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보드라운 두 뺨을 매만지며
고마웠다고 미소지어줘
그의 빈약한 등을 쓸어내리며
미안하다고 이야기해줘
그를 다정히 끌어 안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여줘
「난 조슈아를 지키려고 태어났대.
그 애가 백치가 되지 않도록 내가 백치가 되었고
그 애가 죽지 않도록 내가 대신 죽었고
그 애가 데모닉이어야 했기에 난 손상되었어.
-이브노아 아일첸브리스 폰 아르님.
룬의 아이들 데모닉 7권 제 13장 sunburn, 197p 자신이 자신을 연기하다 중 」
부제 : 검은 휘장 뒤 영원한 약속 속에서
글 : needlegrass
옛날 옛날에
곱디고운 금발의 공주님이 살았답니다.
그 공주님은 자신의 생일날
회색머리칼을 지닌 앳된 왕자님의 품속에서
돌아가셨어요
아아 슬퍼라 우리 불쌍하신 공주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하지만 공주님은 역시나 공주님!
돌아가시기 전 낭만적인 한마디를 남기시는 걸 잊지 않으셨답니다.
공주님은 말씀하셨어요,
왕자님에게만 들릴 정말이지 작은 목소리로,
아름다운 그 목소리로
다른 남자에게 보내는 세레나데를.
그를 사랑하니까 그에게 안아달라고 해
그리곤 공주님은 왕자님께 미소지어주셨습니다.
그건 마지막 공주님의 말이었죠.
오늘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그 낭만적인 공주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랍니다.
비취반지성의 아침은 무척이나 맑았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성의 사람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고귀한 지위를 지닌 자신들의 주인을 위한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언제나 품위 있어 보여야 하는 그 크고 우아한 성을 청소하기 위해, 성을 둘러싼 반지모양의 웅장한 정원을 손질하기 위해, 하녀와 정원사들은 일을 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이렇게나 바쁜 성 사람들 중에도 딱 한사람 예외가 있었다. 풍성한 금발머리를 어깨 언저리까지 길은 무척이나 예쁘고 활발해 보이는 소녀.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새하얀 구두를 손에 든 채로 그 소녀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새하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성 사람들은 모두 소녀를 좋아했다. 소녀의 밝고 명랑한 성격, 쾌활하고 좋은 사교성, 초롱초롱한 예쁜 눈망울, 가느다란 목에서 나오는 높은 음의 아름다운 멜로디까지 소녀가 지닌 모든 재능들이 소녀를 돋보이고 더욱더 아름답게 해주었다. 소녀는 춤을 잘 추었다. 정원에서 맨발로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소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예쁘고 근사해서 소녀가 춤을 출 때면 하녀와 정원사들이 몰려와 구경을 하곤 했다.
이브노아 아일첸브리스 폰 아르님.
소녀의 이름이었다. 이브는 고귀한 지위를 지닌 분의 딸이었다. 그녀는 부러울 것 없이 자랄 수 있는 최고의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다. 더불어 소녀는 총명하기까지 했다. 이브는 정말이지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 어린 나이에도 일 년 마다 열리는 성의 파티에 모인 귀부인들의 얼굴과 이름을 모두 기억하고 구별할 수 있었다. 이브는 행복한 아이였다. 부모님으로부터의 사랑을 무럭무럭 받으며 자라났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지고 있었다. 공주님 못지않은 커다란 침실도, 전 대륙에서 무척이나 값 비싼 악세사리도, 최고의 제봉사가 만든 화려한 드레스도. 하지만 이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행복이 무너진 일이 일어난 건 그녀 나이 다섯 살 때의 늦겨울, 그날의 속삭임 때문이었다.
* * *
2월 28일, 그날도 아침은 무척이나 맑았다.
이브가 손으로 문지른 후 바라본 창문의 바깥세상에는 눈이 덮여 있었다. 늦겨울이라 눈이 오는 일은 드물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함박눈이 내려서 하녀들도 정원사들도 모두들 옷을 따뜻하게 덧대어 입고 있었다. 이브는 창문에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그리고는 그 부분에 보물 상자를 그려 넣었다. 별다른 뜻이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오늘은 왠지 모르게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 중에서 최고로 기분 좋은 일이.
