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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 烈 祠(충렬사)와 安樂書院(안락서원) 釜山東萊(부산동래)
(2010년 9월1일. 동래향교 유림신문 기고했던 原稿를 첨삭하며. 德宇 宋政永)
* 護國 先烈 英靈(호국선열영령)의 安息處(안식처) *
忠烈祠(충렬사) 本堂(본당)에는 ‘宋象賢(송상현) 동래부사’, ‘鄭撥(정발)부산진첨사’ ‘윤흥신 다대첨사’를 비롯하여 壬辰倭亂(임진왜란) 당시 부산지역에서 倭賊(왜적)을 맞아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맞은 수많은 護國英靈(호국영령)의 位牌(위패)가 奉安(봉안)되어 있다.
安樂洞(안락동)에 자리하고 있으며 望月山脈(망월산맥)을 主脈(주맥)으로 하고 東萊邑城(동래읍성) 뒷산의 줄기와 연결되는 萊山(래산)을 背景(배경)으로 盃山(배산)을 案山(안산)으로한 壬坐丙向(임좌병향)의 軸線(축선)에 本殿(본전)이 배치되어 東萊(동래)의 앞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殉國先烈(순국선열)의 英靈(영령)을 모신 釜山 東萊(부산동래) 忠烈祠(충렬사)의 모습은 유일하게 全國(전국)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都心(도심) 한가운데의 생생한 歷史(역사)속 國亂克復(국란극복)의 敎育場(교육장)이며, 護國忠節(호국충절)의 搖籃地(요람지)라고 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歷史(역사)의 浮沈(부침)속에서 그리고 특히 日帝下(일제하)에 대부분의 국가재산이 언제? 왜? 어떻게? 누구에 의해서? 인지 消失(소실)되어 空中分解(공중분해)된 듯한 상태로 되기도 했으나 ‘東萊(동래) 忠烈祠(충렬사) 安樂書院(안락서원)’에서는 迂餘曲折(우여곡절) 속에서도 保有(보유)하고 있던, 不動産(부동산)과 ‘壬亂殉節圖(임란순절도)’ ‘祭享儀式(제향의식)’等(등) 有無形(유무형)의 財産(재산)들은 그 後孫(후손)들에 의해 대대로 지켜왔으며, 國家(국가)에서 必要(필요)로 하니 한 점 私心(사심)없이 국가에 獻納(헌납)하여 오늘날의 忠烈祠(충렬사)의 모습이 되었다.
오늘날 先賢(선현)들이 보여주는 東萊情神(동래정신)의 氣槪(기개)와 氣質(기질) 그리고 면면히 이어온 傳統(전통)과 思想(사상)을 보여주는 곳이다.
* 忠節(충절)의 本鄕(본향) *
안락서원의 가장 독특한 특징은 全國(전국)의 書院(서원) 대부분이 시간이 지나면서 朋黨(붕당)을 조성하고 祭享(제향)을 핑계로 地方民(지방민)을 收奪(수탈)하던 부정적인 면들을 가지고 있지만, 유일하게 오로지 忠孝(충효)에만 중점을 두고 지탱해온 점이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국란극복의 敎育場(교육장)이며 護國忠節(호국충절)의 정신을 면면이 이어오고 있는 곳이다, 돌이켜보면 歷史(역사)의 浮沈(부침)속에서도 안락서원은 有無形(유무형)의 財産(재산)과 傳統(전통)을 목숨을 걸고 지켜왔다. 오늘날 우리는 이곳을 출입하면서 돌아가신 어른들의 말씀을 항상 떠올리게 되는데, 祭享(제향)을 禁止(금지)한 日帝(일제)下(하) 당시에는 서슬 퍼른 헌병들의 監視(감시)속에서 만약의 경우에 고초를 感受(감수)하고 한 발자욱이라도 祠堂(사당)가까이에서 祭祀(제사)를 올리기 위해 쉽게 눈에 띄지 않게 야밤까지도 기다리며, 聲東擊西(성동격서)의 전술을 펴기도 하면서, 뒷산 숲에서 香(향) 촛불의 빛을 막기 위해 검정 ‘치마단’으로 四方(사방)을 가리고 準備(준비)를 하다가 낌새를 느낀 巡察(순찰)을 피해, 숲속의 나뭇가지 부딪치는 소리로, 또 가까이 接近(접근)할 때는 지게막대기 소리, 危險(위험)할 때는 북이나 꽹가리로 사람들의 信號(신호)에 따라 祭祀床(제사상)을 들고 鄕校(향교)뒷산과 邑城北門(읍성북문) 뒤로 새벽녘까지 피해 왔다 갔다 하시면서 祭享(제향)을 계속하셨던 先祖(선조)들을 생각하니 어느 누가 東萊(동래)를 忠節(충절)의 故鄕(고향)이라 하지 않겠는가?
