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산의 지역 문화예술 환경과 기반 2. 안산에서의 강세황과 김홍도의 만남 3. 변방에서 중앙으로 꽃피워야 할 ‘안산의 문화예술’ |
1. 안산의 지역 문화예술 환경과 기반
안산은 “천년 안산”의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940년(태조 23) 안산군에서 출발하여 1986년 1월 1일 안산시로 승격하였다. 이러한 역사성으로부터 출발한 안산은 자연지리 문화자원이 다양하다. 안산의 아름다운 경관(景觀)을 1797년(정조 21) 정조의 화산(華山) 능행(陵幸) 때 하루를 묶으면서 이곳의 형세를 읊은 시에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떨기 갓 피어난 연꽃’에 비유했으며, ‘천하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안산’이라고 격찬하였다. 때문에 안산은 옛부터 문화가 살아 있는 ‘예향(藝鄕)’이자 ‘문향(文鄕)’이었다.
안산은 역사·문화적 측면에서는 선사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시대적 역사문화를 고루 갖추고 있어, 지자체로서는 매우 다양한 시대의 역사성을 보유한 지역이다. 안산의 구릉성 산지 형태의 지세와 접한 서해안은 옛부터 지리적 이점으로 농업과 어업의 중요 생산기지로서 주목되었다. 풍요로운 삶과 순후한 민심을 자랑하며 경기의 살기 좋은 세 곳 중 하나로 손꼽힌다.
안산은 역사문화 자원이 풍부하다. 안산은 시화를 끼고 바다와 연접해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해산물과 소금을 산출하며, 다른 한편으로 농업을 통해 곡물을 생산하였다. 조선전기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바다가 가까우니, 생선과 소금은 백월(百越, 중국 광동)과 같고, 땅이 비옥하니, 메벼와 찰벼는 삼오(三吳, 양자강 하류)에 비길만 하다”고 했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수리산에서 나온 줄기 중에 서쪽으로 간 가장 짧은 줄기가 안산 바닷가에 그쳤는데, 예로부터 경성(京城) 공경가(公卿家) 조상들의 묘소가 많다. 또 서울과 가깝고 생선과 소금이 풍부하므로 여러 대를 이어사는 사대부 집도 많다. 수리산에서 남쪽으로 나온 줄기는 서남쪽으로 가다가 광주 성곶리(聲串里)에서 그쳐 생선과 소금을 생산하는 갯마을이 되었다. 근해의 장삿배가 제법 모여들고, 주민은 생선을 파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 부유하게 된다”고 할 정도였다.
이런 경제적 기반은 왕실의 궁토(宮土)와 어살(漁箭)로 지정되기에 이르렀고, 왕실의 척족(戚族)과 공신의 별서와 사패지가 마련되기도 하였다. 또한 안산은 조선후기 경화사족(京華士族) 뿐만 아니라 낙향한 근기남인(近畿南人)의 안착지이기도 했다. 1689년(숙종 15) 희빈 장씨(禧嬪 張氏) 소생인 왕자의 정호(定號) 문제를 계기로 서인(西人)에 대신해 권력을 잡은 기사남인(己巳南人) 정권의 주축을 이루던 진주 유씨(晉州 柳氏)의 주요 기반도 이곳이었다. 유씨가의 경제기반은 선조의 부마였던 진안위(晉安尉) 유적(柳頔)에서부터 비롯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유명천(柳命天)·유명현(柳命賢) 형제가 죽임을 당하는 화를 입고, 1728년(영조 4) 무신란(戊申亂) 때 유명현의 아들 유래(柳徠)가 옥사하자, 서울을 떠나 안산의 향저로 낙향했다. 이후 진주 유씨는 임금이 하사한 넓은 사패지(賜牌地)와 안산 바닷가의 어염권을 기반으로 이곳에 살면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고, 조선 중기에는 기호남인(畿湖南人) 3대 가문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이르면 청문당(淸聞堂) 만권루(萬卷樓)는 조선 4대 개인 서고의하나로,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의 오교장(五橋莊)과 함께 기호남인들의 학문과 예술의 중심질서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
이처럼 일찍부터 안산에 재지(在地) 기반을 마련한 근기남인의 주도세력은 이러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18세기 이후 활발한 문예활동을 펼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실학의 대표인물인 성호(星湖) 이익(李翼) 역시 선대의 근거지인 이곳에 성호장(星湖莊)을 마련한 것도 이와 비슷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안산은 조선후기 사대부들의 학문과 문화예술, 그리고 지역민에 의한 민속문화가 다양하고 풍성하게 꽃피워 온 고장이었다. 조선전기 ‘산수화엔 안견(安堅), 인물화에는 최경(崔逕)’으로 일컬어진 최경과 안산을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한 강희맹(姜希孟, 1424∼1483)과 《양화소록(養花小錄)》의 저자인 강희안(姜希顔), 그리고 조선 시대 서인 4대문장가로 안산에 살며 시작(詩作)과 문필(文筆) 활동을 했던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문학,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의 실학과 그의 제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민족사학, 강화학파를 개창한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1649∼1736)의 양명학(陽明學)은 모두 안산지역을 기반으로 발흥하였다. 또한 일제 때 활동한 서화가 영운(穎雲) 김용진(金容鎭, 1878∼1968)도 일동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안정복은 광주에서 살면서 33세 되던 해에 66세가 된 성호를 첨성촌으로 찾아뵌 이후 네 번이나 이곳으로 발길을 옮겼고, 12차례나 고견을 구하는 편지를 올리기도 했다. 안정복이 광주 경안면 중대리에서 성호를 찾아뵌 안산의 첨성길은 ‘실학의 길’이다.
