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眞伊 時調의 멋과 風流
金 蓮 玉
서울敎育大學校 講師 / 本聯合會 執行委員
1. 서론
불과 여섯 수의 時調와 일곱 수의 漢詩가 전해져 오는 黃眞伊, 그는 그 스스로의 문학작품과 그 風流的 逸話 속에 살아 있는 朝鮮時代의 상징적 인물이며, 그의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살아 숨쉬는 영원한 古典이다.
황진이의 문학은 傳說도 神話도 아닌 實存으로 유연한 情感의 세계를 읊어내는 한편 離別, 孤獨, 相思 등 悲戀의 세계를 극복하고, 그 情恨의 세계를 확대하여 ‘멋의 문학’을 이룩해 놓았다.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紅顔은 어디 두고 白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시인 林白湖로 하여금 罷職도 두려워 않고 이토록 처연한 追悼(추도)의 시를 읊게 한 황진이는 才色을 겸비한 絶世佳人이었다.
生沒年代, 出生身分조차 확실하지 않은 황진이가 오늘날 우리와 더불어 살아 숨쉬는 것은, 그리고 전해오는 작품이 寡作임에도 불구하고 “황진이 이후에 황진이 없다”1)고 까지 극찬할 정도로 그의 시조가 오늘날까지도 愛唱되고 있는 것은 그의 美貌나 唱 때문이 아니라 문학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개성적이며 보편적인 共感의 세계 때문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시는 본질에 있어서 松江이나 尹善道보다 뛰어나고, 그의 스승인 宋純보다 훨씬 훌륭하며, 詩語의 구사에 있어서나, 시 내용에 있어서 그리고, 인간에 있어서도 또한 뛰어나다”2)고 평가되기도 하였다.
李秉岐(이병기)는 黃眞伊의 노래를 張吾園의 그림과 黃梅泉의 시와 같이 神韻이 생동하는 것이고 낱낱이 봄볕처럼 반짝인다고 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宋純, 鄭澈, 尹善道 같은 대가들도 그를 경건히 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자신을 일러 松都三絶이라 자신 있게 말하는 황진이, 그가 살다 간 생애의 행적과 남긴 작품 속에서 참고,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고요함과 아울러, 살아 움직이고 스스로 取捨選擇하는 自尊과 意志와 적극성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러한 작품은 靜中動의 힘으로 21세기인 오늘날까지도 생명력 있게 숨쉬고 있는 것이다.
2. 생애와 시대상황
본명은 眞이고, 珍伊 또는 眞娘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妓名은 明月로 詩․書․音律에 뛰어났다.
황진이의 文集이나 年譜가 남아있지 않아 생존연대에 관하여는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名妓’니 신선의 딸이니 하며 一世를 風靡(풍미)하던 그녀였지만 그녀에 대한 기록은『於于野談』, 『松都記異』, 『識小錄』, 『朝野彙言』, 『中京誌』, 『東國詩話彙成』, 『崇陽耆舊傳』 등 野史的 文獻에만 단편적으로 실려 있다. 그중 그녀가 살았던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으로는 柳夢寅의『於于野談』3)과 許筠의 『識小錄』뿐인데, 『於于野談』에는 嘉靖4) 初라 했고, 『識小錄』5)에는 恭憲王朝時代6)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모두 壬辰亂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황진이의 생존연대라고 기록된 嘉靖 初나 恭憲王朝보다 50년이나 뒤떨어진다.
황진이의 생존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다른 하나의 단서는 그녀와 교분이 두터웠던 花潭 徐敬德(1489~1546)과 陽谷 蘇世讓(1486~1562)이다. 徐敬德의『花潭集』이나 蘇世讓의 『陽谷集』에는 황진이에 대한 기록이 한 줄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사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가지 考證 자료에 의해 金用淑은 황진이의 생존연대를 中宗 6년경(1511)에서 中宗 37년경(1542)으로 추정하고 있다.7)
출생신분에 관해서도 양반의 庶女라는 견해와 盲人의 딸이라는 견해 등 다양한데 서민층, 그것도 천한 가문의 私生兒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을 향해 품게 되는 戀情을 읊었다고 알려진 그녀의 詩에는 ‘山은 녯산이로되 물은 녯물이 안이로다’와 같은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라든가 ‘秋風에 지 닙 소릐야 낸들 어이 리오’같은 인간 존재가 갖는 근원적인 고독감 내지는 단절감을 표현하는 깊은 철학을 나타낸 면도 볼 수 있다. 그녀는 徐花潭을 매우 존경하고 그와 정신적 교분을 나누었는데 두 사람의 이러한 정신세계는 작품을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는 구속을 싫어하고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으로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여 徐花潭, 朴淵瀑布와 함께 자신을 松都三絶이라 말하였다 한다.
