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月, 음 6월 27일)
2005년 - 사우디아라비아 파드(Fahd, 1923~2005) 국왕 세상 떠남
사우디아라비아의 파드 빈 압델 아지즈 국왕이 1일 오전 수도 리야드의 파이살 왕립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에따라 파드 국왕의 이복 동생으로 지난 10년간 사우디아라비아의 실질적 통수권자였던 압둘라 이븐 압둘 아지즈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사우디 왕실 법정은 이날 성명을 통해 파드 국왕이 이날 오전 사망했으며 압둘라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했다고 밝혔다.
왕실 법정은 이날 이야드 빈 아민 마다니 사우디 공보장관이 국영 TV에서 낭독한 성명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왕실 법정은 압둘라 빈 압델 아지즈 왕세자와 모든 왕실의 이름으로 파드 국왕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바이다"라고 밝혔다.
왕실 법정이 성명을 발표하기 앞서 이날 사우디 국영TV는 정규 방송을 중단했으며 왕실 법정 성명이 발표된 뒤 이슬람 경전인 코란 암송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파드 국왕은 올해 84세로 1995년 뇌졸중으로 입원치료를 받았고 지난 5월27일 급성 폐렴으로 긴급히 입원, 치료를 받아왔으며 최근 사망설이 나돌기도 했다.
이번에 왕위를 계승한 압둘라 왕세자는 파드 국왕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사실상 사우디아라비아를 통치해 왔으며 그의 나이도 올해 82세로 고령이다.
또 압둘라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국방장관인 술탄 왕자가 왕세자가 됐다고 사우디 국영TV가 전했다. <한겨레>
2000년 - 의약분업 본격 시행 의사는 환자에게 처방전만을 교부하고, 약사는 처방전에 따라 약을 조제·투약하는 '의약분업' 제도! 우여곡절 끝에 2000년 오늘부터 본격 시행됐다. 예상대로 혼란과 파행이 빚어졌다. 동네의원들 가운데 정부의 의약분업 강행에 항의해 문을 닫은 곳이 많았고 대형 병원에서는 전공의들이 파업을 벌였다. 처방전을 들고 여러 곳의 약국을 전전한 환자들도 적지 않았다. 미리 한 달 동안 계도기간을 뒀어도 당국과 병원,약국의 사전준비 부족과 환자들의 부적응으로 새로운 제도 도입이 가져온 사회적 진통은 매우 컸다. <YTN>
1976년 - 양정모(梁正模), 올림픽 금메달 1976년 오늘은 올림픽에서 우리 나라 선수가 해방 후 처음으로 금메달을 딴 날이다.
그 주인공은 양정모!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린 제21회 올림픽 레슬링 자유형 62kg급에서 우승했다. 그는 결승전에서 몽고의 오이로프에게 판정패했지만 결승리그에 진출한 세 명 가운데 종합점수가 가장 높아 금메달을 차지했다. 전해섭 선수도 같은 종목에서 동메달을 땄다. 우리 나라는 몬트리올 올림픽에 겨우 5종목에 출전했지만 금메달 1, 은메달 1, 동메달 4개를 획득해 종합순위 19위의 좋은 성적을 올렸다. <YTN>
1973년 - 동독의 최고 실력자 울브리히트(Walter Ulbricht, 1893~1973) 세상 떠남
라이프치히 출생. 1910년 독일 목공(木工)노동조합에 가입, 이후 노동운동을 하였다. 1912년 독일사회민주당(SPD)에 입당, 1919년 독일공산당(KPD)을 조직하고, 중부독일지구 지도부의 요원이 되었다. 1928∼1933년 연방의회 하원의원으로 있었으나 나치스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소련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중 모스크바에서 독일인민전선 설립위원회의 발기인이 되고, 독일사회민주당과의 통일전선을 꾀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귀국, 1946년 O.그로테볼과 함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을 통합하여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결성하고, 그 부위원장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사회민주당 ·공산당의 합동공작, 대외적으로는 친소(親蘇)정책에 의하여 전후(戰後) 동독 부흥의 길을 열었다.
