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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조퇴를 하고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내일 서울에서 조카의 결혼식이 있어 전날 올라가기로 한 것이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승객이 별로 없어 버스 안은 을씨년스러워 보인다.
차 안에 설치된 텔레비전에서는 서울의 모 대학교수가 강원도 삼척 산간오지마을에 영상취재를 나간 것을 방영하고 있다. 대여섯 가구쯤이나 될런지 아주 소박한 마을 사람들의 생활풍경이 정겹다. 70대쯤으로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밭을 갈고 있다. 할머니는 목에다 쟁기 줄을 매고 앞에서 끌고,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힘들세라 조심스레 쟁기질을 하고 한다. 할아버지는 이젠 할머니는 소가 되었고, 자신은 소를 부리는 기술자가 되고 말았단다.
가까운 곳에는 그분들이 사는 조그만 집이 있고, 포장 되지 않은 마당에는 두 살배기 사내 애기가 윗도리만 입은 채 마당에서 혼자 놀고 있다. 교수가 다가가자 낯이 설어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밭을 갈고 있는 할머니에게로 아장거리며 다가간다. 그러자 할머니는 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아이를 안고서는 다시 밭갈이를 계속하였다.
잠시 후 마을의 할아버지들이 집으로 방문하였고, 그들 부부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할머니는 부엌에서 막걸리와 안주거리를 내어 놓는다. 노인들은 시원한 막걸리를 마시며 즐거워하고, 노인 한 사람이 아이를 안고 엉덩이를 가볍게 두들긴다.
아이는 마을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태어난 아이라며 매우 즐거워들 한다. 나도 곁에 있다면 녀석을 안아 보고 엉덩이도 두들기며, 덜 익은 미더덕처럼 생긴 녀석의 고추라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그램이 끝날 즈음 휴대전화 문자 두 개가 들어왔다. 오늘은 분위기가 그래서 마치고 막걸리나 한잔 하자는 애기였다. 왜 사람들은 비가 오면 막걸리 생각들이 나고, 그러한 분위기가 좋다는 것일까? 하긴 고기들도 비가 오면 흥분하여 잘 잡히는 경우도 있다. 다들 비가 오면 마음이 들뜨는 것인가 보다. 그러나 나는 좋아할 기분이 아니다. 버스는 벌써 서울의 중간지점까지 와 버렸다.
충청도를 지날 때는 비가 오지 않더니 경기도 지역을 지나면서 비가 많이 쏟아지고 있고, 차들의 흐름도 점차 느려지고 있다. 비로 인하여 차창 밖의 풍경도 볼 수 없어 매우 심심하자 문자를 보냈던 친구들이 생각났다.
장난기가 발동하여 휴대전화를 꺼내어 문자를 보냈다. ‘술 다 먹지 말고 남겨두기 바람. 서울 거의 다와 감. 부러워 죽겠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막걸리가 살얼음이 얼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데 그 맛이 기가 찬다'는 것이다. 누굴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거의 다 온 고속버스를 되돌릴 수도 없는 일. 그래서 '술동이를 가지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농담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친구에게선 문자가 왔다. '술은 많이 남아있으니 문자와 함께 보낸다'고... 이놈의 술은 왜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옥죄어 매는 건지. 어제와 그저께도 적지 않게 마셔댔는데 그래도 생각나게끔 하는 마력이 있는 걸 어쩌나. 별로 도움도 안주면서...그래도 저번 건강검진에서 간 기능에 대한 면죄부를 받았다는 사실이 명분이기도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8시가 가까웠다. 버스를 내리면서 버스 기사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비가 많이 오는 날씨에 나를 안전하게 서울까지 데려다 준 배려에 대한 호의였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 학교와 가까운 곳에 방을 얻어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잠을 청하여 보지만 잠자리가 낮설어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새벽 서너 시까지도 골목엔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장사를 마치거나 업소에 다니는 사람들 이려거니 하고 잠을 청하려 노력해 본다.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아침 6시가 되자 습관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장마철 날씨는 언제든지 비가 내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뒷산을 향하여 골목길을 오른다. 집들이 거의 다 3,4층의 붉은 벽돌로 지은 빌라들이 많다. 여기가 그 유명한 신림동 고시촌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빌라들이 커서 학생들이 살기에는 부담이 있어 보였다. 굽은 골목길을 오르다 갑자기 높은 계단이 앞을 가로 막는다. 경사가 심하다는 이야기는 고도가 변하는 것으로, 우리가 산을 오르내릴 때도 가파른 것은 그 것으로 인하여 고도차가 순간적으로 심해지는 것이다.
집집마다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감나무가 한 그루씩 심겨져 있다. 물론 간혹 살구나무도 있지만, 과일나무로선 감나무가 거의 집집마다 있는 편이다. 그렇다고 정원을 가진 집들이 아님에도 그런 것은 아무래도 무슨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십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서울이란 노래에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고, 을지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라는 가사가 있었었다. 그런데 여긴 관악구인데다 그런 의미는 아닐 테고...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아 보인다. 옥상에다 호박덩굴을 올리고, 거름기 하나 없어 보이는 좁은 공터엔 해바라기도 심겨져 있다. 마을버스가 동네 높은 골목길까지 다닌다. 올라오다가 차가 서있어 떠나고 나면 도로를 건너려는데 가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도로를 건너다 아래를 바라보니 트럭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좁은 길이라 적어도 100m 정도의 전방을 확인하고 나서야 운행을 해야 할 형편이었다.