『於于野談』, 『識小錄』 등에 보면 그녀는 여자 중의 英傑이요 사내 못지 않게 豪快하여 花潭의 도도하고도 高邁(고매)한 인격과 풍류와 학문을 배우며 그를 欽慕(흠모)하였고, 宣傳官 李士宗과는 그의 풍류에 취해 6년간의 애정생활을 지속하였다. 李生과 반년 여 동안 금강산을 기행하였고, 脫俗하여 山水間에서 浩然之氣를 탐하며 풍류를 즐겼다.
3. 작품세계
口頭傳乘을 힘입어 『海東歌謠』, 『靑丘永言』, 『歌曲源流』, 『大東風雅』 등에 정착된 그의 작품의 주제는 주로 思慕와 情恨이다.
그녀는 늘 외로움 속에 살았지만 자기 감정에 빠지지 않고 비록 그리워할지라도 보내는 이성적 판단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임이 오시는 날 그 긴 기다림을 굽이굽이 펴려는 희망을 안고 살았다. 전해지고 있는 단 6수의 時調에서 보여주는 그의 작품세계는 표면적으로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연약한 감상적인 여성의 눈물만이 아니라, 그의 여유 있는 人生觀과 언어를 다루는 탁월한 技巧를 보여주고 있다.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냐
이시랴 더면 가랴마 제 구여
보내고 그리 情은 나도 몰라 노라
이 시는 ‘동지ㅅ달 기나긴 밤을-’과 쌍벽을 이루는 황진이 시조의 걸작인데, 蘇世讓을 보내고 나서 허전한 마음을 읊은 시조라고 한다. 가람 李秉岐는 “이 한 수의 시조가 나의 스승”이라고 격찬하면서 이 시조가 하도 좋아 시조공부를 시작하는 동기가 되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임을 보내고 난 뒤의 사무치는 그리움과 만류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회한의 정을 솔직하게 호소한 것으로 적나라하게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였다.
마음속에 감춘 그리는 정을 ‘어져 내 일이야’하는 대담한 파격으로 시작하여 ‘이시랴 더면 가랴마’의 도도함과 自身滿滿함의 황진이다운 특성으로 이어간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시의 훌륭한 점은 ‘보내고 그리는 정’에 있는 것이다. ‘그릴 줄을 모로냐’의 疑問形 逆說 속에 드러나는 그의 강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보내는 理性的 판단이다.
사랑하는 임을 보내고 난 뒤의 그리움을 읊은 시, 그러나 임에게서 버림을 받은 슬픔이 아니라 스스로 임을 보내는 여유와 자존심, 그리고 보낸 임께 대한 그리운 情恨을 객관화시켜 보는, 활달한 여성의 솔직한 감정, 그 갈등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보편적인 진실을 절실하게 표현하여 이 시는 오늘날까지도 絶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靑山은 내 뜻이요 綠水는 님의 情이
綠水 흘너간들 靑山이야 變손가
綠水도 청산을 못니저 우러예어 가고
이 시에 대해선 知足禪師를 파계시키고 헤어지며 지은 시라는 설과 6년간 동거하던 李士宗과 헤어진 후 인생의 허무함을 쓴 시라는 설이 있다. 사랑하는 禪師 곁을 떠나야 하는 심정, 그녀의 기교는 도도하면서 진솔하다. 이 시조의 初章에서는 靑山과 綠水가 대립되어 일장의 對句의 구조를 형성한다. 이것은 中章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후의 대립이 對句를 형성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다.
변하지 않는 靑山 곧 自我와 흘러가는 綠水 곧 임의 관계는 ‘못니저 우러예어’가는 심상으로 관계가 맺어져 있다. 결국 흘러간다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며 남녀의 정 또한 그러한 상대적 세계에서 절대적인 永遠不變의 것일 수 없다는 現實認識이 일차적으로 엿보인다. 다시 말하면, 靑山과 綠水를 대칭으로 놓으면서 靑山의 변함없는 영원성 또는 절개와 綠水의 순간성 또는 변질의 對稱이다.
初章의 ‘님의 情이’는 ‘~이오, ~이다, ~이라’ 등의 생략된 형태이다. 그는 詩語를 생략하여 시적 긴장의 효과를 가져온다. 또한 中章과 終章의 ‘變손가, 가고’ 등 疑問形 종결어미, 靑山 綠水 등 同語反覆에 의한 운율의 효과가 어울려서 크게 共鳴을 불러일으킨다.
