 현실이 곳곳에 나타나  있다. 언제나처럼
피카소는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렸던 것이다. 전쟁중  제작된 작품들에는 희미한 촛불로
밝혀져 있는 수많은 짐승의 뼈, 파와 소시지, 번득이듯 날이 선 칼, 삐뚤어지거나 허기진 포
크 등이 표현되어 있다. 정물화에 담겨 있는 이러한 요소들은 바로 전쟁을 말해 준다.
  1944년 8월 24일 이른 아침, 파리는 건물 지붕 위 곳곳에 매복해 있던 군인들이 쏘아대는
총소리에 일시에 잠이 깨었다. 파리가 해방되는 순간이었다. 도시 전체가 엄청난 동요에  휩
싸였다. 친구들은 그랑오귀스탱가의 화실로 한 시간이  멀다하고 허거지겁 뛰어들어와 사태
의 추이를 알려 주고는 폭탄이 터지고 대포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사라지곤 했다. 피카소는
작업에만 몰두했다. 길거리에서 울리는 소음을 듣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노래를 부르
면서.
  총소리가 멎기 무섭게 연합군에 참전했던 친구들이 귀환하기 시작했다. 전쟁 동안 피카소
는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고 그에 대한 소식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그가 파리
에 살고 있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파리가 해방되자 마치 경합이라도 벌어진 듯
엄청난 숫자의 방문객이 피카소의 화실을 찾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방문객들에게 완전히 점
령당했다. 수많은 방문객에게 피카소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 모델, 프랑수아즈 질로    1945년 가을, 피카소는 페르낭 무를로라는 판화가를 만났다.
피카소는 무를로의 작업을 매우 좋아했으며 이로써  1919년 이래 손대지 않던 판화를  새로
시작해 보고픈 욕망을 품었다. 그는 거의 매일 무를로의 작업실에 들렀다. 새로운 시기가 시
작되던 무렵, 새로운 얼굴의 모델이 등장했다. 피카소의 새로운 연인은 이미 2년 전에  알고
있었던 프랑수아즈 질로였다. 1945년부터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에 피카소는 그녀와 함께 남프랑스로 내려갔다. 피카소 자신이 말하듯이 남프랑스
는 '피카소의 풍경'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남쪽 지방은 행복감을 주었다. 길고 고
통스러웠던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한번 자유를 만끽하게  해주었다. 새로이 솟구치는 정열을
가지고 피카소는 창작에 몰두했다. 이  시기 피카소의 작업량은 엄청나게 많았다.  무를로의
아틀리에에서 피카소는 수많은 도자기 작품 외에도  다수의 회화작품을 제작했다. 이중에는
프랑수아즈의 초상화와 두상이 많았다. 그리고 야수와 신화적 인물, 켄타우로스와  미노사우
로스 등 그가 즐겨 다루던 소재들도 여전히 등장한다.  반인반우인 미노타우로스는 당시 그
가 머물던 지중해를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피카소는  미노타우로스에게 오래 저누터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미노타우로스라도 되는 듯이.
  이 같은 신화적인 존재 사이로 어느 순간부터 또 다른 동물이 하나 등장했다. 올빼미였다.
얼마 전에 누군가가 피카소에게 상처 입은 올빼미를 한 마리  가져다 준 일이 있었다. 피카
소는 이 올빼미를 정성껏 치료해 주었는데, 그사이 피카소는 올빼미에게 빠져 버렸다.  그는
빛을 내며 꿰뚫어ㅗ는 듯한, 초연하게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뭔가 알고 있다는 듯한  올빼
미의 눈에 매료되었다. 피카소는 어렸을 때부터 새를 몹시 좋아했다. 올빼미와 비둘기, 언뜻
보기에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두 새는 피카소의 전생애에  걸친 동반자였다. 더욱이 피카소는
이 두 새에 신비적이고 미신적인 의미를 부여했는데, 동그란  얼굴의 올빼미에게서 자기 자
신을 느꼈던 것이다. 어느 날 피카소는 장난삼아 자기 눈을  확대한 사진 위에 올빼미 머리
를 그린 종이를 겹쳐 놓고 두 개의 구멍을 오려 냈다.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1946년  9월
에 앙티브 미술관장이 미술관장의 넓고 밝은 방을 작업실로  제공했다. 피카소는 곧 그곳에
화실을 차렸다. 그곳에서 피카소가 제작한 작품들은 훗날 앙티브 피카소 미술관 소장품의토
대가 되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프랑수아즈는 아이를 가졌다.
  피카소 인생에 깃들인 두 마리 비둘기    1949년, 대규모 평화회의가 공산당 주최로 파리
에서 개최되었다. 다른 지식인들처럼 피카소도  이미 5년 전인 파리  해방 직후에 공산당에
입당했다. 2차 대전 당시 공산당에  입당하는 것은 반나치 투쟁에  능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을 의미했다. 피카소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미술이 재미나 오락거리를 던져 주는 예술
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최근 몇 년 간 겪은 지옥 같은 나날은 예술을 통해서만이 아
니라, 피카소라는 인간 자체가 투쟁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1944년 10월 5
일)
  1949년 1월에 공산당은 피카소에게 평화운동을 상징하는 포스터 제작을 의뢰했다. 피카소
는 비둘기를 그렸다. 그것은 그랑오귀스탱가의 화실에서 기르던 흰색 비둘기들,  몽마르트르
광장의 비둘기들, 고솔의 비둘기들, 라코루냐의 비둘기들, 어린  시절 말라가의 광장에서 보
았던 나뭇가지 위의 비둘기들과 같은 것이었다. 1949년에는 유럽  모든 도시의 담벽에 그의
비둘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해 봄에 또 하나의 비둘기가 그의 인생에  등장했다. 프랑수아즈와의 사이에 태어난
둘째 딸 파로마였다. 팔로마는 스페인어로 비둘기를 의미했다.
  발로리스, 소나무숲에 둘러싸인 계곡 한가운데 자리잡은 프로방스 지방의 소도시    도시
에 들어서면 입구에서부터 모든 집들의 테라스 위에 포도와  올리브 덩굴, 라벤더가 무성하
게 우거져 있었다. 몇 해 전 엘뤼아르와 함께 여행을 하던 중에  알게 된 이 도시는 첫눈에
피카소를 매혹시켰다. 1948년, 피카소는 프랑수아즈와 클로드를 데리고 그곳에 정착했다.
  발로리스는 도자기의 도시였다. 이 분야는 바로 1년 전에 피카소가 새로 발견한 분야이기
도 했다. 발로리스의 도자기 작업실 선반 위에는 비둘기,  황소, 올빼미 여자얼굴 따위 형체
를 갖춘 항아리들이 늘어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피카소는 무어소다도 재료를 다루는 그만의
파격적인 방식으로 동료 도예가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전통적인 도자기 제작방식에 정면으
로 도전하여, 상식을 초원하는 일을 시도했다.
  어느 날 피카소는 수석도공이 방금 막 빚어 낸 병을 집에 들고는 손가락 안에서 주무르기
시작했다. 먼저 병의 불룩한 부분을 공처럼 둥글게 만들어서 손가락 안에서 단단히 버틸 수
있도록 하고는 병목을 바짝 죄었다. 그러고 나서는 솜씨 좋게 몇 번 힘을 주어 비틀어서 이
생활용품을 단번에 가볍고 연약하지만 생명력이 넘치는  비둘기로 변모시켰다. 그것은 정말
로 놀랄 만한 손동작이었다. 만약에 압력이 조금이라도 잘못  계산되었더라면 그 모든 것을
다시 한 덩어리로 뭉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을 것이다.
  발로리스에서 피카소는 행복과 평화를 느꼈다. 새로 사귄 친구들, 즉 도기공 식구들에  둘
러싸여 보낸 발로리스의 생활은 그에게 휴식과 재충전을 주었다.  그는 매일 아침 반바지와
스? 차림에 샌들을 신고 도자기 제작실에 나타났다. 오전 작업을 마치고 나면 바다로 나가
해수욕을 즐기곤 했다. 당시 흰 머리가 나이를 속이지 못하게 할 따름이었다. 이때 피카소는
거의 일흔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는 가족을 매우 사랑했다. 피카소는 두 어린아이, 클로드와 팔로마의 모습, 특히 그들이
노는 모습과 그들의 장난감을 즐겨 화폭에 옮겼다. 그들의 발랄하고 즈거운 모습,  고지스럽
고 다루기 힘들지만 활기가 넘치는 모습을 사랑했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놀기를  좋아했다.
때로는 나뭇조각을 손으로 몇 번 다듬고 크레용으로 윤곽만을 슬쩍 그려 넣은 작은 인형들
을 만들어 주거나 두꺼운 종이를 오려서 동물을 만들어 주기도 했는데, 이렇게 마든 형상들
은 하도 우스꽝스러워서 어른들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피카소는 클로드에게 수영하는 법과
얼굴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들의 주요 놀이터는 골프후안의 해변이었다.
1950년 남프랑스 해안에는 피카소 가족이 점심 나절에 어느 장소로 나온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여 그 장소에 있는 식당은 평소보다 엄청나게 많은 인파고 성황을 이루었고 발로리스
라는 도시는 피카소가 상주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신화적인 장소가 되었다. 라칼리포르니
는 칸의 높은 지대에 위치한 별장으로 20세기 초엽에 벨에포크(Belle  Epoque) 양식으로 지
어진 거대한 집이었다. 통풍이 잘되는  방들은 사방에서 빛이 들어오는  커다란 유리창들이
있어 매우 밝았다. 하지만 힘든 시기였다. 1955년 초여름,  피카소의 가장 큰 소망은 무분별
한 질문들을 해대는 기자들과 대중을 피하는 것이었다.

    제7장  영광의 나날
  피카소와 프랑수아즈는 2년 전 헤어졌다. 프랑수아즈는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나 버렸다. 이
고통스러운 시기에 각 신문은 피카소를 더욱 괴롭혔다. 그러던 그가 작업하는 데 필요한 안
정을 겨우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라칼리포르니에서였다. 74세의  나이에 저어든 그는 다시
한번 정열적으로 일에 착수했다. 이때 피카소의 곁에는 자클린 로크가 있었다.
