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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안조씨 21원파 집의공파/ 분파도(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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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의공파(執義公派)는
함안조씨(咸安 趙氏) 중시조이신 12대 정절공(貞節公) 조 려(趙 旅)선조님의
셋째 손자이신 무진정선생(無盡亭 先生) 조 삼(趙 參)을 파조(派祖) 로 하며,
선생의 후손에서 아래와 같이 5개 지파(支派)로 분파(分派) 하였습니다.
1) 승지공파(承旨公派) 파조: 17대: 휘(諱) 준남(俊男) * 후손세거: 함안, 서울, 마산.
2) 낙천공파(樂川公派) 파조: 17대: 휘(諱) 영남(英男) * 후손세거: 의령, 서울.
3)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파조 17대: 휘(諱) 귀상(貴祥) * 후손세거: 함안.
4) 방호공파(方壺公派) 파조: 17대: 휘(諱) 준도(遵道) * 후손세거; 청송, 영월, 서울.
5) 무과공파(武科公派) 파조: 17대: 휘(諱) 검개(儉凱) * 후손세거: 청송, 대구,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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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의공(執義公) 조 삼(趙 參) 무진정선생(無盡亭先生)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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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대- 39- 17 집의공(執義公) 조 삼(趙 參).
- 21원파 中 9번째 집의공파(執義公派) 파조(派祖)
- (生) 조선 성종 4년1473년(계사생)에 태어나셨으며,
- (卒) 조선 숙종 39년 1544년(갑진년) 3월 12일 별세(壽 72세), 기일(忌日: 3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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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朝鮮 中期)의 문신(文臣)으로, 본관(本貫)은 함안(咸安)이다.
선생(先生)의 휘(諱)는 삼(參), 자(字)는 노숙(魯淑), 호(號)는 무진정(無盡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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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先生)의 부친은 통훈대부, 진산군수를 역임 하시고,
증 참판공 휘(諱) 동호(銅虎)이시며, 모친은 정부인(貞夫人) 고성이씨(固城 李氏),
두분의 슬하에 7형제 순(舜), 창(昌), 삼(參), 적(績), 발(發), 건(騫), 연(淵) 中 셋째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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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부의 휘(諱)는 려(旅)이시며, 조선 단종임금 생육신이신 정절공 어계선생이시다.
증조부의 휘(諱)는 안(安)이시고, 사복시정을 하셨다.
고조부는 휘(諱) 열(悅))이시며,
고려말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신 전서공(典書公) 금은선생(琴隱先生)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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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3년(계사생) 조선 성종 4년에
증) 참판공 휘(諱) 동호(銅虎)의 셋째아들로
향리(鄕里)인 함안군 군북면 원북동에서 태어나셨으며,
정절공(貞節公) 어계선생(漁溪先生)의
일곱손자(순, 창, 삼, 적, 발, 건, 연) 中 셋째 손자(孫子)이다.
휘(諱)는 삼(參), 자(字)는 노숙(魯叔) 호(號)는 무진정(無盡亭)이시며
1489년(기유년) 성종임금 20년 17세에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1494년(갑인년) 성종임금 25년 봄에 향인(鄕人) 절도사 이거인께서 공(公)을 보며,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되고 크게 될 인물이라 하시며,
양 집안간이 혼사를 주선하여 절도사 이거인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1495년(을묘년) 연산 원년에 아들 정균을 낳았다.
1507년(정묘년) 조선 중종임금 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1513년 가을에 함양군수를 제수받고,<咸陽邑誌>,
대구, 성주, 창원, 상주 등 다섯 고을의 관장(官長)과
통정대부(通政大夫) 사헌부집의(司憲府 執義) 겸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 등을 역임하셨다.
선생(先生)께서는
1544년(갑진년) 숙종임금 39년 3월 12일에 향년 72세로 별세하시고, 기일(忌日)은 3월 11일이다.
함안(咸安)의 여양서원(廬陽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배(配) 숙부인(淑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와
슬하(膝下)에 2남 3녀를 두었으며, 정균(庭均), 정백(庭柏) 형제와
3녀는 재령이씨 첨지를 지낸 이 변 이 큰사위이며, 부친은 이계헌이다.
4녀는 평산 신씨 내금장을 지낸 신공헌이 둘째사위로 부친은 신 백이다.
막내딸은 선산 정씨 정 의로 생원을 지냈다. 부친은 사인을 지내신 정 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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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先生))의 묘소는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괴향마을의 성산 유좌(城山 酉坐)에,
배(配) 숙부인(淑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 분묘(墳墓)와 쌍봉(雙封)으로 모셔져 있다.
