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주인 없는 경복궁에서
우리 근대사에는 슬픔과 고통이 진하게 배어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세계사적 흐름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파도였고, 우리의 근대는 결국 외세의 압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우리나라 근대의 시작을 언제로 잡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지만, 1876년 부산 개항과 1880년 원산 개항 그리고 1883년 제물포(인천) 개항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네덜란드계 미국인 화가 휴버트 보스(Hubert Vos)가 1898년 조선을 방문해서 그린 〈서울 풍경〉은 근대가 막 시작되고 있는 서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림 오른쪽 멀리 보이는 경복궁 건물 세 채 중 맨 앞이 정문인 광화문이고, 그 뒤가 근정전이며 맨 뒤가 경회루다. 광화문을 출입문으로 하는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으로, 당시 서울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로서 위풍당당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 경복궁에는 우리나라 근대의 고통스러운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1865년(고종2) 4월, 흥선대원군은 임진왜란(1592)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기 시작했다. 공사는 3년 4개월 만에 끝났고, 고종은 1868년 7월 새로 지은 경복궁에 입주했다. 그러나 4만여 명의 백성을 강제 동원하고, 엄청난 중건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강제로 기부금을 받고 당백전을 주조해 경제를 파탄시키는 등, 경복궁 중건공사는 나라의 기강을 뿌리째 흔들었다.
이 무렵 러시아 함대는 원산, 프랑스 함대는 한강, 미국의 제너럴셔먼호는 대동강에 나타나 조선을 위협했다. 고종은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자 민 왕후(명성황후의 당시 호칭)의 도움을 받아 대리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의 권한을 환수하고 직접 통치에 나섰다. 그리고 부산, 원산, 제물포 등의 항구를 개방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펼쳤다.
개항이 되자 일본을 비롯한 중국, 러시아, 미국, 독일, 영국 등 수많은 외국 배가 조선에 왔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 그리고 1894년 동학혁명 진압 과정에서 조선왕조는 대외적으로 허약함을 노출했고, 일본 · 청나라 · 러시아 세 나라는 호시탐탐 조선을 노렸다. 정국은 극도로 혼미했고, 휴버트 보스가 〈서울 풍경〉을 그린 1898년에 고종은 경복궁에 없었다. 왕은 어디로 갔을까?
개항 이후 일본과 중국, 러시아는 조선을 자신들의 독점적 영향권 아래 두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그중 일본이 가장 적극적이었는데, 1894년 청일전쟁 승리를 발판으로 대륙과 한반도 침략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 국정에 깊이 관여하던 명성황후가 일본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1895년(고종32) 10월 8일 새벽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서울 주재 일본 공사의 지휘 아래 〈한성신보(韓城新報)〉 주필 구니토모 시게아키(國友重章)가 일본에서 건너온 자객[낭인(浪人)]들을 이끌고 경복궁 내 건청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그러나 소장 역사학자들은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살해된 역사적 사실을 을미사변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명성황후 시해참변’이 좀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이 참변 이후 들어선 친일 김홍집 내각은 음력을 폐지하고 양력을 도입하는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을미개혁을 선포하고, 성인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린다. 그러나 백성들은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는 야만적 조치로 여겼고, 개화를 ‘일본화’로 받아들였다. 결국 단발령은 명성황후 시해참변 이후 팽배해 있던 반일감정을 폭발시키는 기폭제가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이 틈에 고종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나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옆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아관파천(俄館播遷)]. 김홍집의 친일 내각은 붕괴되었고, 새로 구성된 친 러시아 내각은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단발령을 철회했다.
