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개화와 외압의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인물 가운데 최익현(崔益鉉)만큼 그 이미지가 선명하게 부각된 사람도 흔치 않다. 이는 개항(開港)을 전후해서는 화서학파(華西學派)를 상징하는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로서, 나아가 일제에 의한 국망(國亡)에 직면해서는 항일의병(抗日義兵)의 표상으로서 충군애국 (忠君愛國)을 구현하는 역사적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한 결과이다.
500년 종사(宗社)가 드디어 망하니 어찌 한번 싸우지 않겠는가. 또한 살아서 원수의 노예가 되는 것이 어찌 충의의 혼(忠義의 魂)이 되는 것만 같겠는가 ... 또는 머리는 자를 수 있으나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 ... 그리고 고종(高宗)이 단발령을 선포하자 " 40년 군신(君臣)의 의리를 끊겠다 " 라는 등의 거두절미(去頭截尾)된 어록만으로는 최익현을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근대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역사의 큰 조류를 역행하는 성리학적 전통질서의 재확립에 이념을 두고, 개화를 거부하고 제국주의 침략에 도전하는 위정척사론과 그를 구현하려는 항일(抗日) 의병으로 일관된 의지와 행동이 표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이항로(李恒老)의 제자이다. 아버지 대(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이다.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서 초명(初名)을 기남(奇男)이라고 하였다. 최익현은 집안이 가난하여 4세 때 단양으로 옮긴 것을 비롯하여 여러 지방으로 옮겨다니며 살아야 했다. 14세 때에 부친의 명에 따라 당시 성리학의 거두인 '화서 이항로 (華西 李恒老) '의 문인(門人)이 되어, 우국애민(憂國愛民)적인 위정척사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것을 위국여가(爲國如家)적인 충의사상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론으로 승화, 발전시켜 자주적인 민족사상으로 체계화하였다.그의 정치사상은 화서 이항로 계열의 위정척사이었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 구현을 이상으로 삼았다.
최익현(崔益鉉)의 정치사상은 이항노(李恒老) 계열의 위정척사(衛正斥邪)이었으며, 공맹(孔孟)의 왕도정치(王道政治) 구현을 이상(理想)으로 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을 내리자, 최익현은 그 부당함을 상소(上疏)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고종(高宗)의 신임을 얻어 호조참판(戶曺參判)이 된 뒤, 누적된 적폐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기득권층의 반발을 받아 제주도(濟州島)로 유배되었다.
1876년에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을 결사 반대하여 지부소(持斧疏 .. 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며 답을 기다리는 것)를 올렸다가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당하였으며, 1895년에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공포되자 청토역복의제소(請討逆復衣制疏)를 올려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전개하였다. 그 후 1905년 소위 을사5조약 (乙巳5條約)이 체결되자 무효화(無效化)와 박제순,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등 ' 을사5적(乙巳五賊) '의 처단을 주장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를 올린 일 등은 흐트러짐 없는 인간 최익현(崔益鉉)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최익현이 살다간 시대는 동아시아를 " 천하(天下) "로 인식하던 조선사람들에게 의식(意識)의 지각변동을 요구하던 격변기이었다. 서양(西洋)이 포함된 새로운 세계질서를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조선 왕조는 19세기 외척(外戚) 세도정치로 이행되면서 쇠퇴기에 봉착하였다. 이러한 내부적 위기상황에 밀어닥친 이질적인 서구문명의 강압 속에서 조선문화의 정체성을 지키려던 지식인들은 심각한 지적(知的) 고민에 직면하게 되었다.
최익현은 그러한 혼란기에 누구보다도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고, 그 신념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갖은 시련을 겪은 조선의 선비이었다. 유교 문화권의 동양은 농경사회(農耕社會)를 기초로 평화공존하는 국제질서, 즉 중화(中華)문화 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던데 반하여, 서양의 제국주의(帝國主義)는 무력을 앞세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로 세계를 제패하였다. 이에 대응하는 지식인 사회의 노선(路線)은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으로 나뉘게 되었다.
개화사상(開化思想)은 18세기 북학(北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지배층의 자기(自己) 변화논리로 기능하면서 새로운 문명의 수입(輸入) 통로를 중국에서 일본(日本)으로 전환하였다. 이는 서양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에 편입하려는 운동이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서양에 편입한 일본(日本)을 배우자는 방법론이었다. 또한 그러한 현실론적 성격에 의해 친일파(親日派)로 변신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반면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은 재야학인(在野學人)인 유림(儒林)이 중심이 되어, 자기 문화보존 논리로 제 몫을 다하였다. 이들 유림(儒林)은 조선왕조가 5백년 동안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한 결과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던 성리학자들로, 일반 지식인 군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조선왕조에서 실현된 성리학적인 사회체제를 수호하려 하였다.
서양 물질문명(物質文明)의 한계를 직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화공존과 도덕적 문화국가를 지향해 오던 조선문화의 정체성이 점점 상실되어 가는 것에 우려를 금치 못하였다. 또한 생필품을 자급자족(自給自足)하던 조선의 경제체제를 조악한 공산품(工産品)으로 공략하려는 자분주의 속성을 예리하게 간파하였다. 그들의 상소문에 나타난 양이(洋夷 ..서양오랑케)에 대한 개념은 무력과 힘의 논리로 침략하고 약탈하던 왜구(倭寇)를 북방족 오랑케로 인식하던 기본적인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위정척사 衛正斥邪
위정척사는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운동으로,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위정. 衛正),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사학(邪學)으로 보아서 배격하는 (척사. 斥邪) 운동이다. 이 운동을하는 정치세력을 위정척사파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유교학파이기도 하다. 또한 전통 사회체제를 고수하였으므로 수구당(守舊黨)이라고 불렸으며, 1870년 갑신정변 당시의 수구당과는 다르다.
이는 조선 후기에 서학(西學)이 들어온 데 영향을 받아 국내에서는 실학운동이 활발해지고, 천주교가 전파되자 주자학의 입장에서 이를 사도(邪道)로 보아 배척하고 국교로서의 유교(儒敎)를 수호하려는 운동이다. 보수 유생들을 중심으로 처음에는 개항(開港), 곧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다가, 뒤에는 항일의병(抗日 義兵) 운동으로 바뀌었다.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反外勢) 자주(自主) 운동이었지만, 지나치게 전통 사회체제를 고수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서 뛰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스승, 이항로 李恒老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조선후기 외국의 세력 민 문물(文物)이 침투하자, 이를 배척하고 유교(儒敎) 전통을 지킬 것을 주장하여 일어난 사회적 운동이다. 위정(衛正)이란 바른 것, 즉 성리학(性理學)적 질서를 수호하자는 것이고, 척사(斥邪)란 사악(邪惡)한 것, 즉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思想)을 배척하자는 것이다. 위정척사(衛正斥邪) 세력들은 전통적인 사회 체제를 고수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개화사상(開化思想)에도 반대하였으며, 수구당(守舊黨)이라고도 불렸다.
양이(洋夷 ..서양 오랑케)의 화(禍)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害)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서학(西學)의 무리들을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오늘날 양적(洋敵)의 침입을 당하여 군론이 敎(외교)와 戰(전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적(洋賊)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 나라쪽 사람, 곧 국변인의 주장이고, 양적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국 쪽 사람, 곧 적변인의 주장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나라의 의상지구(조선문화의 전통)을 보전할 수 있으나, 후자에 따르면 인류(조선사람)가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 점이 양적과 싸우느냐, 화친하느냐 하는 차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근본을 잡는 신념, 곧 경이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망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枝葉)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 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양이(洋夷)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殿下)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外物)에 견제 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 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外物)이라는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洋品)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 입니다. 臣은 평생 양직물(洋織物)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 죽이고 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최익현 초상 ... 보물 제1510호
구한말의 대표적 우국지사(憂國之士), 최익현의 초상화로 크기는 51.5 × 41.5cm이다. 우측 및 좌측의 상하단에 적힌 기록, " 면암최선생칠십사세상 모관본 (勉庵崔先生七十四歲像 毛冠本) "과 " 乙巳孟春上軒定山郡守蔡龍臣圖寫 " 을 보아 1905년에 채용신(蔡龍臣)이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으며, 현재 보물 제1510호로 지정되어 있다. 심의(深衣)를 입고 털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인데, 심의(深衣)는 그가 위정척사에 노력한 전통 성리학자임을 잘 전해주고 있으며, 털모자(毛冠)은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던 최익현의 애국적 풍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
채용신의 초기 작품에서 풍기는 조심스럽고 근실한 화법과 소박한 화격이 최익현의 우국지사적인 분위기를 더욱 잘 살려주고 있다. 심의(深衣)란, 고려시대 중국의 송(宋)나라에서 들어왔으며,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입던 옷으로 머리에 복건과 함쎄 착용하였다. 옷깃, 소매끝, 옷단등에는 검정색 선(線)을 돌렸으며 허리에는 대(帶 . 띠)를 두르고 오색(五色)의 띠를 늘어트렸다.
채용신 蔡龍臣
채용신(蔡龍臣. 1848~1941)의 구한말(舊韓末)의 화가로서,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역임하고 종2품 관직까지 올랐다. 인물, 초상, 산수, 영모 등 여러 화목에 능하였으며,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려서, 고종(高宗)의 초상화를 비롯하여 최치원(崔致遠), 최익현(崔益鉉), 황현(黃玹) 등 많은 초상화를 남겼다. 그는 서양화풍을 수용하는 등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초상화를 변화시킨 화가로 주목받고 있다. 화풍(畵風)의 특징으로는 인물의 얼굴 묘사와 의습(衣褶 .. 옷주름) 처리에 명암법의 구사가 현저하게 나타나는 점과 세필(細筆)을 사용하여 얼굴의 실체감을 부각시키는 묘사법을 들 수 있다.
