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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原이여
草遊回絶橙嗚玲
雲峯深深碧原寒
明月自來還自去
更無人倚玉門關
잡초 구불구불한 돌계단을 덮어 천자님 행차하는
일이란 없고,
구름 걸린 산봉은 깊디깊어 황야는 쓸쓸하기만
하다.
명월만 스스로 오고 스스로 가며 예나 다름없건만
일찍이 옥문관에 마주 서 사랑을 속삭이던 사람
이제 없구나.
옥문관(玉門關)은 변방에서 중원을 들어오는 첫번째
관문이다.
새벽녘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사풍(砂風)은
아침햇살을 뿌옇게 가리고 있다.
이때 모랫바람을 뚫고 들려오는 기이한 방울소리,
그 소리에 이어 무엇인가 움직이는 물체의 흐릿한
형상들이 나타났다.
세 필의 말(馬),
앞장 선 첫번째 말은 백설처럼 흰빛에 발굽에만
검은 털이 난 희대의 신마(神馬)요, 모랫바람을
가리느라, 모자를 얼굴 깊숙이 내려 쓴 말주인의
용모는 채 분간할 수가 없다.
허나, 말등에 도도히 올라탄 그의 몸에서는 실로
범상치 않은 기우(氣宇)가 풍겨 나고 있었다.
그의 뒤로는 두 필의 말,
이 말들 역시 앞선 말보다는 못하나 천 마리 중 한
마리 꼴의 명마(名馬)였다.
헌데, 놀랍게도 말등에 올라 탄 것들은 사람이
아니라 거대한 금원(金猿)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가슴은 각각 무기가 꽂힌 한 개의
은책(銀柵)과 책, 술항아리가 잔뜩 쌓인 수레를 끌고
있었으니 실로 기이하기 이를 데 없는 행렬이었다.
선두의 기사(騎士)는 조용히 말을 몰아나가다가 한
개의 일주문(一柱門) 앞에서 고삐를 당겼다.
바람막이 모자 새로 별빛처럼 영롱한 광채의 두
눈이 일주문 옆의 이정표(里程標)를 향했다.
<임수(臨水) 백리(百里).>
임수(臨水)라면 중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첫번째
큰 도시이다.
본토(本土)와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교통의 요로인
관계로 그 풍물이 극히 번화한 곳이다.
"중원(中原)......"
문득 기사의 입으로부터 나직한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나는 마침내 이곳까지 왔군."
알지 못할 중얼거림에 이어 그의 말과 일행은 사풍
속으로 그림처럼 멀어져 갔다.
이때, 한 줄기 파공음과 함께 두 인영이 일주문
옆으로 스르르 내려섰다.
핏빛처럼 짙은 혈의(血衣)에 역시 같은 색의 복면을
걸친 위인들이었다.
좌측의 인물이 중얼거렸다.
"수상한 자다. 십만팔천령인지도?"
우측의 인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빨리 보고를......"
바로 그때, 한소리 냉혹한 음성이 뒤를 이었다.
"그 보고는 내가 해주지."
두 혈의인은 다급한 시선을 돌렸다 .
그들은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할 새도 없이 검부터
뽑아 짓쳐들었다.
그들의 동작은 매우 신속했다.
두 자루 검은 절묘한 사각(死角)을 이루는 것이
수십 번의 살인을 해온 자들인 듯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무표정하고 냉혹한 한 쌍의
시선 뿐, 그들은 무엇이 어찌되는지 알지도 못하고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이어 뼈가 부러져나가는 소리가 야공의 정적을
찢었다.
대지는 삽시간에 참혹한 공기로 휩싸이고, 냉혹한
눈동자는 두 시체를 근처에 있는 마른 우물 속으로
던져 넣은 후, 바윗돌로 우물의 입구를 막았다.
그는 흔적을 없애는 시간을 낭비하지도 않았으며 또
힘도 들이지 않았다.
사람을 죽일 때도 그랬고 죽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손을 툭툭 털며 냉혹한 시선으로
하늘을 우러렀다.
"중원에서의 첫 살인(殺人), 과달륵은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번화한 거리엔 필경 기이한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임수성(臨水城)은 변방, 신강(新彊) 일대에선 가장
번화한 곳이며, 중원 최북방의 보루라고 해도 좋은
요충지이다.
거리에는 오랜만에 나타난 겨울햇살 아래 인파가
북적이고 있었다.
잘 깔린 청석대로(靑石大路)에 한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몹시 키가 컸다.
그의 손에는 한 개의 새장이 들려 있었으며, 그는
아까부터 사람이 많은 곳만 찾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새장을 들지 않은 그의 한 손은 잠시도 가만있질
않았다. 또한, 그저 그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다른
사람의 주머니 속에 있는 은(銀)은 모두 그의
손아귀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헌데 한 순간 그는 문득 자신의 손을
쇠갈고랑이처럼 낚아 채는 억센 손길을 느꼈다.
그 손의 끝에는 별빛처럼 신비로운 눈동자가
있었다.
"너의 수법은 실로 대단하군."
사내는 즉시 대노하여 외쳤다.
"이 새끼야, 죽고 싶어서 환장했냐?"
말과 함께 그는 신비로운 눈동자의 면상을 향해
사나운 일장을 뿜어 냈다.
허나, 그는 꿈에도 신비로운 눈동자의 얼굴에 손을
댈 생각을 말아야 했다.
신비로운 눈동자는 씩 웃으며 두 손가락에 가볍게
힘을 주었을 뿐이었다. 단지 그것 뿐인데도 사내는
돼지 멱따는 비명을 터뜨리고 말았다.
"누가 개새끼냐?"
사내는 아픔을 참지 못하여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제, 제가 개새끼입니다. 틀림없는 개새끼죠,
공자님."
"흐흠! 나는 다만 한 가지를 묻고 싶을 뿐이다."
"무엇이든지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우향(雨香)이라는 기녀가 있는 곳이 어디냐?"
"우향! 옥루각(玉樓閣)입죠, 옥루각!"
사내는 손목에 힘이 풀리자 무너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리고 고급 가죽신과 털이 숭숭한 금색 발
두 개가 스쳐지날 때까지 그는 고개도 들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몸을 일으켰다.
이때 사내는 또 하나의 시선이 그를 쏘아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이번의 시선은 기이할 정도로 차고
냉혹했다.
"헉!"
사내는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순간 강철처럼 억센 주먹 하나가 물러나는 그의
복부를 깊숙이 파고 들었다.
"욱!"
휘청 허리를 굽히고 사내의 입으로 뱃 속의 오물이
주르르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말,
"자넨 술이 취했나 보군."
냉혹한 눈동자는 조용히 인파 속으로 파묻혔다.
이어, 놀란 외침이 인파 속에서 터져나왔다.
"사람이 죽었다!"
"소매치기 주명(朱明)이다!"
옥배(玉杯),
허나 옥배를 쥔 손은 그보다 더 희다.
이미 몇잔의 술을 마셨는데도 손의 임자는 여전히
별빛처럼 초롱한 시선을 지니고 있었다.
방안에는 네 사람이 있다.
진미가효(珍味佳肴)가 가득한 술상을 사이에 두고
한 명의 신비로운 눈빛을 지닌 손님과 세 명의
기녀(妓女)였다.
임수(臨水) 제일의 기루(妓樓)라는
옥루각(玉樓閣)이다.
그래서인가? 우향(雨香), 단심(丹心),
소훼(素卉)라는 이름의 세 기녀는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단심과 소훼는 연신 은방울처럼 웃으며 부잣님
귀공자로 보이는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있었고,
우향은 그 앞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하늘거리며 흔들리는 분홍빛 나삼자락이 옥배에
비치고 있었다.
