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쉼표가 필요한 까닭> - 한북2회차(광덕산-백운산)
(사진 출처 : 카라 앨범)
어제 월요일 아침 거짓말같이 몸이 가뿐해졌다. 내 몸은 감기나 몸살 증세가 일단 오면 여태껏 그냥 지나간 적이 없었다. 제아무리 민간요법이나 양약을 졸라 써봐도 적어도 사흘에서 일주일은 골골하고 지나야 겨우 몸을 추스른다. 근데 이번에는 불과 하루 만에 씻은듯이 달아나버렸다. 숯가마 원적외선 효험을 본 건가 아니면 몸이 다시 봄으로 돌아가는 건가 ㅎㅎㅎ. 사실 이번 산행 때 숯가마 찜질방을 처음 체험한 나로서는 내 몸에 그 약발이 먹히나 하는 합리적 의심?(ㅋㅋ 요즘 시국 관련 대담에서 이 표현 하도 많이 쓰기에 따라 써봅니다)을 해보고 싶다.
일요일 새벽 일어날 때 무릎 세우기도 힘들고 온몸 근육이 욱신거리는 게 영락없는 몸살이다. 늦어도 전날 밤에라도 이랬다면 못 간다고 문자라도
보냈을 텐데 당일 새벽에 어떡해? 낙남에서 참가인원이 적어 눈물 날 정도로 근근이 버텨온 정맥팀, 이번에 한북정맥 오픈하면서 모처럼 개업 약빨 받으며 연일 만원사례에 대기 손님도 있고 하는데 큰일이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카라 총무 얼굴이 뇌리에 스쳐가는 순간, 서랍
속에 묵혀 있던 타이레놀 한 알을 걍 입에 털어 넣고선 전날 꾸려놓은 배낭 메고 집을 나선다. 산을 이렇게 타야 하는 건가 하면서도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가 원해서 내가 좋아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가는 길이지 않느냐 하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겨울 한북정맥 능선길은 남쪽에서 느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설악산이 화려하고 지리산이 푸근하다면 이곳은 키가 비슷비슷한 산들이 험준하게 펼쳐져 어느 산이 주봉인지 분간 못할 정도로 모두가 기개를 뽐내고 있다. 멀리 조망되는 능선과 골짜기는 온통 검은 줄무늬를 그어놓은 듯 선명하게 대비를 이루면서 이 겨울에 변방의 산을 찾은 우리들에게 한 폭의 수묵산수화를 선사하고 있다. 이렇게 매번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기에 지루함 없이 산을 가고 또 가나 보다.
당일치기라 점심이 아침같이 느껴지는 착각 속에 조경철천문대 가는 길에 위장 페인트칠이 인상적인 포진지 앞에서 배낭을 내리고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참 희한하게도 각각 남남이다가도 밥 먹을 때 되면 몇몇 식구로 저절로 나뉘어 자리잡는다. 예부터 끼니는 습관적으로 먹던 사람들끼리 먹다 보니 가족을 식구라 하지 않았겠나. 그러니 사회에서도 밥을 자주 함께 먹으면 가족처럼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오늘은 각 식구들이 나르샤(닉)가 푸짐하게 준비해온 차돌백이를 굽느라 소란스럽고 진지 앞마당은 온통 지글지글 소리와 구수한 냄새로 가득하다. 최근 산으로 다시 컴백한 그는 매번 고기와 스낵 그리고 음료를 잔뜩 지고 와서 여러 사람들에게 풀어 놓기에 내가 별명을 하나 붙였다. 이동식 슈퍼마켓이라고. 사업에만 열중하다가 단지 산이 궁금해서 무작정 따라 나섰다는 그 사나이, 이제는
새로운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좋아서 산에 온다고 한다. 먹거리를 제공하는 게 고맙기는 하지만 저 열정이
식으면 어쩌나 싶다.(부디 그런 불상사는 없길… ㅎㅎㅎ)
