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27~2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癬?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 (마 7:21~23)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마 22:11~14)
성경은 상징과 비유와 예표로 가득하다.
스알야숩과 마헬살랄하스바스도 그 중 하나다. 하나님의 청함과 택함이 어떻게
다른 지를 극명히 대비시켜 주고 있다. 많은 사람이 청함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택함을 받은 줄 오해하고 있기에 이 상징의 메시지는 더욱 의미가 깊다.
인생들은 흔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길에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으며
또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천명하시되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 하셨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것이 인생을 행한 성경의 일관된 메시지다.
왜 이런일이 일어나게 되는가. 그것은 청함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미를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말씀하시되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셨다.
무엇을 어떻게 듣느냐가 택함과 버리움을 결정 짓는다.
이사야는 주전 740년에서 주전 680년 사이에 활동하였다.
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유대와 이스라엘의 남북 왕국으로 나뉘어 서로 적대하고
있었으며 주위에는 남방의 애굽과 북방의 앗수르 제국이 세계 제패를 노리며
세력을 다투었다. 유대와 이스라엘은 양대 세력의 틈바귀에서 어느 편에 의존하여야
살아남을지 전전긍긍하였다.
오늘날 남북으로 나뉜 우리의 상황도 그와 흡사하다.
이사야는 애굽도 앗수르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 외쳤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 세력을 더 의뢰하기 마련이다.
이 때 이사야(여호와는 구원)는 그 자신과 그의 장자 스알야숩(남는 자는 돌아오리라)과
차자 마헬살랄 하스바스(노략이 신속함)를 그 예언의 징조와 예표로 삼아 눈에 보이는
세상 세력을 의롸하는 자는 신속히 노략당할 것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살아남아 구원되리라 하였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에게 애굽의 지력(地力)의 권세도, 앗수르의 지력(知力)의 권세도
의존하지 말고 구원자 여호와 하나님을 의뢰하라 하였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물질의 힘과 지식의 힘에 압도되어 저희 믿음이 질식을 당하고 있다.
이사야와 그 두 아들의 이름이 예표하던 바 구원의 외침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라는 예수의 말씀과 그 메시지가 동일하다.
이사야와 예수의 이름 또한 같은 의미이다.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받은 수많은 이스라엘이 우상과
거짓 선지자와 외국 세력에 의존하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영적 이스라엘이 세상 것에 의존하다가 세상 것에 노략질을
당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불리우는 우리들이 처한
'마헬살랄하스바스'의 비극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은혜의 진리로 부르셨으나 세상은
그 초청을 거절하였고 또 그 초청을 받아들인 사람 중에는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예복을 입지 않고 자기 옷을 입고 혼인 잔치에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우는 것이다.
기록된 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였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마헬살랄하스바스'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스알야숩'이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거절한 자는 그 선택이 분명하니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그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혼인잔치에 참여코자 그리스도께 왔음에도
바깥 어두움에 내어던지운 것은 비극 중의 비극이다. 왜 이런 일이 인어나는가.
물론 혼인 예복을 잘못 입었기 때문이다. 할례받지 못한 마음으로 혼인 잔치에
참예코자 했음이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혼인 예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기록된 바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7) 하였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또는 그리스도를 입는다 함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음이다.
육적 이스라엘이 강대국 사이에서 여호와 하나님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것을 거절하고
애굽이나 앗수르로 갑옷을 삼으려다가 도리어 저희에게 노략을 당한 것 같이
영적 이스라엘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혼인 예복으로 삼지 않고 기복이나, 교리나,
신학이나, 전통과 유전이나, 윤리나, 도덕이나, 수양이나, 돈이나, 교권이나,
비지니스나, 권세나, 자기 자랑을 혼인 예복으로 삼으니 바깥 어두움에 던지움을
받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영적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로 옷 입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다. 그럼에도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아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할
교회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할례받지 못한 세상의 형상 그대로 입고 있으니
청함을 받았으되 '마헬살랄하스바스'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좇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생명과 사랑과 거룩과 영의 형상을 입지도 못하고
또 세상의 생존과 욕심과 세속과 물질의 형상을 벗지도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는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함에 기인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를 전혀 분별할 줄 모른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도 그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의(쩨테크:히, 디카이오수네 dikaiosuvnh,
righteousness)와 공의(미쉬파트, 크리시스 : Justice, Judgement)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와 공의는 세상의 의와 공의와는 그 차원이 하늘과 땅이 다른 것처럼
다른 것이다.
