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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의 고금명성도] 135 (조선전기왕조실록) 3대왕 태종 이방원
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 포스터
태지석을 보면 ‘공민왕 36년 (1367 정미년) 5월16일 생’으로 되어 있고 태종 실록에도 그렇게 나와 있으며, 매년 5월 16일에 탄신일에 대한 하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생시에 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실록에 태종의 사주에 관한 특이한 기록이 있다.
어머니 한씨가 복자(卜者, 역술인) 문성윤에게 이방원의 사주를 문의하니 ‘이 사주는 귀하기가 말할 수 없으니 조심하고 점쟁이에게 경솔히 보이지 말라’는 말을 했다. - 태종실록 총서
임금이 이어서 복서(卜筮)의 일을 의논하여 말하였다. "내 젊어서 점[卜]을 남에게 물었는데, 왕위에 오른다고 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문성윤(文成允)만은 ‘열토(列土)의 명(命)이 있으니, 남에게 번거롭게 누설하지 마십시오.’ 하여, 내가 마음으로 심히 편치 않았다“. - 태종실록 12권
12개의 생시 중에 태종과 딱 맞는 하나를 찾아서 고려말 조선초 역술인 문성윤 선생이 봤던 것을 생시검증을 통해 재연해보니 묘시생이다. 생시검증 과정에 관한 이야기는 이 글의 마지막에 서술했다.
[간략연보]
1세 (1367 정미년) 음력 5월16일 묘시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남.
16세 (1382 임술년) 진사에 합격, 민제의 딸 여흥 민씨(1365년 7월 11일생, 후에 원경왕후)와 혼인
17세 (1383 계해년) 과거급제. 아버지의 자랑이 됨. 이후 젊은 시절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무관으로 활약하고 주요 정치적 인물들과의 줄도 대줌.
22세 (1388 무진년) 음력 5월22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중앙관직에서 근무하던 이방원은 개경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구조함.
25세 (1391 신미년) 9월 생모 신의왕후 사망
26세 (1392 임신년) 음력 7월 아버지 태조 즉위. 즉위 직전인 음력 4월 정몽주의 반이성계 세력을 제압하는 공을 세움. 하지만 이후 정몽주를 죽였다는 이유로 이성계의 눈 밖에 남.
28세 (1394 갑술년) 장남이나 차남을 명으로 보내라는 홍무제의 요청으로 명나라에 갔다옴. 첫째 양녕대군 출생.
30세 (1396 병자년) 둘째 요령대군 출생
31세 (1397 정축년) 셋째 충녕대군 세종대왕 출생
32세 (1398 무인년) 음력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 장악. 형 방과를 정종으로 내세움.
34세 (1400 경진년) 음력 11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으로 즉위. 조선의 3대 군주가 됨.
35세 (1401 신사년) 태종의 여색 밝힘으로 원경왕후가 투기하여 대립하기 시작. 1402년 더욱 심화됨.
36세 (1402 임오년) 조사의의 난으로 아버지 이성계와 대립. 이후 화해
38세 (1404 갑신년) 이거이 모반 사건. 양녕대군 세자로 책봉.
41세 (1407 정해년) 민무구 민무질 유배. 이후 외척 세력 서서히 척결함.
42세 (1408 무자년) 태상왕 이성계 승하. 장인 국구 민제 사망.
44세 (1410 경인년) 민무구 민무질 사사
49세 (1415 을미년) 경녕군 문제로 민무휼 민무회 숙청
50세 (1416 병신년) 태종의 측근 하륜과 이숙번 물러남
52세 (1418 무술년) 양녕대군 폐세자. 음력 8월 왕위를 세종에게 승계. 측근이자 세종의 장인 심온 죽임.
53세 (1419 기해년) 상왕 정종 승하
54세 (1420 경자년) 음력 7월 원경왕후 사망
56세 (1422 임인년) 세종4년, 음력 5월10일 승하
[선천 명반 분석]
[명궁 천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천상이 조선 최고의 권력자가 될 수 있을까? 아버지 이성계의 왕위를 빼앗기는 했지만 결국은 화해하고 아버지를 상왕, 태상왕으로 모시면서 극진히 대접했으니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형인 정종 이방과와 10살 차이가 나기에 태종 이방원도 같은 정년생의 천기화과와 거문화기가 있다. 정종은 형노선에 그러한 기거 악사위천리가 있고 태종 자신은 명궁협으로 기거 악사위천리가 있으면서 둘 다 협에 민감한 천상 명이니 묘하다. 물론 모든 형제들이 형제궁의 형상이 실제 그 형제들 명궁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니고 두 형제의 인생이 얽혀야 그리된다. 정종과 태종은 얽혀있다.
[인궁 거문화기]
이 명반이 이방원 것이라고 확신이 들었던 결정적인 단서는 인궁의 거문화기이다. 언 듯 보면 화기는 이방원의 부모궁에 가 있을 것이라 생각될 수 있다. 하지만 이방원은 이성계를 존경하면 존경했지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가 싫어했던 것은 자신의 죽은 생모 자리를 꿰차고 왕비가 된 새엄마 신덕왕후와 그러한 계모가 이성계와 같은 베개를 베고 잘 때 관여한 정치로 세자가 되었다고 믿은 그녀의 아들 방석이었다.
임인대한에 이 화기는 부모궁의 악사위천리 복선궁의 현현으로 온 것으로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이 있던 대한이고, 계축대한 부모궁의 이 화기는 생모가 사망한 것 외에 정몽주를 죽인 것과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것을 너머 권력까지 빼앗아 생긴 갈등을 나타낸다. 임자대한 복덕궁의 이 화기는 대한 전택궁인 묘궁이 나의 복덕에는 화기를 나의 관록에는 화과를 주는 전택궁 악사위천리 복선궁의 현현이다.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형 방간을 유배보내지만 (인궁 복덕의 형제궁 화기) 자신의 권력이 강하여 마침내 왕이 되는 상황 (진궁 관록의 문서궁 화과), 처가댁 식구들인 왕비의 동생들을 처단하여 자신의 관록에서의 왕권을 강화시키는 상황, 등을 나타낸다. 신해대한 자전선의 이 화기는 세자인 양녕대군의 눈 뜨고는 못 봐줄 각종 망나니짓을 반복해서 용서해주다 결국 이를 못참아 52세 폐세자로 만들고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준 일을 보여준다. 경술대한 관록궁의 이 화기는 노복궁 악사위천리 복선궁의 현현 때문에 생긴 것으로 세상과의 단절, 즉 승하함을 의미한다. (여기서 잠깐 공부를 위해 첨언하자면, 화과화기가 각 대한 별로 외궁에 좌할 때와 내궁으로 들어 올 때 다르게 악사위천리 복선궁의 현현을 적용시켰다 안 시켰다하는 기술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부모궁]
이번엔 부모궁을 살펴보겠다. 천량과 천수가 있어 매우 우러러 볼 수밖에 없는 웃어른이고, 화과까지 있으니 주변의 주목을 받을 정도의 큰 인물이다. 하지만 부모궁은 협으로 나의 마음(복덕)에는 천마를 그리고 명궁에는 절공을 주어 마우공망적 존재이기도하다. 공교롭게 천마는 타라와 동궁하여 절족마가 되었고 절공은 순공과 동궁하고 악사위천리협을 받아 더욱 공망하게 되었다.
이처럼 이 명반은 린궁(이웃궁)끼리 엮여 있다. 부처궁과 자녀궁끼리는 허모와 화령으로 엮여있는 것 외에도 관록궁 과강필절협, 보필협 -> 전택궁 양타협, 영타협 -> 복덕궁 쌍록권과협 -> 부모궁 마우공망협 -> 명궁 악사위천리협, 형기협이 되는 도미노격이기도 하다.
[명궁재백궁의 인감노출격]
명궁 천상이 악사위천리협을 받으니 도장이 남에게 노출되어 재백궁에 있는 금고 천부가 털리는 인감노출격이다. 자미심전1, p.150을 보면 '천상이 화과와 동궁하거나 삼방사정이나 협에서 화과 화기를 본다면 천상이라는 열쇠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어 금고인 천부가 위축되고, 상황이 안 좋으면 털리는데, 이를 인감노출격이라 이름 붙였다'라고 되어 있다.
