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zz 에세이 (23) - Jazz, 책으로도 만날 수 있다.7회 / STAN GETZ...색소폰의 "The Sound"
재즈 에세이의 주 텍스트인 "ALL MUSIC GUIDE TO JAZZ" 라는 책의 에세이 부분을 여전히 참고로 하겠습니다.
Stan Getz 거의 충동적으로 날 휘몰아가던, 그리고 때로(사실은 거의 언제나) 내 인생의 나머지 모든 것을 소비시키는, 긴장된 내부의 원천에 의해 내몰리며 살아왔다. a taut inner spring which has propelled me to almost compulsively reach for perfection in music, often-- in fact, mostly-- at the expense of everything else in my life." - Stan Getz 연주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결코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색소폰으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He made the [sax] sing in a way that nobody did." - Bill Clinton
아마도 여러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스탄 게츠에 대한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으신 분이 계실까요? 한국 경제에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대고 어디선가는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리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들려올 때 이 나라에서는 재즈 열풍이라는 게 불어대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90년대 초중반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때는 온통 재즈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돌아다녀서 화장품 이름에도 재즈, 티브이 드라마 이름에도 재즈, 소설 제목에도 재즈가 넘나들던 시절이었지요. 대학가와 유흥가에도 재즈 카페라는 것이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이 열풍을 타고 몇몇 사람들은 재즈 평론가라는 직함을 자신의 명함에 찍어댈 수도 있었습니다.
록 음악이, 1만 달러가 넘어가면 재즈가 유행한다는.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거품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터지고 우리의 국민소득이라는 것이 1만 달러를 훨씬 밑돌게 되자 재즈 열풍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리고 그 많던 재즈 카페들도 소리소문 없이 문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즈는 얼핏 듣기에 그 어떤 음악보다 모던하며 세련되고 그러면서도 느긋한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음악입니다. 맞습니다. 재즈는 흔히 경제적 여유를 지닌 사람들의 음악처럼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재즈에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인생의 본질을 통찰하는 그 무엇! 단순히 시간 때우기 식의 여흥과 돈 많은 사람들의 호사취미를 드러내는 수단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바로 이 스탄 게츠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의 보사노바는 지금도 여름만 되면 때도 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나 다 아실 '이파니마에서 온 소너'는 지침 없이 우리들의 귓가로 걸어오고는 하지요. 그는 흔히 이렇게 흥겹고 편안한 보사노바와 함께 동의어로 기억되고는 합니다. 그의 연주는 늘 편안하고 여유로우며 '재즈란 바로 이런 것' 이라는 인식을 퍼트리는 측면도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지요. 그는 누구보다 뛰어난 비밥 연주자였으며 몇 개의 보사노바 음반의 대히트가 그를 최정상의 인기인으로 만들었어도 그는 보사노바를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적 길을 쉼 없이 걸어온, 진정으로 위대한 재즈 뮤지션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어릴 적 그가 살던 동네가 그저 가난과 폭력을 빼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사실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으며 그 동네를 벗어나기 위해 15살의 나이에 학교를 뛰쳐나왔던 과거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한창 시절엔 술과 마약에 빠져 도피하듯 유럽으로 건너가기도 했으며 마약은, 쳇 베이커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그의 인생을 유령처럼 쫓아다니고는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진정한 재즈 연주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때의 연주 스타일에 머뭇거리지 안고 안주하지 않으며 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것. 