집들이 끝나는 지점에 등산로가 나있다. 땅이 젖어 미끄럽지만 기분은 상쾌하다. 나는 왠지 밖에만 나오면 기분이 까닭없이 좋아지는 것은 아무래도 누구 말처럼 역마살이라도 낀 것일까?
동네 뒷산이지만 숲에 제법이나 울창하다. 간밤에 내림 비에 날개가 젖었는지 산새들이 아침부터 구슬프게 울어댄다.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안개에 젖어 온통 회색이다. 등산로는 그런대로 잘 정리되어 있다. 비온 뒤라 그런지 다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런대로 호젓한 기분이 들어 좋다. 10여분을 오르자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가볍게 팔다리운동과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관악산이 어디일까? 어제 서울대역을 지나쳐 왔으니까 남쪽방향이라고 판단되었다. 멀리 떨어진 곳에 어렴풋이 관악산의 산자락이 보였다. 안개로 인하여 산 정상부위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내가 관악산을 올랐던 게 언제더라 생각해 본다. 벌써 까마득한 옛날 일이다. 가까운 곳이라면 산중턱까지라도 오르고 싶은데 여기서는 너무 멀다.
나는 서울의 산들이 좋았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자주 와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도 하지만, 내가 다녀 본 건 지금 바라보는 관악산을 한번, 북한산은 두번, 그리고 도봉산을 한 차례씩 종주를 하였었다. 그리고 청계산과 남한산성을 갔었다.
관악산은 관악구, 금천구, 안양시 그리고 고양시에 걸쳐 있고 봄이면 벗 꽃과 철쭉이 많이 피는 산으로 높이는 629m이다. 북한산은 강북구, 은평구, 성북구, 종로구와 경기도의 고양시에 걸쳐 있고, 최고봉인 백운대는 836m, 암벽등반 코스인 인수봉은 810m이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청뫼회원들과 북한산 종주를 한 차례 하였었다. 도봉산은 도봉구와 의정부시 그리고 장흥면에 걸쳐있는 산으로 자은봉이 739m로 제일 높은 봉으로 가을 단풍이 좋다.
또한 예전 정치인들이 자주 올라 이름이 알려졌던 청계산은 높이가 618m인데 서초구, 성남시, 과천시, 의왕시에 둘러쌓였다. 산아래에서는 맛집들이 즐비하여 등산객들의 발걸음을 사로잡는다. 그리고 광주시와 성남시에 맞닿아 있는 남한산성도 가볼만한 곳이다. 성문까지 차로 갈수도 있지만, 나는 성남시 남한산성역으로 접근하여 올랐다 마장동 방면으로 내려 오기도 하였었다. 올해는 사정이 허락하면 도봉산 종주를 한번 더 해보고 싶어진다.
한참동안 서울의 산들에 대한 추억에 잠겨 있다가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구부러진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 서울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살펴보며 내려오고 있었다.
거리는 어디를 가나 거의 비슷해 보인다. 비 맞은 고양이가 차 밑에 숨어 있는 것이나, 담배를 피우다 하수구에 던져 넣는 더벅머리 청년, 택시에서 비틀거리며 내려 택시기사 더러 사장님이라고 인사하는 예의바른 사내, 눈을 휴대폰에 대고 심봉사 걸음 걷는 중학생, 꼬쟁이 같이 바짝 붙은 바지를 입고 엉덩이 흔들대며 걷는 아가씨의 모습들이 여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들이다.
대로변으로 나왔다. 아직은 이른 아침이라 차량이나 사람들의 행렬이 뜸하다. 하천을 내려다보니 제법 잘 정비되어 있고, 흐르는 물도 깨끗해 보인다. 창포도 심겨져 있고, 수양버드 나무도 서있다.
부지런한 장사 집들은 벌써부터 영업 준비를 하려는지 부산을 뜬다. 주택가를 접어드니 비슷한 집들이 많다. 여기가 거긴 것 같고, 나아갈 길이 지나 온 길 같아 보인다. 집들이 비슷하고, 골목들이 같아 보여 마치 미로에 들어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숙소를 찾기 위하여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길은 물으니 매우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서울 사람들은 다 깍쟁이들인 줄 알았더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생각하니 그래도 정 붙이고 살면 살아질 것 같다는 마음도 든다.
다시 큰 길을 돌아 나와 관악산을 보았다. 안개가 산허리를 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안개가 위로 올라가면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의 산들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막걸리 잔 정겹게 권하는 산 친구가 있는 곳이 좋고, 또한 그들과 함께 땀 흘려가며 즐거움을 나누는 산행을 계속하고 싶다. 다음 주말이면 그들과 또 다른 행복한 동행을 하게 될 것이다. 벌써 부터 그들의 활기찬 모습이 눈에 선하고 그 날이 빨리 다가 오기를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