물론 천부가 있는 궁에 별다른 살성이 없기에 흉이 심하지는 않다. 위에 언급한 이 격국의 정의에 의하면 천부는 털린다기 보다는 위축될 뿐이다. 더욱이 천부의 삼방에서 보이는 양타 때문에 노고가 되었지만, 경양은 보필의 협을 받고 창곡과 동궁하고 타라는 쌍록권과의 협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제화가 되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러한 천부의 협으로 삼기가회가 들어온다.
참고로 명궁 천부가 인감노출격이 되면서 공겁을 협을 받는 아래 영친왕의 명반과 비교해보라.
둘 다 같은 왕이기에 사해궁의 협으로 삼기가회가 들어오는지 모르겠으나, 영친왕의 천부로는 공겁이 협을 하여 공고가 되었다. 공고의 특징은 고립이다. 영친왕은 관록적인 면에서 인감이 노출되어 (자신의 직장에서 쓰는 도장이 일제에게 빼앗기어) 인생 자체가 고립이된 형상이나, 태종은 인생 자체이건 재백이건 고립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인생이 노출되어 왕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재백궁의 천부에 있는 돈을 쓰면서 취미를 즐기는 것에 있어 제한은 있게 된다.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이를 알게 하지 말라."하였다'는 기록이 (태종실록, 1404년 2월8일 기사 중 하나) 사관에 의해 남겨졌다. 이 밖에도 태종이 좋아하는 사냥을 즐기는 것을 재제하고자 하는 대간들의 계속되는 견제도 유명하다. 제사 지내러 어디를 가는 와중에도 행렬에서 이탈하여 갑자기 사냥을 한적도 있고 주위에 알리지도 않고 무사들만 데리고 기러기 사냥을 나간 적도 있는데, 임금이 궁궐에서 사라져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대신들은 난리가 나기도 했다. 왕께서는 수신제가하셔야하니 사냥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대간들의 주청때마다 자신은 궁궐에서 태어난 왕이 아니라서 이렇게라도 궐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되니 이번 한번만 눈감아 달라는 식으로 대신들에게 졸랐을 정도였다.
명궁 천상은 팔좌와 동궁하고 천부는 삼태와 동궁하고 있으니 자신이 돈을 쓰거나 취미를 즐기는 것이 귀족적으로 이루어짐을 암시하고 있는데, 여기에 각기 동물을 상징하는 봉각과 용지가 있으니 조선시대엔 그러한 귀족적 고상한 취미가 사냥임이 자명하다. 하지만 그렇게 사냥을 왕의 지위에 걸맞게 호화롭게 즐기는 것은 인감노출격으로 인해 제재를 많이 당할 수 밖에 없다. 인감노출격의 흉한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태종으로서는 형 정종의 YOLO족 같은 인생이 부러웠을만하다. 정종은 재위기간 2년을 보낸 뒤 상왕이 되면서부터는 사냥과 유람 등을 자유롭게 한 반면, 태종은 명궁의 악사위천리협이 크면 클수록, 다시 말해 왕이 되는 정도까지의 지위에 올라갈수록 재백궁의 천부가 위축되어 마음대로 사냥도 못하고 하니 오히려 왕이 되지 않고 그저 사회적 지위가 동북면 유력가문의 아들이나 아니 왕자 정도에서만이라도 멈추었으면, 그나마 천부는 덜 위축되었을테니 말이다. 딜레마다.
천상이건 천부이건 록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재백궁 입장에서 취미를 즐길 돈이 없어 보이지만, 전택궁의 쌍록권은 이 명반의 주인은 가문의 일을 물려받아 그 돈으로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전택궁과 관록궁이 암합이 되니, 집안에 내려져 오는 직업을 택한다면 (여기서의 아버지의 직업인 국왕) 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부처궁]
복덕궁에 천요가 있고 부처궁엔 천형이 있다. 이런 경우 배우자와 자신이 이질적인 점이 있다는 게 진설도 선생의 부처궁비전진결에 언급되어 있다. 실제 임상을 해보면 배우자와 외모가 다르거나 정치적 사상이 다르거나 가문의 한미함과 부유함이 다르거나 등의 매우 이질적인 면이 존재한다. 이성계 집안은 신진사대부와 같은 사상을 가지고 개혁을 추구했고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자 태종의 비인 원경왕후는 고려말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최고의 가문인 여흥민씨의 수장 민제의 3녀였다. 요즘으로 치면 이방원은 진보 정치인의 아들이고 원경왕후는 보수 정권에서 총리를 한 집안 출신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복덕궁 타라와 부처궁 영성으로 영타격이 형성되어 그런지 원경왕후와 여흥 민씨 가문은 이방원의 왕권쟁취를 위해 가문 전체의 명운을 걸고 힘을 쓴다. 제1차 왕자의 난 때, 장인어른 집에 숨겨 놓았던 각종 무기를 이용했고 처남들도 목숨을 걸고 매형 이방원을 도왔다.
하지만 그러한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부처궁도 다른 시절을 맞이하게되면 다르게 발현되기도 한다. 부처궁과 복덕궁의 영타격발은 감정적으로는 좋지 않다. 자칫하면 부처궁 삼방사정에서 보이는 영창타무의 징험이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극대화된 때가 임자대한 때인데, 자세한 것은 해당 대한 운추론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복덕궁]
복덕궁엔 절족마가 있어 집중력이 매우 좋다. 여기에 ‘꾀’를 의미하는 천요까지 있으니 신하들이 머리로 이방원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제 태종은 신하들을 가지고 놀았다. 한 가지 에피소드를 보자.
개국 공신 중에 조준이라는 인물이 있다. 태조 시절 정도전과 뜻을 같이 하여 급진개혁파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는 정도전과 몇 가지 사안에 있어 의견이 달랐다. 정도전이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고 주장했던 반면 조준은 세자를 이방원으로 세우자고 주장했고, 정도전이 요동정벌하자고 했을 때도 반대했고, 마침내 제1차 왕자의 난 때도 이방원의 편에 섰었다. 결국 태종 시절에도 조준은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게 된다.
태종은 그를 영의정에 앉히고 그의 20대 초반의 아들 조대림을 사위로 삼아서 정도전을 부정하면서도 정도전의 급진개혁이라는 이념은 그대로 물려받는 조정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급기야 사위 조대림에게 병권까지 쥐어주게 된다. 22살의 사위에게 병권을 주는 것은 태종 자신이 병권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병권은 삼군부에서 관할해야 하는데 자신의 사위 조대림을 통해 자신이 이를 쥐고 있는 것이니, 병권을 대신들에게 내 놓으라고 주청이 쏟아질 것이 자명했다.
이를 고민하고 있던 태종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 마침 목인해가 역모를 고한 공을 세워 입신양명하기 위해 조대림을 꾀어 군대를 움직이게 하여 조대림이 역모를 꾀한다고 거짓으로 고변할 것이라는 첩보를 얻게 된다. 태종은 이때다 싶어 꾀를 냈다.
목인해와 조대림을 취조하여 목인해는 모든 사실을 실토했고 조대림은 죄가 없음이 밝혀졌다. 태종은 목인해를 처형하라고 명한다. 하지만 맹사성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처형당하기 전에 목인해와 조대림을 좀 더 신문하여 주범 종범 등을 가려내야 한다고 주청한다. 태종은 이를 허락했고 목인해는 추가 신문 중에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아 사건은 종결된 듯이 보였다. 하지만 태종은 목인해의 처형 후 대신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조대림은 원래 역모를 꾀한 적이 없는데 왜 더 신문하게 만들었느냐?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키려고 그리 한 것 아니냐? 그리 얘기한 맹사성 등을 신문하여 그들의 입에서 모약왕실(謀弱王室, 왕실을 약하게 만들기 위해 모략을 꾸밈), 이 네 글자를 반드시 받아내겠다. 만일 승복하지 않거든 그의 죽음을 아낄 필요가 없다’라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제 조정은 맹사성을 구명하기 위해 난리가 난다.
하지만 이는 태종의 계략으로, 사위를 통해 왕이 군권을 쥐면 안 되니 병권을 삼군부에 내어 놓으라는 대신들의 공격이 있기 전에 조정의 프레임을 ‘맹사성 구명’으로 바꾼 태종의 정치 전략이었고 이는 복덕궁 절족마의 '집중력'과 천요의 '꾀'의 힘이다.
