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함허 득통(涵虛得通) 화상
- 척불斥佛의 강풍强風을 온몸으로 이겨낸 거목巨木 -
(1) 시대적 배경
함허득통화상涵虛得通和尙은 지공 · 나옹 · 무학 삼대화상의 후예로서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적 혼란기와 불교 유교의 종교적 전환기에 이 민족의 정신문화에 큰 기둥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하고 간 고승이었다. 함허스님이 활동한 시기는 고려 말 우왕(禑王) 2년(1376)에서 조선조 세종 15년(1433)사이로 이때는 종교문화의 사상적 전환기로서 불교에서 유교로 장치이념이 바뀌어 가는 시기였다. 이때의 유생들은 고려불교의 병폐에 대해서 통렬한 비판을 가하면서 불교 배격이 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고려말기에서 조선초기의 불교계는 자체 내의 병폐 때문에 정치적 지도이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고려불교는 형식적인 교리와 기복적 행사에 치우친 나머지 일반승려들은 권력과 지위다툼에 눈이 어두워 승단의 화합과 질서는 파괴되고, 또 파계한 승려들로 인하여 사회적 승가의 위신은 여지없이 추락되어 있었다. 고려 성종조 최승노(崔承老)의 상서문(고려사 권85 刑法志 禁令 성종원년 6月條)에 보면 세속인들은 자기의 소원을 위하여, 그리고 승려들은 자기네의 주처를 마련하기 위하여 많은 사우(寺宇)를 다투어 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승려들의 수가 무한정 증가하게 되는 것은 필연이라 할 것이다.
인종 8년(1130) 7월 국자國子 제생諸生의 상사문 가운데
'佛氏寺觀 周遍中外 薺民逃彼 館食逸居者 不知幾千萬焉'
'불씨사관 주편중외 제민도피 관식일거자 불지기천만언'(고려사 권74 選學志學敎)이라 한 것을 보면, 절을 지어놓고 안일하게 포식하는 무리가 얼마나 많았던 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조 성종 때 좌부승지 이극감(李克嵁)은 고려불교의 사원경제를 단적으로 말해
‘寺社半於閭閻 田壯過於官府’
‘사사반어여염 전장과어관부’(成宗實錄 권48 성종 5년 10월 戊申條)라 한 것을 보면 여염집의 반수를 사원이 차지하고, 사원의 전장(田壯)이 관부보다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불량승들의 재색에 대한 행패가 심할 뿐만 아니라 토전의 조(租=세금)나 노비의 고용에만 그치지 않고 식하(植賀=투자)에 노력하여 고리대금 업에도 종사했다.
고려사 권108 최이전(崔怡傳)에
‘聚無賴僧侶 爲門徒惟以 殖賀寫事云云’
‘취무뢰승려 위문도유이 식하사사운운’ 이라 하고, 고려사 권7 文宗 世家8년 8월조에
‘今有避投之徒 托號沙門 植賀營生 耕畜爲業 估販爲風 (中略) 通適賣買 結商醉誤云云’이라
‘금유피투지도 탁호사문 식하영생 경축위업 고판위풍 (중략) 통적매매 결상취오운운’이라 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피역자들이 승려로 위장하고 사원에 들어와 수행(修行)에는 뜻이 없고 재물(植利)에만 눈이 어두워 불교의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많은 재물이 예속된 사원은 주지들 사이에 쟁탈의 표적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선교(禪敎) 양종 사이에 사찰 쟁탈의 추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되, 이를 세도가에 회뢰(賄賂=뇌물)함으로써 지방관리들은 감히 이를 막을 수도 없었다고 한다.
고려말기의 불교승단은 사원과 승려의 증가에 따라 사찰의 전지(田地)와 노비가 증가되고 이로 말미암아 국가존립의 기반이 위태롭게 되었다. 특히 권문세도와 사원세력의 결탁은 장원(莊園)의 발달과 함께 국가 재정을 궁지에 몰아넣고 더 나아가 거국적으로 번번히 시행되는 여러 가지 불사(佛事)는 국가 재정을 크게 소모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말의 왕정은 근본적인 재원정비 없이는 부지될 수 없을 만큼 군자(軍資)와 녹봉이 크게 결핍되었는데 여기에 불교의 영향이 컸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결국은 사대부와 일반 민중의 배불론이 대두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고려말에 유학의 바람을 타고 일어난 배불과 억불론이 조선초에 와서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와같이 고려왕조의 정치적 이념인 불교사상이 조선의 개국공신들에 의해서 배척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배불소와 호불소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불론에 비하여 호불론은 조족지혈이라 할 만큼 약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 까닭은 고려조의 국교인 불교가 정치적인 세력을 얻지 못하고 자체의 부패와 함께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억불론을 주장한 대표자는 목은이색(牧隱李穡1328-1396)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공민왕 원년 4월에(佛敎通史上編 공민왕 원년 4월조) 상서하기를 고려중기 이후로 오교양종五敎兩宗이 모두 이익의 집단[利窟]이 되었다고 하고,
'川傍山曲 無處非寺'
'천방산곡 무처비사' 라 하여 사찰의 지나친 축조[濫造]를 지적하고 도첩제를 실시하도록 주장하며, 새로 건축된 사찰에 대해서는 철거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리고 억세게 일어나는 유신들의 반론을 의식하면서도 그는 공공연하게
‘佛大聖人也 佛者至聖至公’이며 ‘布施功德 不及持經’
‘불대성인야 불자지성지공’이며 ‘포시공덕 불급지경’이라 하여 불사의 지나친 소비를 지적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좌사의左思議 오사충吳思忠과 문하사인門下舍人 조박趙璞 등이
‘論刻利橋 以需宗佞佛 毁人心述 敗亂風俗云云’
‘논각리교 이수종녕불 훼인심술 패난풍속운운’이라 공민왕 원년 12월에 상소하고, 후세유생들은
‘學門不純 崇信佛法 爲世所譏’
‘학문불순 숭신불법 위세소기’ (고려사 권115 이색렬 전利穡列 傳)라 하여 그를 비평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고려말의 불교를 배척하는 유학자들에 의하여 고려왕조는 멸망을 당하고 조선왕조가 개국하니, 이에 따라 사원의 전답이 몰수되고 승려의 지위는 하루아침에 땅에 떨어져 버렸다. 거유巨儒 삼봉 정도전鄭道傳은 공양왕 3년 5월조에 소를 올려 불사(佛事) 때문에 국가재정이 고갈되어 민생고가 늘어나며, 신불神佛을 섬기는 것은 전혀 이익이 없고 해로움만 더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구체적인 예로서 양무제梁武帝를 들고 있다.
삼봉이 불교를 비난하는 데에는 네가지가 있다.
첫째는 승려가 놀고먹어 비생산적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승려의 숫자가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며,
셋째는 지나친 불사佛事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며,
넷째는 장례의 절차가 무례하고 엄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삼봉의 <불씨잡변佛氏雜辨>과 <심기이편心氣理篇>과 <심문천답心問天答>은 체계화된 이론적 척불론으로 후대 유생들의 배불의 기초가 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이 바로 함허스님의 <현정론顯正論>이다.
이것은 불교의 세력이 몰락한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함허스님이 아니라면 감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반론이었다. 결국 조선초에 척불론자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불교는 산중으로 밀려가고 그 많은 재산과 노비는 공탁되었으며 승려들은 강제로 환속을 당하는 시기에 무학의 뒤를 이은 함허스님은 무너지는 불교를 받쳐들고 호법의 등불이 되었던 것이다.
(2) 생애와 업적
스님의 휘(諱)는 기화己和요 호는 득통(得通)이며 구명舊名은 수이守伊고 구호舊號는 무준無準이다. 함허는 자모산(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성불산成佛山) 연봉사에 머물면서 거실의 당호를 함허라 했기 때문에 생긴 별호이다. 스님은 고려 우왕禑王 2년(1376)에 중원(지금의 충주)에서 유씨劉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휘諱는 총聰이고 벼슬은 전객사사典客寺事이며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스님의 모친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대성자모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꿈에 대성이 나타나 어린애 하나를 품에 넣어주고 간 뒤 곧 태기가 있어 홍무洪武 11년(1376) 변진 11월 17일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곧 수이守伊이다. 어려서부터 스님은 아이들과 함께 장난하고 놀 때에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반궁泮宮(성균관)에 나아가 공부할 때에는 하루에 수천어를 기억하고 조금 자라서는 일실一實의 도道를 깊이 통달하였다고 한다. 수이守伊는 21세가 되었을 때 동관同館의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과 봄의 허망함을 알고 두가지 생사(범부의 생사와 성인의 생사)를 벗어나 부처님의 열반을 구하며 도를 넓혀 사은四恩을 갚고 덕을 길러 삼유三有에 이익(資)을 주고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스님의 출가 동기가 무상을 절감한 데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원인은 본래 그의 탁월한 두뇌가 유교에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교에 귀의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의 저서인 <현정론顯正論>에 보면 인仁을 주장하는 유교가 살생을 금하지 않는데 대한 의심을 불교의 자비사상에서 크게 깨닫고 불교에 귀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관악산 의상암에 가서 머리를 깎고 병자년(1396)에 승려가 되었다. 이듬해 정축년 이른 봄에 처음으로 회암사에 가서 왕사 무학 묘엄존자妙嚴尊者를 만나 친히 법요를 들었다. 이 인연으로 스님은 임제종 계통으로 제21세손이며 나옹 밑으로 제2세가 된다. 스님은 무학스님 밑에 조금 있다가 하직하고 여러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다. 갑신년(1404) 봄에 스님은 회암사로 돌아와 한 방을 치우고 지냈는데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이 여일하였다.
이내 그는 수마를 항복 받고 어느날 밤 거닐다가 자신도 모르게 읊기를 ‘행행홀회수 산골입운중’(함허어록 p8)이라 했으니 '다니고 다니다가 갑자기 머리를 돌리니 산뼈가 구름 속에 우뚝 섰다.'는 것이다.