점심을 한바탕 야단법석으로 끝내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몸이 오싹해지면서 한기가 심하게 느껴진다. 약기가 떨어졌다고 직감하고 가져온 타이레놀 한 알 복용하고는 마음 속에 플랜B를 준비한다. 광덕고개에 가서 컨디션이 나쁘지 않으면 계속 진행하고 아니면 거기서 멈추는 걸로 계획하고 출발한다. 먼 산에 가는 사람들은 배낭 깊숙한 곳에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 한 알 정도는 비상알약으로 꼭 넣어 다니길 권하고 싶다. 외상이 아닌 내과적인 요인으로 몸이 힘들 때 알약 하나로 기적 같은 효과를 주는 약들이다. 광덕고개까지는 길이
좋아 수월하게 도착한 후미 일행이 사진 몇 장 찍고 전열을 재정비한 후 바로 백운산으로 향할 무렵 태정 형님이 허벅지에 쥐가 나서 진행이 어렵다고
한다. 체구는 작으시지만 지구력이 좋고 의지가 강해서 웬만해서는 중도 포기를 않는 분인데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고 산세도 편치 않은 데다 눈도 있고 해서 다리 상태가 더 악화되면 큰 민폐가 될 것 같아선지 초입 철계단을 시험 삼아 오른 후에 바로 멈추겠다고 하신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터져 나온다. “태정
형님,나와 함께 내려갑시다.” 현재 상태는 나쁘지 않지만
약의 힘으로 버티는 것 같아 망설일 겨를도 없이 내 몸이 먼저 말을 해버린다.
우리 둘을 홀연히 남겨두고 떠나는 일행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마치 시골 간이역에 홀로 내려 플랫폼에서 떠나가는 기차의 꽁무니를 쳐다보는 기분이다. 째깍째깍 쉼없이 가던 시계바늘이 갑자기 멈춘 듯 발걸음과 함께 흐르던 감각적 시간도 멎으면서 한동안 광덕고개 위에 적막감이 휩싸인다. 코스를 감안해 어림잡아 약 세 시간의 절대적인 자유가 주어진다. 무엇을 할까. 우선 주막에 가서 막걸리에 도토리묵을 시켜놓고 본다. 두 나그네는 같은 60대로서 살 만큼 살아왔기에 잔을 맞대면서 각자의 인생스토리를 펼쳐내며 여유를 즐긴다. 대화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가족 얘기 그리고 성생활에 관한 얘기까지 나누며 막걸리 한 병 놓고 본전을 다 뽑고는 택시를 불러 타고 고개에서 화천 사창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사우나로 방향을 잡고 산골짝 사잇길로 가면서 오른쪽 창문을 통해 한껏 위로 쳐다보니 한북정맥이 하늘과 맞닿아 달려가고 있다. 겨울 늦은 오후 날씨는 흐려 음산한데 흰 눈을 이고 있는 저 아득한 하늘 지평선 따라 이어지는 험준한 굴곡, 도저히 이 시간에 사람이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저 길을 지금 우리 동료대원들이 가쁜 숨을 몰아 쉬며 걸어가고 있다. 잠시 내 몸에서 영혼을 빼내어 그곳으로 올려 보내본다.(이거 말입니다 일종의 ‘유체이탈’을 시도한 건데 마음을 곱게 쓰고 노력하면 되거든요ㅋㅋㅋ) 훨훨 높이 올라가 보니 저기 백수가 백운산 꼭대기에서 또 거풍을 하는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근데 저 빤쯔 아직 안 갈아입었나 전에 몰운대 바다에 풍덩 뛰어들었던 그거로 보이는데ㅋㅋㅋ.(거풍 : 빤쯔 내리고 산 아래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사타구니를 말리는 행위로서 옛 선비들이 주로 여름에 뒷산에 올라 즐겼다고 함) 응선이는
1리터 맥주로 또 소맥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 오늘은 온도를 잘 맞추어 왔나? 지난 번에 얼어서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는데. 보기만 하고 어울릴
수 없는 내 영혼이여 이제 저 아래 태정 형 혼자 타고 가는 택시로 내려가자꾸나. ㅎㅎㅎ 잠시 눈을
감으니 후미의 루틴이 눈에 선하다.
