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의 격동을 부른 말목장터의 사자후
악정은 민을 격동케한다. 120년 전의 조선이 그러했다. 조선정부의 광범위한 폭정! 백성들은 시달리다 못해 숱하게 저항했고 전국에 걸쳐 민중의 항쟁이 잇달았다.
갑오년, 조선정부의 빨대인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에 견디다 못한 고부농민들은 마침내 들고 일어났다. 실은 고부농민들만이 아니었다. 고부 인근 태인 주산리 최경선은 300여 인을 이끌고 말목장터를 향해 달려왔고, 정읍의 손여옥도 고부읍을 향해 내달려왔다.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두 패로 나뉘어 말목장터를 출발하여 고부성을 향해 긴 행렬을 이루었다. 첩보는 빨랐다. 북부면에 사는 조모씨로부터 급보를 받은 조병갑은 재빨리 달아났다.
그 겨울 말목장터는 전대미문의 사태를 만나 들떠 올랐다. 10일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들은 다음날 말목장터로 돌아왔다. 시장엔 농민군의 진영이 갖추어졌다. 전라감영 수교 정석희 일행은 연초포 장사로 위장하여 말목장터에 유진하고 있던 농민군 지휘부를 와해시키고자 했으나 농민군의 치밀한 작전에 휘말려 실패하고 말았다.
농민군은 말목장터에서 백산성으로 진영을 옮겼다. 답내면 말목장터를 출발한 농민군은 궁동면 조소마을 앞으로 해서 달구지가 삐그덕삐그덕 흔들려가던 투박한 길을 달려갔다. 농민군이 달려가던 길은 돌곶명당 주막거리에서 파발마가 달려가던 영원역- 내재역간 역로를 만났다. 역로에 정부군의 파발마는 보이지 않았다. 농민군들은 주막거리에서 제각기 입맛을 다셨지만 엄중한 군울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어서 가자, 농민들이여! 백산성에 오르면 축하의 한 잔 술이 그대들의 마른 목을 적셔 주리라.
말목장터 對 말못장터
말목장터가 맞느냐 말못장터가 맞느냐 하는 논란이 있다. 한자로 말목은 馬項이고 말못은 斗池라 표기한다. 조선 정조 13년에 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는 마무리(馬頭里)가 있다. 말의 목은 당연히 말의 머리를 전제로 성립한다. 지형상 말머리가 있고 말목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두지리라는 지명은 정읍에 3개소가 있다. 이평면 두지리와 덕천면 두지리는 소재지 마을이고, 신태인읍 두지리는 외곽 마을이다. 그런데 지금의 이평면 마항리와 두지리엔 정작 마항마을과 두지마을이 없다. 즉 법정마을(리)로서의 두지리와 마항리는 존재하지만, 자연마을(이장을 뽑을 수 있는 ‘마을’)로서의 두지마을과 마항마을은 없다는 것이다. 실상 이들 두 법정마을은 말을 닮은 지형상의 현 이평면소재지권의 두 구성요소로서 마항리는 동진강 쪽으로 기우는 지점이고 두지리는 서쪽으로 기우는 지점이다. 두지리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도량형기인 말(斗)을 닮은 못(池)이 현재의 농협 근처 뒤편에 있는데 이 연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1894년 정월 10일, 예동마을을 출발한 농민군은 마항리를 거쳐 두지리로 왔고 이어서 두 패로 나뉘어 고부관아로 달려갔던 것이다.
두지시(말못시장)에서 마항시(말목장터)로
시장이라는 명칭의 측면에서 두지장과 마항장을 살펴보자. 임원16지(서유기: 1764~1845년) 예규지에는 고부군의 시장으로 두지장이 기록되어 있다. 두지장은 재군동 이십리 답내면 3, 8일 설(設)이니 고부관아로부터 이십리 떨어진 동쪽 답내면에 있고 매월 3일을 시작으로 5일마다 장이 열렸다는 것이다. 또한 고종(재임기간 1896~ 1907) 때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의 시적고조 부향시에 실린 고부군의 시장으로 두지시가 있으며, 1872년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와 영주지 등에도 역시 두지시가 있다.