이브는 테라스에서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이브는 고귀한 지위를 지니신 아버지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예뻐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녀들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이브에게 무척이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거울을 통해 바라보는 이브의 모습은 조그마한 겨울요정 같았다. 머리에 찌른 눈꽃모양의 장식품과 하얗고 파란 꽃들이 잔뜩 수놓아진 레이스가 많이 달린 활동하기 편한 드레스와 촘촘히 아르님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흰 장갑 등이 그녀를 더욱더 요정처럼 보이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가슴언저리에 보물 상자가 새겨진 어른스러워 보이는 브로치를 했다. 이브는 오늘 무척이나 고귀하고 우아한 아가씨 티가 났다.
이브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숨바꼭질이었다.
오늘도 말썽꾸러기 꼬마 숙녀께서는 수업을 빼먹고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하고 있다는 건 상대가 동의를 했을 때의 표현이니까 일방적으로 하게 했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브와 함께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상대는 세상에서 숨바꼭질을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이브 아가씨! 어디계세요?”
‘내가 아가씨 때문에 못 살아’ 라고 얼굴에 써 붙여놓은 중년의 여자하나가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새 빨게 져서는 이브를 찾고 있었다. ‘내가 일만 아니면’ 이라고 중얼거리는 듯 입술이 약간 삐죽 튀어나왔다가 한 번 더 큰소리로 이브를 불러본다. 대답 없는 이브를 찾느라 그녀는 표정이 울상이 되었다.
“아가씨 하녀장님께서 찾으시는데요.”
비취반지 성에서 어렸을 때부터 일해 왔던 하녀가 이브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는 이브 어머니의 수발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하녀는 활짝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밝은 사람인데 가끔가다 주방에서 쿠키를 몰래 가져와서는 이브에게 건네주곤 했다. 이브는 웃는 얼굴로 그녀가 자신의 조그마한 손에 꼭 쥐어주는 쿠키를 무척 좋아했다.
“쉬잇! 오늘은 교양공부를 하는 날이란 말이야. 그거 무지 무지 따분하다구”
이브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어린아이답게 투덜거리며 자신의 뽀얀 뺨을 통통하게 부풀렸다. 그리고는 복숭앗빛 입술에 그 작고 보드라한 검지 손가락을 올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의 제스처였다.
이브가 숨어있는 뒷간으로 하녀장이 다가왔다. 이브가 숨소리를 죽이고 키득거리며 웃고 있을 때 하녀장이 뭔가 낌새를 챈 모양인지 눈썹을 올리며 매섭게 물었다.
“너희들 아가씨를 못 보았느냐?”
그 나름대로 하녀장은 도도한 사람이었다. 중년에 경력도 꾀나 있을 법한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이브를 다루는 데에는 무척이나 서툴렀다. 그도 그럴 것이 하녀장과 이브의 성격은 상극이었던 것이다. 애교를 조금만 부리면 늘상 휴식시간을 주곤 하는 다른 시간의 선생님들과는 달리 하녀장은 그다지 유순하지 못했다. 그녀는 게으른 것을 극도로 혐오했고 늘 시간을 정확히 지켰다.
그런 그녀가 말썽꾸러기 공작님의 아가씨의 교양공부를 담당해야 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녀장이 계속 다그치자 하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브에게 닥쳐온 위기의 순간이었다.
“아가씨께서는 방금 전 주방으로 가 숨으셨답니다.”
이브 어머니의 수발을 담당하고 있는 하녀가 하녀장에게 거짓말을 했다.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하는 거짓말이 수준급이었다. 그녀는 하녀장이 보지 않는 틈을 타 이브에게 생긋 하고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다른 하녀들은 나중에 불같이 화를 날 하녀장의 모습을 상상하며 벌써부터 더럭 겁이 나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녀는 다정다감한 성격과는 달리 말재주가 좋아서 얼마든지 대처할 수 있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이브에게 ‘이제 다른 장소에 가서 숨으세요, 아가씨’ 라고 속삭여주었다.