‘이제 聖域化(성역화)되어 요즘은 누구나 자유롭게 언제던지 출입할 수 있는 훌륭한 施設(시설)에서 대낮에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祭享(제향)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근세에 와서 內外的(내외적)으로 關心事(관심사)에서 멀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念慮(염려)하는 마음들이 모여지며 儒林(유림)들과 功臣後孫(공신후손)들의 바람직한 모습의 노력으로 차츰 制度的(제도적)으로나 內容的(내용적)으로 자랑스럽고 참신한 분위기로 되어가니 忠烈祠(충렬사)를 出入(출입)하는 발길을 뜻 있고 自負心(자부심)을 가지게 한다.
*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 *
忠烈公(충렬공) 宋象賢(송상현;1551~1592)께서는 礪山(여산) 宋氏 始祖(송씨시조)의 16世孫(세손)으로 선조 24(1591)년 당시, 이미 10餘年(여년)前(전) 倭賊(왜적)의 侵入(침입)을 豫見(예견)하고 栗谷(율곡);李珥(이이)는 時務六條(시무육조=朝廷;조정에 어질고 能力;능력있는 선비를 등용시키고 변방에 兵力;병력을 배치하여 나라의 警戒;경계를 더욱 철저히 하고 戰爭;전쟁에 必要;필요한 軍隊;군대를 養成;양성할 것을 주장)를 繼進(계진)하고 十萬養兵設(십만양병설)을 建議(건의)하며 國論統一(국론통일)을 위한 朋黨政治(붕당정치)를 없애려는 上訴(상소)가 있었으나 宣祖(선조)가 黙殺(묵살)했었고, 사실 1586년경부터 倭國(왜국)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았으며 戰運(전운)이 감돌고 있었으나 朝廷(조정)에서는 미리 준비를 하지도 않다가 戰爭臨迫(전쟁임박)할시 文武才略(문무재략)을 兼備(겸비)하고 뛰어났다고 하여 最前方(최전방)이었던 東萊府使(동래부사)로 아무 대책마련도 없이 보내어졌었다.
* 이러한 사실을 훗날 우암 宋時烈(송시열;1607~1689)이 쓴 神道碑文(신도비문)에서 “公(공)은 평소 벼슬길에 올라서 바르고 곧았으므로(小人輩;소인배들이 일삼는 黨爭;당쟁같은 것에 휘둘리지 않았으니) 늘 어떠한 미움을 사게 되었는데.....,”라고 안타까운 듯이 표현한 것을 보아 짐작이 된다. * 사실 그의 學德(학덕)과 人品(인품)이 높아 正三品(정삼품)의 벼슬다운 좀더 要職(요직)을 맡았어야 했으나, 그러나 公(공)은 任地(임지)에 이르러서는 백성을 다스리고 職務(직무)를 수행함에 오로지 誠意(성의)와 信義(신의)로 하였으며 郡民(군민)들은 公(공)을 사랑하고 모시는 것을 父母(부모)와 같이하였다고 한다.