지금도 선생의 청빈과 학덕,위민선정의
청백리의 기상을 흠모하듯 해마다 수 많은 백로들이 날아 들고 있다.
부인이신 숙부인 성산이씨의 가계를 보면,
부친은 절도사를 지내신 이 거인이시고,
조부는 청무공 이 호성이시며,
증조는 증 판서를 지내신 이영신이시다.
선생(先生)의 외조부는 직장을 지내신 인천 이씨 차혜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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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적(先跡) 으로는
무진정(無盡亭)은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괴항마을에 있으며,
선생(先生)께서 서식(棲息)하시던 곳으로,
1979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58호로 지정 되었다.
1983년 무진정 연당(無盡亭 淵塘) 개수(改修)와 육각정인 영송루(迎送樓)를 창건하였다.
함안군 가야읍에서 남으로 3km 떨어진 가야읍과 함안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집의공(執義公) 휘(諱) 삼(參) 무진정선생(無盡亭 先生)의
묘각(墓閣)인 괴산재(槐山齋)와 무진정 선생 신도비(無盡亭 先生 神道碑)가 근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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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정(無盡亭)은 *
남해안(南海岸) 고속도로를 따라 함안(咸安)에 이르면,
남(南)쪽으로 높은 산(山)들이 북(北)쪽에는 넓은 평야(平野)가 시야에 들어 옵니다.
함안(咸安)가야 인터체인지에서 남(南)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공설 운동장이 나오며,
똑바로 남(南)으로 가면 함안군청(咸安郡廳)이 위치한 가야읍(邑)입니다.
직진(直進)으로 약(略)10리(4km) 달리면,
우거진 수목(樹木)사이로 1천여평의 반월형 연못과
암벽 위에 한 정자가 고즈늑한 모습으로 자태를 드러내는데,
연못에는 4개의 작은 섬이 떠 있고
3개의 무지개형(形) 다리로 연결된 안쪽 섬에는 또 하나의 정자가 떠 있읍니다.
정자와 연당과 수목이 함께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데 보는이 마다 감탄을 아끼지 않읍니다.
이곳이 바로 조선중기 1528년(무자년)중종(中宗) 23년에
무진정(無盡亭) 선생께서 직접 지으신 정자로 함안(咸安)에서 최초로 건립된 정자이며.
1567년(정묘년) 조선 명종 22년에 후손들이
선생의 덕을 추모 하기 위하여 이곳 연못가에 정자를 중수 건립하고,
무진정(無盡亭)선생(先生)의 호(號)를 따라
명명(命名)한 무진정(無盡亭)은 무진정(無盡亭)이라는 편액과
무진정기(無盡亭記)는 신재 주세붕 선생이 직접 썼으며,
현재의 건물은 1929년 4월에 중건한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 지붕으로 기둥 위에는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앞뒤로 퇴를 길게 빼고 중앙의 가운데
방 한칸을 온돌방으로 꾸며 놓았으며,
사방에는 마루를 놓았는데 사방의 방문을 걷어 올리면,
한면의 넓다란 마루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 되어있읍니다.
조선 초기 정원과 정자의 예로,
1979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지방 문화재 제 158호로 지정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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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산재(槐山齋)는 *
조선시대 건축물로서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괴항마을에 위치하는데,
함안 가야 ic에서 5분 거리, 가야읍~ 진동방향 남쪽으로 약 1km가다보면,
무진정(無盡亭)과 연당이 있는 옆에 새로 건립한, 괴산제(槐山齊)가 있다.
원래 함안조씨(咸安趙氏) 집의공파(執義公派) 파조(派祖)이시며,
5주 목민관을 두루 거치시고, 춘추관, 편수관을 지내신 청백리(淸白吏)로 유명하신
무진정 선생(無盡亭 先生) 휘(諱) 삼(參)선조님의 묘역(墓域) 옆에 세운 제실(齊室)로
함성 중학 교정에 있던 구(舊)함안 동현 건물을 옮겨 개축한 것으로
원래 위치는 마을뒤 1km 정도 마을 뒷산(성산 산성 자락)에 괴산제(槐山齊)가 있었는데,
보존 관리가 어려워 원형은 그대로 보존하고,
집의공파 문중(門中)에서 무진정 옆에 터를 마련하여 새로이 건립 하였다.