첨성촌에서 멀지 않은 안산읍내(현 수암동)에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조선후기 화원의 대표였던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거주하고 있었다. 서울 남산에서 태어난 그는 21세 때 진천에 머물던 아버지가 별세하자 3년상을, 25세 때 다시 어머니상과 시묘살이를 마치고, 집안이 옹색해지자 32살에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내려와 61세로 벼슬에 나갈 때까지 30여 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강세황은 수암동 원당골에 우거한 심사정(沈師正, 1707∼1769)과 1761년(영조 37) 무렵부터 교유하며 원당사(元堂寺)에서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부곡(釜谷)의 처가와 5리 떨어진 곳(수암동 추정)에 살았던 표암은 시와 그림에 능하였던 처남 해암(海巖) 유경종(柳慶種, 1714∼1784)의 사랑방인 청문당(淸聞堂)에서 그림도 그리고 시도 짓고 읊으며 지냈다. 이 사랑방에서 그림을 배운 이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1∼1806?)이다. 나이 7∼8세였던 단원은 표암으로부터 귀여움을 받았고, 단원 또한 표암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표암은 30살 위인 성호의 글방을 왕래하면서 같은 연배인 이용휴(성호의 조카)와 친하게 지냈다. 안산은 이렇듯 조선후기 ‘실학의 메카’이자, ‘예향(藝香)의 고향’이다.
안산이 문화와 예술로 가장 화려하게 발돋움한 것은 영·정조 시대였다. ‘안산 15학사’는 안산지역에 거처하던 일군의 남인과 소북 계열 사대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이맹휴의 《연성동유록(蓮城同遊錄)》에서 비롯하였다. 재야의 안산사단(安山詞壇)을 개창했던 임정(任珽, 1694∼1750)·최성대(崔成大, 1691∼1761)가 개창하였고, 다음 세대인 이용휴·강세황·유경종·허필·신광수 등이 가담하면서 활발한 활동하면서 서로 교유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현실정치에서 소외된 인사들로 그들의 불만을 문학이나 예술로 드러냈다. ‘오천시사(午川詩社)’의 일원인 유경종이 당시 참여했던 인사들의 면면을 평한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의 시회활동은 안산을 ‘문향(文香)’의 고장으로 자리잡도록 하였다.
2. 안산에서의 강세황과 김홍도의 만남
김홍도가 강세황의 제자로 인식되게 된 것은 강세황의 『표암유고(豹菴遺稿)』에 수록되어 있는 김홍도에 대한 자료인 「단원기(檀園記)」, 「단원기우일본(檀園記又一本)」이라는 두 글 때문이다. 즉, 단원이 ‘젓니를 갈던 시기부터(7~8세) 강세황에게 배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강세황과 김홍도를 사제지간으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먼저 「단원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홍도는 어려서부터 그림 공부를 하여 다양한 장르에 걸쳐 못 그리는 그림이 없을 정도로 천재성을 지녔으며 그의 재능은 옛 사람과 비교해도 대항할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울러 김홍도는 천부적인 소질을 바탕으로 스스로 터득하여 독창적이고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으며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김홍도의 절묘한 재주에 모두 놀랐다. 「단원기우일본」에는 김홍도가 일찍부터 뛰어난 기예를 지녀 당시 도화서를 대표하는 화원들도 그의 수준을 능가할 사람이 없었으며 산수, 인물 등 모든 분야에서 뛰어난 그림을 그림으로써 조선 전체의 역사 4백년을 통해 보아도 개벽을 이룰 정도로 화풍상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고 적혀 있다. 또한 강세황은 김홍도가 특히 풍속화에 뛰어나 그의 풍속화를 본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신기하다고 부르짖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한편 그는 이러한 김홍도의 천재성은 명석한 머리와 신비한 깨달음을 통해 얻은 것으로 천고(千古)의 오묘한 터득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김홍도의 재능을 극찬하였다.
「단원기」와 「단원기우일본」은 김홍도가 안기찰방(安奇察訪)직을 마치고 도화서로 복귀한 1786년 이후 언젠가에 작성된 글들이다. 당시 70대 중반이었던 강세황은 40대 초였던 김홍도와의 인연을 설명하면서 자신과 김홍도와의 관계가 세 번 변하였다고 하였다. 즉. “처음에는 사능(士能, 김홍도의 字)이 어려서 내 문하에 다닐 때에 그의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였고, 그에게 그림[畵訣]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중간에는 같은 관청에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냈고,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藝林]에 있으면서 지기다운 느낌을 가졌다”는 것이다. 강세황은 “사능(士能)이 글을 부탁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고 반드시 나에게 온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라고 두 사람의 오랜 인연을 말하고 있다.
강세황은 먼저 그는 김홍도가 자신의 문하에 있을 때 그림 그리는 요체인 화결(畵訣)을 가르쳤다고 하였다. 이후 1774년에 강세황은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로 부임하여 같은 부서에서 김홍도와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이것이 두 번째 변화이다. 마지막으로 1786년 이후에 강세황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으로 재직하고 있었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신분과 나이를 떠나 김홍도를 ‘지기(知己)’로 생각할 정도로 가깝게 느꼈다고 술회하였다.
지금까지 〈단원기(檀園記〉에 단원이 ‘젖니를 갈던 시기’부터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김홍도가 안산출신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변영섭의 설에 근거해 문화관광부(현 문화관광체육부)에서 1991년 안산을 단원의 도시로 명명하였다. 이후 안산은 ‘단원의 도시’로 정착시키기 위한 관련 사업을 실시해 오고 있다.