[임인대한(14-23세)]
16세 (1382 임술년) 진사에 합격, 민제의 딸 여흥 민씨(1365년 7월 11일생, 후에 원경왕후)와 혼인
17세 (1383 계해년) 과거급제. 아버지의 자랑이 됨. 이후 젊은 시절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무관으로 활약하고 주요 정치적 인물들과의 줄도 대줌.
22세 (1388 무진년) 음력 5월22일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당시 중앙관직에서 근무하던 이방원은 개경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구조함.
이 대한 내궁으로 악사위천리가 보인다. 묘궁 대한 문서궁의 문서성인 천상이 그러한 악사위천리 복선궁의 현현이 되었다. 이렇게 악사위천리가 문서적 성질을 가지고 있고 대한 명궁 거일도 문서조합이다. 그리고 선천 명궁 악사위천리가 대한에서 홍란천희를 만나 이 대한에 유사대폭발격이 형성된 점, 마지막으로 선천 관록 경양이 대한 관록에서 화성을 만나 화양격발이 발현되고, 선천 관록 보필협 받은 창곡이 대한 관록에서 은근한 타격인 영타의 협을 받는다는 점 등으로 이 대한 중에 과거에 합격하는 집안의 경사가 있었다. 악사위천리를 길하게 보아 이를 자신의 잘나감으로 인한 주변의 시기질투 유발로 볼 수 있음을 알지 못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다. 현대인이라면 '네가 그 학교에 입학했다고?' 정도의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 정도였을 것이다. 아버지 이성계도 무관 집안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하는 자식이 나온 것에 대해 매우 기뻐했던 것을 봐도 얼마나 이것이 폭발적인 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악사위천리이고 대폭발이다.
묘궁은 문서궁이기도 하지만 부모궁이기도 하다. 부모궁 악사위천리 복선궁의 현현은 아버지 이성계가 역적이 되는 것으로 발현되었는데 그러한 구테타가 성공하게된다. 세상 물정 모를 때에 아버지가 성공하는 쿠데타를 저질렀으면 그저 집안이 잘 나가게되어 내가 덩달아 길상을 맞이하는 상이 보였겠지만, 이방원의 나이 22세 때 위화도 회군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역모와 그 후폭풍은 고스란히 자신의 인생으로 반영된다. 나도 덩달아 역적의 자식이 되거나 왕자가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이함이 명반에 보일 수밖에 없다.
대한 천량화록으로 진궁이 인동된다. 이차발생은 인신궁으로 이곳은 선천의 화기가 있기에 록기전도가 되었다. 록기전도로 인해 발생의 의미를 가지는 대한 무곡화기는 축미궁 형노부관으로 직장의 변화이다. 과거시험으로 직장의 변화를 겪고,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으로 사회적 지위의 변화도 겪게 된다. 길한 궁선인 근본적 변화를 의미하는 록존이 있는 대한 부관선 자오궁은 인동되었는가? 대한 차성이차발생이 사해궁인데 이곳은 대한의 자전이자 선천의 재복선으로 자오궁은 선천의 자전선이니 공명된다.
16세 임술년 진사합격과 (과거시험의 예비고사 같은 개념이다) 23세 무진년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이 같은 궁선인 진술궁에 위치한다는 점이 묘하다. 이 진술궁선은 대한의 천량화록이 있는 자리로 재복이 상징하는 목숨선/밥줄선의 천수천량화과 등으로 길한 궁선이다. 선천의 문서궁이자 아버지궁인데, 오래 지속될 수 있는(천량천수) 밥줄의(재복선) 문서적(부질선) 기회(괴월협)가 되는 과거시험 혹은 오래된(천량천수) 아버지의(부모궁) 생각과(복덕궁) 계획이(천기) 행동으로 표출(드러남의 화과)되는 암시도 있는 궁선이다.
전자인 진사시험 합격은 괴월협 자리에 오는 유년인 임술년에 발생했고 후자인 위화도 회군은 부모궁 자리인 무진년에 발생했다. 전자 임술년엔 선천의 록기전도를 유년에서 수미동기로 물고 있고 후자 무진년엔 선천의 록기전도를 수미상접으로 물고 있다. 임술년 진사시험 통과로 무관 집안에서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사람들이 질시하거나 수근대는 모습이 유년 부관 인신궁 거문화기의 시비구설이 되었고 무진년 아버지가 반역으로 고려의 권력을 휘어잡게 되어 이방원이 왕자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게 되니 역시 주변 사람들이 그러한 이방원을 보고 수근대는 상이 유년 부관선인 인신궁 거문화기 시비구설의 징험이다.
이러한 두 개의 유년 관록궁에 대한 체는 대한 관록궁인 오궁 록존의 근본적인 변화임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물론 자궁에서 오궁으로 차성되는 화성으로인해 생기는 양타협살의 흉은 있었을 것이다, 차성되지 않고 록존과 동궁하는 것보다는 심하진 않겠지만 말이다. 함경도에서 진사에 붙었다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의기양양한 이방원을 싫어하는 권문세족 가문의 동기나 선배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고, 최고 권력자 이성계의 아들이라고 내세우며 다니는 이방원을 못마땅해하는 이들 역시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궁은 대한 전택궁인데 절족마가 있으며 갑작스러움을 암시하는 자부살이고 결정적으로 대한 자미화권이 외궁에 좌한 자리이기에 나의 권한 밖의 일, 통제 밖의 일임을 암시하고 남에게 힘이 가서 속수무책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궁선은 삼기가회협 복선궁의 현현이 되는 궁선이기도 하니 궁극적으로는 길한 궁선이다. 임술년과 무진년에 이 궁선은 문서궁이 된다. (그리고 과거시험에 최종 합격된 기해년은 아예 이 궁선 자리로 유년이 좌한다.) 전자는 과거시험합격이라는 문서가 매우 얻기 힘든 것, 즉 경쟁이 치열한 것임을 암시하고 후자는 아버지의 일이 내가 크게 뭔가 도와줄 수는 없는 나의 영역을 벗어나는 버거운 일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둘 다 궁극적으로는 길하다. 심기가회가 이 궁을 통해 복선궁의 현현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천과 대한의 화권과 화과가 외궁으로 빠지는지 내궁으로 들어오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선천 천기화과와 대한 좌보화과는 내궁에 좌하면서 대한 부처궁인 자궁을 쌍비호접으로 비춘다. 그러한 쌍화과의 기운을 선천 천동화권과 태음화록이 본 상태에서 대한의 관록궁인 오궁으로 차성된다.
또한 대한 형노선인 축미궁을 보자. 이 궁선에는 아무런 사화가 없다. 삼방에서 대한의 외궁 전택궁에 좌하는 사궁의 대한 자미화권만을 볼 뿐이다. 그래서 미궁의 강왕한 경양은 크게 흉하지 않고 오히려 내궁으로 들어오는 보필의 복선궁의 현현이 되는 궁으로써 관록에 있어서의 커뮤니케이션(노복)에 있어 강왕한(경양) 사람들과의 그리고 학문적으로도 아는 게 많은 이들과의(창곡)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인맥을 암시하는 보필을 나에게 준다고 해석해야 한다. 특히 대한 천이궁에 있는 좌보는 대한의 화과까지 붙어 있으니 나의 과거시험 합격과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 덕분에 나의 활동무대에서 말로만 그 명성을 익히 들었던 사람들과 접촉하는 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 이방원의 기존 인맥이었던 중앙 정치 무대와는 상관이 없는 주변인들이 얼마나 거문화기로 뒷담화를 했을지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원래 선천 노복궁이 선천 질액궁과 더불어 선천 천이궁에 악사위천리협을 해주고 선천 전택궁과 더불어 선천 관록궁에 보필협을 해주는 대인관계격임을(자미심전1, p155) 체로 놓고 본다면, 이러한 보필 복선궁의 현현이 되는 대한 노복궁의 상황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 경양이 있는 이 외궁 궁선에 록권과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다.
