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목요일 (3월28일)
요한복음 13장 1~20절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다, 나를 팔리라
요한복음 13:1절~20절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9 지금부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십자가 사건이 임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의 마지막 증거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겸손과 종의 자세를 보이시고 자신의 죽음을 통한 죄씻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의 놀라운 본보기로 예수님은 유다의 발을 포함한 모든 제자의 발을 씻기십니다. 사람들의 발을 씻는 일은 비유대인 노예들이나 하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동은 더더욱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자기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의 새로운 메시아적 공동체의 대표자들인 열두 제자입니다. 예수님은 곧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시겠지만 계속해서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을 떠나', 요한은 몇몇 구절에서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몇몇 구절에서 예수님은 심지어 승천하신 이후에도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인성에 있어서는 더 이상 여기 이 땅에 계시지 않고 하늘로 돌아가셨고 언젠가 다시 오시겠지만 신성에 있어서는 무소부재하시며 신자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발씻음은 자기 백성을 위한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죄 '용서'를 위해 상징하며 죄는 그 죽음을 통해 씻겨 나갑니다.
예수님은 발 씻음을 또 다른 방식으로 적용하십니다. 예수님의 단번의 죽음을 통해 씻김 받은 이들은 또한 발을 자주 씻어야 할 필요성이 상징하는 매일의 죄 씻음도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가리키면서 모두가 깨끗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발 씻음을 비유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명백하지만 분명 유다의 발도 씻어주섰습니다. 유다는 베드로와 달리 영적으로 씻음 받지 않았으므로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14절에서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문자적으로 순종하는 오늘날의 여러 교파에서 정기적인 의식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반면 어떤 이들은 이 표현은 서로를 섬기는 일의 중요성을 뜻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며 씻는 행위 그 자체는 불필하다고 생각합니다.
16절에서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보냄을 받은 자'(헬, 아포스툴로스), 이는 신약에서 이 헬라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의 직분이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보냄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몇몇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이는 구원을 위한 택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유다를 포함한 열두 제자를 택하신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다윗 왕에 대한 압살롬의 반역을 다루고 있는 시 41:9를 인용합니다. 거기서의 "믿을 수 없는 친구"는 아히도벨이 될 것입니다(삼하 16:23). 유다가 예수님께 '발꿈치를' 든 일은 유다가 행한 반역적이라고 믿을 수 없는 행위 여기라고 믿을 수 없는 행위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20절에서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내가 보낸 자'란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파송하실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보다 넓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의 모든 사자들에게 적용됩니다. '영접하는 것이요', 그런 사자를 진정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으며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28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22절에서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유다의 외적인 행동은 다른 제자들의 행동과 너무나 비슷하게 일치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다에 대해 말하고 계신다고 즉시 생각하지 못했씁니다.
23절에서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이는 예수님과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에 대한 첫 번째 언급입니다. 책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이 복음서는 요한이 썼으며 다른 증거는 이 요한을 세베대의 아들로 밝힙니다. 내적 증거는 저자가 첫째, 사도였고 둘째,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요 13:23, 19:26, 20:2)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셋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었음을 알려줍니다. '누웠는지라' 그런 상황에서, 요한이 약간 뒤로 기대어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귓속말을 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27절에서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탄은 앞에서 유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싶은 욕망을 집어넣었지만 이제 사탄 자신이 유다의 속에 들어가 이어질 행동에서 보다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암시 합니다.
30절에서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밤이러라', 이 말은 불길한 분위기를 조성 합니다( 참조, 눅 22:53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새 계명>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1절에서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이 말씀은 시 49:3절과 짝을 이룹니다(시 49:3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예수님의 영화는 또다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됩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구별 지어 주는 표지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새 계명"은 온 힘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고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모세의 명령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예수님 자신의 사랑과 가르침은 이 명령을 더욱 심화시키고 승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원수에 대한 사랑까지 가르치셨습니다(마 5:43~48).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새로운 명령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점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데서 발견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뒤이은 죽음에 비추어볼 때 "사랑한 것 같이" 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는 사람을 내포합니다.
38절에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닭 울기 전에', 전부는 아니지만 마가복음의 많은 사본에서 마가는 닭이 "두 번" 울었다고 언급하는데(막 14:30, 68, 72), 닭은 몇 분 간격으로 여러 번 울 수도 있습니다. 마가는(명백히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처음 두 번의 울음소리를 명시하는 반면 마태, 누가, 요한은 베드로의 부인이라는 수치스런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따라서. 그들은 이 세세한 내용을 누락시키고 예수님이 닭우는 소리 전체를 통틀어 닭이 울 때 라고 지칭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친구가 배신하니 심령이 괴로워>
시 55:6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 7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8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9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 10 그들이 주야로 성벽 위에 두루 다니니 성 중에는 죄악과 재난이 있으며 11 악독이 그 중에 있고 압박과 속임수가 그 거리를 떠나지 아니하도다 12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13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14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나는 절망 속에 있다는 시인의 절실함을 더 충분히 묘사합니다. 시인은 심령이 괴롭고 심히 아파합니다. 시인이 날아갈 수 있다면 비들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서 편히 쉴것입니다 그리고 시인의 피난처에서 폭풍과 광풍을 피할것입니다. "이런 파멸을 일으키는 자들을 멸하소서", 이런 상황 속에서 시인은 구원을 기도하고, 원수의 악한 계략이 좌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이 원수가 무고한자에게 가하는 고통, 분쟁, 악독, 속임수에 무관심한 것을 동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노래할 때 시인은 원수가 자신의 악을 회개하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시인은 원수가 회개하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그들의 "혀를 잘라버리소서" 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 나는 나의 친구에게 배반당했다 이제 고통이 더 격심해 졌습니다. 경건한 시인을 해하려고 획책하는 자는 이름을 모르는 원수나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나의 친구 나의 가까운 친우입니다.
그라서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습니다. 시인이 고통스러워 하는것은 배반입니다. 이 사람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실망시킨 친구가 아닙니다. 그는 내내 자신의 악한 의도를 숨기고 자기를 신뢰한 자들을 계획적으로 파멸 시켰습니다. 그는 내내 엄숙하게 다짐하며 자신의 우정을 장담했습니다. 신실한자가 자기의 짐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적절한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