또 어느날 그는 변소에 갔다가 나와서 물통을 들어놓고 ‘유차일사실 여이칙비진’이라고 느낀 바를 갈파했다. 이 말이 어찌 부질없는 말이겠느냐고 야부野夫는 주를 달고 있다. 이후로 함허당은 교화에 전력을 다하게 된다.
병술년(1406) 여름에 스님은 공덕산 대승사에 들어가 을축년에 이르기까지 4년 동안 반야(금강경)의 강석을 세 번 베풀고, 경인년 여름에는 천마산 관음굴에 들어가 각수覺樹[보리수]의 현풍을 크게 떨쳐 인연있는 사람들을 모두 교화시켰다.
또 스님은 신묘년 가을에 불회사에 가서 3년 동안 결제하며 절을 수리하고 여러 불자들을 모아 조풍을 드날렸다.
갑오년(1414) 3월에는 자모산 연봉사에 가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정하여 '함허당'이라 이름하고 3년 동안 수행을 부지런히 했다. 그 후로 스님은 정유년에서 무술년까지 한 겨울 두 여름 동안 <금강경오가해>의 강석을 베풀었다.
이때 <오가해설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후로 반야의 강석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님의 나이 40여세로 반야사상이 완숙되었을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수행하되 마음대로 자유자재했다고 한다. 그는 마을에 나아가 다니기도 하고, 절에 머물면서 일정한 장소에 국한하지 않고 청하기도 하고 만류하기도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우리 선지식’이라고 했다.
경자년(1420) 늦가을에 스님은 오대산에 들어가서 향기로운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오대의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영감암에 가 나옹스님의 진영眞影에 제사한 뒤 잠을 잤다. 그런데 꿈 속에서 어떤 선승이 나타나 스님에게 “경명기화궐호득통卿名己和闕號得通”이라 하는 것이다. 스님은 절을 공손히 하고 꿈을 깼는데 갑자기 선기가 곧 하늘에 오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이튿날 득통은 월정사에 내려와 주장자를 버리고 한적한 방에 고요히 앉아 평생을 마칠 때까지 도태道胎를 기르기 위하여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물마시며 세월을 보내기로 했다. 그런데 주머니 속의 송곳 끝이 밖으로 나와 감추기 어려운 것처럼 그 도덕이 빛나 원근에 두루 전파되었다.
결국 세종대왕이 이 말을 듣고 신축년(1421) 초가을에 대자어찰大慈御刹(경기도 공양군 대자산大慈山)에 머물도록 하여, 스님은 거기에 주석하면서 왕과 여러 군신들, 그리고 수행납자들을 대접하기를 4년 동안했다. 그 뒤 갑진년 가을에 왕에게 글을 올려 어찰을 사퇴하고 길상, 공덕, 운악 등 여러 산에 노닐며 인연따라 날을 보내다가 문득 삼학三學과 일승법一乘法을 펴서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정각을 얻고 진풍으로 말운을 붙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스님은 신해년(1431) 가을에 영남 의양산 봉암사에 들어가 퇴락한 절을 수리했다. 그러나 스님은 법을 펴지 못하고 선덕 8년(1433) 계축 3월 15일 발병하여 심신이 편치 못했다. 4월 1일 신시에 스님은 조용히 앉아
“湛 然空寂 本無一物 靈光赫 洞徹十方 更無身心 受彼生死 去來往復 也無罣碍”
“담 연공적 본무일물 령광혁 동철십방 경무신심 수피생사 거래왕부 야무괘애”라 하고,
조금 있다가 또 “臨行學目 十方碧落 無中有路 西方極樂”
“임행학목 시방벽락 무중유로 서방극락”이라 했다.
이것이 곧 스님의 영결이다. 문도들은 5일 동안 그대로 모셔두었는데 안색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다비 후 치골을 향수에 씻으니 뼈에 붙은 사리가 확연히 빛났다. 효령대군이 이 사실을 상달하니 왕이 명령하여 제자들이 네 곳(현등사, 봉암사, 정수자, 연봉사)에 부도를 세우게 했다.
스님의 세수는 58세이며 법랍은 38년이다.
문하에 문수文秀 · 학미學眉 · 달명達明 · 지생智生 · 해수海修 · 도연道然 · 윤오允悟 · 윤징允澄 등이 있다. 스님의 저서는<함허득통화상어록涵虛得通和尙語錄>에 보면 〈원각경소圓覺經疏> 3권,<반야오가해설의般若五家解說誼> 1권,<영가집설의永嘉集說誼> <현정론顯正論> 1권, <반야참문般若懺文> 2질,<윤관綸貫> 1권,<함허서涵虛序> 1권,<대령소참하어對靈小參下語> <윤석질의론倫釋質疑論> 등이 있다.
(3) 법맥과 사상
함허득통화상의 법맥은 지공 · 나옹 · 무학 삼대 화상의 법계를 이어받았다. 지공이 서천축 108대 조사니까 함허는 가섭 후 101대 법손이 된다. 또 나옹이 평산처림에게 법을 받은 것으로 치면 달마 후 31세가 되며 임제종맥으로 보면 21세가 된다. 삼대 화상의 법맥을 따라 함허당은 역시 선법을 종통으로 하고 반야를 종지로 삼았다. 함허화상은 문장과 이론에 뛰어난 대교학자일 뿐만 아니라 선정사상을 현실에 밀착시켜 생활화한 대선사이다. 그의 중심사상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실긍정적 반야관이다.
반야(空)사상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현실부정적인 것 또는 출세간적인 것, 아니면 초현실적인 것으로 오인하고 있다.
그러나 함허는 <금강경> 서문에서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 즉 현실(此)에 반야(一物)가 실재(有)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교가에서 말하는 일물一物이나 선종에서 말하는 일물이나 선가에서 얘기하는 일착자는 희유한 것이기 때문에 보기 어렵고 황홀해서 추측키 어려우며, 미오를 따져서 범성으로 나누거나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일물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두무미無頭無尾하고 무명무자無名無字”라고 한 육조혜능의 일물이나 “설사일물說似一物이라도 즉불중卽不中이라”고 한 남악회양화상南岳懷讓和尙의 일물이나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라고 한 함허의 일물은 심연한 당처의 자리 곧 반야 자체를 말한 것이다.
화상은 반야의 본체는 명상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그 작용은 시간적으로 억천겁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통관하고 공간적으로 능소능대하여 적게는 미진에도 들고 크게는 법계를 다 쌀 수 있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첫째 희유한 반야는 체를 잡을 수 없어서 일물이라고 강칭하고, 둘째로 반야의 상은 공적하여 절명상이라 하며, 셋째 반야의 용은 시간적으로 관고금하고 공간적으로 위육합이라고 한다. 한량없는 묘용의 본래구족한 반야는 삼세의 주인이며 모든 법 중 왕인데 이것을 불조가 깨닫고 우리 중생들에게도 함유해 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그리고 반야지혜로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다 끊고 구공俱空의 일승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반야는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천상천하天上天下 유아독존唯我獨尊인 절대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이 곧 함허의 절대긍정적 반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절대평등의 인간관이다.
유교는 임금과 신하,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 즉 주종의 인간관이지만 불교는 누구나 다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절대평등의 인간관이다. 그래서 함허는 <금강오가해설의> 가운데 “석가釋迦도 안횡비직眼橫鼻直이시고 인인人人도 역안횡비직亦眼橫鼻直"이라(부처님께서도 눈은 옆으로 째지고 코는 밑으로 처졌으며 사람마다 또한 눈은 옆으로 찢어지고 코는 밑으로 흘렀다)고 했다. 이것이 함허가 주장하는 인간의 절대평등관이다.
셋째, 무피차無彼此의 열반관이다.
흔히 열반은 피안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함허는 “십유생十類生이 여시방불與十方佛로 일시성불도一時成佛道하고 시방불十方佛이 여십유생與十類生으로 동일열반同一涅盤이라”하고 이상적인 불세계를 현실 그대로 불세계라 했다. 즉, 함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닌 동일 열반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넷째, 무피차無彼此의 절대평등적 진리관이다.
진리는 따로 어디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항상 평등하게 있고, 그 평등 가운데는 너와 나를 차별하는 어떠한 것도 없다는 것이다. 화상은 “평등성중平等性中엔 무자타無自他라고 해서 자타自他가 없는 원여성員如性” 즉 절대평등의 진리관을 주장하고 있다.
다섯째, 물아일치物我一致의 우주관이다.
화상은 <현정론>에서 불교는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라 하고 유교에서도 “천지만물사일기天地萬物寫一己”라 하니 양교는 동일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함허는 <현정론> 맨 처음에, 도 그 자체는 시간(고금)과 공간(유무)을 초월해 있으나 거기에 다 통한다고 한 것을 보면 마치 반야일물般若一物을 설명한 것과 같다. 체성體性은 본래 정情이 없지만 성性이 미迷하면 정情이 생기고 정情이 일어나면 지혜智慧가 멀어지며 상념이 변하여 결국은 체體와 달라지는데 이에 따라 삼라만상이 형상으로 나타나며 또 생사가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와 유교의 근본적인 성정론性情論이다.
오계五戒는 인도人道, 십선十善은 천도天道, 사제십이연기四諦十二緣起는 이승二乘, 육바라밀六波羅密은 일승보살一乘菩薩이 각각 성취해야 할 수행덕목이라 하고 3장 12부 경전이 다 사람들로 하여금 정을 버리고 본성을 발현하도록 한 것일 뿐이라고 함허는 자신의 종교관을 피력한 뒤 불교와 유교를 비교했다.