유명한 화가의 경우, 그 지역의 정체성을 정립하는 기준이 된다. 안산시에서 김홍도의 호인 단원를 따서 200년 단원구와 단원로라 명명하고 매년 단원미술제를 여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김홍도의 고향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고 못하고 있다. 안산이라는 설과 마포라는 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최근에는 서울 하량(河粱)이라는 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강세황은 안산설은 변영섭이 처음으로 제기하고, 진준현이 이를 지지했다. 변영섭의 경우, 강세황은 김홍도가 태어나기 전인 1744년(영조 20)부터 1773년 영릉참봉의 관직에 나갈 때까지 만 30년을 처가가 있는 안산에서 살았고, 김홍도는 어렸을 적에 안산에서 강세황으로 부터 그림을 배웠다는 것이다. 반면 오주석은 김홍도의 초년에 사용한 호인 서호(西湖)가 한강인 마포 강가라는 점을 들어 마포가 김홍도의 출생지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유천형은 서호가 안산의 앞바다 이름이며 김홍도가 안산에서 활동하던 강세황, 이용휴(李用休, 1708~1782)와 친교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들어 안산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그런데 이들은 앞의 「단원기(檀園記)」를 근거로 김홍도의 출생지를 추정하고 있을 뿐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이태호는 김홍도가 1784년 안기찰방으로 부임한 뒤에 임청각(臨淸閣) 주인 이의수(李宜秀, 1745~1814)에게 그려준 '수금·초목·충어 화첩' 10폭이 새로 발견되었는데, 이 화첩에 당대 문인 권정교가 쓴 '김홍도는 낙성(洛城) 하량인(河梁人)'이라고 출신지를 알게 하는 발문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원기」의 내용은 서울 ‘하량(청계천 관수교 자리)’에 살던 김홍도가 ‘염초방’에 있는 강세황의 서울 집에 드나들었다는 것으로 안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것이다. 이 발문의 ‘하량’은 청계천 수표교 아래에 있던 중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결국 이태호는 화첩을 근거로 ‘단원 김홍도는 안산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김홍도가 가장 많이 쓴 호는 ‘단원(檀園)’이다. 김홍도는 40대부터 단원이라는 호를 쓰기로 마음먹고, 스승 강세황에게 이에 대한 글을 써달라고 청했다. 강세황은 「단원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단원은 명나라 이유방(李流芳)의 호다. 김홍도 군이 본떠서 자기의 호를 삼은 것은 무슨 생각에서인가? 이유방이 문사로서 고상하고 밝았으며, 그림도 기이하고 전아(典雅)했던 것을 사모했기 때문이리라. 김홍도는 생김새가 곱고 빼어날 뿐 아니라 속마음도 세속을 벗어나 있다. 거문고나 피리의 우아한 소리를 좋아하여 매번 꽃 핀 달밤이 되면 때때로 한두 곡조를 연주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했다. 또 강세황은 「단원기」에서 김홍도의 거처를 묘사하고 있다. “방 한 칸을 마련하고 마당을 깨끗이 하여 좋은 화초들을 섞어 심었다. 집안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의 먼지도 일지 않았다. 책상과 안석 사이에는 오직 오래된 벼루와 고운 붓, 쓸 만한 먹과 희디흰 비단만 있을 뿐이었다”고 하였다.
강세황은 1713년(숙종 39) 윤5월 21일에 서울 남산 기슭의 남소동(南小洞)에서 3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하며 고상한 품성이 남달랐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학문과 장수의 전통이 있었고, 그도 71세 때 할아버지, 아버지에 이어 3대째 기로사(耆老社, 70세가 넘는 정2품 이상의 관리들을 예우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구)에 들어감으로써 ‘삼세기영지가(三世耆英之家)’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아버지 문안공 현은 64세라는 늦은 나이에 얻은 그를 무척 아끼고 기특히 여겨 잠시도 무릎 위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고, 교육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 강세황은 6세에 글을 지었고, 10세 때는 도화서 생도를 뽑는 행사에서 어른을 대신하여 등급을 매겼는데 조금도 틀림이 없어 나이 든 화사(畵師)들이 탄복하였다고 한다. 12~13세에는 행서(行書)를 잘 써서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어다 병풍을 꾸미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 젊은 나이에 집안에서 문서를 작성하고 손님을 맞이하여 접대하는 일을 도맡아 하였다.
효성도 극진하였다. 21세 때 아버지가 진천(鎭川)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별세하였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아버지를 모시고 가려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자 몰래 뒤따라 나서서 돌봐 드리고 돌아가실 때까지 불편함이 없도록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상을 당하고 3년 여묘(廬墓)를 사는 동안 아버지 형제의 유고를 손수 베꼈다. 28세 때는 다시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여묘를 살았다. 집안형편도 넉넉하지 않으며 막내였던 그가 효성 하나로 20대 초반과 후반을 합하여 6년간 부모 여묘를 산 것이다.
25세 때는 생활이 어려워 그때까지 모시던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없게 되자 그의 부인은 가난 때문에 칠순 노모를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였다고 한다. 그 가난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 서울에서 지내기 어려운 형편이 되었고, 마침내 32세 되던 해에 처가가 있는 안산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61세 때인 1773년 영릉참봉(英陵參奉)으로 처음 벼슬길에 올라 서울로 돌아왔다. 물론 강세황이 안산에 살 때 서울과의 왕래를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었다. 현재 김홍도가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었을 때 그 집이 어디에 있었던 집인지는 명료하지 않다. 이 집이 강세황이 거주하던 안산의 집이었는지 아니면 강세황이 서울에 남겨 두고 온 집이었는지 여전히 모호하다. 대대로 중인 무관 벼슬을 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홍도가 연고가 없는 안산으로 이주해서 살았다고 생각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한편, 장진성은 김홍도가 32세 때 그린 병풍인 〈군선도(群仙圖)〉를 보면 과연 김홍도가 천재였으며 문인화가였던 강세황이 그의 그림 스승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하였다. 〈군선도〉에 보이는 인물 표현 방식은 강세황의 작품 어디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강세황이 32세 때 1747년에 그린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는 초복날 개를 잡아먹은 후 안산의 친구들과 시도 짓고 거문도도 연주하면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지만, 인물 하나하나 윤곽과 표정이 잘 드러나 있지 않아 단조로움 느낌이 든다는 점, 김홍도의 《행려풍속도병풍(行旅風俗圖屛風)》을 보면, 산수를 배경으로 들판을 지나가는 일군의 인물들이 지닌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생동감 있게 묘사해 내고 있는데, 이러한 생생한 인물 표현은 강세황의 작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강세황의 〈피금정도(披襟亭圖)〉와 김홍도의 《관동팔경도병풍(關東八景圖屛風)》 〈시중대(侍中臺)〉를 비교하여 공간 처리, 기법, 구도면에서 강세황과 김홍도는 진경산수화에 대해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두 작품의 비교만으로도 강세황이 김홍도의 스승이라는 주장에 의문을 갖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홍도의 출신을 위의 화첩만으로 ‘서울 하량’설은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우선 출신지를 구체적으로 밝힌 화첩 발문의 기록은 김홍도가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한지 10년 이상 지난 시기의 것이다. 안동지역의 찰방으로 부임하여 지방의 양반들과 교유하며 중인신분의 김홍도는 자신이 서울 사람이라고 강조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왜냐하면 당시 주거지를 서울과 지방 두 군데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서울’ 출신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도 서울집과 안산집을 모두 소유하고 있었다.