" 호(號)가 무엇인가?" 고종(高宗)이 채용신에게 물었다. 그가 답했다. "석지(石芝)입니다" 임금은 말을 이었다. " 너의 거처가 부안현에 가까운데, 그곳에는 채석강이 있지 않으냐? 네 성이 이미 "蔡"이니, 이제 號를 석강(石江)이라 한다면 저 채석강과 音이 우연히 합치되어 그 아름다운 이름과 비슷하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 1902년 고종(高宗)은 임금 초상을 그리는 어진화사(御眞畵師) 채용신에게 호를 내렸다. 각별한 애정이 느껴진다.
석지 (石芝) 채용신은 조선의 마지막 초상화가이다. 원래 칼을 쓰는 무관(武官)으로 과거에 급제한 그는 중인(中人) 출신의 도화서 화원들이 어진(御眞) 제작을 맏았던 관례를 깨고, 주관화사(主管畵師)로 발탁되면서 조선 초상화의 새로운 전통을 열었다. 채용신 처럼 " 마음까지 그린다 (傳神寫意) "는 평가를 듣는 화가는 많지 않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최익현의 죽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11월 17일에 전(前) 판서(判書) 최익현이 대마도(對馬島)에서 죽었다. 처음 최익현이 도착했을 때 왜국(倭國) 곡식으로 마든 죽을 주었는데, 물리치고 먹지 않았다. 왜놈들이 크게 놀라 우리 정부와 통하여 음식을 제공하였다. 임병찬(林炳瓚) 등이 다시 강권하였지만, 나이가 많고 속에서 받아들이지 않아 먹는 것이 차츰 줄더니 곱사병까지 겹쳤다. 10월 16일에 자리에 눕더니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날 서쪽을 향해 머리를 숙인 뒤 임병찬(林炳瓚)에게 구두(口頭)로 마지막 상소(上疏)를 남겼다. 살아 돌아가 임금에게 전해 달라고 하고 죽으니, 그의 나이 74세이었다. 왜놈들도 그의 충의(忠義)에 감동하여 줄지어 조문(弔問)하였다. 21일 영구(靈柩)가 부산(釜山)에 이르자 우리 장사꾼들이 시전(市廛)을 거두고 통곡하였는데, 마치 친척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 남녀노소가 모두 뱃전을 잡고 엎어지며 슬피 우니, 곡성(哭聲)이 넓은 바다를 뒤흔들었다. 장사꾼들은 자신들의 시전(市廛)에다 호상소(護喪所)를 마련하고 상여(喪輿)를 꾸몄다. 하루를 머문 뒤에 떠나자 상여(喪輿)를 따라오며 미친 듯 우는 사람이 수천수만이었다. 승려, 기생, 거지에 이르기까지 부의(訃意)를 듣고 와서 인산인해를 이루니 저자 바닥 같았다. 만장(輓章)과 뇌문(雷文)을 모아 말 여러 마리에 싣고 갔지만 종일 십리도 못갔다. 부음(訃音)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자 인시들이 더욱 모여 들었다. 동래(東萊)를 떠날 때에는 상여(喪輿)가 몇 차례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왜놈들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변(變)이 날까 두려워 했다. 이에 엄히 경비했지만 사람들을 오지못하게 막을 수는 없었다. 상주(尙州)에 이르자 왜놈들도 곤란하게 여기어 상여(喪輿)를 기차(氣車)에 싣고 눈 깜짝할 사이에 고향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주(尙州)에 이르는 삼백 리(里)에 이미 10일이나 허비했다. 곡성(哭聲)이 온 나라 골목마다 퍼졌고, 사대부(士大夫)에서 길거리의 어린아이들과 심부름꾼들까지 모두 눈물을 뿌리며 ' 면암(면암)이 돌아가셨다 '하면서 조문했다. 나라가 시작된 이래 사람이 죽었다고 이처럼 슬퍼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조정에서만은 은졸(隱卒 ..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애도의 뜻을 표하는 일)의 의전(儀典)도 없었으니, 적신(賊臣)들이 나랏일을 맡았기 때문이었다. 최익현(崔益鉉)이 죽기 며칠 전날 밤에 서울 동쪽에서 커다란 별이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는 것이 보이더니 얼마 후 부음(訃音)이 이르렀다. 영구(靈柩)가 동래항(東萊港)에 이르자 갑자기 대낮에 처량하게 비가 내리더니 바닷가에 쌍무지개가 생겼다. 장례를 치를 때는 큰 비가 쏟아지고 천등이 쳤으며, 소상(小喪)과 대상(大喪) 때에도 궂은 비가 종일 내려 사람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기고 슬퍼했다. 정미년 2월에 연산현의 경계인 어느 마을 뒷산 길가에 장사지냈다.
최익현의 묘는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1-1에 위치하고있다. 최익현의 묘는 원래 1907년 논산군 노성면의 국도변에 처음 묘를 만들었으나 참배객이 너무 많자, 이완용 및 일제(日帝)의 명령으로 1910년 오지(奧地)인 이곳으로 이장(移葬)되었다.
최익현의 유해(遺骸)가 대마도(對馬島)에서 부산항(釜山港)에 도착하자, 부산시민들은 완전히 철시(撤市)하고 임시의 빈소(殯所)를 찾아 남녀노소가 통곡하였고, 자택인 청양으로 상여꾼에 의해 운구(運柩)될 때 지나는 곳마다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애도(哀悼)한 사실만으로도 그의 삶은 죽을 수 없는 위대한 혼(魂)을 세상에 남겼다. 마침내 군중의 소요(騷擾)를 염려한 일제(日帝)는 강제로 기차(氣車)로 운구(運柩)하게 하고, 본가에 도착하여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를 때에는 수천명의 선비들이 모여 거대한 유림장(儒林葬)으로 장사를 지냈다.
이용구 (李容九)와 소네통감
최익현이 대마도(對馬島)에서 순국(殉國)한 후, 그 시신(屍身)만이 귀국한다. 조선의 백성들이 15일 동안 그의 상여(喪輿)를 뒤따르고 있다는 소문에 조정의 대신들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었지만, 혹시나 민란(民亂)이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최익현의 시신을 충남 정산땅 적당한 곳에 묻기를 원하였으나, 일제와 친일(親日) 대신들은 대전과 공주, 논산등 백성의 왕래가 심한 땅에 묘를 쓴다는 사실이 못마땅하였다. 참정대신 이완용(李完用)은 일본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이 곳에 묘를 쓰는 것을 군(軍) 병력을 이용하여 저지하는 것을 타진하기도 하였다. 오히려 이등박문이 이완용의 제의를 거절한다. 오히려 민심을 건드릴 수 있다는 반론이었다. 결국 논산군 노성면 국도변에 최익현은 묻혔다.
수많은 백성들이 최익현의 묘(墓)에 들려 나라를 잃게 된 현실을 눈물로 통곡하며 한(恨)을 푸는 동안, 의정부 대신 겸 학부대신 이완용, 참정대신 박제순, 궁내부 대신 심상후, 법무대신 이하영,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권중현 등은 찾아보기는 커녕 애써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직 광주관찰사로 있던 이도재(李度再)만이 문상 차 다녀 갔을 뿐이었다.
매천야록(매천야록)을 지은 황현(황현)이 최익현의 빈소를 방문하였을 때, 방문 조문객(弔問客)들의 명부를 확인해 보았는데, 촘촘이 적은 것이 네 권이나 되었지만, 관리의 이름은 이도재(李度再) 한 사람 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방문은 하지 않고 최익현의 죽음을 애도하여 편지로 대신한 사람으로 김학진, 이용원, 이재윤 뿐이었다고 한다. 다만 고종(高宗)의 증조 형제로 벼슬이 승지로 있는 이재윤만이 최익현의 충절에 감복하여 벼슬을 버리고 최익현이 남기고 간 각종 서적을 모아 관리하는 등 그의 사상에 몰두하였다.
춘추대의비(春秋大義碑 .. 위 사진)이다. 춘추(春秋)는 공자가 다시 편찬한 노(魯)나라의 역사서이다. 필체가 매우 엄중하였으며, 맹자는 춘추(春秋)가 지어지자 간신적자들이 떨었다고 할만큼 글 한자 한자에 엄중한 역사의 평가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매우 이해하기 어렵고, 대의명분을 강조한 역사서이다.
춘추대의(春秋大義)라함은 춘추에서 내린 엄중한 대의명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춘추필법이라 하면 엄중한 역사적 평가를 내리는 글쓰기법이라는 의미가 된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평생을 가지고 다니면서 익혔다고 하는 책이기도 하다. 춘추란 책 이름은 일년을 춘하추동으로 나누어 역사를 기록하였기에 나온 이름이다. 참고로 글자 한자 한자에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기에 유교와 중국 역사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읽어도 무슨 뜻인지 모를만큼 어렵다고 한다.
모르고 읽으면 지겨울만큼 간단한 역사기록일 뿐이지만 글자 한자 한자에 담겨진 뜻을 알면 공자(孔子)가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평가에 얼마나 엄중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와 싸울 때도 대의명분(大義名分)이 있는 전쟁과 아닌 전쟁을 구별하여 달리 표기하였다. 왕위에 오를 때도 정통성 있는 왕과 아닌 왕을 구별하였다.