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 믿고 종교가가 되고,
도덕자가 되고, 윤리가가 되고, 사업가가 되고, 자본가가 되고, 권세가가 되고,
사회정의가가 되고, 율법가가 되고, 기복가가 되고 하여간 세상에 속한 그 무엇이
되는 것을 구원인 줄 아는 것이다. 혼인 예복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의는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음을 일컬음이다.
이 세상의 의라 칭하는 모든 것은 이 땅의 생존을 이롭게 하는 형상(옷)일 뿐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혼인 예복이 아니다. 이 땅의 의는 그리스도의 구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불의다. 하나님의 구원과는 상관없는
이 땅의 의를 입고 혼인 잔치에 들어가면 내어 쫓김을 받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말씀과 성령으로 낳아주시고 길러주시고 온전케 해 주시는
그 아들의 형상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이며 다른 것은 그 무엇이 되었든 불의요
불법이다. 불의를 입는 자는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빌어 종교가가 되는 것도, 도덕가가 되는 것도, 사회 정의가가 되는 것도, 사업가가
되는 것도, 권세가가 되는 것도, 야망가가 되는 것도, 그 무엇이 되는 것은 다
불의를 입는 것이다.
다만 누구든지 그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었으면 그것이 하나님의 의다.
어느 누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목사가 되고, 전도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집사가 되고, 신학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설교가가 되고, 사회사업가가 되고,
선생이 되어도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지 않았으면 주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시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헬살랄하스바스는 그리스도의 형상에서 벗어난 자가 받는 의의 심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의의 원리에 대하여 이르시되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하였다.
심는 대로 거두는 원리가 의의 원리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그리고 거둔 대로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음이 공의다. 공의의 원리에 대하여
기록되었으되 "손에 키를 들고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하였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리라"(마13:29~30) 하였다.
하나님은 알곡을 거두시고자 하지만 어느 누가 스스로 쭉정이가 되고 가라지가
되었다 하여 그 싹이 보일 때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고 추수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생존과 함께 생명을 선택할 자유 의지를 주셨으므로
그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함이요, 거둔 대로 갚으시려 함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쭉정이가 있고 가라지가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의와 공의 원리다.
우리 가운데 간혹 하나님은 왜 악한 자와 불의한 자를 버려두시는가 하며
하나님의 의와 공의를 의심하는 자가 있으나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공의 법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며 실상 그 말하는 자가 뽑힐 자가 되어 있기에 그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러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거둔 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심판받아
마땅한 그 사람들을 회개에 이르게 하시고 또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일까.
우리의 사망을 생명으로 돌리는 그 긍휼의 의는 어디에 근원을 둔 것인가.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되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하였다. 그렇다면 모두가 심판받아 바깥 어두움에
던지우는 마헬살랄하스바스가 되었음이 분명한데 그들을 돌이켜 구언받게 하심이
하나님의 의라 하였으니 그 구원의 규범은 언제 마련된 것인가.
그것이 창세기 1장 26절과 2장 17-17절 및 3장 15절이다.
기록된 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온전케 하자)"
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였고, "내가 너로 여자의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완성의 경륜이 곧 의와 규범이라는
것이다. 이 의의 규범은 사람으로 그이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모양(하나님이
낳으신 아들의 형상)을 입고 그의 영광에 이르게 하심이다.
이 은혜와 진리의 규범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러함에도 뱀이 그 규범에 변혁을 가하려 시도하였고 아담과 하와는 그 시도에
참여하여 심판받을 자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비와 긍휼로써 인간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두셨으니 이는 그의 경륜과 택하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기 때문이며
그것이 여자의 후손이 행하실 대속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지
않고 기어이 그 혼인 잔치에 세상 옷을 입고 들어간다면 바깥 어두움에 던지움을
받는 심판(공의)이 있을 뿐이다.
