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아저씨네 문구점(신영란 글 주성희 그림)
2017.05.22. 김수미 발제
이 책의 주인공 빛남이는 아빠의 실직으로 인한 집안 문제, 친한 친구와의 문제,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 친구로 인한 고민 등, 초등학생들이 흔히 느낄 수 있는 고민을 가진 평범한 아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아저씨를 만난 뒤 빛남이는 조금씩 달라졌다. 셰익스피어 아저씨는 빛남이가 찾아올 때마다 ‘상상력은 마술과 같다.’ ‘화창한 날에 독사가 나온다.’ ‘우정에는 단맛도 있고 쓴맛도 있다.’ ‘태풍은 무섭지만 곧 지나간다.’ 등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들의 대사를 인용해, 빛남이가 고민하고 있는 일들을 해결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셰익스피어 아저씨의 도움으로 주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게 되고, 인성도 한층 성숙해진 빛남이의 모습을 통해 책을 읽는 어린이들에게도 셰익스피어 아저씨의 교훈이 고스란히 전해질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작품을 통해 "이세상은 모두가 하나의 무대이고, 남자든 여자든 모두 배우에 불과하다. 모두가 무대를 들락날락 하며 살아 있는 동안 여러 역할을 하게 된다." 고 했다.
실제 배우들은 대본이 있지만 인생이라는 무대는 연습도 대본도 없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만들어 가냐에 따라 충분히 달라질 수 있음을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상상력은 마술과 같다]
‘한여름 밤(하지 바로 전 날)의 꿈’에 나오는 대사로 상상력만으로도 우리의 인생에는 엄청난 변화가 일 어날 수 있다는 뜻
[화창한 날에 독사가 나온다]
‘줄리어스 시저’에서 브루투스가 한 말. 좋은 일이 생겼다고 무조건 기뻐하지 말고 항상 위험에 대비해 야 한다.
[우정에는 단맛도 있고 쓴 맛도 있다]
‘아테네의 타이먼’ -거부 타이먼의 몰락과 그의 은덕을 배신하는 아테네 정치가, 상인, 예술인 등의 이 기적 행태를 보여 주며 배금주의와 사리사욕에 사로잡힌 한 공동체의 진상을 고발한다.
p56- 오늘 남의 잘못은 어제의 내 잘못이었던 것을 생각하라.
(남의 잘못에 대해서 관용하라. 오늘 저지른 남의 잘못은 어제의 내 잘못이었던 것을 생각하라. 잘못 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완전하지 못한 것이 사람이라는 점을 항상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책은 지식의 보물 창고이다]
‘리처드 3세’ - 미루지 마라, 내일은 더 바쁘다
[태풍은 무섭지만 곧 지나간다]
‘리어 왕’ p99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모든 것을 알 수 없다]
‘오셀로’ - 명예라는 건 허무한 군더더기에 불과하다
‘햄릿’ -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리어왕’에서 리어 왕의 대사
-“네가 앞으로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그게 뭐든 꿈꾸는 게 중요해..”
[진실은 반드시 이기게 되어 있다]
주인공 빛남이가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보고 느낀 점
세계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 셰익스피어는 어떤 사람일까?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는 영국의 극작가,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영어로 된 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셰익스피어 자신도 최고의 극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자주 영국의 "국민 시인"과 "에이번의 시인"으로 불렸다.