택시 기사가 사우나로 안내한다더니 도마치고개를 한참 넘어서 우리를 웬 숯가마찜질방에 내려 놓는다. 난생 처음 가보는 숯가마찜질이지만 도전하는 자세로 체험해보기로 한다. 모르니까 무조건 물어봐야지. 근데 가평
깊고 깊은 산골짜기에 위치한 이곳은 습관적으로 오는 사람들만 오는지 주인이 물어보는 우리를 이상하게 쳐다본다. 어설픈 방에서 일단 샤워를 하고 가운을 입고 숯가마 속으로 들어가는데 야 이건 직경 2m정도에 한 평 남짓
되는 황토 움막 같은 곳인데 깜깜해서 아무 것도 안 보인다. 태정 형님이랑 둘이서 더듬거리는 모습이 당달봉사가 따로 없다. 그때 갑자기 웬 아줌마가 핸드폰 불빛을 비춰주며 앉을 곳을 가리켜준다. 가만히 보니 여자 4명이 그 좁은 공간을 둘러 앉아 있었는데 얼굴은 잘 안보이지만 순간 야릇한 기분이 든다. 마냥 편해 보이는 가운인지라 스마트폰 불빛에 그 아줌마 앞가슴이 깊게 파여 보이는데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방울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서로 인사를 건네는데 남양주에서 왔대나. 태정 형님이 조근조근 담소를 나누는 동안 나는 이래저래 후끈거리는 그 도가니에서 정좌하여 조금이라도 더 원적외선을 쬐며 명상 좀 해보려고 애쓰는데 이 아줌마가 자꾸 누우랜다. 그 공간에 발 뻗고 누우면 서로가 부딪힐 텐데 자꾸만 권하기에 에라 모르겠다 모두 누워버렸다.ㅎㅎㅎ
약 세 시간의 자유를 우리는 이렇게 별천지에서 낯선 경험을 하고 도마치고개에서 버스로 내려온 대원들과 만나 오늘의 여정을 오사마리 짓는다. 오늘 우리의 동선은 탈출이 아니라 자기성찰의 기회를 갖고자 일부러 찍어보는 쉼표의 여정이라 하고 싶다.(ㅋㅋ말이
좋다,남이 하면 탈출 내가 하면 성찰?ㅎㅎㅎ) 달리는 열차 안에서는 우리의 속도를 못 느끼며 그냥 시간과 함께 달려간다. 잠시 아무 역에 내려 열차를 떠나 보내고 플랫폼에 홀로 서면 적막한 공간과 멈춘 듯한 시간 속에서 갑자기 멍해지면서 잘 안보이던 내 모습을 보게 되며 스스로와 대화도 해볼 수 있다. 그 순간은 가족이나 일 이런 문제에 몰입해왔던 나 자신에 대해 자책도 하고 위로도 해본다. 이제는 나 자신에 좀더 충실하게 하면서 참된 ‘나’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인생에 새로운 희망이 생기고 꼬여 있던 가족문제나 골치 아픈 일들도 한층 가벼워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혜민
스님이 그의 저서<멈추면,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내가 괴로운 것은 세상이 날 괴롭히는 것이 아니고 알고 보면 내 마음이 날 괴롭히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내가
쉬면 세상도 쉰다’라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너무나 많은 번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숯가마 도가니 속에서 정좌하여 제대로 깊은 성찰의 시간을 가졌어야 하는데 그 아줌마 때문에...ㅠㅠㅠ. 장흥에 유명한 숯가마가 있다던데 연말에 식구들과 거기 가서 땀 좀 흘리고 돼지고기나 좀 구워먹고 와야겠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가끔 내 인생에 쉼표를 찍으면서 돌아보는 시간도 갖고 싶다.
2016. 12. 20
虎 山
첫댓글 더디어 한북으로 오셨군요 한북 겨울 산은 멋져요. 특히 국망봉 능선.. 혼자걷던 한북 생각 나내요.
국망봉 일대 멧되지때 등등... 수고 하셨습니다.
이 고문님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이제 한북 들어갔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호산 한북도 홀로 산행 하면 할만한 정맥입니다. 열심히 지맥 다니고 있습니다.
네 노고산 구간에 연락 주이소 동참
네 연락 꼭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