그런데 1926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시장경제에 기록된 정읍군 시장분포에는 마항시장: 이평면 마항리, 공설, 4/9일 개시로 기록되어 있다. 명칭과 개시일이 조선시대의 현황과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개시일이 달라진 이유는 명맥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용북면 신태인리에 개설되어 있는 상삼리시장이 3, 8일 개시로 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급성장한 신태인읍의 시장에 밀려 개시일이 변동된 것이 아닌가싶다.
두지시의 마항장으로의 명칭 변경은 무슨 이유일까? 이평의 우리말 표기인 배들이 조선시대에 한자로 기록하면서 배주자에 들평를 써서 주평이라 하지 않고 그 음만 취해 이평이라 하였던 점, 김제만경을 글로 읽지 않고 귀로 읽은 이들이 징게맹경이라 한 것과 관련하여 보면, 두지시라는 기록 명칭은 말목과 말못의 비슷한 지명이 한자어로 표기되면서 취사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 일제 시대에 두지시라는 명칭 대신에 마항시장으로 명칭이 달리 표기된 것은 표음변화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대부분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에는 말목장터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고부군의 해체, 면도 바뀌고
1894년 동학농민군을 패배로 내몬 일본군은 조선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1914년에 일제는 전국에 걸쳐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했고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였던 고부는 해체되었다. 2000여년 동안 마한 고비리국에서 백제 중방고사부리성을 거쳐 서기 757년 신라에 의해 고부라는 명칭으로 압축된 이후
오랫 동안 고부군으로 불리우던 고부가 일개 면으로 격하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전봉준이 살았던 조소리가 포함된 고부군 궁동면과 사발통문을 작성했던 서부면은 사라졌다. 궁동면은 이평면과 영원면으로 나뉘어졌고 서부면은 면으로 강등된 고부면에 합쳐졌다. 백산면과 거마면과 덕림면이 부안군으로, 부안면이 고창군으로 편입되었다.
지명은 지형적인 측면에서 유래되는 경우가 많다. 이평면의 두지리와 가까운 평령리, 동진강 건너 신태인읍의 우항과 우령이 그런 경우이다. 이평면의 마항과는 동진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신태인의 우항은 말과 소의 대비로 흥미를 끈다. 답내면과 궁동면은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대개편으로 이평면으로 합쳐졌다. 궁동면에서는 청량마을을 제외한 장재리 전체가 영원면이 되었고 1987년에는 청량마을도 영원면으로 변경되었다. 궁동면소재지 마을인 궁월마을을 중심으로 궁월리라 하지 않고 가장 호수가 많은 청량마을을 중심으로 하여 청량리 1, 2구가 출현하였던 것인데 청량마을이 빠져나간 뒤에 정작 이평면 청량리에는 청량마을이 없는 현상인 것이다.
말목장터생활권
이평면은 본래 고부군 답내면과 궁동면 구역이다. 1914년 두 지역을 합쳐 이평면이라 했고, 1973년에 정우면의 오금리를 편입시켰고, 1987년에 도계리를 덕천면에 편입시켰으며, 청량마을을 영원면에 편입시켰다. 법정리는 11개리이고 자연마을은 46개 마을이다. 두지리는 무릉, 현동, 대독, 소독로 이루어졌으며 이중 무릉마을이 장터이다. 마항리는 요동, 요서, 석전, 연화, 금반리로 이루어졌다. 이평면의 근원이 되는 배들이라는 고유 명을 일제 때 이평이라 그릇 표기했다는 설이 오랜 동안 회자되었으나 이는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조에 이평제라는 기록이 있고 대동여지도에 이평이 표기된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이를 모르고 일제가 배들의 뜻과 맞지 않게 이평(梨坪)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으로 이제는 바로잡아져야 한다.