  거대한 저택 라칼리포르니의 실내를 피카소는 엄청난 잡동사니들로 꾸몄다    라칼리포르
니에는 방들이 많이 있었는데, 방들은 커다란 문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피카소는 그 많
은 방들을 모두 화실처럼 사용했으며 방마다  그가 제작하고 있는 작품이 적어도  하나씩은
놓여 있었다. 자클린이 아무리 애를 써도  무질서는 걷잡을 수 없었다. 저 유명한  피카소의
정글이었다. 기이하고 잡다한 형태의 사물들, 여기저기 뚜껑이 열린 채로 널려 있는 상자들,
시든 채로 꽃병에 꽂혀 있는 꽃들, 쌓여가는 옷가지들, 희한한 모양의 램프들, 먹다 남은 음
식물... 큰 창문으로는 소나무와 유카리 나무 향내가 물결처럼 밀려 들어왔다. 구름 위로  저
녁이 내려앉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이곳에서 피카소는 그림을 그리는  시간 외에는 개나 염
소들과 어울려 장난을 치거나 찾아오는 친구들을 맞으며 여유  있는 생활을 보냈다. 칸바일
러, 사바르테스, 레리 부부, 트리스탕 차라, 장 콕토, 자크 프레베르 등은 항상 곁에 있던 절
친한 친구들이었다.
  그해 여름엔 클루조 감독이 피카소를  주제로 영화를 제작했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마치
마술을 보는 것처럼 피카소의 작품이 실현되는 과정을 한눈에 모두  볼 수 있었다. 그때 그
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모델로 변형작업을 해, 15개에 달하는 대규모 연작 <알제리의 여인
들>을 막 끝낸 참이었다.  어마어마한 작업량을 궁금해하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다작 자체가 내 작업방식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화가들은 한 개의 작품에 100
여 일을 할애할지 모르지만 나는 며칠 만에 100여 개의 작품을 그립니다. 작업을 하는 도중
에 나는 창문을 엽니다. 그리고 캔버스 뒤쪽으로 가지요. 그러면 분명히 무엇인가 새로운 것
이 떠오릅니다."
  보브나르그성을 사들이다    1958년 어느 날, 피카소는 친구 칸바일러에게 전화를 걸어서
"생빅투아르를 샀어요."라고 마했다. 생빅투아르산을 그린 세잔을 작품을 하나를 구입했다는
말로 여긴 칸바일러는 "어느 것으로?"라고 되물었다. 피카소는 세자의 그림이 아니라 800헥
타르에 달하는 영지와 함께 산 북쪽  사면에 위치한 보브나르그성을 샀다고 반복해서  말했
다. 매입은 급작스레 결정되었다. 피카소는 여행중 보브나르그성을  처음 보았는데, 그때 성
과 주변의 야생적인 계곡을 보고 벼락에 맞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1958년 9월에 피카소는 자신의 작품들과 그가 소장하고 있던 세잔, 마티스,  쿠르베, 고갱,
반 고흐 등의 작품들을 가지고  보브나르그에 정착했다. 피카소는 그곳의  커다란 살롱에서
작업을 했다. 살롱에는 18세기에 만들어진 벽난로가 있었고 벽난로  선반 위에는 옛날 보브
나르그가 후작의 흉작이 놓여 있었다. 언제나처럼 거주지가 바뀜에 따라 화법도 변화했다.
  드디어 그는 오래 전부터 존경해 온 세잔의 고향을 찾아왔다. 그는 "나는 세잔의 집에 살
아요."라는 말을 즐겨 했다. 한편,  피카소는 내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스페인의 피가 다시
솟구치듯 빠른 속도로 엄격하고도 장중한 작품을 여러 점 제작했다. 또한 어두운 녹색, 검정
색, 암적색 등을 사용하여 자클린의 초상화를 다수 제작했다.
  1961년 3월 14일자 신문에 피카소와  자클린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기사가 굵직한  활자로
실렸다. 가까운 친구들까지도 이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들의 결혼식은 3월 2일, 발로리스 시청에서 비밀리에 거행되었다. 피카소는 생전 처음  호기
심에 찬 세인들과 기자들을 따돌리는 데에 성공했다.
  노트르담드비, 피카소의 마지막 거주지    보브나르그성은 수려함과 고적함, 야생적인 매
력으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 점 때문에 1년 내내 그곳에 산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힘든 일이기도 했다. 점차 피카소가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1961년  어
느 날, 피카소는 보브나르그보다 쾌적하고 따사로우며 인간적인 장소를 발견했다. 그곳은 노
트르담드비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옛 농가였다. 작은 언덕 위에 세워진 이 시골집은 무
쟁 가까이에 있었으며, 칸에서도 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바깥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
지 않았으면서도 고립을 보자?을 수 있는 곳이었다. 대단히  만족한 피카소는 신선한 공기
로 가득 찬 노트르담드비의 커다란 방에 정착했다.
  1963년 3월 27일, 수려한 데생들로 가득한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에 피카소는 이렇게 적어
넣었다. "회화는 나보다 훨씬 강하다. 나는 회화가  원하는 것을 할 뿐이다." 82세의 나이에
그는 여전히 회화에 '사로잡혀' 살았다. 그리고 예전과 다름없는 뜨거운 열정과 끝없는 욕구
에 따라 더욱더 멀리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30세 청년처럼 작업에 몰두했다. 마치  회화가
삶이며 삶이 회화를 강요한 것처럼, 회화가 삶을 부여한 것처럼.
  1970년 5월 1일, 아비뇽의 교황궁에서 피카소의 최신 회화작품 167점과 데생 45점을 포함
한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다. 전시회를 관람한 사람들은 그의  놀라도록 새로운 미술적 접근
에 혀를 내둘렀다. 89세의 피카소가 그린 그림에는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주제와 새로운 색
체가 나타나 있었다. 그것은 스페인의 재등장이었다. 피카소는 자신의 뿌리인 스페인과의 관
계를 되살리고 있었다. 그후 가장 충실한 친구 사바르테스의 노력으로 바르셀로나에 피카소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미술관은 15세기에 건축된 아름다운 건물로 바르셀로나 중심부에 위
치하고 있다.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를 가슴 깊이 사랑한다는 증거로  젊은 시절에 그린 작품
대부분을 이곳에 기증했다.
  1973년, 피카소는 92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예전과 다름없이 감동을 끌어내려
는 욕망과 어두운 곳에 색, 형태, 이미지, 상징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빛을 비추려는 욕망이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피카소는 자신의 창조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표현하고
자 하는 대상에 부여해야 할 가장 적절하고 완벽한 형태를 찾아내는 자신의 능력을 믿었다.
이같이 끓어넘치는 생명력은 그의 죽음을 뜻밖의 것으로 만들었다. 1973년 4월 8이,  피카소
는 세상을 떠났다. 이 소식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피카소는 자신의 내부에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빛이 있다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다. 피카소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회화의
세계에 완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회화는 어느 순간 멈추어 버리게 마련입니다. 무엇인가
가 중단시키기 위해 다가오는 것이지요."

    기록과 증언
  추억, 크로키, 편지, 사진, 시... 그를 알았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를 찬미했던 사람들이 피
카소에 대해 이야기한다.
  추억과 증언    피카소는 자신의 생애나 예술에 대해 쓴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작품을 통
해서만 이야기 했다. 그러나 피카소의 이웃, 친구, 여인들이 그의 생애를 말했다. 그들은  피
카소를 만나고 대화하고 함께 나누었던 일상생활을 글로 남겼다.  주관적일 수는 있지만 이
이야기들은 피카소의 개성을 생생히 들려주고  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피카소의 생활과
정신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화가인 프랑수아즈 질로는 1943년부터 1953년까지 피카소의 반려자였다. 그녀는 피카소와
사이에 두 아이를 낳았는데, 1947년 생 클로드와 1949년 생 팔로마가 있다.
  ...그날 그는 내 초상화에 착수했다. 그림에는 <꽃여인>(1946년, 아래 그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에게 그리는 것을 지켜봐도 괜찮겠는냐고 물었다. "물론, 오히려 도움이 되겠는걸.
그리고 계속 포즈를 취하고 있을 필요도 없어." 그렇게 해서 나는 한 달 동안 줄곧 그의 작
업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는 내 초상화와 제작중이던 다른 정물화들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그는 팔레트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쪽에는 신문지로 덮인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었
고, 위에는 테레빈유에 적신 붓들이 가득 꽂혀 있는 통조림 깡통들이 서너 개 놓여  있었다.
그는 붓을 하나 꺼낼 때마가 신문지에 붓을 닦았다. 얼룩과  줄이 가득 그어진 신문지는 밀
림을 연상시켰다. 순색이 필요하면 신문지에 직접 물감을 짜서 쓰곤 했는데, 가끔은 종이 위
에 여러 가지 색을 조금씩 섞어 가며 쓸 때도 있었다.
  그의 발치와 이젤 주위에는 크기가 제멋대로인 깡통들이 여러  개 너렬 있었다. 거기에는
회색과 중간색들, 그리고 그가 미리 섞어 둔 여러 가지 색의 물감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서너 시간씩 작업을 계속했다. 필요 없는 동작은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서 있는 것이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아
니, 작업하는 동안 나는 몸을 문 밖에 두고 있어. 마치 힌두교인들이 사원에 들어올 때 밖에
신을 벗어 두고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야. 이런 상태에서  신체는 완벽하게 하나의 식물처럼
존재하지. 화가들이 대부분 장수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가끔씩 그는 화실을 가로질러 높은  등받이가 달린 고딕풍 등나무 의자에  앉곤 했다. 이
의자는 그의 그림에 자주 등장한다. 그는 다리를 포갠 다음  팔꿈치를 무릎 위에 얹고 손으
로는 턱을 괸 자세로 한 시간씩 아무 말 없이 그림을 보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작업을 계
속했다. 이따금 그는 "이 조형 아이디어를  오늘은 더 이상 진전시킬 수  없어."라고 말하고
다른 그림에 손을 댔다. 미완성의 혹은 반쯤 마른 그림들이 항상 대여섯 개 정도는  있었고,
그는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작업을 계속하곤 했다. 오후  2시부터 밤 11시까지 그런 식으로
작업을 계속한 후에야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작업을 중단했다.
