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에게 안부를
손수영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흐른다. 시간도 흐르고 내 삶도 흘러 밴쿠버를 보고 온지 몇 달이 지났다. 내 육체도 흘러서 주름살은 더 깊어지고, 기억도 흐르는 줄 모르게 어느새 흘렀다. 늦기 전에 기억을 더듬으며 밴쿠버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다.
바람아, 나 잘 있다는 안부를 전해다오. 물위에서 반짝이던 햇빛의 그 푸르던 서슬을, 대양大洋의 꿈을 간직한 채 곱기만 하던 밴쿠버의 바다를 그리워한다고. 그 바다를 닮은 다정한 사람들을 그리워한다고.
<앰블파크에서>
웨스트밴쿠버바닷가 앰블파크Amblepark에 갔다. 제인이 일주일에 하루 봉사하는 갤러리Silk Purse Arts Gallery 옆 공터에는 청둥오리 비슷한 캐나다기러기Canada geese들이 먹이를 찾아 쪼고 라벤더 꽃은 졌다. 제인은 그 옆 갤러리마당을 비질하고 있는 흰 셔츠에 빨간 조끼를 입은 제임스와 몇 마디 나누더니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갤러리 안으로 들어간다. 전시된 그림들은 갖고 싶을 만치 예쁘다. 제임스는 갤러리건물도 관리하고 그림전시와 그림설명도 하는 것 같다. 그는 큐레이터일까, 도슨트일까.
제인과 나는 우리걸음으로 약 1시간쯤 걸리는 비치하우스Beach House로 걸음을 옮겼다. 해변산책보도는 특별했다. 길가의 벤치등받이에는 동판이 붙여져 있다. 가족의 일원이 별세했을 때 평소 고인이 좋아하는 글귀나 생활신조, 그리고 가족들이 고인의 명복을 축원하고 기념하는 글이 고인의 이름과 생사일자를 간결하게 적어놓은 동판이다. 물론 고인의 가족들이 준비해놓은 것이다. 7~8년 기한이 지나면 신청해놓은 다른 가족들의 차례가 된다.
해변에는 사람들의 길만 있는 게 아니었다. 풀과 야생화가 핀 약간 높은 지대의 좁다란 오솔길은 개들만의 길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의 동반자인 반려견이라 한다. 개전용식수대까지 있지 않는가.
해변의 레스토랑 비치하우스에서 25%할인한 값으로 식사할 수 있는 해피아워Happy Hours3시반~5시를 놓치지 않고 테라스좌석에 착석. 바다를 보며 제인은 회덮밥 나는 햄버거를 먹었다. 햄버거가 너무 짜서 바꿔 달라했더니 미안할 만큼 친절하게 새로 만든 햄버거와 샐러드 등을 다시 내어왔다. 이러한 경험을 빅토리아의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했다.
<밴쿠버 오르페움 콘서트홀>
제인의 둘째딸이 토론토에서 음악회 표를 보내왔다. 감격스러운 선물이다. 베르디의 ‘레퀴엠’을 밴쿠버 오르페움 극장(Orpheum Theater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Orpheus?)콘서트홀에서 UBC브리티시컬럼비아종합대학 성악가, 연합합창단이 밴쿠버심포니 오케스트라와 Otto Tausk 지휘로 공연한다. 레퀴엠이라니, 캐나다국경일인 현충일기념공연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밤비는 촉촉하게 소리 없이 내리는데 제인의 옆 동네에 사는 Jordan이 제인의 차로 콘서트홀까지 태워다 주었다. 음향기술자Sound Technician로 일을 하는 조르단은 제인의 큰손자로 BC주 옆 앨버타주 에드먼턴에 사는 큰딸의 큰아들이다. 제인의 손을 많이 탔을 것이다.
이리저리 밀리는 많은 사람들도 우리처럼 전장戰場에서의 선혈을 상징하듯 저마다 빨간 양귀비꽃poppy이나 양귀비브로치를 꽂고 ‘오르페움’으로 몰려든다. ‘오르페움’은 ‘예술의 전당’보다 규모는 작지만 오랜 세월의 흔적과 품격이 느껴졌다.
레퀴엠을 보면서 제인이 말해준 캐나다현충일 유래가 떠오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1월11일11시에 전쟁터에는 붉은 양귀비꽃이 마치 선혈이듯 낭자하게 피었더라는 전설 같은 사실이다.
국가와 국민들의 일체감과 진정성이 느껴지는 음악회였다. 성악가와 합창단의 변화를 준 움직임, 독창자의 열창과 2중창 3중창 하모니를 이룬 합창단은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박수를 받아냈다.
음악회가 끝나고 조르단의 안내로 밤11시에서 새벽1시까지 여는 식당Earls Bar에서 밤참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야 영어를 모르니 알아듣는 척 했지만 제인이 설명해 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조르단이 ‘스탠리파크’숲을 거쳐 토템폴을 지나 잉글리시만을 끼고 달리다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닮은 현수교인 ‘라이온스게이트 브릿지’를 건너 놀밴North Vancouver제인의 집까지 드라이브로 행복한 하루를 접게 했다. 심지 깊은 청년이다.