그 후 이준, 이상설, 이위종이 고종(高宗)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조약이 고종(高宗)의 본의가 아니었음을 설파하였다. 이 사건을 구실로 일제와 이완용(李完用)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라 칭하게 하였다. 이완용은 이에 끝나지 않고 일제에 협력하여, 오히려 주도하면서 한국의 군대를 해산하고, 인사권과 재산권 등을 빼앗아 간다. 이에 항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이등박문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르자 일본은 그를 추밀원 의장으로 불러들이다. 만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강제 이장 强制 移葬
최익현의 묘소에는 비분강개한 참배객들이 늘어만 갔다. 그리고 이등박문이 추밀원의장으로 부임하다가 죽고, 부통감으로 있던 " 소노 고노스케(曾禪荒助)"가 통감으로 승진하였는데, 그는 더욱 교활한 수법으로 껍데기만 남은 대한제국을 합병시키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용구(李容九)는 한일합방을 제창, 건의하는 등 대표적인 친일파로, 손병희가 반일 사상을 가진 천도교를 포교하자, 이용구는 친일 사상을 주창하는 시천교(侍天敎)를 창설하여 교주가 되었으며, 日進會의 회장으로 친일에 앞섰던 인물로, 최익현의 묘소를 이장하는 일도 주도하였다.
이용구는 소노통감에게 최익현 묘의 이장을 요청하였다. 이장하면 반발이 심할까 두려워하는 소노통감에게 이용구는 꾀를 내었다. 지금 묘가 있는 논산 상월면이라는 곳이 교통요지 ,즉 북으로는 공주, 남쪽으로는 논산 그리고 호남 , 동쪽으로는 대전, 이곳에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최익현의 묘를 한적한 곳으로 옮기자는 아이디어이었다. 이렇게 하여 최익현의 묘는 인적이 드문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1910년의 일이었다. 최익현의 묘소는 악랄한 일제와 그 앞잡이 이용구의 간교에 의하여 외로운 곳,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묵묵히 지금도 이 나라를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일본 수선사
상소 上疎 상소 上疎
최익현이 임금에게 올리기 위해 작성한 소(疎)는 모두 30편이다. 이 가운데 5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1895년 (그의 나이 63세) 이후인 만년(晩年)에 작성된 것이다. 하지만 중년에 작성된 5편 중 1873년 (41세)과 1876년(44세)의 상소는 각각 그를 제주도와 흑산도에 수년간 유배를 보낼만큼 파괴력이 있는 상소이었다. 47세에 유배에서 돌아온 그는 약 20년간 가까이 은거생활을 하였고, 이 시기에는 상소도 올리지 않았다. 1895년 이후부터 척왜(斥倭)를 주제로 한 상소를 활발히 올렸고, 1906년에는 대마도에서 죽음 직전 임금에 올리는 마지막 상소를 남겼다.
흥선대원군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1873년 11월 14일, 이미 5년 전에 대원군의 내정개혁을 비판하는 상소를 한 차례 올렸던 최익현이 또 다시 계유상소(癸酉上疎)를 올려 흥선대원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페조치로 유림의 기반이 송두리채 뿌리 뽑힌 데 따른 불가피한 자구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원군에 대한 반기(反旗)이었고 도전(桃戰)이었다. 대원군의 행태까지 낱낱이 고발된 이 상소는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려한 고종(高宗)의 뜻과 일치하여 흥선대원군의 10년 세도(勢道)를 하루 아침에 무너뜨렸다.
최익현은 이후에도 아니다 싶으면 끊임없이 상소를 올렸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는 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의 목을 베라면서 도끼와 상소를 들고 광화문에 나타났고, 고종(高宗)이 단발령을 내렸을 때는 " 40년 군신(君臣)의 의리(義理)는 여기서 끝났다 "며 당당히 외치다 흑산도 유배길을 자초하였다.
나라가 존망(存亡)의 기로에 처했을 때는 붓을 놓고 칼을 들었다. 을사보호조약 체결 후 다섯 매국노를 처단하라는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疎)"를 올린 최익현은 곧 전북 태인으로 내려가 800명의 문도(門徒)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결국 일본군에 체포되어 대마도(對馬島)로 끌려가 단식(斷食)으로 저항하다가 1906년 말 이국땅에서 순국하였다. 타협과 굴절을 거부하고 행동하는 지성으로 일관하였던 73년의 삶이었다.
흥선대원군의 失政을 상소하다
최익현은 1855년 (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전적,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이조정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수봉관, 지방관, 언관 등을 역임하며, 천성인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와 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렸다. 최익현이 36세가 되던 1866년에 대원군(大院君)의 실책(失策)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는데, 이 상소는 역사에 기록된 최익현의 첫번째 상소이었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이 주도하던 경복궁(景福宮) 중건을 중지할 것과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른 재정의 파탄 등을 열거하여 대원군의 실정을 극력으로 상소하여 마침내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臣은 몇 해 전에 부름을 받고 마지못해 벼슬의 반열에 나왔으나 며칠도 못가서 까닭없이 견파(譴罷)당하였으니, 臣의 변변치 못하고 사람답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전하께서도 벌써 훤히 알고 계신 바입니다. 그때부터 시골로 물러가서 고생을 달게 받으며 낮은 벼슬자리도 감히 바라보지 못하였는데, 더구나 승지와 같은 훌륭한 벼슬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명을 듣고 나서 놀랍고 황송하여 더욱 죽을 곳을 알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의 일들을 보년 정사에서는 옛날 법을 변경하고 인재를 취하는 데에는 나약한 사람만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大臣과 육경(六卿)들은 아뢰는 의견이 없고, 대간(臺諫)과 시종(侍從)들은 일을 벌이기 좋아한다는 비난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속된 논의가 마구 떠돌고 정당한 논의는 사라지고 있으며 아첨하는 사람들이 뜻을 펴고 정직한 선비들은 숨어버렸습니다.
그칠 새 없이 받아내는 각종 세금 때문에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있으며 떳떳한 의리와 윤리는 파괴되고 선비의 기풍은 없어지고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괴벽스럽다고 하고 개인을 섬기는 사람은 처신을 잘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염치없는 사람은 버젓이 때를 얻고 지조있는 사람은 맥없이 죽음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위에서는 天災가 나타나고, 아래에서는 地變이 일어나며, 비가 오고 날이 개이고 춥고 덥고 하는 기후현상에 대해서는 모두 정상적인 상태를 잃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는 아무리 노련하고 높은 덕망으로 세상 사람들의 추대와 신망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 일을 담당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견제 당하고 모순에 빠져 힘을 쓰기가 쉽지 않을 것인데, 더구나 臣과 같이 본바탕이 어리석고 학식도 전혀 없는데다가 외롭고 약하여 어찌 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만약 전하의 총애만 믿고서 본분에 지나친 것을 삼가라는 경계와 복이 지나치면 재앙을 당한다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고 벼슬 반열에 끼어 따라다니고 길가에서 떠들어대며 의기양양하게 자족하면서 아무 것도 꺼리는 바가 없이 처신한다면 또한 사람들의 드센 비방과 무엄하고 불경스럽다는 주벌이 잇따라 일어나게 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때문에 臣이 머뭇거리고 주저하면서 달려나가고 싶어도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입니다.
위와같은 최익현의 상소에 대하여 고종(高宗)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대의 이 상소문은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또 나에게 경계를 주는 말이 되니 매우 가상한 일이다. 감히 열성조(列聖朝)의 훌륭한 일을 계승하여 호조참판(戶曺參判)으로 제수한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한 말에 대하여 만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이 있다면 소인(小人)이 됨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1868년에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다하였던 최익현은 1873년 최익현은 고종의 신임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反 흥선대원군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의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失政)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흥선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척사소 斥邪疎
1873년 최익현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 측근 등 반 대원군세력과 제휴, 서원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레를 낱낱이 열거, 왕의 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하므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9년 석방되었다.
석방된 이듬해, 민씨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강화도조약)을 논의하자, 최익현은 5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疎)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즉 그는 이 상소에서 ... 1.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으로, 무비(武備)를 갖추지 못하여 고식책으로 강화를 추진한다면 앞으로 賊의 무한한 탐욕을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며 ... 2. 일본의 物貨는 모두가 요사기완(搖奢奇玩)으로서 우리나라의 유일한 농업생산품으로 적의 무한한 공업생산품과 교역하게 되면 반드시 경제적 파탄을 초래할 것이며 ... 3. 일본을 倭라고 일컬었으나, 실은 양적(洋賊)과 다름 없는 것이니 일단강화가 성립되면 금수(禽獸)와 같은 洋人의 사교(邪敎)가 들어와 우리의 진통적인 질서를 무너뜨릴 것이라는 등의 이유로 일본과의 강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최익현은 다시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어 1879년 석방되었다.
병자지부소 丙子持斧疎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임진왜란 당시 중봉 조헌(重峰 趙憲)이 떠 올랐다. 조헌은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나가, 왜국이 장차 조선을 침략할 음모를 가지고 당시 조선에 들어 와있는 일본 사신에 대하여 도끼로 쳐죽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일이었다.
중봉 조헌 重峰 趙憲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 ... 조헌(趙憲)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왜적이 침략할 것을 미리 예견하고 충북 옥천에 있던 중 도끼를 가지고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상소를 올린 이유는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 전국을 통일한 여세로, 明나라를 정벌하겠다는 구실을가지고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길을 비키라는 교섭을 해올 때,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국론이 분열되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급한 나라 일을 예견한 조헌(趙憲)은 자기의 도끼로 당장 왜국(倭國) 사신의 목을 베고, 나라의 방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이를 미친 짓이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헌은 자기 뜻이 받아 들여지지 않자, 이를 한탄하여 궁궐 주춧돌에 이마를 부딪치게 하여 유혈이 낭자하였으나, 그때에 많은 사람들은 조헌의 모습으로 보고 비웃기 까지 하였다.
