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살던 고향 꽃피는 산골 - 구어리(九魚里)
구어리(九魚里)는 대부분의 지역이 평지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공단이 들어선 공장촌이 되고 있다.
마을 동쪽에는 백일산이, 서쪽에 ‘증말못’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너머로 ‘동천(東川 : 우박천)이 흐르고 있다. 주요 자연마을로는 ‘구역’, ‘어령’, ‘송계’, ‘들밑’마을 등이 있다.
그리운 우리 고향 구어리
‘구어리(九魚里)’는 외동읍 소재지인 입실리 남쪽에 인접한 마을로 모화리와 문산리, 석계리, 냉천리에 둘러싸여 있다.
동대산과 애기봉산을 동서쪽에 끼고, 7번 국도를 중심으로 좌우로 펼쳐진 이 마을은 최근 자동차부품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공단지역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현재 다스, 동해금속, 디에스씨, 태광공업 등 115개 업체가 이 마을에 입주해 있다.
구어공단 기공식(구어 2 일반산업단지)
구어리(九魚里)는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아홉 개의 산이 마치 아홉 마리 물고기 형상과 같다고 하여 ‘구어(九魚)’라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역촌이 있었다고 하여 ‘구역(九驛)’, ‘구어역(九於驛)’, ‘구역(九易)’, ‘역촌(驛村)’이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구어(九於)’로 표기되어 오던 것을 1996년 주민의 청원에 의해 본래의 ‘구어(九魚)’로 마을 이름을 되찾았다.
‘구역’, ‘들밑’, ‘어령’이 구어1리를 이루고, ‘송계’, ‘구어장테(웃마을)’, ‘별미’가 구어2리를 이루고 있다.
구어리 풍경
----------------------------------------------
구어리는 약 350년 전 김봉휘(金鳳輝)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구어리(九魚里)를 개척한 김봉휘는 금녕김씨(金寧金氏)의 입향조로 입향시 다래나무를 치고 들어와서 마을을 일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래나무’는 다래나뭇과에 속한 낙엽 덩굴나무로 활엽수이며 높이는 7미터 정도이다. 윤이 나지 않는 얇은 잎은 어긋나고 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다.
다래나무
꽃은 5월에 몇 송이씩 잎겨드랑이에 뭉쳐나는데, 암꽃과 수꽃이 따로따로 달린다. 어린잎은 나물로 식용되고, 10월에 익는 황록색의 열매는 과일로 먹기도 하고, 술을 빚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곳곳의 깊은 산골짜기나 산기슭의 마른땅에서 잘 자라며 추위에 잘 견딘다.
부락의 명칭은 앞서 소개한 대로 당시 이곳으로 뻗어 내려온 능선(稜線)의 형태가 9마리의 물고기형이라 하여 ‘구어(九魚)’라 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역촌(驛村)’이 되어 ‘구어역(鉤魚驛)’이 있었다 하여 ‘구역(舊譯)’이라고도 했다.
구어리의 풍경
구어리(九魚里)의 구어역(鉤魚驛)은 조선시대의 역촌(驛村)으로 지금의 7번국도와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개설되기 전에는 부산과 울산, 경주를 연결하는 ‘영남좌로(嶺南左路)’의 중심지였다.
당시의 수도 한양에서 지금의 불국사역과 외동읍 방어리의 방지마을, 방어리 원동(院洞 ; 원골)에 소재하던 원(院)을 거쳐 구어역에 이르는 길목이었다.
구어역은 경주와 울산의 거의 중간 지점에 있는 역촌(驛村)으로 그 당시 일본으로 도일하던 통신사(通信使) 일행의 대부분이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구어리의 풍경
당시의 통신사(通信使)는 조선시대(朝鮮時代) 때 우리나라에서 일본(日本)으로 보내던 사신(使臣)을 말한다.
어쨌든 이러한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외동읍(外東邑)의 치안을 담당하던 외동지서(外東支署)도 1910년 1월 20일 구어리(九魚里)에서 주재소(駐在所)로 출범하였다.
외동지서(外東支署)는 이로부터 11년간 구어리에 주재하다가 연안리(淵安里)에서 입실리로 이전하는 외동면사무소를 따라 1921년 6월 19일 지금의 입실리로 이전하였다.
구어리 풍경
구어리(九魚里)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민족혼(民族魂)을 말살하기 위해 1914년에 실시한 행정구역 통폐합 시 아무런 뜻도 없는 ‘구어리(九於里)’라 개칭했고, 1998년 일제식민지 잔재타파와 ‘민족혼 찾기’ 추진사업에 따라 마을명의 한자표기를 원래의 ‘九魚’로 되돌려 놓았다.
