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 월면(滿空 月面)스님은 경허의 혜명(慧命)을 이어 근.현대 한국 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하나의 큰 법맥을 형성했다.청허와사명이 조선중기 선의 중흥조이라면 경허.만공스님은 한국불교 근대선의 중흥조라 불린다.스님은 우주와 만물의 본체로서,마음을 가장 중요시 했다. 불교의 진수는 이 마음을 깨닫는데 있고 인간의 가치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3년간 금강산 마하연에서의 선지도와 1937년을 전후한 마곡사 주지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물면서 선불교를 크게 중흥 시켰다. 스님은 또한 1920년대 초 선학원 설립운동을 했으며,선승들의 결사인 동시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모임 성격의 선우 공제회운동에 참여 했다. |
용성 진종(龍城 震鐘)스님(1864~1940) |
용성 진종(龍城 震鐘)스님은 선수행에 진력한 선사이자 계행에 철저한 율사,3.1운동에 앞장선 독립 운동가,불교 경전의 한글 번역에 주력한 역경가로서 한국 근세 불교사의 거목으로 추앙 받는다. 무엇보다 일제 암흑기에 대각교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불교 현대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스님은 선종교당(禪宗敎堂),대각사란 도심 포교당을 세워 현대식 포교 방법을 최초로 도입 하는가 하면,불교의식 간소화 및 찬불가 제정,경전 한글화를 통한 불교 현대화, 사회화,대중화를 선도했다. 또한 북청탄광 경영,화과원(華果院)운영등 승단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선농일치를 주창한 것은 근대 한국 불교사의 가히 혁명적인 실천이념으로 한국 승단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된다. | |
석전 정호(石顚 鼎鎬)스님(1870~1948) |
근대 불교교육의 선구자로 교학발전에 공헌한 석전 정호스님(石顚 鼎鎬)은 금봉 진응스님과 함께 근대 불교3대 강백으로 알려져 있다. 민족 불교를 살리는 길은 곧 불교인에 대한 계몽과 교육으로만 가능하다는 소신아래 조선 불교 교정,현 동국대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 교장직을 맡으며 교육 일선에 투신했다. 삼장강설(三藏講說)은 물론 시문(時文)과 경사자집(經史子集), 노장학(老莊學),심지어 서법(書法)까지 겸통해 당대 석학과의 교유가 많았다. 최남선은 "스님의 해박하심은 내외전(內外典)을 꿰뚫어 감히 내가 미칠바가 못된다"며 흠모했다. 아호인 석전도 추사 김정희가 크게될 후손에게남기라 전한 것을 받아 생긴것. 오세창 김돈희 이도영 정인보등 당대 석학과 교유속에 속명인 박한영으로 더 알려져 있기도 하다.청담 운허 미당등 제자를 배출했다. 불교인의 시대적 자각을 교육을 통해 독려했던 스님은 불교 유신의 방법으로 참다운 계.정.혜,이타행,학교 설립과 인재양성,포교의 현대화,생산 불교로의 전환,인민에 대한 자선사업 6가지를 주창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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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던 만암 종헌(曼庵 宗憲)스님.교육과 수행,전법등 수행자의 본분사를 지키는데 평생 한치의 흐트러짐 없었던 근대 한국 불교의 큰 봉우리다. 스님을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에 대한 열정.1917년 백양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전통 현대를 겸비한 승려교육을 위해 광성의숙을 설립했고, 일반인을 위한 심상 학교를 세웠다. 그뒤 1928년 박한영 스님과 함께 주도한 불교 전수학교(동국대 전신)설립, 1947년 전남 광산군의 정광 중학교 설립등이 이어졌다. 1925년 임제정 설립을 주도했던 스님은 50년엔 한암스님에 이어 제 2대 교정에 추대 되면서 종단 명칭을 조계종으로,교정을 종정으로 바꿔 한국 | |