생애
그에 관한 자료는 불충분하여 추측과 약간의 기록으로밖에 알 수 없다.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 있는 존 셰익스피어의 집,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로 불리고 있는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의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출생하였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존 부부의 첫 번째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였으며, 읍장까지 지낸 유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계급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운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고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여겨진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서와 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셰익스피어는 11세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서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그리스어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그리 뛰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극작가인 벤 존슨은 “라틴어에도 그만이고 그리스어는 더욱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셰익스피어를 비꼬아내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대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다른이들과 다르게 뛰어난 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그 자체로부터 깊은 생각과 뛰어난 지식을 끌어모은 자로서 그 세대의 최고의 희곡가라고 불리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18세의 나이에 26세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우스터의 성공회관구(자치적이고 독립적인 지역 성공회 교회를 일컫는 말)의 교회 법정에서는 1582년 11월 27일에 혼인 허가를 내주었다. 해서웨이의 두 이웃은 결혼을 막을 아무런 장애 요인이 없음을 보증하는 보증서를 다음 날 보냈다.[셰익스피어의 생애에서 세례일과 결혼일을 제외하고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셰익스피어와 앤 사이에서 1583년 5월 23일에 수잔나(Susanna)라는 딸이 탄생한다. 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황으로 보아 그리 늙은 신부가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연상의 아내를 그리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 연상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든 개인적인 성공의 야심에서였든, 아니면 고향에 머무를 수 없을 만한 사고를 저질렀든, 셰익스피어는 1585년에 햄닛(Hamnet)과 주디스(Judith)라는 쌍둥이가 태어난 후 곧장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닌다. 1585년 이후 7∼8년간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녔는데, 이 기간 동안 셰익스피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1590년경에야 런던에 도착해 이때부터 배우, 극작가, 극장 주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런던과 극작 활동
런던에 이주한 셰익스피어는 눈부시게 변하고 있던 수도 런던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통치하던 이 시기의 런던은 많은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대단히 북적거리고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 런던은 인구의 급격한 팽창으로 도시는 지저분해지고 많은 문제점이 야기된 도시였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다양한 경제 활동, 다양한 문화 활동과 행사, 특히 빈번한 연극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흥을 제공하면서 셰익스피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셰익스피어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극작가 로버트 그린의 기록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1592년에는 런던에서 알려진 극작가 중 하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가 대학도 마치지 못한 학력으로 인해 품격이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594년부터 셰익스피어는 당시 런던 연극계를 양분하는 극단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 극단의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
1599년 궁내부장관 극단은 템스 강 남쪽에 글로브 극장을 신축하고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극단은 국왕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와 《루크리스》(1594) 등 두 편의 장시(長詩)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는 1590년 ∼ 1613년까지의 대략 24년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기간에 희·비극을 포함한 모두 38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59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는데, 특히 《헨리 6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인기는 더해 갔다. 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668년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극찬한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10편의 비극(로마극 포함),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 몇 편의 장시와 시집 《소네트》를 집필하였고, 대부분의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생전의 엘리자베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경우에도 셰익스피어 한명만은 못 넘긴다." 이었다.
말년과 죽음
셰익스피어에 대한 첫 번째 전기를 출간한 작가 로우(Rowe)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몇 년전에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당시에 모든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일은 보기 드문 경우이었고, 말년에도 셰익스피어는 런던을 계속 방문하였다. 1612년 그는 마운트조이의 딸 메리의 혼인 신고와 관련하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받았다. 1613년 3월 그는 과거에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소 수도원 이었던 문루(gatehouse)를 사들였고, 1614년 11월에는 내과 의사이자 그의 사위인 존 홀과 함께 몇 주간 런던에 머물러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무덤
셰익스피어는 죽은 뒤에 고향의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묻히게 된다.
그의 흉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판단은 네스터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 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 대지는 그를 덮고, 사람들은 통곡하고, 올림푸스는 그를 소유한다.”
작품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 생전에 출판된 것은 19편 정도이고, 1623년 동료들에 의하여 전집이 간행되었다. 이 전집은 이절판(folio)의 대형판으로 38편의 작품 중 2편을 제외한 36편이 들어 있다. 당시의 극본은 관례상 출판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작품의 정확한 창작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지금까지 가장 신빙성 있는 것으로 알려진 E.K.채임버즈 교수의 추적에 의한 작품명 및 창작 연대는 다음과 같다.