공의에 대해 기록되었으되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마16:27) 하였다. 또 기록되었으되
"이것이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고후9:6) 하였다.
알곡을 심었으면 알곡을 거두고 가라지를 심었으면 가라지를 거둔며,
적게 심었으면 적게 거두고 많이 심었으면 많이 거두는 것이 의의 원리다.
공의는 거둔 대로(행한 대로) 갚음을 받음이다. 그렇다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과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공의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이 의와 공의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우리에게 갚없는 구원을 베푸시니 그것이 하나님의 의요
우리의 일한 대로 갚아주시니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일하지 아니한 자는 받을 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될 뿐 아니라 우리에게서
의로움의 열매(삶)을 원하시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하여금 의를
행하도록 의롭게 하여 주셨음에도 우리가 불의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의롭게 된 것이 아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칭하실 뿐 아니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의의 권능과 권세와 성품괴 의지를 주시며 또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의롭다 하심의 의미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칭하시기만 하고 내버려 두신다면 우리는 계속하여 그리스도 밖에서 죄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으도 죄에서의 해방도 아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됨은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살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의롭게 되었다 함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새 생명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 하는 것은 다만 우리의 관념일 뿐 우리는
불의 아래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성령으로 말미암는 생명의 의를 입으려 하지 않고 죽어 있는
의를 입고서 자기 지식이나 능력을 좇아 자기의 야망을 이루고져 마헬살랄하스바스의
넓은 길을 걷고 있다.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새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 생존의 야망을 좇아
살면서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고 자기의 의를 세우는 불의를 자행한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은 다름 아니라 자기의 의를 세우려
함이다. 자기의 의르 세우는 행위는 교리로, 도덕으로, 윤리로, 율법으로, 사회정의로,
기복으로, 비지니스로, 지기 공로로, 성공으로 하여간 세상이 옳고 좋다는 여기는
그 무엇으로 선한 모양을 드러낸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를 찾지만 속으로는 자기 야망을 세우는 것이
자기 옷을 입고 혼인 잔치에 들어옴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 모두가 귀하게 여기는
그 무엇을 벗지않고는 그리스도로 옷 입을 수가 없다.
기록된 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랴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 하였다. 그리스도를 좇고자 하는 자는 자기 안의 죄도,
야망도, 의도 다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믿는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특히 목회자들이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의를
좇다가도 시간이 흐를수록 자기의 의를 좇는다. 자기의 의란 자기 공로를 주장함이고
자기 스스로를 옳다함이다.
이사야는 말하기를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64:6) 하였다. 더러운 옷 같은 자기의 의를 입고 나서는 것이
바깥 어두움에 던지울 마헬살랄하스바스의 형상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의의 도(십자가의 도)에 따라 살면서 "나는 매일 죽노라"
하였다. 그는 왜 매일 죽는 삶을 살았을까.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매일 새롭게
되는 의를 입기 위하여는 이미 이룬 의가 자신의 눈에 아무리 선할지라도 벗어 놓지
않으면 안 되었음이다. 사람의 의는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 의에 집착할 때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자기의 의를 세움이 된다.
그 때부터 불의는 다시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초기에 잘못되기 보다는
나중에 잘못되곤 한다. 이는 저희가 죄악에 빠져서라기 보다는 자기의 의에 얽매여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벗고 자기의 의를 입으라는 시험은 누구에게나 온다.
누구든지 범죄하였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려니와 스스로의 의와
자랑거리와 욕심에 얽매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짓밟고 세상 임금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세상 임금(바알)을 내어 좇으라 하시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 각양 각색의 세상 임금이 되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청함을 받은 자들이 택함을 입지 못하고 노략하는 말세적 현상에 대하여 기록하였으되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막13:21~23) 하였다.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케 하는 일은 이미 구약시대에 그 모습을 드러내었으니
"이스라엘 족속 중에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이 다시 있지 못하리라"(걸12:24)함과 같다.