[계축대한(24-33세)]
25세 (1391 신미년) 9월 생모 신의왕후 사망
26세 (1392 임신년) 음력 7월 아버지 태조 즉위. 즉위 직전인 음력 4월 정몽주의 반이성계 세력을 제압하는 공을 세움. 하지만 이후 정몽주를 죽였다는 이유로 이성계의 눈 밖에 남.
28세 (1394 갑술년) 장남이나 차남을 명으로 보내라는 홍무제의 요청으로 명나라에 갔다옴. 첫째 양녕대군 출생.
30세 (1396 병자년) 둘째 요령대군 출생
31세 (1397 정축년) 셋째 충녕대군 세종대왕 출생
32세 (1398 무인년) 음력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 장악. 형 방과를 정종으로 내세움.
영창타무의 부처궁 대한이다. 영창타무는 자신이 일을 그르쳐서 심한 경우 자살에 이를 수 있는 흉격이다. 원국 부처궁이 영창타무라는 것은 배우자의 흉상을 암시하지만, 왕비로 살면서 흉상이 없다는 게 오히려 왕비답지 않은 인생이다. 이 명이 그러한 영창타무 대한으로 왔는데, 대한 관록궁에 인생을 호도한다는 타라천마의 절족 호도마가 형성되어, 자신의 의지대로 관록의 상황이 흘러가지 않은 것을 더욱 잘 나타낸다. 실제 전 대한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 이후 거의 왕자나 다름없는 시절이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버지 눈 밖에 나는 바람에 생각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다. 이 대한 중에 의지할 곳은, 보필협을 받은 창곡과 동궁한 천이궁 경양이다. 그리하여 이 대한 중에 아버지의 동지인 정몽주와 정도전도 죽이고 이복 동생들도 죽여 결국 아버지를 상왕으로 내치게 된다.
계축대한 부모궁 거문화기는 대한 복덕궁 천상을 형기협인한다. 아버지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선천 복덕궁이 강왕하기에 버틸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대한을 보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 대한에 위화도 회군으로 이미 권력을 장악한 아버지의 생각은, 이방원 명반의 선천 부모궁의 천량천수가 좌한 모습대로 그리고 이성계 명반의 복덕궁이 천량천수의 협을 받은 모습대로 시간이 들더라도 신중히, 명분도 지키면서 만인의 지지를 받는 원숙하며 자연스러운 왕조 개창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고려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하는 조정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개혁파들의 지지도 받고자 했다. 위화도 회군 이전에도 그들은 정적이 아니라 사상적 동지였다. 이를 위해 이미 조정을 장악한 이성계는 백성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토지개혁 등의 정책을 추진하여 민심뿐 아니라 중도파 혹은 온건개혁파들의 지지를 끌어내고자했고 차근히 새로운 왕조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아버지의 행동은 명분을 얻으려다 권력을 놓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을 이방원에게 심어줬다. 이방원 입장에서는 왜 다 포용해서 가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권력은 휘두르라고 있는 것 아닌가? 재백궁에 경양이 있으면 차 사고, 집 사고, 친구에게 밥 사는 등, 돈으로 플렉스(돈자랑)한다. 물론 그렇게 플렉스할 돈이 생긴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방원의 선천 관록궁에는 경양이 있다. 이 명반 주인에게 권력이 있으면 어떻게 되겠나? 당연히 거침없이 휘두른다. 특히나 대궁에서 영탐이 차성되고 작사전도가 되어 직장이 뒤집어질 정도로 자신의 권력을 과시했을 것이다. 이방원 입장에서는 아버지 이성계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내 그러한 이방원의 선천 관록궁이 대한 천이궁 활동무대궁으로 온 계축대한에 아버지 재가도 받지 않은채 정몽주를 죽여 건국의 걸림돌을 제했고, 6년뒤 급기야 아버지를 내몰고 자신이 절대권력자가 된다.
이성계가 낙마하여 조정을 비운 사이, 정몽주는 공양왕에게 친이성계파를 제거하자고 주청했고 실제 여러 이성계파가 숙청되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병상에 누워있던 아버지를 모시고 개경으로 갔다. 그리고 기색을 살피기 위해 이성계의 병문안을 왔다가는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인다.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고려의 대학자 정몽주였다. 명분을 위해서라도 절차를 밟아 조사 후 유배를 보낸 뒤 사사를 해도 민심이 좋지 않았을텐데, 이성계의 아들이 사사로이 암살하여 죽였다. 이로써 이성계 가문은 예전에도 고려의 영웅 최영장군을 죽인 것에 더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는 했으나 존경과 지지를 보내기는 쉽지 않은 가문이 되었다. 이로써 아버지는 수월하게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게 되었으나 아들 이방원과는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
此亦何如彼亦何如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 하여가 (이방원)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 단심가 (정몽주)
이방원이 나와 손 잡고 같이 인생을 누려보자고하니 정몽주는 자신은 고려의 충신이고 이는 변함이 없다고 답한다. 이 두 시조는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 언급 되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비록 만수산이라는 이름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있는 등, 후대에 창작된 시조라는 것이 정설이나 이 두 편의 시조만큼이나 당시의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없다.
개국공신 책봉을 할 때도 태조는 이방원을 포함한 전처의 장성한 아들들에게는 푸대접을 한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태조는 사랑하는 왕비의 자식이자 이방원의 배다른 동생인 11살 방석을 세자로 앉힌다. 그리고는 마침내 사병혁파를 위해 이방원을 비롯한 자식들의 개인 군사들을 빼앗으려한다. 개국 후 아버지로부터 6년 여간 푸대접을 받아왔던 이방원은 참을 수 없었다. 정도전과 배다른 동생 방번과 방석을 죽이고 아버지를 상왕으로 내친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계축대한 복덕궁과 부처궁을 보면 천상과 천부로써 부창부수같은 호흡을 자랑하는 부부관계가 보인다. 앞서 선천 명반 분석에서의 인감노출격에 대한 설명을 이 대한에서는 나와 배우자 사이의 관계로 바꾸어 이해하면 된다. 복덕궁 천상은 악사위천리협으로 왕권에 도전하는 것이 다 드러나는 형상이다. 부처궁은 삼기가회협을 받은 천부로, 이는 가문 전체의 힘을 쏟아 그 천상의 뜻을 받아주어 아낌없이 천상에게 내어주는 천부다. 여기서 두 가지 사안이 묘하다. 삼기가회는 부처궁 천부의 협으로 들어온다. 협은 주변 상황을 의미하니 이는 이 대한의 처뿐 아니라 처가댁의 도움을 받음을 의미한다. (현대인의 명반 중에, 삼태팔좌가 부처궁을 협하는데, 어느 대한 부처궁에 의지하는 상이 보이니 장인의 차를 10년 내내 자신의 차처럼 쓴 경우도 있었다.) 두 번째로 대한 부처궁 천부는 천상이라는 도장 혹은 열쇠가 따려고 하면 그 금고안의 것을 다 내어주는데, 실제 이 대한 중에 장인의 집에 숨겨둔 각종 무기를 내어주어 제1차 왕자의 난을 성공하는 것에 여흥민씨는 가문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고 하는 생각이 다 드러난 복덕궁 천상으로 인해 부처궁 천부는 가문의 멸족을 감수하고 이방원을 도와줬으니 많이 무섭고 위축이 되었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명반도 이를 잘 얘기해주고 있다.
정몽주는 1337년 음력12월22일 생으로 이방원과는 30살의 나이차가 난다. 정도전은 1342년 생으로 이방원과 25살 차이가 난다. 둘 다 이방원에게는 대선배이다. 부모궁으로 봐야 한다. 공교롭게도 정몽주를 암살하여 아버지 심기를 불편하게 한 일은 대한 부질선 거일화기에 좌한 유년인 임신년에 이루어지고 정도전을 죽이고 아버지를 상왕으로 내친 해 역시 같은 궁선인 무인년에 발생한다. 두 해 공통으로 이방원은 악사위천리 시비구설의 위세를 떨친다. 이두문파 징험에 의하면 실제 거문궁에 좌한 유년에 오는 것만으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시비구설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대한의 피해궁은 대한의 노복이자 선천 전택인 오궁이다. 이 피해궁 때문에 대한 천이궁엔 경양을 그리고 대한 관록궁엔 타라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양타는 각기 영타격이 되기도 하여 은근한 격발이 일어나기 쉽다.