儒以五常으로 而寫道樞하니 佛之所謂五戒는 卽儒之所謂五常也라
유이오상으로 이사도추하니 불지소위오계는 즉유지소위오상야라
不殺은 仁也요 不盜는 義也요 不婬은 禮也요 不飮酒는 智也요 不妄語는 信也라
불살은 인야요 불도는 의야요 불음은 례야요 불음주는 지야요 불망어는 신야라 (현정론)
즉, 화상은 오계와 오상五常을 배대하여 양교가 근본은 같다고 했다. 그런데 5계10선을 사실상 불교에서는 가장 천한 것이라고 해서 유교를 얕잡아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애는 사상적 뿌리는 같지만 그 깊이와 행동은 다르다고 지적한다. 유교가 살생을 하면서 인을 주장하는 것은 불교가 살생을 하지 않고 자비를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함허스님의 출가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배불론에 대해서 스님은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현실과 종교를 모르고 한 말은 일축해버렸다.
아무튼 함허득통스님은 쇠운에 접어든 불교를 붙잡고 “불자佛子는 잡아 죽여야 한다"는 유교인들을 설복해서 불 · 유의 과도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 대교사大敎師요, 대선사大禪師이며, 대종사大宗師였던 것이다.
39, 서산휴정(西山休靜, 1520-1604)
휴정은 법명, 성은 최崔씨 완산完山사람,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서산西山. 9,10세에 양친兩親을 잃고 과거에 낙방落榜하여 지리산에 들어가 경전을 공부하고는 숭인崇仁에게 출가하다. 21세에 영관靈觀에게 인가받고 만행萬行을 하다가, 1589년 정여립의 옥사獄事에 무업無業의 무고誣告로 체포되었으나 선조宣祖가 오히려 상을 내리다. 1592년 의주義州에서 宣祖의 명으로 都摠攝이 되어 義僧 5천을 인솔하여 倭亂 대처하다. 후에 金剛 · 妙香 · 頭輪山에서 가풍을 선양하다. 묘향산 圓寂庵에 제자를 모아놓고 설법 뒤에 입적하다.
저서:[禪家龜鑑] [三家龜鑑] [淸虛堂集 8권] [禪敎釋] [禪敎訣]등.
40, 편양(鞭羊) 禪師
- 걸인과 함께 양치며 살던 聖者-
(1) 시대적 배경
흔히 조선불교를 숭유억불의 법란시대라고 한다. 유생들로 가득 찬 조정 위정자들의 갖은 박해와 탄압과 멸시를 받으면서 근근이 명맥을 이어왔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갖은 시련이 있었기에 전국 각지의 수많은 납자들이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여 해탈장부가 된 것이다. 유생들의 박해는 도리어 도인들을 배출한 계기가 되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예는 숱하게 많다.
조선 초의 碧溪爭心선사는 沙汰를 당하여 황악산 古紫洞勿汗里의 어 느 호숫가에 은거하면서 호수에 곧은 낚시를 드리우고 삼매에 들었다. 碧松智嚴선사는 함경도에 침입한 여진족을 소탕한 장수로서 出家爲僧하여 벽계선사를 찾아가 땔나무 장사를 하며 수도하더니 급기야는 見性悟道했다. 芙蓉靈觀선사는 천민출신으로서 남의 집 종살이를 하다가 뜻을 세워 출가하여 九千洞에서 10여성상을 용맹정진한 끝에 打破漆桶하여 벽송선사의 衣鉢을 傳受하였다. 서산대사는 조실부모하고 고아가 되었는데도 열심히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에 응시하였고 낙방을 계기로 지리산의 신선을 찾을 양으로 義神洞天에 들어갔다가 崇仁長老를 만나 世塵을 벗은 뒤 西山窟에 처박혀 3년여를 씨름하더니 낮닭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대오하고는 조선불교의 중흥조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수행풍조의 전통 속에서 유년에 출가한 鞭羊禪師도 선배 도인들처럼 수행에만 전념하여 解脫丈夫가 되어 종풍을 振作하는 한편 廣濟蒼生하였던 것이다.
(2) 생 애
선사는 선조 14년(1581)에 竹州縣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張氏이고 아버지는 張珀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12세의 나이로 금강산 楡 岾寺의 玄賓선사에게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왜구가 강산을 짓밟던 8년 풍진 동안은 은사의 슬하에서 三藏을 이수하며 티 없이 자랐으며, 왜란이 가라앉자 捨敎入禪하여 제방으로 다니면서 여러 선지식을 찾았다. 선사는 19세 때 타파칠통하고 保任하면서 평안도 어느 목장에서 ‘양치기 생활’을 하면서 鞭羊堂이라는 법호를 얻게 되었다. 22세 때 묘향산의 淸虛禪師에게 입실하고 3년을 시봉하였으며 이때 스승의 진수를 체달하여 嗣法弟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청허, 곧 서산대사의 법동을 잇게 된 편양선사는 그의 법을 楓潭의심에게 전수하였으며, 풍담은 다시 月潭설제에게로, 월담은 喚惺志安에게 전하여 편양선사가 입적한 지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한국 승려 중 95% 이상이 모두 편양문손에 속하게 되었다. 편양선사는 서산대사의 제자 81인 가운데 가장 막내였다. 한 산중을 거느리는 조실자리에 앉은 도인들이 즐비하였으니 이 중에서도 四溟 · 逍遙 · 靜觀 · 鞭羊의 4대 문중을 이른바 ‘서산문하의 4대 문파’라고 한다.
하지만 3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사명 · 소요 · 정관 등 3대 문파는 그 대가 끊긴 지 오래이고 현재는 오직 편양문손만이 크게 성하여 우리나라 전체 승려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편양선사의 어느 면이 그토록 장하기에 선사의 문하만이 크게 떨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선사가 3년간의 양치기 생활과 평양성 내에서의 보살행의 공덕이 아닌가 한다. 양치기생활은 어떤 보수를 받고 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보림하는 가운데 양떼들을 돌본 것이었다. 선사는 양떼들을 자신보다 낮은 축생으로 다룬 것이 아니고 인간과 구별함이 없이 마치 赤子와 같이 여겨 그들의 보호자가 되고 선도자가 되어준 것이었다.
또 평양성에서의 보살행이란 선사가 보림하면서 평양성 내의 모란봉에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성 내에 사는 걸인들 수백 명을 한곳에 모아 그들을 보살펴주었다. 선사 자신이 문전걸식하는 형편인데도 수백 명의 걸인들을 친권속 같이 보살펴준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선사로서는 걸인들의 보호자 노릇을 하는 일이 수행의 한 방편인 두타행일 수밖에 없었지만, 선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를 가리지 않고 근 10년을 헌신하였다. 이 作福行을 실천궁행한 공덕으로 오늘날 전체 승려의 조사가 된 것이 아닐는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서산대사 문하에는 81인의 悟道弟子가 있었고, 이 중에서 한 산중의 조실이 된 분만도 50여 명이나 되었다. 그 분들 모두가 편양선사보다 법랍이 높은 선배들이었지만 그들의 後福이 편양선사보다 못한 것은 편양선사만큼 큰 복을 못 지었기 때문이리라. 평양성에서의 이타행을 끝내고 묘향산으로 돌아와서 선사는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맑은 성에 노닐기를 마친 뒤
묘향산에서 그름과 벗해 한가롭구나.
홀로 앉아 밤은 깊어가는데
앞봉우리 달빛은 마냥 차갑고녀.
(百城遊方畢 香岳伴雲閑 獨坐向深夜 前峰月色寒)
선사는 귀산 후 묘향산의 천수암과 금강산의 천덕사 등 사암에서 후학을 위해 개당 강법하여 널리 교를 선양하였다. 선사는 선을 닦아 깨친 도인이면서 전등 · 화엄 등 삼장을 강설하였으므로 선자에게는 本分宗師이고 교학자에게는 大講伯이었다. 이렇듯 선과 교를 雙修하고 幷闡한 것은 당시의 불교가 선교양종인 탓도 있겠지만 선교일치의 사상을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편양선사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선에 주안점을 둔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인조 22년(1644) 5월 10일, 이 날은 편양선사가 세연을 거둔 날이다. 묘향산 內院은 선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께서 입적하신 암자로서 스승의 최후를 지켜본 편양 자신이 또한 이절에서 坐化하였다. 임종에 이르러 제자 풍담의심에게 후사를 유촉하고 오되 오심이 없이 오신 길로 가되 가심이 없이 그렇게 가셨다. 선사의 세수는 64세이고 법랍은 53세였으며 은색 사리 5과를 수습한 제자들은 묘향산과 금강산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3) 사 상
조선불교는 한마디로 禪敎兩宗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납자들은 선교를 겸수하는 것을 정규과정처럼 여겨왔고, 또 그렇게 실천해 왔다. 처음 출가입산하면 3년 내지 10년을 행지생활을 하면서 중노릇하는 제반을 익힌다. 행자 중에서도 총명한 사람은 조사어록과 경전을 이수하기도 한다. 사미계를 받고 득도하면 본격적으로 三藏을 배우는데, 《華嚴》《傳燈》《拈頌》등 이른바 大敎를 수료하면 걸망을 메고 諸方禪院을 歷訪하며 참선하게 되는데. 이 과정을 보통 ‘捨敎入禪’이라 일컫는다.
이런 과정을 편양선사도 어김없이 거쳤다. 선교를 겸수한 것이다. 그리하여 40이 넘어 견성로도 후의 保任行을 마치고는 다시 산사에 머물며 수학납자를 提接하였는데 교학을 이수해야 할 학인에게는 삼장을 강설하고 참선대중에게는 禪家 특유의 방법으로 祖師禪旨를 선양하는 등 선교를 한 장소에서 한 스승이 가르친 것이 조선불교의 한 특색이기도 했다. 선원의 조실이 강원의 강사를 겸하였으므로 자연히 선교일치의 사상이 확립되기도 했지만, 편양선사는 교보다 선을 우위에 놓고 교는 선을 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여겼다. 서산대사의 선과 교를 편양과 사명이 전수하였으므로 이 두 분의 격을 여타 제자들보다 한층 높이 평가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편양선사의 문집에 ‘禪敎源流尋도說’이라는 글이 있다. 이 尋검(?)說은 선사의 禪敎觀이라 해도 좋고 선사의 사상을 십분 함축한 내용이라 해도 좋다. 이 글은 선사의 선과 교에 대한 견해를 아는데 충분한 내용이어서 한마디로 선사의 선교관이라 하겠다. 이제 이 심검설을 분석 검토하면서 선사의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선사의 선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가? 선사는 선을 교보다 우위에 두었으므로 심검설의 첫머리에 놓고 선을 俓截門이라 일컬었다. 물론 이는 선사의 스승이신 서산대사의 사상과 일치하며 멀리 중국 옛 조사들의 사상을 잘 계승한 것으로 이해된다.