이 경우는 옛 신라조에서 울산만에서 침투하는 왜구(倭寇)를 막기 위해 방어사(防禦司)를 설치한 방어리(防禦里)를 일제가 아무런 뜻도 없는 ‘方於里’로 개칭한 경우와 같은 맥락이었다.
구어리의 풍경
방어리(防禦里)도 일제가 저들 마음대로 고쳐버린 방어리(方於里)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취지로 방어리(方魚里)로 부르다가 지난 2005년 마을 주민들이 마을 이름을 신라조(新羅朝) 때의 본래 이름으로 환원해 줄 것을 경주시에 요청하여 다시 ‘방어리(防禦里)’로 변경되었다.
구어리는 주로 잠업(蠶業)으로 농가의 수입을 올렸으나 양잠 불경기, 일손부족 등으로 소득이 줄어들다가 이제는 이마저도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
‘구어리(九魚里)’는 ‘구역’, ‘들밑’, ‘어령’이 구어1리를 이루고, ‘송계’, ‘구어장테(웃마을)’, ‘별미’가 구어2리를 이루고 있다.
구어1리는 2008년 9월 현재 175세대 413명이 살고 있고, 구어2리는 492세대 1천303명인데 토박이 주민들은 120가구 정도 밖에 안 된다.
벽산천마타운의 경우 대부분 직장인들이 입주해 있는데 321세대 934명이 살고 있다. 구어리는 농가가 약 50%정도 되고, 나머지는 직장인들이 입주해 있다. 벽산아파트를 포함하면 농가비율은 약 30% 미만이다.
구어리의 풍경
2008년 현재 구어리의 농가는 주로 벼농사에 의존하고 있고, 배(3천여평), 사과(1만3천여평), 정구지(2천여평), 딸기(2천500평), 한우(900두) 등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구어리에는 또 장학회를 설립하여 해마다 4~5명씩의 학생들에게 1인당 50만 원정도 씩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2000년에 설립한 이 장학회는 입주업체와 뜻있는 주민들의 참여로 현재 3천만원정도의 기금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구어리는 입주한 기업체와 자매 결연을 맺어 서로 교류해 오고 있는데, 구어1리는 ‘동해금속’과 2000년대 초부터 자매결연을 맺었고, 구어2리는 ‘다스’와 2008년 초에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구어리의 자연부락과 주요 지형지물, 명소들을 둘러본다.
구어리 풍경
구역(九驛)
‘구어’의 중심이 되는 마을로 역촌이 있던 마을이라 ‘구어역’, ‘구역(九易)’, ‘역촌(驛村)’이라고도 한다. ‘들밑’ 동쪽에 있다.
들밑
마을이 들 아래쪽에 위치하므로 ‘들밑’또는 ‘덜밑’이라 불렀다고 한다. ‘구어’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어령(魚泳)
‘구역’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지형이 마치 물고기가 노는 연못처럼 생겼다고 하여 ‘어영(魚泳)’이라 불렀다고 하며, ‘어렁골’, ‘어룡골’이라고도 한다.
송계(松溪)
‘구역’ 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소나무 숲과 거랑(개울, 하천)이 있던 곳에 마을이 생겨 ‘송계’라고 부른다. 모화리와 입실리 사이에 있다고 해서 ‘중말’이라고도 했다.
구어리 공단
구어장테
옛날 ‘구어장’이 서던 곳에 있는 마을로 ‘웃마을’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벽산아파트가 들어선 서북쪽 마을이다.
옛적 이곳에 있던 ‘구어장’은 1921년 6월, 이 마을에 소재하던 외동주재소(파출소)가 연안리에서 이전한 당시의 외동면사무소를 따라 입실리(入室里)로 이전하면서 폐장(閉場)되었다.
매월 끝자리 수가 3과 8로 되어 있는 날에 개장(開場)하던 ‘구어장’의 개장날짜는 지금도 ‘입실장’의 개장날짜로 정해져 있다.
구어리 벽산아파트
별미
별처럼 생긴 산에 묘가 있어서 ‘별미(묘)’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말하는 ‘별미’의 ‘미’는 표준어로 ‘묘(墓)’라는 말이다.
덕방재(德芳齎)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덕방(德芳) 이일신(李日新)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구어리 ‘들밑’에 건립한 재사(齋舍)이다. 그 후손 중에는 삼성그룹을 창업한 고 이병철 회장 일가가 있다.
구어리덕방재
숭모제(崇慕齊)
청안이씨 청평군 이기(李基)의 차자인 성균관 진사 흥방(興邦)과 배위(配位) 오천정씨의 분묘를 수호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齋室)이다. 1700년대에 건립하여 여러 차례 중수(重修)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배위(配位)’란 부부가 다 죽었을 때, 그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로 妃匹(비필)이라고도 한다. 보첩(譜牒 ; 족보)에는 ‘配’라고만 기록하고, 본관(本貫)과 성씨(姓氏)와 4조(四祖 : 부, 모, 증조, 외조)만을 기록하고 배위(配位)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는다.
