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大地
정의륙
매정한 시간은 사정이 없다. 햇볕 따스한 정원에 온갖 꽃들이 교태를 부리더니 언제였는지 화려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진 꽃자리는 아쉬워도 대신에 오월 말의 시골집 마당은 온통 푸른 기운으로 가득 찼고, 콧속으로 스미는 공기는 형언할 수 없이 상쾌했다. 대지의 냄새였다. 나무 향과 이슬 머금은 풀 내, 무취하다는 시냇물 향취까지 뒤섞여 있었다. 지저귀는 새들의 침 내까지 다 어우러졌음 직한 천지가 만들어낸 냄새였다. 행복이 찰나에 머무는 만족의 감정이라면 이게 바로 행복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젊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일주일 중 주말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 더 절실하게 다가왔던 것일까.
이곳은 여름철 더위로 유명한 경북 분지다. 그래서 더워지기 전에 풀을 벨 요량으로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전날에 예초기의 플라스틱 날을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 기름도 가득 채워 만반의 준비를 했던 터였다. 그런데 예초기를 끌고 가며 본 이웃들 밭의 색깔은 우리 집 정원의 푸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검은 흙빛에다 풀 한 포기 보이지 않았다. 제초제를 철저히 친 결과였다. 풀에 갈 영양분을 오로지 나무나 농작물에만 가게 하려는 목적이었겠지만, 무언가 아쉽고 주위는 삭막했다. 토지에서 수입의 대부분을 얻을 수밖에 없는 그들과 그렇지 않은 나와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이었다. 그들 밭에 심어진 감나무와 대추나무의 파란 잎들이 그나마 나에게 주는 위안이었다.
며칠 새 풀이 크게 자라 만족스러운 광경은 아니었으나 녹색 가득한 우리 밭은 그래도 계절에 걸맞았다. 풍경이 먹을 걸 제공하는 건 아니지만 자연이 좋아서, 또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하여 제초제를 치지 않고 한 달에 두어 번 예초기를 돌리고 있다. 그런데 올봄은 가뭄 때문에 밭에 잡초가 잘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오월 초에 풀을 벤 후에 오늘 거의 한 달 만에야 다시 예초기를 잡는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흙이 바짝 메말라 기계가 지나간 자리에는 흙바람이 거세게 일고, 땀은 뚝뚝 떨어지며 숨이 가빴다.
이럴 때는 밭 가장자리 자귀나무와 남천나무 사이에 놓아둔 평상이 요긴하게 쓰인다. 누가 버린 낡은 것을 부산서 주워 왔는데 나무 그늘 밑에 쉬면서 땀을 닦고 공상하는 장소로는 마치 맞다. 심호흡을 하고 바라보니 건너편에 흐르는 마르지 않는 동창천은 여전히 시원하고, 좀 전에 풀 벤 자리는 초록색 융단으로 변했다. 발아래 집 울타리에는 빨간 장미까지 가득하니 여름을 향한 상상의 나래는 끝없이 펼쳐졌다.
크지 않고 값싼 땅이라 돈으로 치면 도시 변두리의 작은 아파트도 살까 말까한 적은 액수지만 포만감이 드는 걸 보면, 이것도 일종의 소유욕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이 땅과 살아갈 궁리를 하다 보면 무지개색 꿈에 들뜨는 건 분명하니까. 설사 그럴지라도 내가 가꾸는 이곳이 펄벅의 ‘대지’나 박경리의 ‘토지’에 나오는 땅의 개념과는 결코 같을 수가 없다. 두 작가의 대지가 옛날의 기근과 부富를 상징한다면 나는 정신적 평안을 갈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설처럼 농경시대의 토지는 바로 생존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 존재와 욕망의 역사가 바로 토지에 있었고, 이는 개인의 인생이 걸린 절대 가치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세월 따라 세상도 변하고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지는 법. 농경사회에서 산업혁명, 정보화 사회를 거쳐 로봇에 인공지능을 장착하는 시대가 되면서 땅은 같은 땅이로되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크게 달라진 것이다. 이제는 인간의 육체노동이나 농토에서 먹을거리를 구하기보다는 두뇌 노동이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시대가 달라지며 돈을 버는 방법이나 증식된 재산의 보관 수단이 토지 일변도에서 여러 형태로 다변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이 대지는 연명하기 위한 절대 공간이 아니라 건강을 제공하고 또 다른 꿈을 꾸게 하는 좋은 동반자로 변했다.
