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라도 다 같은 초록이 아니다. 여름이 싱그럽고 청량감을 띠는 초록이라면, 봄이 가고 여름이 오기 시작한 시기엔 봄과 여름의 장점만을 취한 믹스매치 초록이 대세다. 충분히 감상하지 못해 아쉬운 벚꽃을 뒤늦게 산 위에서라도 드문드문 보게 되는 즐거움에 산에 오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계절을 초월하는 게 산이다.
이렇게 초록의 계절을 맞아 걷기 열풍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제주도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에 이어 경북 봉화군도 5개 구간 90km 길이의 솔숲길을 개방할 계획으로 현재 조성 중이다. 개통에 앞서 1·3구간을 답사해보았다.
▲ 1.이 다리를 건너면 석천정사로 들어갈 수 있다. 2.솔향 가득한 숲에서는 숨쉬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될 것 같다. 춘양목 군락지. 3.봄처럼 향긋한 송이돌솥밥상이다.
석천정~닭실마을~산수유마을~우곡성지
이른 아침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4시간이 채 되지 않아 경북 봉화읍에 도착했다. 걷기에 앞서 배를 든든히 채우기로 했다. 봉화의 특산물인 향긋한 송이를 듬뿍 올린 돌솥밥, 제철 봄나물들을 양껏 올려 쓱쓱 비벼 먹고 나니 힘이 난다.
석천정(石泉亭) 입구에 도착, 계곡 물길을 따라 울창한 송림의 향긋한 내음을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걷다 보니 석천계곡 맑은 물과 울창한 수림, 기암괴석들과 함께하고 있는 석천정이 보인다. 계곡을 가로질러 소담하게 놓인 다리를 건너면 바로 석천정사(石泉精舍)다. 선비가 많기로 유명한 봉화에는 정자도 유난히 많다. 정자가 많다는 것은 선비가 많았다는 증거다. 봉화에는 100여 개의 정자가 있는데 사라진 정자까지 합하면 170개가 넘으며, 이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수라고 한다.
내성천 지류를 따라 올라가면 닭실마을이 나온다. 닭실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안동의 앞내, 풍산의 하회,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삼남지방의 4대 길지(吉地)로 꼽히는 곳이다. 마을의 지세가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 닭실마을로 불린다. 이곳은 전통 한과로도 유명하다. 조선 중종 때 재상 충재 권벌의 종택이 이곳에 터를 잡은 뒤 제사를 모시면서부터 한과를 만들기 시작해 500여 년 동안 한과를 만들어왔다.
지금은 유곡리부녀회원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함께 한과를 만들고 있다. 우연히 들른 이곳에서 식후라 배가 부른데도 동네 아낙들이 권하는 한과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달콤한 조청에 알싸한 생강향이 나는 맛이 자꾸만 손이 갔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져 더욱 맛있다. 전통 한과에 대한 주민들의 자부심과 사랑이 대단하다. 언제나 좋은 결과는 끊임없는 노력과 애정에서 나온다. 뼈대 있는 양반마을로도 유명한 이곳은 멋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산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기운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짐작케 한다.
▲ 1.사대부의 마을 ‘닭실마을’이다. 2.성질 급한 사람도 천천히 걷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청암정의 돌다리. 3.영화 ‘워낭소리’ 속 아버지의 이미지가 오버랩되어 왠지 마음이 애잔해지는 산수유 마을.
닭실마을 길과 하천을 따라 동쪽으로 토일, 새말, 탑평 등의 마을을 지나 하천을 가로지르는 신기교라는 작은 다리를 건넜다. 이어 왼쪽으로 길을 잡고 600m쯤 올라간 갈림길목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면 동양리를 지나 산수유마을에 닿는다. 산수유마을은 ‘띠띠미마을’로도 불리며, 영화 ‘워낭소리’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곳이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산수유 농사를 짓는데 아쉽게도 한 발 늦어 산수유꽃으로 물든 마을 풍경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머릿속 상상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지금은 온통 초록인 이 아담한 마을이 두어 달 전만 해도 온통 샛노란 산수유꽃 천지였을 것이다. 지금은 값싼 중국산이 넘쳐나 흔해져 버렸지만 과거 이곳 산수유는 영화 ‘워낭소리’ 속 소처럼 귀한 자식들 공부시켜줄 밑천이요, 먹여주고 입혀줄 젖줄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쌀처럼 귀한 곡식이었던 것이다. 띠띠미마을 가는 길, 2차선 도로변 밭에는 산수유가 곡식처럼 자라고 있다.
정식 명칭은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 두동마을. 남양 홍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지금도 주민의 절반이 홍씨 성을 갖고 있으며 20여 가구 대부분이 산수유 농사를 짓는다.
걷고 또 걷다 보면 길에서 많은 걸 얻고 배운다. 한없이 앞으로 걷고 또 걷다 보면 머릿속이 맑아질 때도 있고, 반대로 더 복잡해질 때도 있다. 주변의 것에 더 귀 기울여 집중하기도 하고 마음이 여유로워지기도 한다. 하루를 걷든 한 달을 걷든 길 위에서 느끼고 배운 것들이 현실에 돌아와서도 오래도록 기억되고 잊지 않고 싶어진다. 전국의 걷기 열풍이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 아닐까.