그렇게 1년 동안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정국을 운영하던 고종은, 1897년 2월 환궁할 때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경운궁으로 갔다. 당시 경운궁 주변에는 외국 공관들이 모여 있어, 일본이 함부로 군사를 동원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경복궁은 1896년 이후 계속 비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정치적으로 몹시 불안정했던 조선에 배를 타고 들어온 외국인들 중에는 자국의 정치적 ·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외교관과 상인이 많았다. 간간이 기독교 선교사들도 함께 왔는데, 이들은 주목적인 선교를 하면서 서양식 교육과 의학을 조선에 소개하는 데에도 앞장을 섰다. 배재학당을 세운 아펜젤러(H. G. Appenzeller), 연희전문의 언더우드(H. G. Underwood), 숭실학당의 베어드(W. M. Baird), 제중원의 앨런(H. N. Allen), 여성 전문 병원인 보구여관의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등.
외교관과 선교사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활동하기 시작하자, 소수지만 호기심 많은 언론인과 여행가 그리고 화가들도 하나둘 극동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나라 조선을 찾아왔다. 특히 이때 방문한 화가들은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을 남겼다.
스코틀랜드 화가 콘스턴스 테일러(Constance J. Tayler)는 1894년경부터 몇 차례 방문해서 그린 서울 풍경을 자신의 책 《코리아앳홈(Korea at Home)》(1904)에 남겼다. 이보다 앞선 1886년에는 영국의 탐험가 영허즈번드(F. E. Younghusband)가 백두산에 올라 수채화로 그린 〈천지 풍경〉을 여행기에 싣는 등 많은 화가와 여행가가 ‘은둔의 나라’ 조선을 신기하게 둘러본 후 그 모습을 유럽과 미국의 여러 잡지에 글과 그림으로 전했다.
1894~1897년, 네 차례에 걸쳐 조선을 다녀간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은 자신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1897)에 서울을 묘사하면서 “인구 25만 명의 도시 서울은 다른 나라들의 큰 수도와 비교해 당당할 자격이 있고, 다른 어느 나라의 수도보다 아름답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당시의 작품들은 대개 책에 소개된 도판으로만 전할 뿐 원화는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작품의 수준도 그다지 높지 않다. 다만 〈서울 풍경〉을 그린 휴버트 보스는 개항 초기에 조선을 방문했던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비교할 때 회화적 수준이 월등히 높고, 원화가 후손들에 의해 잘 보존되어 전하고 있다.
〈서울 풍경〉의 오른쪽에는 흰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지금의 태평로에서 조금 왼쪽 부근이다. 만약 보스가 웅장한 경복궁만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평범한 풍경화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흰색 도폿자락을 휘날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행인을 몇 명 그려 넣어, 당시 조선 사람들의 ‘보편적 특징’을 화폭에 담음으로써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보스가 이 부분에 흰옷 입은 행인들을 그려넣은 건 우연히 그들이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1911년에 쓴 〈자서전적인 편지〉각주1) 에서 “그곳(조선)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민족 중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시 ‘유령처럼’ 흰옷을 입고 마치 꿈속에서처럼 아무 말 없이 걸어다녔다”고 묘사했다. 그가 조선에서 흰옷 입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했음을 알 수 있다.
보스가 미국에서 〈서울 풍경〉을 전시할 때 사용한 제목은 ‘미국 공사관에서 본 서울 풍경(Seoul, Korea From the American Legion)’이었다. 그는 경운궁 옆 미국 공사관(지금의 미국 대사관저)에 있는 언덕에서 경복궁과 당주동, 신문로 일대를 내려다보며 이 작품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림 왼쪽 한옥 옆 공터에 총을 들고 서 있는 군인이 보인다. 이곳은 어디기에 총을 든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는 걸까?
문화재와 옛 건물의 위치를 연구하는 우리문화재자료연구소의 이순우 소장은 〈서울 풍경〉을 본 뒤, 공터는 현재 덕수초등학교 부근이고 한옥은 영국 공사관 왼편에 있다가 1894년에 해체된 수어청(守御廳)이 사용하던 건물이라고 추정했다. 수어청은 중앙군영의 하나였으니, 공터는 연병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어청은 1894년에 해체되었기 때문에, 보스가 이 그림을 그린 1898년에는 한옥이 더 이상 수어청 소속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군인이 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는 것일까?