생각해보면 이 장소로 해서 내 인생 항로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른다. 생각이 풍족해지고 심신에 평화가 찾아왔다. 다시 말하건대 물질적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편안하고 영감을 일깨워주는 장소로써 잃었던 동심의 회복을 여기서 체험하고 있다. 땅은 소유의 수단도 되지만, 대지란 뜻에는 자연의 힘, 즉 포용과 평화의 뜻도 깃들어 있다.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소유 부동산의 대표적인 예로 아파트를 드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그 역사를 찾지는 않는다. 과시용이나 부의 증가 수단으로 간주할 뿐이다. 그러나 대지에는 역사와 건강, 생성 소멸하는 생명체의 존재 등 세상의 철학이 내포되어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땅이 이전에는 누구의 소유였으며 어떤 연유로 손 바뀜 하여 연고 없는 나에게까지 돌아왔는가를 가끔 생각하는 것도 이런 데서 기인한 것이리라.
이제 이 땅과 지낸 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50대 중반의 중년에서 칠십이 넘은 노년으로 변한 나의 역사가 이 대지에 깃들어있다. 밭에 심은 수종도 많이 바뀌었고 밭이랑에 뿌린 내 땀방울도 보이고 이 땅을 바라보는 시각도 변했다.
개인의 욕심이나 애국이라는 이름의 집단 광기로 토지나 영토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인간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장면이다. 그러나 대지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땅은 욕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기도 하지만, 자연의 일부다. 세상이 열릴 때 스스로 만들어진 게 자연이며 누구도 정복한 적이 없고 정복되지 않는다. 베토벤 교향곡 전원에서 우리가 느끼는 우러나오는 기쁨과 평안함이 바로 자연이다. 대지를 진정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다우며 윤택할 것인가. 돈이든 땅이든 내 것이라고 잠시 착각하는 사이 인생은 가버린다. 나이 들어 머지않은 내일이 훤히 보이는 데도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을 본다.
그날 쉬던 자리에서 털고 일어나 작은 텃밭에서 오이와 가지를 캐다가 시원한 냉국을 해서 먹었다. 찬 막걸리 한 사발을 곁들였더니 새벽에 흘린 땀을 보충하고도 남았다. 이것이 자연의 매력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요리
제목에 언급한 요리란 말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문맥으로 봐서 이 요리는 음식을 말하는 게 분명할 텐데, 그렇다면 왜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하지 않고 굳이 ‘내가 좋아하는 요리’라고 표현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어감이 좋아서 단순히 선택한 것인가, 음식과는 다른 의미를 전달할 목적이었는지 발제자의 의중을 해석하는 것이 어려웠다. 오래 전에 서구에서 약국을 할 때 바로 옆집이 ‘교목장’이라는 유명 요정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요리집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창원으로 이사 간 경남 도청이 약국 바로 맞은편에 있을 때였는데 관청의 높은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이 이 요정을 드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통상 우리가 사먹는 음식보다 훨씬 비싸서 서민이 접근하기 힘든 것이 요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한복을 차려 입은 여인들이 손님 곁에 앉아서 시중을 들었음은 불문가지다. 다시 말하면 그 당시는 속된 말로 음식보다 한 수 높은 게 요리였다는 말이다.
또 하나, 음식이 먹는 것에 주안점을 둔다면 요리는 거기다가 조리법 등 그 이상 차원 높은 어떤 행위까지 내포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요리의 정의에서 그 나라의 지리와 전통, 역사까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일면 타당한 걸로 생각한다.
중국요리나 일본요리를 예로 들면 떠오르는 게 있다. 중국요리는 우선 기름진 걸 생각하게 되고 조리법도 볶거나 튀기는 게 많다. 반대로 일본요리는 담백하고 날 생선을 연상하게 된다. 기후나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지만, 나라별로 음식을 만드는 재료가 차이가 나고 조리법도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요리란 완성된 음식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재료를 모아 음식을 완성하는 전 과정을 지칭하는 뜻도 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 수필에서는 요리의 뜻을 단순화해서 음식과 요리를 같은 의미로 쓰기로 했다. 뜻도 비슷한 데다 마음만 먹으면 괜찮은 요리를 먹지 못할 정도의 가난한 우리 국민이 이미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리는 서양식으로 주식에다 부식을 짬뽕해서 내놓는 경우도 있으나, 밥과 국, 반찬을 구분하는 한국적 정서로는 주식보다는 부식에 넣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술을 마시면서 안주로 먹는 음식들을 요리라고 부르는 걸 보면 짐작할 수 있는데, 여러 가지 음식을 음미하려면 배부르지 않는 부식에다 요리를 분류하는 것이 타당할 걸로 본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언가 생각해 보니 단순한 게 아니다. 나이 듦에 따라 좋아하는 음식도 변화가 있었고 기분에 따라 다르며 자리에 따라 차이가 있다. 또 아무리 좋아하더라도 연달아 먹으면 질리는 법이니 어느 하나를 콕 집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내세우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 초등학교 가난한 시절에는 간장에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리고 깨만 좀 섞어도 그렇게 맛이 좋았고, 지금도 배고플 때는 라면에 김치만 있어도 훌륭한 성찬보다 낫다. 소식하는 편이라 뷔페 같은 데를 가면 본전을 못 빼고 나오는 바람에 가는 걸 꺼리게 되는 걸 보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딱히 고정할 것도 못되는 것 같다.