밴쿠버시내에서 놀밴으로 넘어갈 때 지나는 ‘라이온스게이트 브릿지‘를 건너는 그 순간, 제인은 넋을 놓게 된다고 한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넓은 바다와 그 앞쪽에 거대한 병풍처럼 우뚝 서있는 사이프러스산은 노을이 지면 지는 대로, 하늘이 푸르면 푸른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언제나 아름답다고 했다.
<UBC University British Columbia>
이르게 아침 먹고 제인이 운전대를 잡는다. 좀 먼 거리를 갈 거라고. 그래서 그런지 좀 결연한 표정이다. 목적지는 UBC. UBC는 제인이 석사학위를 받은 대학이다. 캐나다의 대학 중 캠퍼스가 퍽 아름답고 넓으며 보물처럼 관리하는 고목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캐나다의 3대 명문대학 중 하나라고 한다. 모교방문에 설레었을까.
학생들 식당Cafeteria은 제인이 가장 많이 이용했던 공간이란다. 자신이 다닐 때와는 이용방식이 바뀌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밥값은 올랐지만 한번 계산하면 왼 종일 머물 수 있어서 밥 먹으며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교수 Nitobi 추모공원을 가기위해 일어섰다. 도중에 야외에 조성된 동양학공원을 보았는데 둥근 공원에는 공자의 사상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글자와 뜻을 새긴 5개의 돌비석이 있었다. 이 대학에서의 동양학이란 중국과 일본만 인식하는 듯하다.
Nitobi 교수는 일본사람이다. 입장료를 냈다. 연못 가장자리의 작은 산책로를 따라 숲 오두막정자 단시短詩하이쿠가 새겨진 자그마한 둥근 돌에 쓴 시비詩碑 석등石燈 등 아기자기한 일본식정원이다. 예뻤다. 이어령 교수가 ‘축소지향형일본’이라 갈파했는데 그렇기도 하다. 미국 어바인에 있는 일본식당은 너른 잔디밭에 맨드럼한 돌 하나 놓고 인기를 끌더니.
<브랜트의 만찬>
찬찬히 제인의 집 안팎을 둘러본다. 콘도 앞 앙증맞은 꽃밭, 베란다 쪽의 키 큰 수목들, 햇빛부스러기들을 쪼며 쭈잇쭈잇 삐요삐르르삐욧 새들이 요란하다,
가족사진들 노트북 인쇄기 CD플레이어 클래식음악CD들 사전류 성경책 참고할만한 읽을거리 등등이 보인다. 분명 소설류나 시집도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제인이 한국방문 때 친구들에게서 받은 소소한 선물들과 20014년에 만든 전국 동기들의 주소와 근황, 교가가 수록된 소책자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건 부엌세간살이 사이에서 발견한 한 장 한 장 모은 ‘레시피 북’이다. 웬만큼 두꺼워야지. 새로운 음식에 관심 없는 나인지라 들쳐보니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사진을 찍었다. 눈에 넣는다고 기억날 것이며 가슴에 새긴다고 기억날까. 시진이 기억할 것이다.
오늘저녁은 특별한 날이다. 브랜트의 저녁만찬에 초대받은 날. 비치하우스Beach House에 간다. 웨스트밴쿠버해변을 걸었다. 바닷물이 철썩거리는 돌무더기방파제엔 여기저기 통나무들이 널려있다. 비치하우스 뷰 포인트는 햇빛에 고즈넉이 속살을 보이는 앞바다. 쭉 뻗은 목재 테크길을 걸었다. 토템장승도 보았다.
타 지역에서 공부하는 대학생 아들 에멧트 외에 다 모였다. 저녁이니 뷰가 무슨 소용. 시선을 끌거나 방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을만한 자리를 잡는다. 장서지간丈壻之間인 제인과 브랜트가 푸짐한 음식 못지않게 활달한 대화와 웃음으로 분위기를 풍성하게 만들어간다. 영어불통인 나는 꾸어다놓은 보릿자루. 말수가 적은 소냐는 브랜트의 몇 마디 말에는 활짝 웃는다. 고등학교모범생답게 차분한 에이뷰리, 유머도 던질 줄 아는 것 같다. 참하고 예쁘다.
만찬을 끝내고 브랜트가 사이프러스Cypress산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산위에서 도시의 야경을 보았다. 어둠속 도시의 밤풍경이 이상한 감동을 준다. ‘사이프러스’라면 고흐가 자주 그린 그 사이프러스나무가 이 산에 많이 있을까. 궁금하다.
그들이 얼마나 제인을 사랑하고 존중하는지 알 수 있는 하루였다. 참 다복한 가정이다.
바람아, 나의 소식을 밴쿠버의 그리운 사람들, 제인 브랜트 소냐 조르단에게 전해주길 바란다.
한국오면 꼭 나에게 연락해 달라는 당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