돌연 허공을 휘젓던 우향의 소맷자락이 조용히
허공을 갈랐다.
순간, 희디흰 손,
그 손에 의해 단심과 소훼의 목이 느닷없이 피를
흩뿌리며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두 개의 목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묵묵히 옥배를 바라보던 손의 임자는 조용히 술을
들이켰다.
떨구어져나간 목이 땅에 떨어지는 것과 우향의 몸이
그 자리에서 날아갈 듯 예를 올린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삼가 옥풍신녀(玉風神女) 고단(古端)이
주군(主君)을 뵈옵니다."
옥풍신녀(玉風神女)!
이는 바로 서장밀성 오풍대의 하나로
화편옥풍대(花鞭玉風隊)의 존주(尊主)를 일컬는 말,.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주군이라 불리운 신비스런
눈동자의 주인은 목리공이리라.
목리공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의 일은?"
화골산(化骨散)이리라. 두 개의 시체는 서서히 녹아
들고 있었다.
그것이 완전히 녹아 한 줌의 물로 변할 때까지
기다린 옥풍신녀는 이윽고 영롱한 두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중원의 세력은 뜻밖에도 강합니다. 그 동안
본성에서 짐작하고 있던 세력과는 큰 차이가 있으며,
본성이 능히 제압할 수 있었던 천축, 관외무림과는
또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라."
"속하가 육개월 동안 수집해 온 정보에 의하면..."
수집이라곤 하지만 일개 성(城)의 기녀로 분장하고
있는 그녀가 그 동안 쓴 돈은 무려 황금 십만
냥이었다.
일천 명의 인원을 풀어 그 중 반 정도가 첩자로
몰려 죽었던 것이니, 그토록 많은 돈과 생명을
뿌려가며 수집한 정보가 얼마나 상세한지는 가히
말하지 않아도 불문가지다.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신진세력의
대거등장입니다. 이들은 과거의 명문대파를 완전히
압도할 뿐 아니라 중원 무림 유사이래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던 최고의 힘과 강대한 위세를 보이고 있지요.
그 중에서도 특출한 십 인을 일컬어 사람들은
신주십환(神州十環)이라 하였으니......"
신주십환(神州十環)-
인간이되 이미 인간이 아니고 신(神)의 영역을
넘보고 있는 십 인의 절대자들,
제일환(第一環),
천요(天妖) 혈옥인(血玉人) 운지(雲芝),
무림 유사이래 그 유래가 없는 공전(空前)의
마녀(魔女),
삼 년 전, 당시 중원제일인(中原第一人)이던
추소야(秋小爺)의 가슴에 검을 꽂아 만길 절벽 밑으로
떨어뜨린 후 온 천하에 혈우혈풍(血雨血風)을 휘몰고
온 장본인,
천하는 전율하고 땅은 숨을 죽였다.
삼 년 동안 그 흰 옥수(玉手) 아래 죽은 이의 수만
해도 무려 일천,
하늘도 탄식하는 요사스런 미모와 구층지옥도
뒤집어 버릴 아수라의 마예(魔藝)로써 천교(天敎)라는
사교(邪敎)를 만들어 휘하 십만을 헤아리는 엄청난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
제이환(第二環),
마도대종사(魔道大宗師) 천마대종(天魔大宗)
냉풍(冷風),
온 천하 마도인의 총수(總帥),
화문팔가(花門八家), 지주궁(蜘蛛宮),
유장곡(幽腸谷), 무상동(無常洞) 등의 중원 아흔 두
개의 마종(魔宗)과 극락사(極樂寺),
대뢰음사(大雷音寺)를 위시한 새외마종(塞外魔宗),
그리고 백 년 내의 거마(巨魔)들이 모인
백마맹(百魔盟) 등, 천하 이백 일흔 아홉 마종의 위에
군림한 절대자,
한 자루 자뢰마마도(紫雷魔魔刀) 아래 십만의
거마대효(巨魔大梟)를 망라한 그의 마교(魔敎)는 그
세력을 가히 추측조차 할 수 없다.
제삼환(第三環),
천하제일부(天下第一富) 금룡대공(金龍大公)
합돈(合豚),
천하상권(天下商權)의 절반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는 거부(巨富),
그는 그 엄청난 재력으로 황제까지 좌지우지하는
사람이다.
제사환(第四環),
성옥도(聖玉島) 검후(劍后) 옥미림(玉微林),
도군(刀君) 추소야의 숙명적인 대적관계에 있던
비운의 여인,
그의 복수를 맹세한 후 홀로 강호를 주유하고 있다.
제오환(第五環),
천심곡(天心谷) 무아선생(無我先生)
손북두(孫北斗),
정대한 지혜와 넓은 계략으로 가득찬 천심곡의
제일곡주(第一谷主),
그의 수하들은 하나같이 제갈량(諸葛亮)을 능가하는
재사(才士)들이다.
제육환(第六環),
천외신룡(天外神龍) 뇌진우(雷震宇),
과거 천년무맹(千年武盟)의 제이인자(第二人者),
지하로 숨어든 정파세력의 영수(領袖),
제칠환(第七環),
사후(邪后) 헌원령(軒轅玲),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는 채색나비처럼 현란한
미모의 소유자,
헌원가(軒轅家)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신비의
여인방(女人幇)을 거느리고 있다.
제팔환(第八環),
검군(劍君) 소석(蘇石), 검방(劍幇)의 제일인자,
제구환(第九環),
도왕(刀王) 방인(方仁), 도방(刀幇)의 제일고수,
제십환(第十環),
창황(槍皇) 유운(柳雲), 창방(槍幇)의 영수(領袖),
"이상 말씀드린 십 인이 바로
신주십환(神州十環)으로서 현재 중원무림은 이들 십
인이 통치하고 있어요."
"......"
"그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세력은 운지의 천교와
냉풍의 마교, 합돈의 대보방과 뇌진우의
천년무맹이지요. 천년무맹은 완전히 지하세력으로써
겉으로는 전혀 그 흔적이 드러나지 않고 그밖에
천교는 강북(江北)을, 마교는 강남(江南)을, 대보방은
사천(四川)과 귀주(貴州) 일대를 장악한 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히 대치하고 있어요."
옥풍신녀 고단의 말은 열기에 찬 채 계속됐다.
그러나 목리공은 이미 그녀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운지, 냉풍, 합돈, 옥미림...
그의 시선은 망연히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온 몸으로 치달려 가는 것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기이한 전율이었다.
어디냐? 어디에서 들었던 이름들이냐?
추소야! 이 이름은 왜 이리 정겹게 들릴까?
목리공은 무너지듯 의자 속으로 몸을 묻었다. 두
손은 고뇌에 찬 머리를 움켜 잡고 탄식을 터뜨린다.
나는,
나는 이 이름들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번뇌는 오래 가지 않았다.
목리공은 이미 떠오르지 않는 모호한 기억들을 쉽게
체념하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모르는 것은 그들을 만나 버리면 된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있는 중원에 와 있다.'
목리공의 두 눈에서 다시 신광(神光)이 솟아
나왔다. 그는 허공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달륵, 그곳에 있는가?"
순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두 줄기 인영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흑의에 냉막한 눈동자의 사내와 뚱뚱하고 사악한
웃음이 감도는 중년인,
바로 과달륵과 환우삼귀(還宇三鬼) 중
한천진귀(寒天陣鬼)였다.
"하명 기다립니다!"
목리공은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중원의 세력은 뜻밖에도 강대하다. 또한 그들은
본성에 대해 매우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으니, 한천!"
한천진귀의 시선이 목리공을 향했다.