이곳 산수유 마을까지 걸어오면서 옹기종기 모여 한과를 만드는 아낙들의 손맛을 보았고, 알싸한 솔내음을 알았고, 5월에 길가에는 두릅·찔레꽃 등 먹을거리가 지천으로 널렸다는 것을 알았다.
▲ 봉화의 사과꽃은 날씨가 선선해질 무렵에 이곳 주민들의 주머니를 작게나마 채워준다.
두동마을 끝에 올라 내려다보면 아래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아련하게 사라지는 길이 눈에 들어온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창평저수지에 닿는다. 둘러보는 곳마다 하얀 사과꽃이 지천이다. 봉화는 송이뿐만 아니라 신선도와 당도가 뛰어난 사과로도 유명하다. 저수지 아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솔숲길이 한동안 이어지는데 2km 됨직한 숲길을 걷다보면 다시 포장도로가 나온다. 우곡성지(愚谷聖地)로 이어지는 아스팔트길이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천주교 우곡성지는 한국 최초의 수덕자(修德者) 농은 홍유한(洪儒漢·1725~1785)의 묘가 있는 곳으로 사제관과 피정의 집, 수련원, 동상과 야외 제대, 십자가의 길 등이 조성돼 있다. 문수산 중턱에 자리 잡은 이곳의 묘역은 1993년 발견돼 1998년부터 우곡성지로 조성됐다.
도래기재~주실령~춘양목 군락지
도래기재에서 주실령에 이르는 3시간 남짓한 이 코스는 백두대간 종주길을 코앞에 두고도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길이다. 어찌 보면 밍숭맹숭하기도 한 이 길이 아스팔트가 아닌 흙길인 것은 감사할 만하다. 하지만 차가 다녀도 전혀 무리가 없을 만큼 평평한 데다 길 잃을 염려 없이 한 가닥의 길로 이어져 있어 지도나 GPS로 길을 찾아보는 재미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실망할 법도 하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좋은 점도 있는 법. 아직 여행객이 많이 찾지 않은 이 코스는 사람의 손길을 많이 타지 않은 순결함도 지니고 있다. 오지는 오지인데 부드럽고 편안한 어머니 같은 오지인 것이다. 조금 재미는 덜하지만 길 잃을 염려 없고,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로 삼림욕을 즐기며 걸을 수 있고, 쉬어갈 그늘이 거의 없어 아쉽긴 하지만 평탄한 길은 무리 없이 걷기에 딱이다.
서쪽으로는 백두대간 주맥인 옥돌봉이 이어지며, 동쪽으로 구룡산이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도래기재는 서벽리 북서쪽 2km 거리에 있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도래기마을에는 조선시대에 역이 있었기에 역촌마을이라 하여 도역리라 불리다가 이것이 변음돼 이제는 도래기재로 통용되고 있다.
비교적 평탄한 고개를 굽이굽이 걸어가면 저 멀리 보이는 능선길이 걸음을 재촉하는 것 같고, 제법 걷는 맛이 있다. 해발 780m의 주실령 고개에 당도했을 때는 적당하게 땀으로 젖은 몸을 바람이 한 번 씻어주니 고맙다. 그러나 코스가 끝날 때까지 적당히 앉아 쉴 벤치 하나 없다는 점이 야속한 느낌이다. 중간 중간 낙석 위험이 많다는 점과 표지판이 거의 없어 내가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도 나그네를 답답하게 한다.
▲ (위) 드문드문 피어 있는 벚꽃들을 눈으로 일일이 하나하나 헤아렸다. 도래기재에서 주실령 가는 길. (아래)일제감정기에 남벌된 춘양목이 새삼스레 아쉽게 느껴지던 춘양목 군락지.
주실령은 해발 780m의 고개로 옥돌봉과 문수산 사이에 있다. 옥돌봉 산행 들머리로 이용되고, 예배령과 문수산을 종주하는 산행 들머리로도 이용되는 고개다. 주실령 서쪽에 자리한 오전리에는 탄산수로 이름 높은 오전약수가 있다.
도래기재~주실령을 돌아보고 나니 오전 한나절이 지났다. 인근 식당에서 푸짐하게 점심을 먹고 춘양목(금강송) 군락지로 향했다. 춘양면 서벽리에 위치한 춘양목 군락지는 평균 지름이 50cm가 넘는 금강송(춘양목)이 약 1500그루 자생하고 있는데 평균 수명이 50년 정도밖에 안 된다. 까닭은 일제강점기부터 끊임없이 남벌된 탓이다.
숲 돌아보기는 산책로 입구 전시장에서 시작되고 약 1시간 걸린다. 현장에 상주하는 숲해설가들과 함께 금강소나무 숲을 다양하게 체험할 수도 있다. 금강송이 이곳에서 춘양목으로 불리는 까닭은 과거 인근 지역에서 벌목한 금강송을 영암선 철도인 춘양역에 모았다 전국으로 내다 팔았기 때문이다. 1.5km에 달하는 탐방로 곳곳에는 수목과 야생화, 야생동물에 대한 설명을 적은 해설판이 세워져 있다. 맑은 공기와 더불어 숲길을 걸으며 아름드리 금강송을 발견하듯 관람하는 맛이 쏠쏠하다. 걷기를 목적으로 한다면 그 길이가 살짝 실망스럽지만 삼림욕을 즐기고 자연체험학습을 하기에는 좋은 코스다.
첫댓글 요기 가고 싶네여.
저두요^^**
봄되면 찾아 갈 길입니다.
벙개 여행으로 추진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