  화실에는 완벽한 정적이 감돌았다. 이 정적이 깨어지는 것은 그가 가끔씩 뱉어 내는 독백
이나 몇 마디 대화가 오갈 때뿐이었다. 외ㅜ에서 들어오는 소음은 전혀 없었다. 해가 넘어가
기 시작하면 그는 두 개의 조명등으로 화폭을 비추었다. 화폭  주변은 완전히 어둠 속에 묻
혀 버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화가가 최면에 걸려 넋을 빼앗긴 듯 작업에 몰두하려면 화
폭 주위가 완전한 암흑이어야 해. 화가가 이성의 집요한 틀을 벗어나려면 자신의 세계에 최
대한 근접해 있어야 하거든."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와의 생활>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 작가, 출판인, 독일예술사가, 피카소 최초의 미술상. 1907년에 파리
에서 화랑을 개업한 그는 전위작가인 브라크, 마티스, 피카소 등의 작품전을 열었다.
  칸바일러:그러니까 그날 나는 집을 나섰습니다.  주소는 알고 있었지요. 라비냥가  13번지.
라비냥 광장 계단은 그날 처음 올라가 보았습니다. 그가 살던 건물은 얼마 후부터 바토라부
아르라고 불리게 되는데, 그 건물이 당시 주부들이 빨래를 하러 모이던 센강의 배처럼 나무
와 유리로 지어졌기 때문이지요. 그 건물 수위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찾는 방은
한 층 아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기슭에 붙어  있는 그 건물은 출입구가
가장 꼭대기층에 나 있었고, 거기서부터 한 층씩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는 거예요. 드디어 피
카소가 살고 있다는 방 앞에  도착했습니다. 문에는 친구들이 피카소에게  전하는 알아보기
힘든 글들이 가득 적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마놀로는 아종의 집에 있음. 토토트가  다녀
감. 드랭은 오늘 오후에 들를 것임.' 이런 것들이었지요.
  나는 문들 두드렸습니다.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앞섶을 열어제친 셔츠 바람의 젊은이가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나이가 지긋한 신사와 내 화랑에 찾아왔던 청년이었
습니다. 노인은 볼라르였지요. 볼라르는 피카소와  방문할 때마다 짓궂은 농담을 하곤  했지
요. "첫 영성체를 축하하는 뜻에서 부모가 화랑을 차려 준 젊은이가 있다."라고 말입니다.
  라비냥가에 있던 화실들이 얼마나 곤궁하고 비참했는지는 아마 상상하기 힘들 겁니다. 피
카소의 방에는 염색한 종이들이 벽에서부터 바닥까지 넝마처럼 널려  있고, 데생 위에는 먼
지가 소복하게 앉아 있었으며, 푹 꺼진 안락의자 위에는 둘둘 말린 그림들이 널려 있었습니
다. 화덕 옆에는 잿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었구요. 한마디로 끔찍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곳
에 페르낭드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피카소가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프리카라 부르는 커다
란 개를 기르고 잇었어요. 방 안에는 언젠가 위드한테 들었던 대형 작품이 있었습니다. 훗날
<아비뇽의 처녀들>로 알려진 그 작품은 입체주의의 시발점이  되는 작품이지요. 이 자리에
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피카소의 영웅주의입니다. 당시 그는 정신적인 고독을 정말 견
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친구나 화가 가운데 그의 그림을 이해하고 대화상대가 될 만한 사람
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비참한 화실에서 제작한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그저 미친 짓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지요. 아폴리네르를 통해서 피카소를 알게 된  브라크는 피카소가 불을 뿜
어 내기 위해 석유를 들이마시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피카소의
작품을 본 사람들은 그가 처한 상태로부터 그림을 파악했던 것입니다. 피카소 자신은 <아비
뇽의 처녀들>을 미완성작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 작품은 피카소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는
지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 그림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내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왼쪽 절반은 주로 단색으로 그렸는데 당시 장밋빛시대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림의 형태는 당시 사람들의 표현대로 도끼로 찍어 잘라 낸 듯  훨씬 힘있게 그렸
습니다.) 반면에 오른쪽 절반은 좀더 강렬하고 다양한 색채를  사용했습니다.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보여 주는 것이지요.
  크레미외:<아비뇽의 처녀들>에 대해 볼라르와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칸바일러:오, 아시잖아요. 나는 당시에는 볼라르를 잘 알지 못했어요. 그를 제대로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습니다. 단지 볼라르가 피카소의 집에 가끔씩 찾아왔지만 피카소의 작품을
썩 탐탁해하지 않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아마 볼라르도 <아비뇽의 처녀들>을
보았겠지요. 긔고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이 작품을 끔찍한 것으로 여기고 싫어했던 게 분명
해요.
  크레미외:그 작품에 대해 피카소와 처음으로 주고받았던 말들을 기억하십니까?
  칸바일러:아니오, 잘 모르겠습니다. 단지 내가 그에게 그림이 훌륭하다고 말했으리라는 것
은 확실해요. 전 정말로 놀랐거든요.
  칸바일러와 크레미외 <나의 화랑, 나의 화가들>
  브라사이. 헝가리 태생의 사진작가. 1923년 파리에서 피카소를  만났다. 그는 피카소의 조
소작품을 빠짐없이 사진에 담았으며, 피카소의 인물사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43년 11월 30일, 드디어 일생일대의 작업에 착수했다. 바로 <양을 안고 있는 사나이>이
다. 이 '선한 목자'는 미치광이  같은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조각상은 매우 무거웠다.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고작해야 축을 중심으로 방향을 돌릴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럴
듯한 배경을 어떻게 구하 것인가? 그리고 조명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대머리가 보기 좋게 벗겨지고 기품과 당당한 풍채를 가진 한 신사와 열띤 토론을 나
누며 피카소가 들어왔다. 그는 우리를 소개시켜 주었다. 지금은 보리스라는 이름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보리스는 <양을 안고  있는 사나이>의 조명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그의 조언은 나를 성가시게 했다. 역시 짜증이 난 피카소가 가로막고 나섰
다. "서두르지 말아요. 보리스. 브라사이가 알아서 할 겁니다. 당신의 무대조명  경험은 그에
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에요."
  나는 계속해서 이 '목자' 상과 대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면상과 3/4사면상 그리고 측
면상을 여러 장 찍었다. 다음 컷을 위해 조각상을 돌릴 때면 조각상의 허리를 안고 무척 조
심스레 움직여야 했다. 목자의 팔에 안겨 도약하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는 어린 양이 깨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럭저럭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
각상을 옮겨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는 각도를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조
심스레 1/4정도 돌렸다.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어린 양의 발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
던 것이다.
  언젠가 필연적으로 벌어질 일이었다.  피카소의 조각작품들을 들고,  돌리고 당기고, 밀고
하면서 보낸 지난 3개월 동안 아직 하나도 깨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눈앞에 벌어진 사고의 충격에서 벗어나자 나는 곧 이 사실을 피카소에게 고백하기로 마음
먹었다. <양을 안고 있는 사나이>는 피카소가 자기 작품 중 최고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나
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피카소 특유의 독설을
퍼부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아직 그런 일을 당해 보지 않았지만... 그가 받을 충격격을 줄이
기 위해 사바르테스에게 먼저 이 일을 알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사
바르테스가 보이지 않았다. 떨어진 발의 파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것은 원래부터 몸통에
제대로 붙어 있지 않았다. 고정시키는 데에 사용했던 못도 석고에  금이 가는 데 일조를 하
고 있었다. 결국 그것은 예정된 사고였다. 조각의  네메시스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무모하게 자기 근본에서 뻗어 나와 있는 것은 어느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 나는 목을 자르
고 팔다리를 절단한다. 나는 몸체에서 삐쳐 나온 것들, 손가락, 코 그리고 귀를 자르며 헤라
클레스의 다리와 비너스의 팔을 자른다. 나는 조각품이 자기 속으로 움츠러들어서 시간,  비
바람과 악천후 또는 예술품 파괴자나 사진작가들에게 아무런 돌출부도 내보이지 않으며, 모
든 말단 부위를 몸 속으로 다 집어 넣고  죽은 척하고 있는 곤충과 같은 것이 되기를  원한
다." 그러나 나는 여신에게 이 조각상은 모든 것을 다  용납할 수 있는 청동으로 만든 것이
라고 내심 반박했다.
  나는 이 사실을 피카소에게 알렸다. 그는 큰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비난을 퍼붓지도  않았
다. 노여움의 콧김이 뿜어 나오지도 않았다. 불길한 징조인가? 당장 그 자리에서 터져 나오
는 분노보다 하얗게 질려 싸늘하게 응축된 그의 울분이 더 위험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는 한마디도 않고 내 뒤를 따랐다. 그는 노련한  기술자처럼 부서진 조각들을 한
조각도 빠짐없이 보고 나서 못을 검사하고 조각상의 떨어져  나간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그
러고는 차분히 말했다. "크게 걱정할 것 없어. 못자리를  충분히 깊게 파지 않았던 거야. 조
만간 다시 손을 보겠어."
  그사이 사바르테스가 왔다. 피카소가 '사고' 소식을 알렸던 것이다. 사바르테스가  내게 말
했다. "당신이 왜 그걸 깼는지 알아요. 다른 사진작가들이 사진에 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서지요? 그러려면 피카소의 작품을 찍을 때마다 전부 깨 버려야 할 겁니다. 아, 그러면 당신
사진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가지게 될까요."
  한 시간 뒤 그의 지을 나설 때 피카소는  내게 "내가 별로 화를 내지 않았지? 그렇지  않
나?" 하고 물어 보는 것이었다.