"사천의 오지(奧地)를 하나 고르도록, 그곳을
극비리에 매입하여 가장 빠른 속도로 본거지를
만들라. 이 모든 것은 오른 손이 하고 이를 왼손이
모르도록 해야 하느니......"
"존명(尊命)!"
"과달륵!"
"그대는 전 인원의 완벽한 중원 잠입계획을
세우도록, 그리하여 한천이 만든 주거지 내에 전
인원을 웅거시키되 조금도 흔적을 남기지말고 쥐죽은
듯 웅크리고 있으라!"
"하오면?"
순간, 목리공의 두 눈에서 차가운 광채가 폭사되어
나왔다.
"천축,서장, 관외에서 모아 온 돈을 모조리
투입한다. 극소수의 정예를 선발하여 특수행동대를
만들되 중원의 이목을 흐리고 대혼란을 야기시키는
것이 첫째의 목적, 연후 혼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
총력을 투입하여 하나씩 차례대로 격파한다."
"존명(尊命)!"
명령은 곧 법이다.
두 사람은 허리를 굽히는 그 바람으로 후르르 창
밖으로 날아 나갔다.
목리공은 느릿하게 잔을 들었다.
주홍빛 액체가 찰랑이는 잔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강철 같은 완고함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첫번째 목표는 신주십환 중 제삼환, 금룡대공
합돈(合豚)의 대보방(大寶幇)이다. 금력(金力)이란
무엇인가를 움직이는 첫번째 힘이니까."
바람이 부는 호면(湖面),
이곳은 바로 그 유명한 은수(銀水)다.
해발 삼천 척(尺)의 고지(高地)에 위치하였으며,
무산삼협(巫山三峽)과 황하(黃河)의 첫 번째
수원(水源)인 이곳 호면에 어린 기련산맥(祈連山脈)의
웅자가 한 폭의 그림 같다.
사시경(巳時頃) 아침 햇살은 호면 위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데 호수 위엔 점점이 놀잇배들이다.
그 중에서도 유난히 화려한 한 척의 배가 있다.
오색 휘장이 드리워진 배 안엔 지금 진수성찬의
가효(佳肴)가 차려져 있고, 상을 중심으로 하여 다섯
사람이 빙 둘러 앉아 있었다.
최상석에 앉은 이는 바로 목리공이었다.
일신에 흰 유삼(儒衫)을 걸친 그의 모습은 오늘따라
더 훤칠하고 준미(俊美)했다.
그 옆으로 세 가닥의 염소수염에 가는 눈에서
잔광(殘光)을 번뜩이는 바로 환우삼귀 중
상전(商殿)의 혈천상귀(血天商鬼)가 있고 그 아래로
금빛 화복의 세 중년인(中年人)들이 각기 특유한
용모로 앉아 있다.
이들은 바로 천축대부(天竺大夫),
서장대부(西藏大夫), 북해대부(北海大夫)라 불리우는
자들로써, 과거에는 천축, 서장, 북해의
제일상인(第一商人)이었으나 현재는 서장밀성의
상전(商殿)에 복속한 위인들이다.
최초로 말을 꺼낸 사람은 혈천상귀였다.
"대저, 중원에 성행하는 상업의 내역을 보자면
표국(標局), 보석, 차(茶), 서책 및 골동품,
토지(土地), 운송(運送), 대외무역(對外貿易) 그리고
주루(酒樓), 기루(妓樓), 객잔(客棧) 등의
대인업(對人業)과 전장(錢莊)으로써 이를 일컬어
팔대상업(八大商業)이라 합니다. 이에 대한 내역을
천축대부가 말해 보시오."
코가 높고 눈이 파란 오십 정도의 장년인(壯年人)이
나섰다.
천축상업의 반을 점유하고 있던 거상(巨商)
천축대부,
"그 중에서도 차, 표국, 대인업과 전장이
사대상업으로 꼽히며 중원상업의 구할은 이
사대상업으로 쏠려 있소이다."
또한, 중원의 상업을 점유하고 있고 두 개의 큰
가문(家門)이 있으니, 이는 바로 대보방의
대보상행(大寶商行)과 마교(魔敎)에 속한
화문팔가(花門八家)의 소소전성(笑笑錢城)이었다.
이 중 대보상행은 차, 표국, 대인업에 주력하고
있으며 소소전성의 주력가업(主力家業)은 말할 것도
없이 전장(錢莊)이었다.
"본성에서 노려야 할 것 역시 이들이 주력하고 있는
사대상업일 것으로 사료되오. 소소전성의 경우는 거의
팔 할을 전장업(錢莊業)에 의지하고 있으니, 그들의
전장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곧 소소전성의 멸망과도
통하는 것이외다."
목리공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내엔 잠시 침묵이 돌았다.
진미가효가 차려져 있으나 장내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다섯 사람의 옆에는 역시 다섯의
기녀(妓女)가 앉아 있되 이들은 놀랍게도 앉은 채로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입가에 보일 듯 말듯 가는 선혈이 맺힌 것으로 보아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에 당한 듯 실로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비밀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죽음이었다.
목리공은 오랫 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것은 그의 특유의 습관이었다.
중인들에게 말을 시켜 놓은 자신은 묵묵히 듣는다.
연후 오랫동안의 침묵 끝에 짤막하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허나, 혈천상귀는 잘 알고 있다.
그 명령이야말로 지난 반 년 동안 온 천하를
무자비하게 휩쓸어 온 완벽하고도 가공할 것임을,
밝디밝 햇살이 내리앉은 목리공의 입술이 이윽고
무표정하게 열렸다.
"관건은 하나다. 대보상행과 소소전성을 서로 싸움
붙인다. 연후, 우리는 음지(陰地)에서 이득을
취한다."
어부지리(漁父之利)요, 차도살인(借刀殺人)의
지계(之計)였다.
이어서 세부적인 명령이 시달된다.
네 명의 거상(巨商)들은 숨죽인 채 목리공의 입술을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씩 웃었다.
그 웃음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홀연히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네 사람이었다.
목리공은 천천히 술잔을 들어올리며 한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놀잇배로부터 오 장여쯤 떨어진 곳의 쪽배 위에
단정히 정좌한 한 사람이 있었다.
얼음처럼 냉막한 안색이긴 하나 아름답다. 그
용모는 미녀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다.
일신에 풍기는 고아한 기품과 더불어 한 자루 붉은
수실의 검(劍)을 멋들어지게 둘러멘
금의미검객(金衣美劍客)이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매우 조용하고 침착했으나 만약 목리공이 타고
있는 배 주위로 누군가가 접근해 온다면 그것이 설사
백만의 적군(敵軍)이라 해도 이 아름다운 미검객이
들고 있는 한 자루의 검은 하늘의 번갯불처럼 피를
찾아 날뛰었을 것이다.
목리공은 가볍게 몸을 날려 그의 쪽배로
내려앉았다.
순간 금의미검객은 무심히 우수(右手)를 들어
올렸다.
가늘고 흰 손 끝마디에서 투명한 광채가 번쩍 이는
순간, 방금까지도 멀쩡하던 놀잇배가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좋은 잔옥수(殘玉手)로군."
한소리 무심한 중얼거림에 이어 두 사람을 태운
쪽배는 이내 호수 저편으로 미끄러져 갔다.
배 한 척이 부서지고 다섯 명의 기녀가 실종된
사건은 오랫동안 이곳 사람들의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진상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보총상행(大寶總商行)은 사천(四川)
중경성(重慶城)을 거점으로 하고 전 대륙에 뿌리를
내려 중원상업(中原商業)의 팔 할을 점거하고 있는
대상가(大商家)였다.