* 公(공)께서는 당시 동래로 赴任(부임)해 올 때부터 이미 마음속에 굳게 다짐한 바가 있었으니, “오늘날같이 國論(국론)이 分裂(분열)되어있으며 政勢(정세)가 어수선하니 이웃의 倭賊(왜적)이 반듯이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이다. 만일 그들이 來侵(내침)할 경우 죽음으로써라도 이를 반듯이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豫見(예견)과 그 뜻을 수차례에 걸쳐 朝廷(조정)에 올리고 당시 동문수학하며 허물없이 친한 친구사이로 定山守令(정산수령)으로 있던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아들 金集;김집을 宋公이 가르쳤음)에게 戰雲(전운)을 詩(시)로 부쳐서 그 뜻을 전하니 宋公(송공)의 忠誠(충성)스러운 氣槪(기개)를 欽慕(흠모)하여 官廳(관창)의 壁(벽)에 새겨두고는 恒常(항상) 보며 마음을 다졌었다고 하니 당시 公(공)의 決意(결의)를 짐작할 수 있다. 결국 公(공)의 豫想(예상)대로 선조 25(1592임진)년 4월13일 바다를 건너와 4월14일 侵入(침입)해 釜山鎭城(부산진성)을 함락하고 엄청난 火力(화력)과 大軍(대군)의 威力(위력)으로 東萊邑城(동래읍성)으로 進軍(진군)하여 城(성)을 에워싸게 되는데, 경상좌병사 李珏(이각)은 당시 宋公(송공)과 함께 城(성)을 지킬 計策(계책)을 세우다가 戰勢(전세)가 불리하자 宋府使(송부사)에게 맡기고 자신의 管轄區域(관할구역)인 이곳을 벗어나 逃亡(도망)을 하려하자 宋公(송공)은 크게 歎息(탄식)하고는 ‘나라에서 나에게 이 城(성)을 맡겼으니 내가 살아남고 城(성)을 陷落(함락)시킬 수는 없다. 나는 城(성)과 運命(운명)을 같이할 것이다’라는 決意(결의)를 다지고 群衆(군중)들의 앞에서 함께 죽음으로서 城(성)을 지킬 것을 다짐하며 督勵(독려)하고 모든 사람들을 城(성)안으로 불러들이는 등, 준비를 마치고 직접 南門樓(남문루)에 올라서서 賊(적)과 대치하는데, 이렇게 泰平時(태평시)에는 國祿(국록)으로 높은 待遇(대우)를 받던 守令方伯(수령방백)들이 國難(국난)을 당해서는 제각기 一身(일신)의 安全(안전)만을 생각하고 逃亡(도망)하여 살기를 圖謀(도모)했지만, 宋公(송공)은 將帥(장수)와 兵士(병사)들 郡民(군민)들을 이끌고 東萊城(동래성)을 死守(사수)하며 모두 함께 끝까지 싸웠으나, 세겹으로 둘러싼 수많은 賊(적)의 精銳大軍(정예대군)과 相對的(상대적)으로 優秀(우수)한 武器(무기)를 앞세워 破竹之勢(파죽지세)로 攻擊(공격)하니 衆寡不足(중과부족)으로 4월 15일 戰鬪(전투)에서 城(성)은 陷落(함락)되고 수많은 軍官民(군관민)과 함께 殉節(순절)하셨다. 훗날 부임했던 동래부사 李安訥(이안눌)의 ‘4월 15일’이라는 詩(시)를 읽어보면 그 내용처럼 痛哭(통곡)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 忠烈祠(충렬사) 境內(경내)의 연못인 義重池(의중지) 좌측 언덕에는 春秋大祭(춘추대제) 享祀(향사)때 祭享準備(제향준비)場所(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昭義堂(소의당)이 있는데 이곳 壁(벽)에는 “孤城月暈列陳高枕(고성월운열진고침;=외로운 성은 달무리처럼(에워싸고) 포위되었는데 이웃한 여러 진에는(잠들어 있네) 도와줄 기척도 없구나), 君臣重義 父子恩輕(군신중의 부자은경;=임금과 신하의 의리가(무겁고) 무거운 것이 오매 아비와 자식의 은정을 가벼이 하오리다(부모의 은혜는 가볍다)).” 이러한 글귀(句節;구절)의 액자가 걸려있는데, 당시 城(성)은 함락되고 賊(적)들이 들이닥쳐 가까이와도, 주변에서 避(피)하라고 勸誘(권유)해도 꼼짝 않고 朝服(조복)을 갑옷위에 입고 오히려 賊(적)들을 꾸짖으며 殿牌(전패)를 모신 객사와 北向遙拜(북향요배)를 마치고는 父親(부친)에게 하직의 글을 부채에(絶命詩;절명시를 남기고 죽음을 맞으며) 쓴 글귀(句節;구절)이다.
