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드리는 말씀
2010년 4월 24일의 교통사고(메뉴 <우리의이야기들> 395번, 402번글 참조)가 저를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로 내몰았습니다.
공차증(恐車症)의 발작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어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스무장의 엽서(메뉴 <카미노이야기>1번~20번 산티아고 소식)를 통해 저의
여정 75일이 대충(요약) 표현된 대로 카미노가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한 깡마른 한국 늙은이가 날이 갈 수록 모든 이(카미노 상의)의 선망을 받게 되면서
우쭐해지기도 했지만 때로는 기분나빴고, 또 때로는 속상했습니다.
겁날 때도 있었고,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하게 되는 다섯 개의 <카미노이야기>에는 이같은 애환이 담겨지게 될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마치 치밀하게 제작된 어떤 각본에 따른 한낱 출연자였을 뿐이라
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고비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해결사들이 등장했으니까요.
우연의 반복은 필연이라던가요.
이 이야기도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메뉴에서 차레를 <옛길> 아래로 낮춘 것은 우리 길만 못하다는 하위개념 뜻이
포함되어 있음도 첨언합니다.
<카미노 이야기>
(1)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길'(도로, way,road)이라는 보통명사일 뿐인 스페인어 카미노(camino)는 야고보
(Santiago:聖야고보의 스페인어 표기) 덕에 유명하고 거룩한 단어가 되었다.
신약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의하면 동 시대의 여러 동명이인중 제베대오의 아들인
이 야고보는 그의 동생 요한과 함께 예수의 열두제자중 하나다.
그는 헤로데 아그리파1세에 의해 사도들중 가장 먼저 순교했다.
그래서 그는 동생 요한처럼 유명하지도 않고 그에 대한 기록도 별무다.
그런데, 그의 생전 걸음이 이베리아반도에 까지 미첬다.
아마도,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 . . ", "땅 끝에 이르기 까지
. . . . , " 등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당부를 실천했을 것이다.
그의 시신도 예루살렘에서 이 지역으로 옮겨졌다.
아마, 유대인들이 시신마저 훼손하고야 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
훗날(AD844년), 확장 일로의 이슬람교 세력과 에스파냐군(카톨릭 세력)간의 싸움인
클라비호 전투(Clavijo)가 발발했다.
이때, 야고보는 결정적 위기마다 에스파냐군 앞에 나타나서 전세를 역전시킴으로서
'무어족 처단자 성 야고보(Santiago Matamoros)'라는 이미지를 갖게 되었고, 일약
스페인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의 시신 찾기가 뒤따랐을 것임은 당연한 귀결.
그러나 어디에 묻혔는지 행방이 묘연해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느 밤에 수도사 펠라요(Pelayo)가 한 밝은 별빛에 이끌려 간 들판에서
야고보의 무덤을 발견했다.
성 야고보(Sant Iago)가 있는 별(stella)들의 들판(compos), 즉 '산티아고 데 콤포
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지명의 유래다.
당시의 국왕 알폰소는 그 묘지 위에 150여년에 걸쳐 웅장한 대성당을 짖게 했다.
'성 야고보대성당'이다.
이 대성당으로 가는 길은 가장 잘 알려졌으며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리는 프랑스 길을
비롯해 모두 12개다.
'서울'에서 '생장피드포르'로
나는 이쯤의 상식을 지니고 70일 동안에 프랑스 길과 다른 두 길 등 세 개의 카미노,
약 1.500km를 걷겠다며 2011년 4월 3일 프랑스 파리행 KAL편으로 한국을 떠났다.
2002년, 딸이 있는 미국을 다녀온 후 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일은 끝났다고 다짐뒀
건만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허언이 되고 말았다.
자라에 놀란 가슴 소댕(솥뚜껑) 보고도 놀란다 했던가.
과도한 검색에 대한 항의의 실천이었는데.