하나님은 허탄한 묵시를 보는 자와 아첨하는 복술자에게 심판을 내리시지만 저희가
심판을 받아 멸하기 전까지는 평안과 축복으로 사람을 미혹하며 자기들의 배를
채우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내에 가득한 기복과 복술은 이스라엘에 있었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아담 아래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을 좇게 하는
미혹의 바람은 그칠 줄 모른다. 기복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보냄을 받지도 않았으나
스스로 목사가 되고 전도자가 되고 부흥사가 되어 성려의 능력을 복술로 말씀을
주문으로 대치시킨다. 히브리어의 '뱀(나하쉬)'과 '복술가'는 같은 말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복술이 곧 뱀의 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언젠가 필자는 어느 텔레비젼 방송에서 예수의 이름을 빙자한 여자 무당이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병 고치는 복술을 행하며 주문을 외우고 있고 군중은 미친듯
환호하며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본적이 있다. 기독교계에서는 이단이라 부르는 바알
집단의 행태이다. 그러면 그 바알 집단을 이단이라 부르는 교계는 무엇이 다른가.
오십보 백보다. 실상 그 바알 집단은 교회에서 복술과 기복 교리를 배운 자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편은 그나마 율법으로 자제하고 있으나, 다른 한편은 어거할
수 없는 노새처럼 된 것뿐. 그러나 교계는 도리어 간사한 위선자들로 가득 차서
입술로는 주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으로는 욕심을 가득 채우고자 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저도 은혜의 복음을 색욕거리로 만들기는 마찬가지이니
마헬살랄하스바스를 다른 데서 찾을 일이 아니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복술과 주문은 성령의 권능과 말씀의 진리를 흉내낸다.
이 진짜 같은 속임수와 거짓말들은 군중들의 아멘 소리에 더욱 힘을 얻으며
자기 영역을 넓혀간다. 청중들의 아멘을 유도하는 것이 복술자가 행하는
일의 핵심이다. 어느 유명하다는 설교자는 주문술의 위력을 익히 알고 있는지
"믿습니다" 하여야 할 때 억양을 달리하며 "믿씹니다"를 반복하여 청중에게
최면을 건다.
최면을 걸고 "믿씹니다"를 반복하여 믿음이오고 거듭남이 오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다면야 천 번 만 번 반복 외쳐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복술자가 노리는 것은 다만
청중의 호주머니인 것을 영혼 사냥꾼들에게 자기의 영혼이 노략질 당하는 것조차
모르며 청중은 "그리되소서"(아멘) 화답하니 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는 저주를 불러들이는 그 옛적 유대인들을
닮은 꼴이다.
단언컨대 복술자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돈은 그리스도께서 조금도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 거룩한 성전으로 드리기를 바라신다.
그럼에도 성전이 되어야 할 자기의 몸은 창기가 하듯 마알(우상)에게 주고는
그에게서 받은 화대의 찌꺼기를 그리스도께 드리면서 그것을 믿음이라 외쳐대고
있으니 이를 일컬어 그리스도의 은혜를 색용거리로 만든다 함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거룩을 위함이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하였다.
목사도, 전도사도, 부흥사도, 선교사도, 장로도, 집사도, 권사도, 평신도도 믿는 자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심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이다.
그외의 다른 것은 모두 썩어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부활의 영광과 존귀에 대하여
기록되었으되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인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전15:42~44) 하였다.
성경은 심은대로 거둔다 하였다. 그러면 썩을 것으로 심었는데 어떻게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 것인가.
이는 우리의 번역 성경이 원뜻을 살리지 못한데 있다.
"썩을 것으로" 심는 것이 아니라 "썩을 것에" 심는다.
심는 것은 생명의 씨앗 곧「말씀」이다. 말씀이 썩을 것에, 욕된 것에, 약한 것에,
육의 몸에 심기워 열매 맺으면 썩지 않을 것으로, 영광된 것으로, 강한 것으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 함이다. 부활이란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이
생명에게 삼키우는 의의 원리다. 그러므로 생명의 씨앗이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생명의 능력에 있다.
무엇이든 생명으로 인도하지 않는 것은 다 헛된 것이요 거짓이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 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빌 3:18~19)
"때가 이르리니 많은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소욕을 쫓을 스승을 많이 두고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턴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글: 조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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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썩을 것으로" 심는 것이 아니라 "썩을 곳에" 심는다라는 말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