忠烈祠(충렬사)廣場(광장)마당 우측에는 ‘戰死易 假道難(전사이 가도난=싸워서 죽는 것은 쉬워도 길을 열어 줄 수는 없다)’의 名言碑(명언비)가 있는데, 이것은 당시 지금의 동래경찰서자리인 弄珠山聚兵場(농주산취병장)에 陣(진)을 치고 있던 賊(적)의 主力部隊(주력부대)와 대치할 때, 賊(적)은 우리 측이 對備(대비)하고 있음을 보고 木板(목판)에 글을 쓰서 南門(남문)앞에 세우고 가는데, 守門將(수문장) 軍官(군관) 宋鳳壽(송봉수)를 시켜 가서보게 하니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전칙전의 불전칙가아도=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우리에게 길을 비켜;빌려 달라)’라고 쓰여 있었다, 이러한 賊(적)의 요구에 宋府使(송부사)께서도 이에 對應(대응)하여 역시 목판에 이렇게 일축하여 쓰서 賊中(적중)에 던지고 城(성)을 지킬 意志(의지)와 決心(결심)을 굳게 다짐하였으니 賊(적)들은 결코 降伏(항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조총과 화살을 亂射(난사)하니 東來城戰鬪(동래성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 廣場(광장)의 좌측 記念館(기념관)에는 당시의 처절했던 戰況(전황)을 보고 느낄 수 있는 記錄畵(기록화)와 遺品(유품)들이 所藏 展示(소장전시)되어 있다.
* 계단을 올라가면 우측에는 壬亂先烈(임란선열)의 護國忠節(호국충절)을 후세에 본보기로 삼기위해 1652(효종 3)년에 세운 安樂書院(안락서원)의 講堂(강당)이었던 현재는 春秋大祭(춘추대제) 享祀(향사)때 祭官選定(제관선정)場所(장소)로 사용하고 있는 昭崒堂(소줄당=堂號;당호는 韓愈;한유의 夷齊頌;이제송에서 따왔는데 ‘壬辰亂先烈;임진란선열들의 忠節;충절은 日月;일월보다 밝고 泰山;태산보다도 높다’는 것을 나타낸 것임)이 있으며, 좌측의(본당을 내려오면서 보면 서쪽) 義烈閣(의열각=行義能終;행의능종을 義;의라하고 剛克爲伐;강극위벌을 烈;열이라고 하는 것임)은 祠堂(사당)인데 동래성전투당시 한놈의 왜적도 용납할 수 없다며 지붕에 올라가 倭賊(왜적)과 기와장을 부수어 이를 던지며 최후를 맞을 때 까지 싸웠던 無名(무명)의(撤瓦殺賊義女;철와살적의녀) 두 義女(의녀)와 宋府使(송부사)와 僉使(첨사) 鄭撥(정발)를 따라 순절한 愛妾(애첩) 金蟾(금섬), 愛香(애향) 두 烈女(열녀)의 位牌(위패) 4位(위)를 모시고 있으며,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면 壬辰倭亂(임진왜란) 당시 釜山地方(부산지방)에서 국가와 이 地域(지역)을 지키기 위하여 싸우셨고 殉國(순국)하신 89位(위) 先烈(선열)의 位牌(위패)를 모신 祠堂(사당)인 忠烈祠(충렬사)本殿(본전)이 있다.