  브라사이 <피카소와의 대화>
  앙드레 말로. 프랑스 작가. 예술에 깊은 애정을 지녔으며, 스페인 공화파를 옹호하기 위해
1936년에 결성된 국제여단에서 활약했다. 이 점에서 그가 피카소의  둘도 없는 대화 상대자
였다는 사실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형 중에 팔다리가 잘려 나간 자그마한 상이 하나
있었다. 새로 고친 그 조각상을 그가 집어 들었다. 한데 모은 두 다리와 상반신이 둔부와 복
부의 커다란 동체에서 대칭으로 뻗어 나와 있었다.  "토마토에 나뭇가지를 관통시켜서 똑같
은 것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는 진열장에서 <크레타 여인>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사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
함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시간을 초월한 조각들이군요"
  "그래야지요. 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을 초월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새로운 예술
을 창조하려면 현대예술을 살해해야 하지요. 사람들은 흔히 자기  자신과 닮은 것을 좋아합
니다만 내 조각들은 내 우상을  전혀 닮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유사성이라니요!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나는 정면의 얼굴에 옆모습의 코를 그렸습니다. (이때 코를  꼭 측면으로 그려
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코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지요. 다시 말해 그걸 '코'라고  부
르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떤 이는 흑인예술의 영향에 대해 운운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면
의 얼굴에 옆 모습의 코를 달고 있는 아프리카 조각을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선사
시대의 회화를 좋아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선사시대의 회화를 닮지 않았습니다.!"
  <게르니카>를 제작하던 때 이 화실에서 피카소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프리카 물신의 형태에서 영향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서 내가 얻은 것이라면
회화의 세계에서 내가 찾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나를 이해하게 해주었다는 거지요."
  그는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발굴한 바이올린  모양의 우상을 들고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게르니카의 사진을 볼때처럼 강렬한 표정이 되었다. 갑작스런 변화였다. 마치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말이다(브라크는 피카소의 '최면상태'에  대해 내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내게 손짓을 해보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빛과 공기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외부에서 새어
드는 소음도 여전했다. 그렇지만 피카소는 불안과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다.
  "우리 스페인 사람들은 아침에는 미사, 오후에는 투우 그리고 밤이면 창녀촌을 찾지요. 이
모든 게 어디에서 섞이는지 아세요?  슬픔이에요. 우스꽝스러운 슬픔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밝은 사람이지요? 안 그래요?" 실제로 그는 매우 밝아 보였다.
  앙드레 말로 <흑요석의 두상>
  크리스티앙 제르보. 그리스 태생의 작가, 문예 출판인, 미술상.  1926년에 <예술노트>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예술노트>는 피카소와 피카소의 작품에 대해 많은 글을 실었다.
    피카소와의 대화    작품을 대하는 나의 시선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과  같습니다. 창
문을 통해 세계를 보는 것처럼 하나의 창문을 통해 작품을 바라봅니다. 이때 눈에 들어오는
정경이 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커튼을 내립니다. 작품을 대하는 자세는 생활을 대하듯 직
접적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회화만의 고유한 법칙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단히 눈앞에 현존하고 있는 삶을 소유해야 합니다.
  예술가에게는 하늘이든, 땅이든, 하찮은 작은 종이조각이든, 지나가는 하나의 형상이든, 모
든 곳에서 다가오는 감성이 집적됩니다. 예술가는 사물을 차별하면 안 됩니다. 사물 중에 특
별히 고귀한 영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발견된 대상에서 자신을 끄집어내야 합니
다. 자기 작품은 제외하고 말이죠. 나는 예전 작품을 다시 베끼는 작업을 혐오합니다. ...
  화가는 충만과 공허의 단계를 체험하게 됩니다. 거기에 예술의 비밀이 깃들여 있지요.  예
를 들어 내가 퐁텐블로숲을 산책하고 있는데, 녹색으로부터 포만감을 느끼고 있다고 합시다.
바로 그 감정을 화폭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러면 화폭에 녹색이 지배적으로 나타날 것입
니다. 이처럼 화가의 작업은 그의 감정과 시각을 배설하고자  하는 위급한 필요성에서 나오
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미술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
다. 이런 사람들은 그림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단지 그들의 몰이해의 정도에 일
치하는 맞춤복을 입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요.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림을 걸어 놓는 못
이 회화를 파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미술작품은 구체적인 중요성을 가지
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작품을 제작한  사람에게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작품이 팔려  나가
어느 벽에 걸리는 순간부터 그것은 완전히 다른 중요성을  가지게 됩니다. 회화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미에 대한 진부한 교육은 허위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속았지만  하도 감쪽같이 속아서 진
리의 그림자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비너스, 요정들,  나르시스
등의 아름다움은 허위입니다. ... 모든 사람들은 회화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왜 그들
은 새들의 지저귐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걸까요? 왜 우리는 밤과 꽃,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려고만 하는 겁니까? 그러면서 회화의 문제가 나
오면 이해를 추구합니다. 예술가의 작업은 어떤 필연성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 즉  예술가
역시 세계의 미세한 구성요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를 매혹시키지만
우리가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자연적 존재들보다 더 큰 중요성을 예술가에게 부여
해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에 거트루드 스타인이 드디어  <세 명의 음악가>가 무엇을 표현
한 것인지 알아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정지한 삶'이라고 말입니다.
  크리스티앙 제르보 <예술노트> 1935년호
  엘렌 파르믈렝. 작가. 화가 에두아르 피뇽의 부인. 이들 부부는 1950년대에 피카소와 그의
아내 자클린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회화는 공격적이다    흔히 미술에 대해 갖고 있는 "이  애완동물은 위험하지 않다."는
생각, 즉 미술이 아무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는 유감스러운 생각에 대해 피카소는 이렇게 말
했다. "그런 생각에 주의해야 합니다. 옷의 단추와 단춧구멍 그리고 단추에 드리운  작은 그
림자를 하나하나 그리며 초상화를 완성하는 것은 아주 재미있고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주
의하세요! 어느 순간 단추의 형태가 당신의 얼굴로 튀어나오니까." ...
  "진행중인 작업에 주의해야 합니다. 가장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가장 자유로운 순
간입니다. 거인의 날개를 달았다고 느낄 때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전진을 방해할  뿐이
지요."
  얼마 전에 그는 <줄넘기하는 소녀>를 본떠 만든 청동상을 노트르담드비로부터  우송받았
다. 피카소가 여러 가지 요소를 섞어 작업하던 시기에 현실  탐구의 수단이 된 것은 조각이
었다. 화가로서의 피카소에게 공중에 뛰어오른 소녀를 표현하는 것은 힘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조각가로서의 피카소는 해결의 수단을 찾아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어느날 피카
소는 매우 유쾌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줄넘기하는 소녀>의 공간 문제에 대해 고심을 하고
난 참이었다. "내 어린 소녀가 공중에 떠 있을 때, 어디에 몸을 지탱시켜야 할지  드디어 알
아냈어요. 당연히 그건 줄이지. 왜 여태까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저 현실을 한번 바라보
는 것으로 충분한걸."
    대립적인 의미를 지닌 채    피카소가 가장 즐겨 했던 말은 "나는 찾지 않는다. 발견할
뿐이다."였다. 이 말이 그의 진심이라면 대담성과 확신으로 가득찬 이 문장은 정반대의 의미
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우리는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찾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실상 피카소는 매순간 찾았고 매순간 발견했다. 그는 작품을  하나 끝마치면 자신이 표현
한 비밀을 찾기 위해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이것이 끝나야 다른 작업을 시작했다. 그가 그림
이 원하지 않는 곳으로 그림을 이끌 때 그림은 그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그를 몰고 갔다.
    이름붙이기    우리는 커다란 백색면 위에 그려진 몇  개의 가느다란 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선만으로도 두 개의 팔, 열 개의 손가락이 달린 두 개의 손, 서로 움켜쥔 손들에
들어간 힘,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손의 무게와 형태가 충분히 표현되고 있었다. 피카소는  이
렇게 말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입니다. 사물을  그들 자시느이
이름으로 부르는 거지요. 눈이라고 이름붙이고, 발이라고 이름붙이고,  무릎 위에 놓인 개의
머리라고 이름붙입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자유의 사슬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자유요? 조심해야 하는 겁니다. 다른 부문에
서와 같이 회화에서도 그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당신은 항상 사슬에 묶인 자신을 발견하
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지 않을 자유는 반드시 다른 일을 해야 함을 의미하지요. 사슬은 바
로 거기에 있는겁니다. 자유는 같은 말을 가지고 장난을 칩니다.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니기
도 하고 정반대 의미를 지니기도 하고 정반대 의미를 띠기도 합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자클린이 이런 말을 했어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은 마치 씨
앗은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그냥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고요."
    그림을 끝내기    진정한 화가는 결코 자신의 월계관에 만족하지 않는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화가란 결코 끝을 내지 못한다는 것입니
다. '오늘 열심히 작업했으니 내일은 휴일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은 절대로 오지  않습
니다. 중단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물론 그림을 중단하고 다시는 손대
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순간이 있지요. 그렇다 해도 그 위에 '끝'이라는 단어를 써 넣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진리?    "어떤 진리 말입니까?" 피카소가 되물었다. "진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림에서 진리를 추구한다면 그 진리로 수백 장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이 진리일까요? 또 모델과 그림  중에서 어떤 것이 진리일까요? 진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파울로 피카소는 회상한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습니
다. '진리는 거짓이다'."
  엘렌 파르믈렝 <피카소가 말하기를>
    피카소와 시인들    다른 어떤 화가보다 피카소는 시인들이 각별히 좋아하던 화가였다.
파리에 정착한 날부터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작가들, 막스 자코
브, 아폴리네르, 콕토, 엘뤼아르, 브르통, 아라공, 르베르디, 샤르 등과 끊임없이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폴 엘뤼아르, 초현실주의 운동, 레지스탕스 활동, 정치 참여를 통해 피카소와 유대를 다졌
다. 피카소는 엘뤼아르의 시와 저작물에 수록된 삽화를 다수 제작했다.