그는 누구보다 그 길을 열심히 살았던 뮤지션이었으며 우리들이 영원히 기억해야할 뮤시션인 것입니다. 첫 출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0년대 초반에 그의 보사노바 앨범이 집중적으로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와 함께한 'JAZZ SAMA'와 아스트루드 질베르토의 청초한 듯 하면서도 요염한 목소리가 인상적인 'GETZ/GILBERTO' 앨범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둘다 라이센스로 나와 있어서 구하기가 어렵지도 않을 거에요. 이 둘이 싫다면 좀 크다싶은 레코드 점에 가서 스탄 게츠 코너를 살펴보아도 좋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매장이 그의 보사노바 음반들로 채워져있을 것입니다. 여유로우며 은근한 흥겨움을 지닌 음악으로 탈바꿈한 것입니다. 보사노바의 뜻이 아마 새로운 물결이라는 뜻이라지요. 뿐만 아니라 재즈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뮤지션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기타리스트 찰리 버드와 함께한,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이 작곡한 히트곡 'Desafinado'가 수록된, 1962년 앨범 "Jazz Samba", 그리고 그 후속탄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트루드 질베르토가 노래를 불러 히트한 'The Girl From Ipanema'가 수록된 "Getz/Gilberto" 앨범은 브라질의 보사노바를 영원히 재즈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스탄 캔튼, 베니 굿맨 등 빅 밴드 리더들과의 훌륭한 연주는 그를 우디 허먼 악단으로 이끌어 이 밴드에서 색소폰 파트의 Zoot Sims, Serge Chaloff 그리고 Herbie Steward와 함께 "Four Brothers"로 불리게 된다. 1948년 허먼 밴드에서의 "Early Autum" 녹음에서 보여준 놀랄만한 솔로 연주는 그를 뛰어난 솔로연주자로 인식시키는 것이었다. 비브라토가 없는(yearning, ethereal, vibratoless),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광범위한 호소력을 주는 스윙과 비밥의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게츠는 결코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에 코드 체인지를 개입시키지 않았으며 이것은 좀 더 맹목적으로 코드의 변화를 중요시하던 하드 밥 연주자들과 그를 뚜렷이 구별시켜 주는 것이었다. 덴마크에서 반쯤은 은퇴한 상태로 살았다. 수년간 이 색소폰 연주자는, 후에 큰 족적을 남기는 칙 코리아, 조안 브래킨, 스티브 스왈로 그리고 게리 버튼과 같은 뛰어난 뮤지션들을 고용해 녹음을 했다. 칙 코리아와의 1972년 앨범 Captain Marvel, 1977년 피아니스트 Jimmy Rowles와 함께한 The Peacocks 앨범은 오늘날 열성적인 팬들 사이에서 여전히 인기있는 앨범으로 남아있다. 그의 보사노바 앨범은 전세계에 걸쳐 지속적으로 새로운 팬들을 끌어들인다. 캘리포니아 말리부에서 사망하였다.
발췌 번역한 것이며 그나마도 제가 시간이 부족해 끝부분은 번역을 못했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 욕심을 부렸었는데 마무리를 못했습니다. 이해해 주시구요, 번역이 어색한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보시기에 분명한 사실만을 참고 삼아두신다고 생각하시면 편하실 것 같군요) 그들은 러시아를 떠났으며 유럽으로 갔다. 결국 그들은 런던에 다달아 일년 동안 Whitechapel에 살았고 미국으로 건너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양복 수선공 일을 했다. 다행히 그들은 타이타닉 호를 타지 않아서 결국 대서양을 건너 루이지애나에 다다를 수 있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가족의 성은 Gayetzki에서 Getz로 바뀌었다. 그리고 스탄은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가족은 뉴욕에 정착하였다. 그는 회상하기를 그의 가족이 살았던 지역은 "폭력과 가난을 빼고는 아무것도 없던" 곳이었으며 "그 거리를 벗어나기 위해서 음악을 연주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아버지가 사다준 중고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였다. 15의 나이에 그는 학교를 나와 가수 Dick 'Stinky' Rogers 밴드에 들어갔으나 결석학생 조사관에 발각되고 만다. 일년후 학교를 떠날 나이가 되었을 때 트럼본 연주자 Jack Teagarden은 스탄이 그의 밴드와 투어 연주를 할 수 있도록 보증서류를 제출하여 16의 나이에 그는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밴드 중에 하나와 연주하는 프로 음악인이 되었다.