일대가주(一代家主)는 신화적(神話的)인
상술(商術)의 명인이었던 중원대부(中原大夫)요,
이대가주는 그가 나이 육십에서야 거두어 들인
수양아들 금룡대공(金龍大公) 합돈(合豚)이었다.
금룡대공 합돈,
귀족죄인의 후예를 모아 수감하는
천우뇌원(天宇牢院) 출신인 그는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과거를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 그의 양부보다도 더 뛰어난 상술을
발휘하여 불과 삼 년의 세월 동안에 대보총상행을
두배나 확장시키는 중원상업의 두 번째 신화(神話)를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금룡대공 합돈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 세력을
관계(官界)와 무림계(武林界)로까지 꾸준히 뻗치니,
무림으로는 삼대세력의 하나인 대보방(大寶幇)을
이루고, 관계로는 당금 황상(皇上)으로부터
사천정의후(四川定義侯)의 봉함을 받음과 동시에,
정통황족의 문벌인 경유공주(瓊柔公主)와
혼약(婚約)을 맺기에까지 이르렀다.
실로 약관(弱冠)의 나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성취였다.
합돈은 년전에 대보총상행의 총점주(總店主)로 역시
약관의 나이인 신의서생(神意書生) 주동(朱同)을 전격
기용했다.
신의서생 주동은 그때까지 아무도 그 이름을 아는
이가 없는 백면(白面)의 신비서생이었다.
허나, 그 또한 가히 신기에 가까운 상술을 발휘하여
대보총상행의 가세를 날로 번창케 하는데 막대한
일익을 담당하였다.
중원상업 점유율 팔 할에 소속 총원 오십만에
이르는 대보총상행!
대보총상행의 수뇌부는 크게
팔행이십팔숙사십팔가(八行二十八宿四十八家)로
나뉘어진다.
팔대상업(八大商業)의 총책인 팔대행주(八大行主)의
권한은 실로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지경이며, 그
중에서도 대총상행의 삼대주력가업(三大主力家業)인
차(茶), 표국(標局), 대인업(對人業) 등은 위세가
당당하여 표국의 대보총표국(大寶總標局), 차의
대륙상행(大陸商行), 대인업의 중원상행(中原商行)
등은 각각 일만의 전표를 천하에 두고 그 행주들은
황제보다도 더한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때는 건풍칠년의 겨울, 새해를 며칠 남겨두고
상가(商街)는 마지막 가업정리에 매우 분주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밀성지령(密城指令) 제일호(第一號),
온 대륙에 돈을 풀어 대보총표국의 수송비결을
캐내라. 단 대보총상행의 상부에서 일체 알지
못하도록 극비리에 행동할 것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정보를 캐내라.>
대보총표국의 수송은 매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온몸을 금갑(金甲)으로 두른 희귀한 말이 그것이다.
이 말들은 하루에 천 리(里)를 달렸다. 뿐만
아니라, 어찌나 힘이 강한지 천 리를 달리고도 가쁜
숨 한 번 내쉬지 않았다.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간에 물건을 싣고 달려도 먼저
도착하는 것은 대보총표국의 말이었다.
몽고의 대완종(大腕宗)과 시합을 시켜도
마찬가지였다.
이름하여 금마(金馬),
대보총표국의 이 괴상한 말로 하여 망해버린 표국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이 말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금마(金馬)는 대보총표국의 극비제일호였다.
금마성(金馬城),
그들은 오지(奧地)에 금마를 기르는 금마성이란
특별장소를 두고, 오천의 무사로 하여금 그곳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천하의 대보총표국으로 운송의뢰가
들어오면 엄중한 경비 속에 필요한 말만을 내보내는
것이었다.
눈보라와 삭풍이 몰아치는 사천의 겨울은 맵다.
한 사람이 눈을 잔뜩 머리에 이고 조그만
주점(酒店)으로 들어섰다.
대륙의 북부를 가로지르는 기련산(祈連山)의 대산맥
옆에 위치한 몇 개 안되는 주루 중 한곳이었다.
눈에 반쯤 파묻히다시피한 주루의 내부는 그지없이
초라했다.
가운데의 나무를 연료로 하는 화석을 사이에 두고
서너 개의 탁자가 그 전부였다.
들어 선 사람은 머리에 눈을 털 생각도 않고 곧장
그 중 한 탁자로 다가섰다. 그
탁자엔 이 주루의 유일한 손님 하나가 앉아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전주(殿主)."
주춤주춤 다가선 인영이 무어라 말을 꺼내자 고개를
숙인 채 술만 마시고 있던 인영의 시선이 날카롭게
그를 향했다.
뱀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은 바로 서장밀성
상전(商殿)의 혈천상귀(血天商鬼)였다.
"누가 함부로 전주란 호칭을 쓰라고 했느냐?"
"그, 그게 저어, 대부님......"
비로소 혈천상귀의 시선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무엇을 좀 알아 봤는가?"
"없습니다. 너무 엄중한 경비라서."
혈천상귀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침중한 탄식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 사천의 오지에서 꼬박 한 달을
허송세월했다.
금마성의 금마를 빼내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것도 쥐도 새도 모르게 해야만 했다. 그러나,
도대체가 금마성의 경비는 너무 엄중했다.
이미 오천 냥의 황금과 백여 명의 인원을
허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내가 알아낸 것은 금마성 안으로는 개미새끼 한
마리 들어갈 틈도 없다는 것뿐이다."
혈천상귀는 초조해졌다.
금마성의 금마를 빼내는 것은 서장밀성이 중원을
정복하는 첫 번째 시금석(試金石)이었다.
이것이 성공해야만 그 뒤로 줄을 이어 서 있는 두
번째, 세 번째 전략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금마성의 경비는 여전한가?"
"오천의 인원이 절반으로 나뉘어 이천 오백명의
일류급 무사들이 낮밤을 쉴 새 없이 교대하고
있습니다."
"......"
"또한 그들 오천의 무사에 대한 내력 역시
극비입니다. 그들은 매우 잘 훈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출신성분 역시 안개속에 가려져 있어 조금의
틈도 찾을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혈천상귀는 거칠게 잔을 들이켰다.
"금마성주(金馬城主)......"
벽력신편(霹靂神鞭) 우환(尤環)이라고 했다.
거창한 외호였지만 십 년 전 무창(武昌) 일대에서
벽뢰무장(霹雷武莊)이란 조그만 도장을 경영한 것이
그의 내력의 전부였다.
"제기랄!"
홧김에 들어가는 것은 술이다.
혈천상귀가 막 석 잔째의 잔을 입으로 가져갔을 때,
돌연 한 줄기 인영이 섬광처럼 그들의 앞으로
나타났다.
이어 공간을 감돌기 시작하는 그윽한 향기와 함께
혈천상귀 등의 놀란 시선 속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환상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한겨울 삭풍에도 불구하고 얇은 금의비단 하나를
걸쳤으며 어린아이처럼 해맑고 순수한 웃음이 얼굴
가득 감도는 아름다운 소녀였다.
순간 혈천상귀 등은 자G러질 듯 놀라 그 자리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삼가 비직 등이 총군사(總軍師)님을 뵈오!"
총군사라면, 이 여인은 바로 신화궁주 유나가
아닌가?
사막의 꽃이며 전설적인 신비녀인 유나는 배시시
웃으며 지저분한 의자위로 망설임없이 앉았다.
"우리는 오랜만에 보는 군요, 혈천(血天)!"
회계대의 늙은 주인은 정신없이 곯아 떨어져
있었다.
필시 수혈(睡穴)을 짚힌 것이리라.
그들을 힐끗 보고 난 혈천상귀는 엎드린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어찌 이런 오지까지 귀하신 몸을......"