옛날 馬祖의 一喝에 百丈은 귀가 먹고 黃蘗은 혀를 토했나니 이 一喝이 문득 이 拈花消息이며 또한 달마께서 처음 오신 면목이니 곧 空劫 이전 부모님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소식이니라. 諸佛諸祖의 奇言妙句와 良久 · 棒喝과 百千公案과 갖가지방편이 다 이에서 나왔느니라. 銀山鐵壁이라 발을 놓으려 해도 문이 없고 石火電光이라 思議를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것이 교밖에 따로이 전하신 선지니 이른바 俓截門이니라.
여기에서 언급한 염화소식이란 부처님이 교밖에 따로이 전하신 일이 세 차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이 세 차례 전하신 것을 삼처전심이라 한다.
첫째는 多子搭前分半座요 둘째는 靈山會上擧拈花이며 셋째는 沙羅林中示雙趺이니 이를 교외별전하신 선이라 한다. 이를 쌍수제자 마하가섭이 세존에게 받아가지고 이조 아난에게 전하고 아난은 다시 삼조 商那和修에게 전하여 서천에서 28대를 전하니 28대조는 바로 보리달마이다. 달마는 인도를 떠나 중국에 이르러서 제자 慧可에게 전했는데 혜가는 29조가 되고 혜가는 다시 30조인 僧璨에게, 승찬은 道信에게, 도선은 弘忍에게, 홍인은 慧能에게 전했다. 이 혜능이 33조이며 동토의 6조이니 중국적인 선을 확립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천하에 선법이 가득 차게 되었다. 마조는 6조 혜능의 수제자인 南岳懷讓의 법을 이은 碧眼宗師로서 直心是道란 말을 처음 사용하였으며, 대기대용을 적절히 잘 구사하여 많은 납자의 눈을 뜨게 한 스님이다. 이 마조의 일갈이야말로 세존의 염화미소, 바로 그 소식이며 달마가 동토에 처음 오셔서 전하신 선의 진수이니 이 선을 체득하면 一超直入如來地하므로 경절문이라 한다.
그러면 이 선을 체득하는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선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경절문 공부는 저 조사의 공안상에 때때로 들어 깨쳐서 의심 일으킴을 성성히 하되 천천히도 말고 빠르게도 말며 혼침과 산란에 떨어지지 아니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잊지 않기를 갓난애가 어머니 생각하듯 하면 마침내 분연히 한번 묘를 발하리라.
선사는 여기에서 간화선을 언급하고 있다. 원래 달마조사가 전한 선은 묵묵히 自心을 반조하는 이른바 순선이었는데 육조혜능이 一物을 제창한 이래 趙州從염(言+念)等의 대에 이르러 간화선이 확립되었다. 그래서 육조의 선은 남악회양 문하에서는 간화선이 청원행사의 문하에서는 묵조선이 확립 발전하여 대대로 전승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에 이르러 태고보우선사가 중국에 가서 임제종지를 받아와서 대대상승하여 편양에 이르렀으므로 자연히 간화선의 종지를 따르게 되었다. 위의 글은 화두를 드는 요령을 설명한 것으로서 중국 大慧宗杲禪師의 가르침과 궤를 같이한다.
다음으로 선사의 교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옛날 교가종장들의 4교 때처럼 4교를 들고 있으니 화엄 · 아함 · 방등 · 법화가 곧 그것이다.
교에 사등차별이 있으니 佛이 처음 성도하자 緣熟菩薩과 上根凡夫를 위하여 二頓을 설하시니 화엄이요 성문을 위하사 사제를 설하시고 연각을 위하사 12인연을 설하시니 아함이며, 보살을 위하사 6도를 설하시니 방등이요, 전의3승구경을 위하사 아녹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시니 법화라 이를 4교라 하느니라.
선사의 4교관은 옛날 종장들이 이미 제창하신 것이어서 특별한 것은 아니나, 사등차별의 교법은 실은 차별이 없고 다만 4교를 수용하는 사람의 근기에 스스로 차별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사제가 화엄보다 얕지 않고 화엄이 사제보다 玄微하지 않아서 모두가 일법을 따름이라고 역설하였으니, 이는 선사의 안목이 뛰어났음을 보게 되는 장면이라 하겠다.
“연이나 당기에 스스로 차별이 있을지언정 법은 차별이 없나니 樹王을 일으키지 않고 鹿苑에 노닐며 돈설이 곧 사제를 설한 것이니라. 그런즉 仙苑과 覺場이 한자리요 화엄과 사제는 일설이라, 화엄이 반드시 사제보다 현미하지 않으며 사제가 반드시 화엄보다 얕지 않느니라. 다만 근기를 따라 대소의 차별이 있나니 마치 하늘이 비를 내림에 초목이 윤택함을 받되 초목이 스스로 길고 짧음이 있을지언정 그 비는 한맛이니 불설도 또한 그러하여 교는 근기를 따라서 다를지언정 그 실제는 다 일법이니라"
그러면 이 교, 즉 圓頓門을 깨치는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원돈문 공부는 일령심성이 본래 스스로 청정하여 원래 번뇌가 없음을 반조함이니 만일 경계를 대하여 분별하는 때를 당해 문득 이 분별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앞을 향하여 이 마음을 추구하되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고? 하라. 만일 일어나는 곳을 궁구하되 얻지 못하면 곧 심두가 뜨겁고 답답할 것이라, 이것이 좋은 소식이니 놓아버리지 말지어다.
“자기의 심성을 반조하는 공부를 선사는 권하고 있다. 분별심이 일어나기 이전을 향하여 그 분별심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고 하고 궁구해 가되, 일어난 곳을 못 찾아 마음속이 답답할 것이지만 바로 그 경지가 깨침으로 가는 좋은 소식인 만큼 방사하지 말고 계속 추구해 나가라고 가르쳤다"
선사는 또 심검설에서 염불문 공부를 언급하고 있는데, 참선 · 간경과 함께 수행의 삼대로 중 하나인 점으로 보아 여기에서 설한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점이라고 하겠다.
“염불문 공부는 行住坐臥에 항상 서방을 향하여 존안(阿彌陀佛)을 첨상하여 의지하여 잊지 않으면 목숨이 마치는 때에 아미타불이 오셔서 상련대에 영접 하시리니 이 마음이 곧 불이며 이 마음이 곧 육도만법이니라. 그러므로 마음을 여의고 달리 부처가 없으며 마음을 여의고 달리 육도선악의 여러 경계가 없느니라"
“마음을 오롯이 하여 아미타불을 염하여 잊지 않는다면 臨命終時에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서방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사상은 미타경에 설한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 심검설에서 염불문 공부를 언급했다고 해서 편양성사 자신이 염불인이었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불교수행의 세 가지 길 중에 속하는 까닭으로 후생들을 위해 올바른 수행방법을 제시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선사는 임명종시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설하고 있다.
“목숨이 마치는 때에 만일 불경계가 현전함을 볼지라도 경동심을 없이 하며 만일 지옥경계가 현전함을 볼지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이 할 것이니 심과 경이 일체라. 이를 不二라 하나니 이 불이법문 중에 어찌 凡聖 · 善惡의 차별이 있겠는가?"
“불경계가 현전하거나 지옥경계가 나타나거나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 말아라. 경계는 마음에서 생기는 것 그러므로 선악제경에 마음을 내지 않으면 마음과 경계가 여여하여 곧 일체가 될 것이다. 이를 不二라 하거니와 이 불이의 경지가 부사의한 제불경계인 것이다. 선사의 가르침이 여기에 이르러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음을 재삼 감탄해 마지않으며 염불문 공부의 결론을 마저 들어보기로 하자"
이와 같이 관찰하여 미혹하지 않으면 생사마를 어느 곳에서 찾으리요? 이 역시 도인의 마구니를 제압하는 요절이니 학자는 모름지기 착안하여 살펴볼지니라.
선사는 심검설에서 선과 교를 밝힘에 있어 조금도 무리와 억설이 없이 선을 깨친 도인다운 품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끝 부분에서 경절문 · 원돈문 · 염불문의 공부하는 요령을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설한 데에서 스승으로서의 대자대비를 공감하게 되어 더욱 돋보인다.
또 臨命終時의 마음가짐을 맨 나중에 설하여 우리에게 생사대사를 해결하도록 촉구한 고차원적인 배려에서 선사를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해짐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리라.
(4) 업 적
편양선사가 본격적으로 행화하던 시절은 임란이라는 전대미문의 전란을 치른 뒤여서 민심은 흉흉하고 백성들은 기아와 병마에 극도로 시달림을 받는 시기인지라 많은 제약과 어려움이 따랐다. 평양성에서 걸인들을 보살피면서 민심의 소재를 알게 되고 백성들의 고충도 피부로 절감하였으므로 선사는 더욱 자애심을 발하여 내 나라와 내 겨레를 아끼고 애휼히 여겨 자신의 고통쯤은 아예 잊은 채 중생제도에 여생을 바쳤다.
나라가 어지러우매 승풍도 다소 흐린 점이 없지 않았을 터이나 선사는 시종일관 계율을 엄정히 하고 오로지 수행일로만을 부지런히 걸음으로써 전체 승려의 모범이 되었으며 귀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불법문중의 동량으로서 천하승려의 정신적 의지자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이타행이 어디 있으며 이보다 더 큰 업적이 또 어디 있겠는가. 선사의 그 모범됨과 귀감 됨의 공덕으로 선사의 문손이 연륜이 쌓일수록 더욱 성하여져서 3백여 년이 흐른 현금에 와서는 전국 전체 승려가 선사의 문손 아님이 없으니 편양선사의 도덕과 복업의 크고 장하심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다 하겠다.