1590∼1591년 《헨리 6세 2부·3부》, 1591∼1592년 《헨리 6세 1부》, 1592∼1593년 《리처드 3세》 《실수의 희극》, 1593∼1594년 《타이터스·앤드로니커스》 《말괄량이 길들이기》, 1594∼1595년 《베로나의 두 신사》 《사랑의 헛수고》 《로미오와 줄리엣》, 1595∼1596년 《리처드 2세》 《한여름밤의 꿈》, 1596∼1597년 《존왕》 《베니스의 상인》, 1597∼1598년 《헨리 4세 1부·2부》, 1598∼1599년 《헛소동》 《헨리 5세》, 1599∼1600년 《줄리어스 시저》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夜)》, 1600∼1601년 《햄릿》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 1601∼1602년 《토로일러스와 크레시다》, 1602∼1603년 《끝이 좋으면 다 좋아》, 1604∼1605년 《자에는 자로》 《오셀로》, 1605∼1606년 《리어왕》 《맥베스》, 1606∼1607년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1607∼1608년 《코리오레이너스》 《아테네의 타이먼》, 1608∼1609년 《페리클리즈》, 1609∼1610년 《심벨린》, 1610∼1611년 《겨울 이야기》, 1611∼1612년 《폭풍우》, 1612∼1613년 《헨리 8세》 등이다.
이상의 작품 연표에서 나타나듯이 그의 습작기에 쓴 것은 영국사극과 희극이다. 영국사극은 모두 10편을 썼으나 그 중 8편은 중세 후기, 주로 영국·프랑스 양국간의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으로 불리는 두 왕가(王家) 사이의 권력투쟁의 과정을 극화한 것이다. 따라서 집필 연도순과는 관계없이 《리처드 2세》 《헨리 4세 1부·2부》 및 《헨리 5세》를 묶어서 1398∼1420년까지의 4부작으로, 《헨리 6세 1부·2부·3부》 《리처드 3세》를 묶어서 1422∼1485년까지의 4부작으로 각기 생각할 수 있다. 이들 작품을 일괄해서 볼 때, 헨리 7세 및 헨리 8세에 의해 정치적 통일을 위한 기반조성이 이룩되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에 의해 근세국가로서 크게 도약하는 역사적 시점에서 본 관점이 이들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봉건적 질서가 내부붕괴를 일으키면서 골육상쟁이 유발하는 처참한 피의 역사가 선명하게 표출되어 있고, 유혈과 찬탈의 연쇄적 과정이 젊은 극작가의 눈에 생생하게 비춰지고 있다.
한편, 초기 희극 《실수의 희극 Comedy of Errors》과 《말괄량이 길들이기 The Taming of the Shrew》는 각기 라틴 희극 및 이탈리아 르네상스 희극에서 내용과 수법을 빌려온 것으로 젊은 극작가의 습작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품에서도 이미 자신이 배울 것과 새로 보태야 할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으며, 뒤이을 자신의 희극세계의 구축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1594∼1600년에 걸쳐 창작된 일련의 희극, 《베로나의 두 신사》 《사랑의 헛수고》 《한여름밤의 꿈》 《베니스의 상인》 《헛소동》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夜)》 등은 흔히 낭만희극이라 불리며,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서정적 분위기와 재담(才談)·익살·해학 등 희극 고유의 요소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젊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말(결혼)에 이르는 낭만희극의 정석(定石)을 보여 주면서도 그는 사랑의 풍요함과 사랑의 병, 그리고 변신(變身)의 능력에서부터 사랑의 변덕스러움·장난, 그 파괴적 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주제는 중세에서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문화의 전통에 따르는 것이지만, 이를 작품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셰익스피어의 창조적 결과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가 확대와 깊이를 더한 것은 역사극과 낭만희극을 쓰고 난 뒤, 비극 작품을 쓰면서부터이다. 대체로 1600∼1608년까지의 이 시기에 그는 대표작인 4대비극을 중심으로 로마 역사에서 소재를 얻은 3편의 로마 사극, 그리고 희극의 형식을 취했으면서도 이전의 정통희극과는 달리 암울한 색조가 짙은 이른바 문제희극(問題喜劇) 3편도 써냈다.