한암 중원(漢岩 重遠)스님(1876~1951) |
경봉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 수행을 "소치는 구도행"에 비유하며,"돈오점수"를 설파했던, 선교를 아우른 근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다. 1899년 스님은 청암사 수도암에서 경허 성사를 만나 설법을 듣는 인연을 맺고 전법제자가 되어 수년간 문하에서 참선 공부를 한다. 그 명성이 자자해 스님미 30세 되던 1905년에는 통도사의 조실로 추대됐고,5년후엔 홀연 평안도 맹산 우두암으로 은거 했다가 50세 되던해(1925년)봉은사의 조실로 추대 되기도 한다. 많은 이들은 지금도 한암 스님 하면 오대산 상원사를 떠올린다.1925년 봉은사 조실 자리를 내놓고 상원사로 들어간 스님이 입적할 때인 1951년까지 산문 밖을 한번도 나오지 않았던 데다 ,공비토벌을 이유로 국군이 상원사를 소각하려는 것을 몸울 던져 막았던 일화 때문이다. 스님은 1941년부터 45년까지 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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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운 봉완(龍雲 奉玩)스님(1879~1944)
일제암흑기에 민족 독립을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선 독립 운동가 이자 근대 최고의 시인. 법호 만해로 아려진 용운 봉완(龍雲 奉玩)스님은 이렇듯 한국 현대 불교사 뿐 아니라 현대 한국사와 문단사에도 기리 남을 기라성 같은 분이다. 스님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하는등 민족 독립이라는 당대 현실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또한 불교 혁신운동을 일으켜 한국 불교의 이정표를 세운 일도 큰 공적이다. 불교 중흥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망라한 최대의 불교 시론인 <조선 불교 유신론> 저술,불법홍포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월간 "유심"과 "불교"운영,한국 불교를 일본 불교에 예속하려 했던 이회광 일파의 원종에 맞서 임제종 운동을 펼친일,비밀결사 만당을 결성했던 일등이 바로 그것이다. | |
효봉 원명(曉峰 元明)스님(1888~1966) |
버림과 하심,그리고 끝없는 자기부정을 통해 궁극의 깨달음을 구가하는 불가(佛家)의 르침을 실천한 상징적 인물로 효봉 원명(曉峰 元明)스님을 꼽는다. 한국인 최초의 법관"이라는 사회적 명망과 권위를 하루 아침에 송두리채 벗어던지고 중생제도와 불교 정화에 투신한 대표적인 스님 가운데 한분이기 때문이다. 석두 화상을 은사로 37세란 늦깍이에 출가한 스님은 1년6개월간의 토굴 고행등 철저한 수행과 계행으로 한국불교의 손꼽히는 선지식으로 남아있다. 이같은 철저한 계행과 수행력은 곧 한국불교의 숙원이었던 정화 운동에도 참여케 했다. 1954년 동산 금오 금봉 청담스님과 함께 정화운동의 기치를 내걸며 이에 앞장선 것이다. 조계종 총무원장(1957년),초대 종정(1962년)등을 역임했다. | |
경봉 정석(鏡峰 靖錫)스님(1892~1982 |
1907년 6월 성해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경봉 정석(鏡峰 靖錫)스님은 통도사 불교 전문 강원에 입학해,경전연구에 몰두했다. 어느날 스님은 "종일토록 남의 보배를 세어도 반푼 어치의 이익이 없다"는 구절에 충격 받고,마음속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참선에 몰두 하게 된다. 해인사 퇴설당 안거를 시작으로 금강산 마하연.석왕사등 이름난 선방을 찾아 다니던 스님은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장좌불와등 정진을 계속 했다. 마침내 1927년11월 20일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1930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 원장으로 취임한 이후50년을 한결같이 중생교화의 선구적 소임을 다하였다.1941년에는 조선불교선리참구원 이사장,1949년 통도사 주지 등을 역임한뒤,1953년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조실로 추대 입적하던 날까지 이곳에서 설법과 선문답으로 납자.불자들을 지도 했다. | |