  세계가 부여한 틀을 극복했음을 삶에서 충분히 입증한 사람들 가운데 피카소는 가장 위대
한 부류에 속했다. 그는 세계를 정복한  후에 세계에 반대하는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정작
피카소가 이룩한 것은 정복이 아니라 자신답게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푸른색이 없으면
붉은색을 칠합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직선 또는 곡선 대신에 그는 선을 수천조각으로 분해
했다. 분해된 선들은 피카소의 내면에서 하나의 일체감과 진실을 회복했다. 피카소는 객관적
인 실재로서 통용되는 관념을 무시하고, 대상과 그것을 보고  사유하는 인간의 관계를 재정
립했다. 그는 가장 대담하고 숭고한  방법으로 인간존재와 세계존재 사이에  놓인 불가분의
증거들을 새롭게 제시했다.
  피카소 이후 벽들이 무너졌다. 그는 세계의 현실을 포기하지  않는 것만큼 자신의 현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피카소는 회화 앞에 서 있는 시인처럼 시 앞에 서 있다. 그는 꿈꾸고 상상
하며 창조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현실의 대상에서 그속에  잠재되어 있던 대상이 탄생하여
그 스스로 현실이 된다. 그것들은 현실에서 현실을 오가며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하나의 단
어가 다른 단어들 사이에서 탄생하듯 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대상들에 혼동을 느끼지 않
는다. 모든 것은 조화와 연관에서 가치를 획득하며, 나아가 서로 교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폴 엘뤼아르 <파블로 피카소에게>

    파블로 피카소에게    1. 어떤 이들은 권태를 또 어떤 이들은 웃음을 만들어 냈다. 어떤
이들은 삶에 비바람으로 재단한 코트를 지어 입혔다. 그들은  나비들을 살상하고 새들을 물
에 빠뜨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 죽어 갔다.
  너, 너는 눈을 열어 언제나 변함없는 자연의 대상들 사이로 눈길을 보낸다. 너는 자연물에
서 수확을 거두었고 언제나 씨를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네게 영혼과 육체에 대해 설교했다. 그런데 너는 육체 위에 머리를 다시 얹었고
배부른 자들의 혀를 찔렀으며 미가 찬양한 빵을 불태웠다. 단 하나의 정신이 우상과 노예들
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리고 너의 희생물 사이에서 순진하게 너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것은 슬픔에 이식된 기쁨으로 막을 내렸다.
  3. 더 이상 방황은 말지어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왜냐하면 탁자는 참나무처럼 곧고 수도
사의 옷은 희망의 색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조그마한 영역. 다이아몬드 같은 그 영역
위로 모든 별들의 영상이 반사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우리는 인간과 동물의 친구이다. 마치 하늘의 무지개가 그렇게 하듯.
  때로는 불타는 듯하고, 때로는 얼음처럼 싸늘한 우리의 의지는 나전으로 만들어졌다. 그것
은 꽃눈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지게 한다. 흐르는 절기에 맞추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시각과 손길의 권능으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만질 것이다. 여인을 만지듯이 하늘을 만질 것이며 우리의
손을 우리의 눈에 연결시킬 것이다. 축제는 새로워진다.
  4. 상처 입은 태양이 사는 야성의 집의 창문에 황소의 귀가  비치면 상처 입은 태양은 꼬
리를 감춘다.
 자명종의 색채와 침실의 벽은 잠을 몰아내 버렸다.
  5. 찢어진 이 신문조각보다 더  메마른 찰흙이 어디 있을 것인가?  너는 그것을 무기삼아
여명을 정복하려 했다. 보잘것없는 한 물체의 여명을. 너는 존재하고자 학수고대하던 것들을
사랑스럽게 그려 나갔다. 다른 사람들은 그리지 않는 공백속에 너는 그림을 그려 나갔다. 너
는 여유 있게 닭의 모양을 오려 냈다. 네 손은 담뱃갑과 늘어  가는 술잔과 술을 가지고 유
희했다.
  어린이의 세계가 꿈에서 솟아 나왔다.
  기타와 새들을 위해 불어오는 한 줄기 신선한  바람 오직 침상과 작은 집 그리고 새봄의
푸르름과 햇포도주를 향한 정열뿐
  헤엄치는 사람들의 다리는 파도와 해변을 발가벗긴다. 아침이면 너의 푸르른 덧창은 밤을
닫는다. 밭고랑 속에 숨어 있는 메추라기는 지나간 8월들과 목요일들의 호두냄새를  풍긴다.
그때는 오색의 수확물들이 걷히고 농부의 아내들은 노래부르며 늪지대는 말라서 까칠해졌고
새들의 둥지도 말라 갔지.
  피곤한 해거름녘에 바라보던 제비의 쓸쓸한 모습
  아침은 푸른 과실을 깨우고 밀과 우리의 마음과 뺨을  황금빛으로 만든다. 손가락 사이에
불꽃을 쥐고 너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그림을 그린다.
  마침내 불길은 하나가 되고 구원을 가져온다.
  폴 엘뤼아르 <보여주기>
  자크 프레베르. 피카소와 프레베르는 1950년대에 만났다. 이들의 익살과 공상의 세계는 두
예술가를 서로 가깝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프레베르는 피카소에게 시들을 헌정했으며, 피카
소는 프레베르에게 다수의 콜라주 작품을 선사했다.
    피카소의 산책    동그란 진짜 도자기 접시위에 사과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과를 앞에
두고 사실주의화가 하나가 그것을 그리려고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헛되이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사과는 그리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사과는 나름대로 할 말이 있었다.  사과자루
안에서도 몇 번을 이리저리 돌았던 그 사과는 진짜 접시  위에서 다시 돌기 시작했다. 자기
몸을 축 삼아 눈속임을 하면서 움직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돌았다. 원하지 않는데도 사람들
이 그의 초상화를 그리려 하기 때문에 가로등으로 가장한 기즈 공작처럼 사과는 분장한 아
름다운 과실을 가장한다. 바로 그때 사실주의 화가는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사과의 모든  외
양이 그에게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가난에 찌든 불행한 사람처럼 갑자기 어느 날 자
비를 베풀어 겁을 주고, 겁을 주는 만큼 자비로운 자비와 자선을 표방하는 어떤 조직으로부
터 자선의 손길을 만난 가난한 사람처럼. 불행한 사실주의 화가는 문득 자신이 처량한 먹이
신세가 되었음을 발견한다. 엄청나게 많은 사상의 조직들의 먹이가. 계속 빙빙 돌아가는  사
과는 사과나무를 연상시키고 지상의 낙원과 이브 그리고 아담을. 물뿌리개와 과수원과 파르
망티에를, 계단을 캐나다와 헤스페리데스 자매들을, 노르망디와 레네르를 그리고 에피를  손
바닥놀이의 뱀과 사과 주스의 선언을 원죄를 예술의 기원을 스위스와 윌리엄 텔을 세계 중
력 전시회에서 수차례 상을 받았던 아이작 뉴턴까지 연상시킨다. 얼이 빠져 버린 화가는 더
이상 모델을 바라보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다. 바로 그 순간  피카소가 매일 자기 집에서 아
무 데나 산책하듯 그곳을  지나가다가 사과와 접시와 잠든  화가를 보았다. 세상에! 사과를
그리려 하다니,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사과를 먹어 버렸다. 그러자 사과는 그에
게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피카소는 접시를 깨뜨렸다. 그러고는 웃음으로 띠고 사라졌다. 그
러자 마치 이가 빠지듯 잠에서 빠져 나온  화가는 미완성의 화폭 앞에 자신이 홀로 있음을
발견했다. 깨진 식기조각들과 현실을 끔찍한 씨앗들 한가운데에
  자크 프레베르 <말들>
    시인 피카소    1935년부터 피카소는 글쓰기라는  새로운 분야에 착수했다. 그리고 몇
달 동안 화필을 옆에 제쳐놓고 오직 시작에만 전념했다.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쓴 그의 시
들은 지워 버린 부분, 얼룩, 그리고 데생과  채색으로 그득하다. 그는 희곡도 두 편  썼는데,
<꼬리 잡힌 욕망>(1941년)과 <네 명의 어린 소녀들>(1952년)이 그것이다.
    꼬리 잡힌 욕망(5막 2장)    장면은 불안 가족의 집, 부엌과 욕실을 겸한 침실인 하수구
에서 벌어진다.
  여윈 불안:불결한 나의 정열에 데어 생긴 화상은, 무지개의 금갈색 모서리 위에 영원힌 자
리잡고 있는 프리즘을 연모하는 동상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키고, 그 상처를  마치 축제 때
뿌리는 종이 테이프처럼 공중으로 날려보낸다. 나는 불의 창에  매달려 있는 얼어붙은 영혼
일 뿐. 초상화로 이마를 때리면서 나는 모든 자비에 대해  꼭꼭 닫혀 있는 창들을 향해 "고
통 사려."를 소리 높여 외친다. 딱딱하게 굳은 부챗살들로 넝마가 된 내  저고리는 눈물방울
에 들어 있는 질산을 삼킨다. 나는 해초처럼 팔을  늘어뜨리고 치렁거리는 치마처럼 끌면서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문간에서 큰소리로 외친다. 어제 '큰발'에게서  40전을 주고 샀던 설탕
졸임과자 봉투는 내 손을 불태운다. 나는  곪아 가기만 하는 관자루를 가슴에 품고  있는데,
사랑은 자기의 날개 깃털 사이에서 구슬놀이나 하고 있다.  내 욕망의 너저분한 회전목마에
서 말고 사자들을 빙빙 돌게 만드는 낡아빠진 재봉틀은 내  육심을 갈아 버린다. 그렇게 조
각난 내 육신은 죽은 채로 태어나 허기와 갈증으로 이글거리며 내 창문을 두드리는 별들의
얼어붙은 손 안에 산 채로 봉헌된다. 어마어마하게 쌓인  장작들은 체념한 태도로 자신들의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자, 수프를 만들어 보자. (요리책을 읽으면서) 스페인 멜론 반의 반의
반쪽, 종려기름 약간, 레몬즙, 누에콩, 소금, 식초, 빵의 속살, 약한 불로 익히기. 그리고 삭히
기. 똑같은 것을 제국주의 일본의 틀 위에 1,000개쯤 만들어 내기. 닭들한테 주기 딱 알맞을
만큼 얼어분을 때까지 기다리기. (잠자리로 삼고 있는 하수구 구멍을 통해 소리친다.) 언니!
