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속에서 핀 신념
옥한흠 목사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벧전 4:12-14)
영광의 영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자와 죄인이 어디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벧전 4:12-19).
설교자로서 퍽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자유와 평화의 세계에 살면서 공산치하에서 살고 있는 성도들이 얼마만큼 어려움을 당하는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너무나 안일한 자리에서 고난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부끄럽고 또 그들을 위하여 피눈물나는 기도를 하지 못하면서 그들에게 고난을 이기고 승리하라고 격려만 하고 있다는 자체가 부끄럽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고난 당하는 형제들에게나 아직 고난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도 고난에 대해서 깊이 배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특히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고난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 우리의 신앙을 빼앗길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것처럼 역사상 가장 빠르게 선전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사상이 공산주의입니다. 1903년에 레닌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를 이야기할 때에는 불과 17명의 추종자밖에 없었습니다.
14년이 지난 후에 4만 명의 추종자가 생겼고, 그것이 러시아 정부를 정복하고, 드디어 반 세기도 안 되어 세계적으로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공산주의의 지배 아래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학자의 말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동안 얻은 신자의 수보다도 그들이 50년 안에 얻은 숫자가 더 많다고 평가할 만큼 세계적으로 공산주의는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지금도 침투하고 있습니다. 1957년,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후르시초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국에 있는 미국 사람들에게 연설하면서 이런 건방진 소리를 하였습니다.
"역사는 우리 편이다. 우리는 너희 미국 사람들을 장사지내겠다. 내가 한 가지 분명히 예언하는데 너희들의 손자 때가 되면 너희 손자들은 전부 다 우리 사회주의의 지배 아래 들어오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오늘 세계를 돌아보면 공산주의는 지금 벽에 부딪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기독교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활발히 움직이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바로 사는 곳에 공산주의는 세력을 뻗치지 못합니다.
북한을 위시하여 공산치하에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순교의 피를 흘렸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전히 그곳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어둠의 장막 속에서도 기도의 소리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가 기독교를 이기지는 못합니다.
한편 자유주의 세계에 사는 우리는 한 가지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 전 총장이었던 존 베네트 박사의 말을 우리는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공산주의가 존재하게 된 책임은 기독교가 져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살지 못했으므로 공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사회에서 가난한 자, 고통당하는 자, 억압 당하는 자, 노동자 계급의 사람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정신과 사상을 가지고 바로 도와주지 못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너희 기독교가 못하는 것 우리가 한 번 해야겠다 하고 일어나게 된 것이다" 라고 지적합니다.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공산주의 아래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더 큰 책임을 느껴야 하고, 기도해야 됩니다. 또 공산주의가 짓밟고 황폐화시킨 국가들을 생각할 때마다 교회들은 더 깊이 책임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무리 교회가 많고 그리스도인들이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못하면 언제 공산주의의 무서운 세력이 지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공산주의는 일종의 신앙입니다. 학자 마리타인이 말한 것처럼 기독교적 이단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통일교가 기독교적 이단인 것처럼 공산주의 기독교적 이단입니다. 공산주의의 지도자였던 마르크스나 스탈린이 신학생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공산세계가 곧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대신에 공산주의를 대치한 것입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위해서라면 생명도 바칩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가장 잔혹한 단체입니다. 무엇이나 정당화될 수 있으며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는 단체가 바로 공산당입니다. 개인의 존엄성이나 자유는 공산주의를 위한 하나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공산주의 아래서 신자가 생겨날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위하여 공산주의를 배척하든지, 아니면 공산주의와 타협하면서 예수를 포기하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피의 역사입니다. 성경을 들고 창세기부터 차근차근 한 장씩 넘겨보세요. 의인 아벨이 자기 형에게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밭에 쓰러져 죽은 이야기로 시작하여 피가 흐르지 않은 구절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이것은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요 피의 역사를 통하여 이룩된 종교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9절에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고난을 당하다 왔다는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도 "흰옷 입은 자들을 일컬어서 말하기를 큰 환란에서 나오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20장 4절에도 천년왕국에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하나님의 백성들을 일컬어 "예수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베임을 받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다 목베임을 당하고 세상에서 피를 흘리고 순교한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이와 같이 고난을 통하여 이룩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악마와 같은 사상을 세상에 뿌리박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결국 공산주의자가 피흘리고 고난당하기를 더 두려워하지 않느냐, 아니면 기독교 신자가 피흘리고 고난당하기를 더 두려워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승부는 결정될 것입니다.