구어리 풍경
이러한 풍속은 남존여비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유교사상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반드시, 그리고 신속히 개선되어야 할 사항이다.
참고로 필자가 필자의 현조부모에서 손자손녀에게 이르는 ‘신판 족보’에는 작고하신 분은 물론 모든 여성(현조모님에서 손녀까지, 왕대고모님을 비롯한 모든 출가외인)의 이름을 빠짐없이 등재하고 있다.
구어리
남안제(南岸齊)
청안이씨 성균관 진사 흥방(興邦)의 차차 충순공(忠順公) 의심(宜甚)의 분묘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齋室)이다.
백일산(白日山)
옛날에 헐벗은 민둥산으로 하얗게 보였다고 하여 ‘백일산(白日山)’이라고 했다. 사방사업이후 산이 우거졌다. 마을 동쪽에 있는 산으로 동대산 서쪽 자락이다.
구어리 풍경
봉수산
‘송계’ 동쪽에 있는 산으로 동대산 서쪽 자락에 있는 지령(支嶺)이다. 현재 ‘송계사’가 있는 산이다.
고잔미
고려장(高麗葬)을 했었다고 하는 묘(墓)가 있는 산으로 ‘어령’ 서남쪽에 있다. ‘고잔미’의 ‘미’는 ‘묘(墓)’라는 말이다.
구어리 풍경
여기에서 말하는 ‘고려장(高麗葬)’이란 늙은 부모를 산속의 구덩이에 버려두었다가 죽은 뒤에 장례를 지냈다는 풍습으로 오늘날에도 늙고 쇠약한 부모를 낯선 곳에 유기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인다.
고려총(高麗塚), 고려산(高麗山), 고려곡(高麗谷), 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한다.
고려장
지난 1963년 당시 김기영 각본·감독의 흑백영화가 상영되기도 했었다. 줄거리를 잠시 소개한다.
계속되는 가뭄 때문에 굶주림에 허덕이는 마을에서 원시적 생활을 영위하면서 미신에 얽매여 사는 그 마을에는 무당(巫堂)이 절대자(絶對者)로 군림(君臨)하고 있다.
또한 그 마을에서는 사람의 나이 70만 되면 산 채로 업어다 버리는 폐습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폐습이라기보다는 워낙 식량난에 봉착한 그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하나의 계율이었다.
이 엄한 계율과 효심의 틈바귀 속에서 방황하는 우유부단(優柔不斷)한 김진규는 어머니를 산골짜기에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지고 갔던 지게를 내어 던진다.
영화 고려장
그런데 함께 따라갔던 그의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다시 주워 다 어깨에 걸쳐 메고 온다.
아버지가 지게를 버리라고 얘기하자 어린 아들은 이렇게 아버지에게 말한다. “아버지도 70이 되면 이 지게로 제가 업어다 버려야 하니까요…….”
섶갓
‘어령’ 서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섶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섶’은 잎이 붙어 있는 땔나무나 잡목의 잔가지와 잡풀 따위를 말린 땔나무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섶나무
‘섶갓’의 ‘갓’은 나무나 풀 따위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하여 가꾸는 땅이나 산을 말하는데, 주로 사유림(私有林)을 말하지만, 특별한 기준이 없이 사용된다. 필자의 향리인 괘릉리의 원성왕릉이 있는 산은 ‘능갓’이라고 한다.
진등대
‘질매재’ 서쪽에 있는 긴 등성이다. ‘구어’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진등대’의 ‘진’은 ‘길다’라는 뜻의 ‘긴’이라는 말이다. ‘등대’는 ‘등때’라고도 하는데, ‘등성이’ 또는 ‘산등성이’를 말한다.
“하이골 ‘등때’에 밭 띠제가 깨 선나 숭가 논 기이 가문사리가 들어가 모도 말러 죽어삤다”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하이골(괘릉리 동산령) 등성이에 밭 일구어서 참깨 얼마 심어놓은 것이 가뭄이 들어 모두 말라 죽어버렸다”는 말이다.
등대(등성이)
큰뻔데기
‘들밑’마을 뒷산에 있는 큰 ‘버덩’을 말한다. 위에서 말한 ‘뻔디기’는 우리 고향 사투리로 좀 높고 평평하며 나무는 없이 풀만 우거진 거친 들, 즉 표준어 ‘버덩’을 말한다.
냉이뻔데기
‘들밑’마을 뒷산에 있는 ‘버덩’이다.
구어리 풍경
삼탯고개
‘어령’의 서남쪽에서 석계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찬냇고개
‘들밑’ 서북쪽에서 냉천리 ‘찬내’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구엇골
‘구어’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기엇골’이라고도 한다.
