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문신 홍우용(洪祐鏞, 1872년~1941년)의 시문집. 석판본. 2권 2책. 장서각 소장. 전남대학교 도서관 소장.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덕소(德韶), 호는 우산(牛山), 거주지는 전남 화순. 남평공계 군수공파.
고조부는 홍영한(洪永漢), 증조부는 홍희우(洪羲禹), 조부는 홍수영(洪壽榮), 부는 동지중추부사 홍규주(洪圭周), 어머니는 金基白의 따님이다.
집이 가난하여 서당에 나가 공부하지 못하고, 몸소 농사일을 돌보면서 조금이라도 여력이 있으면, 공부를 부지런히 하여 수년이 되자 문리가 저절로 통해졌다.
경서를 공부하는 동안에 어렵고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하나의 작은 필기장에 그것을 낱낱이 기록하여 정일신재(鄭日新齋)ㆍ기송사(奇松沙) 두 선생의 집에 찾아가 바른 가르침을 받았다.
가난 때문에 초년에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하며 과거의 고시에서 출제된 경서의 내용을 더욱 탐구하고 대의를 파악하였으니, 사림에서 크게 인정을 받았다.
부친은 그가 16세 때에 서거하였기 때문에 어머님만을 모시고 지냈다.
1894년 모친의 요청에 의해서 경시(京試)를 치르고 鄭義林의 문인으로 천거로 장릉참봉(長陵參奉)으로 임명되었으나, 당시 도둑의 무리가 크게 일어나 호남이 극히 심하다고 하니, 제대로
벼슬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집안에서만 생활하였다.
그 뒤 포천(抱川)으로 가 면암(勉菴) 최선생을 뵙고 학문을 토론하고 질의하니 선생은 격려의 말을 하여 그를 도와주었다.
만년에는 금오산(金鰲山) 아래에 우산정사(牛山精舍)를 짓고 학문을 닦는 곳으로 삼으니, 가르침을 받고자 모이는 자는 그곳에 수용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여러 사람의 글을 널리 보고 터득하여 시율에 뛰어나 입을 열면 시가 되었다.
시냇가의 정자나 산수의 사이에서 시를 읊으며 지내니 속세를 벗어난 사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