스탈린이나 레닌을 보면 그들은 10년이 넘도록 감옥을 드나들고 나중에는 4년 동안이나 시베리아에서 형무소 생활을 했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공산주의를 위하여 그들은 그와 같은 희생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다 감수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고, 복음을 증거하려는 우리가 고난을 두려워하면서 어떻게 그들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지난 2천 년 동안 피흘리기를 두려워하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기독교를 믿었다면 오늘날 기독교는 우리에게 이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벌써 1500년 전에 오늘날 불교처럼 산 속에 들어가서 경건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하나의 평범한 종교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자그마한 나라에 있는 우리의 손에까지 복음이 들어와 힘있게 약동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피흘리고 고난당한 선배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당하고 피흘린 성도들의 대가가 절대로 헛되이 돌아가지 않을 것을 우리는 압니다. 반드시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
베드로도 고난당한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는 고난을 당한 후에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라고 소개하면서 편지합니다. 당시 소아시아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며 믿음을 지키던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가 본문의 말씀입니다.
고난당하는 성도들은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신념을 가져야 된다고 그는 말합니다.
첫째, 신자에게 고난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신념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2절).
신자에게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9절을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니라”고 했고, 사도행전 14장 22절에서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믿기 어려운 어떤 환경이 닥쳐왔을 때 우리가 신앙을 유지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려고 하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교회를 짓밟고 핍박하는 무서운 집단들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할 때 그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지키려고 하면 단 하나의 길밖에 없습니다. 고난당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상황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중세기에 유명한 종교개혁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부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신자들에게 영웅적인 기질을 가지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감수할 수 있는 놀라운 사람으로 만든다.“
사실 그렇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의 기사는 물론이거니와 초대 교회에서 핍박을 당한 성도들의 이야기, 과거 북한에서 고난당한 수많은 사람들의 글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특별히 넘칩니다. 고난 속에서 수많은 성도들을 변화시켜 강하게 하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합니다.
갈릴리 어부와 같이 초라한 사람들이 강해졌습니다. 아는 것이 적고, 힘이 없고, 나약한 부녀자들이 담대해졌습니다. 주일학교 다니는 어린이들이 예수 한 분 때문에 초인적인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해 어떠한 고난도 감수할 수 있을만큼 능력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놓은 때문입니다.
북한에 있는 성도들이나 공산치하에서 고생하는 형제들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자기들만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죄의 값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임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마음에 시험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고난은 신자에게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나라에 들어 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증명받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둘째, 고난 속에서 즐거워할 수 있다는 신념입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12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적극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눅 6:22, 23).
어떻게 환란당하면서 기뻐하고 뛰놀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란당한 베드로나 많은 성도들이 증거하기를 환란 속에서 기뻐할 수 있다고 간증합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습니다. 로마 지하감옥에서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인데 그는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자기의 심정을 그대로 전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있는 자기도 기뻐하는 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에게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기뻐하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헬렌 스토크라고 하는 스코틀랜드에 사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바른 신앙을 고수하려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남편과 함께 사형장에 끌려 나가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기뻐해요. 오늘 우리가 죽으면 가장 즐거운 날이 될 거예요. 우리 앞에는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날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 시간 나는 당신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잠깐이면 우리는 함께 영원한 나라에서 만나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이예요."
고난을 기뻐하는 근거
어떻게 고난 속에서 이와 같이 기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적어도 몇가지 근거를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고난당하는 자들의 머리 위에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14절).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을 때 천사가 그와 함께 했습니다. 다니엘의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속에 떨어졌을 때 신의 아들 같은 이가 와서 그들과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무렵 천사가 그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과 그리스도께서 그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게 했습니다.
14년간 캄파넬 감옥에서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범브란트 목사는 "감옥생활에서 이 세상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특이한 황홀경과 같은 기쁨을 맛보며 살았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특별히 함께 하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그들이 지치지 않도록 새 힘을 주십니다.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의 영광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열어 주십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형제들에게도 하나님이 이와 같은 은혜를 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고통당하는 수많은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놀라운 위로를 주신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이 그들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길은 고난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 세상에 삽니다.