매년 5월 초에 집의공파 종중의 승지공파, 낙천공파, 통덕랑공파, 방호공파, 무과공파 의
5개 지파(支派) 종원(宗員)들이 전국 각지(全國各地)에서 모여서, 종회(宗會)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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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행록(言行錄)을 보면
선생의 천성이 독서를 좋아하시어 일찍 책을 덮으신 일이 없으셨다.
하루는 아침 밥상이 들어 왔는데 쳐다 보지도 않고 글만 읽으셨다.
오래되어 계집종은 진지를 잡수신 것으로 알고 밥상을 철상하였고,
낮에 이르러서도 또 이와 같았다.
날이 저물어서야 시장함을 느끼시고 묻기를
"오늘은 밥상을 내오지 않으니 어쩐 일인가 ?" 하시니
선생의 부인께서 아침부터 있었던 사실을 모두 말씀 하셨다.
선생께서 크게 웃으시며 말씀 하시길 "내가 과연 알지 못 하였다" 고 하셨다.
이처럼 선생께서는 학문에 전심을 다하여
외물(外物)에 무심(無心)함이 이와 같았다 라고 함주지(咸州誌)기록이 전하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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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생께서는 을사명유(乙巳名儒: 기미보 언행록 참고)로서
때를 살펴 함안으로 귀향(歸鄕)하시어 무진정에서 평생을 보내셨으며,
신재 주세봉 선생이 글을 지어 기록하였는데 살펴보면,
"선생께서는 다섯 고을의 관장을 두루 역임하시고 일찍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으시며,
정자 가운데 높이 누워 청산(靑山) 백운(白雲)을
병풍으로 삼고, 청풍명월(淸風明月)을 손님으로 삼아
증점(曾點)의 시(詩)와 도연명의 시(詩)를 읊으면서 태연히 즐기는 느긋한
그 즐거움은 비록 많은 녹봉을 받는 경상(卿相)과도 이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리라.
대체 벼슬이 영화롭기는 하나 욕(辱)이 따르기 때문에
군자(君子)가 서슴없이 물러남을 귀하게 아는 것이다.
또한 선생께서는 앞산을 바라보시며,
신후계(身後計)를 삼으시었으니, 이는 능히 천명(天命)을 아신 것이다.
천명을 잘 아시기때문에 서슴없이 물러났고,
서슴없이 물러나셨기에 능히 이런 즐거움을 누릴수 있었으니
정자(亭子)의 이름과
선생의 이름이 다 함께 무진(無盡)하였던 것이다.
또 이르기를
"선생께서는 동군(同郡)사람으로 덕의(德義)가 두터운 장자(長者)이시며,
관직에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근실한 명망(名望)이 있었다. "이글은 무릉지와 함주지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십완정(十翫亭)과 풍탄정(楓灘亭)은
선생께서 공부하신 곳인데 지금은 그 옛터만 남아 있읍니다.
* 함주지 발문에 기록되어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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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 주세봉과 한강 정구 두분 선생께서 서술하신 글을 읽어보면
그 형제간에 열심히 했던 공부와 집안에서 부모에게 효양(孝養)하셨던 사실과
관직에 계시면서 청렴(淸廉) 결백(潔白)하셨던 지조(志操)를 가히 볼 수 있으며,
또 큰 포부와 높은 기품이며 기미(幾微)에 밝으시어
사색 당파(四色 黨派)에서 벗어나 초연하게 붕당(朋黨)
가운데서도 완인(完人)이 되어셨으니, 또한 가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이후에 선생의 행적을 알고자 하는 이는
함주지와 무진정기를 보면 족할 것이니 또 어찌 많은 것이 필요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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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일찌기 집에서 소장하고 있는
중용(中庸)과 대학(大學), 그리고 당감(唐鑑: 당나라 역사책)을 보았는데
이는 선생께서 예조좌랑으로 재직할 당시
중종임금께서 선생의 바른 학문을 아름답게 여겨 상(償)으로 하사(下賜)하신 것이었다.
또 충재 권선생(충정공 권 발)의 교유록을 보면 선생과 함께 교유(交遊)하셨던 기록이 있다.
임금께서 특별히 사랑하심과 사우(師友)간에 교류의 성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先生)의 묘갈명은 귀와 참판 김굉이 지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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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정선생 이야기(요약) *
선생께서는 어렸을 때 부터 뛰어난 글 재주와 훌륭한 도량이 점점 하시고,
학문이 날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셨다 합니다.