이브는 ‘고마워’ 라는 말을 남기고 뒷간에서 창문을 넘어 정원으로 향했다. 분명히 하녀장이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아가씨 제가 교양은 항상 어떤 것이라고 말씀드렸죠!’하며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브는 드레스를 발목 위까지 끌어 올리고 새하얀 정원을 달렸다. 여기라면 당분간 누가 그녀를 찾으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이브는 오후 내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무엇을 할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혼자선 눈싸움을 할 수 없으니까, 그래 눈사람을 만들자.
마음을 정하고 눈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눈이 소복이 쌓인 곳에 쪼그리고 앉아 눈뭉치를 하나 만들었을 때였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조그마하게 속삭임처럼 이브의 귓가에 들려왔다.
「안녕, 귀여운 아가씨」
처음에 이브는 이게 손님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자기에게 존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녀나 정원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오늘은 손님이 오시는 날이 아니었다. 이브가 당황해 한다기보다 신기해하고 있을 때 그 목소리가 속삭임이 되어 다시 한 번 이브의 귓가에 닿았다.
「아가씨 난 아가씨처럼 겨울요정이야.」
“나처럼?”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향해, 허공에 되물었다. 오늘 하녀언니들이 이브를 겨울요정이라고 불러주긴 했지만, 이브는 진짜 겨울요정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겨울요정이라고 말한 이 목소리의 주인은 정말 무식한 녀석일 것이다, 라고 이브는 생각했다. 진짜 겨울요정이라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어선 안 되는 건데 이 요정이라는 녀석은 서슴없이 이브를 진짜 겨울요정이라고 착각하고 말을 걸고 있지 않은가? 요정으로서 실격인 녀석이거나 가짜 겨울요정이다, 라고 이브가 결론지었을 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귀여운 아가씨 재미있는 상상을 하고 있구나 하지만 나는 정말 겨울요정인걸?」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어?”
겨울요정이라는 녀석의 말에 이브는 솔깃해졌다. 이건 정말이지 동화책속에서만 나오는 그런 요정 같지 않은가. 남의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정작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나타날 때면 소원 같은 것을 들어준다는 정말이지 진짜, 진짜 요정.
이브가 신기해하고 있을 때 목소리가 한 번 더 이브에게 확신을 주었다.
「물론이지. 나는 귀여운 아가씨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다음번엔 나한테 무슨 말을 할지도 알고 있는 걸.」
이 녀석은 진짜 요정이다, 라고 이브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 겨울요정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이브가 갖고 싶어 하는 보물을, 고귀한 지위를 지닌 아버지마저도 손에 넣어주지 못한 보물을 이 녀석은 이브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브는 넌지시 요정에게 물었다.
“그럼 내가 이다음에 무슨 말을 할 것 같아?”
겨울요정은 뜸을 드리다가 말했다. 방금 전보다는 조금 낮은 목소리로.
「나한테 얻고 싶은 게 있겠지, 안 그래?」
이브는 겨울요정이 이 말을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면서 되물었다.
“뭐든, 뭐든지 들어줄 거야?”
「그래. 뭐든 들어줄게. 말해보렴 꼬마아가씨, 아가씨가 갖고 싶은 보물은 뭐니?」
뭐든 들어준다고 겨울요정이 말했다. 이제 성공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소원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브는 교양공부를 빼먹고 정원으로 나오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방금 전에 하녀장에게 붙잡혔더라면 이브는 지금 영락없이 테이블에 앉아 따분한 교양수업을 듣고 있어야 했을 터였다. 이브는 마음속으로 자신을 도와준 하녀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워했다. 그리곤 말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이브는 자신의 소원을 겨울요정에게 이야기했다. 이브가 갖고 싶어 하는 보물, 그건…
“동생을 갖고 싶어!”
이브의 꿈에 부푼 외침을 듣고, 자기 자신을 겨울요정이라고 말한 목소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어조로 속삭였다.
「그래 좋아 꼬마아가씨, 아가씨의 보물은 동생이구나. 그럼 그 동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겠네?」
시험해 보려는 듯한 목소리. 여기서 물러서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이브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돌이킬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이제는 처음으로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할 수 있어! 뭐든지.”
이브의 열띤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목소리는 지금쯤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겨울요정의 탈을 쓴 채로.