운허 용하(耘墟 龍夏)스님(1892~1980) |
근대 역경사에서 큰 획을 그은 운허 용하(耘墟 龍夏)스님.대장경 한글화의 선구자인 스님은 1892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나 민족 독립을 위한 활동을 맹렬히 전개하다 출가 인연을 매었다. 스님은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가 봉천성 동창학교에서 교사로 지낸다. 이해 항일 단체인 대동 청년단에 가입한 스님은 그 뒤 흥동학교,배달학교 등을설립하며 아동들을 중심으로 한 교포교육에 전념 했다. 1919년 '서로군정서'기관지<한족신보>의 사장을 맡기도 했던 스님은 21년 강원도 유점사에 들어가 경송 스님을 은사로 출가 한다. 그 뒤 스님은 학인 동맹을 조직하는등 독립운동을 지속하는 한편 교육과 역경사업에 심혈을 쏟는다. 불교 대중화를 위한 스님의 원력은61년 국내최초<불교사전>발간으로 나타났고,64년 동국 역경원을 설립 원장에 취임 하면서<한글대장경>간행에 전념하며 근대 역경 사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다. <수능엄경><사분비계니계본><범망경><묘법연화경>등 스님이 역술한 주옥같은 경전들은 지금고 애송되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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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 태전(金烏 太田)스님(1896~1968) |
"선리(禪理)가 없다면 불법의 명맥이 끊기는 것" 덕숭문중의 큰 산맥 금오스님은참선의 중요성을 제방납자들에게 가르치며 일평생 수행으로 매진한 이시대 선객이다. 1935년 직지사에 이어 안변 석왕사,도봉산 망월사,쌍계사 칠불선원,동화사,1953년 선학원등 전국 유수 선원에서 조실로 있으면서 상당법문과 격어법어로 후학을 제접했다. 수행을 위해선 한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을 만큼 칼날같은 수행력으로 불조의 심인을 전했다. 스님 자신도 깨달음을 위해서라면 수월선사등 선지식을 칙견하기 위해 전국 제방선원을 찾아다닐만큼 참선정진과 선풍진작을 몸소 실천 했다. 1954년 정화불사때 전국 비구승대회 준비 위원회 추진 위원장으로 승단 재건에 참여한 것도 철저한 계행에서 비롯된 수행자다운 면모다. 1955년 조계종 부종정과 1958년 총무원장을 역임했다. | |
전강 영신(田岡 永信)스님(1898~1975) |
경허 만공으로 불붙기 시작한 선맥은 전강 영신(田岡 永信)스님으로 이어지며 근대 선맥의 일가를 형성한다. 스님은 특히 일생동안 권위나 지위에 걸림없이 절차 탁마한 수행자의 표본으로 유명하다. 김천 직지사 곡성 태안사등에서 정진하던 스님은 혜봉스님,혜월 스님을 만나 선담을 나누고,1923년 금강산 지장암에 있던 한암스님을 찾아 선지를 담론한데 이어 만공선사를 만나 전법게를 받는다. 그후 육도 만행의 운수 행각을 벌이던 스님은 33세 젊은 나이로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된 것을 비롯 법주사 복천선원,김천 수도선원,광주 자운사등 전국의 제방에서 후학들을 제접한다. 특히 6.25때 제자 송담스님을 보호하고 뒷바라지 하기위해 시정에서 장사를 했던 유명한 일화는 두고두고 스님을 나표로 존경받게 하는 것이다. | |
고 암 상언(古庵 祥彦)스님(1899~1988) |