언니! 언니! 빨리 와. 빨리 와서 상 차리는 일과 배설물이랑 핏자국으로 더러워진 빨랫감 접
는 일을 좀 도와 줘. 서둘러, 언니, 수프가 벌써 싸늘하게 식어서 거울 달린 옷장의 우리 깊
숙이에서 갈라지고 있어. 이 수프  가지고 오후 내내 나는  수천 가지 이야기들을 꾸며 냈
지. 이 수프가 그 이야기들을 언니의 귓속에 속삭여 줄거야. 언니가 해골의 보랏빛 꽃다발을
이야기의 마지막으로 삼겠다면 말이야.
  살찐 불안:(헝클어진 머리에 새까맣고 더러운 모습으로 낡은 프라이팬을 손에 쥔 채, 온통
감자튀김으로 범벅이 된 침대 시트에서 나온다.)  잉어가 뛰듯이 달리는 영구차뒤를 쫓아오
는 데에 필요했던 기나긴 인내심에 놀라워하면서 지금 아주 먼 곳에서 도착하는 참이야. 자
기 셈을 계산하는 데는 무척이나 꼼꼼한 뚱보 염색업자가 내가 가고 있던 길 위에다 놓아두
려 했던, 잉어가 뛰듯이 달리던 영구차 말이지.
  여윈 불안:태양.
  살찐 불안:사랑.
  여윈 불안:아, 언니는 어쩌면 그리 아름다울까!
  살찐 불안:오늘 아침에 우리 집 하수도 구멍을 나가자마자 바로  철장 옆에 박혀 있는 커
다란 신발 두 짝을 내 날개 사이에서 빼냈어. 그리고  얼어붙은 슬픔의 늪을 뛰어넘어 파도
에 몸을 맡기고 저 먼 곳 기슭까지 떠내려갔지. 하늘을 보고 누워  물에 떠 있는 쓰레게 위
에다 몸을 죽 뻗은 채 입을 벌리고 오랫동안 눈물을 받아 마셨지.  곡 감은 두 눈도 기나긴
꽃비의 월계관을 받았어.
  여윈 불안:저녁식사가 준비되었어.
  살찐 불안:즐거움이여, 사랑이여, 봄이여, 영원하라.
  여윈 불안:자, 거위고기를 자르고 그 속에 집어 넣은 다진 고기를 알맞게 덜어 가. 고통과
놀라움 한 다발이 벌써 우리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 있네. 그리고 권태의  싸늘한 귀 밑에
겁으 fajr고 죽어 버린 홍합의 껍데기들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고 있구나. (그녀는 빵조각을
들고 소스안에 넣어 적신다.) 죽에 소금이랑 후추가 덜 들어갔네. 우리  아주머니 한분은 검
은 방울새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놈은 밤새도록 옛 시절의 권주가를 부르곤 했지.
  살찐 불안:철감상어를 조금 더 먹을 테야. 이 음식의 에로틱한 매운 맛은 양념을 한 날 음
식을 좋아하는 나의 타락한 미각에 전혀 숨돌릴 틈을 주지 않는군.
  여윈 불안:불행한 축제날 가짜 무도회에서 입었던 레이스 달린  원피스를 화장실 장롱 제
일 위칸에서 찾아냈는데, 온통 좀벌레가 쏠았고 더럽게 얼룩진 상태로 벽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와 먼지 아래서 불 같은  고통으로 몸을 뒤틀고 있었어. 아마  우리 가정부가 지난번에
애인을 만나러 나갔을 때 입고 거기 둔 것이 분명해.
  살찐 불안:저기 좀 봐. 문이 살며시 열리고 있어. 누군가 들어오고 있는 거야. 우체부일까?
아니군. '파이과자'야. (파이과자에게)들어와. 우리랑 같이 식사하자. 네가 몹시 좋아할  거야.
큰발은 어떻게 지내고 있니? 오늘 아침에 '양파'가 창백한 얼굴에 엉망으로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는 오줌에 푹 젖어서 바늘이  이마에 관통해 상처를 입은 채  나타나지 않았겠니. 그는
울고 있었어. 그래서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를 치료해 주었단다.
  여윈 불안:너, 그 얘기 들었어? 암코양이가 지난 밤 새끼를 낳았단다.
  살찐 불안:우리는 새끼고양이들을 딱딱한 돌 안에 익사시켰지. 그 돌은 아주 아름다운 자
수정이었어. 오늘 아침에는 날씨가 매우  화창했어. 조금 쌀쌀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따듯했
어.
  파이과자:들어 보세요. 난 '사랑'을 만났답니다. 그는 무릎이 다 까진데다 이집저집 구걸하
며 다니더군요. 이제 그는 빈털털이가 되어 시외버스 차장 자리를 구하고 있었요. 슬픈 일이
기는 하지만 그에게는 도움이  될 거예요. 그는 항상  뒤돌아서 못되게 구는 사람이잖아요.
'큰발'은 나를 보고 싶어했지만 자기가 놓은 덫에  걸린 격이지 뭐에요. 절 좀 보세요.  너무
오랫동안 일광욕을 했나 봐요. 온통 물집 투성이예요. 사랑.  사랑. 자, 여기 100전짜리 동전
이 하나 있어요. 이걸 달러로 환전해서  제게 주시고 잔돈은 그냥 챙겨  두세요. 안녕, 영원
히! 축제 잘 보내세요. 나의 친구들! 좋은 저녁이군요! 안녕, 좋은 아침이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영원히 안녕!
  그녀는 치마를 들어올려 자기 엉덩이를 내보이고는 소리내어 웃으며 창문을 뛰어넘어  사
라진다. 그 통에 유리가 전부 깨져 버린다.
  살찐 불안:예쁜 아이야. 독똑하기도 하고. 그런데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어. 저러다간 끝이
좋지 않을걸.
  여윈 불안:사람들을 모두 불러모으자.(그녀는 트럼펫을 집어  들고 집합신호를 울린다. 그
러자 극의 모든 인물들이 달려 나온다.) 양파야, 너는  앞으로 나오렴. 넌 응접실 의자 여섯
개를 다 차지해도 돼. 자, 여기 의자들이 있다.
  양파:고맙습니다, 부인.
  살찐 불안:큰발아, 내가 내는 문제에 정답을 맞추면 식당에 있는 늘어진 램프를 네게 주겠
어. 자, 말해 보렴. 4더하기 4는 얼마지?
  큰발:너무 큰 수, 하지만 별 것 아닌 수.
  여윈 불안:훌륭해!
  살찐 불안:좋았어!
  여윈 불안:(병을 하나 따 그의 코앞에 내밀며 '둥근꼭지'야. 이건 무슨 냄새지?
  둥근꼭지 웃는다.
  여윈 불안:훌륭해! 다 이해했구나. 자, 깃털펜이 가득 든 통이다. 이건 네 거야. 행운이 함
께하길!
  살찐 불안:파이과자야, 계산서를 보고하렴.
  파이과자:나는 암퇘지 젖통 같은 내 가슴 속에 600리터의 우유를 가지고 있지. 그리고 햄
과 소의 위, 소시지, 삼겹살, 순대도 있어.  내 머리는 돼지고기 소시지로 뒤범벅이 되어  있
고. 또 연보라색 잇몸과 설탕이 들어 있는 오줌도 있어. 통풍성 관절염으로 조여든 내 손 안
에는 달걀 흰자가 들어있고 뼈다귀로 가득한  앙상한 골격과 쓸개즙도 있고 궤양과  누관과
연주장도 있지. 그리고 입술은 꿀과  접시꽃으로 뒤틀려 있어. 단정하고 께끗하게  차려입은
나는 사람들이 내게 준 우스꽝스러운  장신구들을 우아하게 걸치고 있지.  나는 어머니이자
동시에 완벽한 기쁨의 딸ㅇ기도 해. 나는 룸바를 출 줄도 안다구.
  여윈 불안:네게는 석유 양동이와 낚싯대를 주겠어. 그런데 그전에 넌 우리 모두와 함께 춤
을 춰야 해. 먼저 큰발과 함께 시작하렴.
  음악이 연주된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파트너를 바꿔 가며 춤을 춘다.
  큰발:낡은 이불들을 천사의 쌀가루로 싸고 요는 가시덤불 속에 뒤집어 놓자. 그리고 등을
다 밝히자. 우리 모두 힘을 다해 빗발치는 총탄에 대항해서 비둘기처럼 비상하고,  폭탄으로
무너진 집들을 이중으로 꼭 걸어 잠그자. ... 너! 너! 너!
  커다란 황금빛 풍선 위에 이러한 단어가 나타났다. '아무도' 막이 내린다.
    삽화가 피카소    선과 색채, 지면구성에 대해 날카로운 감각을 지녔던  피카소는 문자
와 인쇄물, 서예술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수많은  기회를 통해 삽화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다. 잡지표지, 포스터, 판화 등 그래픽 예술의 전분야  중 피카소가 손대지 않은 부분
이 거의 엇을 정도이다. 시인의 친구로서, 아름다운 도서의 애호가로서 피카소는 문학작품을
장식하는 삽화들도 다수 제작했다. 그의 판화작품들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나  뷔퐁의 <
자연사>등 고전문학에 사용되기도 했다.  한편, 피카소는 시 전체를  그만의 그래픽 문자로
변형하여 문학작품에 조형적인 리듬과 힘을 부여하기도 했다.
    피카소와 연극    화가에게 연극은 독창적이고 무궁무진한 표현수단이 될 수  있다. 무
대라는 공간에서 화가는 자신의 회화세계를 연출할 수 있으며 의상 디자인을 통해 자시느이
색채감과 새로운 형태미를 적용해 볼 수도 있다. 또한 문학이나 음악과 조화를 이루며 미술
을 창작하는 과정에서 감수성이 최대한 발휘되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서커스의 세계와
어릿광대들, 곡예사의 열렬한 찬미자였던 피카소는 무대세계와  일찍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
다. 전쟁 직후, 장 콕토는 피카소에게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단을 위해  의상과
무대장치를 위뢰했다. 이렇게 해서 피카소는 1917년에서 1924년 사이에 당시의 저명한 음악
가들과 함께 <퍼레이드><세뿔 짐승><메르큐르와 퓰치넬라> 같은 창작 발레극에 참여하게
된다.