1489년(기유년) 조선 성종임금 20년에
약관도 아닌 17세때 진사시에 합격하시어
만인에 숭앙(崇仰)의 대상이 되셨고,
1507년(정묘년) 조선 중종임금 2년에 문과에 급제하시어,
함양, 대구, 창원, 상주, 성주,등 여러고을의 부사와 목사직을 역임하시고,
내직으로 통정대부 사헌부 집의(현: 감사원 국장급)겸 춘추관 편수관을 역임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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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柱 *
조선왕조실록에는 1512년(임신년)조선 중종 7년에 사헌부 지평,
1536년(병신년)조선중종 31년에 안동부사, 상의원정, 사옹원정(司甕院正)을 지냈다고 되어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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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직에 계실때는 청렴한 생활로 위민선정(爲民善政)에 헌신하시어,
가시는 곳 마다 청빈한 명관(名官)으로 이름이 높으시었고,
함안 조씨(咸安 趙氏) 갑진보 서문(序文)에는
청백근신(淸白謹身)에 집의공 삼(參)이라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또한 사헌부 집의에 재임중 일때는
중종(中宗)임금의 신임이 두터웠고,
중종(中宗)임금으로 부터 중용과 대학, 당감(唐甘)을 하사 받으시었는데.
이는 선생(先生)께서 예조좌랑으로 재직할 당시
선생의 바른 학문을 아름답게 여겨 상(償)으로 하사 하신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선생(先生)의 앞날이 얼마든지 보장 되었을 것이나
당파싸움으로 시기와 모략을 일삼는 무리들과 헤어지기 위해
향리(鄕里)로 돌아갈 결심을 굳혔읍니다,
벼슬길이 아무리 영화롭다 하나
용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생각 하셨기 때문 입니다.
이는 무턱대고 높이 오르기만
좋아하여 급경사의 비탈길인 줄도 모르고,
높은 곳으로만 치닫다가 쉽게 내려오지 못 하고,
현기증으로 넘어져 인생을 망치는 우리 세태에 경종이 아닐수 없읍니다.
고향으로 돌아오신 선생(先生)께서는
신재 주세붕, 한강 정구 선생등의 거유(巨儒)들과 교유 하시면서,
후학을 가르쳐 후진양성에 여생을 보내셨으며.
후학들은 여양서원(廬陽書院)에서 향사(享祀)하였으나
지금은 유허비(함안군 여항면 내곡리 도로변 소재)만 서 있읍니다.
그리하여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수 많은 후손들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 목숨을 '초개' 같이 던져
그 충효는 대(代)를 이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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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진정(無盡亭) 선생(先生)의 슬하에
두 아드님 현감공 휘(諱) 정균(庭鈞), 휘(諱) 정백(庭柏)과
3녀(사위: 재령 이 변),
4녀(사위: 평산 신공헌),
5녀(사위: 선산 정 의)를 두셨으며,
현감공 휘(諱) 정균(庭均)께서는 재주와 행실이 들어나셨고,
현감공 께서는 생원(生員) 휘(諱) 물(勿)을 낳으시니
생원공 휘(諱) 물(勿)께서는 문장과 필법이 당대에 유명 하시었다.
생원공의 아드님, 승지공 휘(諱) 준남(俊男: 승지공파, 파조)께서는
임진왜란때 곽망우당의 쫏아 의병을 모집하고,참모로서 활약하시었으며,
정유재란때 효도(孝道)를 위 하여 순절(殉節)하시었고,
승지공의 아들 선전공 휘(諱)계선(繼先)께서는
정묘호란때 의주에서 오랑캐(胡軍)과 싸우시다 충절을 다 하시고 순절(殉節)하시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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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의공파(執義公派)문중은 함안조씨 13충(忠) 中 두 분이 계십니다.
17대 승지공 휘(諱) 준남(俊男) 선조님과
18대 선전공 휘(諱) 계선(繼先) 선조님에게
나라의 임금께서 부자 충효(父子忠孝)의 정려를 사액(賜額)하시어
무진정(無盡亭) 입구에 부자(父子) 쌍절각이 세워져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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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의공파(執義公派) 종중(宗中)에서는
매년 음력 3월 30일 무진정과 괴산재에서 종회를 개최하여 오다
1996년부터 5월 5일에 종회를 개최하여, 조상(祖上)의 유덕(遺德)을 기리고,
주세봉 선생의 무진정 기문을 음미하면서, 후손으로서의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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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문(記文)을 보면,
아라가야의 개국(開國)으로 부터 오늘에 이르기 까지
하늘이 숨기지 않았고, 땅이 감추지도 않았지 마는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하루에 천만 사람이나 되는데도,
이곳에 정자를 지을만 한 좋은 자리가 있는 것을
알아 차린 사람이 있었음을 듣지 못 하였다.