「그럼 아가씨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 아가씨는 지금 이 순간부터 백치가 되어 주어야 해. 뭐든지 한다고 나하고 약속했지, 할 수 있겠어?」
“백치?”
이브의 조그마한 연분홍빛 입술에서 낯선 발음이 흘러 나왔다. 그건 무척이나 무섭고 자기와는 관계없는 단어. 불쌍한 사람의 모습이 생각나게 하는 단어였다.
「그래. 아가씨가 백치가 되어 준다고 약속하면 동생이 생기게 해줄게. 할 수 있지? 뭐든지 한다고 약속해놓고 못한다고 할 참이야?」
목소리는 이제는 속삭임이 아니었다. 겨울요정의 탈을 쓴 목소리의 주인공은 화가나있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거의 외치듯이 했다. 목소리의 외침이 커져만 갔다. 백치가 되면 동생을 가질 수 있다. 보물을 얻기 위해 지불해야하는 대가는 이브 자기 자신이 백치가 되는 것. 백치가 되면 동생을 가질 수 있어. 이 한마디가 이브의 귓가에 맴돌았다. 그렇게 하겠다고,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여버려야 할 것 같은 느낌.
이브는 생각해보았다. 백치가 되는 것도 어쩌면 좋은 일이지 않을까.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앞으로 태어날 동생에게만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 줄 수 있다. 그건 이브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하나뿐인 소원, 이루고 싶었다. 좋아라고 그렇게 한마디만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자신은 이 가혹하고 모든 것이 복잡하기만 한 세상에서 탈출할 수 있었고, 새로 태어날 생명은 훌륭한 위치에서 멋진 세상을 바라보며 자라날 수 있었다. 이보다 근사한 배경은 없다. 이브는 생각했다. 이건 동생에게 좋은 일이야 라고. 백치라는 단어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새 나 하나쯤 희생만하면 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곤 이브는 그 조그마한 입술로 목소리가 듣고 싶어 하던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지금까지 기껏해야 5년을 살았지만, 이 단순한 대답이 이렇게나 낯설게 느껴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말을 하면서 이유를 알 수 없게 눈물이 나왔다. 싫다고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답했어야 했을까. 내가 백치가 되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실까? 아냐 동생이 생긴다면 기뻐해주실 거야.
겨울요정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있었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웃음기가.
「잘했어 아가씨, 그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단다.」
겨울요정이 갑자기 흡사 악마처럼 느껴졌다. 검은 옷을 입고 검은색으로 치장을 하고 검붉은 날개를 지닌 커다란 뿔을 가지고 있는 악마 같은 위화감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럼 아가씨, 아가씨의 동생을 4년 후에 태어나게 해줄게. 음, 생일은 그래 오늘로 하자. 어때 마음에 드니?」
싫다고,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하기엔 이미 늦어있었다. 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계약은 성사될 것이다. 이브는 앞으로 백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두려운 표정을 짓고 있구나. 그럼 안 되지, 알겠니? 아가씨는 이제부터 5살의 정신연령만을 지녀야해. 그 이상처럼 보이면 안 돼. 아가씨가 죽을 때까지 그 약속을 지켜주면 내가 아가씨의 동생은 백치가 되지 않도록 해줄게. 그러니까 꼬마아가씬 그 동생을 지켜주는 사람이 되는 거야. 음 파수꾼 정도? 어때 멋지지 않니?」
매혹하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파수꾼이라, 어떤 의미의? 단순히 백치가 되지 않도록 해주는 방패막이인가? 동생을 사랑하는 형제자매로서가 아니라?
「꼬마아가씨, 귀여움을 받고 있구나? 아가씰 찾는 사람이 있어. 자 이제 그만 가봐. 잊지 말렴, 나와한 약속은 죽을 때까지 유효하단다.」
잠깐만이라고, 물어볼 것이 있다고 붙잡으려 했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그럴 수 없었다. 입맛을 다시는 듯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는 듯한, 악마 같은 자의 목소리가 멀어져만 갔다.
이브를 짓누르고 있던 악마의 위화감이 한순간 휘익 하는 소리를 내며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몸에 힘이 없어져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브의 손에 들려있던 눈뭉치는 녹고 없었다.