고암 상언(古庵 祥彦)스님은 제산 혜월 만공 용성 한암스님등 대선객의 회상에서 25 하안거를 성만한 후 38년 용성스님에게 전법계를 받았다. 1967년 조계종 3대 종정에 추대 됐으며,1970년 해인총림2대 방장,72년 4대 종정, 78년 6대 종정,80년 용성문장에 취임했다. 88년10월25일 가야산 해인사 용탑 선원에서 세수90,법랍71세로 입적했다. 자비보살의 무소유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스님은 소박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삶을 행동으로 실천해 보였다. 재물이나 명예가 수행자에게 병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스님은 자신에게 올려진 공양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는등 평생을 무욕청정으로 살았다. | |
청담 순호(靑潭 淳浩)스님(1902~1971) |
청담 순호(靑潭 淳浩)스님은 불교 정화운동등을 통해 일평생 교단 재건에 앞장선 분이다.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효시인50명의 승려를 규합해 개운사서 전국학인대회를 결성한 것이나, 54년 선학원서동산 효봉 금오스님등과 전국 비구승대회를 개최 왜색불교 타파를 위한 정화의 가치를 내건 것등은 스님의 불교중흥의 결연한 의지와 실천을 알게한다. 이어 조계종 초대 총무원장(1955년)과,통합종단 2대종정(1966년)에 이어 청정 승가 구현을 위해 종단 탈퇴선언(1969년)까지 감행할 만큼 조계종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종단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계종 3대 사업인 도제양성 역경포교가 바로 스님을 통해 제시 됐으며,율법 제일주의 확립과 승가대 건립,대중불교와 청정 승가의 토대를 구축했다. | |
탄허 택성(呑虛 宅成)스님(1913~1993) |
"유.불.선 삼교와 동양학의 대도를 관통한 당대의 서학"탄허 택성(呑虛 宅成)스님은 소년기에 이미 부친에게 유학을 수학,한학전반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 21살 때까지 유교의 진수를 터득하고,노자와 장자의 도교까지 섭렵한 스님은 좀더 훌륭한 스승이 없을까"고민하던중 오대산 한암스님 소식을 듣고 3년에 걸친 편지 왕래끝에 1934년 마침내 출가하게 된다. 출가 후 3년간 묵언하면서 오직 참선에만 정진했던 스님은 17년간 상원사에서 두문분출한채<화엄경>을 비롯한 내.외전 일체를 공부했다. 55년부터 본격적인 후학양성에 나서 오대산 연수원장,동국대 대학 선원장,초대 중앙역경원장 등을 역임 했다. 물론 스님이 전력을 기울인 부분은<화엄경>역경.청량징관의<화엄경소초>와 이통현장자의<화엄론>을 참조해<신화엄경합론>1백20권을 번역한 것은 "스님 만이 할 수 있는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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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 성우(慈雲 盛祐)스님(1911~1992) |
자운 성우(慈雲 盛祐)스님은 범어사 해인사 선암사 대승사 도리사 불영사 금강산 마하연등 전국 선원에서 서래밀지(西來密旨)를 탐구 했으며 1934년 4월부터 해인사에서 경.율장 연구를 시작했다. 1939년 율풍진작을 위한 서원을 세우고 오대산 동대 문수 보살상 앞에서 백일간 기도 끝에 서상(瑞祥)을 받은 스님은 1953년 한문본 비구.비구니계본과 사미.사미니율의 3만부를 간행.홍포했다. 규정원장(1975년)과 총무원장(1976년)을 역임한 스님은 82년부터 단일계단 전계사로 1천76명의 수계자를 배출했으며,스님이 배출한 보살계 수계자만도 1만 7천82명에 이른다. 동국역경원장 등을 맡기도 했던 스님은 한평생 청정율풍 진작을 위해 노력했다. | |
퇴옹 성철(退翁 性徹)스님(1912~1993)
성철 (이영주)