오직 선생(先生)께서는
한번 보시고 이곳을 가려 정자를 지어셨으니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 겠는가 !
길가는 사람들이 신선(神仙)의 집인양 바라 보았다.
무진정(無盡亭)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산이 우뚝 솟아 하늘을 치 닫는듯 하고, 정자와 마주한 곳이 괴산이다.
북쪽에서 바라보면 천리나 보이는 들판에
보리가 자라면 푸른물결이 하늘을 흔들고,
곡식이 익으면 황금의 구름처럼 대지(大地)를 감싼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햇볕을 쬐일수 있고,
여름에는 창문을 열면 더위가 가까이 하지 못하니
좋은 경치와 통하고, 맑은 바람이 저절로 불어오고,
밝은 달이 먼저 이르니
발걸음을 옮기지 않아도 온갖 경치가 모두 모였으니
진실로 조물주의 무진정(無盡亭)이라 하겠다.
선생(先生)께서는 도연명의 글과 같은 시흥을 펴시면서,
고요한 가운데 그윽하고, 쓸쓸한 가운데 편안하고,
유유한 가운데 스스로 즐기면서, 화락(和樂) 하게 지내시었다.
그 즐거움이야 말로 많은 녹봉을 받은 높은 벼슬자리와 도 바꿀수 없을 것이다.
천명(天命)을 알았기 때문에 능히 용퇴할 수 있었고,
용퇴할 수 있었기 때문에 능히 이 즐거움을 즐길수 있었으니,
정자(亭子)의 경치도 무진(無盡)하고,
선생(先生)께서의 즐거움 또한, 무진(無盡) 할 것 이다.
무진(無盡)한 선생(先生)께서의 즐거움과 무진(無盡)한 정자의 경치가 모였으니,
정자의 이름은 선생(先生)의 휘함, 명호와 함께 무진(無盡)할 것이 분명하다" 고 하셨다.
* 14대 집의공파(執義公派) 조 삼(趙參) 무진정선생(無盡亭先生) 선적지(先蹟地)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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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분묘(墳墓)- 소재지: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성산산성 下
02. 무진정 조선생 신도비- 소재지: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무진정 우측 입구.
03. 괴산재- 소재지: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무진정 좌측 입구.
04. 무진정. 무진정 현판(무진정 記). 표지석- 소재지: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547번지(괴항마을).
05. 영송루(육각정)- 소재지: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 무진정 연당내.
06. 무진정 연당- 1983년 무진정 연당(無盡亭 淵塘) 개수(改修)와 육각정인 영송루(迎送樓)를 창건하였다.
07. 무진정 선생 유허비- 소재지: 함안군 여항면 면사무소내.
08. 여양서원, (여양서원 유허비)- 여양서원은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 있었는데 현재 유허비만 있다.
09. 풍탄정(楓灘亭) 유허비- 소재지: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
10. 십완정(十翫亭)- 무진정선생께서 공부하신 곳인데 지금은 그 옛터만 남아 있다.(함주지 발문에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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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서원(廬陽書院)은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 있었는데,
광릉자 안택, 무진정 조 삼, 동천 박 오, 매죽헌 이명호, 삼열당 이경번, 만묵당 이경무 등
육선생(六先生)을 향사하던 곳이였었는데,
대원군의 서원훼철시 철거되어 옛터만 남아 있으며, 그 자리에 여양서원 유허비만 외로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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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풍탄정 유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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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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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탄정(유허비).
* 소재지: 함안군 법수면 주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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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탄정(楓灘亭)은
무진정선생께서 공부하신 곳인데 지금은 그 옛터만 남아 있다.(함주지 발문에 기록되어 있다.)
함주지(咸州誌)에 보면 군의 관아에서 북쪽 25리에 위치하는데(마륜리에 있다) 정암진의 하류이다,
그 하류(下流)에 아현연(阿見淵)이 있는데
군(郡) 관아(館衙) 에서 북쪽으로 20리쯤 위치하며,
풍탄의 하류에서 세차게 흘러 깊은 못을 이루는데
깊이를 측정하지 못함이라 세상에 전하기를 용(龍)이 있었는데
스스로 이 소(沼)에서 하늘로 올라갔다 이르더라.