그런데 필자의 무딘 솜씨로 고작 이 정도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독자들께서는 이해하여 주시기 바라면서 끝을 맺는 바이다.
41, 부휴선사(浮休禪師)
--名利 외면한 수행승의 본보기--
(1) 생 애
浮休禪師는 속성이 김씨이고 법명은 善修이며 호는 浮休로 전북 獒樹(지금의 남원) 사람이다. 부친의 이름은 積山으로 조상은 일찍이 신라 조정에 높은 벼슬을 지낸 대성이었지만 신라가 멸망하면서 가족도 몰락하여 서민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李씨인데 자식이 없음을 근심하다가 부부가 함께 서원하기를 만약 자식을 얻으면 출가시키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길가에 있는 한 奇石에 자식을 얻기를 기도했는데 어느날 저녁 꿈에 한 신승이 하나의 둥근 구슬을 주자 이것을 받아삼키고 임신을 하였다. 선사가 태어난 해는 明의 世宗帝 嘉靖 22년(중종 38, 1543) 癸卯 2월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를 “뜬세상이 매우 어두우니 저는 장차 출가하기를 바랍니다”고 하더니 마침내 출가를 결심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信明長老를 좇아 머리를 깎고 芙蓉靈觀대사의 게송을 듣고 그의 친절한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그의 심법을 남김없이 터득하였다. 그의 신체적 특징은 배가 크고 눈썹이 길며 몸이 컸는데 다만 왼쪽 손이 조금 不仁하였다. 득법 후에는 京師에 나아가 당시의 재상 盧守愼(蘇齊)의 장서를 빌려 보았는데 7년 만에 그의 책을 남김없이 다 보았다. 그의 필법 또한 매우 뛰어나, 당시 사명대사와 더불어 二難(두 사람의 상대하기 어려운 명수)이라 불리어졌다.
壬辰亂을 당하여 덕유산의 초암에 있었는데 왜군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암굴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저녁 늦게 왜적이 지나갔으리라 생각하고 샛길을 따라 암자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때 돌연히 왜군 10여명이 숲속으로부터 나와서 칼을 휘두르며 기세를 떨쳤으나 선사는 叉手하고 서서 태연하게 동요하지 않았다. 왜적들은 이것을 크게 이상스레 여겨 모두 선사에게 엎드려 절하고 흩어졌다. 다음 해에 사명대사가 선사를 조정에 천거함으로 진중에 이르러 선사도 승장의 한 사람이 되어 전지를 전전하였다.
난이 평정되니 선사는 가야산으로 가서 다시 선창의 사람이 되었다. 그때 명나라 사신 李宗城이 황제의 명을 받고 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에 봉하려고 서책과 함께 바다를 건너려 하다가 도중에 가야산 해인사를 유람하던 중 선사를 한 번 보고 심복하여 돌아갈 것을 잊고 며칠을 머물다가 돌아갔다.
선사가 九天洞으로 옮겨갔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눈을 감고 『원각경』을 암송하는데 아직 경을 다 암송하기 전에 한 마리의 큰 구렁이가 계단 밑에 넘어져 있음을 보고 그 꼬리를 제쳐주니 다시 서서히 기어가는데 쫓아갈 수가 없었다. 그날밤 꿈에 노인이 와서 선사에게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화상께서 독경하는 것을 듣고 이미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고 하였다.
光海君朝에 선사가 두류산에 거주할 때의 일이다. 임자년에 광인의 무고를 받고 제자 碧巖과 함께 당시 수도에 압송되어 옥에 갇히게 되었다. 광인이 누구인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당시 풍수설에 밝고 여러 큰 절을 짓게 하면서 궁중에 출입했던 性智라는 설이 있다. 선사가 옥에 갇히자, 옥을 관리하는 사람이 스님을 보니 氣宇가 軒昻하고 언설도 또한 비범한지라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이것을 광해군에게 아뢰었다.
다음날 광해군이 선사를 안으로 들도록하여 법요를 물어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紫蘭가사, 壁彩장삼, 염주 등을 하사하고 그 밖에도 진기한 물건들을 후하게 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봉은사에 큰 재회를 열어 선사를 도사로 삼아 궁중에서 쓰던 좋은 말을 타게 하고 圉人들로 하여금 전도케 하니 당시 경성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그 모습을 우러러 뵈옵고 절을 하면서 그 뒤를 따랐다. 선사는 평생토록 신도로부터 받은 것을 일찍이 한 물건도 간직한 일이 없고 모두 흩어서 필요한 사람에게 베풀어 주었다. 선사의 기품과 도량은 매우 깊고 의연하였으며, 크고 넓어서 헤아릴 수 없었다. 선사의 法學(법력의 명예)가 해내에 분분하여서 스님을 찾아와 도를 배우려는 자가 7백여에 달했다.
광해군 6년 庚寅에 선사는 72세가 되어 송광사로부터 쌍계사 · 칠불암으로 갔는데, 이는 입적할 땅을 정하기 위함이었다. 다음 해 7월에 가벼운 병증세를 보이더니 上足제자 碧巖覺性을 불러 간절히 법을 부촉하였다. 11월 1일 午時에 목욕을 마치고 시자를 불러 지필을 가져오도록 하여 하나의 게송을 썼다.
‘七十三年을 幻海에 노닐다가 오늘 껍질을 벗고 初源으로 되돌아간다. 廓然空寂하여 원래 一物도 없거니 어찌 菩提와 생사의 뿌리가 있으랴.’
쓰기를 마치고 조용히 遷化하니 法臘이 57세였다. 문인들이 靈骨을 수습해 이것을 나누어 海印, 松廣, 七佛, 百丈 네 곳에 부도를 세웠다. 이 일이 있은 지 5년 후에 광해군이 ‘弘覺登階’ 라는 시호를 陽하였다.
(이상은 李能和 선생의 『조선불교통사』 高橋亨의 『李朝佛敎』 및 忽滑谷快天의 『朝鮮禪敎史』 金仁德 교수의 『浮休禪師의 禪思想』 을 참조하였음.)
(2) 교우관계
芙蓉靈觀선사의 심법을 곧바로 이은 직계제자로는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세에 학덕과 공훈 및 승계에 있어서 서산대사를 짝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만 서산대사에게 사명대사와 같은 걸출한 제자가 나와서 스승의 법예를 드높인 것처럼 부휴대사도 碧巖覺性과 같은 빼어난 제자와 翠微 · 白谷 · 晦隱 등과 같은 훌륭한 제자를 두어 그 법맥이 면면히 이어졌다.
벽암각성은 사명대사의 뒤를 이어 팔도도총섭이 되어 毫名을 떨친 사람이다. 물론 제자의 많고 적음과 세상에 대한 공적에 따라서 바로 그 사람의 禪的境地를 평가할 수는 없으나, 이처럼 훌륭한 제자를 키워낼 수 있었음은 그의 법력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다만 부휴선사는 서산대사와 법형제이기는 하지만 나이가 23세나 아래이므로 나이만으로 보면 사명대사와 동년배가 된다. 그러므로 법형인 서산스님을 스승과 같이 존중하였으며, 사명대사와는 친구처럼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사명스님의 글이 있다.
“성인이 가신 지 3천년이 지난 지금 大雄(부처님)의 진실한 법은 날로 쇠퇴하고 마군의 말들만 분분한데 사람들은 모두 이것에 취해 있구나. 金言은 땅에 떨어지고 세상은 헛된 말만 쫓아서 집착하니 이 때를 당하여 靈山이 어찌 평안하겠으며 少林은 어느날 생기를 되찾을 것인가. 지금에는 오직 正眼을 지닌 우리 형님이 있을 뿐이니, 형님이 아니고서는 누가 이 邪網을 다시 정돈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 형님이라 칭한 것은 곧 부휴선사를 가리킨 것이다. 두 분의 서로를 아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사명대사가 나라의 위급함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다 보니 종문의 본분사에 충실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이를 은근히 자기가 마음으로 인정하고 존경하는 부휴선사에게 당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부휴선사는 다만 종문에서만 선지에 밝은 탁월한 스님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당시에 학덕과 인격을 갖춘 최고 수준의 유생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의 재상이었던 盧守愼과의 관계가 잘 말해준다. 선사가 그의 책을 빌려서 7년 만에 모두 독파하였음은 이미 말한 바이지만 두 분은 사상적으로도 불 · 유에 구애됨이 없이 토론하여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노수신이 유배지에서 저술한 『夙興夜寢箴註』 에 心의 體用을 설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一物이 문득 지나가도 眞體는 전과 같이 그 光靈을 모두어 흩어지지않는다. 모든 사려가 끊어져 明鏡止水와 같되 터럭 끝만치도 꾸민 흔적이 없으며 虛明靜一의 상이 있으되 비록 귀신이라 할지라도 그 分際(분별되어진 모습)를 볼 수 없으니 이것이 靜하면서 存養하는 것 이 다"
여기서 一物이라 함은 眞如一心이라 볼 수 있고 眞體란 心眞如自體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心體가 비록 작용한다고 할지라도 眞如自性은 본시 그대로의 光靈이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또한 사려가 끊어져 명경지수와 같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이는 인위적으로 닦아 얻는 것이 아님을 다음에 말한 것이며, 끝으로 眞如自性 자체는 귀신이라도 형상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는 心의 體用을 묘하게 설명하려고 한 것으로 비록 언로의 자취가 남겨진 흠이 있으나, 선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없이는 하기 힘든 말이다. 그러므로 이퇴계 선생도 이 글을 평하여 말하기를, “禪의 寂照虛通과 다를 게 없다”고 하였다.