출생 1911년 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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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 물은 물'이란 법어로 현대인에게 올바른 삶과 깨달음을 일깨운 퇴옹 성철(退翁 性徹)스님. 스님은 철저한 계행과 쉬운 법어로 한국 불교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데 공헌 했다. 청담 자운 월산스님등과 함께 일으킨 봉암사 결사나,성전암에서 8년간의 장좌불와 수행,그리고 종정 추대 때도 산문으로 나오지 않을 만큼 수행으로 일관한 선사다. 스님은 선풍을 바로 세우기 위한 사상적 모색을 끊임없이 펼친 불교사상가로서도 알려져 있다. 대표저서<선문정로>를 통해 돈오점수론의 한계를 지적,돈오돈수에 입각한 간화선의 사상적 기원과 실천론을 천명했다. 이는 돈오돈수론과 돈오점수론을 둘러싼 선 논쟁의 계기를 부여 했으며, 조계종 종조를 보조지눌이 아닌,태고 보우스님으로 다시 강조하는등 한국불교의 선 부흥에 크게 기여 했다. | |
구산 수련(九山 秀蓮)스님(1909~1983) |
구산 수련(九山 秀蓮)스님은 송광사 백양사 용문암 해인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수십안거를 성만한 선사다. 53년 통영 미래사 창건,56년 조계종 감찰원장,62년 동화사 주지,69년 송광사에 조계총림을 개설한후 초대 방장을 맡았다. 73년 불일국제선원을 개원한 이래 79년 미국 L.A 고려사,82년 스위스 제네바 불승사,미국 카멜 대각사를 개원하는등 해외포교에 진력해 큰 성과를 남겼다. 이와 함께 69년 불일회를 창립 총재에 취임한 후 국내 대중 포교 현대화에도 큰 획을 그었다. 효봉스님의 법맥을 이은 구산스님은 해인사 백련암 동화사 금당선원 청암사 수도암등지에서 참구한 선사로 한국 선불교 중흥에 크게 이바지 했다. 구산스님은 또한 선사로서는 드물 게 해외포교와 대중포교에도 지대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송광사 중창불사를 이뤄냈다. | |
춘성스님 |
춘성 스님은 한용운 스님의 제자로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던 1891-1977년 항시 강조하시던 스님이였다 생전 바루 하나 옷 한 벌 가지고 수행하던 스님이다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몽땅 벗어주어 빤스만 차고 오실 때 도 있었다 두타행 제일 이였다 13세에 어린 나이로 백담사 만해 한용운 스님을 은사로 수계를 한다 1929년 만공 선사를 만나 법을 이었다 스님은 1977년 봉국사에서 세납87세 법납 74세로 입적하시였다 | |
구하스님 |
구하스님은 1872년 울주에서 태어나셨다 스님은 어려서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함을 보였다 1884년 13세 되던 해 천성산 내원사로 출가했다 1889년 경울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이후 범어사에서 의룡 스님께 외전을 배웠고 해담 혜옹 스님께 내전을 배웠다 1900년에 성해스님으로부터 구하라는 호를 받았다 1911년 통도사 주지를 시작 1960년 초대 중앙총무원장으로 추대 받으며 불교정화에 헌신했다 | |
월산스님(1912~1997) |
경허-만공-금오로 이어지는 선맥(禪脈)을 계승한 월산스님은 덕숭문중의 가풍을 안빈낙도(安貧樂道),즉 '가난함을 즐기고 도에 즐거움을 붙이는 것 이라 하고,자신의 가풍을'하루 세끼 밥먹고 잠오면 잠자는 것'이라고 밝히는 등 역대 선지식들이 그랬던 것처럼'평상 심시도'를 생활속에서 실천하는 삶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스님은 이처럼 참선을 중시하면서도 다른 선사들과는 달리'다소 돌아가는 것일 뿐이지 경을 공부하는 것으로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유연한 입장을 보이는 등 어는 한 곳에서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삶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종단이 혼란과 위기에 처했던 정화나개혁 당시와 같이 종단이 난국에 처했을 때는 현실에 적극나서 난국을 헤쳐나가는 길을 제시했는가 하면, 총무 원장을 맡고난후 두달만에 '이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라며 홀연히 자리를 버리고 떠나는 무착의 삶을 보여 주기도 했다. <1912~1997,조계종 제6대 총무원장.원로회의 의장> | |