이러한 피해궁인 오궁은 전택의 형노로 집안의 어머니 혹은 형제자매를 의미한다. 그게 깨져야 천이궁 경양을 쓸 수 있는데, 하지만 그 결과 관록궁은 타라를 먹게 되어 천마와 더불어 자신이 바랬던 관록이 아닌 다른 관록적 상황이 전개되기 쉽다. 실제 생모가 25세 신미년 사망한 다음 해에 정몽주를 죽여 건국을 도왔으나 왕자로써 합당한 대우를 못 받게 되었고, 32세 무인년 정도전과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나서야 자신이 조선의 실질적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저 오궁의 록존은 생모이고 이복동생들이다. 이렇게 둘 다로 해석하는 이유는 록존궁에 우필이 동궁하여 ‘하나 더’를 의미하기에 그런 것이고, 동복이 아닌 이복 형제라는 점도 역시 좌보가 아닌 우필이 형노선에 있기 때문이다. 저곳이 희생되고 나서야 혹은 저곳이 희생되어야 경양을 쓸 수 있다. (피해궁의 록존이 깨지고 나서야 양타가 길하게건 흉하게건 발현된다는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하다.)
임신년 유년 천량화록과 선천 태음화록으로 이차발생이 인신궁인 대한의 발생궁이되고 유년 무곡화기로 대한의 탐랑화기를 인동하기 수미동기가 되었다. 무인년은 유년 탐랑화록과 천기화기로인해 수미상접이 된다.
[임자대한(34-43세)]
34세 (1400 경진년) 음력 11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왕으로 즉위. 조선의 3대 군주가 됨.
35세 (1401 신사년) 태종의 여색 밝힘으로 원경왕후가 투기하여 대립하기 시작. 1402년 더욱 심화됨.
36세 (1402 임오년) 조사의의 난으로 아버지 이성계와 대립. 이후 화해
38세 (1404 갑신년) 이거이 모반 사건. 양녕대군 세자로 책봉.
41세 (1407 정해년) 민무구 민무질 유배. 이후 외척 세력 서서히 척결함.
42세 (1408 무자년) 태상왕 이성계 승하. 장인 국구 민제 사망.
이 대한의 사안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공식적으로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형 방간을 유배 보내고 정종을 상왕으로 그리고 태조는 태상왕으로 내친 뒤 조선의 3대 왕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이미 이전의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매우 큰 의미가 있지는 않다. 이는 그저 시기의 문제였을 뿐이다.
오히려 아버지 이성계와의 대립이 절정을 지나 결말로 가는 과정이 이방원에게는 더 큰 의미가 있었다. 36세 이성계가 후원하여 이방원의 죽은 계모인 신덕왕후의 친척인 조사의를 내세워 난을 일으켜 이방원을 내치고 정종을 다시 왕으로 앉히려는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면서 부자갈등의 절정의 끝을 이뤘고, 이 후 화해했으나, 이러한 갈등의 최종 결말은 42세 이성계의 승하로 맺게 된다. 이것이 두 번째 주요 사안이었다.
세 번째는 원경왕후와의 대립과 처가 가문 척결이다. 왕비의 몸종과 동침을 하기도 하는 등, 태종은 왕으로 등극 후에 마음껏 색을 밝히는데, 예전에 제1차 왕자의 난 때도 대활약을 했던 강인한 성격의 원경왕후는 이를 시기하여 왕과 동침을 한 여인들을 중궁전에 불러 벌을 가한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중전의 시녀 등 20여 명을 궐 밖으로 내치고, 이후 여러 후궁들을 들인다. 기생 출신이건 궁녀 출신이건 사대부 가문 출신이건 가리지 않고 많은 후궁들을 두었다. 이에 원경왕후의 서운함은 더욱 깊어진다.
양녕대군을 세자로 책봉 했는데, 외가에서 성장한 세자를 등에 업고 외척들이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발호할까봐 태종은 여흥민씨 처가 가문을 척결하기로 결심한다. 그 시작은 선위파동이었다. 실제로는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하고 8일 동안 신하들의 반응을 보았다. 이러한 선위파동 후, 영의정 이화는 기다렸다는 듯, 민무구와 민무질이 양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했을 때 얼굴에 반기는 빛을 띠었다가 이를 철회할 때는 표정이 달라졌다‘라며 태종에게 보고하고 태종은 이를 여흥민씨 척결의 시작으로 삼았다. 물론 이는 복덕궁 천요를 가진 태종의 시나리오였고 영의정에게 그런 얘기를 하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처남 민무구와 민무질은 유배 보내졌고, 장인어른 민제는 이듬해 사망한다.
태종에게 있어 단 하나의 걱정은 세자 양녕대군이었다. 세자는 외가댁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렇게 외할아버지를 위시하여 외삼촌들이 숙청되는 상황 그리고 이에 분노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 세자는 과연 삐뚤어지지는 않을까, 아니면 세자가 왕이 되면 여흥민씨 척결에 앞장섰던 대신들을 숙청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양녕대군에게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게 나중에 드러난다.
임자대한은 자궁 동월운으로, 염정파군이 동월운으로 오면 ‘감정참상’이라고 얘기한다. 선천 명궁 악사위천리협이, 인궁의 거문화기가 신궁으로 차성됨을 감안하면, 대한 명궁 삼방에서 역시나 악사위천리를 본다. 이 둘을 합치면 감정상의 폭발이 일어나기 쉬운 대한이다. 대한 관록궁인 진궁에 화과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권력을 찬탈하는 상이라기보다는 현대인이라면 승진하는 상 정도로 보인다. 앞서 서술했듯, 이미 권력을 잡은 후에 공식적으로 왕위 등극하게 된다. 이 대한의 더 큰 화두는 그게 아니라 안 좋은 감정이 천리나 가는 폭발적 악화인데, 대한 명궁에 태음과 천동이 있으니 이는 배우자와 자녀 문제가 될 수 있다.
대한 복덕궁의 지겁, 거문화기와 동궁한 태양은 형극적이다. 이렇게 형극적인 태양빛은 대한 부처궁의 천형을 더욱 형극적으로 만들어준다. 대한 부처궁의 괴월협을 받은 천기화과는 왕이 되어 대놓고 합방하는 기회를 잡아 색을 밝히는 것이 드러나는 후궁들을 암시하고, 이를 감시하는 천량은 원경왕후로 인궁의 형극적 태양빛으로 매우 화가 나 있는 상태이다. 앞서 봤던 계축대한 부창부수의 복덕-부처의 관계는 임자대한에 와서 상극적인 관계가 되었다.
임자대한 천량화록이 발생인데, 이차발생은 인신궁의 거일화기를 인동하여 록기전도가 되었다. 이로인해 대한 무곡화기는 발생의 의미를 띠고 록기전도를 감안한 최종결과는 인신궁이 된다. 축미궁 부관부질이 발생이라는 것은 관록의 문제, 부처의 문제, 그리고 이곳이 대한 부모궁이니, 아버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대한의 화두 세 가지이다.
[신해대한(44-53세)]
44세 (1410 경인년) 민무구 민무질 사사
49세 (1415 을미년) 경녕군 문제로 민무휼 민무회 숙청
50세 (1416 병신년) 태종의 측근 하륜과 이숙번 물러남
52세 (1418 무술년) 양녕대군 폐세자. 음력 8월 왕위를 세종에게 승계. 측근이자 세종의 장인 심온 죽임.
53세 (1419 기해년) 상왕 정종 승하
이 시기 민무구, 민무질은 사사되고 또 다른 처남 민무휼, 민무회도 숙청하니 원경왕후는 남편에 대한 원망의 마음이 극에 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외척의 발호에 대해 강박관념이 있어 이렇게 처갓집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것과는 대조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동지인 하륜과 이숙번 등에게는 무한한 신뢰를 주었다. 이 대한 중에 하륜은 나이가 들어 물러났고 이숙번은 유배 후 태종이 찾지 않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물러난다. 물론 그 동안 기복은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그들의 실수와 비리는 심하지 않게 처리한 태종이었다.