겹겹히 쌓인 험한 바위가 솟아있는데 그 바위위에 기우단(忌雨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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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균, 조정백, 3女, 4女, 5女 中 장자(長子) 조정균(趙庭筠),
제 15대: 현감공(縣監公) 조정균(趙庭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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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정균(趙 庭筠) 15대 - 54 - 19
(生): 追)1495년(을묘생)조선 연산 1년, 명 효종 홍치 8년),
(卒) : 별세 년,월,일.은 알수 없고, 다만 기일(忌日)만 8월 29일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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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朝鮮 中期)의 문신(文臣)으로,
본관(本貫)은 함안(咸安)이다.
공(公)의 휘(諱)는 정균(庭筠)이며, 자(字)는 정간(貞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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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감공 가계(家係) 보면,
고조부는 시정공(寺正公) 휘(諱) 안(安)이시고,
증조부는 정절공(貞節公) 휘(諱)려(旅) 어계선생(漁溪先生)이시며,
조부는 증 참판을 지내신 증 참판공 휘(諱) 동호(銅虎)이시며,
부친은 사헌부 집의를 지내신 집의공(執義公) 휘(諱) 삼(參) 무진정 선생(無盡亭先生)이시다.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성산 이씨(星山 李氏)이시며,
두분의 슬하에 두 형제(정균, 정백) 中 장자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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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감공(縣監公)과 배(配) 숙인(淑人) 완산 이씨(完山 李氏) 사이에
물(勿), 개(介), 근(斤)의 아들 삼형제와 따님 다섯 등 팔남매를 두셨으며,
장남 물(勿)은 생원에 급제하고,
둘째 아들 개(介)는 숙부(叔父) 정백(庭栢)에게 출계(出繼)하였으며.
1女는 권관의 벼슬을 한 이대윤이며,
2女는 하 제(河 濟)에게 출가하였고,
3女는 진사 이휘익에게,
4女는 현감 정 지(丁 至)에게.
5女는 생원 나언겸에게 각 출가를 하였다.
공(公)께서는 손자 두분을 두시니,
장남 준남은 참봉으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활동도 하셨고,
선조 집의공 묘(墓)가 적에게 발굴 당하자, 쇠하여 끊어짐을 통곡하며,
적중에 들어가 흙으로 널을 덮어 가리니,
적이 협박하여 항복받고자하거늘,
도리어 적을 크게 꾸짖고, 굴복하지 아니하고, 살신성인하셨다.
훗날 증 좌승지하셨다.
차남은 영남이며, 손녀 두분은 곽재록, 성윤효에게 출가 하였다.
참봉 준남(승지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계선으로 선전관이요, 둘째는 술선이다.
선전공 게선은 정묘호란(인조임금 5년) 1627년에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니
부자의 충효로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니 세상사람들이 영화(榮華)라고 하였다.
아! 아! 공(公)께서 법가(法家)에 나서 자라 받은 적선을 갚음으로
앞으로 받을 경사는 자손에게 미침이 이와 같으니,
덕(德)의 씨를 뿌리고, 선(善)을 쌓지 아니하고는 이와같이 능하겠는가 ?
부인도 또한 선량한 심성과 아름다운 덕(德)이 어긋남이 없고,
배우자로서 변함이 없었다.
세대가 멀어서 숨은 유덕을 널리 드러내지 못하고,
품행의 개략도 한둘밖에 기록하지 못하여,
이 실로 자손의 만세토록 무궁한 원한(願恨)이라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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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公)의 분묘는 함안군 함안면 미산 유좌(眉山 酉坐)에 있으며,
배위(配位) 숙인(淑人) 완산이씨(完山李氏) 분묘(墳墓)와 쌍분(雙封)으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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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행록(言行錄)을 보면,
공(公)께서는 재행(才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인동현감을 지냈다.
태어나신해와 돌아가신해는 증거가 없다.
아 ! 아 !
공(公)께서 법도(法道)있는 가문(家門)에서 태어나,
여경(餘慶 : 선조들의 선행으로 그 자손들이 누리는 경사)이
자손에게 미침이 이와 같으니,
만일 덕(德)을 쌓고, 적선(積善)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와 같겠는가 ?
세대(世代)가 오래되어
깊이 감추어진 사적(事跡)을 찾아 낸다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나,
행업(行業)의 대강도 쉽게 기록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자손만세(子孫萬世)에 무궁한 한(恨)이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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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감공(縣監公) 묘표(墓表).
공(公)의 휘(諱)는 정균(庭筠)이요, 자(字)는 정간(貞幹)이며,
관(貫)은 함안조씨로 함안사람이다.