그 후 그는 1947년 Woody Herman Orchestra에 참가하기 전까지 Stan Kenton, Jimmy Dorsey, 그리고 Benny Goodman 등이 이끄는 밴드와 연주를 했다. 2년 후 그는 솔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룹 리더로서 재즈 역사상 가장 빛나는 뮤지션 중에 한명이 되기에 이른다. 녹음은 1991년 3월 6일날 행해졌다. 이 47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위대한 음악적 유산을 후세에 남겼다. 정도로 발전되고 연마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족할 정도였다는 데 동의한다. 알토 색소폰의 음색과 닮아 있었지만 때로 소프라노 색소폰과 비슷한 소리를 내기도 했으며, 그러나 어느 순간에는 바리톤 색소폰의 목이 깊이 잠긴 소리, 심지어는 굉장한 폭발음(sonic boom-비행기가 음속을 돌파할 때 나는 폭발음)과 같은 소리를 낼 때도 있었다. 때로 그의 음색은 공기처럼 가벼웠으며 다시 목시 쉰듯한 소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색소폰 음색은 그 자신의 기분에 따라 극적으로 바뀌었지만 언제나 즉시 알아볼 수 있는 (그만의) 음색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삶의 경험이 확장될수록 그의 음색은 바뀌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수한 핵심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사용되는데 그것은 그의 스타일이 다른 어떤 테너 색소폰 연주자의 스타일보다 더 광범한 범위를 갖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의 스타일의 뿌리는 분명히 스윙 시대에 두고 있지만, 여러 스타일의 측면을 포괄하는 여러 방면으로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었다. 1945년 버전에는, 자신의 개인적 스타일이 분명했던 1949년 같은 곡의 라이브 레코딩에 비해, 그 영향이 분명히 두드러진다. 그러나 1946년 피아노의 행크 존스, 베이스의 컬리 러셀, 드럼의 맥스 로치가 포함된 콰르텟 연주는 덱스터 고든의 사운드와 같은 소리를 낸다. 이 세션은 녹음된 네 곡에서, 이 뛰어난 4인조의 실력을 확인시키며, 19의 나이에 뛰어난 연주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또한 흥미롭다.
그리고 그는 밥 운동의 아이디어들을 그의 경력의 초기에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흡수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놀랄만한 테크닉을 지닌 뛰어난 젊은 뮤지션이 여러 유명한 뮤지션의 영향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소화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겨루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레스터 영이 그에게 주요한 영향을 주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아마도 레스터 영이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시각은 게츠의 사운드가 콜맨 호킨스로부터 보다는 레스터 영에게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때문이겠는데, 그러나 후기에 더 분명히 두드러지는 벤 웹스터의 따뜻한 氣息音의 사운드를 추구했다는 것 이상이 있다. 실재로 게츠의 연주에서는 다른 많은 테너 색소폰 연주자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중 아무도 그의 연주의 긍극적인 모델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곳에 있다.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그들 중에서 특히, 재즈 신을 빛나게 한 가장 뛰어나고 개인주의적인 연주자들은 트럼본의 빌 해리스와 바리톤 색소폰의 Serge Chaloff였다. 유쾌하고, 굉장히 서정적이었으며, 환상적이고 그리고 비밥적인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는 "최고의 테크닉과 음역 그리고 인내를 축복처럼 부여받"았고 "음악적 취지의 통제는 그의 테크닉만큼이나 무서운 것이었다." 그는 압도적인 음악적 인성을 가지고 있었고 밴드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젊은 음악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허먼 허드와 함께한 그의 연주를 들어보고 다시 게츠의 연주를 들어보라.
그 영향력은 분명해진다. 트럼본은 색소폰과 매우 다른 악기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해리스가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사용한 음악적 장치와 테크닉은 젊은 섹소폰 연주자에게 벌써 흡수되어 있었다. 비브라토의 난폭한 사용, 극닥적이고 다이나믹한 대조, 빠르게 오르내르는 음정 그리고 조성의 왜곡은 모두 게츠의 감성적인 색소폰에 그대로 발견된다. "The Sound"라는 별칭으로 알려졌다. 초기에 주로 레스터 영에게서 영향 받은 게츠는 스스로 주요한 재즈 뮤지션으로 성장했고 스스로 (연주 스타일에 있어) 거듭된 발전을 보여주었다. 빅 밴드에서 연주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16세에 벌써 잭 티가든과 함께 연주했으며(1943) 그후 스탄 캔튼('44-45), 지미 도세이(1945), 베니 굿맨('45-46)의 밴드에서 연주를 하였다. 그는 그는 베니 굿맨과 몇 개의 레코드에서 솔로 연주를 행하기도 했다.