“아가씨! 그런 곳에 계셨군요!”
하녀장이 화가 난 목소리로 치마의 앞부분을 들어 올리며 이브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옆에 서서 팔짱을 끼고는 설교를 늘어놓았다.
“이브아가씬 어째서 제 수업 때만 항상 빠지시는 거예요? 제가 잘못해드린 게 뭐가 있다고 그러시냐구요, 네 아가씨? 어머, 아가씨? 우세요? 아이참, 잔소리 좀 했다고 우시기예요? 알았어요 화 안 낼게요, 그만 우세요 네?”
하녀장이 한창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만 눈물이 나와 버렸다. 왈칵 눈물이 쏟아져서 넘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짜증나기만 했던 하녀장의 잔소리가 오늘은 정겹게 들렸다. 그래서, 그래서 울었다. 정말 무서워서 방금 만난 요정이 아니 악마가, 다시 나타날 것만 같아서 그래서 늘 보던 사람을 만나니까 반가워서 눈물이 나왔다. 한없이 이브의 보드레한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 눈물자국을 만들었다.
“아가씨 제가 잘못했어요. 이제 화내지 않을게요, 네? 추우실 텐데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어쩜 예쁜 드레스가 다 망가졌네요, 아무리 귀여운 겨울요정이라지만 이렇게 눈을 묻히고 계시면 어떻게 해요, 빨리 들어가셔서 옷도 갈아입으셔야겠어요.”
최고로 좋은 날이 될 줄 알았던 날이 무서운 날로 바뀌어 버렸다. 처음으로 만난 악마 같은 존재와의 대화에 대한 기억은 오래도록 아니 평생토록 이브의 머릿속에 남아 있을 것이었다. 지워지지 않고 그렇게 계속. 무서운 날인 오늘은 앞으로 태어날 동생의 생일이 될 것이다. 울지 않아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눈물이 나왔다. 이제 난 백치다 라고 생각하니 서럽기도, 홀가분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브는 그렇게 5살의 나이에 백치가 되는 일을 받아드렸다.
그건 평생에 걸쳐 유효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어린 소녀의 몸부림.
* * *
“그 얘기 들었어? 아르님 공작 가문의 따님 말이야, 그렇게 총명하던 따님이 백치가 되셨다더라구”
“그 얘기를 아직도 못들은 귀족집안이 어디 있겠수? 공작님도 불쌍하시지 하나뿐인 따님이신데 말이야.”
“공작부인은 몸이 약하셔서 임신을 하시면 안 된다던데 그 말 사실인가? 그렇게 되면 아르님 가문은 누가 이어야 하지?”
“혹시 모르지, 충신한테 물려주실 지도. 아무리 그래도 백치자식한테 물려줄 순 없는 일 아닌가?”
그날의 일이 있고부터 사람들의 태도는 한순간에 바뀌게 되었다.
이브에게 공부를 하라거나 방을 치우라거나 어지르지 말라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고귀한 지위를 지니신 그녀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한결 같이 아니 예전보다 더 이브를 예뻐해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뭔가가 텅 빈 사람 같았다. 그녀의 생일이 지나고 그녀가 6살이 되던 때 이브는 약혼자가 생겼다.
그의 이름은 테오스티드 다 모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테오라고 불렀다. 테오는 그녀를 헌신적인 사랑으로 대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백치가 뭐가 좋아서 약혼을 하냐고, 그렇게 공작 지위가 탐나더냐고 손가락질 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그를 보았지만 그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를 위해 힘썼다.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그는 그녀를 사랑했다.
겉치레일 뿐이라고 흉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누가 백치를 좋아하겠냐며 저 녀석은 그저 거짓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고 매몰차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브는 알고 있었다. 테오가 자기를 사랑해준다는 사실을. 이 사람이라면 그녀가 백치로 평생을 산다고 해도 그녀를 죽을 때까지 사랑해 줄 것 같았다. 이브만을 바라보고 이브만을 위해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 해 줄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브는 테오와 단둘이 있을 때 테오에게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라면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브의 마음을.