구어리
나만정
‘어령’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청한이씨 재실(齋室)이름이 ‘나만정’이었다.
못안골
‘어령’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못(저수지)이 있는 안쪽 골짜기이다.
질매재
‘들밑’ 서북쪽에 지형이 ‘길마’처럼 생긴 등성이다. ‘길마’는 짐을 싣거나 달구지를 채울 수 있도록 말이나 소의 등에 얹는 운반구로 우리 고향에서는 이를 ‘질매’라고 한다.
길 마
쇠짓골
송이버섯이 많이 났다고 하는 골짜기로 ‘송계’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쇠짓골’의 ‘쇠’는 표준어로 송이버섯을 말한다.
도독골
‘송수막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주막이 있던 곳이어서 도둑이 많았다고 한다. ‘도독’은 표준어로 ‘도둑’이라는 말이다.
구어리
석밭골
‘송계’ 동쪽 골짜기로 돌이 많은 골짜기이다. ‘석밭’은 ‘돌밭’이라는 뜻이다.
머구밭골
‘송계’ 동쪽 골짜기로 ‘머위’가 많이 나는 골짜기로 ‘송계사’ 뒤 골짜기이다. 외동사투리 ‘머구’는 표준어 ‘머위’를 말하는데, ‘머위’는 국화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잎자루는 산채(山菜)로써 식용되고, 꽃 이삭은 식용(食用)하거나 기침약으로 사용한다.
머 위
업은골
‘송계’ 동쪽에 ‘백일사’ 절이 있는 골짜기이다.
북바우
마치 ‘북’처럼 생긴 바위로 ‘들밑’ 서북쪽 ‘새악들’에 있다.
탕관바우
‘탕관(탕건’처럼 생긴 바위로 송계 동쪽에 있다. 30여 년 전에 개간하여 과수원이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탕관’이란 국을 끓이거나 약을 달이는 데 쓰이는 작은 그릇을 말하기도 하나, 외동사투리로는 ‘탕건(宕巾)’을 이르는 말로 주로 쓰인다.
탕 건
탕건(宕巾)은 예전에 벼슬아치가 갓 아래 받쳐 쓰던 관(冠)으로 말총을 잘게 세워서 앞은 낮고 뒤는 높아 턱이 지도록 만든다.
약을 달이는 탕관(湯罐)은 주로 약탕관(藥湯罐)이라고 하는데, 쇠붙이나 오지 따위로 만들며, 손잡이가 있다.
약탕관
연자바우
‘백일산’ 정상에 있는 ‘연자방아’처럼 생긴 바위로 크기가 수 십 미터에 이르는 큰 바위이다. 연자방아는 ‘연자매’라고도 하는데, 돌로 만든 방아의 하나로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은 것으로,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거나 빻는다.
농기구 중의 하나인 연자방아는 알곡 및 가루를 내는 도구로 윗돌의 중심에 구멍을 뚫고 나무막대를 가로질러서 소의 멍에에 고정시키면, 소가 돌면서 돌을 돌리게 된다.
연자방아
돌은 요철(凹凸)로 만들어져서 집어넣은 곡식이 돌아가는 돌의 압력에 눌려 으깨지면서 껍질이 벗겨지거나 가루가 나오도록 되어 있는데, 보통 소를 모는 사람과 곡식을 쓿어 넣는 사람 등 2명 정도가 있어야 작업이 가능하다.
화전바위
‘송계사’ 북서쪽에 있는 큰 바위로 옛날에 ‘화전놀이’를 하던 바위다.
당앞들
옛날 ‘서낭당’의 앞에 있는 들로 ‘어령’ 동쪽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서낭당’이란 ‘서낭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집을 말한다.
‘서낭당’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선왕당․천왕당․국수당․국시당 등으로 불리며 한자로 표기하여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한다.
서낭당
‘서낭당’은 보통 마을 어귀나 고갯마루에 원뿔 모양으로 쌓은 돌무더기와 마을에서 신성시되는 나무(神樹) 또는 장승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형식은 5색 헝겊을 걸어놓은 서낭나무와 돌무더기를 쌓아놓은 누석단(累石壇)이 결합된 것이 일반적이다.
벗만리
‘어령’ 동쪽에 있는 들로 ‘봇몰리’라고도 한다. ‘구어’에서 제일 큰 들이다. 흔히 ‘구어들’이라 하면, 이 들판을 말한다.
구어들
새악들
‘들밑’ 서쪽에 있는 들판을 말한다.
시골
‘구역’ 서북쪽에 있는 들판을 말한다.