  친애하는 친구여,
  <퍼레이드>에 관해 상세하게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셨지요. 그래서 이렇게 몇자 적습니
다. 두서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매일 아침 새로운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비평가들은  <퍼레이드>를 직접 보지도 않
고 혹평해댑니다. 그렇지만 절망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마당에,
비난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를 모욕하는 기사, 우리를 멸시하는 기사, 미소를 띠고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듯하지만 내심
은 우리를 헐뜯는 기사 따위들을 그저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입니다. 근시안을 지
닌 교양 없고 둔감한 사람들의 비난을 대하면서 나는 사티와 피카소와 함께 보냈던 황금 같
은 몇 달을 생각해 봅니다.
  내가 처음 <퍼레이드>를 구상한 것은 휴가중이던 1915년 4월(당시 나는 군복무 중이었습
니다), 사티가 자시느이 곡 <배 모양의 소곡>을 비네스와 함께 연탄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였습니다. 표제부터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요.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던  청중
들은 이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날 텔레파시 같은 것이 우리 사이를 오갔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함께 만들 수 있으리
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요. 1주일 후에 나는 전선으로 복귀했습니다. 떠나기 전에 나는  사
티에게 노트와 스케치를 한 묶음 넘겨주었습니다.  그가 '중국인'과 '미국인 소녀'와 '곡예사'
(당시 곡예사는 한 명뿐이었습니다) 등의 테마를 구상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들이었
지요. 그 스케치에는 해학적인 구석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권태감과 유랑
극단의 숨겨진 면모가 강조되어 있었지요.  중국인은 선교사들을 고문할 수 있는  자였으며,
타이태닉호에 승선한 미국인 소녀는 익사 일보 직전이었으며, 곡예사는 천사들과 깊은 내면
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티의 음악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면서 우리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
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퍼레이드>와 그 극의 내면을  동시에 들을 수 있었던 것
도 바로 그 차원에서였습니다.
  '매니저'는 초기 극본에는 존재하지 않던 인물들입니다. '뮤직 홀'의 번호가 하났기 넘어갈
때마다 익명의 목소리가 확성기(유랑극단의 축음기를  연극적으로 모방한 것으로, 현대식으
로 개조된 가면)에서 흘러 나와 그의 꿈 사이 작은 틈으로 등장인물들의 관점으로 독특하게
요약한 문장을 노래했습니다.
  피카소의 스케치를 보고, 우리는 그것을 신중하게  변형시켜 비인간적이고 초인간적인 성
격을 지닌 착색석판화 세장으로 연결하는 게 몹시 흥미로우리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무대 위에서 왜곡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실제의  무용수가 꼭두각시 취급을 당
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매니저를 표독스럽고  몰상식하며 상스럽고 떠들썩한  인물로 구상했습니다.
그들은 괴이한 형상과 행동양식  때문에 군중의 증오와  조롱을 받습니다. <퍼레이드>에서
이 대목은 오케스트라 석에 앉아 있는 세  명의 매니저가 악단이 잠시 쉬는 동안 입나팔을
하고 큰소리로 외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피카소와 함께 로마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레오니드 마신과 의상과 무대장
치를 안무에 맞추어 보려 했습니다. 그때 나는 피카소가 만들어 낸 매니저라는 인물들이 각
자 한 가지 음성만 가진다면 확성기를 통해서 듣는다 해도 지독한 불균형감과 충격을 줄 거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 인물당 세 개 정도의 음색이 필요할 텐데, 그것은  단순
성이라는 원칙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소리 대신  정적 속에 울리는 발소리
를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정적과 발 구르는 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우리의  인물들
은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잔인한 곤충과 매우 흡사했습니다. 그들의  춤은 계획된 사고이자
계속되는 헛디딤이었으며, 거북한 의상 때문에 자유롭지 못한 그들의 몸짓은 안무를 저해한
다기보다 오히려 전통적인 형태와 단절하고 자신의  영감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 즉 우리의 행진 리듬
을 따라 위치를 바꾸는 그 무엇에서 찾아야 했습니다.
  막바지 연습에 한창일 때였습니다. 무대장치가들이 마분지로  엉성하게 만든 해골탈을 말
들에게 씌웠지요. 그러자 소리 높여 울던 말들이 유령마차를 끄는 말처럼 기이한 모습을 띠
었습니다. 이를 보고 모두 웃었지요. 피카소는 이  효과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말들의 변신을 관중들이 그렇게 나쁘게 평가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등장인물 세 명,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네 명에 대해 말하는 것이 남아 있군요. 내가
한 명의 곡예사를 한 쌍의  곡예사로 대치했기 때문입니다. 마신은  곡예사들에게 흥미로운
안무를 지시했습니다. 사실주의적 연출에 따라 패러디한  이탈리아식 대무를 배치하는 것이
었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이 인물들은 매니저들보다 입체주의적입니
다. 매니저들은, 무대장치적이고 움직이는 초상화 같으며 구조적으로 특정한 양식의  안무가
부여된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네 인물은 실제  동작을 사실주의적인 힘을 상실
하지 않은 채 무용으로 변환합니다. 이것은 마치 현실의 사물에서 영감을 얻은 현대 화가가
그것을 화폭에 옮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대상의  양감과 질감, 색채와 음영 등이 지닌  힘을
그대로 살리면서 말이지요. ...
  장 콕토 <수탉과 곡예사>
    피카소와 도자기    도자기 예술에서 피카소는 조각가의 재능과 화가의 재능을 결합할
수 있었다. 1946년, 발로리스에서 도자기 제조장을 경영하던 라미에 부부와 만난 것을  계기
로 피카소는 이 새로운 분야에서 가능한 모든 기법들을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피카
소는 이 분야에서도 혁신을 불러일으켰고 전통을 뒤흔들었다. 그의 대담한 작품에 어안이벙
벙해진 전문가들은 이렇게 실토했다. "피카소처럼 작업하는 견습생은 평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도자기 전문가의 눈에 비친 피카소    예로부터 이 광활한 예술분야에서 수많은 선배들
이 이미 엄청난 발견을 시도했고, 포기하기도 했으며, 잊혀지곤 했다. 수세기 이전부터 많은
탐구가들이 비밀을 헤쳐 보고자 정열과 인내를 가지고 탐구해 온  이 영역. 이제 모든 것이
다 이야기되었고, 모든 표현형식들이 다 밝혀졌으며, 또 모든 창작의 가능성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아니다. 적어도 피카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교적 제한적인 상
황, 즉 화폭과 유성물감에 제한받아 온 이 화가는 갑자기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항상  움직이
고 있었고 공간과 팔레트를 해방시키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의 상상력에  갑자기 새로운
차원이 열렸다.
  피카소가 제작한 모든 작품들, 그것은 단지 그가 피카소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피카소라는 인물이 항상 깨어 있었고 새로이 자신
을 발견하는 사람이었으며, 그리하여 매순간 하나의 피카소에서 또 하나의 새로운 피카소가
탄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현기증 나는 속도로 진행된  엄청난 양의 내적 진화야말로
피카소의 다양한 기법과 양식, 놀라운 표현능력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닐까.
  피카소는 많은 것을 시도하고 제기했다. 그것들은 현실이자 수수께끼로 존재한다.  도자기
작업 역시 이 세계의 일부이다. 도자기 애호가들은 피카소가  그들의 눈앞에 제시한 작품들
에 매혹됨과 동시에 어떤 섬세한 재질, 어떤 예기치 못한  색감 그리고 어떤 흙반죽이 새롭
게 제시되었는가에 커다란 관심을 가질 것이다. 바로 이것이  피카소의 장점 가운데 하나이
다. 다시 말해서 피카소는 자신의 재능과 상상력을 다른  세대가 사용하는 방법에 적용하고
는, 그 와중에서 그가 제기하고 해다을 내리고 넘어선 문제를 타인에게 되묻는 것이다.
  이것은 피카소가 문제를 넘어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피카소는 놀라울 만큼 민첩하게
일했다. 그가 그저 기분이 내키는 대로 낡은 관념을 피하고  기존의 특을 버렸다는 것이 아
니다. 피카소는 자신이 지닌 특성에 자연스럽게 확장되면서 끊임없이  그 자신과 우주를 발
견하도록 했을 뿐이다. 바로 이런 과정에서 그의 예기치 않은 역동성과 창조력,  불꽃놀이처
럼 분출하는 능숙함이 나타난 것이다. 피카소의 작품을 보면 일단 놀란 다음 매혹된다. 그것
은 그의 작품이 한 영혼이 최종적으로 다다른 상태를 보여 주고 있어 그 발전과정이 우리에
게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상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특성을 가진 피카소의 도자기는 잊을 수 없는 한순간
을 만나게 해준다. 나아가 피카소는 스페인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며 우리에게 새로운 가르
침, 새로운 즐거움, 새로운 찬미의 동기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몇 달 동안 대가에게 배움을 얻고, 함께 작업하고  생활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
다. 이것은 우리가 그의 재능에 영광을 표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에게 전적으로 새로운 분야
였던 도자기 예술에서 피카소가 실현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그의 천재적 발명능력과 끊임
없이 솟아나는 창조욕, 즉각적인 대응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겸허함에 근본을 두고  있
다. 그것은 언젠가 풍요로운 수확을 거두리라는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황무지를 개
간하는 농부의 겸허함이다.
  조르주와 수잔 라미에 1948년 4월, 발로리스에서
    피카소와 투우    피카소의 영혼과 핏속에는  스페인이 깃들여 있었다. 스페인 출신의
고야처럼 피카소 또한 훌륭란 투우화가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말라가에서 아버지와 함께
투우를 관람했고, 그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피카소는 스페인에 다녀올 때마다 황소, 부
상 당한 말 또는 투우사의 죽음 등을 화폭에 담아왔다.
    화가 피카소, 투우사 도망겐    피카소는 내가 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서 항상 안달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날 그가 나의 은퇴소식을
듣게 된다면, 또는 내가 경기장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면, 피카소는 기뻐할 것이다.
