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 가사(歌詞) 기능보유자.
석암은 사랑채에 독 서당을 차려놓고 자녀 교육에 힘쓰시던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분 중 문장가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문학과 예술을 접하게 된다. 석암은 7세부터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8세에 주산 보통학교에 입학하고 9세에 서예와 한문을 배우고 13세에 시문을 익혔으며 사서삼경을 수학하였다. 그때 이미 석암은 한시 250수와 50여편의 작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후 이렇게 천재적 재능을 보인 석암은 보통학교에 입한한 뒤 학교 공부에 회의를 느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본격적인 서당공부에 들어갔다. 천재적 기질을 보이던 석암은 15살 되던해 詩會에 나가 장원을 했는데 10살 위인 동서 김한술이 하객들 앞에서 시조창을 부르자 시조창에 매료(魅了)된다. 형용할 수 없는 시조가락에 도취된 석암은 신방에 와서도 시조창을 부를 정도로 빠져들게 된다
세상은 琴三尺이오 생애는 酒一盃라
西亭江上月이 둥두렷이 밝았는데
東閣에 雪中梅 데리고 滿月長醉하리라.
오늘 국악의 거성(巨星) 인 석암은 이렇게 동서 김한술씨를 첫 번째 스승으로 만나면서 탄생되었다
그 뒤 시조창에 재미를 붙인 석암은 레코드판을 수집하여 시조창을 배우기도하고 지방을 다니면서 시조창을 부르는 가객(歌客)을 찾아가 배우기도 했다. 또 오성현.김춘경 선생을 집으로 모셔와 시조창을 배우기도하고 석암의 재주를 소문으로 듣고 직접 찾아오신 이도삼·오윤명으로부터 상사별곡·처사가 등 가사와 가곡을사사를 받으며 하규일의 8가사와 가곡 남녀창 음반을 구입해 혼자서 익히기도 했다. 18세 되던 해 장성 백양사에서 그지방의 名歌 임재희에게 가사를 익히고, 2년후 전북 정읍의 대금 명인 竹民 전계문으로부터 가곡 여창을 배우며 기초를 튼튼히 했다. 23세가 되던 39년에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병성선생의 소리를 듣고 서울로 올라와 당대의 善歌 斗峰 이병성의 문하생이 되었다. 이때 석암은 두봉으로부터 너무 진도가 빠르다며 질책을 받을 정도로 빠르게 전수받았다 한다. 이후 12가사와 가곡을 모두 익힌 뒤 부안으로 내려간 석암을 두봉선생이 친히 찾아가시어 72일동안 부안에 기거하시며 가사와 가곡을 다듬어주시고 가사보와 남녀창 가곡보를 가르치셨다
이렇게 正歌(가사.가곡.시조)를 체득(體得)한 석암 선생은 해방을 전후해 정가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하며 송창섭, 김소란, 박향란, 김옥희 등에게는 가곡 여창을, 유종구,고민순에게는 남창을 전수시켰다.이리 향제 줄풍류의 예능보유자 강낙승도 이무렵 석암에게 12가사와 가곡남창을 배웠다. 석암 선생은 해방 이듬해 그동안 꾸준히 채보해온 가락을 정리하여 '조선창악보'를 간행했다. 이후 부안농고 국어교사로 임용되어 전주명륜대학, 김제고교를 거쳐 53년에 전주고교 교사로 전임한다. 석암은 전주고 교사시절 국악반을 만들어 시조를 가르쳤다. 또한 선생은 전주국악원 창립 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이후 석암은 단소·대금·북가락·범패 등의 채보에 심혈을 기울여 10여년이 지난 후 국악보를 간행했다. 이 악보는 18종의 악기 연주법을 비롯해 가사·가곡·시조와 판소리·민요·단가·가야금병창에 이르까지 국악분야의 연주법을 총망라해 우리 국악 연구의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전주고교를 끝으로 교직생활을 마친 석암은 풍류객으로 시조와 가사를 부르며 전국을 순유하여 ‘정삿갓’이란 별명을 얻었다. 한번 집을 나가면 몇달씩 집에 소식을 전하지 않기를 예사로 하였다. 오죽하면 집에서 ‘모친위독’이란 신문광고를 냈으랴. 하지만 이때 석암은 지방에 따라 각기 다른 시조의 가락을 통일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경제·내포제·완제·영제·반영제·원제 등으로 각기 다른 가락을 하나의 체계로 통일해 '석암제'를 완성한 것이다.
석암은 이후 김천에서 대전으로 거처를 옮겨 61년 대한시우회를 결성, 63년 대한시우회를 창설하였다. 또 전국에 지부와 지회를 조직하고 전국에 시조·가사·가곡을 보급해 국민개창운동을 벌이는 한편 매년 전국시조·가사·가곡 경창대회를 열기 시작했다. 석암은 75년 7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41호가사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자 그해 11월에는 국립극장에서 가사·가곡발표회를 가졌으며 79년에는 대한정악회를 창설하였다.
이처럼 석암 선생은 15세에 시조창을 들은 인연으로 국악에 발을 디뎠다. 시·서·화 삼절(三絶)의 대가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국악 사랑의 마음으로 정악 보급과 체계화 작업, 석암제 개발 등에 한 평생을 헌신해, 이제 우리나라의 '악성'으로 불리워 지게 된 것이다.
저서:<가사보>,<시조보>,<가곡보>,<조선창악보>,<아악보>,<국악보>,<가악보>,<증보주해시조보>,<시호록> <금립시집직역본>,<고금천문학>,<석암시문집1-4>,<명심보감직역본>,<만방길흉결>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