(가장 비싼 우리 항공기를 이용한 것은 애국심의 발로가 아니고 다만 축적되어 있는
마일리지를 사용하기 때문일 뿐이다. 아재비 떡도 싸야 사먹는다 잖은가)
파리 샤르르 드골공항~오스테르리츠(Austerlitz)역~카미노 프랑세스의 시발점 생
장 피드포르(Saint Jean Pied de Port)까지가 가장 걱정거리였으나 지인 L과 아들
도움으로 이미 해결된 터라 한결 가벼운 기분이었다.
드골공항은 서유럽 여행중에 이용한 적이 있어서인지 생소하지 않은데다 내 이름를
쓴 피켓청년이 반겨주어 오스테르리츠역까지 가는 동안 잠이 들 만큼 편안했고, 두
장의 열차표(오스테르리츠~바욘과 바욘~생 장)를 미리 인터넷 구매해 번거로움을
덜어준 L이 새삼 고마웠다.
그는 국내 굴지은행의 파리지점장 재직때도 여행중인 우리 부부에게 극진하였으며
이번에도 저렴한 사전 인터넷 구매를 해주었다.
유로스타(Eurostar) 이후 처음 타는 열차인데 고속TGV는 아니지만 편했다.
내 여정(旅程) 최초로 말을 걸어 온 이는 독일 중년남.
옆 젊은 스페인녀에게 바욘(Bayonne)역을 물었는데 20분쯤 후에 도착할 것이라는
통로 저편 남성의 음성이 말꼬를 텄다.
국적(國籍)을 주고 받는 사이에 바욘역에 도착했다.
심야열차가 7시간 반만인 4월 4일(현지시간) 이른 아침(06 :45)에 도착한 바욘역은
생 장 가는 페레그리노들(peregrinos:pilgrims:순례자)의 환승역이다.
그래서, 내리는 이 대부분이 대형 배낭(back pack)을 메고 있다.
밤 새 비가 내렸나.
먼동이 막 트려는 시각, 촉촉이 젖어있는 바욘역 대합실은 이미 도착해서 생 장가는
열차를 기다리는 중인 이들과 합해져 제법 북적댔다.
(4월 초라 한가한 편이라니까 앞으로 날로 더욱 북새통일 것이 짐작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은 국경이 없나.
독일인은 하차하자 마자 독일인 답게 1시간 쯤의 막간을 이용하여 아침(breakfast)
챙기기에 열중하며 나의 아침 불식(不食) 습관을 알 리 없는 그는 내게도 먹어두는
것이 낫다고 권했다.
생 장행 1량의 전동차가 바욘역을 떠난 시각은 먼동이 튼 아침 7시 48분.
월요일인데 학교 대신 어딜 가기에 저리도 신명이 나있을까.
줄곧 조잘대는, 중학생 연령대의 남녀 소년들 몇명 외에는 모두가 산티아고를 최종
목적지로 하는 페레그리노들인 듯.
잘 정돈된 이미지를 풍기는 프랑스 남서부의 도시 바욘.
봄비에 젖은 연록 숲이 아침의 고요를 가르며 달리는 차창을 통해서도 아름다웠다.
니브강(nive) 맑은 물은 이 느낌을 생장 한하고 벗하게 하려 하건만 조용하고 자그
마한 시골에까지 침투한 고공크레인들이 훼방을 놓았다.
우리의 옛길을 걸을 때도 시골의 순박을 여지없이 깨뜨려버리는 저 문명의 악귀가
늘 그랬던 것 처럼.
나는 현대판 바벨탑의 핵심 도구인 저 괴물을 유구히 내려오는 고귀한 정서를 일시
에 파괴해 버리는 악귀라고 정의한다.
저층 아파트들이 판박이지만 친환경적이라 맘에 든다.
그림같은 목촌(牧村)을 만들며 동행하는 강을 내 동네 우이천과 바꾸고 싶다.
그러면 뭐 하나. 금방 오염되고 말 텐데. <계속>
아래 그림1. 2: 오스테르리츠역
3: 바욘역
첫댓글 카페지기님. 70여일간 여정에 대한 내용을 기다렸는데, 이제 시작되나 봅니다. 새겨 읽어 보겠습니다.
저도요.
그리 봐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