줄밭들
‘줄풀’이 많았던 들로 ‘구역’ 남쪽에 있다. ‘줄풀’은 표준어로 볏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이다. 열매는 영과(穎果)를 맺으며 식용한다. 잎은 우장(雨裝)이나 자리를 만드는데, 못(저수지)이나 물가에 나며, 우리나라와 중국․일본․시베리아 동부 등지에 분포한다.
줄 풀
여기에서 말하는 ‘우장(雨裝)’은 ‘도롱이’를 말하는데, ‘도롱이’는 짚이나 줄풀, 띠 따위를 엮어 만든 옛 우비(雨備)의 하나로 예전에 주로 농촌에서 일할 때 비가 오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던 것으로 안쪽은 엮고 겉은 줄거리로 드리워 끝이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필자들이 어린 시절에는 아이들의 경우 비가 오면,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신 우장(도롱이)을 입고 쇠풀을 베거나, 소를 몰고 야산으로 나가 ‘소맥이기’를 하곤 했었다. 외동읍 북부지방 우장은 주로 짚으로 엮어 만들었다.
우장(도롱이)
태평봇 들
‘태평보’의 물을 받아 농사를 짓는 들로 ‘구역’ 동북쪽에 있다.
새들
‘송계’ 서쪽에 있는 새로 생긴 들판을 말한다.
외꼬지
‘송계’ 북쪽에 있는 들로 지금의 ‘만남의 광장’ 앞에 있는 들판을 말한다.
구어리 마을회관
정지말들
‘구어장테(구어장터)’ 동쪽에 있는 들로 만남의 광장 북쪽에 있다.
덕방못
‘들밑’ 뒤에 있는 저수지(貯水池)로, ‘덕방지(德方池)’, ‘덕방제(德方堤)’라고도 한다. 못이 터져 ‘터진못’으로도 불렀는데, 광복 후 다시 막았다.
여기에서 말하는 ‘못’은 넓고 깊게 팬 땅에 늘 물이 괴어 있는 곳으로 웅덩이보다 크고 늪보다 작은 저수지(貯水池)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저수지를 이르는 말이다.
덕방못(德方池)
‘덕방지’는 산골짜기에 위치하여 수심이 깊은 저수지인데, 조용한 시골마을 저수지가 이제는 ‘덕방낚시터’라는 이름의 유료낚시터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주어종(主魚種)은 붕어라고 한다.
산세(山勢)의 풍광(風光)에 가려 시원함을 느끼게 해주는 이 낚시터에는 현재 85개의 좌대(座臺)가 설치되어 있고, 12시간 기준으로 입어료(入魚料)는 2만원이며, 식당과 수면실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 저수지 또한 양어장이 되어 버린 듯하다고 한다.
삼태지(三台池)
‘삼탯고개’ 밑에 있는 못(저수지)을 말한다.
새악못
‘덩방못’ 서쪽에 ‘새악들’에 있는 못을 말한다.
송계못
‘송계’ 동쪽에 있는 못을 말한다.
구어리 풍경
해방못
‘새악못’ 남쪽에 있는 못으로 ‘해방지(解防池)’라고도 한다.
고짓보
‘들밑’ 앞에 있는 보(洑)를 말한다. 보(洑)는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둑을 쌓고 냇물을 끌어들이는 곳을 말한다.
보(洑)
모산보
‘들밑’ 앞에 있는 보(洑)를 말한다.
목너멧보
‘중보’ 북쪽 길목 너머에 있는 보(洑)를 말한다.
새악보
새악들에 물을 대는 보(洑)로 지금은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줄밭보
‘줄밭들’에 물을 대는 보(洑)로 지금은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구어리 기업은행 지점 준공식
중보(中洑)
‘모산보’ 아래에 있는 보(洑)로 지금은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정지말보
‘정지말들’에 물을 대는 보(洑)를 말한다.
새들보
‘동천거랑(우박천)’에서 ‘새들’에 물을 대는 보(洑)를 말한다.
구어리 풍경
태평보(太平洑)
‘태평봇들’에 있는 보(洑)로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 외동읍에서 제일 좋은 보(洑)로 이름이 나있다.
홈걸보
물을 대는 홈통이 있었던 보(洑)로 송계 앞에 있다. ‘홈거릿보’라고도 하는데, 지금은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구어리 부산은행지점 개점식
구어역(九於驛)터
옛날 영남좌로(嶺南左路 ; ‘嶺南左道’라고도 함)의 역참(驛站)이었던 ‘구어역’이 있었던 곳으로 ‘관거리’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영남좌로(嶺南左路)’란 조선시대 때 한양(漢陽 ; 서울)에서 전국으로 연결된 9개 대로(大路) 가운데, 서울에서 보면 왼쪽인 봉화삼로로 통하는 양주, 광주, 여주, 충주와 단양을 거쳐 죽령을 넘어서 경상좌도의 도시들인 풍기, 영주, 안동, 의성, 의흥, 신령, 영천, 경주(불국사→방어리→제내리→냉천리→구어리→모화리), 울산, 기장, 동래로 연결되는 길을 말한다.