또한 노수신은 竊見通書에서 말하기를 “성인을 가히 배울 수 있습니까? 배울 수 있소이다. 요긴한 것이 있습니까? 있소이다. 청컨대 여쭈어 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가 요긴한데 無欲입니다. 무욕한즉 靜虛하고 動直합니다. 靜虛한즉 밝고(명) 밝은즉 통합니다. 動直한즉 공평하고 공평한즉 溥大하게 됩니다. 明通하고 公溥하면 두루할 수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노수신이 비록 유학자이기는 하지만 심의 체용에 대한 이해와 공부방법에 대해서는 선사로부터 시사받은 바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3) 법맥과 선사상
松廣寺嗣院事蹟碑를 보면, 臨濟禪師로부터 18대를 전하여 石屋淸珙에게 법이 전해졌고, 이 법을 고려의 太古普愚선사가 전해 받았으며, 다시 여섯 번 전승되어 부휴선사에게 이어졌다고 한다. 또한 송광사 開倉碑에서 말하기를, “고려승 보우가 중국 가무산에 들어가 석옥청공선사의 회상에 참여하였는데, 淸珙은 임제의 18대 嫡孫인 바, 보우가 이 법을 남김없이 증득하여 幻庵混修에게 전했다. 혼수는 龜谷覺雲에게, 각운은 登階淨心에게 전했으며, 정심은 碧松智嚴에게, 지엄은 芙蓉靈觀에게, 그리고 영관은 상족제자에게 전했는데 그 이름이 善修이고 자호는 부휴인 바 內典을 모두 꿰뚫어 一代의 宗師가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부휴선사가 서산대사와 동문의 형제임을 알 수 있음과 동시에, 임제선사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선종의 골수 법맥을 계승한 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사상적 핵심은 문자의 소전을 뛰어난 格外禪道理를 종지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이 가운데 소식을 누가 알 수 있으랴. 크게 분발하여 제 몸뚱이도 잊고, 간절히 疑團을 일으키니,囮地一聲에 천지가 무너지거늘, 어찌 북쪽바다 남쪽 땅을 논의할 것인가?"
남쪽이다 북쪽이다 분별하는 것은 인간의 주관적인 생각에 따른 것일 뿐, 광대무변한 허공계에는 그런 분별이 붙을 수가 없다. 하물며 천지가 무너져 버린 마당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는 문자의 해석이나 구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적 체험의 경지이며 이는 일체의 망상이 부서져 본연의 심광이 열린 자리를 노래한 것이다. 마음의 기틀이 근원의 빛으로 되돌아왔으므로, 이를 一念廻光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마다 스스로 衝天하는 기운이 있으니, 일념회광하면 곧 대장부이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이신 소식이 끊어졌다면 말하지 마라. 비가 지나간 뒤에 산새들이 다시 서로 부른다" 흔히 말법시대에는 참선을 해도 소용없다고들 한다. 시대가 혼탁하고 중생의 근기가 어둡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 發心求道는 하지 않고, 그 책임을 시대에 돌리려는 것이요, 자기 자신을 중생일 수밖에 없다고 자굴하는 것인 바 선사는 이것을 경계한 것이다.
진정한 구도심은 안이한 상황에서보다 오히려 위기의 자각에서 더욱 치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가 온 뒤에(즉 고뇌를 극복한 그 자리에) 깨달음의 환희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길은 단순한 도피의 길이 아니요, 적극적인 초극의 길이다. 그러기에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기틀을 당해서 活眼을 열며, 사물에 응해서 玄風을 떨쳐라.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毘盧의 정수리를 밟으면, 연꽃이 불 속에서 피어나리라"
어렵고 답답하며 위험한 일에 직면하여 눈을 감아 버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눈을 똑바로 뜨고 진상을 직시해야만 된다. 정신이 죽으면 눈을 뜨고 있어도 죽은 사람과 같으며, 산 정신으로 문제를 똑바로 보면 진상을 깨달을 수 있다. 진상을 깨닫고 보면 두려울 것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자타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다. 진상을 깨닫고 보면 두려울 것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자타가 함께 자유로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스스로 중생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체념하거나 자굴하지 않을 수 있어서 聖俗의 한계를 뛰어넘으니, 비록 번뇌의 불꽃이 맹렬한 사바 속에 있을지라도 청정한 자성이 결코 물들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진실에 돌아와 망상이 곧 空임을 了達하면 중생과 부처가 본시 통해서 같아지나니, 미혹함은 마치 불나비가 불꽃 속에 뛰어듬 같고 깨달음은 마치 학이 새장을 벗어남과 같다"
불꽃이 나비나 곤충을 태우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니요 미물이 스스로 미혹하여 제 몸을 태우는 것일 뿐이다. 창문이 본시 열려져 있으나, 미혹한 생명이 열린 곳을 향해 날지 않고 닫힌 창문만을 두드림은 창문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장애는 본시 밖에 있는 것이 아니요, 제 스스로의 미혹에 있음이 분명할진대 답답함에서 벗어나는 길도 지혜의 눈을 여는 길 밖에 없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 진리가 특별한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말(言)을 잊고 그 뜻에 계합하여라. 그 근본 뜻에서 활안을 열면 邪魔外道가 스스로 歸降하리라"
마음에 미혹됨이 있어 이것과 저것이 막혀 있으면 통할 길이 없고, 마음이 통해 있으면 막힘이 없다. 그러니 제 마음은 막아놓고 있으면서 다른 것이 나를 장애롭게 한다는 생각이 있는 동안은 사마외도의 작란을 실감할 수 밖에는 없다. 반대로 제 마음이 통해 있으면 본시 사마외도가 있을 자리가 없고, 설사 그런 것이 있어서 작란을 하려 할지라도 어찌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본시 통해 있는 것을 억지로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허공을 누가 막아 놓을 수 없음과 같다.
그러면 일념회광하여 활안을 열고 활발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선사는 간화선의 방법이 그 첩경이 됨을 이렇게 말한다.
“趙州의 無字에 疑端을 일으켜 12시중에 뜻을 오로지하여 보라. 물이 다하고(盡) 구름이 다한 자리에 이르면 곧바로 祖師의 關門을 때려 부수리라"
조주선사의 무자화두는 매우 유명하여 중국에서 看話禪이 행해진 이래 가장 대표적인 화두로서 손꼽히고 있다. 이 화두가 생긴 유래가 있다. 어떤 날, 한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개(大)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곧 ‘無’라고 답하였다. 이 대답을 들은 스님은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히『열반경』 에는 ‘-切衆生悉有佛性’이라 하여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째서 스님은 개에게 불성이 없다고 하였을까 하는 것이 문제였다. 만약 그 스님이 부처님이나 조주스님을 의심했다면 굳이 의심을 일으킬 까닭이 없다. 또한 조주스님도 童眞出家한 大善知識으로 ‘古佛’이라 불리워지는 분이니, 결코 虛言을 할 리가 없다. 그러니 그 스님은 큰 의심뭉치가 가슴을 가득 채워 밤이고 낮이고 이 문제를 참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화두를 참구함에 있어서는 화두에 의심을 일으키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진실로 의심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먼저 큰 신심을 전제로 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만약 신심이 견고하지 않으면 절실한 의단도 생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산대사도 선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三要’가 있는데, 첫째가 大信根이요 둘째가 大疑團이며 셋째가 大憤志라고 했다. 부휴선사의 사상적 맥락도 서산스님과 軌를 같이하므로, 大疑團과 大憤志를 중시해서 發憤忘身하고 절실히 의단을 일으킬 것을 강조함과 동시에 큰 선심을 또한 매우 중시한다. 그러므로 선사는 이렇게 말한다.
“道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오직 나에게 있나니 부디 먼 곳에서 구하거나 하늘에서 구하지 마라. 마음을 거두고 산창 밑에 조용히 앉아서, 낮과 밤으로 항상 趙州禪을 참구한다"
즉 道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있음을 철두철미하게 믿어야만 趙州禪도 비로소 참구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도가 나에게 있음을 믿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활안이 열려서 몸소 그런 것임을 증득한 것이 아니요, 여래의 말씀을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말씀이 없으면 처음부터 의심을 일으킬 것도 없다. 따라서 선의 참구는 여래의 말씀을 부정하는데 그 특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래의 말씀을 몸소 체증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여래의 말씀을 듣고 보면서 제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으면서도 문자만 이해한 것으로 만족한다면 이는 진실한 불자가 아니요, 또 직심이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선은 큰 믿음과 진실한 마음을 바탕으로하여, 어째서 여래가 그와 같이 말씀하셨는지 그 속뜻(살림)을 끝까지 체득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선과 교가 본시 원융하여 전혀 갈등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부휴선사는 사명대사 小禪疏에서 말하기를 “부처님 법은 자비스런 배가 되어 모든 중생들을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네주시니 삼계의 火宅을 면하려면 모름지기 三寶의 威神을 힘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한 薦登階禪師疏에서 말하기를 “위대한 부처님의 중생을 제도하시는 대비는 만겁을 지내도 다하지 않는다”고 했으며 또 追薦父母疏에서는 “법계의 含靈이 다 불법의 가피의 힘을 입었고 하늘과 같이 끝이 없으매 나를 낳으신 부모의 은혜를 정성껏 갚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문을 두드려 그 저승의 길을 닦아야 할 것이온데, 만일 귀의하는 마음이 간절하면 어찌 그 감응이 더디겠습니까?" 하였다.
이처럼 부휴선사는 선종의 골수 법맥을 이은 종사이지만 大信을 바탕으로 활안을 열어, 말의 끝을 버리고 그 속뜻을 포섭하여 일체함령을 자재롭게 度脫하는 길을 걸었으니, 진실로 대승의 참 불자요, 이것이 곧 한국 선종의 특색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42, 백곡(白谷)화상
- 척불(斥佛)의 부당성 항의한 대장부 -
(1) 백곡(白谷)의 생애
백곡허능(白谷處能)(1619-1680)은 숭유배불정책으로 인해 불교가 그 명맥을 유지하기조차 힘에 겨웠던 조선 중기에 출현하였다. 그는 당시 가혹했던 배불정책에 대해 공식적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촉구했던 유일한 승려로 기록되고 있다. 전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백곡의 생애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유문집인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백곡선사탑명(白谷禪師塔銘)』, 이 탑명을 쓴 최석정(崔錫鼎)의『명곡집(明谷集)』 등 단편적인 몇몇 기록들을 통해 그 편모를 더듬어 볼 수 있을 뿐이다.