강세황은 32세(1744)에 처가가 있는 안산(安山)으로 이사하였다가 61세(1773)에 처음 벼슬길에 올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고 스스로 적고 있다. 강세황에게는 진주 유씨 소생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1763년부터 1790년 사이에 소과와 대과에 합격을 했다. 1763년 증광시(增廣試)에 강흔이 합격했고 이어 맏아들 강인이 1765년 1772년 소과와 대과에 합격 했다. 이들의 거주지는 안산으로 기록되었고, 78세인 1790년에 막내아들 강빈이 합격했을 때는 거주지가 서울로 나타난다. 강세황이 자신의 글에서 밝힌 안산의 거주시기와 과거 합격자의 기록은 일치한다.
강세황이 안산집[鄕邸]과 염초방의 서울집[京邸]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었다면 당시 벼슬아치들처럼 아들들은 서울집에서 과거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과거 합격자 명부에도 서울 거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것이 매우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과거 합격자의 목록인 『국조방목(國朝榜目)』을 보더라도 흔히 나타나고 있으며, 안산 출신으로 높은 벼슬을 지내고 안산에 묘소가 있는 유명 인사들도 『국조방목』에는 서울 거주로 기록되었다. 여러 사료를 분석해 볼 때 강세황의 서울집은 안산 이주 후 다른 사람이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1784년 안기찰방으로 부임한 뒤에 임청각 주인 이의수에게 그려준 '수금ㆍ초목ㆍ충어 화첩' 10폭의 화첩에 '김홍도는 낙성(洛城) 하량인(河梁人)'이라고 출신지를 표기한 시기를 분석하면, 김홍도의 나이는 40세가 된다. 또 강세황의 나이는 72세에 해당한다. 이 둘은 이미 안산을 떠나 한양에서 활동한 시기이다. 또한 김홍도가 어렸을 때인 ‘젖니를 갈던 시기’를 대략 7~8살로 추정해도 강세황의 나이는 40대에 해당한다. 강세황이 안산의 처가로 내려올 당시의 나이는 32살이었다. 따라서 둘이 첫 조우한 시기는 빨리 잡아도 강세황의 나이가 대략 30~40대 초반으로 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김홍도의 안산생활은 한양으로 올라가 활동하기까지의 12~20년의 기간이 되며, 이후 27살 전후에 상경하여 활동한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김홍도가 강세황에게서 그림을 배운 곳은 안산이 확실하다. 만약 김홍도의 출신지가 안산이 아니고 화첩의 기록처럼, 서울 ‘하량’이었다면, 도리어 안산으로 유학을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김홍도는 1745년(영조 21년) 태어나, 정조 재위 24년을 거쳐 순조 6년 1806년경까지 62년을 살았다. 김홍도의 가계는 오세창의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에 나오는 가계도와 성원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5대조 김득남은 수문장을, 고조 김중현은 별제를, 증조 김진창(金震昌)은 만호를 지냈고 조부 김수성과 부친 김석무(金錫武)는 벼슬이 기록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김홍도의 집안은 대체로 하급 무반 벼슬을 지낸 중인 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홍도의 외할아버지는 장필주(張弼周)는 인동장씨 집안으로 대대로 화원을 지낸 화원사회의 명문거족이다. 이런 내력으로 그는 강세황이이나 화원세계의 소개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연유로 일곱 살 전후의 어린 나이에 강세황에게서 화법을 배웠을 법하다. 이후 행적은 1765년 그의 나이 21살 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경현당수작도>를 제작한 것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화원으로 두드러진 활동을 하였으며, 특히 정조 원년인 1777년(33살)때부터 국왕으로부터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29세, 37세, 47세 세 차례에 거쳐 화역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국왕의 초상화 제작에 참여하였다. 44세 때에는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 절경을 제작하였으며, 46세에는 정조의 생부 사도세자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수원 용주사의 후탱불을 주관하였다.
1791년 연풍현감에 제수되었지만 불미스럽게 파직되어 1795년 한양으로 돌아와 그림에 전념하게 되었다. 51세에는 임금의 화성(수원) 행차를 그린 <화성원행의궤도>와 수원의 경관을 담은 <화성춘추팔경도> 16폭 병풍을 진상하였다. 52세(1796년) 때에는 전체 20폭으로 구성된, 단원 예술혼의 정화라고 할 수 있는 <단원절세보첩>을 완성하였다. 빛났던 장년 때와는 달리 노년은 허망하게 보냈다. 순조 때인 1804년에는 규장각 화원으로 소속되어 젊은 화원들과 시험을 보기도 하는 등 처량한 신세가 된다. 1805년 가을에는 신병으로 화원을 그만 두게 되었고 그해 말 그린 <추성부도>는 허망한 인생에 대한 쓸쓸함을 읽을 수 있게 하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따라서 단원 김홍도의 출생지에 대한 여러 의견 가운데 ‘안산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자료는 그의 그림일 것이다. 즉 김홍도의 그림 속에서도 안산 앞바다의 풍속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안산과 직접 관련있는 것은 「어살(魚箭)」·「매해파행(賣蟹婆行)」·≪행려풍속도병》 중 「매해파행」·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 등이 있다.
김홍도의 ‘어살’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 물 속에 말목을 세워 고기를 들게 하는 울을 어살 또는 어전(漁箭)이라고 한다. 바다에 말장을 빽빽이 쳐서 길게 담을 만들어 두었다. 또 말장과 말장 사이에 그물을 치면 ‘말장그물’이라 한다.
어살은 독살과 더불어 어살은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한 대표적인 어법으로, 조류를 따라 내유하는 조기·청어·민어·갈치·숭어·대하·전어 등 모든 어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어살은 충청남도 서해안을 비롯하여 경기도·전라도·황해도 등 서해안을 중심으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한 곳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안산은 1396년(태조 5) 서해의 어장(漁場) 중 가장 우수한 곳으로 지목되어, 궁중에 생선 등 해산물을 진상하는 사옹원분원(司饔院分院)이 직할하는 안산어소(安山漁所)가 자리 잡게 되었다. 또 염소(鹽所)가 5개, 어량(魚梁)이 5개가 있었다. 안산어소에는 정7품관인 2인의 직장(直長) 중 1인이 상주하며 어로를 감독·지휘했는데, 어염(漁鹽)에 대한 상인들의 징세 업무도 보았다.