의열각 4位(위)와 함께 총 93位(위)가 모셔진 이곳 충렬사 境內(경내)에서는 風前燈火(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와 이 地域(지역)의 危機(위기)를 守護(수호)위해 救國(구국)의 一念(일념)과 殺身成仁(살신성인)의 情神(정신)으로 싸우고 돌아가신 殉國先烈(순국선열)들의 영령을 모시는 祭享(제향)이 418주(2010)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다.
충렬사의 祭享(제향)은 儒敎的 理念(유교적이념)에 의한 생활철학이 구체화된 의식으로서 우리 고장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친 동래부사 송상현공과 백성들의 英靈(영령). 儀魄(의백)을 宋公祠(송공사)에 봉안하고서 祭享(제향)을 모신 데서 비롯된 것이다. 祭享(제향)을 10여일 앞두고 부산 동래유림 대표들과 歷代(역대) 安樂書院長(안락서원장)으로 구성된 院會(원회)를 개최하여 제관을 선출한다. 제향 당시 안락서원장이 初獻官(초헌관)이 되며, 제향의 절차는 周禮(주례)와 禮記(예기)등에서 교시하는 禮法(예법)에 따라 笏記(홀기:의식의 순서 등을 기록한 것)에 의해 진행된다.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英靈(영령).儀魄(의백)을 봉안함에 있어서 위로는 부사.군수.첨사를 비롯하여 백성들까지 아래로는 忠僕(충복)·愛妾(애첩)까지도 그 功(공)을 기리어 모신 것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며 제향 때 女性祭官(여성제관)이 참여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오랫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된 儀式(의식)으로서, 변함없이 옛 법식대로 모셔지고 있는 것도 이 祭享(제향)의 특징이라 하겠다.
현재 忠烈祠(충렬사)安樂書院(안락서원)에서는 傳承(전승).保存(보존)에 힘쓰고 있다.
釜山儒林(부산유림)들과 함께 安樂書院(안락서원)院長(원장)을 初獻官(초헌관)으로 하여 매년 음력 2월과 8월 中丁日(중정일)에 올리는 春秋大祭(춘추대제), 釜山市長主管(부산시장주관)으로 5월 25일의 忠烈祠祭享(충렬사제향)은 부산시민의 精誠(정성)을 모아 奉行(봉행)하고 있으니 全國的(전국적)으로 많은 追慕參拜客(추모참배객)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이곳 忠烈祠(충렬사)가 아니면 보기 힘든 祭享(제향)의 謹嚴(근엄)함과 形式美(형식미)는 극치를 이룬다. * 忠烈祠入口(충렬사입구)의 案內標識版(안내표지판)과 管理室(관리실)에 準備(준비)되어있는 詳細(상세)한 팜플랫은 좋은 資料(자료)가 될 것이다.