백곡의 속성은 전(全)씨, 자는 신수(愼守), 광해군 9년(1619)에 태어났다. 법명은 허능(處能), 백곡은 그의 법호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속리산에서 살았다. 속리산에서 2-3 년을 배우다가 17-18세 무렵에 서울로 오라왔는데 서울에서의 백곡은 불학(佛學)보다는 잠시 한문과 유학에 더욱 전념하고 있었다. 이때 백곡은 주로 동양위(東陽尉) 동애(東涯) 신익성(申翊聖)(1588-1644)의 집에 머물면서 경사(經史)와 제자(諸子)의 책을 읽고 유학과 문사에 대하여 깊은 조예를 갖게 된다. 동애와 어떤 관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이며 병자호란 당시 척화오신(斥和五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한 그와의 친분은 어쨌든 백곡으로 하여금 당시 고관대작 및 지식인들과의 교제 폭을 넓게 해주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경사(京師)에 머물면서 그는 고관 문사들과 더불어 시문(詩文)으로 두텁게 교유하였으며 약관에도 채 이르지 못한 나이에 기재(奇才)로 불릴 만큼 문명(文名) 또한 높았다. 그러나 백곡은 이같은 경사제자에 대한 지식이나 뛰어난 문명에만 안주하지는 않았다. 동애의 집에서 4년을 지낸 그는 어느날 문득 ‘기사(己事)가 미명(未明)함’을 깨달았다. 그 길로 백곡은 멀리 지리산 쌍계사로 내려가 벽암각성(碧岩覺性)(1575-1660)을 찾아뵙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미 15세 때 속리산에서 출가한 몸이기는 했지만 진정한 출가는 이때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나이 20세를 조금 넘겼을 무렵의 일이다. 각성의 문하에서 20년 동안을 수도에 전념한 후에 그는 스승의 법을 전해 받았다.
그로부터 백곡은 중년에는 서울 가까운 산사에 머물렀으며, 현종 15년(1674)에는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있다가 3개월이 채 못 되어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백곡은 얼마동안 표연히 남북을 두루 유행하며 속리산 · 성주산 · 청룡산 · 계룡산 등지에서 법석을 열어 전법활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는 그의 나이 60세 전후의 일이므로, 학덕이나 사상이 완숙한 경지에 이른 시기였다. 그는 대둔산 안심사에서 가장 오래 주석하였는데, 숙종 6년(1680) 7월 2일 64세를 일기로 입적하니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백곡집(白谷集)』 2권이 전해지고 있다. 그의 유문집을『대각등계(大覺登階)』으로 제명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또한 대각등계라고도 불렸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곡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여기서 잠시 그의 저술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대각등계(大覺登階)』은 물론 불교사상을 체계적으로 다룬 저술이 아닌 그의 시문집이다. 우리는 그의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시나 문장을 통하여 그의 시와 문사가 얼마나 유려하고 호방 · 웅건한가를 친히 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시재(詩才)는 당시 선배 거공(鉅公)들의 아낌없는 사랑과 칭찬을 받았음은 물론, 효종(孝宗)같은 이도 세자로 있을 때에 백곡의 문덕이 탈속의 높은 경지에 있음을 극찬한 바 있다. 그는 선사(禪師)이면서도 난해한 선시류(禪詩類)가 아닌, 조야의 상찬과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격조 높은 작품들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한국 시문학사에 있어서도 특출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그러나 여기서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그의 이 같은 뛰어난 시문이 아니다. 문집 하권에 제사(諸師)의 비문 · 행장 · 記 등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 1편의 존재가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국가의 가혹한 배불정책에 대한 불교측의 공식적인 항의인 동시에 백곡의 분명한 호법의지를 보여주고 있는『간폐석교소(鍊廢釋敎疏)』는 오직 이 문집에만 그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 따라서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은『간폐석교소(鍊廢釋敎疏)』를 통해 조선불교의 암울했던 시대상황과 함께 당시 불교계의 호법의지의 일단을 전해주고 있는 만큼, 그 사료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할 만한 문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 법계(法階)와 선교관(禪敎觀)
여말선초에는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의 문하 법손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어 법맥을 상승해 왔다. 그러나 곧 이어 단행된 조선 초기의 종파 축소 및 통폐합을 비롯하여, 이후 도첩제 및 승과제의 폐지 등으로 불교계는 종맥가통마저 상실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럴 무렵에 서산대사 휴정(1520~ 1604)이 출현하여 선대상전(先代相傳)의 법맥을 확고하게 일으켜 세우고 있음은 이미 주지하는 사실이다. 휴정이 확립한 법맥은 물론 그의 법조 벽송으로부터 영관으로 이어져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휴정보다 나이는 23세 연하이면서도 동문의 위치에서, 당시는 물론 오늘의 한국 불교계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던 고승으로 부휴선수(浮休善修)(1543 -1615)가 있다. 즉, 지엄으로부터 영관에 이어진 임제의 법맥이, 영관 이후에는 휴정과 선수 양대 문하로 나누어져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백곡은 이 선수파의 법계에 속한다. 선수의 7백여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벽암각성의 법을 전해 받았으므로, 그는 곧 선수의 법손이 되는 것이다.
영관 이후 휴정의 문하와 선수 문하의 활동은 불교계 내의 법계형성 분포로나 당시 외란에 처한 국가적 현실참여에 있어서 양대 산맥을 이룬다. 흔히 휴정 이후 조선 불교계는 휴정 문하에 의하여 주도된 것으로만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은 선수 이후 각성, 처능 대에 이르러서는 휴정 문하 못지않게 그 세(勢)가 번성하였다. 국가적 현실참여의 활동 면에서 보더라도 임진왜란 때에는 휴정과 그 문도에 의하여 의승군의 활동이 주도되다가 병자호란 과정에서는 양계파가 쌍벽을 이루고 각성 이후 응준과 백곡이 팔도도총섭을 역임했던 사실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선수, 각성으로 전해져 온 법을 이은 백곡의 선교관은, 휴정의 그것과 기본적으로는 입장을 같이하면서도 여기서 한 걸음 더 발전적인 모습을 띠고 있어 눈길을 끈다. 즉 선교관은 철저하게 합일적이고 일치적인 것이다. 이는 한국불교의 통합사상적 성격을 또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한국불교의 통불교적 전통은 신라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그 근원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원효의 사상이 고려시대에는 의천의 교관겸수로 나타나고 그것은 다시 지눌의 정혜쌍수로 전개되면서 선교일치의 총화적이며 통불교적인 사상의 흐름을 형성해 왔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런 사상이 휴정(休靜)에 의해 재삼 확인 실천되고 있었다 할 만한데, 여기서 편의상 백곡의 선교관을 휴정의 그것과 비교하면서 살펴본다. 휴정의 선교관은 그의『선가귀감(禪家龜鑑)』 에서 말하고 있듯이 ‘선시불심(禪是佛心) 교시불어(敎是佛語)’라는 한 마디에서 명료하게 드러난다. 세존이 삼처(三處)에서 전심한 것이 선지(禪旨)이며 그 분 일대의 설법이 교문(敎門)이므로 선은 곧 불심이요 교는 곧 불어라는 것이다. 휴정이 입적 10여 년 후에 출생한 백곡도 또한 이 같은 선교일치적 기본 입장에서는 거의 다름이 없다. 그의 문집 가운데 선과 교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짤막한 ‘禪敎說(선교설)’에서 백곡은 ‘선자심야(禪者心也) 교자회야(敎者誨也)’라고 정의하고 있다. 선은 마음으로써 전하고 교는 말을 빌려 홍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교에 대한 이같은 두 사람의 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정의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그것의 수용에 있어서는 각기 다른 입장을 보여준다.
즉, 휴정은 선교일치를 말하면서도 수행과정에 있어서는 선과 교를 역시 선후의 관계로 파악하고 있다. 사교입선(捨敎入禪)의 공(功)을 말하고 있음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설은 활처럼 굽은 것이라고 보고 조사의 마음은 활줄처럼 곧은 것이라고 봄으로써 선과교의 우열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비해 백곡의 선교에 대한 견해는 자못 다른 바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해 그의 ‘禪敎說(선교설)‘에 나타나는 일관된 정신은 선과 교로 구분해서 양문을 국집하는 그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는 선문과 교문이 나누어지고 선문자는 이사난변(理事難辨)하고 교문자는 공유호집(空有互執)함으로써 스스로 오류를 범하는 자가 많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가공의 허위를 천착(穿鑿)하며 서로 비방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타인을 그르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고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그는 선과 교가 불이(不異)하면서도 이(異)하고 이(異)하면서 불이(不異)하다고 전제하고, 그 이유로서 선과 교가 오직 그 근원이 하나이므로 도리가 다를 바 없고, 다름이 있다면 심(心)과 구(口)의 다름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이처럼 백곡의 선교관은 이이불이(異而不異) · 불이이이(不異而異)의 입장으로 결국 선교일치로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선교관은 실은 선교 이전의 불분(不分)을 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백곡은 다시 선과 교로 나누어서 그 이(理)가 각각 다르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 논리적인 방법으로 그 부당성을 지적하여 매우 놀라운 견해를 드러내 보여준다. 그것은 흔히들 세존이 가섭에게 선을 전하고 아난에게 교를 전했다고 하지만, 이는 믿을 수 없다는 논리이다. 다시 말하면 불법은 세존으로부터 가섭 · 아난으로 전해져 온 것인데, 만약 가섭이 선이라면 전교(傳敎)의 아난에게 선을 전할 수는 없을 것이며, 아난의 교 또한 전선(傳禪)의 가섭에게서 선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선이라면 주고받는 자가 다같이 선이지 교가 아니며, 다만 교라면 그 경우도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백곡의 이러한 견해 한 마디로 선종계보설이나 교외별전설 마저 부정하는 것으로서, 대단히 파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으로 보건대, 백곡은 선과 교가 완전히 합일된 것으로 파악하는 선교관을 갖고 있으며, 이는 휴정에게서와 같은 선과 후, 시와 종, 우와 열의 선교관과는 근본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휴정의 선교관을 초월하는 백곡의 선교관에서 우리는 통불교적 사상의 새로운 전개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당시 시대상황에 따른 한 조류였다 할 유불일치 혹은 유불회통사상에 대해서도 그는 보우나 휴정 등과는 분명히 다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백곡은 두 사상이 진리성에 있어서는 서로 회통될 수 있음을 굳이 부언하지는 않았지만, 그 깊고 얕음과 우열에 있어서 유교는 불교에 비해 천열(淺劣)하다는 것을 직설하고 있는 것이다.