"전쟁터에서 어찌 귀하고 귀하지 않고를 따지리오.
그동안의 성과는?"
"그것이 저어......"
노안(老顔)에 흐르는 것은 땀이다.
유나는 말없이 웃더니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혈천상귀에게 건네주었다.
"펴 보세요."
무심히 그것을 펴 보던 혈천상귀의 몸이 일순
부르르 떨렸다.
<벽력신편 우환,
사천 중경(重經) 태생, 취미 전무(全無), 음식은
가리지 않음. 시경(詩經)을 자주 읽으며, 슬하에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있음...... 中略......>
이어 우천(尤天)과 우옥경(尤玉璟)이란 이름의 두
자녀에 대해 그들의 출신성분과 내력, 현거주지,
무공, 취미, 습성까지 깨알처럼 적힌 두루마리였다.
이것은 바로 그동안 혈천상귀가 몽매에도 얻고자
하던 금마성주의 내력이 아닌가?
"이, 이것은?"
"주군(主君)께선 일을 행함에 있어 빈틈이 없으신
분, 그분은 어떤 일이든 두 갈래로 착수하십니다.
혈천 등을 이곳으로 보낸 후, 주군께선 직속기관을
풀어 따로 조사를 착수하셨으니 그 두루마리는 바로
그 결과예요."
혈천상귀는 식은 땀이 등허리를 적시는 것을
느꼈다.
주군 목리공의 직속기관,
-밀밀천정(密密天鼎)-
이 기관엔 냉혹한 검수 과달륵이 있으며 금의미검객
환미가 있다.
그밖에도 주군 자신이 특별히 선발하고 교육시킨
밀성십이천(密城十二天)이 웅크리고 있다고 들었으나
그들의 행동이 이토록 신속하고 치밀한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며, 면목없습니다!"
이마를 땅에 찧는 혈천상귀를 향해 유나는 예쁘게
웃어 보였다. 웃으며 그녀는 말했다.
"금마성주 우환은 결점이 없는 사람이예요. 그는
대보총표국내에서도 청렴결백한 자로 소문이 나
있어요. 허나 결점이 없는 사람에겐 그 결점을 만들어
주면 돼요. 이는 주군께서 늘 말씀하시는
무중생유(無中生有)의 도리지요. 혈천, 이 일에
주군께선 큰 기대를 걸고 계시답니다. 그분은 지금
직접 이곳으로 오고 계세요."
慾望의 언덕
우천(尤天)은 대보총표국 중경지부(重慶支府)의
표두(標頭)였다.
그가 금마성주의 아들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우천이 얼마나 청렴결백한
위인인가를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표두라면 표국 내에서도 수뇌부에 드는 위치였지만
그는 다리밑 초라한 움막집에서 살고 있었다.
총각인데도 그의 옷은 늘 깨끗했으며 청결한 냄새가
났다.
한 마디로 그는 누구나가 신임해 마지않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재였던 것이다.
헌데 유난히도 혹독한 추위였을 게다.
우천은 표국 일을 마친 뒤, 좀처럼 가지 않던
기루(妓樓)에 친구들에게 끌리다시피 갔다.
얼얼한 추위를 녹이는 몇 잔의 술과 화려한 주위의
장식과 함께 기루엔 잠자리 날개 같은 망사의
하나만을 걸치고 나는 듯 춤을 추며 미녀가 나타났다.
만지면 사르르 녹아 버릴 듯 뽀얀 살결에다 꿈꾸듯
영롱한 시선을 가진 여인이었다.
우천은 채홍(彩紅)이란 이름의 이 기녀가 그의 옆에
앉았을 때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말았다.
그녀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그가 꿈꾸던 이상적인
미모의 여인이었다.
어쩌면 이토록 마음에 꼭 드는 여인을 하늘이
자신을 위해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심장이 녹았다. 가슴이 녹고 몸이 취했다.
"핫하, 우천 저 친구 채홍에게 넋이 빠졌구먼."
"채홍아! 네 서방님은 아직도 동정(童貞)의 몸일
게다!"
여체(女體)는 나긋나긋하고 녹을 듯이 부드러웠다.
우천은 그 몸 속에다 최초의 정액(精液)을
쏟아부으며, 더불어 그가 지켜오던 도덕과 절제도
함께 쏟아붓고 말았다.
남자가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더욱이 청렴한
군자가 기녀(妓女)를 만난다는 것은 매우 힘겨운
일이다.
우천은 채홍의 목에 금목걸이를 걸어 주어야만
했다.
자신은 움막집에서 자면서도 그녀에게만은 푸른
기와집과 상아침상을 마련해주어야만 했다.
그는 청렴했다. 허나 양심을 속이면서까지도 채홍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번뜩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우천의 큰 행복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표국의 일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채홍의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으며, 그 손에는 월명국(月明國) 특산인
백진주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큰 나무 아래에 두 사람이 서서 우천이 채홍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우천은 지금 얼마의 빚을 지고 있는가?"
"공개적인 것이 은자 만 냥, 그리고 음성적으로
표국의 이익에서 빼돌린 것이 은자 팔천 냥 정도로
추정됩니다."
"아직 멀었군. 자신 뿐 아니라 그 아비도 감당 못할
정도의 빚을 지도록 만들어야 해...... 채홍에게
일러라. 좀 더 큰 것을 원하라고 말이야."
우옥경(尤玉璟)의 남편은 관리(官吏)였다.
당청(唐靑)이란 이름의 그는 특별히 모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평범한 인물이었다.
허나 그에게는 아내에게도 말못할 고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도박(賭博)이었다.
그는 밥먹기보다도 더 도박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의 운수는 별로 신통한 편이 못되었다.
그는 따는 것보다는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그 결과 그가 여러 도박장에서 진 빚은 거의 은자
천 냥에 이르고 있었다.
평범한 관리에게 은자 천 냥은 큰 빚이다. 당청은
오늘도 퇴청 시간이 지난 청사에 앉아 푹푹 한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이때다. 같은 관리인 섭장(攝長)이 지나다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떤가, 당형! 오늘 밤 선외루(仙外樓)에서 큰
도박판이 있다네. 물주는 연경(燕京)에서 놀러 온
부호(富豪)인데 그는 벌써 사흘째 은자 삼천 냥을
잃고 있다네. 오늘 밤 그 머저리 같은 부호에게
자네의 운세를 시험해 보G 않으려나?"
도박판의 분위기는 흥청이고 있었다.
판은 검패(劍牌),
진노야(陣老爺)라는 이름의 부호는 오늘 밤에도
벌써 은자 천 냥째를 날리고 있었다.
그는 연신 곰방대를 피워가며 자신의 쓸모없는
운세를 한탄하고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잃은 은자에
대한 애착으로 하여 선뜻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당청은 군침이 돌았다.
그는 몇 번이나 판을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보다가
마침내 선외루의 주인에게 은자 오백 냥의 차용증을
쓰고 은자를 빌렸다.
'한판, 딱 한 판이면 된다. 길게 끌 것도 없이 저
멍청이 부자 놈 덕으로 그 동안의 고민을 싹
청산해버리는 거다.'
당청이 은자 오백 냥을 들이밀자 그의 친구들은
순순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당청은 패를 잡았다.
건너편 멍청이 부자는 은자 오백 냥이란 말에
이마에 식은 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흐흥! 운이 내게 있는 징조다.'
가죽패의 촉감이 좋았다.
당청은 조심스럽게 한 장씩 패를 가늠해 보다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연환검(連還劍)!'
검패의 족보 중에 오천왕(五天王) 다음의 족보다.
오천왕은 평생 가야 한 번 잡을까 말까한 것이니,
당청은 벅찬 가슴을 끌어 안으며 짐짓 아무 내색도
않으려 노력했다.