하륜은 이방원의 장인인 민제의 친구이다. 이방원보다 20살이 많다. 태종실록에 보면 “하륜이 본래 사람의 상보기를 좋아하여, 제게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상 본 것이 많지마는 공의 둘째 사위 같은 사람은 없었소. 내가 뵙고자 하니 공은 그 뜻을 말하여 주시오’하였다. 민제가 태종에게 말하기를, ‘하륜이 군을 보고자 한다’하였다. 태종이 만나보니, 하륜이 드디어 마음을 기울여 섬기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렇게 인연이 된 하륜은 이방원의 킹메이커가 된다. 태종실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제1차 왕자의 난 직전에 “하륜이 일찍이 임금(이방원)의 잠저(즉위 전 왕이 살던 집)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묻자 하륜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쳐서 이 무리를 없애는 것 뿐입니다’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륜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이성계)께서 놀라시더라도 필경 어쩌겠습니까?” 결국 하륜은 이숙번을 이방원에게 소개하면서 그의 군사를 이용하여 거사를 치루게 한다.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겐 하륜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하륜도 태종 나이 50이 되는 해 천수를 다한다. 이방원의 전성기를 함께한 신하 하륜도 죽고 이제 제위 말기를 준비해야 하는 기간이 되었다.
하지만 이 당시 세자 양녕의 기행은 이 대한 내내 태종을 괴롭혔다.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세 아들이 이미 줄줄이 요절했기에 더욱 애지중지 키웠다. 풍수가 안 좋아 아들 셋이 요절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원경왕후는 자신의 외가인 여흥민씨 집안에 보내 양녕을 키웠다.
양녕대군은 기생들과 놀고 매사냥을 즐겼으며 서연도 핑계를 대고 피했다. 특히나 중추원부사 곽선의 첩인 어리를 납치해 자신의 첩으로 삼은 일은 유명하다. 이것이 발각되자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의 집에 어리를 숨겼고, 심지어 어리는 양녕의 딸을 임신까지 했다.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은 ‘아바마마는 첩이 많으면서 왜 내가 첩을 갖는 것은 안됩니까?’라고 하며 반항했다. 이 순간이 태종이 양녕에 대한 감정적 분노를 너머 이성적 폐세자 수순을 밟게한 계기가 되었다. 양녕대군이 직접 쓴 '반성문'이 아닌 '반항문'을 여러 대신들에게 보여주면서 어떻게 세자를 처리해야겠냐고 묻고 다녔다. 물론 이미 태종은 결심했으리라.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이유가 그 편지 안에 담겨있었으니 이를 대신들에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설명은 충분했다. 태종은 마침내 몇 년뒤 태종이 51세 되던 정유년에 양녕을 폐세자로 만들어 버리고 창녕을 세자로 앉힌 뒤 보위를 물려준다. 그리고 외척 발호에 강박증이 있는 태종은 세종(창녕대군)의 장인 심온을 제거해준다.
폐세자 양녕은 유배지로 보내졌는데, 태종은 각종 물자를 그곳에 지원하여 풍족하게 사는데 지장 없게끔 만들어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아비의 은혜를 아는지 모르는지 양녕의 기행은 계속된다. 심지어 이런 일도 있었다. “불교에 귀의한 동생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불사를 짓는데 찾아 가서 사냥으로 잡은 새와 짐승을 절 안에서 구웠다. 효령이 말하기를, ‘지금 불공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소.’라고 하니, 양녕이 말하기를 ‘나는 살아서는 국왕의 형이 되어 부귀를 누리고, 죽어서는 불자의 형이 되어 보리에 이를터이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하니 효령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는 얘기가 실록에 있다. (세종실록 1446 병인년 4월23일 기사)
신해대한 거문화기는 대한 전택궁 선천 형제궁인 인궁에 좌한다. 이것과 대한 형노선 선천 부질선인 진궁의 천량천기화과와 더불어 대한 관록궁 천상은 형기협인되고 악사위천리협이 된다. 이렇게 관록궁 천상의 인감이 노출되어 대한 명궁 천부는 위축된다. 천부는 인궁과 암합을 하는데, 인궁을 보면 집안(대한전택궁) 자녀(태양)의 구설문제(거문화기)로 묘궁 관록이 악사위천리가 되는 게 무척 신경 쓰였을 것이다. 인궁은 또 집안(대한전택궁) 자녀(태양) 문서문제(거일)의 변화(선천형노선)로도 해석된다. 세자를 바꾸게 되는 상이다. 현대인이라면 자신의 가업의 중책을 맡긴 자식 혹은 자식과도 같이 그 미래를 걱정해주고 챙겨준 직원이 문제를 많이 일으켜 다른 이로 사장을 바꾼 꼴이다.
이제 자신의 정치적 동지들도 전부 물러간 마당에 왕으로서의 마지막 대사는 보위를 물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말 그대로 양녕으로 인해 악사위천리가 되었다.
태종 52세 무술년은 대한 형노선 자리로 대한의 문제궁선이다. 게다가 선천 형노선인 인신궁과 첩궁공명도 되는 유년이다. 유년 앉은 자리를 보니 오래된(천량천수) 문서(선천부질선과 선천화과)의 변화(천기와 대한 형노선)가 있을 수 있다. 앞서 본 인궁의 집안 자녀 문서의 변화는 무술년 관록궁이 되어, 양녕을 폐세자로 만들고 충녕을 세자로 앉히는 일이 이 해의 관록의 주요 사안이 되었다. 유년 록기로 본 최종결과는 역시나 인신궁 유년 관록궁이다.
[경술대한(54-63세)]
54세 (1420 경자년) 음력 7월 원경왕후 사망
56세 (1422 임인년) 세종4년, 음력 5월10일 승하
태어나서 난생 처음 공궁 대한으로 왔다. 무기력할 수 밖에 없다. 협으로 들어오는 괴월은 나이들어서는 고질병을 의미하는데 이곳이 선천의 질액궁이면서 십이운의 사지에 병부가 있으니 차성한 천수로 보건데 수명이 관건이 되기 쉬운 대한이다. 또한 대한 천이궁의 협으로 천마절공의 마우공망이 들어오는데, 이때 천마는 타라와 동궁하여 절족마가 되었고 절공은 악사위천리의 협을 받으며 순공과 동궁하니 절로공망의 공망함은 배가된다. 선천 부모궁이 협인 나의 복덕과 명궁에 각기 그러한 흉한 마우공망을 주었듯, 이번 대한에서는 천이궁에서의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 (어느 궁이 무슨 협을 받기도하고 상황에 따라 어느 궁이 협으로 린궁(이웃궁)에 뭔가를 준다는 유기적 간명은 추론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실제 이방원은 세종과 며칠간 함께 매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왔는데 몸이 안 좋았고 병석에 누운지 한 달 만에 승하한다.
이 대한 천이궁의 모습이 저러한 상황이니 바깥 바람을 오래 쐬면 안 좋을 수밖에 없다. 대한일차, 특수이차, 이차 발생 등으로 형제궁과 身궁/상문백호 부질선 등이 인동되고 대한 천동화기로 재복선까지 인동된다. 임인년은 대한 태양화록의 자리이면서 대한의 록기전도를 수미동기 시키는 유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곡동 헌릉에 태종과 원경왕후는 나란히 묻혀있다. 원경왕후 묘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태종은 ‘나중에 나도 묻힐 곳인데 내가 불교를 싫어하는 것 알지 않냐’며 질책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나란히 묻히는 것은 원래부터 태종의 뜻이었는데, 여흥 민씨 가문을 몰락하게 만든 일에 대해 저승에서 부인에게 사죄할 요량이었던 듯하다.
[참고: 생시검증]
필자가 태종의 생시를 묘시로 보는 이유는 위에 다 설명이 되었다. 나머지 11개의 시간은 왜 태종의 인생이 되지 못하는지에 대한 생시검증을 해 보겠다. 원래 이 작업이 먼저 이루어졌는데, 편의상 순서는 이렇게 뒤로 미뤘다.