벽초 큰스님 |
1908년 출가 하셨다. 청양에 태어나 만공선사와의 인연이 되어 입산을 하셨다. 만공선사의 법맥을 이은 벽초스님은 1940년부터 70년간 수덕사 소임을 맡았다. 하루는 만공스님이 화두를 어떻게 하고 있는냐고 물으니 벽초스님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무었인고 이렇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만공스님은 "넝쿨이 너무 많구나 공부하는법 한가지를 일러주마 너의 그 한 생각이 어디로부터 오는가 "하고 하라 하시었다. 그리고 항상 하심을 하셨으며 절은 일배이상 밪지 않하셨으며 법상은 항상 사양 하셨다. 한번은 1943년 만공스님과 오대산 적멸 보궁에 다녀오시는 길에 만공스님께 불쑥 "적멸보궁앞에 용의 콧구멍을 보셨습니까?" 하고 질문을 하시니 만공스님은 한마디로 "영룡이 콧구멍속에서 방광을 하네" 하셨다고 한다. 벽초 스님은 갈 때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그 날 아무도 들여 보내지 말라는 말과 입적 하시었다. 이때 세수는 88세 법납은 77세이다. | |
수덕사 혜암 스님 |
수덕사 혜암 스님 스님은 1884년 황해도 백천에서 태어나셨다 16세때 보임스님을 은사로 수계를 하셨다 27세 해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묘향산 상원사 주지역임을 했고 1929년 45세 때 만공스님께 전법을 받고 1984년 수덕사방장추대를 했다 스님은 1984년 100세에 입적 하셨다 | |
월하스님 |
월하 스님 월하스님은 1915년 충남부여에서 태어나셨다 1933년 금강산 유점사로 출가했다 차성환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계를 했다 1940년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1954년 효봉 청담 스님 등 승단정화에 주력했다 1956년 통도사 주지 겸 감찰원장을 역임했다 1960년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했다 1975년 동국학원이사장을 역임했다 1978년 총무원장을 역임했고 1984년 제9대 종정을 역임했다 2003년12월에 열반하셨다 | |
해인사 혜암 스님 |
해인사 혜암 스님 혜암 스님은 1920년 전남장성에서 태어나셨다 1945년 26세때 선관책진책을 보다가 발심 출가를 했다 인곡스님 은사로 수계를 했다 일주일내에 도를 깨치겠다고 분발 철야정진하셨다 1967년 해인사 유나를 거처 수좌 방장등을 역임했다 1987년 원로의원 을 했고 1999년 제 10대 종정 추대를 받았다 2001년 12월에 입적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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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10. 10 충남 논산~.
승려.
속명은 이상순(李商純), 법명은 석호(石虎), 서옹은 호이다. 1932년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
1935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중앙불교전문학교시절 전라남도 장성군 백양사(白羊寺)에서
승려 만암(蔓岩)에게 계(戒)를 받고 출가했다. 1935년 일본 교토[京都] 임제대학(臨濟大學)으로 유학하여
1941년 졸업하고, 1944년까지 일본 임제총본산 묘심사(妙心寺) 선원(禪院)에서 수도했다. 1944년 귀국하여
전국의 선원을 돌아다니며 참선에 몰두하다가 1962년에 동국대학교 대학선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후 서울 도봉산 무문관(無門關), 대구 동화사(棟華寺), 전라남도 봉암사(鳳岩寺)·백양사 등지의 조실(祖室)스님으로
지내면서 임제종(臨濟宗)의 선풍(禪風)을 지키며 수행승들을 가르쳤다. 1974년 대한불교조계종 제5대 종정(宗正)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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