성균관 진사 증 이조참판 어계(漁溪) 선생의 증손(曾孫)이요,
조부(祖父)는 휘(諱) 동호(銅虎)로 진산군수로 증 이조참판이며,
부친 휘(諱) 삼(參)은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이시다.
공(公)의 출생한 해와 돌아가신 해는 알수 없으나,
재주가 있고, 행실이 착하여 벼슬에 천거(薦擧)되어
인동현감에 이르렀고, 돌아가시자
함안고을 서쫏 미산 신좌(辛坐)에 장사(葬事)하였다.
배(配)는 숙인(淑人) 완산 이씨로
태종대왕의 차자인 효령대군 휘(諱) 보(補)의 현손이,
효령이 서원군 휘(諱) 안(案)을 낳았고,
서원(瑞原)이 제천군 휘(諱) 운을 낳았으며,
제천(提川)이 영산부정 휘(諱) 예손(禮孫)을 낳았으니,
즉 예손이 부인의 아버지(生父)이다.
공(公)은 이남 오녀를 낳았는데,
장남 물(勿)은 생원에 급제하고, 차남 개(介)는 숙부 정백공 앞으로 출계를 하였고,
일녀(一女)는 권관의 벼슬한 이대윤과, 이녀(二女)는 인의(引儀) 하 제(河濟)와
삼녀(三女)는 진사 이휘익과, 사녀(四女)는 현감 정 지(丁 至)에게,
오녀(五女)는 생원 나언겸(羅彦謙)에게 각각 출가 하였다.
장손 준남은 참봉으로 임진왜란을 당하여
선조 집의공 묘(墓)가 적에게 발굴 당하자,
쇠(衰)하여 끊어짐을 통곡하며,
적중에 들어가 흙으로 널(棺)을 덮어 가리니,
적이 협박하여 항복 받고자 하거늘,
도리어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아니하고, 살신성인 하였으며.
둘째 손자가 영남이고, 손녀 두분은 곽재록, 성윤효에게 출가 하였다.
장손 준남(승지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이는 계선으로 선전관이요, 둘째는 술선이다.
선전공 게선은 정묘호란(인조임금 5년) 1627년에 평안북도 의주에서 순절하니
부자의 충효로 나라에서 정려를 내리니 세상사람들이 영화(榮華)라고 하였다.
오호라 ! 공(公)이 법가(法家)에 태어나 자라면서 받은 적선을 갚음으로
앞으로 받을 경사는 자손에게 미침이 이와 같으니,
덕(德)의 씨를 뿌리고, 선(善)을 쌓지 아니하고는 이와같이 능하겠는가 ?
부인도 또한 선량한 심성과 아름다운 덕(德)이 어긋남이 없고,
배우자로서 변함이 없었다.
벌써 세대가 멀어서 숨은 유덕을 널리 드러내지 못하고,
품행의 개략도 한둘밖에 기록하지 못하니,
이 실로 자손의 만세토록 무궁한 원한(願恨)이 아니겠는가.
<곡천(谷川) 김상정(김尙鼎)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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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 물, 조 개, 조 근, 2女, 4녀, 5女, 6女, 7女, 中 장자(長子) 조 물(趙 勿).
제 16대: 생원공(生員公) 조 물(趙 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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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물(趙 勿) 16대 - 93 - 32
(生) 追 1520년(경진생)조선 중종임금 15년
(卒) 별세 년,월,일.은 알수 없고, 다만 기일(忌日)만 7월 6일로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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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장(行狀)을 보면,
조선 초기(朝鮮 中期)의 문신(文臣)으로,
본관(本貫)은 함안(咸安)이다.
공(公)의 휘(諱)는 물(勿)이며, 자(字)는 여지(汝止)로,
조선 명종임금 7년 1552년(임자년)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임진, 정유년의 병화(兵火)로 인해
정확 한 생졸(生卒)과 사행(事行)이 실전(失傳)되고,
다만 기일(忌日)만 7월 6일로 전(傳)해 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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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환여승람 인물부(人物部) 과환편(科宦篇) 사마(司馬)의 기록을 보면,
조물(趙勿)의 본관은 함안이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현감(縣監)을 지냈다. 라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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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분묘(墳墓)와 선적(先蹟)을 보면,
공(公)의 분묘(墳墓)는
함안군 함안면 정태동 간좌(鼎台洞 艮坐)이며,
배(配) 포산 곽씨 분묘(墳墓)와 합봉(合封)으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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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행록(言行錄)을 보면,
공(公) 께서는 벼슬 높은 가문에서 생장(生長)하여,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으로 일세에 그 명성을 떨쳤으나,
불행히 일찍 돌아가시어 능히 세상에 쓰이지 못하였다.