[ 忠烈祠(충렬사)와 인락서원의 由來(유래) ]
壬亂(임란)以後(이후) 선조 38(1605)년 당시 廢墟(폐허)가 되어있던 이곳 東萊府使(동래부사)로 부임한 尹暄(윤훤)이 官(관)에서 직접 郡民(군민)들과 宋象賢公(송상현공)의 忠節(충절)을 기리기 위해 祭祀(제사)를 모시기로하고 東萊邑城 南門(동래읍성남문) 밖 농주산에 송상현의 位牌(위패)를 모신 宋公祠壇(송공사단)을 세웠고 이듬해 1606년에는 東萊邑城南門(동래읍성남문)안에 祠堂(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고 祭祀(제사)를 올린 것이 시초가 된다. 1624(인조 2)년에 宣慰使(선위사) 李敏求(이민구)의 建議(건의;요청)로 忠烈(충렬)이라는 賜額(사액)이 下賜(하사)되어 宋公祠(송공사)는 忠烈祠(충렬사)로 改稱(개칭)되고(=危身奉上;위신봉상을 忠;충이라하고 剛克爲伐;강극위벌을 烈;렬이라 함), 釜山鎭城(부산진성)에서 殉節(순절)한 충장공 鄭撥(정발)을 함께 配享(배향)하였으며, 1652(효종 3)년 동래부사 尹文擧(윤문거)가 祠堂(사당)을 參拜(참배)하고는 地方(지방)의 선비들과 議論(논의), 祠堂(사당)이 좁고 祠宇(사우)가 낮으며 濕氣(습기)가 많고 城門(성문)가까이 있어 시끄러우므로 祠堂(사당)의 位置(위치)에 適合(적합)하지 않고 宋公(송공)은 선비로서 學行(학행)과 忠節(충절)이 後學(후학)에게 師表(사표)가 되므로 그러한 것을 높이 받들며 後世(후세)에 전하고 先烈(선열)들의 忠節(충절)과 德行(덕행)을 선비들에게 가르칠 必要(필요)가 있다하여 書院(서원)으로 擴張(확장)하기로 하고 지금의 장소부근을 定(정)하고 그해 9월 位牌(위패)를 옮겨 모시고 講堂(강당)과 東西齋(동서재)를 갖추어지어 洞里(동리)의 이름을 따서 安樂書院(안락서원)이라 稱(칭)하게 되었는데(=別稱;별칭으로 萊山書院;래산서원이라고도 했음), 本堂(본당)인 忠烈祠(충렬사)가 宣祖(선조)때 이미 賜額(사액)을 받았었기 때문에 ‘충렬사 안락서원’으로 불렸다. 이렇게 되어서 祠宇(사우)와 敎育施設(교육시설)을 갖춘 書院(서원)으로 重建(중건)되며 그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1653) 忠烈(충렬)이라는 諡號(시호)가 추증된다.
1709(숙종 35)년에 府使(부사) 權以鎭(권이진)과 府民(부민)에 의해 位牌奉安問題論議後(위패봉안문제논의후) 忠烈公(충렬공)이 殉節(순절)할 때 함께 戰死(전사)한 양산군수 趙英圭(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 유생 문덕겸, 梁潮漢(양조한), 비장 송봉수, 군관 김희수,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부민 김상등 9義士(의사)를 추향위해 사액탄원을 하며 충렬사옛터에 별사를 지어 位牌(위패)를 모시고 祭祀(제사)를 지냈다. 1714년 충렬사에 合享(합향)되었던 정발장군과 趙英圭(조영규)를 忠烈別祠(충렬별사)로 모시고 祭祀(제사)를 지내다가 그 후에 동래성이 함락된 후에도 投降(투항)하지 않고 義兵(의병;倡義募兵;창의모병)을 일으켜 倭賊(왜적)과 싸운 宣武原從功臣錄券(선무원종공신녹권)에 登載(등재)된 功臣(공신)가운데 力戰討賊(역전토적)에 戰功(전공)이 赫赫(혁혁)한 동래출신 ‘24位(위) 壬辰倭亂別典功臣(임진왜란별전공신)’의 名單(명단)이 이곳의 壁(벽)에 그려 새겨졌다.