1949년 동독정권 수립과 함께 부수상이 되고, 1950년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1953년 제1서기가 되었다. 1960~1971년 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을 역임하고, 1971년 5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하였다. 울브리히트 체제는 국내의 정치통제와 친소정책을 바탕으로 기술관료들을 양성, 경제수준 향상에 기여하였다. 저서에 《독일노동운동사》(1953∼1958)가 있다.
1972년 - 윤이상(尹伊桑) 오페라 <심청>, 바이에른 음악제 첫날 첫 프로그램으로 공연
바이에른 음악제는 뮌헨 올림픽 문화행사로서 8월 1일부터 40일동안 열렸다.
1946년 - 제주도, 전라남도에서 분리 대한민국 최대의 섬인 제주도가 1946년 오늘 전라남도에서 분리돼 도로 승격됐다. 9년 뒤인 1955년 9월 1일에는 제주읍이 시로 승격하게 된다. 이 섬은 신라 때 '탐라'라는국호를 갖게 됐고 이후 명칭이 도이, 주호, 탐라 등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리다 고려 충렬왕 때부터 제주라 불렸다. 1981년 서귀읍이 중문면과 통합하면서 서귀포시로 승격돼 현재 2시 2군 7읍 5면으로 편성돼 있다. <YTN>
1944년 - 필리핀 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케손(Manuel Luis Quezon, 1878~1944) 세상 떠남
타야바스주(현재의 케손주) 발러 출생. 마닐라의 산토토마스대학교를 고학으로 다니던 중 필리핀혁명이 발발하자 혁명군에 참가하여 미국을 상대로 싸웠다. 필리핀이 미국의 점령하에 들어간 후, 1905년 타야바스 주지사로 선출되어 정계에 투신하였다. 1907년 제1차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후로 필리핀정치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09∼1916년 워싱턴 주재 판무관을 지내면서 필리핀의 자치권 획득에 성공하였다. 1935년 미국의 보호 아래 수립된 필리핀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1941년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하자 워싱턴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으로 있었다. 필리핀의 완전독립을 보지 못한 채 그곳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1944년 - 바르샤바 시민 무장 봉기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는 2차대전 중 잿더미로 변했다. 1939년 9월에는 독일군의 포위를 받아 시가지가 파괴되었다. 1943년 4∼5월의 게토우 봉기에 이어 1944년 8월 1일∼9월 2일에는 유명한 바르샤바 봉기로 해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히틀러 군대는 바르샤바가 자랑하던 500여 개의 귀중한 문화유적과 도시의 85%를 계획적으로 파괴했다. 귀족풍의 아름다운 도시 바르샤바는 하루아침에 인적이 드문 유령의 도시가 되었다. 1945년 1월 17일, 나치스 독일로부터 해방되자, 다음해부터 시가지의 재건이 시작되어, 도시의 근대화와 역사적인 건축물의 복원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오늘의 바르샤바를 이루고 있는 고색 창연하게 보이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2차대전 후 폴란드인들이 자력으로 원형대로 복원시켜 놓은 것이다.
1936년 - 프랑스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생 로랑(Yves Saint-Laurent, 1936 ) 태어남
알제리 태생이다. 순수 패션의 대부로 일컫는다. 17세 때, 재능을 인정받아 C.디오르 상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1957년 디오르가 급사하자, 22세로 디오르 상점의 후계자가 되었다. 1960년 군에 입대하면서 자리를 M.보앙에게 넘겨 주고, 1962년 제대하자 파리에 오트쿠튀르(고급 의상실)를 차리면서 독립하였다. 1966년 처음으로 여성 정장에 바지 정장을 도입하였으며, 사파리 재킷을 고안하였다. 작풍은 현대적이며 신선하고 단순하여 젊은이들에게 반응이 좋았고, 특히 미국에서 인기가 있다. 1999년 패션 기업 구치와의 갈등과 고전적 스타일의 그의 디자인과 세계 디자인과의 거리감 등의 이유로, 2002년 1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고별패션쇼를 마지막으로 은퇴하였다.