신(臣) 최익현 삼가 아룁니다.
임진왜란 시, 나라를 위하여 왜군과 싸우다 전사한 조헌(趙憲)장군이 길주 땅으로 귀양을 가면서, 영동역에 이르러 일본(日本)의 동태가 수상하니 경계를 소홀히 하면 안된다고 상소(上疎)를 선조(宣祖)대왕에게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조헌장군은 그 상소문에서 중국 楚나라 사람 변화(卞和)라는 사람과 옥(玉)에 대하여 예를 들었습니다.
어느날 초나라 사람 변화(卞和)는 초산이라는 곳에서 玉을 얻었다고 합니다. 변화는 이것을 임금인 여왕(勵王)에게 바쳐 임금의 총애를 받고 싶었습니다. 여왕은 변화의 마음을 가상하게 여기고 보석 감정사에게 감정을 시켜 보았더니 보석이 아니고 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무엄하게도 변화가 자기를 속였다고 하면서 괘씸한 나머지 변화의 왼발을 잘랐습니다. 변화는 억울하였으나 돌이라고 하는 옥을 다시 보관하였다가 뒷날 여왕(勵王)이 죽은 후 헌왕(獻王)에게 玉을 또 바쳤습니다. 그러나 헌왕도 보기 좋게 돌을 옥이라고 속인 자라는 측근의 말만 듣고 자기를 능멸하는 자라 하여 변화의 오른발도 잘랐습니다.
그러나 변화는 끝까지 돌이 아니라 옥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헌왕이 죽고 다시 문왕(문왕)이 즉위하였는데, 문왕은 양다리가 잘린 사내 하나가 초산에 올라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슬피 울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文王이 그 사내를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 사연을 물으니, 자기는 변화라는 사람인데 勵王과 獻王에게 玉을 바쳐도 돌이라고 하면서 자기 두 발을 잘리게 되었다고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文王은 하도 이상하여 다시 卞和가 갖고 있는 돌멩이를 감정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돌은 옥이었습니다.
또 송나라 사람 장준 이야기를 하나 더 말씀드리면, 宋나라 사람 장준은 국권 회복에 뜻을 두어 金나라를 저지하기에 힘쓰다가, 정승 진회라는 자의 모함을 받아 영주 땅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왕은 금나라와 송나라 간의 강화가 宋나라에 불리하다는 것을 끝까지 주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훗날 백성들은 그의 충성을 칭찬하였습니다.
전하 !! 臣은 임진왜란 때 동인, 서인으로 당이 나뉘었을 때 그리고 일본의 풍신수길이 거짓으로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던 날, 조헌선생은 나라의 장래에 대한 깊은 근심과 염려를 갖고 일본 사신을 도끼로 쳐죽이라고 충성을 다하여 옳은 말을 끝까지 하다가 온 조정이 그를 광인(狂人)으로 취급하고 비웃음과 미워함을 자초하여 죄 아닌 죄를 짓게 됨으로써 유배를 가서 역졸(驛卒)로 까지 전락한 사실을 보았습니다.
조헌선생의 경우 의당 그 일에 징계를 받았으니, 입은 다물고 붓은 천장에 달아 매고, 남의 일에 개의치 말듯이 해야 하는데, 도리어 의리를 다하고 충성을 바치는 마음이 한결같이 변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백세 후에 그의 상소를 읽고 그 시대를 논하다가 보니 어떤 사람이라도 그 충절에 감탄하여 눈물을 뿌리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전하 !! 臣은 전과자로 낙인 찍혀 있습니다. 그러나 전과자이면서도 다른 전과자와 다른 것은 지난번에 삼가 전하께서 臣이 다른 마음이 없음을 살피시고 특별히 관대하게 처분하여 제주도에 안치시켰다가 고향으로 돌려보내 편하게 있으면서 늙은 아비를 공양하도록 하게 하셨으니, 귀양살이와 비교하면 다른 점은 있기는 있습니다.
지금 일본놈들의 배가 서해 바다에 들어와 성상께서 근심을 하게 만드니, 臣은 답답한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비록 성상이 좌우에 있는 여러 대신들이 모두 저를 죽여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나라의 장래가 초미의 급선무인데 어찌 입을 다물어 모른 척하여 조헌장군과 같은 죄인 아닌 죄인으로 남아있겠습니까? 臣은 왜놈들의 배가 무엄한 짓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생각하기를, 조정에서 마땅히 정한 공론이 있어 신속하게 그 흉한 왜놈들을 이 나라에서 쓸어내되 시일을 끌지 않으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소식을 들은지 며칠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잘 되었다고 들리는 말은 없었고, 심지어 외부에서 떠드는 말에 의하면 첫째도 목전의 불만을 끄기 위하여 화친을 하려 한다고 하기도 하고, 둘째도 화친만이 살길이라고 하는 말이 들리니 ,많은 백성들은 이 소식을 듣고 눈 앞의 불만 끄면 다 되는것이냐고 하면서 조정의 하는 일을 분개하여 여기며 사방이 어수선합니다.
전하 !! 눈 앞의 굴욕적인 일만 당장 처리하면 이 나라의 장래가 질 될 것 같습니까? 모르겠습니다만 만사를 제치고 일본과 화친부터 맺어야 한다고 서두른다고 하는데 이 말이 정말 근거가 있는 말입니까. 아니면 안으로 정사를 다스리고 밖으로 외적을 막는데 있어서 본래부터 정한 계책이 있지만, 단지 민간에게 와전된 말입니까? 만일 와전되었다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어찌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는, 만약 와전이 아니고 사실이라면 그것은 적을 위하는 것이 되고 장차 국가를 위한 계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만일 이대로 화친이 시행된다면 잘못 되어도 훨씬 잘못된 것 입니다. 지금같이 국내외적으로 불안한 우리나라에서 무턱대고 우리가 적과 강화를 서두르는 것은 반드시 나라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이 될 것이니 만에 하나도 다행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앞서 대원군이 나랏일을 오늘과 같이 위급한 때를 생각하지 않고, 일인독재하에서 즉흥적으로 행하여진 실정 때문입니다.
전하 !! 왜놈들이 조선에 눈을 돌린 것은 세계 정세로 보아 저희 나라로서는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일본놈들은 우리나라의 종주국을 청나라로 보는데, 종주국인 청나라가 제 발등의 불도 못끄는 나라로 전락된 후 조선은 청나라에서 조차 돌보지 않는 조선, 허약하기 짝이 없는 고루한 왕조로 보고 있습니다. 전하 !! 일본이 왜 조선이 고루한 왕조로 보고 있을까요? 대원군 때문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께서는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내어 세금을 뜯어다가 나라를 지킬 생각을 하여 국방력을 강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엉뚱한 곳에 돈을 너무 낭비하여 이렇게 허약한 국가로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전하 !! 지금 세계는청나라에정신이 팔려 관심이 없지만 머잖아 동양 천지는 서양 열강의 밥이 될 것이 뻔합니다. 왜놈들은 이 점을 노린 것입니다. 조선, 이것을 빨리 차지하지 않으면 앞으로 서양이 조선을 요리하게 될 경우 큰골치거리가 되고 말리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일본은 계속 청나라에 조선의 지위를 마치 청나라의 종속 국가인것 처럼 떠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병 주고 약 주는 식으로 청나라는 조선이 독립국이라는 대답을 받아내어 청나라와 이간을 시키는 동시에 우리에게는 청나라로부터 독립한 국가라고 사탕발림을 하고 있습니다.전하 !! 청컨데 죽음을 무릎쓰고 臣이 생각하고 있는 다섯 가지의 폐단을 조목조목 열거하겠습니다. 바라옵견데 성상께서는 臣이 지금 말씀드리는 것이 옳은지 그른지 찾아보소서. 신이 삼가 듣건데, 일본이 먼저 우리에게 화친을 하자고 사정하였다면, 우리에게 유리한 점이 있는고로 우리가 저들을 먼저 제압할 수 있으므로 그러한 강화 요청만은 믿을 수있습니다.
그러나 화친을 주장하는 강화조약 시안이 우리의 약점을 보인 것으로 나왔다면 이는 주도권이 저들에게 있는 것이므로 그들이 도리어 우리를 제압할 것이니, 그러한 강화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臣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이번의 강화가 저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약점을 보여서 나온 것입니까? 지금 우리는 편하게 지내려고, 방비도 없으면서 두렵고 겁이 나서 강화를 청하고 있습니다. 목전에 닥친 일을 우선 종식시키려는 계책만을 세우려 하고 있습니다. 조정에서는 목전의 다급한 처방만을 세우려 하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모두 보고 있으니, 비록 속이려고 하지만 속일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대원군 이후 방비가 없고 약점을 보이고 있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하물며 우리가 강화를 맺는다면 향후에 한 없는 그들의 욕심을 무엇으로 채워주겠습니까? 우리가 들어 줄 것은 한계가 있지만 저들의 요구는 끝이없을텐데, 앞으로 그들이 또 다른 무엇을 요구할 때에 이에 한 번이라도 부응하지못하면 놈들은 화를 낼 것이며, 결국 침략하여 유린할 것으로 앞에 세세웠던 목전의 임시방편으로 화친하였다는 공로를 모두 버릴 것이니,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이 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 !! 가령 그들의 요구대로 강화를 맺었다고 치십시요. 강화를 맺고 나면 적들이 욕심내는 것은 상품을 교역하는 데에 있습니다. 저들의 상품은 대부분 지나치게 사치하고 특이한 노리개이거나, 손으로 생산된 것들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으로 농산물로서 땅에서 생산된 것이니 그들과는 다른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는 백성들의 재산은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인데 이것을 한없이 사치하고 기괴한 노리개로 가득찬 공산품과 바꾸게 되니, 이렇게 되면 마음도 좀먹고 풍속을 해치게 될 것은 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취약한 우리 경제는, 해마다 일본에다가 많은 이익을 주게 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면 수년 후에는 우리나라는 얼어붙은 수천 리에 황량한 땅과 쓰러진 집들만이 남게 되고, 결국 우리나라는 다시 지탱하여 보존하지 못하는 나라가 되어 결국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요구하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의 둘째 이유입니다.