1946년 6월 최초로 리더로써 레코딩 데뷔를 한 그는 '47-49년의 우디 허먼의 Second Herb 밴드와의 작업으로 유명해졌는데 이 악단에서는 주트 심스, 허비 스튜어드, 서지 샬로프와 함께 'Four Brothers'로 불리었고 'Early Auyumn'과 같은 발라드 곡에서 아름다운 음색을 들려 주었다. 허먼 악단을 떠난 후 japt와의 몇 개의 투어연주를 제외하고는 너머지 일생 동안 리더로써 활동하였다. 뮤시션들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1950년에 호레이스 실버를 발굴하여 몇 개월간 자신의 콰르텟어세 함께 연주하였다. 1951년에 스웨덴 투어를 다녀온 후 그는 기타리스트 지미 레이니가 포함된 흥미로운 5인조(exciting quintet)을 구성한다. 엡 펨포의 곡과 발라드에서의 아름다운 음색이 혼합된 인터플레이(interplay)는 기억될만하다. 게츠의 연주는 조니 스미스의 앨범 'Moonlight in Vermont'의 히트에 도움을 주었고 1953-54년에는 밥 브룩마이어를 포함한 퀸텟을 구성한다. 50년대의 게츠는 마약 문제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인기투표 1위를 기록한다.
1958-60년을 유럽에서 보낸 후 이 테너 연주자는 미국으로 돌아왔고 그가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앨범 'Focus'를 편곡자 에디 사우터의 오케스트라와 녹음 한다. 그리고 나서 1962년 2월 찰리 버드와 'Jazz Samba'를 녹음함으로써 보사노바를 미국에 소개하는데 일조한다. 이 앨범의 수록곡 "Desafinado"의 큰 히트로 그 다음해 게츠는 주로 보사노바 풍의 앨범들을 (Gary McFarland's big band, Luiz Bonfa, Laurindo Almeidia 등과의 작업을 통해) 녹음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히트를 기록한 것은 (안토니오 카를로스 조빔과 조아오 질베르토와 작업한)'Getz/Gilberto'였다. 이 음반의 히트는 주로 Joao Gilberto와 그의 아내 Astrud Gilberto가 함께 녹음한 "The Girl From Ipanema" 때문이었다. 도전적인 재즈를 연주하는 걸 선택했다. 이 즈음의 그의 정기적인 밴드는 비브라폰 연주자 Gary Burton이 포함된, 피아노 없는 콰르텟이었지만 1964년에는 빌 에반스와 녹음하기도 했으며 1965년에는 Micky One라는 영화의 사운드 트랙을 Eddie Sauter와 함께 연주했고, 1967년에는 clr 코리아와 함께, 고전적인 앨범이 된 'Sweet Rain'을 녹음한다. '66-80년 사이에 스탄 게츠가 녹음한 모든 앨범이 다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기회를 잡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았다.(Although not all of Getz's recordings from the 1966-80 period are essential, he proved that he was not shy to take chances. 이게 무슨 뜻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레코드 사의 앨범 제작 제의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르간 연주자 Eddie Louiss와의 1971년 앨범 'Dynasty', 1972년 칙 코리아와의 앨범 'Captain Marvel', 1975년 Jimmy Rowles와의 앨범 'The Peacocks' 앨범은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1970년의 콰르텟에는 피아니스트 Joanne Brackeen을 기용하였지만 이 후 게츠는 피아노 대신 키보드 연주자 Andy La Verne을 기용한 다음기 멤버들과 퓨전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때 심지어 몇몇 곡에서는 에코플렉스(echoplex)를 이용하기도 하였는데, 몇몇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멤버들과의 대부분의 연주는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1981년 콩코드 레이블과 계약함으로써 그는 다시 순수한 재즈(퓨전과 비교하는 의미에서)의면모를 되찾게 되었고 대부분의 연주에서 순수한 어쿠스틱 트리오의 연주를 배경 삼아 연주한다. 말기의 게츠의 사이드맨에는 피아니스트 Lou Levy, Mitchell Forman, Jim McNeely, 그리고 Kenny Barron 등이 있었다. 그의 마지막 녹음인 1991년의 'People Time'은 (테너 색소폰 호흡에 있어서 약간 짧음에도 불구하고) Barron과의 뛰어난 듀엣을 보여주는 것이다. MGM, 빅터, 컬럼비아, 스티플체이스, 몽코드, 소넷, 블랙 호크, A&M, 그리고 EmArcy 등의 레이블에서 녹음하였으며 현재 시디로 만날 수 있는 수많은 녹음을 남겨놓고 있다.
4. 스탄 게츠의 음반들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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