이 시에도 自尊的 自慢이 드러나며 실제로 사랑하고 있는 임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부득이한 이별 후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할 수 없다 하여 別恨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의 美感은 優雅美다.
山은 녯산이로되 물은 녯물이 안이로다
晝夜에 흘은이 녯물이 이실쏜야
人傑도 물과 도다 가고 안이 오노라
이 시는 산과 물의 대비로 그 속성의 차이를 밝히고 人傑을 물에 비유함으로 인생의 無常을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황진이가 그 爲人을 평생 사모하던 花潭의 죽음을 보고 인생의 덧없음을 그린 것이라 한다. ‘물은 변한다. 밤낮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물과 같이 人傑도 변하여 덧없이 죽어 간다’는 형식으로 전개하여 작가가 花潭의 죽음을 보고 산과 물을 작가와 花潭으로 대비시키며 인생의 無常을 탄식하고 있다.
花潭의 죽음 즉 임과의 永離別을 나타낸 이 시는 있어야 할 것에 대한 좌절인데 이 경우 있어야 할 것은 사모하는 花潭과 偕老(해로)하는 것이다. 그는 花潭과의 永離別을 동기로 삼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위대한 운명 앞에서 자신에게 있어야 할 것이 산산이 깨어짐을 보여주는 人生無常을 읊고 있다.
산은 고정된 것이며 不變의 것임에 비하여 흘러가는 물은 可變的인 것이다. 여기에서의 人傑은 위와 같이 떠나간 임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 그 人傑은 황진이 자신, 그리고 흘러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삶을 말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 시는 存在에 대한 질문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해당하는 시대는 네 번의 士禍와 中宗反正 등으로 정치투쟁이 극대화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 高麗의 舊都 松都에서 신분적 위치가 기생인 황진이의 고뇌를 드러낸다.
無常한 인생, 가버린 인재를 아쉬워하는 이 시는 여류의 작품이 가지는 연약한 선이 아니라 활달하고 큰 器量을 지니고 있다. 가는 임을 두고도 그 임의 마음은 오히려 자기에게 있음을 逆說的으로 표현하는 황진이 특유의 도도한 自尊心을 여기서도 읽을 수 있다.
음이 어린 後ㅣ니 일이 다 어리다
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
지 닙 부 람에 행여 긘가 노라
황진이가 花潭精舍에 은거하는 花潭을 생각하며 지은 시다. 임에게 서운하게 한 일도 虛言한 일도 없다. 그러나 임은 말 없이 캄캄한 밤 자정이 지나가는데도 오는 기미가 전혀 없다. 話者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깨뜨린 적이 없는데 임은 그렇지 않다. 信義가 蹂躪(유린)되었을 때 흔히 여성은 보복의 감정을 품기 쉬우나 이 시의 話者는 信義 없음을 원망하지 아니하고 동양적인 理解와 自然性에 歸依함으로 개인의 위선과 허물을 철학적인 인생의 無常 속에 용해시켰던 것이다.
여기에서도 그녀 특유의 자존과 자만을 볼 수 있다. 初․中章에서 보인 주관적 정서는 終章에서 비약적 전환을 가져오며 객관화 된다. 달 없이 캄캄한 밤에 오는 기미가 전혀 없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임을 기다리고 있는 話者는 임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떨어지는 나뭇잎은 어쩔 수 없는 自然의 攝理(섭리)이기 때문이다.
권력 투쟁을 위해 분열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천한 신분적 위치를 냉혹히 파악하면서 현실 그 자체를 충실히 받아들이며 살았기에 그의 삶은 여유와 자신이 있었다.
이 시에 ‘秋風’에서 드러난 가을의 의미는 하루에서는 日沒에 해당하며 인생에서는 죽음을 의미한다. 문학적 원형으로는 悲劇의 원형이며 悲歌의 원형이다. ‘지 닙’도 물론 轉落, 죽음의 신화며 悲歌의 원형이다. 우리는 이 시조에서 황진이의 인생이 서서히 막을 내리는 가을의 원형과 만나게 된다. 才色을 겸비하여 일세를 풍미한 그녀가 무상함을 한탄하는 心懷를 ‘秋風에 지는 닙’에다 부쳤다.
소견 좁은 원망이나 끈질긴 집념 없이 가을 물결같이 담담하고 맑은 서정을 읊어내고 있으며 感性的이고 理智的이며 여유와 자신을 가지고 현실을 살았다.
이 시에 대해 서경덕은 ‘내 언제 無信여 님을 언제 소겻관 / 月沈三更에 온 이 전혀 업서 / 秋風에 지 닙 소릐야 낸들 어이 리오’하며 답시를 남겼다.