"진노야의 패는 어떻소?"
이마의 식은 땀이 많아지는 것으로 신통찮은 패인
것이리라.
당청은 의기양양하여 선외루 주인을 불렀다.
자신의 패를 슬쩍 귀뜸해 보인 다음,
"오백 냥만 더."
누가 보든 대세는 확연했다.
당청은 기세등등하게 주인이 가져온 오백 냥을 더
걸었다.
"추가가 없다면 이 판은 내 것인 것으로 알겠소."
진노야는 쩔쩔맸다.
그는 몇 번이고 자신의 패를 확인해 보다가
조심스럽게 오백 냥을 내밀었다.
"호오?"
당청은 짐짓 탄성을 발하며 주위의 친구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오늘에야 임자를 만난 것 같소. 나는 평생의
도박운을 걸고 이 판에 천 냥을 걸고자 하오!"
은자 열 냥이면 다섯 식구가 한 달을 먹고사는
세상이다.
주위의 모든 시선들이 일제히 당청의 판으로
쏠렸다. 도합 은자 이천 냥이 걸린 판이다.
먼저 당청의 패가 열렸다.
순간 장중에서 탄성이 터져나왔다.
"연환검!"
당청은 득의만면하여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천 냥의 은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내에게 큰소리를 치고, 금의비단에 황실 같은
집에 사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승자의 오연한 시선을 패자에게 돌렸다.
다음 순간 당청은 십 장 밖에서도 보이도록 몸을
떨고 말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진노야의 다섯 장 패,
그것은 놀랍게도 오천왕(五天王)이었다.
"으음......"
침중한 신음과 함께 우환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두장의 서찰은 각각 아들과 딸에게서 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다 읽는 순간 고질인 허리병이
도지는 것을 느꼈다.
"무지한 것들."
<아버님 전상서,
불초 천아는 죽음을 무릅쓰고 서신을 드립니다.
불초는 도저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몇 번인가 죽을까 망설이다 가문의
명예를 생각하여 필을 들었습니다...... 中略......
그리하여 채홍도 종적을 감추고 불초는 안팎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아버님 전상서,
남편 당청의 잘못을 먼저 불효여식은 울며
사죄드립니다. 그는 이미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빚을 지고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中略......
아버님! 집안의 체통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선처를 내려 주시면......>
아들 우천이 진 빚이 은자 만팔천 냥에 사위 당청이
진 빚이 은자 이천 냥이면, 도합 이만 냥의 빚이다.
우환은 손을 이마에 얹었다.
평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그에게 이처럼 엄청난 돈이
있을 리 만무다.
설사 상부에 건의하여 돈을 빌린다 해도 돈의
용도를 추적하다 보면 아들과 사위에 비행이 만천하에
폭로될 것이다.
우환은 난생 처음 청렴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벽장의 문을 열었다.
이미 삼십 년 동안 입에 대지 않던 술이었다.
그러나 먹어야 했다. 최소한 이 밤만이라도 먹고
취해야 했다.
여인, 이낭랑(李娘娘)은 탄식을 터뜨렸다.
이미 주루엔 많은 사람들이 올라오고 또 가며
그녀를 불렀으나 그녀는 도무지 그쪽으로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녀의 정부(情夫),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에게 이
술집을 사주고 맡긴 금마성주 우환이 벌써 이레째
이곳에서 취해 있었다.
아무리 기분 좋은 날에도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던
그가 아니던가?
'은자 이만 냥이라니......'
생각할 수록 한심한 액수다.
늘그막에 저토록 큰 시련을 맞은 그가 측은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때다. 그녀의 귓속으로 돌연 솔깃한 대화 하나가
쏘아져 들어왔다.
"사정이 딱하군요. 연리(年利)를 일년 간 미루어
주고 왔습니다."
"잘했네. 사람은 각박해서 안되는 법이니,
감숙(甘肅) 쪽의 대부현황(貸付現況)은 어떤가?"
"그쪽은......"
고급 짐승가죽 외투를 걸친 일견해 보기에도 부호의
냄새가 역력한 두 사람이었다.
둘 다 헌걸차고 준수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상전으로 보이는 백색 곰외투의
청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왔다.
그들의 뒤에는 얼음처럼 투명한 피부의 금의미검객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이레 전이던가?
무슨 전장(錢莊)을 경영하는 대부호라고 언뜻
들었다.
그때는 무심히 넘겼으나 이제는 대부(貸付)라는 두
글자가 천둥처럼 크게 들리는 것이었다.
이낭랑은 잠시 망설이다가 즉시, 주방에다 최고급의
술과 안주를 준비하도록 분부했다.
연후, 그녀는 조심스럽게 음식상이 나가기를 기다려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금마(金馬)란 말입니까?"
이마를 땅에 박은 채 금마성주 우환은 식은 땀을
흘렸다.
백색외투의 청년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급히 천축으로 갈 일이 있어서
수송수단을 찾는터였던지라, 대보총표국의 금마라면
천축까지 간신히 시간을 대어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오."
조심스럽게 늙은 정부와 젊은 구세주의 눈치를
살피던 이낭랑이 황급히 거들었다.
"여보, 이분들은 천축까지 시간을 대어가지 못하면
큰 손해를 본다지 뭡니까. 그래서 무이자로 돈을
대부해주겠다는 거 아녜요?"
고개를 끄덕이는 젊은 구세주를 힐끗 바라본
이낭랑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더군다나 말을 쓰신 후엔 즉시 보내 주신다니,
이것이 당신의 권한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금마성주 우환은 식은땀을 훔치며 다짐하듯 물었다.
"분명히 천축입니까?"
백색외투의 청년은 싱긋 웃으며,
"원하신다면 그쪽의 사람을 하나쯤 딸려 보내셔도
좋소."
순간, 금마성주 우환은 이마를 땅에다 박으며
외쳤다.
"우환은 이 일을 거절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완벽이란 없다.
많은 음모가 태반이 실패하는 것도 그것이 인간이
꾸미고 인간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금마성도 그 자체로선 완벽했다.
그러나 대보방주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는 금마를
너무 믿지말았어야 했다.
그것에 대한 투자로 이득을 봤으면 또 다른
투자가치를 찾아 눈길을 돌려야 했을 것이다.
<밀성지령(密城指令) 제이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대륙상행(大陸商行)의
차(茶)를 사들이라.
단, 그들의 상부에서 절대로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할 것.>
대보총상행의 두 번째 주력가업인 차를 주관하는
대륙상행에선 매우 특이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선 그들의 차는 어느 것을 막론하고
최고급이었다.
중원 어느 곳에서도 대륙상행의 차만큼 좋은 것은
구할 수가 없었다.
또한 대륙상행에선 그때까지 유래가 없던
연점상(連店商)이란 것을 만들어 독특한 판매 방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즉, 대륙상행과 연맹을 맺은 상가(商家)에만 차를
내주어 팔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차의 품질을 높이고 이름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대륙다상(大陸茶商)>이란
이름의 연점상들은 좋은 차를 기호하는 고객들이 줄을
서게 되었던 것이다.
중원차의 구할에, 연 인원 십만으로 차에 관한 한
그야말로 독보적인 경지를 걷는 대륙상행이었다.
그러나......
"대륙상행의 차를 구입하는 데는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것들인가?"
"첫째, 연점상인 대륙다상들은 절대로 많은 양을
팔지 않습니다. 둘째, 조금씩 사모은다 해도 전
중원을 다하자면 본성이 가지고 있는 은자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본성의 재산 대부분은 토지입니다."