선천 명반에선 문무를 겸비한 왕인지 여부, 아버지와의 갈등, 즉위 후부터 시작된 원경왕후와의 갈등이 있는지를 중점으로, 그리고 유년에선 1) 17세 계해년 과거급제로 아버지의 자랑이 된 해, 2) 32세 무인년 음력 8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 이성계를 상왕으로 내치는 유년과, 3) 56세 임인년 승하한 해를 위주로 생시검증을 해 보겠다. 이방원은 다섯째 아들이고 효심이 깊었던 것도 아니니 부모의 상망이 불분명하게 나타날 수도 있어, 이는 생시검증에서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아버지와의 갈등 부분은 이방원의 인생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니 신중히 살펴보겠다.
자시: 오궁 태양의 양양창록격으로 과거급제가 불가능하지는 않은 문서적으로 좋은 명이다. 부모궁의 천부 경양 덕분에 명신궁엔 록존을 그리고 복덕궁엔 록과를 얻게 되니 부모궁의 모습은 아버지 이성계를 닮았다. 복덕궁은 화양격발을 받은 기월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습이다. 하지만 명궁 록존으로 보수적인 성향이 있어 아버지를 물리치고 왕위를 빼앗을 정도가 되기는 쉽지 않다.
자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을사대한으로 대한 부모궁 오궁이 피해궁이 되는 등, 딱히 문서적으로 길상한 암시는 찾기 힘들다. 계해년은 대한 천이 선천 노복궁으로 술궁의 거문화기로 인해 형기협인이 되어 좋지 않다. 단 관록적 길상은 보인다. 유궁 대한 관록궁의 대한 자미화과에 화탐이 형성되었다. 2) 32세 무인년 음력 8월은 계묘대한으로 협으로 록권과가 들어오고 관록궁은 강왕한 미궁의 경양이기에 권력을 잡기 쉬워 보이나 아버지를 내 모는 상은 읽기 쉽지 않다. 3) 56세 임인년은 계축대한인데 상망의 암시가 선명하지 않다. 굳이 이 대한 중에 질병으로 고생하는 암시가 보이는 해는 53세 기해년 정도로 대한에서 인동되지 않은 身궁이 유년 질액궁이 된다. 유년 무곡화록이 대한 부관선이기에 선천 부관선인 진술궁이 공명되어 록기전도가 된다. 이로 인해 발생의 의미를 갖는 문곡화기와 선천 태음화록으로 인해 질액身궁선인 자오궁이 인동된다. 상관궁의 완성 3번째 사안이다. (자미심전2, p.164)
축시: 부모궁 록존으로 인해 명궁엔 타라를 주어 절족마가되고 복덕궁엔 경양을 준다. 명궁 천기는 항상 부모궁에 자미가 오기에 부모궁의 향배가 중요하다는 점을 체로 잡으면,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의 인생은 호도되는 면이 있지만, 그래도 그러한 아버지 록존의 물질적 풍요로움 등으로 자신감 있게 나의 복덕궁 경양으로 살 수 있는 인생이다. (자미심전1, p.238 부모궁 록존편 참고). 하지만 복덕궁 경양 말고는 위권출중한 왕의 모습으로 보기 쉽지 않다.
축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갑진대한으로 본인의 변화와 육친 불리를 암시하는 찰살이 좌한다. 하지만 이외에 과거급제 등의 길상의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2) 32세 무인년은 계묘대한으로 양명한 양양이 좌하고 관록궁으로 경양이 보인다. 하지만 축궁에서 미궁으로 차성되는 화기와 천형 등으로 인해 왕권을 찬탈할 수 있는 길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3) 56세 임인년 음력 5월10일은 생일 이전이므로 계축대한이다. 대한 노복궁이 피해궁이 되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할 수도 있다. 대한의 록기 궤적도 질액궁과 身궁 등을 인동하여 상망의 암시가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앞서 본 다른 사안들이 많이 안 맞는다.
인시: 살면서 몇 번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는 칠살명이다. 하지만 복덕궁 록존으로 인해 사고방식이 보수적이어서 큰 변혁을 꿈꾸기에는 쉽지 않다. 그저 주변 상황 때문에 큰 변화를 겪을 뿐이다.
인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계묘대한으로 관록궁에서 경양, 천형, 지겁이 있는 거동의 과강필절이라서 과거시험에 불리한 대한이다. 현대인이라면 학교폭력 등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기 쉽다. 2) 32세 무인년은 임인대한 무파상대한으로 파조파가의 의미답게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으로도 보인다. 하지만 대한 관록궁의 록존 때문에 폭발의 의미 보다는 수렴의 의미가 강하다. 3) 56세 임인년 음력 5월10일은 생일 이전으로 임자대한이다. 대한의 무곡화기가 대한 복덕궁으로 들어오기는 하나 상망이라고 보기는 쉽지 않다.
진시: 명궁 거문화기로 인해 부모궁을 형기협인하니, 웃어른인 아버지 이성계의 권력을 뺏을 것이 설명된다. 명궁 영성은 육친불리의 암시를 띠어 혈육상잔의 상이 보인다. 또한 묘왕지 태양은 생시가 인시이기에 주성이 되는데 삼방사정에서 보칠창곡의 백관조공을 보며 쌍록 또한 보니 왕으로 볼 수도 있다. 허나 양양창록의 문인이라는 점은 보이나 구테타를 한 무인이기도 하다는 점은 보이지 않는다.
진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계축대한으로 화탐에 화양격발이 형성되었으나 문서적 길상은 찾기 힘들다. 선천과 대한의 화과도 외궁으로 빠지기에 더욱 그러하다. 2) 32세 무인년은 임자대한으로 아버지를 물리치고 왕좌를 빼앗는 암시는 읽을 수 없다. 대한 관록궁의 기량의 화과 정도로는 폭발적인 관록적 비상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3) 56세 임인년은 기유대한으로 대한 노복궁의 거문화기로 인해 대한 천이궁이 형기협인되니 출행을 조심해야하니, 사냥을 다녀온 뒤 앓게 되는 상이 보이기는 하는데, 위의 1)과 2)의 운추론이 맞지 않으니 태종의 명으로 보기 힘들다.
사시: 강왕한 응수건원격이다. 살면서 큰 변화를 몇 번 겪는다는 칠살과 자신만의 계파를 만들거나 육친 혹은 육친같은 사람들과의, 즉 '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과의 관계를 중요시 한다는 염정이 명궁에 있다. 천이궁 묘왕지의 경양은 쌍록과와 보필협을 받고 있어 제화되었고, 인생의 후반부를 의미하는 身궁이 자녀궁 거문화기로 인해 형기협인 되었으니 세자로 책봉한 양녕대군이 삐둘게 성장하는 것에 상처받는 상도 보인다.
사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임자대한으로 관록궁에 천동화권이 있는데 협으로 은근한 격발이라고 하는 영타가 각기 문곡문창과 동궁하여 들어온다. 이 대한 관록궁은 문서적인 은근한 격발로 권위가 생기는 상이다. 하지만 폭발하듯 격발하는 상은 보이지 않는다. 2) 32세 무인년 음력8월은 신해대한으로 파조파가의 무파상운이다. 대한 명궁은 형기협인되어 있고 대한 천이궁의 절족마는 공겁협이 되어 있어서 길한 상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리고 아버지와의 갈등을 암시하는 상도 찾기 쉽지 않다. 3) 56세 임인년은 무신대한으로 대한 복덕궁에 거문화기가 있어 흉하기는 하나 이것으로 이 대한 중에 상망에 이르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오시: 자궁 천량으로 양양창록이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천이궁 록존으로 활동무대에서 강왕하기 보다는 위축되고 관록궁도 별 특이사항 없다.
오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신해대한으로 파조파가운이다. 하지만 이 대한 중에 조업을 깨거나 가정이 깨지는 일은 없었다. 관록궁에서 화탐격이 이루어지고 삼기가회협도 되지만 선천과 대한의 화권과 화과가 전부 외궁으로 빠지면서, 계해년 유년 록기를 돌려 보아도 과거시험 합격운은 파악되지 않는다. 2) 32세 무인년은 경술대한으로 대한 명궁의 거문화기로인해 대한 부모궁 천상이 형기협인되어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상황은 읽히나 대한 관록궁의 모습이 기월인 점 등으로 봐서 왕위찬탈의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3) 56세 임인년은 정미대한으로 별다른 상망의 암시가 보이지 않는다.
미시: 해궁 천부명으로 삼방에서 록을 보지도 못하고, 봉부간상에 의해 천상을 보니 형기협인되어 있다. 강왕한 왕 혹은 과거급제하는 명반으로 보기 힘들다.