靑山裏 碧溪水ㅣ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明月이 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千古의 불변으로 여기에 자리하고 있는 靑山, 그 靑山에서 생성된 碧溪水, 이 兩者는 어쩌면 하나로 합일되어 존재하는 것이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의 속성이 흐르는 것일 때 이 碧溪水는 다른 물보다도 더욱 빨리 흐르는 것이 특수화된 그의 속성이다. 그래서 話者는 ‘수이 감을 자랑마라’ 하였다. 여기서 대상의 ‘動․變’은 한층 부각되어 나타나고 자아는 그것을 부정하고 저지한다.
中章에서 그 부정과 저지의 근거가 밝혀지는데 그것은 ‘一到滄海면 도라오기 어려오니’하는 진리이다. 그 진리를 비유로 나타낸 것이다.
기다림의 정서를 悲哀感이나 원망 대신에 泰然自若하게 天地日月의 변화에 비유하여 무상한 인간심리의 변화를 멋을 깃들여 표현하였다. 상대방의 애정을 강요하거나 초조해하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의 변화도 자연변화의 한 요소로 진리의 궤도 위에 올려놓고 觀望하였다. 그 속에서 맺어지는 사랑의 언약이나 변심도 한갓 자연성에 맡기어 버린다.
이 시에는 아이러니가 잘 나타나 있다. 아이러니는 비평적이며 표면적으로는 냉정하나 간접적으로 강력한 정서를 전달하며 합리적이며 상반적인 원리를 갖는다.
‘碧溪水’는 同音異義語인 종실 ‘碧溪守’요 ‘明月’은 황진이 자신이다. 이것은 언어적 아이러니의 기교로 重義이다. ‘一到滄海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中章에 보이는 이 객관의 개입은 初章, 終章의 주관을 더욱 강하게 하는 효과를 보인다. 언어 자체와 상호 간의 긴장, 初․中․終章 사이의 긴장, 주제적 요소를 환기시키는 긴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아이러니의 수법이 이 시에는 쓰이고 있다.
그는 시의 양식을 통해 형상화시킨 인간 경험의 새로운 세계를 문학의 언어로 열어 놓았다. 그의 언어적 형상화의 극치인 다음의 시조를 살펴본다.
冬至ㅅ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春風 니불 아레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뷔구뷔 펴리라
이 시는 李士宗과 6년을 동거한 뒤에 이별하고 다시 그를 그리워하며 쓴 시라고 『於于野談』에 전한다.
이 시의 표현수법은 우리 文學史를 통틀어 감히 최고라고 할 만하다. 시간을 공간으로 은유 내지 상징한 것과 관념을 이미지화한 점에서 그 기교는 뛰어난다. 즉 ‘기나긴 밤’이란 무형의 시간을 따스한 이불 속이라는 공간에 묻어둔다는 이 時空合一의 발상은 황진이의 가장 섬세하고 뛰어난 표현이며, ‘기나긴 밤’이란 관념을 ‘서리서리 너헛다가’나 ‘구뷔구뷔 펴리라’로 이미지화한 수법은 20세기 이미지스트인 엘리어트의 표현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創作心理는 積極的 能動性으로 창작 동기는 이별이지만 곧 邂逅(해후)하리라는 작가의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곧 邂逅하리라는 확신은 그가 가진 긍정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며 優雅美의 發露이다.
‘冬至’는 가장 긴 밤, 즉 기다림의 절정이다. 그리고 冬至의 긴긴 밤을 빌어 화자는 ‘어론 님’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밤에 대한 인식은 ‘한 허리를 버혀내어’의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타난다.
詩語에 드러나는 기교는 ‘冬至ㅅ달’, ‘밤을’, ‘허리를’, ‘니불’, ‘서리서리’, ‘어른 님’, ‘오신 날’, ‘펴리라’로 흐르는 流音 ‘ㄹ’, 탁월한 은유의 구사가 참신한 이미저리(imagery)를 창조한다.
또한 ‘서리서리’와 ‘구뷔구뷔’를 대칭시키면서 우리말의 아름다운 운율을 유감없이 살려 내고 있다. 또한 初章과 中章의 시간과 공간 이미지의 交接은 想像世界의 폭을 확충한다.
