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령 충만한 순교자
성경 : 행 7:54~60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 7:54~60)
※설교내용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는 분입니다. ‘하늘에도’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은 하늘이 있기 전에도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늘은 궁창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장차 공중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 예수는 지금 하늘에 계시고 때가 되면 다시 한번 공중에 들어오실 것입니다(살전 4:17).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늘에도 계시다.’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별들이 있는 궁창하늘이 아닌 영계(靈界) 하늘을 떠올려야 합니다.
예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 1:11)라고 말한 것처럼 예수는 지금 하늘에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하늘이 있기 전부터 홀로 계신 분입니다. 창세기 1장에 소개된 우주 창조가 있기 이전에 영계 하늘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은 그 영계 하늘이 있기 전에도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을 지으신 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은 별들이 있는 궁창의 어느 구석에 가는 것이 아니라 궁창 너머에 있는 영계 하늘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들어가 계신 곳이 바로 그곳이며, 우리도 장차 부활한 몸으로 그곳에 들어갈 것입니다.
부활이란 이미 흙으로 돌아간 육체가 다시 몸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된 영(靈)이 몸으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의 영혼은 육체를 떠난 후에 낙원에 가서 부활을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죽은 사람은 이미 천국에 가 있다.”라고 말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일이 있기 이전에 반드시 부활이 있어야 하는데 부활은 장차 예수께서 재림하심과 동시에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낙원은 믿는 자들의 영이 육체를 떠난 후에 들어가는 영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땅에 충만한 인류 가운데 한 사람을 택하여 생령이 되게 하신 다음 그를 에덴이라는 특별한 환경에 두셨습니다. 그가 타락했을 때는 그를 쫓아내신 다음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지키심으로써 누구도 에덴동산에 들어갈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땅 위에 이처럼 특별한 환경을 만드신 것처럼 낙원은 공중 안에 있으면서도 공중권세 잡은 자 마귀가 접근할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리하고 계신 곳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는 사흘 동안 낙원에 가 계셨습니다(눅 23:43). 부활하신 후에 막달라 마리아가 그를 만지려고 하자 그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요 20: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낙원에 가셨던 분이 아버지 집에는 아직 올라가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 낙원은 분명 하늘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5~17절은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낙원에 있던 영들은 홀연히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때에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성도들의 영은 순간에 육에 속한 몸을 빠져 나와 썩지 않을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육에 속한 몸은 이 땅에 남겨질 것이고 영이 변화된 몸은 공중에서 주님은 물론 그동안 낙원에 있다가 부활한 이들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후에 우리는 주님과 함께 세상에 내려와서 왕 노릇 하다가 천 년이 지난 후에는 주님과 함께 하늘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사람이 꾸며낸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며, 우리는 그 믿음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성령이 주시는 여러 가지 은사는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거가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도 믿음에 증거가 없으면 혼란스러운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속히 성령을 영접하고 또한 성령의 증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단지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늘에 가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다님으로써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일종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는 세상에 있는 수많은 종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는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도 없고 부활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은 종교인을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장차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썩어질 육신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양식을 먹은 영혼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요 6:49~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지만 그것 역시 영계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고 우주 공간 속에 있는 물질의 일부이기 때문에 아침에 아무리 많이 먹어도 저녁이 되면 또 배가 고파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날마다 그것을 먹었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늘로부터 온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피 뿌린 옷을 입은 말씀을 가리킵니다(계 19:13). 세상에 많은 말이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피 뿌린 옷을 입은 말씀만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영이요 생명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은 종교인을 데려 가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으로 생명을 얻은 영혼들을 데려가시기 위해서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설교자가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세상 이야기를 설교단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자신이 진리를 증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은혜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능력이 없는 청중들은 그런 세상 소리가 자기 마음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을 때 “은혜 받았다.”라고 말하고 또한 자기 영혼이 양식을 먹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말씀에 대해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 12:49~5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증언하시는 보혜사의 사역에 대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해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올 때 그것이 비로소 우리 영의 양식이 됩니다.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각 종교마다 교리가 있습니다. 그런 교리는 사람을 부활에 이르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사모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배’라는 말에는 하나님과 만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습니까? 신령과 진정, 즉 성령과 진리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거듭나고 진리로 양육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기 영혼이 언제 어떻게 자기 육체를 빠져나가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영혼이 몸을 빠져나가는 그날이 이르기 전에 주님이 먼저 오실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마치 추수하는 날과 같다고 했습니다. 논밭에서 자란 곡식은 추수 때가 되면 모두 타작마당으로 옮겨집니다. 그곳에서 쭉정이는 모닥불에 들어가고 알곡은 창고에 들어갈 것입니다. 성경은 다시 오실 주님을 가리켜 손에 키를 들고 오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마 3:12).