영남좌우로
당시의 ‘영남좌로’는 주로 영남 동부지역의 선비들이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상경(上京)하던 길이었고, 일본으로 도일(渡日)하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士)들과 영남지방으로 임명된 지방관(地方官)들의 부임과 귀환을 위한 통로였다.
그리고 ‘역참(驛站)’이란 조선 시대, 관원이 공무로 다닐 때에 숙식을 제공하고 빈객(賓客)을 접대하기 위하여 각 주(州)와 현(縣)에 둔 객사(客舍)를 말하는데, 구어리에 이 ‘역참’이 있었다.
영지초등학교 옆 영남좌로
한편 영남우로(嶺南右路)는 영남좌로 만큼 널리 알려진 길은 아니지만, 낙동강 서편의 경상우도(慶尙右道)선비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다니던 길이었다.
이 길은 왜인(倭人)들과의 교역을 위해 개방한 삼포(三浦) 가운데 한 곳인 제포(薺浦)에서 서울로 상경하던 왜사(倭使)들이 주로 이용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삼포(三浦)란 조선 시대, 왜인에 대한 회유책으로 개항한 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울산의 염포(鹽浦)를 말한다.
그 시절 부산포
(앞에 보이는 섬이 지금의 영도섬이다)
그리고 제포(薺浦)는 왜인에게 개항해 준 삼포(三浦)의 하나로 지금의 경상남도 진해시 부근에 있었던 포구를 말하며, 왜사(倭使)는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보내던 사신을 말한다.
그러나 이렇듯 ‘벼슬길’이기도 했고, 그 벼슬을 얻은 자들이 왕래하던 영남좌우로(嶺南左右路)는 1592년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1597년의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왜놈들이 우리나라를 침공한 침략자(侵略者)의 길이 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이들 침략자들에 의해 강토를 유린당한 우리의 선조들은 그 시절 영남좌로(嶺南左路)의 길목마다 진을 치고, 그들 왜놈들을 몰살시키기도 했고, 왕성인 한양(漢陽)에의 접근을 그만큼 지체시키기도 했었다.
영남좌로 전투
원원사 일대를 무대로 한 ‘모화전투(毛火戰鬪)’에서 그랬고, 영지저수지와 방어리 ‘못밑’마을을 무대로 한 ‘영지전투(影池戰鬪)’에서 그랬다. ‘경주읍성전투’와 ‘영천전투’도 모두 영남좌로(嶺南左路)에서 전개한 전투들이었다.
그러나 왜적(倭敵)에 의한 영남좌로의 유린은 이때만이 아니었다. 지난 1910년부터는 그 왜놈들의 후손인 일본군(日本軍)이 우리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점령하고, 민족의 얼이 깃든 이 영남좌로(嶺南左路)를 수탈과 강제노동, 정절과 민족혼(民族魂)을 유린하는 길로 악용하기도 했었다.
경주터미널-구어리행 시내버스
관거리(冠巨里)
‘구어역’이 있던 곳으로 지금의 만남의 광장 북쪽의 건널목 부근이다. 입실리와의 경계지점이다.
구어장(九於場)터
‘구어’ 동북쪽에 있는 ‘구어장’의 터다. 매월 끝자리수가 3과 8이 되는 날에 장이 섰다. 이곳이 본래 외동주재소(외동지서) 소재지였다. 현재 벽산아파트 서북쪽이다.
구어리 풍경
송수막이
‘송계’ 남쪽에 있는 옛길에 소나무 주막이 있었던 곳으로 ‘송수맥이’라고도 한다.
구어교(九魚橋)
1990년 외동읍 구어리(九魚里) 국도 7호선 구간에 건립된 교량으로 다리 길이 24m, 너비 18m, 높이4m이며, 2경간(徑間)에 최대 경간길이 12m이다.
구어교
여기에서의 ‘경간(徑間)’이란 교량(橋梁), 건물, 전주(電柱) 따위의 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그 사이의 거리를 말한다.
구어교(九魚橋)는 RC(Rahmen Bridge ; 라멘교) 형식으로 상부가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라멘교는 다리의 ‘도리’와 교각(橋脚)이 연속으로 단단하게 이어진 구조의 다리로 철근 콘크리트 다리나, 철도의 고가선(高架線) 따위에 이용된다.
라멘교
여기에서 말하는 ‘도리’는 집이나 다리 따위를 세울 때, 들보와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을 건너서 위에 얹는 나무를 말한다.
구어교(九魚橋)는 7번 국도에서 외동읍 소재지 입실리(入室里)로 통하는 삼거리 상에 위치하여 주변에 주유소와 공장이 많으며, 옆으로 동해남부선(東海南部線)이 지나간다.