<谷川 金尙鼎 撰>.
공(公)께서는 조선 명종임금 7년(1552년(임자년)에 생원에 급제하여,
뛰어난 명성이 일찍 드러났는데,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시니,
아는 이들이 애석(哀惜)해 마지 않았으나,
오래되어 시문(詩文)이 전(傳)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라전신록(金羅傳信錄)에는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친 인동공(仁同公)과 생원공(生員公)께서 모두 문학으로 명성이 드러났으므로,
반드시 남은 문헌이 후세(後世)에 전(傳)하는 것이 있을 터인데,
모두 흩어져서 거두지 못 하였고, 또 누차 병화(兵火)를 겪어
생졸(生卒)과 사행(事行)을 가히 상고할 수 없으니,
하물며, 그 다른 것은 어찌 바랄 수 있겠는가 ?
<세록(世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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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원공(生員公) 물(勿) 묘표(墓表),
공(公)의 휘(諱)는 물(勿)이요, 자(字)는 여지(汝止)이며,
성(姓)은 조씨의 핏줄로서, 함안에서 태어났다.
영우(嶺右)의 벼슬을 대대로하여, 내려오는 집안으로,
성균관 진사 증 이조참판 어계선생 휘(諱) 려(旅)가 공(公)에게는 고조(高祖)가 되고,
증조(曾祖)는 진산군수(珍山郡守)로 증 이조참판 휘(諱) 동호(銅虎)이며,
조부(祖父)는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휘(諱) 삼(參)이고,
아버지는 인동현감(仁同縣監) 휘(諱) 정균(庭筠)이며,
어머니는 숙인(淑人)완산 이씨로 영산부정(榮山副正) 휘(諱) 예손(禮孫)의 딸이다.
공(公)은 벼슬한 집안에서 생장(生長)하여,
문장(文章)과 필법(筆法)이 일세에 빛나,
명종 7년 1552년(임자년) 성균관 생원에 급제하였으나,
오래 살지 못하고 일찍 돌아가시자,
함안군 동쪽 정대동(鼎台洞) 간좌(艮坐)에 장사(葬事)하였다.
배(配) 포산 곽씨는
성균관 생원 휘(諱)지원(之元)의 딸로 시집와서 살던 중
생원공이 먼저 돌아가셨고, 뒤에 돌아가시자
공(公)의 묘(墓0에 합보(合封)하였다.
공(公)께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준남은 참봉으로 증조부의 묘소가 왜적에게 봉변을 당하니
목숨을 무릅쓰고 적중(敵中)에 들어가,
흙을 날라 널(棺)을 덮고, 적을 꾸짖으며,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둘째아들은 영남(英男)이고, 두딸은 모두 시집갔으니,
현감공 비문에 상세하게 실려있다.
준남(俊男)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 계선은 선전관으로 정묘호란때 의주에서 순절하여,
또한 나라에서 정려가 내려졌으며,
둘째 아들이 술선이니 무릇 친손자, 외손자가 8대에 걸쳐 수백명이나 된다.
오호라 ! 공(公)의 성명(聲名)과 문예(文藝)가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시어
비록 세상에는 쓰이지 못 하였으나,
아들은 효자(孝子)가 되고, 손자는 충신(忠臣)이 되어
빛나는 현판이 영화스런 사랑을 받으며, 문루(門樓)에 걸려 있으니,
이는 진실로 공(公)이 후덕을 널리펴고, 적선을 쌓았던 어진 교훈을
후인(後人)들에게 전(傳)하니 어찌 빛나지 않겠는가 ?
후손들 역시 벼슬에 미련을 두지않고, 권세에 아첨함이 없이
한가롭게 지내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부인의 착한 성품과 아름다운 모범
또한 공(公)의 배필이라고, 일컬었지만
바로 전하고, 증명할 만한 것이 없으니,
보통 사적(事蹟)과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감히 한 두가지 들은 바를 망령된 헛된 말을 보태는 일은
선조들을 속이는 중죄(重罪)이니, 어찌 무궁(無窮)한 한(恨)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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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준남, 조영남, 1女, 2녀, 中 장자(長子) 조준남(趙俊男).
제 17대: 21원파 집의공파/ 76지파 승지공 파조 승지공 조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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