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매해파행(賣蟹婆行)〉에 대한 평에서 강세황은 “내가 일찍이 바닷가에 살 때, 아이를 업고 광주리를 인 십여 명의 젓갈 파는 아낙들이 무리를 지어 길을 가는 것을 보았다. 바닷가 하늘에 태양이 처음 떠오를 때 갈매기와 물새들이 다투어 날아오르고, 거칠고 차가운 풍물이 한 무리를 이룬 것이 또한 필묵의 밖에 있고, 바야흐로 도도히 흐르는 속세의 티끌 속에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보는 이로 하여금 돌아가고픈 생각이 일게 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행려풍속도병》 중 〈매해파행〉이 있다. 이 작품에도 적혀 있는 강세황의 제발(題跋)에는 광주리와 항아리에 담겨진 어물이 무엇이고, 언제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알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 즉, “성게, 새우, 소금을 광주리와 항아리에 가득히 채워 포구에서 새벽에 출발한다. 해오라기 놀라서 날고 한 번 펼쳐 보니 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듯하다” 포구의 여인들은 성게, 새우, 소금을 광주리와 항아리에 담아서 이고 가고 있다. 그들이 새벽부터 부지런히 포구를 출발해서 향하는 목적지는 어디일까? 그곳은 안산을 거쳐 인근 군현이나 대도시 한양(서울)일 것이다. 서화에 재능을 가진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바닷가 풍물을 그린 풍속화인 〈게 파는 여인(賣螃女)〉에 대해 시로 쓴 평에서 인천과 부천 사람들은 바닷가에 나는 방게를 주어 무리를 지어 한양, 즉 서울로 가서 옷과 바꾸어 돌아온다고 했다. 이들 지역과 붙어 있는 안산의 풍속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1763년(영조 39) 4월 10일에 그려진 「균와아집도(筠窩雅集圖)」의 연객(煙客) 허필(許佖)이 적은 화면 상단의 발문에 따르면, “책상에 기대어 거문고를 타는 사람은 표암이다. 곁에 앉은 아이는 김덕형이다. 담뱃대를 물고 곁에 앉은 사람은 현재 심사정이다. 치건(緇巾)을 쓰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호생관 최북이다. 호생관과 마주하여 바둑을 두는 사람은 추계(秋溪)이다. 구석에 앉아 바둑 두는 것을 보는 사람은 연객 허필이다. 안석(安席)에 기대어 앉은 사람은 균와이다. 균와와 마주하여 퉁소를 부는 사람은 김홍도이다. 인물은 그린 사람은 또한 홍도이고, 소나무와 돌을 그린 사람은 현재이다. 표암은 그림의 위치를 배열하고, 호생관은 색을 입혔다. 모임의 장소는 균와이다”라고 했다.
허필의 발문에 따르면, 균와(筠窩)라는 곳에서 강세황, 심사정, 허필과 최북, 김홍도와 비슷한 연배인 김덕형(金德亨)이 함께 자리를 하고 있다. 강세황은 수암 원당골에 우거한 심사정(沈師正, 1706~1776)과 가까웠으며, 시인이자 화가였던 허필(許佖, 1709~1768)과 절친했다. 또 안산에서 만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화가 최북(崔北, 1712~1786)과도 두루 친했고 김홍도(金弘道)는 직접 가르쳤다. 이들은 모두 18세기 화단의 주역들인데 이들이 한 화폭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림이 그려진 때는 1763년이며, 표암이 전체의 구도를 잡고 소나무와 돌은 심사정이 그렸고 채색은 최북이 했으며 인물은 김홍도가 그렸다. 당시 강세황은 51살, 심사정은 58살, 최북은 52살 그리고 김홍도는 19살이었다. 김덕형은 김홍도 보다 어린 나이로 짐작이 된다. 현재 전하고 있는 김홍도의 아집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인물화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균와는 ‘대나무 움집’이나 ‘대나무가 있는 별장’의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모임에 참가한 여덟 사람 중 한 사람인 신광익(辛光翊, 1764~1876)의 호이며, 모임이 열린 장소이기도 하다. 광익은 신을 벗고 안석에 기댄 채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단원보다 한 살 아래이며 이들보다 더 어린 인물이 꽃가꾸기에 미친 사람이자 꽃 그림으로 유명한 《백화보(百花譜)》를 그린 김덕형이다.
또한 김홍도와 이용휴의 관계이다. 단원과 이용휴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글은 「대우암기(對右菴記)」·「대우암금군상찬(對右菴金君像贊)」·「대우암명(對右菴銘)」이다. 「대우암기」에는 김홍도가 거처하던 곳인 대우암의 연유를 설명하는 한편 김홍도의 재능을 칭찬한 글이다. 1782년 이전에 쓰인 이 글에서 이용휴는 “김군 사능(士能)은 스승이 없이도 지혜로써 새로운 뜻을 창출하고, 그 붓이 간 곳에는 신(神)이 모두 함께 하니 그 푸른 빛, 황금빛으로 섬세하게 그린 터럭이나 붉은 색, 흰 색으로 묘사한 비단은 모두 정교, 묘리(妙理)하여 옛 사람이보지 못함이 나의 한이다”라고 김홍도가 스승 없이 그림의 대가로 성장했다고 평가하였다.