구어리 공단
구어리 공단
구어리에는 앞서 소개한 대로 1987년부터 1988년까지 10만 9천㎡에 조성한 농공단지를 시작으로 현재 다스, 동해금속, 디에스씨, 태광공업 등 115개 업체가 이 마을에 입주해 있다.
---------------------------------------------
1998년 외동읍(外東邑) 구어리(九魚里)에서 서기 3세기말에서 4세기 초까지 경주 외곽지역에 강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엿보게 하는 고분군(古墳群)이 발굴된바 있다.
이 고분군은 당시의 경우 경제력과 군사력의 상징인 철이 대량으로 부장되어 있어 사로국(斯盧國)이 신라(新羅)로 발전해가던 시기의 경주지역 역사를 이해하는데 귀중한 유적으로 학계에서 평가하고 있다.
이 고분을 발굴한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은 구어리 556-1 일대 주택공사(住宅工事) 현장에서 철(鐵)을 대량으로 부장(副葬)한 덧널무덤(木槨墓)과 부장품을 묻은 부곽(副槨)과 유물 1백50여점 등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덧널 무덤 구조
여기에서 말하는 부곽(副槨)이란 한 무덤 안의 으뜸 덧널에 딸린 ‘덧널’로 대개 패물이나 그릇 따위의 부장품을 넣어 두는 곳이다. 그리고 ‘덧널’이란 ‘관(棺)’을 담기 위해 나무로 네모지게 짠 것을 말한다.
발굴된 무덤 중 길이 6.2m, 너비 3.4m짜리 목곽묘(木槨墓)는 내부를 한 번 더 파서 이중구조로 묘(墓)를 만든 뒤 시신(屍身)을 안치했다.
이곳에서 철도끼 40여점, 철창 40여점, 철정(鐵釘 : 쇳덩어리로 이를 가공해 철기를 만든다) 20여점 등 모두 1백여 점의 철제품이 발굴되었다.
덧널 무덤
황남대총 등 서기 4∼5세기 경주 왕릉급 고분을 빼고는 이처럼 다양한 철제품이 대량 출토된 무덤은 없었다. 서기 4∼5세기 부산(釜山) 복천동고분이나 합천(陜川) 옥전고분, 경주 구정동(九政洞) 고분에서도 철도끼나 철창(鐵槍), 철정(鐵釘) 등이 발굴됐지만, 대개 한 종류씩만 출토됐으며, 규모도 이보다 적었다.
이 목곽묘(木槨墓)의 부장품을 묻기 위해 서쪽에 만든 부곽(副槨)에서는 긴 철판을 연결시켜 만든 갑옷인 판갑 등 철갑옷 2점 등이 발굴되었다.
외동읍 구어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토기
이 고분군(古墳群)에서는 서기 6세기까지의 무덤이 출토됐으며, 동일한 가계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굴단은 밝혔다.
학계는 “서기 3세기말 경주 외곽지역에서 영남권(嶺南圈)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철제유물이 무덤에 묻혔다는 것은 진한(辰韓)-변한권(弁韓圈)에서 경주지역이 이른 시기부터 앞서 나갔음을 입증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외동읍 구어리
이 고분군이 발견된 동기는 1998년 1월 9일 경주시(慶州市) 문화예술과(文化藝術課) 직원이 조사지역 인근의 복합민원 확인차 현지에 출장하던 중 우연히 유적(遺蹟)이 훼손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부터다.
이 후 경주시 당국에서는 국립경주박물관 직원을 대동하여 재차 현장 확인을 실시하였고,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은 고분군(古墳群)의 정확한 훼손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동 연구원의 조사지역은 구어리(九魚里) 마을의 남쪽 편 야트막한 구릉으로 경주유적지도에 의하면 ‘구어리(九魚里) 고분군(古墳群) 1’로 표기된 곳으로, 당시 이곳에는 건설업자가 단독주택(11가구)을 신축하고자 공사를 진행하던 중이었다.
외동읍 구어리 고분군 발굴현장
이 주택공사로 석실분(石室墳) 1기와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1기가 절개되는 등 유적의 상당부분이 결실되었다. 당국에서 사전 현장조사도 없이 주택건설을 허가해 줬기 때문이었다.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은 1998년 4월부터 8월까지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목곽묘(木槨墓) 및 적석목곽묘 등 고분(古墳) 42기와 가마 2기 등 총 44기의 유구와 다량의 유물을 발굴하였다.
이들 유물의 발굴과 더불어 필자의 생각도 학계의 견해와 같이 신라(新羅) 건국초기 전국에서 가장 강대한 정치세력의 하나가 외동읍(外東邑) 지역에 분명히 존재했다고 본다.