폐일언하고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말할 때가 된 것 같다. 아무리 공복이 제일의 반찬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나라고 어찌 좋아하는 요리가 없겠는가. 부산 사람들이 많이 접하는 요리다. 이제 나이 먹다 보니 술 마시는 횟수나 양이 다 줄었는데 소주 안주로 좋은 꼼장어구이가 그것이다. 껍질을 벗기는 게 힘들어서 집에서 요리로 해먹기 어려운 단점이 있지만, 음식점에서 소주 안주로 먹기는 아주 좋다. 지금은 잘 잡히지가 않아서 비싼 축에 속하지만, 사오십년 전만 해도 우리가 쉽게 접촉했던 술안주였다. 조리 방법이 단순하여 요리라고 말하기 어렵고 그냥 서민 음식이라 부르는 게 좋겠다.
어떤 불로 굽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 연탄불 화덕에 석쇠에 얹어 굽는 꼼장어라야 제 맛이다. 금방 살짝 구운 꼼장어에 양파와 양념이 들어간 고추장을 버무려 다시 연탄불에 구워 내놓으면 완성된다. 탄 음식이 암을 유발한다 하여 요즈음은 프라이팬에서 꼼장어를 볶아내는데 연탄불 꼼장어만큼 맛이 안 난다. 기장의 짚불 꼼장어가 유명하다 하여 오리지널로 구워준다는 곳에서 먹어봤지만 닝닝한 것이 값만 비싸고 영 내 성에 차지 않았다. 꼼장어는 역시 좀 맵고 짠 자극이 있는 양념이어야 제격이다. 매운 맛을 술로 달래고 술의 쓴 맛은 맵고 달콤한 꼼장어구이로 중화시켜 세상에 더없이 좋은 맛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성정이 아무리 조용한 사람도 꼼장어를 먹는 이 자리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말소리가 높아지고 떠들게 되는 신비한 음식이다.
대학교 4학년이었으니 50년이 다 된 이야기다. 약사국가고시를 목전에 둔 4학년 겨울 방학으로 기억한다. 그때 영도에 살았는데 시험이 임박한 상태라 영도 도서관을 드나들며 마지막 속도를 내던 때였다. 지금도 영도 도서관이 그 자리에 있는지 그 후로는 가 본 적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영도 출신 국회의원 예춘호씨가 사비를 털어 건립한 도서관이었는데 이 때 처음 영도 도서관을 출입해봤다. 방학인데 구태여 대학 도서관이 있는 동래까지 먼 거리를 오가며 시간을 죽일 필요가 없을 듯해서 영도 도서관을 출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같은 영도라고는 해도 우리집에서 도서관까지는 거리가 꽤 됐다. 영선동 집에서 봉래동 도서관까지 아마 빠른 걸음으로 30분은 걸리지 않았나 싶다.
그 중간쯤에 남항동 큰 시장이 있었다. 먹을거리가 많은 시장이었는데 꼼장어 식당도 여럿 있었다. 공부를 마치고 그 앞을 지나올 때면 저녁 식전이라 꼼장어 굽는 냄새가 어찌 구수하던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는 꼼장어구이를 사서 찬바람에 식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짧지 않은 거리를 힘껏 뛰었다. 아직 식지 않은 꼼장어를 내 놓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작은 상에 아버지와 마주 앉아서 소주에다 꼼장어를 곁들여 먹던 그 맛을 어찌 잊을까. 미술가가 부자간의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렸다면 아마 훌륭한 작품이 되었으리라.
꼼장어에 대한 이런 추억이 있어 꼼장어구이는 나에게 더 없이 좋은 요리가 되지 않았나 싶다. 요새 tv를 틀어보면 어느 방송 없이 요리 방송이라 식상해서 채널을 돌려버린다. 그러나 누가 꼼장어구이에 대해서 요리 방송을 한다면 꼭 보고야 말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