〈독립신문〉 1898년 7월 30일자에 “전 수어청 앞길부터 아라샤(러시아) 공관 뒷문 길과 영국 공관 뒷문 길, 대궐 서편 회극문 앞길까지 요사이 병정들이 엄밀히 파수하여 내왕하는 사람들이 그 길로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당시 정동에는 각국의 외교 공관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에, 아관파천 이후 경계를 강화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 수어청 건물 오른쪽 뒤편에 있던 주한 영국 공사관 앞에서도 영국 해군이 보초를 서면서 깃발로 사람들의 통행을 통제하는 모습을 그린 삽화가 1898년 3월 19일자 〈런던뉴스〉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보스는 당시 왜 우리나라에 왔고, 외교관도 아닌 그가 어떻게 미국 공사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뉴욕타임스〉 1897년 11월 7일자 기사에 의하면, 보스는 하와이왕조의 마지막 공주 카이킬라니와 결혼한 뒤 동남아시아를 일주하는 여행 도중에 조선을 방문했다. 스케치여행을 겸한 신혼여행이었다. 보스는 〈자서전적인 편지〉에서 “미국 공관에서 여러 달을 묵었는데, 공관 건물 중 하나(1등서기관의 집)를 내주어 마음대로 생활과 작업을 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회상했다.각주2)
보스가 당시 미국의 유명 정치인과 재계 인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리는 유명한 화가였다고 해도, 공사관 안에 있는 1등서기관의 집을 몇 달씩 사용하도록 내줬다는 건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런데 이 ‘특혜’ 속에 우리 근대사의 한 자락이 담겨 있다.
보스는 〈자서전적인 편지〉에서 “미국인 시인이자 광산업자인 헌트와의 친교(그리고 제 작업에 대한 그의 관심) 덕분에 그의 안내를 받아 서울로 갔다”고 밝혔다. 헌트가 바로 평안북도의 운산금광을 개발하는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의 공동대표였는데, 운산금광은 미국 공사 앨런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1884년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온 앨런은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을 치료한 인연으로 어의에 임명되었고, 고종의 지원을 받아 제중원을 설립했다. 그 후 미국 정부의 외교관으로 발탁되어 주미 한국 공사관 서기관,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을 역임하면서 고종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1895년 앨런은 ‘10년간 한국을 위해 봉사한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훗날 동양 최대의 금광이 되는 운산금광의 채굴권을 받은 뒤, 미국인 자본가 모스(J. R. Morse)에게 인계했다. 그러나 모스가 자금 압박에 시달리자 앨런은 또 다른 미국인 사업가 헌트(S. J. Hunt)를 끌어들였다. 모스에게 3만 달러를 주고 운산금광 채굴권을 확보한 헌트는 500만 달러라는 거금을 모아 동양합동광업주식회사를 설립한 뒤, 첨단 광업 장비를 투입해 운산금광 개발에 나섰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문건에 따르면, 헌트는 고종을 알현할 때 미국 공사였던 앨런을 통했다. 앨런과 헌트는 각별한 사이였고, 그런 헌트가 보스를 데리고 왔기 때문에 공사관 안에 있는 1등서기관의 집을 몇 달 동안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보스는 단순히 신혼여행을 즐기기 위해 조선과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했던 것일까?
휴버트 보스(Hubert Vos, 1855~1935)
1855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벨기에의 ‘브뤼셀 왕실학원’에 들어가 정통회화를 공부했고, 이후 파리와 로마에서 회화수업을 받았다. 1886년 ‘파리 살롱전’에서 실내 풍경화로 금상을 받았고, 1887년 암스테르담의 ‘세 도시 연례전’에서도 금상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 해부학과 조각 또한 공부해 초상화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1891년 영국 왕립초상화가협회의 창립회원이자 정회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해에 네덜란드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초상화 화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893년 이후에는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