1936년 -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개막
1936년 오늘, 제11회 올림픽이 독일 베를린에서 개막됐다.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고대 올림픽의 발상지인 그리스의 올림피아에서 성화를 채화해 7개 나라 3,300명의 주자에 의해 베를린으로 봉송됐다. 올림픽이 텔레비전으로 중계되기도 처음이었다. 49개 나라 3천9백여 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농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됐다. 나치스의 인종차별적인 경기운영에도 불구하고 흑인 6명을 주축으로 한 미국 남자 육상팀은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일제치하에 있던 우리 나라는 7명이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다. 대회 마지막 날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쾌거는 우리의 민족혼을 일깨웠다. 이번 올림픽에서 우승은 금메달 37개의 독일이 차지하고 미국과 헝가리가 그 뒤를 이었다. <YTN>
- 저우언라이(周恩來)
1927년 - 중국 공산당 최초의 대규모 전투 '남창기의(南昌起義)' 발발
중국 공산당이 일으킨 남창기의(南昌起義)가 1927년 8월 1일 발발했다. 남창기의는 주은래를 중심으로 주덕, 엽정, 섭영진 등이 참여한 대규모 공농(工農) 홍군의 봉기였다.
당시 전투에 참가한 병력수는 약 2만에 달했다. 그때 남창을 지키고 있던 국민당 군 병력은 3000명에 불과했다. 초반의 승리는 기의(起義)군의 몫이었다. 병력도 우세했고, 사전계획과 작전도 치밀했고 지휘체계도 통일적이어서 남창시는 이내 기의군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러나 남창 인근 무한과 남경 방면의 지원세력의 사정이 여의치 못한데다, 남창시를 에워싼 적의 규모 역시 기의군의 몇배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이었다. 결국 남창에서 철수하여 남하할 수 밖에 없었고 봉기는 실패하고 말았다.
남창의기는 중국 공산당이 자체 병력으로 적과 대규모로 전투를 벌인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남창의기의 첫 총성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은 자체의 인민혁명군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자체 군대로 무장혁명투쟁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새로운 노선을 확고히 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은 이 날을 기념해 8월 1일을 건군 기념일로 삼고 있다. <조선>
1885년 - 헝가리의 화학자 헤베시(George de Hevesy, 1885~1966) 태어남
부다페스트 출생. 부다페스트대학 ·베를린대학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배우고, 취리히대학에서 H.로렌츠의 조수, 칼스루에공과대학에서 F.하버의 조수를 거친 후 1911∼1914년 맨체스터대학의 E.러더퍼드의 연구실에서 방사능을 연구하였다. 그 후 부다페스트대학 물리화학 교수, 코펜하겐의 N.보어 연구소의 객원교수를 거쳐, 1926년 프라이부르크대학 물리화학 교수가 되었다.
처음으로 라듐 D를 상당량 추출하는 데 성공, 그 방사능을 조사하고, 납[鉛]과의 관계를 밝혔다. 그리고 이들 방사성원소의 전기화학적 성질, 용해도, 동위원소, 원자가(原子價) 등을 연구하고, 악티늄계(系)원소의 분리를 행하던 중에, 하프늄은 지르코늄에 유사해야 한다는 N.보어의 원자구조론에 입각한 관점에서, 네덜란드의 D.코스터와 공동으로 X선에 의한 미량분석에 의해 1923년 지르콘광석 중에 있는 하프늄을 발견하고, 이것을 분리하는 데 성공하였다.
1819년 - 미국의 소설가 멜빌(Herman Melville, 1819~1891) 태어남
뉴욕 출생. 부유한 무역상 집안의 8형제 중의 셋째이며, 유년 시절에는 부족한 것 없이 보냈으나, 13세에 아버지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른 후 죽었기 때문에 학교도 중단하고, 은행·상점의 잔심부름, 농장일, 학교 교사 등을 하며 전전하였다. 20세에 상선의 선원이 되어 영국의 리버풀까지 항해했고, 다시 22세에 포경선의 선원이 되어 남태평양으로 나갔으며, 1844년 군함의 수병이 되어 귀국하였다. 이 동안의 경험이 주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1846년 포경선에서 탈주하여 남태평양의 마르키즈제도의 식인(食人)마을에 살았던 기구한 경험을 그린 《타이피족(族) Typee》(1846)의 발표로 작가활동을 시작하여 연달아 작품을 내놓았다.