"많은 양을 팔지 않는다면 팔게 만들면 된다. 또한
은자가 부족하다면 보충시키면 된다. 안되면 되게
만들면 되고 없으면 있게 만들면 되는 법,
무중생유(無中生有), 이는 나 목리공의 첫번째
도리이다."
-은자(銀子)가 부족하다면 보충시키면 된다-
소소전성(笑笑錢城)은 꿈결처럼, 환상처럼 돈을
내주고 그 돈을 갚지 못하면 목숨으로 변상하게 하는
악명높은 화문팔가(花門八家)의 한 집단이었다.
허나 근간에 이르러 소소전성은 큰 위기에 봉착하고
있었다.
대보방 등의 신흥 상업세력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대보방의 돈을 빌렸다.
설사 조금 비싼 값이더라도 소소전성의 물건에는
등을 돌렸다.
전장업(錢莊業)이 팔할이요, 기타 표국이며 대인업
등으로 가업을 꾸미고 있던 소소전성으로선 말할 수
없이 큰 타격이었다.
급기야 그들은 궁여지책으로 대부(貸付)의 조건을
대폭 완화해야만 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잃은 신망은 좀처럼
다시 회복되지 않는 안타까운 세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화려한 대청에 원탁을 중심으로 삼 인이 모여 앉아
있다.
최상석에는 비대한 몸에 실처럼 가는 눈을 지닌
보살형의 인물 살수소존(殺手笑尊)이 앉아 있다.
이 위인은 바로 신비의
소소전성주(笑笑錢城主)이자, 마교(魔敎)의 핵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살수소존 방립(方立)이며, 그의
아래 좌우로는 소소전성의 이대거두(二大巨頭)인
흑백쌍마전(黑白雙魔錢)이 음침하게 앉아 있었다.
지금 삼 인의 시선은 대청의 한쪽을 향하고 있었다.
붉은 갈기에 역시 붉은 털을 지닌 일견해 보기에도
희대(稀代)의 신마(神馬)임이 분명한 말이 서 있는
곳이었다.
묵묵히 말을 바라보고 있던 살수소존이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저것이 바로 대보총표국의 금마(金馬)란 말인가?"
검은 얼굴의 흑마전(黑馬錢)이 말을 받았다.
"관외(關外) 장백(長白)의 특종(特種)인
혈홍마(血紅馬)입니다. 이미 다른 말과 경주를
시켜보았으며 그 속도와 힘으로 보아 대보총표국의
금마가 확실합니다."
"으음, 금마의 비밀이 바로 혈홍마일 줄이야. 하긴
앞뒤로 꽁꽁 금갑을 둘러 놓았었으니 혈홍마인지
백홍마인지 알 수도 없었지만."
살수소존은 실같이 가는 안광(眼光)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저 말을 가져 온 자의 신분내력은?"
"목노야(木老爺), 그는 자칭 서역의 상인이라고
했습니다. 수하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의 행적은
서역으로부터 온 것이 확실하다고 합니다."
"서역의 상인이 왜 대보방의 금마(金馬)를 훔쳐
우리에게 주는가?"
"그는 그것으로써 황금 오십만 냥 정도를
대부(貸付)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또한, 본성의
상부인 마교(魔敎)의 비호 아래 자신의 상업을
확장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왔으며, 원한다면 자신의
힘으로 혈홍마를 얼마든지 얻어올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금마가 혈홍마임을 안 이상 그것을 확보하는 것은
우리 힘으로도 충분해! 그의 상업은?"
"비단 포목입니다."
살수소존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금마(金馬),
저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엄청난 소득이었다.
소소전성은 단숨에 표국업(標局業)을 장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여세를 몰아 전장업의 잃어 버린
신용을 회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보방과의 한 판 승부, 이는 살수소존이 오래
전부터 꿈꾸어 오던 숙원이었다.
이제 그 실마리는 잡혔다.
그러나 한 가지, 타인(他人)의 힘으로 그 실마리의
끈을 잡았다는 사실이 그는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살수소존을 힐끗 바라본 백마전(白馬錢)이 고개를
꺄우뚱하며 흑마전에게 시선을 던졌다.
"대보방의 금마를 빼내어 올 정도라면 결코 소홀히
볼 조직이 아니오. 우리는 그 목노야란 자를 끌어
들였다가 우리 안에서 호랑이를 키우게 되는 것이
아닌지?"
순간, 흑마전의 입가에 사악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용할 때까지 최대한 이용을...... 그가 상술은
뛰어날지 몰라도...... 흐흐, 마종화문(魔宗花門)의
무예는 천하무적이오."
바로 그때, 두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살수소존은
눈을 번쩍 떴다.
"목노야를 데리고 오라."
목노야(木老爺)라지만 노야라는 호칭이 붙기에는
너무 젊다. 또한 아름답다.
소소전성의 세 거두는 문을 밀고 들어서는 청년을
보는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하늘의 별처럼 신성한 두 눈에, 여인처럼 붉은
입술에 맑은 살결, 뺨에 난 반달 모양의 상흔을
위시로 해서 청년의 얼굴에는 많은 상처가 있었다.
허나 또다시 보자니 그 상처들은 색다른 매력이
되어 아예 눈에 띄지도 않는 것이다.
일생을 도산검림(刀山劍林) 속에서 뒹굴어 온 세
마두였지만 이때만은 생전 느껴보G 못했던 순수한
감흥을 느끼고 말았다.
'아름다운 청년이군.'
어색한 침묵 후에,
"목노야라 불러 주시오."
청년의 낭랑한 목소리에 세 마두는 언뜻 정신을
차렸다.
미청년은 이미 자리에 몸을 앉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집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와 동작이다.
살수소존의 심중 미간을 찌푸렸으나 그의 얼굴은
기이하게도 웃고 있었다.
"방립이오."
말이 끝나는 순간, 돌연 그의 소맷자락 끝에서 한
마리의 뱀이 솟아 나왔다.
그것은 눈 깜짝할 새에 미청년 목노야의 머리 위에
올라앉더니 그의 이마에 붉은 혓바닥을 늘어뜨리는
것이다.
허나, 미청년은 태연자약하다.
그는 물처럼 고요한 시선을 깜박이지도 않은 채
살수소존에게 고정시켰다.
"중원의 뱀 구경은 처음이로군."
살수소존의 얼굴에 떠오른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좋은 배짱.'
그는 낄낄 대소를 터뜨리며 뱀을 거두어 들였다.
"무례를 용서하시오. 좋은 동업자를 구하기 어려운
세상이라라......"
"소생의 조건은 생각해 보셨는지?"
"황금 오십만 냥이라면 본가의 재산 절반이오. 허나
금마라면 그 정도의 가치는 있으되 그밖의 다른
조건은?"
"없소. 단, 오천 정도의 인원이 필요하오만."
"호오! 어디다 쓰시려고?"
미청년의 얼굴에 신비로운 웃음이 떠올랐다.
"대보총상행의 차(茶)를 좀 사 볼 생각이지요."
살수소존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유는?"
"동업자의 성의표시라고나 할까? 어차피 손을
잡기로 하였으니 좀더 생색을 내고 싶어서,
그것이라면 신년(新年) 선물로 어떠실지?"
순간 흑백쌍마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차라면 대보총상행이 두번째로 주력하고 있는
가업이다.
그 엄청난 것을 이쪽에게 새해 선물로 주겠다니,
살수소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그는 오랜 후에야 침중한 어조를 흘려냈다.
"말씀은 고마우나, 한 가지만 묻겠소."
"무엇이든지."
"귀공이 중원으로 들어온 후, 대보방으로 가지 않고
이곳으로 온 까닭은?"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돌연, 허공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말 한 마디 여하에 따라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순간이었다.