당신도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모든 생활에 위협이 오고 고통이 오고 환란이 온다면 예수님을 끝까지 붙들 수 있겠습니까?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를 따르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나, 중세의 성도들은 지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원수들을 욕하지 않고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며 자기를 괴롭히는 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평화로운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그들을 고문하던 자들이 무릎을 꿇고 회개하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러한 고난을 통하여 더 역력히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북한과 중국 지역에서 고통 당하는 성도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흘리는 피는 절대로 헛되지 아니하며 그들이 당하는 고난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날에 주어질 축복이 너무나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도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13절).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때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때입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너의 상이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설교자였던 크리소스톰은 “이 세상에서 모든 성도들이 당한 고난을 다 합하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보면 그곳에서 누릴 영광의 한 시간 만큼에도 비교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하늘의 영광은 크고 찬란하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눈물 흘린 성도들의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고, 그 머리에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며, 놀라운 황금의 길을 걸으며 찬양해 주실 것입니다. 그 영광이 너무나 크기에 신자는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순교자인 주기철 목사님이 1940년 9월에 잠깐 석방이 되어 산정현교회에서 마지막 유언의 설교를 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죽음을 무서워하며 예수를 버리지 맙시다. 한 번 죽어 영원한 천국의 복락을 누린다면 그 어찌 즐겁지 아니합니까?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다고하여 예수님을 버리고 세상과 타협하여 살면 몇 년이나 살 것입니까?
앞으로 많이 살아야 삼사십 년입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하시렵니까?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잠깐동안 아침 안개와 같은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다가 꿈을 꿉니다. 꿈 속에서 어떤 사람에게 쫓기고 괴로움과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눈을 뜨고 깨어났을 때 그 꿈 속에서 고통당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많지만 지나고 나서 저 천국에서 눈을 뜨면 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던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세계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현실적인 약간의 고난 앞에 자기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이 올 때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불행하게도 요즈음 성도들을 가만히 보면 너무 안일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기독교를 도대체 무엇으로 이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는 값어치 없는 아편과 같은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을 그저 달래는 막연한 마약과 같은 종교가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싸우다가 죽어도 절대로 후회가 안 되는 종교요,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기고, 예수 때문에 세상에서 구경거리가 된다 할지라도 나중에 그것과는 상대가 안 되는 영원한 축복과 영광을 누리게 만드는 참 종교입니다. 이 귀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값이라도 우리는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세계는 공산주의 세계가 되어야 비로소 파라다이스가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던져 버립니다.
하물며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산다는 그리스도인들이 조그마한 고통과 손해 앞에 믿음을 포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을 공산주의에서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파제는 올바르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고난당하는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세가지 신념 중 세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온다는 신념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17절).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는 의로써 갚아 주실 것이요, 공산주의와 같이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력은 하나님께서 무서운 불로 심판하실 때가 옵니다. 벌써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공포 속에서 날마다 쫓기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8개의 침실을 만들어 놓고 날마다 보안장치를 한 다음에 어느 방에서 자는지도 모르게 자야만 겨우 잠이 드는 공포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이미 심판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 공포가 그를 붙들어 지옥으로까지 끌고 갔을 것입니다.
공산주의는 망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반드시 망합니다. 유대 나라를 괴롭힌 애굽이 살아남지 못했고,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수르와 바벨론이 살있지 못했습니다.
아남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힌 나치의 집단이 그대로 남아 이처럼 심판은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공산치하에서 고통하는 성도들은 이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비록 눈물과 땅과 피의 역사가 계속되만 어느날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가 보는 앞에서 모든 대적들이 심판받는 모습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공산치하에서 고통하는 신자들을 위해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유세계에 살면서 우리 역시 고난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기꺼이 즐거워하면서 감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하여 기독교의 강력한 정신과 힘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들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북한에 있는 형제들이 다시 해방을 맞는 새로운 자유가 도래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십니다. 우리 모두 이것을 믿고 힘있게 전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고통에는 뜻이 있다, 옥한흠, 국제제자훈련원, 2008, 173-187