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자료 이병주 문학관
*이병주문학관: 작가 나림 이병주의 창작저작물과 유품을 상설 전시하는 문학기념관으로 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80여 권의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가의 균형성 있고 총체적인 시각을 느낄 수 있는 문학 현장이다. 2,992㎡의 대지에 504.24㎡의 연면적 규 모로 세워진 2층 건물로, 전시실과 강당 및 창작실을 갖추고 있다. 전시실에는 연대기 순서로 따라가며 작가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도록, 관련 유품과 작품 등이 소개 글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는 전시실의 내용 을 따라가 보면, 부산『국제신보』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하던 때의 언론인 이병주의 모 습과 마흔네 살 늦깎이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후 타계할 때까지 27년 동안 한 달 평균 1 천여 매를 써내는 초인적인 집필활동을 보여준 작가 이병주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이를 통 해 그가‘기록자로서의 소설가’,‘증언자로서의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은 이유를 느낄 수 있습 니다. 그리고 대표작인 『지리산』의 한 장면을 모형으로 만든 디오라마와 작가가 원고를 집필하고 있는 모습의 디오라마, 그리고 영상 자료들이 함께 있어 더욱 생생하고 입체적으 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다솔사 전경 다솔사 소나무 길
*다솔사(多率寺):경남 사천시 곤명면의 봉명산에 있는 사찰이다. 다솔사가 자리잡은 봉명산은 와룡산으로도 불리며, 불교식 이름인 방장산이라는 별칭도 있다. 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의 말사이다. 신라 지증왕 4년인 503년에 승려 연기(緣起)가 창립했다는 전설이 있다. 당시의 이름은 영악사(靈岳寺)였다. 다솔사(陀率寺)로 이름이 바뀐 것은 선덕여왕 5년인 636년이다. 이때 자장율사가 건물을 새로 지었다.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는 의상이 영봉사(靈鳳寺)로 개칭하였고, 신라 말기에 도선이 증축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방장산의 형국이 대장군처럼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있다"(多率)는 의미에서 다솔이라 했다는 이야기 전한다. 고려 말에 나옹이 중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 중 대양루는 조선 숙종 때 중건하면서 지어진 것이고, 나머지 건물은 19세기 이후에 세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승려로 이름이 있던 한용운과 최범술이 기거해 유명해졌고, 김동리는 다솔사 야학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 〈등신불〉을 썼다. 경상남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를 4점 보유하고 있다. 18세기 양식의 누각인 대양루와 응진전, 극락전, 그리고 다솔사 산하의 보안암 석굴이다. 일주문이나 천왕문이 없고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찰 뒤편에는 차밭이 조성되어 있다.
섬진강 마지막 포구인 망덕포구, 해마다 가을이면 전어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경남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정병옥 가옥, 망덕포구에 있다.
*망덕포구와 정병옥가옥: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서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섬진강 마지막 포구인 망덕포구에 시인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숨겨두었던 정병옥 가옥이 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41호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고 적힌 명패가 걸려 있다. 연희전문시절의 윤동주와 정병욱의 사진이 있다. 이 가옥은 국문학자로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1922~1982)의 옛 가옥이다. 1925년에 지은 이 가옥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윤동주(1917~1945) 시인의 유고가 보존되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1941년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자 자필원고를 하숙집 후배였던 정병욱에게 맡기고 일본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윤동주는 3부의 자필원고를 만들어 한 권은 자신이 갖고, 나머지 2부를 은사였던 이양하 교수와 정병욱에게 각각 맡겼다. 정병욱은 학병에 끌려가기 전 어머니에게 이 원고를 소중히 보관해줄 것을 당부하며 혹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에게 갖다줄 것을 당부하게 된다.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 모를 일제의 수색을 피해 마루 밑에 원고를 숨긴다. 그 와중에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윤동주 시인은 1943년 항일운동 혐의로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된다. 마루 밑에 보관돼 있던 원고는 해방을 맞아 정병욱이 다시 찾게 되고 시인의 유고는 1948년 정병욱과 그의 동생 윤일주에 의해 다른 유고와 함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라는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만약 유고가 이곳에 보존되지 않았다면 오늘날 널리 애송되는 그 유명한 <서시> <자화상> <별 헤는 밤> 등 시인의 대표작은 영원히 그 존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가옥은 정병욱의 부친이 지은 건물로 양조장과 주택을 겸한 건물로 요즈음 보기 힘든 1920년대 점포주택이다. 일제강점기 암흑기의 어두운 문학사를 밝힌 저항의 등불로 평가되는 시인의 유고를 보존했다는 문학사적인 의미도 크지만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또한 정병욱 교수가 판소리와 한글을 연구한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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