“테오, 난 있지”
테오가 웃는 얼굴로 이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이브보다 다섯 살 위인 그는 무척이나 다정다감한 사람이었다.
“테오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아니 생길거야.”
테오의 얼굴에 실망감이 서렸다. 하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해해 줄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래도 자신은 이브를 사랑해준다고도 그렇게도 말해주었다.
“테오 있지. 나한테는 보물이 하나 있는데, 난 그걸 죽을 때까지 지켜주어야 한 대. 아마 테오는 이해해주지 못하겠지만 난 그래야만 한 대. 누군가하고 약속했거든. 그 누군가는 무척이나 무서운 요정 같은 거지만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라고 난 믿고 있어.”
테오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말로는 이해해한다고 한 번 더 말해주었다. 이브는 테오를 사랑했지만 자신의 보물을 더 사랑해주어야 했다. 그건 이브가 결정한 일.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 보물은 이브가 태어나게 해준 이브의 동생이기 때문에 이브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이브는 동생을 사랑해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테오, 사랑해 정말로”
6살 소녀와 11살 소년의 사랑은 무척이나 다부진 것이어서 그 누구도 깰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녀의 보물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소녀와 소년이 앳된 마음으로 사랑을 속삭인 후 3년이 지나고 그녀의 보물이 태어났다.
모가 난 사랑이라도 이해해줘요.
둥글지만은 않은 사랑이지만 받아줘요.
그대가 사랑하는 만큼은 아니라지만
나도 그댈 사랑하니까 다만 더
사랑하는 게 있을 뿐이니까,
섭섭해말고 받아줘요 내 마음을.
나도 그대를 사랑한답니다.
* * *
“이브 아가씨, 남동생이 태어나셨습니다요!”
어머니의 수발을 담당하던 그 하녀를 오랜만에 만났다. 하녀는 이브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브의 보물은 남자아이였다. 여자아이였다면 같이 더 재미난 놀이를 하고 놀 수도 있었을 텐데 남자아이라니 조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나 보러 갈래! 내 동생은 어디 있어?”
어느새 이브는 백치연기라는 것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평생을 해야만 하는 일에 그녀는 차츰 적응해 나가고 있었다. 그녀가 적응을 해야만 하는 건 그녀 자신의 동생을 위해서. 오늘 만나는 동생만이 이브의 전부였다.
“이쪽이에요 아가씨.”
하녀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널찍한 방. 그 방의 한 켠 아기 요람에 누워있는 동생의 머리색과 눈동자는 전부 검은색이었다. 정말이지 검어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이. 동생은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나 줄 것이다. 누나인 이브가 부모님께 못해드린 만큼 더 많은 기대를 품고서.
“내 동생 이름이 뭐야?”
하녀를 향해 이브가 웃으며 물었다. 이브는 기분이 좋았다. 4년 동안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서 만난 동생.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조슈아. 조슈아 폰 아르님 이랍니다.”
나한테는 숨겨놓은 보물이 하나있어.
내 평생을 바쳐 악마에게 구해온 아이야.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칼을 지닌 내 보물은
하나뿐인 내 동생이래. 그 아이도 날 사랑해줄까?
난 이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해줄 자신이 있는데.
end
첫댓글 니들님 축하합니다아
축하드려요 ㅇ_ㅇ~다시읽어도 감격b
언니언니 축하해애^^ 다시 읽어도 정말 멋진 글이야아//
ㅠㅠ이브노아 아가씨
아아 니들님 멋져요. 이번으로써 벌써 세번이나 읽게 되었군요. 역시 이브노아 양의 이야기는 슬픕니다/
축하해요오~
축하드려요오~ 정말 슬픈 얘기 군요 ㅜ.ㅜ
이거 ;; 혹시 지어낸게 아니라 책에서 가지고 온듯한 글들?????? (퍼퍽 ;;죄송) 그만큼 글을 잘 작성하신다는 좋은뜻 ^^
.............완전감격스러운.....ㅅ
멋져요ㅠㅠ 급감동ㅠㅠ
이브 너무 불쌍해....
와ㅜ ! 재밌다..
너무 잘쓰세요! 그런데 단편소설인가요?
이브 너무 불쌍해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