허나, 미청년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예 대보방의 책임자는 만나 볼 수도
없었소."
순간, 살수소존의 입을 뚫고 대소(大笑)가
터져나왔다.
"와하하하하!"
그는 웃으며 목노야의 손을 덥석 잡더니 주위를
향해 외쳤다.
"창고의 문을 열라! 목노야가 얼마를 원하든 모두
내어 드려라! 사람을 모아 목노야의 지시를 듣도록
하라!"
-많은 양을 팔지 않으면 팔도록 만들라!-
유거(劉去) 신풍철룡(神風鐵龍)이란 외호의 그는
중원 차의 팔할을 점지하고 있는 대륙상행의 손꼽히는
인재였다.
그의 무예는 사천아미(四川峨嵋)의 진전을 이어
받아 초일류급이었으며, 그의 머리는
제갈량(諸葛亮)을 뺨치도록 비상했다.
누가 보더라도 그는 앞 길이 환히 트인
청목(靑木)이었다.
헌데 유거는 요 며칠 동안 폭음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유거는 술에
추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곡기(谷奇)......'
곡기, 그는 유거와 똑같은 날 대륙상행에 몸을 담은
동기였다.
허나 곡기는 모든 면에서 유거를 한 걸음씩 앞질러
나가고 있었다.
상술이 그랬으며, 무예가 그렇고, 두뇌가 그렇다.
한 마디로 그가 존재하는 한 유거는 아무리 날고
뛰어도 제이인자(第二人者)에 불과했다.
오늘의 일만 해도 그렇다. 차의 출고(出庫)를 맡고
있는 유거는 그 복잡하고 어려운 재고정리를 완벽하게
해냈다.
허나, 그보다 앞서 전국 연점상의 재고를 파악해 온
곡기에게 모든 칭찬은 돌아갔던 것이다.
"빌어먹을!"
유거는 사납게 술상을 내리쳤다.
"내가, 이 유거가 그 놈보다 못한게 무어란
말인가?"
이때 돌연, 부드러운 목소리 하나가 그의 말을
받았다.
"심사가 울적하신 모양이구료. 형장, 소생이 합석을
해도 될런지."
유거의 충혈된 시선 속으로 아름다운 미청년 하나가
쏘아져 들어왔다.
"당신은 누구?"
"까닭없이 울적한 사람이오. 형장의 모습을 멀리서
보자니 소생의 마음 또한......"
그렇잖아도 누구에게든 심사를 토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유거다.
그는 즉시 목(木)이라는 성의 미청년과 어깨를 끼고
주루를 나섰다.
한 집에 이어 두 집, 그리고 세 집, 아무리 못
마셔도 수십 항아리는 마셨을 게다.
술과 술친구에게 실컷 심중의 울분을 토하고 난
유거는 네 번째 술집에서 끝내 만취하고 말았다.
"아시겠소, 목형. 나 유거는 그 곡가 놈에게 뒤질
게 하나도 없단 말이오?"
"헛허, 물론이오. 그럼 그 곡가만 세상에서
없어지면 문제는 모두 해결되겠구료."
담담한 말이었다.
그러나 순간, 유거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무슨 말?"
"유형이 원한다면 곡가는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질
수도 있단 말이오."
유거의 당황한 시선이 미청년을 향했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
"말했지 않소? 까닭없이 우울한 사람이라고."
잔잔한 시선 그대로 미청년은 품속에서 쪽지 한
장을 꺼냈다.
"이곳에 유형의 직인(職印) 하나만 찍어 주면 모든
고민은 해결되오."
쪽지는 일종의 납품서(納品書)였다.
즉, 각 연점상으로 들어 가는 차(茶)의 확인서였던
것이다.
유거는 그제서야 미청년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바로 소규모의 다상인(茶商人)일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경작한 나쁜차를 대륙상행의
이름을 이용하여 판매하려는 것이다.
유거의 시선이 빠르게 쪽지를 훑어 나갔다.
모두 이십 합(盒)의 분량이다.
소규모의 다상인에겐 큰 것일지 몰라도 한 개의
연점상을 상대하는 유거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과거에도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모두 거절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제일인자(第一人者).'
최고의 자리에 서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유거의 안색이 짧은 시간 동안에 여러차례
변해갔다.
욕망과 도덕과 배신, 신의, 야망과 이성의 상반된
언어가 머리를 혼란하게 하고 있었다.
조용하나 성실한 음성이 귓전을 파고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 하였으며
식시무자위준걸(識時務者爲俊傑)이라 하였거늘...
허나 나는 유형을 잘못 본 모양이오."
유거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음 순간, 그는 거의 빼앗다시피 쪽지를 받아
들었다.
"하겠소!"
바로 그 무렵 성(城)의 다른 곳으로는 한 대의
마차가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다.
이 마차의 속도는 몹시 느렸다.
밤이라곤 하나 번화가의 사람은 여전히 많았으며,
평범한 마차는 그 인파 속을 유유히 파고 들었다.
곡기(谷奇)는 몹시 기분이 좋았다.
얼큰한 한 잔 뒤에 그는 노부모에게 드릴 선물을
한아름 안고는 휘적휘적 길을 걷고 있었다.
마차가 옆을 스치는 소리를 들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곡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인파 속을 무례히 헤집는 마차의 주인에게 한
마디 해줄 생각이었다.
"도대체."
그러나 순간,그의 벌린 입 속으로 한 자루 검이
날카롭게 박혀 들었다.
"학!"
피하고 자시고 할 새도 없이 곡기는 뒤통수까지
단숨에 꿰뚫리고 말았다.
회의에 찬 시선으로 속도를 빨리하여 사라지는
마차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몸은 스르르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노부모에게 드릴 선물 또한 땅에 나뒹굴었다.
유거(劉去)가 쪽지에 도장을 찍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스무 합의 차라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왜
그것을 주군께선 그토록 어렵게 얻으십니까?"
볼멘 소리로 투덜대듯 말하는 혈천상귀를 향해
목리공은 씩 웃어 보였다.
웃으며 그는 유거의 직인만을 쪽지에서 도려내더니,
품속에서 또 다른 하나의 두루마리를 꺼내어 그곳에다
붙였다.
"내가 필요한 것은 유거의 도장 뿐이었지."
두루마리에 쓰인 글을 다음과 같았다.
<이천 합의 차(茶)를 중앙으로 급송할 것,
촌각을 지체해선 안됨.
본점(本店) 출납장령(出納掌令) 유거(劉去).>
얼떨떨한 표정의 혈천상귀를 향해 목리공은 조용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서둘러야겠다고 생각지 않나? 유거는 내일
틀림없이 오늘 직인을 찍어준 스무 합의 차를
확인하려고 지점에 문의를 할 것이다. 그 전에 우리는
이 두루마리대로 차를 수거해야 한다. 이 천 합씩
일만의 점포이니 도합 이천만 합이다."
목리공은 의장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신비로운
웃음을 피어올렸다.
"소소전성에서 얻어온 인원을 모조리 사용하도록.
차를 실어 오는 선두 말은 금마를 이용하는 것도
좋겠지. 본점 출납장령의 직인에다 금마라면 그들은
조금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금마성을 헤집어 한 마리의 금마를 얻더니,
그것으로 엄청난 돈과 인원을 간단히 확보했다.
연후,그 돈은 한 푼도 쓰지 않고 또다시 이천만 합의
차(茶)라니,
실로 하늘과 땅도 곡(哭)을 귀계(鬼計)요,
신계(神計)였다.
목리공은 나른히 기지개를 켰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차는 소소전성에다 갖다 놓도록 하고, 그 후에
나를 좀 깨워 주게."
말이 끝났을 때, 이미 그는 코를 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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