디모데전서 4장 1~2절은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일종의 외식(外飾)입니다. 사람들은 옷을 통해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옷을 통해 과시할 수 있는 육체는 어차피 흙에 남겨두고 가야 합니다. 주님이 심각하게 여기시는 외식은 육체의 외식이 아니고 영적인 외식입니다. 예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마 23:13) 하고 책망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영적인 외식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외식하는 사람입니까? 믿음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래 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는 진노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엡 2:2~5).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았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고 또한 자기 안에 성령이 계시고 자신이 진리로 양육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종교인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 전해진 말씀도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은 우리를 부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하여 모세로 말미암은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말씀을 명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예수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53~55)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생의 양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 세상을 떠나더라도 항상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데반은 유대인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히 외쳤습니다. ‘여러분 부형들이여,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을 보았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들이 본 것은 천사였소. 당신들은 천사가 모세를 통해 베풀어 준 율법도 지키지 못하고 있소!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 품에서 독생하여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에 오르신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요!’(행 7:1~60)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돌로 그를 쳐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이처럼 가장 성령 충만한 순간에 육체를 떠났습니다. 이는 예수의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순교입니다. 진정한 순교자란 죽이려는 사람에게서 도망치려다가 더 이상 도망할 곳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잡혀 죽는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육체를 떠나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이가 많다는 것을 핑계로 자신이 주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죽은 후에 시체가 묻힐 곳을 걱정하면서 소위 명당이라는 곳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비싼 납골당을 미리 사놓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가치 없는 일에 시간과 물질을 허비하지 말고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울수록 더 헌신하고 더 영적인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마 6:21).
우리가 살아있는 시간은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으신 것은 죽음을 맛보기 위해서입니다(히 2:9). 이 목적을 위해 지음을 받은 인간은, 그러므로 육체로 태어난 이상 반드시 죽음을 맛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은 백 년을, 어떤 사람은 오십 년을, 어떤 사람은 십 년을 달려가지만 결국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성령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느냐, 아니면 믿음을 떠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셨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 19:30)’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고, 또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자기 영혼을 아버지 손에 담대히 맡길 수 있었습니다(눅 23:46). 우리 영혼도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아야 합니다. 돌에 맞아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얼굴에 광채가 날 정도로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처럼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나야 합니다. 타락할 대로 타락하여 만신창이가 된 사람을 예수께서 기쁜 마음으로 데리러 오시겠습니까? 그는 하늘에 소망을 두고 주의 뜻대로 사는 자들을 데리러 오시는 분이지, 거짓말하고 방종하던 사람들을 데리러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성령은 이미 밝히 말씀하셨습니다(딤전 4:1~2). 우리는 주님을 만날 날이 가까이 올수록 더 신령해야 하고 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만이 순교가 아니고 영혼이 성령으로 충만한 중에 세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입니다.
당신은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하렵니까? 방종하고 타락한 신부입니까, 아니면 목숨을 다해 정절을 지키며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입니까? 스데반은 돌로 맞는 순간에 “이 놈들, 어디 한번 두고 봐라!” 하고 이를 가는 대신 도리어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의 영혼이 오늘 당장 육체를 떠난다면 당신은 어떤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겠습니까?
내 영혼아, 성령충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