* 영조 12년(1736) ‘節義(절의)를 表彰(표창)함에 文武(문무)가 따로 있을 수 없고, 尊卑(존비)의 等級(등급)을 매기는 것은 옳지 않다’하여 충렬별사를 撤廢後(철폐후) 별사에 모셨던 모든 位牌(위패)가 忠烈祠安樂書院(충렬사안락서원)의 別祠(별사)와 本祠(본사)로 옮겨져 合享(합향)하여 擴大(확대)되면서 以後(이후)부터는 東萊城(동래성)에서 같이 殉國(순국)한 良人(양인)들도 모셔지는 계기가 된다. 영조48년(1772) 多大僉使(다대첨사) 尹興信公(윤흥신공)을 추배하고 宋象賢公(송상현공)과 鄭撥公(정발공)을 따라 殉節(순절)한 金蟾(금섬)과 愛香(애향)도 忠烈祠(충렬사)東門(동문)밖에 별도로 祠堂(사당)을 지어 모셨다.
忠烈祠(충렬사) 安樂書院(안락서원)은 처음에는 壬辰倭亂(임진왜란)때의 忠節(충절) 송상현공을 奉祀(봉사)하기 위해 세운 宋公祠(송공사)가 賜額(사액)을 받으면서 忠烈祠(충렬사)로 改稱(개칭)되고 교육기능을 갖춘 書院(서원)으로 重建(중건)되면서 붙여진 名稱(명칭)이며, 고종 2년(1864)에 흥선대원군이 當時(당시) 만연했던 서원의 폐단을 통감하여 亂立(난립)되어 있던 全國(전국)의 書院撤廢(서원철폐)때에도 毁撤(훼철)되지 않은 47개 書院(서원)중의 하나였다. 壬亂(임란)때 殺身成仁(살신성인)의 情神(정신)으로 국가를 위해 殉節(순절)한 先烈(선열)분들을 奉安(봉안)한 賜額祠堂書院(사액사당서원)의 偉業(위업)을 重(중)히 여겨 헐리지 않고 그 命脈(명맥)을 이어왔던 것이다. 日帝(일제)때는 보수는 생각지도 못하였고 * 그 후에도 충렬사는 몇 차례의 補修(보수)와 整備(정비), 重修(중수)를 거쳐 오면서 1956년 별전공신 24위와 2義女(의녀)까지 모셔지고, 1976년의 75위에는 녹도만호 정훈장군, 수영의 25人(인) 義兵(의병)등 35위가 추가됐고, 無名氏(무명씨)들과 奴婢(노비) 3명도 처음으로 모셔졌다. 1991년 새로 밝혀진 13위의 공신들, 1996년 추가로 밝혀졌다는 3위, 2007년 1위의 推奉(추봉)으로 현재는 93위의 護國英靈(호국영령)의 神位(신위)들이 모셔져 있습니다. 日帝(일제)때부터 祠宇(사우)의 補修(보수)와 祭享行事(제향행사)를 妨害(방해)받아서 頹落(퇴락)되었고 光復後(광복후)에도 미처 보수하지 못했던 것을 1976년 정부의 방침에 따라 1977년부터 1978년까지의 여러 곳에 散在(산재)되어 모셔지고 있던 祠堂(사당)과 여러 곳의 祭享(제향)들을 한곳으로 모으면서 擴張淨化作業(확장정화작업)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단지 안락서원의 전통적인 건물들이 당시 없어지고 그 후 儒林(유림)들과 院長(원장)님들의 노력 속에서도 아직까지 복원되지 못함이 안타깝다. 그리고 入口(입구)에는 그동안 念願(염원)이었던 강학공간으로 곧 새로이 建築(건축)되어 開院(개원)될 ‘충렬사 안락서원 교육회관’의 마무리작업이 한창인데 앞으로의 役割(역할)이 큰 企待(기대)가 된다.
2010년 10월 “충렬관”의 현판을 걸고 개원 현재 다양한 전통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연중 개설하고 수강생을 맞이하고 있다. 주요 프로그램은 △ 전통문화체험교실
△ 전통생활 예절교육 △ 한국문화체험교실 △ 사회 인성함양교육 △ 다문화학생 전통예절교육 △부모와 함께 하는 전통예절교실 △ 어린이 예절교육 △ 선현의 가르침교실 △기초한자교육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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