(3)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의 의의(意義)
백곡은 문장에 특출하였고 또 차원높은 선교관 및 확연한 유불관을 지닌 고승이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에서 그의 존재는 배불정책하의 조선시대에 당당하고 기개에 찬 논조로 국가의 척불에 대해 항소를 제기했던 유일한 승려로서 더욱 크게 부각되어 있다.
가혹한 배불교시책이 단행되었던 조선초 무렵, 이에 대한 불교측의 항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태종 6년에 조계종의 승려 성민(省敏)은 누차 의정부에 조정의 지나친 척불시책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였고, 수백명의 승도를 이끌고 가서 신문고를 쳐 왕에게 직접 척불정책의 완화와 사원 · 전토 · 노비의 복구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비록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는 못하였지만 불교측의 적극적인 항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함허당 己和처럼《현정론(顯正論)》을 저술하여 유불의 회통성을 주장함으로써 유학자들의 척불론에 대해 불교를 제대로 이해시키고 그 척불론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는 간접적인 저항활동도 있었다.
이처럼 법난이 계속되는 가운데 몇몇 사람의 항거가 있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항거도 국초(國初)에 극히 짧은 시기의 일이고 그나마 미미한 것이였다. 또한 상소의 경우도 국초의 승려 상총(尙聰)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의 사명·의암에 의한 몇 차례 예를 들 수가 있다. 그러나 상소의 내용은 불가 내의 자체문제이거나 국난에 대처할 국가 중대사에 관한 문제를 소진(疏陳)한 그야말로 위국충정의 글들로서, 배불시책에 대한 불교측의 저항 및 정당한 주장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이럴 때에 오직 백곡만이 국가의 배불시책에 대항하여 장문의 〈간폐석교소〉를 올리고 있는데, 이는 백곡 이전의 여러 상소들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을 달리한다. 백곡이 생존했던 조선중기만 하더라도 그동안 계속 되어온 척불로 인하여 종단의 피폐상은 물론 승려의 사회적 지위 또한 소위 팔천(八賤)의 하나로 전략되어 있던 시대였다. 따라서 승려들은 국가의 부당한 대불시책에 대하여 저항할 기력조차 상실한 채 다만 현실을 수용하고 침묵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백곡은 정연한 논리로 척불을 논파하고 그 시정을 촉구하는〈간소(諫疏)〉를 제기한 것이다. 이 소(疏)는 조선조 500년간에 걸친 배불정책 하의 불교사에서 단 한 편의 항소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더할 수 없이 논리정연하고 간절긴요하다. 그런 점에서 백곡의〈간폐석교소〉는 단연코 우리 불교사 특히 조선조 불교의 역사에서 기념비적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백곡이 이와같은 항소를 제기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물론 그 동기는 한마디로 국가의 배불정책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 직접적인 동기는 백곡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인수(仁壽) · 자수(慈壽) 양원(兩院)을 철폐하여 니승(尼僧)을 환속시키고 봉은(奉恩) · 봉선(奉先) 양사(兩寺)까지도 폐하여 승중(僧衆)을 환속시켜 불교를 사태훼파(沙汰毁破)하고자 한 조정의 결의에 있었다. 즉 현종이 즉위하여 그 원년(1660)에 양민으로서 머리를 깎고 승니가 되는 것을 금하고, 만약에 승니가 된 자는 일일이 환속시키고 또 그것을 어기는 자는 죄를 과하도록 하였다. 그해 2년 정월에는 성 안의 인수원(仁壽院)과 자수원(慈壽院)의 두 니원(尼院)을 철폐하고, 봉은사와 자수원에 봉안했던 열성위패(列聖位牌)를 땅에다 묻었으며, 이어서 니중(尼衆)을 환속시키고, 또 봉은사 · 봉선사 까지도 폐하여 승중(僧衆)을 환속시켜 불교를 사태훼파(沙汰毁破)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불교계의 절박한 현실문제가 항소의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지만, 그러나 도첩제 승과제의 폐지 등 백곡 이전에도 그가 제기한 문제 이상으로 가혹한 척불시책이 강행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백곡의 항소제기는 눈앞의 절박한 문제에서만이 아닌 또 다른 측면에서 당시 사회의 어떤 변화와 상황이 뒷받침되어 백곡으로 하여금 분연히 항소의 붓을 들게 했던 것으로 볼 수가 있다. 그것은 주로 임진 · 병자 양란의 과정과 그 후 승려들의 국가적 기여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양란의 과정에서 의승군의 활동과 그 국가적 기여는 제한적이기는 하나 척불의 도를 둔화시키고 불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백곡에 앞서 사명의 상소 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것이 비록 불교자체와는 무관할 지라도 불교와 국가와의 언로가 잠정적이나마 개설되어 있었으며, 승려의 지위가 어느 정도 상승된 것도 사실이다.
임진란 중의 사명 · 영규 등의 특기할만한 공헌은 말할 것도 없고, 백곡의 사승인 각성 또한 임진 · 병자 양란을 통해 크게 활약했던 인물이다. 그는 임란 중에는 스승 부휴를 대신하여 명나라 장수와 함께 바다에서 왜적과 대전하였고, 인조 2년(1624)에는 팔도도총섭이 되어 승도를 거느리고 3년에 걸쳐 남한산성을 쌓았으며, 병자호란 때에는 남쪽에서 3천 명의 의승군을 모아 스스로 의승대장이 되어 북상하기도 하였다. 그런 각성의 제자인 백곡은 그의 상소에서 승려들이 국가에 크게 기여하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지만, 어쨌든 양란을 통한 불교계의 힘의 성장세를 배경으로 백곡이 〈간폐석교소〉 와 같은 강력한 항소를 제기할 수 있었으리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4) 간소의 내용
현종 2년(1661)에 올린 백곡의 〈간폐석교소〉는 8천여 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하나의 훌륭한 논저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여기서 백곡은 폐불훼석의 부당 불가함을 논증하기 위해 광범한 사례와 심후(深厚)한 식견(識見)을 구사하여 타당하고도 이를 정연하게 항변 역설하여 위정자의 시정을 촉구하고 있다.
그는 서론적으로 불타의 탄생과 입멸 그리고 불교의 중국 전래와 홍전(弘轉)내력에 대하여 약술한 다음 본론에 들어가 우리나라에서의 훼불훼석의 근거를 6개항으로 요약해 보이고 있다.
그것은 1. 불교가 중국이 아닌 이방(異邦)에서 생긴 것이므로 2. 3대 후에 출현하여 상고(上古)의 법이 아닌 시대가 다른 것이므로 3. 인과응보의 그릇된 견해로서 윤회를 무설(誣說)하므로 4. 농사를 짓지않고 놀면서 재면(財綿)을 소모하므로 5. 머리를 깎고 법망에 잘 걸려 정교(政敎)를 손상케 하므로 6. 승려임을 빙자하여 요역(徭役)의 기피로 편오(編伍)에 유실이 있기 때문에, 폐불하는 것이라는 가정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백곡은 자신이 가정한 이 6개항에 달하는 척불논리와 이로 인한 폐불훼석은 부당불가한 것임을 많은 사례와 경전 등에 근거하여 일일이 논파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이들 6개항에 달하는 그의 논증은 불교의 철학적인 교리의 측면보다는 현실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가 존재해야할 당위성을 역설하는 내용들이다.
그는 또 중국에서 숭불과 억불의 사례를 들어 척불 위정자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는가 하면, 우리나라로 눈을 돌려 삼국의 숭불흥국과 고려 의 봉불(奉佛)이 치도(治道)에 유해하지 않았음을 언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태조 이래 조선의 역대 왕이 실제에 있어서는 숭불하여 폐불치 않았음을 예를 들어 보임으로써, 당시 국왕 현종에게 재삼 불교의 무해(無害)를 강조하고 봉불의 이익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다. 특히 풍수지리설을 독신(篤信)하던 당시에 도선의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을 호소력있게 강조함으로써 거듭 봉불의 이익을 논하고, 끝으로 상소의 궁극적 목적인 양원(兩院) 즉 내외원당의 훼폐가 불가하다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폐불훼석을 간하는 소의 결론을 끝맺고 있다.
국가정책을 문제 삼아 불교 측에서 공식적으로 이를 항의하고 시정을 촉구한 것으로는 백곡의 간소가 유일한 것이어니와, 이 같은 상소에 대한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을까? 그 정확한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다만 그 후 몇가지 조치와 추세를 통해 상소의 결과를 짐작해볼 수는 있다. 즉 양원은 이미 철훼되었지만 봉국사와 봉선사는 끝까지 철폐되지 않고 존속되어 왔다는 점과, 현종이 그 만년에 봉국사를 세우게 하는 등 신불(信佛)의 흔적이 보이는 점, 또 현종 15년에 백곡 자신이 팔도도총섭에 임명되었다는 점 등은 곧 그의 상소가 어느 정도 주효했던 것으로 보아지는 것이다.
이처럼 백곡은 대문사(大文士)로서, 선교관(禪敎觀)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사상가로서, 또 배불의 시대상황을 극복하려 했던 호법자(護法者)로서, 조선조 불교사에 불멸의 족적을 남기고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