이용휴의 이 글은 강세황과 김홍도의 사승관계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이용휴는 대표적인 남인인 여주이씨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작은아버지가 성호 이익이다. 이용휴는 아버지인 이침(李沈, 1671~1713)이 사망했을 때 6살이었다. 그는 안산에 있는 이익을 찾아가 학문을 배웠으며 안산에 거주하면서 재야문단의 대표적인 인물로 성장하였다. 그는 이른바 ‘안산 15학사(學士)’ 중 한 명이었다. 이용휴는 강세황의 처남인 유경종(柳慶種, 1714~1784), 강세황의 절친한 벗이었던 허필(許佖, 1709~1768)과 가까웠다. 특히 허필의 누이동생이 이용휴의 동생인 이병휴(李秉休, 1710~1776)와 혼임을 함으로써 허필과 이용휴는 사돈이 되었다. 이용휴가 허필의 생지명(生誌銘)을 써 주게 된 이유도 이러한 막역한 관계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용휴와 강세황, 심사정, 허필, 최북은 안산을 연고로 교유했을 것은 거의 분명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강세황의 『표암유고』에는 이용휴에 대한 언급이 없다. 강세황은 성호 이익을 위하여 〈도산도(陶山圖)〉를 그려 주었으며, 이익을 위시해 이광환(李匡煥, 1702~?)·이현환(李玄煥, 1713~1772)·이재덕(李載德, 1711~1768) 등 여주이씨 집안사람들과 매우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산15학사에 속해 있던 안산을 대표하는 시문가(詩文家)였던 이용휴에 대한 언급이 『표암유고』에 빠져 있다. 또 이용휴의 「대우암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김홍도와 안산의 관계에 대해 일절 언급이 없는 점이다. 이용휴는 김홍도의 안산에서의 출생과 성장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으며, 김홍도가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운 사실도 이용휴는 부정하고 있다. 이용휴는 「대우암기」에서 김홍도에게는 스승이 없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나아가 안산15학사가 남긴 어떤 글에도 김홍도의 안산 거주 사실은 나타나 있지 않다. 김홍도가 안산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면 안산에서 거주했던 이용휴가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러 기록을 통해 이들의 인적 관계망을 보면, 유종경과 강세황, 이익과 이용휴를 축으로 하는 김홍도와의 관련은 쉽사리 부정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용휴는 생원시에 합격하고, 절충첨중추(折衝僉中樞)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고 문장에 전념하였다. 서울서 관직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홍도와의 관계는 안산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를 추론케 하는 것이 《단원아집도(檀園雅集圖)》이다. 1753년 이재덕(李載德, 1711~1768)의 집 근처 성고(聲皐: 성포의 언덕)의 단원에서 시회를 열고 지은 시들을 모아 성첩한 것으로, 표지에 성고(聲皐)라는 방인(方印)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이재덕(李載德)이 소장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시회첩에 수록된 시는 총 29수로 시회에 참여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이경환(李景煥, 1696~1779), 이창환(李昌煥, 1699~?), 이광환(李匡煥, 1702~?), 이재덕(李載德, 1711~1768), 이재의(李載誼, 1729~1811), 이현환(李玄煥, 1713~1772), 이철환(李嚞煥, 1722~1779), 이재억(李載億, 1726~?), 이용징(李龍徵, ?~?), 강세황(姜世晃, 1713~1791), 권매(權勱, 1716~1767) 등이다. 이재덕은 본래 서울에 살다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1750년무렵에 안산 성촌(聲村) 조귀리(早歸里)로 이주하였다가 얼마 후 성고로 이사했다. 1762~1763년경에는 부모님의 선영을 섬산(蟾山, 剡山)으로 옮기고 3년 뒤 ‘의추재(依楸齋)’라는 재실을 짓고 살았다. 이현환의 「의추재기」에는 이재덕의 거처에 대해 ‘눈앞에는 하포(蝦浦)를, 등 뒤에는 수리산을 두었고, 집 오른편에는 단구(丹丘)가, 왼편에는 도산(陶山)이 바라보인다’는 기록으로 보아 김홍도가 사용한 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또한 김홍도가 ‘단원’이란 호를 즐겨 사용한 것은 1781년 31살 무렵이었다. 그가 그린 〈단원도(檀園圖)〉 발문을 보면, 1781년 봄에 우리 집인 단원에서 강희언(姜希彦) 및 정란(鄭瀾)과 함께 셋이 모여 ‘진솔회(眞率會)’라는 아회를 가졌다고 했다. 이 그림속의 단원은 아산이 아닌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김홍도의 초기 작품에 ‘서호(西湖)’·‘단구(丹丘)’는 성호 이익이 성포(聲浦) 서쪽 앞바다를 서호로 지칭하고 있다. 김홍도의 어린 시절만큼은 안산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 김홍도의 그림과 그와 관련한 여러 기록을 근거해 볼 때, 김홍도가 그림공부를 한 곳은 안산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필자의 전공은 미술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림과 관련한 기록들은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지 못하고, 기존의 단원 그림을 이해한 연구자와 문헌기록만을 검토해서 내린 추론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친근한 김홍도는 안산에서 자라나며 대화가로서의 기틀을 닦아 나갔다. 안산이 조선후기 최대의 화가 김홍도가 성장하는 배경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안산은 조선후기 새로운 사상과 문화예술 터전이었다. 북으로 진산(鎭山)인 수리산(修理山) 밑에서 발원해 읍내를 남북으로 가르는 오천(午川, 介橋川)을 사이로 북촌 추곡(楸谷)에서는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이, 남촌 첨성촌에서는 성호 이익의 실학이, 중촌 부곡에서는 ‘안산 15학사’의 한 사람이며, 영조 임금의 명찬(命撰)으로 『산림경제(山林經濟)』를 증보(增補)한 약은(藥隱)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이 살고 있었다.
또한 18세기 당시 안산은 노론(老論)과 이 당쟁에서 피해 물러난 남인(南人)과 소북(小北)계 문인, 학자들의 중요한 활동처였다. 우리나라 실학자 중 유명한 성호 이익(李瀷, 1681~1763) 선생을 비롯하여 그의 조카이자 당시 문단의 거장인 이용휴(李用休, 1708~1782), 문인화가 강세황(姜世晃, 1713~1791)과 허필(許佖, 1709~1768), 강세황의 처남이자 안산 문화계의 구심점이 되었던 유경종(柳慶種, 1714~1784)과 이외에도 강세황의 처조카로 유경종의 5촌 조카인 《근재서법(勤齋書法)》 등을 남긴 근재(勤齋) 유신(柳賮, 1748~1790) 등 그의 수많은 친구들이 당시 안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특히 유경종은 조부인 이조판서 유명현(柳命賢, 1643~1703)의 고향집을 물려받아 오교장(午橋莊)을 마련하여 안산 문화계의 사랑방을 제공하였다.