외동읍 구어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토기
그리고 필자만의 지나친 비약인지는 모르나, 어쩌면 BC 1세기에서 AD 3세기까지 발흥했던 진한(辰韓) 12소국(小國)중의 하나가 외동읍지역에 존재한 것이 아닌가도 추정한다.
당시의 진한(辰韓) 12소국(小國)들은 큰 나라의 경우 4천~5천호의 규모가 되기도 했지만, 작은 나라는 6백~7백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의 외동읍(外東邑) 구어리(九魚里)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이들 소국(小國)의 하나가 창설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동읍 구어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토기
물론 진한(辰韓) 12소국 중의 하나가 신라(新羅)의 전신인 사로국(斯盧國)이었고, 우리들의 외동읍 지역이 그 사로국의 경내에 편입되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지금의 구어리(九魚里)를 중심으로 하는 외동읍 일원에 하나의 독립적 국가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을 가져보는 것이다. 망상(妄想) 보다는 고고한 향토애(鄕土愛)로 이해되기를 기대한다.
어쨌든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 지역은 진한(辰韓) 시대였든, 신라(新羅) 건국초기였던 하나의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본다.
외동읍 구어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토기
--------------------------------------------
구어리(九魚里)의 주요 출향인사로는 김규재씨(전 안동시장), 남호경씨(한우협회 회장), 남재호씨(전 선덕여상 교장), 김진규씨(주)세창 대표), 오영중씨(사법연수원), 조학렬씨(미국 공학박사), 김청수씨(서울 서초경찰서), 오영표씨(서울 변호사) 등이 있다.
이들 외에도 포항시 구룡포종합고등학교 교장에 재임하고 있는 김진권씨(金鎭權), 석계초등학교(25회)와 외동중학교(27회)를 졸업하고, 국방부장관 정책보좌관을 거쳐 현재 공군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김재권(金載權) 대령, 부산지방국세청 조사2국에 근무하고 있는 김한권씨(金漢權), 울산에서 학원을 경영하는 김병권씨(金柄權) 등이 있다.
구어리 정미소
그리고 현재 국정원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임만혁(任萬赫)씨, 외동중학교 제15회 졸업생으로 경주문화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한 최병두(崔炳斗)씨도 ‘어영’ 출신이다.
구어리(九魚里)는 또 남구봉(南九峰) 시인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본명을 ‘기진(基鎭)’이라 하는 남구봉은 1934년, 당시의 경북 월성군(月城郡) 외동면(外東面) 구어리(九於里)에서 출생하였다.
남구봉 시인
동국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후 1958년, ‘자유문학(自由文學)’에 ‘향리점묘(鄕里點描)’ · ‘어느 배리(背理)된 시점(時點)에서’ · ‘묘비명(墓碑銘)’ 등이 추천되었다.
주요 작품에는 ‘세대론서(世代論序)’ ‘형상(形象)’ ‘로타리 사면(斜面)’ ‘너가 간 가을에’ ‘눈’ 등이 있으며,〈현실(現實)〉의 동인이다. 여기에서 남구봉이 쓴 ‘너가 간 가을에’를 게재하여 음미해 본다.
너가 간 가을에
남구봉(南九峰)
발밑에 구르는 낙엽을 본다.
새파란 하늘을 본다.
온통 출렁이는 숨소리를 듣는다.
마침내 잃어버린 기억을
오한(惡寒) 같은 불빛이 시늉을 하는데
청신한 나프탈린의 후각을 느낀다.
<시그널은 시인의 눈동자인가요?>
<아니, 당신은 현기증을 일으키는구료>
너가 간 길머리에서
해바라기를 안다는 것. 얼마나 외로운
인생의 순교자인가를 되뇌어 본다.
저기 뉘라도 창문을 열자
아무 거리(距離)도 회화(會話)도 없이, 이렇게
낙엽을 안고 다소곳이 달빛에 서면
발밑에 구르는 낙엽이 있다.
새파란 하늘이 있다.
온통 출렁이는 숨결이 있다.
|
배경음악은 다른 부락의 경우와 같이 이미자(李美子)의 ‘고향의 봄’을 선곡(選曲)하여 음미하고자 한다.
고향의 봄
작사 : 이미자
작곡 : 이미자
편곡 : 박경호
흑난초 곱게 피는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찾아와서 집을 짓겠지
내 어이 고향 두고 타향을 왔나
그리워서 불러보고 눈물을 짓는
정든 고향 찾아가자 꽃피는 고향
흑난초 눈에 어린 고향에 봄은
강남제비 돌아와서 피었으련만
천리타향 머나먼 곳 내 어이 왔던가.
오늘 밤도 잠 못 들어 밤을 지새는
정든 고향 나는 가리 꽃 피는 고향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