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남공 최부 錦南公 崔溥 1454년에 나주(나주군 동강면)에서 출생하여 조선 성종조(1469~1494)에 공직활동을 한 최부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다.[동국통감(東國通鑑)]과[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의 편찬에 참여 했고, 왕명(王命)으로 [표해록(漂海錄)]을 저술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금남공 최부는 본관本貫이 나주羅州인가? 탐진耽津일까? 조선의 공식문서에서 그의 본관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조선조 성종 13년(1482)에 실시한 알성문과 입격방목(합격자 명단)에 최부는 자는 연연, 갑술생, 本耽津 居羅州라고 했고,성종17년(1486) 중시문과 입격방목에도 최부의 자는 연연, 갑술생, 본탐진 거나주, 임인 일성급제, 父 成均進士 澤이라고 명시했다. 두말이 필요없이 최부는 탐진최씨이다. 최부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어서 아들이 없다고 표현된 기록도 있다. 최부는 정실에게서 딸만 3명이 있고 적자가 없었으며 후실에게 서자 최적崔迪을 얻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서자庶子는 계보에 인정하지 않은 듯 하다. 그럼에도 탐진최씨에는 최부의 시호를 따온 금남공파가 있다. 금남공파의 계보는 무엇이며, 입격교지를 소장해온 성지공파는 어떤 계보이며 또 금남공파와는 어떤 관계일까? 성지는 최부선생의 출생지 마을 이름이다.jgc ■ 진사 최택 進士 崔澤 최부의 부친은 진사 최택임이 중시문과 입격방목에서 확인되었다. 최택의 묘소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리에 있었고, 최부의 묘소는 그의 처가가 있던 해남군에 있었으나 그의 후손들(탐진최문)이 1947년에 최택의 묘소가 있는 무안군으로 이장했다.몽탄면 이산리는 최부가 태어난 나주시 동강면과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있는 강건너 마을이다. 나주최씨 保寧派에 의하면 그의 中始祖인 嘉善大夫 崔論金은 조선 명종조(1545~1567)의 진사 최택의 후손이라고 했다. 최택의 본관이 탐진이므로 나주최씨보령파는 탐진최씨에서 분파했다는 논리는 성립된다. 그러나 최택의 아들은 최부 한사람뿐이며(표해록에 3월29일 기록에 의하면 최부에게는 아우가 있다) 최부는 적자가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최논금의 계보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긴다. 최택에게 형제가 있어 나주최씨로 분파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형제가 없다고 최부의 외손 유희춘은 기록했다. 그리고, 최택이 명종조의 인물이라면 시기적으로 세종조의 인물 최정원의 아들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성종조의 인물 최부의 부친도 될 수 없다. 최정원과 최부가 활동한 시기는 1400년대이기 때문이다. 최택은 명종조 (1545~1567)보다 100년정도 이전의 인물이어야 타당하고 세 인물의 관계도 합리적으로 성립된다. 보령파 가계보가 년대 기록을 잘못한 듯 싶다.jgc ■ 진의부위 최정원 進義副尉 崔井元 최정원은 최부의 祖父로 알려져 있다. 최부의 조부는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부의 외손인 유희춘이 그의 저서인 <眉巖日記>에서 최정원이라는 최초의 언급을 했다. 최정원의 묘소는 최택 최부의 묘소에서 먼 거리인 나주시 삼영동 내영산에 있다. 최정원의 묘소가 아들 최택의 묘소가 있는 몽탄면이나 손자 최부가 출생한 동강면과 멀리 떨어진 곳에 따로 있는 이유가 궁금하다. 참고로 나주최씨 고양파와 청양파의 中始祖는 조선 세종조(1418~1450)에 進義副尉(武班 從九品)를 했던 최정원이라 했다. 고양파의 주장대로라면 최정원은 탐진최씨이면서 나주최씨이기도 하는 이중본관을 지닌 모순이 있다. 나주최씨 고양파와 청양파가 그들의 중시조를 최정원의 독자인 최택과 독손인 최부가 있었음에도 굳이 최정원을 중시조로 모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다. 최정원의 선대는 공식적으로는 기록이 없었다. 그러나 탐진최씨 준량공파에서 최정원 3대를 그들의 계보에 편입시켰다.jgc ■ 나주최씨는 탐진최씨와 어떠한 연결고리가 존재하는가? 결론은, 나주최씨가 탐진최씨 최택에서 분파했다고 하지만 나주최씨 분파 안에서도 이설이 존재하여 탐진최씨와 나주최씨와의 관계에 통일된 증빙자료가 없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나주최씨가 최부의 유일한 아들인 최적(崔迪)의 후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나주최씨가 최적의 증조부인 최정원이나 조부인 최택을 중시조로 모신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끝.
■ 최부(崔溥)선생은 부인 해남정씨 사이에서 딸만 셋을 두었다. 두 번째 부인 함양박씨와는 아들 최적(崔迪)만을 두었다. 최적은 손자 최만령(崔萬齡), 증손 최번(崔蕃), 현손 최용해(崔龍海), 최두남(崔斗南), 최용운(崔龍雲)으로 이어졌다. 최용운(崔龍雲)이 나주최씨로 分籍했다. <강원구의 최부선생 자료> 최용운(崔龍雲)은 보령파일까? 고양파/청양파일까?jgc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