그는 울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그는 자신의 운명을 다한 거야."  우리 투우사들은 아무리
반복해도 그 강조가 줄어들지 않는 끔찍한 불안 속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몰아넣는다. 우
리들은 번쩍거리는 옷을 입은 우리의 모습에 반해 접근하는 사람들과, 인간으로서의 우리에
게 접근하는 사람들을 직감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피카소  역시 투우사 같은
사람이다. 그 역시 자기의 명성이 발하는 빛에 끌려 온 나비를 구분할 줄 알았다.
  프랑스에서 경기를 벌인 투우사 중 피카소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황소를 주는  것을
거부한 사람은 아마도 내가 유일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물론 그것이 내 욕심에는 지
극히 못 미치는 것이지만, 몇  시간씩 피카소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와의 우정을 만끽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것은 거부하
고 있다. 만약에 내가 그를 위해 투우를 하고 그가 나를 모델로 그림을 그린다면 아마도 우
리 사이의 긴밀한 유대감은 손상될 것이며, 우리의 관계는  직업적인 차원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피카소를 가까이하게 되면서 나는 그의 성격 중 한 면모를 새로이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피카소가 자기의 최금 작품들을 보여 줄 때 이상할 정도로 조심스러워하거나 결벽증
을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투우가 끝난 뒤 피카소가 호텔로 나를
찾아올 때문 결벽증을 넘어서 부끄러움까지 느끼곤  했다. '존중', 아마도 이 단어가  우리의
이러한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피카소에게서 세인들의 상상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길거
리를 지나면서 언제든 마주칠 수  있는 보통사람들에게서 보는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간혹
관중석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눈에 띄면  내 머릿속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사진작가에게는 정말로 근사한 모델이 되겠는걸.' 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간다. 마찬가지고
원형경기장의 주위를 한 바퀴 돌면서 관중들의 모습을 둘러볼 때, 때때로 나는  '피카소적인
모델'처럼 느껴지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도 한다. 피카소는 내게 오스카 와일드가 예술적 창조
의 하나로 분류한 놀라운 미덕을 일깨워 주었다. "자연이 예술을 모방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사이에 우정을  싹트게 하고, 한층 더 나아가  우리의 관계를 지극히
인간적인 친밀감으로 이끌어 주었다. 우리는 직업이라는  끔찍스러운 진열장에서 전시를 마
치고 우리 자신으로 돌아와서야 진정한 평온을 찾을 수 있다. 그때 나는 피카소라는 인물이
내게 고취시켜 준 일종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동질감과  더불어 우리가 반말을
하는 데에는 우정이라는 지고한 이유가 존재한다. 예술은 절대  나이를 먹지 않으며 그것을
행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
  이제 나는 왜 내가 빛의 옷을 입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본질에 다가서기 위해서일 것이
다. 만일 투우사가 빛나는 투우복장을 입어서 고야나 피카소 같은 인물에게 어떤 영감을 줄
수 있다면 그는 하나의 위대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자족해도 좋을 것이다. 이유는 찾지 말자.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
  도밍겐 <황소와 투우사>
    피카소와 정치    예술에서 혁명적이었던 피카소는 일상생활과 정치적 입장에서도 혁명
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세계를  뒤흔들었던 20세기의 비극적인 사건들과  접할 때마다
피카소는 그 자신의 방법으로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스페인을 갈가리 찢어 놓은 비극적 내
란은 1936년에서 1939년 사이에 제작한 <게르니카>를 통해  표현되었다. 이 그림은 20세기
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중 나치  장교 하나가 게르니카의 사진을 가리
키며 물었다. "당신이 그린 것이오?" 피카소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아니라 당신들이 그
린 것이오!"
    게르니카 사태    1937년 5월,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제작하고 있을 당시에  그는 한
언론기관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피카소가 프랑코파라는 소문이 떠돌았던 것이다. 피
카소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스페인 전쟁은 민족과 자유에 거역하는 반동세력과의 투쟁입니다. 예술가로서 나의 삶은
오직 반동에 대한 투쟁, 예술의 죽음에 대항한 투쟁으로 점철되어 왔습니다. 내가  반동분자
들과, 더욱이 죽음과 동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어떻게 한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란이 발발했을 당시에 합법적으로 수립된 스페인 민주정부는 나를 프라도 미술관  소장으
로 임명했습니다. 나는 곧바로 그 직책을 수락했지요. 나는 현재 작업하고 있는 그림에 <게
르니카>라는 이름을 붙일 것입니다. 최근 작품들에서 나는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바다로
빠뜨린 순부에 대한 증오를 명백히 표현했습니다.
    공산당 입당    1944년 10월, 공산당  일간지 <뤼마니테> 1면에는 피카소가 공산당에
입당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 소식은  여론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그랑오귀스탱가의
화실로 찾아든 많은 미국 신문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공산당 입당은 나의 일생과 작품세계의 맥을 따라가 보면 극히  논리적인 귀결입니
다. 자부심을 가지고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순간도 나는 회화가 단순히  즐
거움만을 주는 기분전환을 위한 예술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데생
과 색채를 통해 세계와 인간에 대한 이해로 나아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지식을 통해
매일 조금씩 우리 모두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말이지요.  나는 가장 진실되고 가장 정
의롭고 가장 선한 것을 내  방법을 통해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위대한 화가들이 이미
알고 있었듯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진정한 혁명가로서 그림을 위해 항상 투쟁해 왔다는 사실을 스스로 의
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최근 몇
년 간 겪은 지옥 같은 나날은 예술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나 피카소라는 인간 자체가 투쟁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공산당을 찾았습니다. 사실  따지고 고면 나는 항상 그
들과 함께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아라공, 엘뤼아르, 카수, 푸주롱 등 나의 친구
들은 모두 알고있는 사실입니다. 내가 여태껏 공식적으로 입당하지 않았던 것은 일종의  '순
진함' 때문이었다고나 할까요? 나는 나의 작품, 즉 나의 마음의 입당으로 충분하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나의 당이었습니다. 공산당이야말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좀더 심도 있게 하고, 좀더 나은 앞날을 구상하기 위해  그리고 오늘을 사는 사람들과 미래
의 인류를 더욱 명철하고 더욱 자유로우며 더욱 행복하게 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 참여라는 것, 어딘가에 얽매인다는 데에  대한 두려움이오? 아닙니다. 오
히려 그 반대로, 나는 지금보다 더 큰 자유와 충만감을 느낀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항
상 하나의 모국을 찾고 싶어했습니다. 언제나 나는 유배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더 이상  그
렇지 않습니다. 스페인이 다시 나를 받아들이는 날을 기다리는 동안, 프랑스 공산당이 두 팔
을 벌려 줄 테니까요."
    피카소는 프랑스군의 장교가 아니다    "여러분들은 예술가가 대체 어떤것이라고 생각
합니까? 어떤 얼간이가 눈만 가지고 있으면 화가가 되고, 귀만 있으면 음악가가 되고,  가슴
속에 하프만 가지고 있으면 시인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천만에요. 그 정반대입니다.  예술가
는 하나의 정치적 인물입니다. 그는 전세계에서 벌어지는 격렬하거나 가슴 훈훈한 사건들에
대해서 항상 깨어 있으며, 그러한 사건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에 생명력을 주는  인물입니다.
어떻게 예술가가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습니까? 냉담한 상아탑에 갇혀 다
른 사람들이 그리도 풍부히 제공하는 삶을 외면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회화는 아
파트나 치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적과  싸우며 공격과 수비를 행하는
하나의 전투무기입니다."
  시몬 테리 <프랑스 서신>, 1945년 5월 24일
    피카소 미술관    피카소의 작품만으로 전시하는 미술관은 세 개나 된다.  그리고 그의
작품 100여 점은 전세계 유명 미술관에 흩어져 있다.  가장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인 피카소
는 전세계에서 숭앙받고 있다.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    친구 하이메 사바르테스와 피카소 자신이 기증한 3,000여
점의 데생과 석판화, 판화와 조각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이  미술관은 전기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피카소는 어린 시절에 부모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거주했다. 1901년에 파리에 정착하기 전
까지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미술학교를 다니며 수업을 받았다. 이 미술관에는 그의 작품들이
연대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호화스러운 전시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1890
년, 피카소가 아홉 살 되던 해에 그린 데생이다. 수많은 초기작품 외에도 청색시대와 장밋빛
시대의 회화작품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으며, 벨라스케스의 작품  <메닌>을 주제로 한 연작
도 있다.
    앙티브 피카소 미술관    1946년, 골프후안에서 피카소는 앙티브에 있는 그리말디 미술
관의 관장이던 도르드 라 수세르를 만났다. 피카소에게 미술관에  기증할 데생을 하나 부탁
할 생각으로 찾아왔던 수세르는 그에게 성의 꼭대기층에 있는 거대한 화실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다음날 피카소는 그 장소를  방문했는데, 돌아가는 길에는 그의 반바지  주머니에
열쇠꾸러미가 들어있었다. 1946년 8월과 9월 사이에 피카소는 이 거대하고 신선한 작업실에
서 쉬지 않고 작업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그는 정기적으로 '자신의' 미술관을 방문하러 오곤
했다. 말년의 어느 날, 피카소는 수세르에게 "미술관 이름을 그리말디 대신 피카소라고 하면
어떨까요?"라고 제의했다. 이 미술관에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연간 100만 명이 넘는 방문
객이 찾아온다.
    파리 피카소 미술관    파리 피카소 미술관은 1985년 9월 28일에 문을  열었다. 파리에
서 가장 오랜 구역인 토리니가에 위치한 살레 미술관은 17세기 건축된 호화로운 개인저택이
다.
  소장품은 203점의 회화와 158점의 조각품, 6점의 종이붙이기 작품, 88점의 도자기, 3,000여
점이 넘는 데생과 판화 등이다. 이들은 피카소가 소유하고 있던 것으로, 상속자들이  국가에
기증했다. 이 박물관은 루브르 미술관이나 테이트 갤러리만큼 크지는 않지만, 소장품들의 중
때요도 문에 전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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