저들이 비목 왜인(倭人)의 이름으로 강화조약을 맺자고 칭탁하고 잇으나, 실은 약한 나라를 잡아먹는 제국주의 양적(洋賊)들입니다. 이 일이 한 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의 서책과 天主敎의 초상이 교역하는 속에 뒤섞여 들어오게 되고, 조금 지나면 전도사와 신자가 전수를 받아 온 나라에 두루 가득 찰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포도청에서 감시하여 체포하고 처벌하려 할 것은 뻔합니다. 또 그럴 경우 청나라에 나와있는 신부들이 프랑스 함대나 미국 함대가 다시 쳐들어 올 것이고, 그렇게 되면 강화한 조약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더구나 종교란 것은 내버려 두고 불문에 부치게 되면 조금 지나서는 집집마다 사람마다 邪學을 하게 되니, 이는 강화조약이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의 셋째 이유입니다.
왜놈들은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저들은 육지로 내려와 서로 왕래하고, 혹은 집을 짓고 강토에서 살려고 할 것인데, 그럴 경우 우리가 이미 강황하였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습니다. 거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이나 비단과 부녀자들에 군침을 삼킬 것이고 나중에 심하면 약탈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날 것이니,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저들에겐느 포악한 사무라이라는 놈들이 있지만, 그놈들을 흉내낸 낭인들이 항상 옆구리에 칼을 차고 다니고 있는데, 그놈들은 사람의 탈을 쓴 짐승으로써 조금만 제 욕심을 채워주지 않으면 사람을 파리 목숨같이 죽이거나 잡아 넘기는 데 기탄이없다 할 것 입니다.
부녀자들의 경우 이놈들에게 강간을 당할 경우 열부나 효자가 애통스러워 하늘에 호소하여 복수하여 주기를 구하겠지만, 조정에 있는 사람들은 강화조약을 깨트릴까 두려워 감히 송사를 처리하지 못할 것은 뻔합니다. 이와같은 사례는 워낙 많아서 온 종일 말하여도 모두 열거할 수 없습니다. 하여튼 이러한 일이 벌어지면 사람의 도리가 깨끗할 수가 없어서 백성들이 하루도 살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부르는 까닭의 넷째 이유입니다.
대신들 중에는 걸핏하면 병자호란 때의 仁祖가 남한산성에 피난을 갔다가 항복한 사건을 두고 청나라와 조선이 양국관계를 맺은 사건이 인조께서 정묘화란 때 맺었던 형제의 나라에서 임금과 신하의 나라로 바꿀 것과 그들이 황금, 백금 1만 냥, 말 3000마리 등 세폐(歲幣)와 군사 3만을 요구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라도 일단 위기만 넘기면 피차가 서로 좋게 지내게 되기 때문에 오늘날 삼천리 강토가 오늘에 이르도록 반석같은 안정을 보존하였으니, 일본고 조약을 맺는 것이 그때와 다름없다고 주장하면서 일본과의 조약을 격상시키고 있습니다.
臣은 이러한 말에 동조할 수 없는 어린 아이 같은 소리나 다름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병자호란 때의 강화조약은 눈 앞의 청나라가 무서워서 굴복하고만 것이 아닙니까? 당시 김상헌과 홍익한 같은 분들은 눈앞의 이익에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만주 서쪽에서 일어난 淸나라 사람들도 어떻게 하면 明나라를 쓰러트리고 중국 본토의 황제가 되어 중국 천하를 차지할 수 있을까를 고심하다가 힘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중국의 옛 역대 왕들을 모방하고 仁과 義를 내세우며 마치 자기들이 정통성있는 나라인 것 처럼 행세하였던 것 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통성을 강조해 보았자 오랑케는 오랑케일 뿐입니다. 다만 이 오랑케들도 사람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후 만주족과 한족이 피차가 모두 사이가 좋아져서 지금까지 탈 없이 청나라를 유지해 왔습니다. 비록 그들은 민족간에 뜻이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관대하게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어 침해하거나 학대하는 염려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발령 반대 상소 .... 吾頭可斷 此髮不可斷
최익현은 계유상소(癸酉上疎)를 올리면서 대원군의 10년 집권이 무너지고, 고종(高宗)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高宗의 신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제수되었고, 누적된 시폐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권신(權臣)들은 반발하여 도리어 대원군 하야를 父子(대원군과 고종)를 이간질하였다고 규탄하였다. 이에 최익현은 " 사호조참판겸진소회소(辭戶曺參判兼陳所懷疎)"를 올려 閔氏일족의 옹폐를 비난하였으나, 상소의 내용이 과격, 방자하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873년부터 3년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계기로 최익현은 왕도정치적 명분이 상실된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우국애민의 위정척사의 길을 택하였다.그 첫 시도로 1876년 위의 "丙子持斧疎"를 올려 일본과 맺은 병자수호조약을 결사반대하였다. 이 상소로 최익현은 흑산도로 유배되었으나, 그 신념과 신조는 꺾이지 않았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약 20년 동안 최익현은 침묵을 지켰다. 이 시기는 일본과 개국 이래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운동, 청일전쟁 등 여러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하던 때이었다. 특히 1881년 신사척사운동이 일어나 위정척사사상이 고조되고 있을 때, 이 운동의 선봉에 서있던 최익현이 침묵을 지켰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러한 침묵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위기상황 속에서 항일투쟁의 지도이념으로 성숙하게 된 것은 그의 위정척사사상이 고루한 보수적인 것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 항일투쟁방법도 이제까지의 상소(上疎)라는 언론수단에 의한 개인적, 평화적이 아닌 집단적, 무력적인 방법으로 바뀌었고, 위정척사사상도 배타적인 국수주의(國粹主義)로부터 민족의 자주의식(自主意識)을 바탕으로 한 자각된 민족주의로 심화되었다.
단발령 斷髮令
1895년 11월 15일. 김홍집(金弘集)내각이 성년 남자의 상투를 자르도록 내린 명령이 단발령이다. 을미사변 (일본군의 민비 시해사건)이 있은 지 불과 3개월 뒤인 11월15일에는 오는 17일을 건양(建陽) 원년 1월1일로 음력에서 양력으로 역법(曆法)을 변경하고, 동시에 高宗의 조칙으로 단발령을 선포하였다. 당시 내세운 단발의 이유는 " 위생에 이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 "이라는것이었다. 그러나 유교윤리가 일반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린 조선 사회에서는 " 신체, 머리털, 살갗은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으로서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孝의 시작 "이라는 말 그대로 머리를 길러 상투를 트는 것은 인륜의 기본인 孝의 상징이라고 여겼다. 반발은 심하였다.
단발령을 선포한 高宗은 太子와 함께 당일로 단발을 하였다. 고종은 망설였으나,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 등의 강요에 못이겨 고종은 농상공부대신 정병하(鄭秉夏)에게 " 내 머리를 깎으라 "고 탄식하며 단발하였고, 그 다음에는 내부고시를 통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일제히 단발령 명령을 내려 포고함과 동시에 우선 관리들부터 단발을 강요하였다. 이는 일부 대신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의 반발을 일으켰고, 이는 반일감정 나아가서는 開化 그 자체를 증오하게 되는 사회혼란을 야기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유길준(兪吉濬)은 유생들의 단발에 앞서 당대 유림의 거두인 최익현을 경기도 포천에서 잡아들여 투옥한 후 고시문을 보이면서 단발을 강행하려 하자, 최익현은 "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을 자를 수없다. ( 吾頭可斷 此髮不可斷 ) "고 질타하여 그들도 단발을 강행하지 못하였다.
이 결과 김홍집 내각은 끓어오르는 반일감정으로 인하여 국정개혁을 결실시킬 대중적 지지기반을 상실하고 말았으며, 그리고 이러한 반일 분위기 속에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개시되었으니, 단발령은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더불어 의병운동의 결정적 기폭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익현은 상소를 통한 소극적인 운동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에 나서게 되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의 일대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청토역복의제소 請討逆復衣制疎
1894년 東學 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최익현은 농민군을 약탈,잔학해위를 일삼는 집단으로 간주하고 격렬하게 비난하였다. 그해 6월 경복궁 쿠데타가 일어나고 갑오개혁이 단행되자 " 請討逆復衣制疎 "를 올려 親日 개화파정권을 적으로 규정하면서 개화정책의 전반적 폐지를 요구하면서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의 처단과 역적들을 비호하는 일본에 대한 문죄를 요구하였다.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하였다. 이때 내부대신 유길준(兪吉濬)이 보낸 순검(巡檢)에 의하여 서울로 압송되어 감금 투옥되었다.
이후 1898년 궁내부특진관이 되었고, 뒤에 중추원의관, 의정부 찬정, 경기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최익현은 高宗의 密旨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노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되었다.