본격적인 비극작품을 쓰기 전에 이미 초기에 2편의 비극, 즉 《티투스 안드로니쿠스》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썼으나, 이 작품의 명성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1600년 이후에 쓰인 4대 비극을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의 대표적인 4대 비극 중 가장 먼저 쓴 《햄릿 Hamlet》은 하나의 복수비극으로, 주인공인 왕자의 인간상은 사색과 행동, 진실과 허위, 양심과 결단, 신념과 회의 등의 틈바구니에서 삶을 초극해 보려는 한 인물의 모습이 영원한 수수께끼처럼 제시되고 있다. 두 번째 작품 《오셀로 Othello》는 흑인장군인 주인공의 아내에 대한 애정이 악역 이아고(Iago)의 간계(奸計)에 의해 무참히 허물어지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나 심리적 갈등보다는 인간적 신뢰가 돋보이는 작품의 하나이다. 세 번째 작품 《리어왕 King Lear》도 늙은 왕의 세 딸에 대한 애정의 시험이라는 설화적(說話的) 모티프를 바탕으로 깔고 있으나 혈육간의 유대의 파괴가 우주적 질서의 붕괴로 확대되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다. 인간성의 선·악의 문제가 이처럼 근원적 차원에서 다뤄진 작품은 좀처럼 찾기 힘들며, 또한 삶이 원초적으로 비극을 내포하고 있음을 조명(照明)한 경우도 드물다. 마지막 작품인 《맥베스 Macbeth》에서도 권력의 야망에 이끌린 한 무장(武將)의 왕위찬탈과 그것이 초래하는 비극적 결말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정치적 욕망의 경위가 아니라 인간의 양심과 영혼의 절대적 붕괴라는 명제를 집중적으로 다뤘기 때문에 주인공 맥베스는 악인이면서도 우리에게 공포와 더불어 공감을 자아내게 해준다.
4대비극은 셰익스피어극의 절정이자 세계문학의 금자탑(金字塔)으로서 이 시기에 씌어진 로마 사극도 비슷하게 비극적 내용을 담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는 이상주의자 브루투스와 현실정치가 안토니우스의 대결을 통하여 브루투스의 패배에서 얼핏 햄릿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든 것을 표출하였다는 의미에서 셰익스피어는 뛰어난 자기완결적인 작가였음을 알 수 있다.
명성과 평가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의 극작가였던 벤 존슨은 “당대뿐 아니라 만세(萬世)를 통해 통용되는 작가”라고 말하였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그는 뛰어난 시인·극작가로서 인정을 받아 왔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숭앙(崇仰)이 절정에 도달한 것은 19세기 초 낭만파 시인·비평가들이 그를 재평가함으로써 그의 작품에 대한 해석과 비평도 깊이를 더했다. 콜리지, 찰스 램, 해즐릿 등이 바로 이에 기여했던 대표적 문인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해 놓은 낭만적 셰익스피어상(像)은 20세기에 들어와 크게 수정되기에 이르렀으며 학문적·비평적 연구의 큰 성과와 더불어 그를 16세기의 극작가이자 동시에 20세기에 사는(때로는 동시대 작가처럼 보고자 하는) 작가로 보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작품해석이 다양하게 전개될 뿐 아니라 고전의 ‘살아 있는’ 모델로서 셰익스피어를 대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한편, 작품이 영어로 씌어져 있음에도 셰익스피어가 영국인의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라는 인식은 이미 19세기 이후에 두드러졌다. 세계 각국에서 자국어(自國語)로 번역 출간하여 읽는 셰익스피어에 못지 않게 또한 무대 위에서도 보는 셰익스피어가 세계 곳곳에서 상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셰익스피어가 한국에 알려진 것은 개화기(開化期) 초에서부터였으나 그때는 단편적인 소개에 지나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소개는 1923년 현철(玄哲)에 의한 《햄릿》의 완역(完譯) 출판이 시초이다. 1920년대에는 이 밖에도 셰익스피어 소개가 있었으나 모두 단편적이었으며, 1930년대에 와서 극예술협회에 의한 《베니스의 상인》 공연이 있었고, 이것도 법정장면만을 다룬 부분적인 소개였다. 이 밖에 학교극으로서 셰익스피어가 상연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셰익스피어가 소개된 것은 해방 후인 6·25전쟁 이전에 김동석의 《셰익스피어 연구》, 설정식의 《햄릿》 번역이 나왔고, 1950년대에 들어와 각 대학의 셰익스피어 강의가 보편화되었으며, 세계문학출판이 활기를 띠면서부터 학문적 연구·번역·공연 등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두산백과, 위키백과 참고)
첫댓글 고생하셨어요~
수고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