유경종의 오교장에 드나들었던 많은 인물들 중에는 유명한 역사학자 안정복(安鼎福, 1712~1791), 시인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정조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1720~1799), 정치인 목만중(睦萬中, 1727~1810) 등 유명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홍도는 이처럼 풍성한 안산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로서 성장하는 기틀을 닦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스승 강세황과 이용휴가 있었으며, 이들은 안산 문화계의 핵심 인사들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기반으로 안산은 살아있는 문화 예술의 도시로서 문화예술의 전당과 경기도미술관, 시립예술단, 서울 예술대학, 예술인아파트, 사라진 애니메이션 센터, 전국 단일 최고 규모의 문화원, 단원미술관, 단원조각공원이 세워져 있다. 지금도 안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시인 묵객과 화가가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안산의 문향과 예향적 기반은 18세기 문화예술의 중앙무대였던 안산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김홍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려진 바 없다. 우리는 미술 작품만을 보았지 그의 일생을 돌아보려는 시도(자료의 구축과 연구)는 없었다. ‘단원구’라는 명칭을 사용한지 13여년이 지났고, ‘단원미술제’가 17년 이상 열렸지만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는 단원과 안산과의 관계를 밝히려는 자료집을 발간하거나, 이에 기초한 김홍도 개인의 삶을 다룬 학술대회 제대로 열린 적이 없다. 과연 안산을 ‘단원의 고향’이자 ‘단원의 도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3. 변방에서 중앙으로 꽃피워야 할 ‘안산의 문화예술’
안산은 지역적 특성상 고려와 조선의 수도였던 개경·한양 중심의 중간 기착지로서, 대중국 무역로인 남양만의 관문이자 서해를 통한 수도권으로의 침입을 방어하는 전략 지역이었다. 절의와 충절, 효자, 열녀가 중시되면서도, 목내동과 수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와 마을의 형성하여 어·염업 중심의 경제생활이 다른 지역보다 활발하였다. 또한 왕실의 외향으로서 왕실의 궁토, 어살과 공신의 사패지가 원 안산 북부지역에 존재(시흥·군포)하고, 왕실의 척족과 훈신의 근거지와 경화사족(京華士族)이 낙향하여 세거지가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근기 남인의 정치적 소외와 안착이 이루어졌으며, 실학사상을 중심으로 한 문학과 예술의 터전이 되었다.
이처럼 안산의 정치, 경제 등 지역적 위상은 부평(인천), 시흥(금천), 과천(광주) 등 한강주변의 다른 지역보다 일찍부터 주목되었으나, 조선후기 이후 정치적으로 중앙 정계에서 소외된 인사들이 대거 은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근기남인의 정치적 소외와 열세, 그리고 경제적으로 농지와 인구의 부족 등은 점차 군세를 쇠락시켰다. 이러한 점은 관아의 빈번한 이동과 인근 군현에 통합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안산은 다른 지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사우·서원 건립과 이를 주도하는 문중의 결집이나, 학연의 연계가 시사(詩詞)를 제외하고는 뚜렸하게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점은 안산이 지역적으로, 또는 세거한 유력 가문이 비교적 뚜렷한 당색을 유지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중앙에서 낙향한 기호남인 문사(文士) 계층은 중앙지향성을 버리지 못한 채 출신지(고향)이라는 개념보다는 오히려 언제든지 떠날 수 있고, 낙향할 수 있는 연고지라는 관념이 자리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역의식과 정주의식은 어업과 농업에 기반한 토착주민과 유대되지 못하였다. 향약(鄕約)과 같은 지역공동체를 결속하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러하다. 다만 어업과 관련된 동계(洞契) 정도만 활성화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산은 한양과 가까운 근기지역이라는 지역적 조건과 함께 순후한 인심과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중앙 관료와 문사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에 의해 안산은 새로운 변화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실학과 새로운 변화를 이끈 중심지로서 항상 신문화(세계화)를 선도해 갔다. 이러한 점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안산의 지역적 가치로 새롭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안산은 변방에서 중앙으로 꽃피워야 할 ‘안산 실학과 문화예술’을 가꾸어야 한다. 특히 지역적으로 어업과 농업적 요소가 강했던 지역인 어촌(대부도)과 농촌(본오 으뜸쌀)을 보존하면서,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낙향한 한사(寒士)의 땅에서 이루어진 문화(근기 남인의 안산 15학사, 양명학)와 예향과 실학의 태동지로서의 역사문화의 도시(최경, 강희맹, 강세황, 심사정, 김홍도)를 최대한 이용하여 공단과 세계화의 도시(반월, 시화공단, 원곡동 외국인촌-러시아, 중국 조선족, 동남아시아 등)로 탈바꿈 되어야겠다. 또한 장유의 해산헌팔영(海山軒八詠), 유명천의 하당팔영(荷堂八詠), 이익의 화포잡영(花浦雜詠) 17수, 강세황의 연성8경(蓮城八景), 유원성의 부계8경(釜溪八景) 등에 보이는 안산의 경관을 살리고, 안산의 전통 상징인 농어, 연꽃·연밥, 쌀, 소금, 어량(돌살), 토란과 밤, 매화, 노가주(露柯酒), 호미씻이[洗鋤] , 4세충렬문(四世忠烈門)를 문화 상품으로 개발되어야 하고, 안산의 옛 경관인, 안산객관(安山客館), 석곡역(石谷驛), 쌍청당(雙淸堂), 유시회의 청문당과 지상편도(池上篇圖), 청문당 정자 뒤편의 우거진 대숲, 앞뜰의 작은 연못, 은행나무, 청문당 분매(淸聞堂盆梅) 등), 유종경의 오교장과 경성당·청문당, 서해팔경의 하나였던 대부도(大阜島) 객관, 장유 선대의 호호정(浩浩亭)과 장유가 기거한 해장정사(海莊精舍), 강세황과 심사정이 머문 원당사(元堂寺), 안원사(安院寺), 침해정(枕海亭), 무산(巫山, 해봉산(海峯山), 수리산 취암봉과 수리산의 2월 진달래, 9월 단풍, 안산어소(安山漁所), 새뿔 사옹원 분원, 장유 안산 별장의 집 뒤에 향나무를 추억할 수 있는 안산의 ‘역사가도(歷史街道)’를 구체화하여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될 수 있어야겠다.