을사조약 乙巳條約
을사조약은 1905년 11월17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다. 제2차 한일협약 또는 을사5조약이라고도 한다. 이후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의 외교권 박탈은 물론 내정(內政)까지 지배하게 되었고, 국내의 외국 공사관과 해외의 우리나라 공사관이 폐쇄되었다. 을사조약의 진상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일제히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며 조약의 파기를 주창하는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청토오적소 請討五賊疎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疎)를 올려 의거(義擧)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이용 안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나라 안의 적과 나라 밖의 구(寇)들이 합세하여 임금을 위협하고 조약의 굴레를 씌워 침탈을 강행하였으니, 이제 국가에 남아있는 것은 虛名에 불과할 뿐이오 폐하(陛下)께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은 허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서 종사를 보존할 길은 전혀 없고 民生들만 魚肉으로 되어 온 것이 벌써 여러날 입니다.
옛부터 다른 사람의 국가를 멸하고 다른 사람의 토지를 빼앗는 일이 어찌 할 일이겠습니까마는 저들 왜적들 같이 교활하고 융악한 자들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 나라의 君臣들은 바야흐로 그것을 동양평화다, 우의익친(友誼益親)이다 ..라고 천하에 큰소리를 침으로써 만국의 耳目을 기만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어리석은 일이거니와 또한 그들의 앞잡이로써 저들의 손톱과 어금니 노릇을 하고 있는 우리의 역적들도 저들의 농간에 춤을추면서 그것은 잠시 외교권을 일본에 빌려준것으로써 우리들이 부강할 때 다시 찾으면 된다고 지껄여 대고 있습니다.
아! 슬프도다. 저들 倭라는것들은 금심수행(禽心獸行)의 오랑케들로서 족히 人道로써 꾸짖을 바가 못되지만, 이 우리의 적신배(賊臣輩)들은 또한 국가에 대한 무슨 원수가 있어서 그것을 반드시 망하게 하므로써 이 차마 하지 못할 끔찍한 일들을 그대로 한단 말입니까. 이제 저들 왜적들은 마침내 人種마저 바꾸려는 독모(毒謀)마저 실행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민조례(移民條例)라고 하는 것을 만들어 不日內로 시행할 것인 즉 이 지경에 이르러서 저들 逆臣輩들은 또한 무슨 말을 가지고 그 죄를 피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를 당하여 진실로 인성(人性)을 가진 자라면 그 누구나 生을 그만두려는 뜻을 가질 것이온데 臣과 같은 늙은이로써는 하루 더 살면 하루의 욕(辱)을 더 하는 것이고, 이틀을 더 살면 이틀의 辱을 더 하는 것이온데 어찌 구차하게 몸을 아끼는 마음때문에 저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송병준들과 같이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臣은 숨어서 생명을 끌면서 약간의 동지들과 더불어 저 적의(翟義)나 문천상(文天祥)이 했던 것과 같은 거의(擧義)를 도모해 온지 이제 5개월이 되었습니다. 다만 臣은 본래부터 才智가 없고 또한 늙으매 병까지 겹쳐서 처음 모의를 시작할 때부터 그 형세가 막히기를 십중팔구나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擧義할 것을 끌어오면서 앉아서 세월만 보내다가 이제 그 계획이 다소 정해지고 인사들이 모여들었기에 바로 이달 12일에 前 낙안군수(樂安郡守) 임병찬(林秉瓚)을 보내어 먼저 義旗를 꼽게 하였습니다.
이에 臣 등은 동지들을 장려하여 차례로 北으로 밀고 올라가 이등박문(伊藤博文)과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등 제왜(諸倭)를 글로써 부르고 각국 공사 및 우리 정부의 諸臣들을 회동시킨 다음 크게 담판을 벌리므로써 작년 10월의 늑약(勒約)을 거두어 없애버리고 각부의 고문관들을 罷하여 돌려보내며, 또한 우리의 국권을 침탈하고 민생들을 하나같이 만국공론에 붙여 없앨 것은 없애고 고칠 것은 고침으로써 국가로 하여금 반드시 그 자주권을 잃지 않게 하고 민생들로 하여금 역적의 禍로부터 免하게 하려는 것이 바로 臣의 소원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역량과 형세를 헤아리지 않은 채 저들에게 짓밟히는 禍를 당한다 하더라도 臣은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죽음을 감수하고 毒한 귀신이라도 되었다가 저 원수의 오랑케를 쓸어버리고 말 것이지, 결코 저들과 더불어 같은 하늘 밑에 살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우리 사람들 가운데 즐겁게 저들의 노예가 되어 大義를 도리어 원수처럼 버려는 자들이 있어 서로 앞을 다투어 우리를 비도(匪徒)라 칭하면서 헐뜯을 것이오니 臣은 참으로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궁궐을 바라보고 폐하를 사모하며 울어울어 목메이는 가엾은 이 臣의 충정을 삼가 죽음을 무릎쓰며 이같이 호소합니다.
포고팔도사민 布告八道士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은 곧바로 請討五賊疎와 재소를 올려서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할 것과 망국조약에 참여한 박제순(朴齊純) 등 五賊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상소 등 언론수단에 의한 위정척사운동은 집단적, 무력적인 항일의병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최익현은 1906년 윤4월, 전라북도 태인에서 궐기하고, 한편으로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疎)를 올려 의거의 심정을 피력하고 궐기를 촉구하는 포고팔도사민(布告八道士民)의 포고문을 돌리고, 일본정부에 대한 문죄서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를 발표하였다.
아, 슬프다 ! 오늘의 국사를 차마 어찌 말하랴. 예사날 망국에 종사만이 무너지더니, 오늘의 망국에는 인종마저 함께 무너지는구나. 우리 삼천만 인민이 이제 모두 노예가 되니 남의 노예가 되어 살기란 곧 죽음만 같지 못하다. 하물며 당당한 이 대한자주지민이 구차하게 고개 숙여 저 원수 밑에서 하루의 삶을 구한다면 어찌 죽음보다 나으랴. 우리나라는 토지도 인민도 정치도 모두 우리의 자립이요 자주이었다.
대개 사람이 반드시 죽을 것을 알게 되면 기력이 스스로 떨치고 의지가 굳어지고 애국심이 스스로 솟아나고 합심의 공이 그대로 나타나는 법이니 이제부터 우리는 의존하는 마음을 뽑아 없애고, 위축하는 습성을 떨쳐버리며, 고식 주저하는 고질도 바꿔 없애고, 열 걸음 나아가되 한치도 물러서지 말고 함께 죽을지언정 결코 홀로는 살려하지 않는다면 모든 이의 마음이 큰 하나로 뭉쳐져 하늘도 반드시 우리를 도우리라.
나 최익현은 충성을 다해 나라의 환난을 미리 막지 못하고 또 몸을 던져 순국함으로써 민기를 북돋우지도 못하였으니 너무 부끄러워 살면서 수천만 동포를 대할 수 없다. 이에 감히 포고로써 호소하노니 나라 안 온동포들이여 ! 바라건데 이를 죽어가는 한낱 늙은이의 말이하 흘려버리지 말고, 부디 우리 모두 스스로 힘내고 굳게 다져서 우리의 인종마저 바꾸려는 저들의 악랄한 간계를 끝내 막아낼 지어다.....................
선유위원 宣諭委員
1894년의 갑오경장과 뒤를 이은 단발령 또한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전후하여 전국의 각처에서 의병(義兵)이 봉기하고 있었다. 최익현은 조정에 의해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임명되었으나, 그는 도리어 진회대죄소(陳懷待罪疎)를 올려 의병들을 " 모두 충성과 의리를 앞세운 백성들"이라 일컬어 擧義救國의 정당성을 밝혔다. 그 후 최익현은 러일전쟁의 발발과 일제의 군사적 국권침탈을 보고서 "궐외대명소(闕外待命疎)"를 올려 외세의 척결과 국권수호의 방책을 역진하였다.
항일의병활동 抗日義兵活動
최익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을사조약 늑결 이후 70세가 넘은 노구(老軀)를 무릎쓰고, 직접 의진(義陣)을 편성하여 항일전에 투신하였다는 사실에 더 큰 비중이 있다. 최익현은 을사조약 늑결에 항거하여 매국대신(賣國大臣)들인 을사5적(乙巳五賊)을 처단할 것을 요구한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疎)를 올리고 나아가 의병을 일으켜 국권회복을 도모할 것을 결심, 천명하였다.
궐리사 강회 궐리사 강회
최익현의 이 거의(擧義)는 충남 홍주의 민종식(閔宗植) 의병진과 공동항쟁할 호남(湖南) 의병진의 편성으로 나타났다. 최익현이 항일의병을 도모하려던 구체적인 움직임은 19065년 1월 (을사조약 체결 후 두 달 경과) 충남 논산군 노성의 궐리사(闕里祠) 집회에서 나타났다. 그는 명암 신협의 초청을 받고 궐리사에 가서 원근의 유림들이 모인 집회에서 강회를 열고 시국의 절박함을 알리며 일치단결해서 국권회복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때의 집회에는 1896년 진주의병진에서 활동하였던 경남 합천의 명유 애산 정재규(艾山 鄭載圭)가 10여 명의 지사들과 함께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거의가 항일의지를 결집시키는 의병항전의 준비단계이었던 것이다.
최익현, 체포되다
6월11일 아침, 광주 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의병 해산을 명하는 광무황제의 선유조칙과 관찰사 고시문을 최익현에게 보내와 의병의 해산을 종용하였다. 물론 최익현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괴뢰로 전락한 정부에서는 전주관찰사 한진창에게 전북지방 진위대를 동원하여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훈령을 내렸다. 한진창은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를 출동시켜 6월11일 순창 외곽을 봉쇄하여 읍의 북쪽인 금산(錦山)에는 전주 진위대가, 동쪽인 대동산(大同山)에는 남원 진위대가 각각 포진하여 읍내 관아의 객관(客館)을 중심으로 포진하고 있던 의병부대를 압박해 왔다.