말목장터는 1894년 정월 시작된 고부농민봉기와 3월의 무장·백산기포 두 번에 걸쳐 농민군을 맞이했으며, 1899년 기해농민봉기, 세칭 영학당 사건을 일으킨 영학계가 조직된 곳이다. 영학은 영국인 목사가 주일마다 와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선교활동을 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지방주민들뿐 아니라 7읍에서 많은 영학계원 신자들이 몰려들어 물의가 일자 주일집회를 중지하고 말았다. 영학계는 고부· 흥덕· 고창 · 장성· 영광· 무장· 함평 등 7읍의 수계장에 최일서(익서)와 장성 송문여, 서사에 차일용, 수전유사에 김태서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입암 왕심리에서 벌왜 벌양 보국안민을 기치로 일어났으나 17개 군 농민 200여 명의 사상자 및 체포자수를 남기고 실패로 끝났다. 고부농민봉기의 발상지인 말목장터에서 조직된 영학계가 중심이 되어 제2의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는 면에서 이들의 거사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말목시장은 궁동면 조소리에 살던 전봉준을 비롯하여 우덕면 손바라기에 살던 증산 강일순이 드나들던 곳이며 백산면과 거마면 사람들도 드나들던 곳이다. 19세에 구례군수를 지낸 서택환은 지운 김철수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근래에 까지도 말목시장에 서당이 있었고 가까운 백산면 수청리와 원천리 사람들도 이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말목장터 근처 서산리에는 청하 권극중이 태어났고 그가 수천권의 책을 산처럼 쌓아놓고 학문을 했기에 그를 따르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증산 강일순이 실상 이 서산마을에서 태어났는데 이는 그곳이 증산의 외가가 있었던 까닭이다. 증산의 외가가 권극중의 가문이었고 증산이 도가적인 측면이 강했다는 것에서 권극중의 영향이 읽혀진다고 한다.
김제에서 동학농민혁명사를 연구하였던 최순식선생의 논문에는 말목장터 생활권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 전봉준(全琫準) 고택마을에서 말목장터(古阜民亂의 중심지)까지가 3.8㎞이고 강일순(姜一淳) 생가마을에서 말목장터까지는 4㎞이다. 만석보(萬石洑)에서 전봉준(全琫準) 고택마을까지는 6.8㎞고 강일순(姜一淳) 생가마을에서 만석보(萬石洑)까지는 7㎞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면(面) 행정구역은 달랐지만 전봉준(全琫準)과 강일순(姜一淳)은 다 같이 말목장터가 생활권이었고…"
전봉준과 강증산이 생활권으로 삼았고, 영국인 목사가 임시교회를 열었으며, 기에서 비롯된 영학계가 일으킨 기해농민봉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동화·동시를 많이 창작하고 있는 시인 이준관이 말목장터 근처 하송마을에 이사와 살았고 이평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적이 있으며, 배용제시인은 무릉마을 태생으로 감나무 아래에서 살았으며, 한일문학의 가교역할을 하는 한성례시인은 하송마을 태생이다. 국어학자인 김종훈 박사가 말목장터 근처에서 태어났다. 이들 시인, 학자들은 조선시대 청하 권극중의 후예들로서 그 문맥을 잇는다 할 것이다. 말목장터에 말목장터문화관이 지어지고 시문학관 등이 꾸려진다면 좋을 것이다. 배들교실, 권극중교실, 동학교실, 증산교실, 영학교실, 시문학교실, 5일장교실 등이 그 안에 갖추어져 이 지역 관련 현장을 답사하러 오는 이들이 더 많은 것을 체험하고 마음을 채워갈 수 있다면 좋겠다.
말목시장은 현대화에 밀려 사라졌다. 아마도 신태인시장의 급성장이 그 시기를 앞당겼을 것이다.
말목장터는 현재는 이평면의 소재지 마을로서 매년 고부농민봉기일을 기념하여 예동에서 출발하는 기념제를 열고 있다. 말목장터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던 감나무는 고사했으나, 말목장터에 얽힌 사연은 말목장터생활권을 드나들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