이러한 역사문화의 조건을 가진 안산시는 서울의 인구 및 산업 분산시책의 일환으로 계획도시로 개발되었다. 1976년 시흥군의 수암면과 군자면, 화성군의 반월면 일대가 반월 신공업도시로 조성되면서 오늘의 안산이 형성됐다. 그 전까지는 바다를 낀 반농반어 지대로, 드문드문 마을이 흩어져 있었을 뿐이다. 안산은 반월공단과 시화공단을 대표로 하는 공업지구가 활성화되면서 인구의 증가하자, 1986년 1월 1일 시승격과 함께 고려시대 때부터 사용된 원래 이름인 안산시로 정하였다. 이때의 안산은 국내 최초의 계획도시였다. 호주의 캔버라를 모델 삼아 자족형 도시로 설계됐다. 2002년 11월 1일 상록구와 단원구가 생기면서 넓이 142km²(경기도의 1.42%)의 수도권의 거대도시로 성장하였다. 1990년 20만이 조금 넘는 인구 규모에서 25년이 지난 2015년 현재 4배 가까운 76만 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빠른 변모를 보여 준다는 점에서 안산시의 무한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이제 안산은 변방에서 중앙으로 꽃피워야 할 ‘안산 실학과 문화예술’을 가꾸어야 할 시기이다. 특히 지역적으로 어업과 농업적 요소가 강했던 지역인 어촌(대부도)과 농촌(본오 으뜸쌀)을 보존하면서, 중앙 정치에서 밀려나 낙향한 한사(寒士)의 땅에서 이루어진 문화(근기 남인의 안산 15학사, 양명학)와 예향과 실학의 태동지로서의 역사문화의 도시(최경, 강희맹·희안 형제, 이익, 강세황, 심사정, 김홍도)를 최대한 이용하여 스마트 허브(공단)와 세계화의 도시(반월, 시화공단, 원곡동 외국인촌-러시아, 중국 조선족, 동남아시아 등)로 탈바꿈 되었다.
‘안산 문화예술의 진흥’의 인프라는 이미 이루어져있다. 성호 이익 선생의 “저 넓은 (화포) 갯벌에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소금끼를 없앤다면 광활한 옥토가 되어 농토가 없어 굶어 죽는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니 좋은 계책을 백성에게 물어 이루라"라고 한 간절한 소망은 이제 농토에서 다시 크고 작은 상가와 주거지로 변화하였다. 농업과 어업에서 산업도시로 변화하였고, 토착민보다는 이주민이 많이 모여 안산시민을 구성하고, 여기에 전국 최고의 외국인 도시가 되었다. 공해문제로 지탄받던 공단은 ‘안산 스마트허브(Ansan Smart Hub)’로의 첨단 산업기지로 변모하고 있다.
이처럼 안산지역은 오랜 역사 속에서 육지와 바다를 함께 아우르는 농업과 어업의 전진기지로서 주민의 풍요한 삶을 자랑해 왔다. 순후한 인심과 여유로운 삶 속에서 창조되고 축적해 온 문화는 중앙의 사대부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균형된 모습을 자랑해 왔으며, 특히 조선 시대 후기에는 근기지방의 학문적 산실로 실학과 문학, 예술을 포함하는 새로운 문화운동의 중심지로 떠오르기도 하였다.
이제 세계화를 선도할 안산은 이런 주변 여건의 변화를 수용하고, 안산의 현실문제를 새로운 실학정신과 안산만이 지닌 문화예술로 대처해야 할 때이다. 이것이 바로 10년, 20년 후 안산이 먹고 살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성호 이익 선생의 “저 넓은 (화포) 갯벌에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고 소금끼를 없앤다면 광활한 옥토가 되어 농토가 없어 굶어 죽는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니 좋은 계책을 백성에게 물어 이루라"라고 한 간절한 소망은 이제 농토에서 다시 크고 작은 상가와 주거지로 변화하였다.
조선 실학이 ‘묵은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자(新我舊邦)’는 것이었다면, 우리 역시 묵은 안산을 새롭게 해야 한다. 성호 당시에 이룰 수 없었던 꿈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과연 성호가 다시 살아나 바라본다면 무엇이라 말할까? 이미 사라진 농토를 보면서 잘했다고 하지 않을까? 성호의 실학이라면 아직도 화포(성포동, 사동, 본오동 일대)는 농토로 남아 있어야 한다. 성호는 굶어죽는 백성을 위해 농토를 꿈꾸었지만, 우리는 우리를 위해 그것을 계승해 다른 것을 꿈꾸어야 한다. 오늘 날 우리의 실학정신은 조선 실학과도, 성호 실학과도 달라야 한다. 그것이 성호가 바라는 참된‘안산 실학’이기 때문이다.
농업사회를 이끌어 가는 조선성리학을 사회개혁 이념으로 받아들인 유형원·이익·안정복 등과 이를 탈피하여 농·상·공업의 균형적인 산업구조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사회를 재구성하려는 박지원·박제가·정약용·김정희 등 북학사상가들의 실학정신을 따르되, 우리 현실에 맞는 실학으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그것이 ‘실학의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다.
‘안산 실학’의 인프라는 이미 이루어졌다. 농업과 어업에서 산업도시로 변화하였고, 토착민보다는 이주민이 많이 모여 안산시민을 구성하고, 여기에 전국 최고의 외국인 도시가 되었다. 공해문제로 지탄받던 공단은 테크노마트와 허브 로봇센터 같은 첨단 산업기지로 변모하고 있다.
이제 세계화를 선도할 안산은 이런 주변 여건의 변화를 수용하고, 안산의 현실문제를 새로운 실학정신과 안산만이 지닌 문화예술(표암과 단원)로 대처해야 할 때이다. 안산의 정체성을 찾고 확립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은 안산 역사문화와 성호 실학을 재창조하여 우리 시대에 맞는 안산 실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종적, 횡적인 아날로그 실학에서 복합, 첨단의 디지털 실학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면에서 성호 이익과 표암 강세황, 그리고 단원 김홍도가 다져놓은 안산 실학과 예술이 ‘한국의 실학과 예술’으로, ‘세계 실학과 예술’의 메카로 새롭게 자리하기 위해서는 우리부터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실학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첫댓글 잘 읽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