최익현은 처음에 이들이 일본군인줄 알고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척후병의 보고로 이들이 일본군이 아니라 우리 동족인 진위대 군사임을 알고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하기 위하여 진위대측에 다음과 같은 간곡한 통첩을 보냈다. 우리 의병은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목적으로 싸울 뿐, 동족간의 살상은 원치 않는다. 진위대도 다 같은 우리 동포일진데, 우리에게 겨눈 총구를 왜적에게로 돌려 우리와 함께 왜적을 토멸토록 하자. 그리함으로써 후세에 조국을 배난하였다는 오명을 씻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양 진위대는 최익현의 이와같은 호소를 묵살한 채 오히려 의병진의 피전(피전)자세를 역이용하여 일제히 맹공을 가해왔다. 최익현의 의병 측은 이미 " 동포끼리는 싸워서는 안된다 "고 사생취의(捨生取義)를 결행, 응전없는 상태에서 맹공을 받게 되자, 중군장 정시해가 전사하는 등 일시에 진영이 와해되고 말았다. 이에 최익현은 주위를 돌아보며 " 이곳이 내가 죽을 땅이다. 제군은 모두 떠나라 "고 하며 지휘부가 있던 순창 객관 연청(椽廳)에 그대로 눌러 앉자, 그의 곁을 떠나지않은 자가 22명이었다. 진위대는 의병측으로부터 아무런 저항이 없자, 사격을 중지하고 지휘소를 에워싼 채 그대로 밤을 지냈다.
6월14일 끝까지 남아있던 최익현 이하 임병찬, 고석진, 김기술, 문달환, 임현주, 유종규, 조우식, 조영선, 최제학, 나기덕, 이용길, 유해용 등 13인의 의사들은 전주로 압송되었다. 이로써 최익현의 의병항전은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위 사진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최익현의 모습이다. 며칠 뒤 최익현 일행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일본군 사령부에 감금되었다. 최익현 이하 13인의 의사(義士)들은 여기서 그들의 심문과 회유를 받는 동안 일제(日帝)의 죄상을 성토하는 등 의기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두 달 남짓 일본군사령부에 감금된 채 최익현과 임병찬은 그해 8월 하순, 일본 대마도 엄원(嚴原) 위수영(衛戍營)으로 압송되어 적국(敵國)에서 감금생활을 하게 되었다.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일제는 끝내 굽힐 줄 모르는 최익현의 충절을 두려워한 나머지 대마도 위수영(衛守營)으로 귀양 보내 단발(斷髮)을 강요하였으나 그는 단식(斷食)으로 대항하며, 제자 임병찬(林炳瓚)에게 유소(遺疏 .. 죽기 전마지막 상소)를 구수(口授)하였다 ( 74세. 대마도에서. 1906년 11월).
유소 遺疏
죽음을 앞둔 臣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對馬島) 경비대 안에서 서쪽을 향하여 두 번 절하고 황제 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삼가 아룁니다. 臣이 금년 윤 4월에 의거(義擧)를 시작한 처음에 대략 상소로 아뢰었는데, 그 상소(上疎)가 진달되었는지의 여부를 모르겠습니다. 臣이 거사를 잘못하여 마침내 체포되는 욕을 당하여 7월8일에 일본 대마도로 압송되어 현재 경비대 안에 수감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분간하면 필경 살아서 돌아갈 희망은 없습니다. 지금 이놈들이 처음에 강제로 臣의 머리를 깎으려 하였고, 끝에서 다시 교활한 수단으로 달래며 말을 하니, 놈들의 심사를 측량할 수 없으니 반드시 죽이고야 말 것입니다. 삼가 생각하건데, 臣이 여기에 온뒤로 한 술의 밥이나 한모금의 물도 모두 적(敵)의 손에서 나왔으므로, 설령 적(敵)이 臣을 죽이지 않아도 臣이 차마 구복(口複) 때문에 자신을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 드디어 식사를 거절하고 옛 사람의 " 자신을 깨끗히 하여 先王에게 부끄러움이 없다 "는 의리를 따르려고 결심하였습니다. 臣이 나이 74세 이니 지금 죽은들 무엇이 애석하겠습니까. 다만 역적을 치지 못하고 원수를 없애지 못하였으며 국권을 회복하지 못하고 강토를 도로 찾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4천년 화하(華夏)의 정도(正道)가 흙탕에 빠지는 것을 붙들지 못하고, 삼천리 강토에 있는 선왕의 백성이 어육(魚肉)이 되는 것을 구원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臣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臣이 삼가 헤아리건데, 왜놈은 멀어도 4, 5년 사이에 반드시 망할 징조가 있는데, 우리가 대응할 방법을 다하지 못할까 걱정입니다. 이제 청나라와 러시아 두 나라가 밤낮으로 이놈들에게 이를 갈고 있고, 영국과 미국 여러 나라도 이놈들과 반드시 잘 지내는 것만은 아니니 조만간 틀림없이 서로 공격할 것입니다. 또한 전쟁을 치르면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바닥나서 민중이 그 윗사람을 원망할 것입니다. 밖으로 틈을 엿보는 적이 있고, 안으로 위를 원망하는 백성이 있으면 그들이 망하는 것은 발을 들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데, 폐하께서는 국사를 다스릴 수 없다고 하지 마시고 마음을 분발하여 聖志를 넓게 세워서 퇴폐함을 진작하소서. 답습하는 습관을 진작하고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지 말며, 믿을 만하지 않은 것은 믿지 마소서. 헛된 위엄에 지나치게 겁내지 말고, 아첨하는 말을 솔깃하여 듣지 말며, 더욱 自主하는 정신을 굳게 지키고, 의뢰심을 영원히 끊고 와신상담하는 뜻을 새겨 자수(自修)하는 방법을 다하소서.
그리하여 영재와 준걸을 불러들이고, 군인과 백성을 어루만지며 양성하여 사방 형편을 관찰하고, 중용을 취하여 일을 하신다면, 이 나라의 백성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며, 선왕의 5백년 성덕과 지선의 혜택이 마음에 젖어들 것이니, 어찌 폐하를 위해 죽을 힘을 다해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지 않겠습니까? 그 동기는 다만 폐하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삼가 언하건데, 폐하께서는 臣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이라 해서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지 않으신다면 , 臣은 지하에서 또한 두 손을 모아 기다릴 것입니다.
臣이 죽음에 임해서 정신이 어지러우니, 하고 싶은 말을 일일이 진달할 수 없어서 이것만 써서 신과 함께 갇혀있는 前 군수(郡守) 임병찬(林炳瓚)에게 부탁하고, 죽으면서 그에게 때를 기다려 올리게 하였습니다. 삼가 빌건데, 폐하께서는 어여삐 여기시어 살펴 주소서. 臣은 울면서 영결하는 심정으로 삼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아룁니다.
임병찬의 상소
임병찬(林炳瓚 .. 1851~1916)은... 낙안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과 함께 의병(義兵)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는 최익현 의병활동을 실질적으로 주도(主導)하였으며, 모병, 군량 및 병사 훈련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6월12일 순창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 중 최익현과 함게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후 감금 2년형을 선고 받고 대마도로 최익현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최익현이 죽자 그의 시신과 함께 귀국하였다.
삼가 아룁니다. 臣은 본시 못생기고 어리석어 가장 낮은 자리에 있으나, 오직 임금을 섬기고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만은 천성에서 나옵니다. 이에 臣의 스승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한 사실은 작년 윤 4월, 臣의 스승이 올린 상소와 臣의 상소에 이미 대략 아뢰었습니다. 그 원소(原疎)가 상달되었는지 여부는 臣이 알지 못하나, 지금 臣이 만번 죽다가 남은 병든 몸으로 살아서 고국에 돌아왔으니 마땅히 산중에 묻혀서 종적을 감추고 감히 다시 나와 사람을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스승의 유소(遺疎)를 부탁받았기에 폐하께 진달하지 않을 수 없고, 유소의 뜻에는 상당한 곡절이 있으니, 또한 마땅히 사정을 진술한 연후에 국민의 의혹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臣의 스승이 의병을 일으킬 때 臣이 불초한 줄 모르고 함께 나라의 치욕을 씻자고 약조하니, 臣은 처음에 자신의 재능도 요량하지 못하고 망녕스럽게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순창(淳昌)에 이르러 전주, 남원의 두 관병(官兵)을 만났는데, 臣의 스승과 臣이 " 원수는 왜놈인데, 어찌 우리 병정끼리 서로 죽일 수가 있느냐 ?"하고 달려가서 서로 공격하지 말자고 깨우쳤는데, 두 관병은 모두 듣지 않고 총탄을 난사하여 마침내 의사(義士) 정시해(鄭時海)를 臣의 스승이 앉아있는 앞에서 죽였습니다.
그리하여 의병은 모두 흩어지고 오직 臣 임병찬과 유생 고석진, 최제학, 김기술, 나기덕, 문달환, 양재해, 임현주, 조우식, 이용길, 조영선, 우해용 등 12인이 남아서 함께 스승을 지키며 한사코 좌우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日兵이 와서 스승 이하 13人을 잡아 모두 경성에 있는 일본군사령부에 가두었고, 4개월이 지나 7월8일에 스승과 臣을 왜놈의 대마도로 압송하여 경비대라는 곳에 구속하고, 나머지 11명의 동지들은 차례로 다 돌려보냈습니다.