그는 日常的인 量的 시간을 文學的인 質的 시간으로 換置시켜놓고 있다. 긴 동짓달의 밤은 自然的 量的 시간이다. 이 시간은 춥고 쓸쓸하고 긴 시간이다. 그러나 이 긴 밤의 한 허리가 뚝 잘려지는 순간 이 시간은 질적으로 변모된다. 그리하여 임이 오신 날 짧기만 한 봄밤에 이어진 긴긴 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밤, 허리, 춘풍, 이불, 고운 님’ 등의 肉感的인 언어를 사용하여 觀念的이고 抽象的인 그리움을 具體化하였다. 게다가 紗窓(사창)에 촛불이 하늘거리는 妓房에서 이런 시어가 주는 이미지는 자칫 천박하고 肉感的인 분위기로 흐르기 쉽다. 그러나 그는 이 시어를 질적인 시간의 이미지와 만나는 상상의 공간으로 시의 격을 한층 높였다.
틀에 박힌 이별의 恨에서 超脫하여 긴 겨울밤의 고독을 따뜻한 봄밤의 만남의 歡喜로 변이시키며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는 흐르는 碧溪水도 막을 수 있을 뿐더러 春風의 이불도, 秋夜長 긴긴 밤도 제멋대로 서리서리 넣었다가 굽이굽이 펴는 無所不能의 시인이다. 그리하여 분명 그리워할 줄 알면서도 굳이 보내는 餘裕와 達觀의 境地로 자신을 끌어올린다.
4. 결론
詩語에 대한 自覺과 韻律美, 참신한 은유와 이미저리의 구사로 시의 개성을 살린 황진이, 그녀는 철저하게 현실에 집착하여 현실주의적 면모를 보여주며 그 시의 性情은 참으로 진솔하고 다감하다.
愛情을 주제로 다루면서도 황진이의 시는 순응적이며 체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지적이며 결단력 있는 사랑을 말하고 있다. 이 애정은 바로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영원히 이어지는 문학의 本流이다. 黃眞伊의 시조에 나타나는 면면한 정서는 가식 없는 진솔한 詩語로 호소력 있게 다가오며 또한 이별의 슬픔에 함몰되지 않는 이성적인 절제력이 함축되어 있으며 뛰어난 시적 발상과 心象의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신분이 천하다는 이유로 文集 하나 전하지 않고, 時調도 비록 여섯 수만이 전해오지만 그의 시조의 다양한 詩精神과 탁월한 기법은 감히 天衣無縫이라 할 수 있으며 절절한 別離와 戀慕의 情, 生의 虛無 등을 노래한 豪放한 기교 등은 수백 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黃眞伊 時調에서 보이는 감탄, 의문, 명령형 따위의 終止形이 다른 시조 작가의 상투적인 어투가 아닌 개성적인 목소리로 들리는 것도 시 전체의 유기적 통일에 기여하는 한 단위인 詩語와 文型이 가져오는 균형과 조화의 결과에서 오는 것이라 할 것이다. 황진이 시조는 우리 時調史에서 일대 전환을 가져온 한 변신이다. 그의 시조는 革新이었으며 驚異였다.
황진이는 朴淵瀑布를 사랑했다. 자기의 천성과도 같이 도도하고 호쾌한 폭포에 자리를 깔고 당시의 士大夫들과 함께 했을 것이다. 폭포소리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장고소리는 어울려 퍼졌을 것이고 양반들은 어깨가 으쓱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그녀는 자연을, 남자를 좋아했지만 무엇보다도 문학을 사랑하였다.
朝鮮社會를 규제하고 있는 世俗的인 道德을 超克하고 愛情을 愛情으로 나아가 藝術로까지 승화시킨 데서 그의 문학의 의의가 있다.
生沒年代, 出生身分조차 확실하지 않은 황진이가 오늘날 國文學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의 文學作品 속에 살아 숨쉬는 個性的인 멋과 風流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 金東旭, “黃眞伊와 許蘭雪軒”, 姜銓燮 編著, 黃眞伊 硏究, (서울:倉學社, 1985). 58쪽
2) 張德順, “奇拔한 詩想의 所有者 黃眞伊”, 姜銓燮 編著, 黃眞伊 硏究, (서울:倉學社, 1985). 53쪽
3) 眞伊 嘉靖初 松都名技 有眞伊者...柳夢寅,『於于野談』
4) 중국 明나라 年號인데 嘉靖1년은 朝鮮 中宗 17년(1522)에 해당된다.
5) 眞娘, 恭憲王朝 有士人李彦邦者...松京唱眞娘 聞其善唱 來訪其家...許筠, 『識小錄』
6) 恭憲王朝는 中宗朝를 가리킨다.
7) 金用淑, “黃眞伊의 생존연대”, 姜銓燮 編著, 黃眞伊 硏究, (서울:倉學社, 1985). 172쪽.
첫댓글 황진이 시조 감상잘했습니다. 이 가을 더욱 가슴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