남태평양의 평안한 방랑생활을 엮은 《오무 Omoo》(1847)에 이은 가공의 남해 모험담 《마디 Mardi》(1849)는 단순한 모험담에 만족하지 못한 그의 실험적 작품인데, 주인공의 환상의 미녀 탐구에 우화적 의미를 주어,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에 비유한 섬나라를 순회하는 동안에 문명비평·사회풍자·철학적 논의가 전개된다. 이것은 작가의 사상과 예술적 관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작품이지만, 호평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는 다시 체험에서 우러난 이야기로 돌아가, 리버풀을 왕복하는 상선생활을 그린 《레드번 Redburn》(1849), 군함생활을 그린 《하얀 재킷 White Jacket》(1850)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작품은 단순한 기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주인공이 이민선·리버풀의 뒷골목·군함생활 등의 참상과 악을 알게 되고, 나아가서 악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을 만나 심오한 인생개안(人生開眼)에 이르는 과정을 묘사하였다.
대표작 《백경 Moby Dick:or, the White Whale》은 에이햅 선장이라는 강렬한 성격의 인물이, 머리가 흰 거대한 고래에 도전하는 내용의 소설로, 모선인 범선이 아닌 노 젓는 작은 보트로 고래를 쫓는 용감한 포경선 선원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에이햅의 복수전이 이교적(異敎的) 분위기를 낳고, 악·숙명·자유의지 등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전개되는 작품이다. 다음 작품인 《피에르 Pierre》(1852)는 경험에 입각한 해양 이야기에서 탈피하여, 시골의 부유한 평민 집안의 외아들 피에르가 이복누이 이사벨을 구하려다가 빠져 들어간 비극적인 삶을 그린 것이다. 그는 캘비니즘적(的) 그리스도교 사상에 의지하면서도 때로는 그 범주를 넘은 견해를 제시하여 인간심리의 착잡함을 비유적·상징적으로 묘사하였기 때문에, 《백경》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독자에게는 충분히 이해되지 않았다.
근대적 합리성을 거부하는 철학적 사고, 풍부한 상징성이야말로 그의 본질이었으나, 금세기에 와서야 그가 단순한 해양모험담 작가가 아닌 친구 N.호손과 더불어 인간과 인생에 비극적 통찰을 한 상징주의 철학적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 밖에도 마지막 장편 《사기꾼 The Confidence Man》(1857), 단편 《서기(書記) 버틀비 The Clerk Bartleby》 《베니토 세레노 선장 Benito Cereno》(1856)과 유작(遺作)이 된 중편 《빌리 버드 Billy Budd》(1824)가 있으며, 시집 《Carel》(1891) 《Ticnolen》(1876) 등이 있다.
1779년 - 미국 국가를 작사한 변호사 키(Francis Scott Key, 1779~1843) 태어남
미국 국가 〈성조기여 영원하라〉의 작사자. 1812년 미·영전쟁 때 영국군이 워싱턴 D.C.를 불태운 뒤인 1814년 9월에 키는 친구인 윌리엄 빈스의 석방을 교섭하기 위해 체서피크 만에 정박해 있는 영국 함대로 파견되었다. 빈스는 미국군이 메릴랜드 주 블래던즈버그에서 패한 뒤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영국 함대가 볼티모어를 방어하고 있던 요새 가운데 하나인 맥헨리 요새를 포격하는 동안 키는 영국 군함에 억류되었다. 포격이 이루어진 9월 13~14일 밤 키의 불안은 고조되었다. 아침에 요새 위에 아직도 미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것을 보고 〈성조기여 영원하라〉라는 시를 썼다. 그날 석방된 키는 볼티모어 호텔에서 그 시를 개작해 익명으로 〈맥헨리 요새 방어 Defence of Fort M'henry〉라는 제목으로 인쇄되었고, 9월 20일 〈볼티모어 패트리어트 Baltimore Patriot〉에 의해 출판되었다. 술을 찬양하는 영국 노래 〈천상의 아나크레온에게 To Anacreon in Heaven〉의 가락에 붙인 이 시는 곧 미국 전역에 퍼졌다. 이것을 나중에 육군과 해군이 국가로 채택했고, 1931년에 의회가 공식국가로 채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