미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경술대한으로 선천 관록의 악사위천리협이 대한 관록에서 황란천희를 만나기 관록적 대폭발이 일어 나기 쉽다. 특히나 대한 명궁 천기가 괴월협을 받고 있어 마치 내가 공부한 것만 나와 시험을 잘 보는 것으로 볼 수는 있다. 이것으로 인해 대한 관록궁 거문화기로 주변에서 이방원이 어떻게 과거시험에 합격했지라는 수근거림이 있을 수 있다. 가능한 스토리이다. 2) 32세 무인년은 기유대한 염파상으로 아버지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하는 정도의 파괴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3) 56세 임인년은 병오대한으로 선천 질액궁에 좌하면서 병부가 있고 양타협살이 되니 상망의 암시가 없지는 않다. 또한 身궁이자 대한 질액궁이 되는 축궁에 천형 그리고 대궁에 천월과 경양이 있어 상망에 이른다면 이 궁선에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유년 록기의 향배로 보건데 임인년보다는 그 전 해인 정축년이나 전전 해인 경자년 정도가 유력하다.
신시: 강왕한 왕의 상황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없다. 차성된 천기가 괴월협 받은 명이니 기회를 잘 얻은 관료가 될 뿐이다.
신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기유대한으로 괴월이 내궁에 들어와서 대한 문서궁 술궁 복선궁의 현현이 되었다. 문서적 길상이 있다. 대한 명궁의 염정은 관록의 성이니 관록적 문서 길상이다. 2) 32세 무인년은 무신대한으로 남성육친을 상징하는 태양이 보이면서 천이궁 거문화기로 대한의 부모의 천이궁인 묘궁을 형기협인하니 아버지 왕권을 뺏을 만하다. 하지만 군사를 동원해 구테타를 일으키는 상은 찾기 힘들다. 대한 관록궁에 각종 길성이 있기는하지만 동월조합이 탈취한 권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유시: 유궁 자탐명이다. 자미의 성질이 더 드러나려면 보필이 보여야하고 탐랑의 성질이 더 드러나려면 화령이 보여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니다. 강인한 성격의 이방원으로 보기에는 부족하다. 복덕궁이 형기협인이 되어 아버지와 전택의 상황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상이 보이고 복덕궁 자체에 살이 동궁하고 있지 않으니 이를 버티는 것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나, 그저 그뿐이다. 천상 복덕궁이 강인하기는 쉽지 않다.
유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무신대한으로 선천 명궁 악사위천리가 홍란천희운으로 오니 유사대폭발격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악사위천리 복선궁의 현현이 되는 궁이 대한 문서궁 이니 문서적 폭발을 의미한다. 하지만 계해년은 앉은 자리로 보나 유년 록기로 보나 시험에 합격하는 상은 보이지 않는다. 2) 32세 무인년은 정미대한으로 쌍록과협을 받은 경양이 있다. 하지만 대한 천이궁에서 영창타무를 보고 대한 관록궁은 형기협인 되어 있으며 부모를 해하는 상도 읽히지 않는다.
술시: 전형적인 자미천부의 협을 받은 기월동량 작리인으로 왕의 명반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
술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정미대한으로 쌍록과협을 받은 화양격발운이다. 하지만 삼방사정에서 살을 많이 보고 관록궁 마저 형기협인 되어 있으니 관록적 길상은 읽기 쉽지 않다. 2) 32세 무인년은 병오대한 양양창록운으로 문서적으로 길한 듯 보이나 명궁 록존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 보수적이게 된다. 아버지의 왕좌를 빼앗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해시: 자미두수 교과서에 나올만한 전형적인 응수건원격이다. 명궁 경양은 보필이 각기 쌍록과를 끌고 들어와 협을 해주고 삼방에서 보이는 창곡괴월은 각기 삼태팔좌와 동궁하고 있다. 단 하나 전택궁의 거문화기와 지겁이 걸리는데, 이로 인해 복덕궁은 부모궁화과와 더불어 악사위천리가 되었으며, 관록궁은 형기협인이 되는 것 외에도 노복궁의 지겁과 더불어 공겁협이 되어 살짝 위협을 받는다. 이방원의 인생과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해시 유년운: 1) 17세 계해년은 병오대한 오궁 태양으로 양명한 기운이 많다. 원래 오궁은 태양빛이 너무 강해서 안 좋다고 하지만 마침 록존이 동궁하여 태양의 지나친 발산의 성질을 잡아준다. 또한 미궁 대한 문서궁 복선궁의 현현으로 오궁에 록존 그리고 신궁에 록과를 얻게 되는데, 여기에 보필 복선궁의 현현 또한 이루어지니 이 대한의 문서운은 매우 길하다. 하지만 대한 관록궁에 거문화기, 지겁, 등이 있다. 현대인이라면 대입에서 실패할 운으로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라도 노력하여 성공한 인생을 살 수는 있어도, 명문대학을 가는 것은 시절인연이 되지 않는다. 부정행위로 과거를 급제해서 시비구설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이방원이 이 대한 중에 과거급제를 하는 상과 맞지 않는다. 계해년 유년 록기로도 관록적 길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2) 32세 무인년 음력8월은 갑진대한으로 영타협을 받은 천동화권이다. 대한 관록궁이 매우 길해 보이나 관록궁의 협으로 자미천부가 들어오니 온실에 있는 안락한 관록으로 보인다. 이성계를 내치고 권력을 차지하고 유지하는 상과는 다른 모습이다. 3) 56세 임인년은 임인대한으로 별다른 상망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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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기다리던 이방원이군요! 천천히 읽어 보겠습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0.14 16:33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0.14 21:55
읽는데도 시간이 걸리는데 작성하는건 열배의 시간이 걸렸을 것같아 후학들을 위해 수고해주심에 감동이 밀려옵니다.
천상명이 완벽하게 이방원의 인생이 설명되네요!
덧붙이자면 멍궁 천상 신궁 정파라서 정파상 혈육과의 감정파괴 조합이 이뤄지는바 형제들을 죽이는 상이 선천구조상으로 암시되었네요!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천상명이 유약하기만 한 것은 아닌듯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정파가 신궁이라서 그냥 천상이 아닌 정파상으로 봐야겠군요. 사실 이방원이 워낙에 입체적인 인물이라 해석이 쉽지는 않았습니다만, 진짜 이 명반이 완벽하게 이방원 인생이 설명되어 사실 저도 쓰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글에다 직접적으로 쓰진 않았지만 이방원이 과거급제 된 상황이, 이명박이 대통령 당선될 때 악사위천리가 있어 다스 실소유주 여부에 관한 스캔들이 있었지만 당선된 것과 유사합니다. (주어가 없다는 유행어까지 나왔을 정도..) 악사위천리가 있으면서 문서적 길상이 있는 게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알면 알수록 빠져들게 되는 조선왕들입니다^^
이제 세종대왕 명반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다리던 태종이네요.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방원 인생이 좀 스펙타클합니다...감사합니다~
인감노출격이라 해서 무조건 안 좋은 건 아니군요.
좋은 자료, 좋은 분석 감사합니다. ^^
예 .. 흉같지 않은 흉, 길같지 않은 길이 있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세번을 읽은것 같은데 여전히 어렵긴 합니다. 100번은 읽어야 할것 같습니다.
후학들을 위해서 이래저래 고생하시니 마음으로 드리는 커피한잔 보내드립니다.^^
열심히 읽도 또 읽어 봐야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앗. 3번이나 읽으시다니 @@ 감사합니다~
와 ~ 역시 대단합니다. 저도 10번은 읽어야 할거같습니다. 요즘 주식시장에선 태조이방원 테마주가 날리고있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태양광 조선 이차전지 방산 원자력... 검색해보고 알았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역사공부까지 시켜주시네요. 프린트해서 천천히 2회차 읽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천천히 읽어 보세요
제가 임년생 유궁천상 명궁이라 태종과 반대방향이고 복덕궁, 명궁협도 반대입니다. 두고두고 참고하겠습니다. 사냥을 즐겼다는게 너무 잘 이해됩니다. 본능적으로 근질근질합니다.ㅎㅎ
앗...그러시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