스승과 신이 그곳에 도착하니 홍주(洪州)의 의사 9명이 먼저 그곳에 감금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왜놈의 장수가 처음 스승을 보고 바로 갓을 벗기고 머리를 깎으려고 스승을 협박하였습니다. 스승은 처음 잡힐 때부터 적들을 꾸짖었는데, 그때에는 더욱 꾸짖어 마지 않고 臣을 돌아 보면서 말하기를
< 차라리 목을 끊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 살 수는 없다. 내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 하고 마침내 밥을 물리치고 먹지 아니하고, 손수 유소(遺疎)를 짓고 臣에게 주면서 " 내가 죽은 후에 마땅히 이것을 우리 임금에게 올리라 "고 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왜놈들의 대장이 부하를 데리고 와서 사과하기를 " 이것은 통역하는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다 "하고 이어서 간절히 밥 먹기를 권하니 스승은 말하기를 " 비록그래도 나의 의리로는 너희들 밥은 먹을 수없다 "하고 고집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그놈들은 " 음식 값은 모두 大韓에서 보내온것이니 일본음식이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때에 신과 같이 갇혀있던 여러 의사들이 모두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만단으로 말씀드려 식사히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3일만에 비로소 식사는 하였으나 이로부터 기력이 소모되고 온몸이 수척해져 날이 갈수록 여위었고, 풍증(風症)마저 합병하였는데, 마침내 11월17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 슬프고 원통합니다.
스승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참지못해서 80고령으로 의거를 시작하였고, 만리 이국 땅에서 마침내 문천상(文天詳)의 죽음과 같은 의리로 마쳤습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습니까 ! 지금 스승의 상소문 속에 " 식사를 거절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스승이 그날 바로 돌아가지 못한 곡절은 이상과 같습니다. 신이 만약 상소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고 숨기고 아뢰지 않는다면, 죽은 스승이 최후까지 충의로 마친 뜻을 밝힐 방법이 없어 염려되었고, 또 상소를 바치면서 연유를 자세히 아뢰지 않으면 백성들로 하여금 스승의 죽음에 의심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이 울면서 상소를 받들면서 그 연유를 자세히 아뢰지 않을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 상소문은 본래 스승이 입으로 부르고 , 臣이 받아 썼기 때문에 서례(書禮)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또한 그곳에서는 우리나라 종이가 없어 다만 행장 속에있던 종이쪽에 쓴 것인데, 지금이라도 臣이 다른 종이에 옮겨 쓰지 못함은 스승의 구본(舊本)을 보존하려는 까닭입니다. 아아 ! 애석합니다. 臣은 스승과 함께 죽지 못하고 뜻밖에 옛날 모습으로 다시 서울길을 밟으니, 들리고 보이는 것이 모두 슬프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실로 구차하게 살아 있음이 다행인 줄을 모르겠으며, 목메어 우는 심정을 견디지 못하여 삼가 죽음을 무릎쓰고 아룁니다.
단식 斷食
1906년 10월, 일본 수비대장으로부터 최익현에 대한 식비(食費)는 모두 조선정부에서 부담하기로 하였다는 말을 듣고 계속하던 단식(斷食)은 중단하였으나, 이미 오랜 단식(斷食)과 고령(高齡)으로 병을 얻어 그해 11월 5일에 대마도(對馬島) 병영(兵營)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한(恨) 많은 일생과 구국신념으로 일관된 생애가 마침내 종결되었다.
대마도에서 최익현의 단식(斷食)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최익현과 함께 유배(流配)를 와서 스승 최익현의 최후까지 함께 한 제자 임병찬이 쓴 ' 대마도일기(對馬島日記) '에 다름과 같이 전한다. 대마도에 도착한 날, 왜군 수비대장은 최익현 일행에게 일본이 주는 밥을 먹었다는 이유로, 일본식대로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을 한다. 그러자 최익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일본 밥 두어 숟가락으로 먹은것이 이미 잘못된 일이구나. 머리를 깎으라는 명령은 조정의 명(命)도 따르지 않았는데, 하물며 일본사람의 말을 들을까보냐 ? 이제부터 단연코 일본 밥을 먹지 않으리라 ...
이렇게 해서 최익현은 그날 저녁부터 음식을 거부하였다. 함께 있던 임병찬, 이식, 유준근 등도 먹지 않았다. 그리고 최익현은 그날 조정에 올릴 상소문을 제자 임병찬에게 구술한다. 그는 왕에게 자신이 단식을 시작하였음을 알리고 자신의 강경한 입장을 적었다. 오늘날 최익현이 단식 끝에 죽었다는 근거는 바로 이 상소문에 근거한다.
그런데 상소문을 쓴 다음 날인 7월11일 오후에 일본군 수비대장이 최익현 일행을 찾아온다. 그는 통역의 잘못으로 오해가 생겼다면서, 머리를 깎으라는 뜻은 아니었다고 정중히 사과하였다. 그리고 일본은 비교적 예의를 갖추어 최익현 일행을 대하였다. 어쨋든 그날 저녁 비로소 최익현은 죽을 먹었다. 꼬박 여섯 끼니를 굶은 뒤이었다. 이 날의 일을 " 대마도일기 "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저녁 밥이 나왔기에 선생님께 드시기를 권하였더니 죽을 조금 드신다. 이것을 보고 모두 밥을 먹었다. 그리고 최익현은 그로부터 3개월 후 발병하여 한 달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물론 비록 이틀간이지만, 74세라는 고령의 최익현에게 단식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최익현의 사인(死因)은 감기중상으로 시작된 통증이되, 단식으로 쇠약해진 건강, 조선과는 다른 대마도의 환경과 기후, 유배지에서의 정신적 고통, 노령 등이 종합적으로 빚어낸 것이라고 하겠다.
최익현의 유해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자질문인(子姪門人)은 물론 회사 사원들을 비롯한 수만명의 남녀노소가 부두에 몰려나와 "춘추대의 일월고충 (春秋大義 日月高忠)"이라 적은 조기(弔旗)를 높이 들고 통곡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임병찬이 기록한 <대마도일기. 對馬島日期>에는 최익현의 마지막 유시(遺詩) 한 편이 전한다.
기첨북두배경루 起瞻北斗拜瓊樓
백수만삼분체류 白首蠻衫憤涕流
만사불탐진부귀 萬死不貪秦富貴
일생장독노춘추 一生長讀魯春秋
아침에 일어나 북녘을 보고 主上께 절 올리니 / 흰 머리 오랑케 옷에 분한 눈물 흐르는구나 / 만번을 죽어도 진(秦)나라 부귀를 탐하지 않음은 / 한평생 노(魯)나라 춘추(春秋)를 읽었기 때문일세
최익현이 임병찬(林炳瓚) 등 12명의 의병(義兵) 제자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일본 대마도 이즈히라시(嚴原市) 위수영(衛戍營) 수비대에 수감된 것이 1906년 음력 7월8일이었으며, 최익현의 나이 74세 때 일이었다. 그리고 최익현이 일생을 마감한 날은 대마도에 유배된 후 4개월이 흐른 1906년 음력 11월 17일이었다. <면암집. 勉庵集>에는 그 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1월17일(庚戌) 인시(寅時. 오전 4시)에 대마도 수관(囚館)에서 운명(殞命)하다. 전날 저녁 큰 별이 동남쪽으로 떨어지며 밝은 빛이 밤하늘에 뻗쳤다. 이것을 바라본 사람은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오늘 새벽에 운명하셨다. 이에 앞서 영조(永祚 ..최익현의 장남)가 염습(殮襲)할 제구(祭具를) 갖추어 들어왔다. 선생이 운명하셨다는 말을 들은 수비대장은 " 시신을 오래 이 건물에 둘 수 없으니, 시실(屍室)로 옮기라 "고 하였다. 시실(屍室)은 경비대 안에 있는데 한칸 자리 판자집이었다.
바닥에는 벽돌을 깔았고, 가운데 시상(屍床)이 마련되어 있었다. 사시(巳時 . 10시)에 시신을 이곳으로 옮기고 염(殮)을 하였다. 마침 날씨가 매우 추워서 염한 상태로 밤을 보낼 수 없어서 신시(申時. 오후 4시)에 소염(소염)을 하였다. 집사(執事)는 임병찬, 신보균, 남규진이 맡고, 집례(執禮)는 이척이, 호상(護喪)은 노병희가, 사서(司書)는 문석환이, 사화(司貨)는 신현두가 맡았다. 이날 밤 일본측은 영조(永祚 . 큰 아들)와 영학 (永學 .. 차남)만을 시신 곁에 있게 하고 그 외 안에 있던 사람은 밖으로 못나가게 하고, 밖에 있던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날 전보를 쳐 본가와 서울에 부음(訃告)하였다.
11월18일 입관 후 수선사(修善寺)에 모시다. 노병희가 밖에서 소나무 판자를 구해와서 匠人을 불러 棺을 짜려고 했는데, 수비대장이 와서 하는 말이 " 관(棺은) 마땅히 부대에(部隊)서 준비해야 한다는 상부의 명령이 내려왔다 "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관을 만들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로서는 원수가 만든 물건이고 규격도 달라 하루도 사용할 마음이 없었으나,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니 참고 그것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신시(申時 . 오후 5시)에 입관하여 영구(靈柩)와 혼백(魂魄)을 모시고 수비대 뒷문을 통하여 동네 가게 주인 해로(海老)의 집으로 갔다. 함께 있던 수감자는 모두 흰 두건에 환질(環桎)을 두르고 부대 문(門) 안에서 배웅하였고, 오직 임병찬(林炳瓚) 한 사람만 영구(靈柩)를 배행하여 가게에 이르자, 해노(海老)의 아들 웅야(雄野)가 앞을 인도하여 수선사 법당에 영구를 모셨다.
출처 : 김규봉의 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